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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5 20:40:37 조회 : 60         
   기호의 운명 210915 이름 : 우리교회(IP:119.18.78.122)   

기호의 운명(요나 4:4-11)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IZX2l7iQkMw, Hit:7
 우리교회 21-09-15 21:25 
기호의 운명 

2021년 9월 15일            본문 말씀: 요나 4:4-11

(4: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4:5)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4: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4:7)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4: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4: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4: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인간들에게는 과거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가 하는 모든 일들도 곧장 과거 창고에 쌓이게 됩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과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언약에 의한 구원’은 과거의 모든 죄를 주님께서 잊어버리게 해주시는 식의 방식이 가동됩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 103:12) 즉 인간이 죄를 안 지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었음에도 구원받게 하시는 겁니다. 문제가 그 죄를 처리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 자신이 ‘없는 존재’로 전환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인간은 나름대로 삶의 현장, 곧 현장성을 의식하고 삽니다.

현장성이란 ‘내가 어디에 있으며, 지금이 몇 시인지’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게 만듭니다. 이 현장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기에 인간들은 자신이 여기에, 그리고 이 시점에 엄연히 ‘있다’고 여깁니다. 자신이 있음을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매사를 자기 있음의 중심으로 하여 생각합니다.

요나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에 자신이 있다고 여겨서 하나님이 없는 곳으로 자신을 이동시켜려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자기 있음만 따로 빼내어 도피한 겁니다. 그 다음에는 어쩔 수 없이 죽음에 직면했을 때, 요나는 자신의 자긍심을 그대로 지닌채 죽음 속으로 도피했습니다. 바다에 자신의 몸을 던진 겁니다.

셋째로 요나는 오늘 본문에서 ‘분노로 도피’하고 있습니다. 분노 속으로 자기를 숨깁니다. 자기는 비록 죽더라도 자신이 분노했다는 것만은 계속 살아있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요나가 살아오면서 느낀 자기만의 현장성입니다. 요나의 현장성 위주로 살아가면서 요나는 자신의 과거사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요나를 기어이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나름대로 질문을 던지고 일방적으로 답을 구하시는 작업을 수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요나가 어떤 인생을 살아가던지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신 답, 즉 구원의 방식으로 구성하시려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요나의 인생은 하나님에게 있어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기호’가 됩니다. 즉 사물을 가지고 기능적으로 활용할 때, 그 사물을 취득하시는 자의 의도는 따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기호의 기능입니다. 요나가 기호로 쓰여진다면 요나의 모든 과거사는 하나의 기호로 응축이 되면서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겁니다.

즉 요나를 통한 나타나는 하나님의 작업취지로 인해 요나는 ‘하나님의 현장성’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게 바로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현장성을 나타내기 위한 기호화 작업에서 니느웨 사람은 그 현장에 ‘있음’이 되고 요나는 ‘없음’이 됩니다. 이 있음과 없음 사이에 단절이 발생된 겁니다.

요나의 분노는 요나가 생각하는 그 현장성에서 하나님의 뜻이 없어서 생겨난 겁니다. 더는 하나님과 함께 일 못하겠다고 삐진 겁니다. 이런 요나가 어떤 식으로 구원이 될까요? 요나서 2장에서 요나가 물에 빠졌을 때에 하나님께서 큰 고기를 준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이 ‘큰 고기’조차 하나님께서 쓰시는 기호입니다. 요나나 일반인들의 분노는 끝까지 자신의 궁극적인 존재를 지켜내기 위해 타인에 의해 삼킴 당하지 않으려고 보여주는 것이 분노입니다. 즉 처음이고 끝까지 홀로 살고 홀로 죽겠다는 표현이 분노입니다. 이런 단절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요나를 기호화하십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쓰시는 기호가 요나의 예상 밖으로 등장합니다. 즉 박넝쿨은 ‘없음’→‘있음’→‘없음’이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자기 분노에 바쳐서 ‘죽겠다’는 그 죽음을 요나가 주님의 쓰시는 기호가 되는 접점이 되게 하십니다. 죽더라도 홀로 죽지 못하고 곁에 누가 다가서면서 그 다가선 것이 다시 없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요나와 분노와 죽음을 해석해버리십니다.

요나의 분노와 죽음은, ‘없었던 박넝쿨’의 개입으로 그 본질이 드러납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한 분노와 자신의 가치를 지키려는 죽음이었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요나 본인이 알고 있는 현실이요 현장성입니다. 그러나 이 현장에서 알려진 바는 ‘요나는 홀로 죽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요나는 하나님의 현장성의 기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죄 속에서 요나와 함께 죽으시겠다는 겁니다. [주 에수 나의 산 소망]이라는 복음성가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그 누가 주의 자비를 다 알아
한 없는 은혜 측량할까?
영광을 떠나 이 땅에 오신
죄가 되신 구주 예수

여기서 ‘죄가 되신’에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나의 모든 과거사를 주님이 자신의 몸으로 다 빨아당기신 겁니다. 그 박넝쿨의 기호 속에 합체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박넝쿨이 하나님이 준비해두신 벌레에 다 갉아먹혀 죽어버립니다. 그래서 조금전까지 있었던 박넝쿨이 다시 ‘없음’이 됩니다.

이로서 요나는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사라지고 주님의 현장성, 곧 니느웨 속에 합류된 요나가 됩니다. 시작점은 요나이지만 도착점은 니느웨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도착점입니다. 여기에는 아무리 많은 숫자라도 오직 하나(1)로 취급됩니다. 다들 균질성을 이룹니다. 주님의 은혜 속에서 차별이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전에 없었다가 이제는 주님 안에서 있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현장성에서는 요나는 애초부터 탄생도 없고 최후도 없습니다. 마치 박넝쿨의 운명 같습니다. 그저 ‘주님 안에서 요나’가 태어났고 ‘주님과 함께 있는 요나’가 있을 뿐입니다. 요나의 과거사는 이로서 주님의 십자가로 인해 주님을 증거하는 삶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주님의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님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21-09-17 00:38 
12강-요나 4장 4-11절(기호의 운명)2109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나 4장 4-11절입니다.

요나 4:4-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요나 1장부터 4장에 올 때까지 1장, 2장, 3장이 있었습니다. 1장, 요나가 다시스로 멀리 자리를 피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그 장소에서 피해서 하나님은 없고 자기만 있는 장소로 살고자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1장과 2장에서는 요나가 죽음에 직면하게 되어서 죽음 속으로 요나가 자기의 자존심을 챙기면서 도피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통해서 요나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목숨을 건지게 했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4장에 도달했습니다. 4장 초반에는 요나가 분노하고 있습니다. 1장부터 4장 초반까지 죽 보게 되면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요나 이야기입니다. 요나의 그 움직임 속에서 지금 인간들이, 사람들이 어떠한 본질을 가지고 살아가는가를 요나를 앞장세워서 죽 보게 하는 겁니다.

내 몸 하나 편하고자 하나님 없는 곳으로 도피하는 것, 이것이 다시스로의 도피고 그 다음에 궁지에 몰렸을 때 칵 죽으면 되지, 이게 바로 죽음의 도피입니다. 그런데 4장에 들어와서 요나는 어디로 도피하느냐 하면, 자기 분노로 도피합니다.

이렇게 도피하고, 도피하고, 도피하는 이 요나, 이 요나의 특징을 보게 되면 뭔가 하나님의 생각과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요나의 이 모습, 하나님의 곁을 떠나고자 하는 요나에게서 하나님은 떠나지 않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그 인간에 대해서 인간이 무엇이 궁금하냐 할 때, 먼저 질문 던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질문을 던진 하나님 그 당사자가 답도 일방적으로 도출해 내시는 겁니다.

그래서 요나는 자기 생각하고 도망쳤다가, 자기가 자기를 죽음에 넘겼다가 분노했다가, 그렇게 하지만 요나가 나는 어떤 인간이냐, 나는 어떻게 살까, 나의 미래는 뭘까, 이러한 고민과 본능적인 갈등 이것은 어디서 나오냐 하면, 어디까지나 요나 본인에게서 나온 거예요.

하나님께서 요나를 버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던진 그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 스스로 답을 얻고자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해서 작업하시면서 전개된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챙기고자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밖에 모르는 이 인간이 어떻게 구원될 수 있는가, 그 과정을 요나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거예요.

4장에 와서 요나가 죽겠다고 하고 분노합니다. “네가 왜 성을 내냐?” 하니까 “제가 성내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이런 식으로 고집을 부리는 것, 그렇게 하는 이 모든 것, 1장, 2장, 3장, 4장 끝까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요나를 버리지 않고 요나를 통해서 답을 얻어내려 하는 거예요.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는가, 그 답을 내는데 있어서 요나 제일 마지막을 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여기에 요나의 반응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마지막 그 끝 이야기가 하나님 말씀으로 끝납니다. 회개했다든지 제가 잘못되었습니다, 다시는 안 하겠습니다, 이런 것이나 ‘야, 이게 하나님의 뜻이군요. 제가 몰랐습니다.’ 전혀 이런 것이 없어요. 요나의 끝이 그래요.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이 요나를 철저하게 이용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전개, 자기작업의 전개, 절차, 그것을 위해서 요나를 철저히 이용하신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나를 버리지 않는 이유가 뭐냐? 이점을 신약적 관점에서 제가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구약도 마찬가지지만요. 지나간 너의 모든 과거의 죄는 다 용서해줄게, 라는 취지의 말씀들이 복음의 이름으로 신약성경에 집중해서 많이 나와 있어요. 모든 과거의 죄를 다 용서해줄게. 간음하다 잡힌 여자도 마찬가지고 베드로도 마찬가지고요. 기본 바탕의 취지가 그런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그러면 인간의 과거는 다 지나갔는가? 과연 과거는 전부 다 용서했으니까 과거라는 것은 무의미한가? 이런 생각이 들 수 있거든요. ‘그래. 과거는 어떻게 개판같이 살았더라도 하나님께서 과거를 다 잊으라고 했으니까 나는 신난다.’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과거를 용서하려면 과거를 다 수납해서요, 과거의 모든 것을 다 빨아당겨서 하나의 일거에 처리할 수 있는 그 작업이 필요한 거예요. 요나 1장에서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갔다. 요나가 스스로 ‘나는 인생 여기서 끝내겠다’ 하고 바다에 풍덩. 3장에, 하나님 뜻대로 했는데도 자기 예상한 결과대로 안 나와서 하나님 앞에서 분노하는 요나의 이 성냄, 화냄, 곧 대들고 화내는 것, 이 모든 것이 요나의 과거잖아요.

그러면 그 요나의 과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겁니다. 이 요나의 과거를 일거에 “이제 그 모든 죄는 용서받았어. 과거는 잊어버려. 내가 알아서 처리하는 거야. 과거를 네가 책임지게 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어떤 과거를 보냈든 간에 그 처리는 내 담당이야. 네 과거 다 가져와. 아니 내가 빨아당길게.”

주님께서 요나의 과거를 빨아당겨서 요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요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고 구원해주시는 그 조치가 주님 앞에서 이게 정답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스스로 문제를 던지고 홀로 일방적으로 그 답을 얻는다 하지요. 그 답을 과거가 화려한 요나를 가지고 답을 스스로 얻는 겁니다.

그 답에 대해서 저는 오늘 본문에서 이걸 이렇게 이야기하겠습니다. 그게 뭐냐? 기호다. 기호라고 할 때 왜 인간보고 기호라는 말을 썼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박넝쿨이 나와요. 박넝쿨은 그 박넝쿨 안에 박넝쿨의 과거사가 들어 있는 게 아닙니다. 박넝쿨은 원래 여기 없었던 거예요. 없었던 것인데 6절에 보면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했거든요.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이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해서 질문되는 그 모든 요나에게 일어난 일을 박넝쿨이라는 어떤 기호……, 물체라고 할 수 있지요. 단지 물체라는 것은 의미가 안 붙어 있으니까 의미가 붙어 있는 물체, 이게 기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체 떼버리고 의미만 달랑 챙겨서 어떤 기호 사인 일종의 물질로 되어 있는 문자 저는 그걸 기호라고 응축해서 표현하고 싶습니다.

박넝쿨이 기호가 되어버리면 박넝쿨은 하나님에 의해서 적절하게 사용당함이 돼요. 이것은 박넝쿨 개인의 문제는 여기서 다 떨어지고 박넝쿨을 준비하고 벌레에 먹히는 모든 박넝쿨의 운명에서 뭐만 축출해서 건져야 되느냐 하면, 박넝쿨을 준비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박넝쿨을 키워서 요나의 머리를 덮었던 그 하나님, 그다음에 그 덮었던 박넝쿨을 벌레를 준비해서 벌레에게 먹히고 시들시들 시들어버리게 하시는 그 하나님.

박넝쿨에 있었던 이 세 가지 변화, 이 변화를 통해서 죄 많은 인간을, 자기 백성을 어떻게 천국 백성으로 만드는가에 이 세 가지의 변화를 박넝쿨을 통해서 전개시키고 설명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이 박넝쿨이 기호가 된다면 이는 곧 요나도 박넝쿨같이 기호로 쓰여야 된다는 거지요.

이 기호가 된다는 말, 인간이 하나님이 쓰시는, 하나님이 스스로 문제를 던지고 답을 얻어내시는 중도에 개입해야 될 박넝쿨같이 준비된 기호로서 쓰신다면 그 인간은 자기를 기호라고 생각할 때 뭘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어떤 시계(시간)나 지도나 볼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몇시지, 여기가 어디지, 라는 생각을 쏙 빼야 됩니다.

왜냐하면 요나의 과거는 바로 다시스로 가겠다는 지리적인 의식을 갖고 움직였거든요. ‘하나님 계시는 이곳 말고, 이스라엘 말고, 안 계시는 다시스로 가야지.’ 이미 이곳 말고 저곳, 공간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40일 지나면 망한다면서요. 38, 39, 40.’ 안 망했어요. ‘그러면 시간에 착오가 있었나? 움막, 초막을 짓고 좀 더 지켜볼까? 이 관람석에서.’

이렇게 했는데 이 모든 것, 요나는 어떤 공간과 시간을 생각할 때 그게 하나님 쓰시는 기호로서는 삭제되어야 될 요소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요나가 시간을 안 보고, 자기가 지금 어디 있지, 라고 생각을 안 하고 박넝쿨과 똑같이 그냥 쓰시기만 하면 된다면 요나에서 삭제한다는 것, 비기호적인 요소를 삭제하고 하나님이 쓰시는 기호로, 하나의 물질적인 문자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요나에게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현장성이 문제가 돼요. 현장성.

인간들은 시간과 공간을 생각할 때 그게 뭐냐 현장이 됩니다. 현장이라는 것은 사건 현장, 그 현장이지요. 인간은 어떤 현장에 딱 들어오게 되면 현장에서 자기의 본능을, 자기의 욕망을 거기서 감추려야 감출 수가 없어요.

끊임없이 환경을 마주 대하면서 생존하기 위해서 도피하고, 자기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죽기도 하고, 또는 자기 예상한 대로 안 되면 분노하기도 하고, 그 분노하는 것, 자기 자존심 챙기는 것, 주님 앞에서 도망치는 것, 이게 전부 다 뭐냐 하면, 인간들이 생각한 그 현장성입니다.

그런데 그 현장성을 하나님께서 허용을 했어요. 그게 문제가 되니까,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답이 얻어지니까 일단은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어떤 현장에서 어떤 태도와 행동을 보이는가를 먼저 보여주는 겁니다. 보여줄 때 이렇게 요나가 도망치고, 그리고 자기가 바다에 먼저 뛰어들고, 그리고 분노하는 것은 무엇 때문에 그런가?

단절 때문에 그렇습니다. 단절. 끊어짐. 내가, 존재하는 내가 여기 있는 이 환경 그것과 그리고 하나님이 생각하는 그 현장, 하나님이 생각하는 세계, 하나님이 생각하고 있는, 답을 알고 있는 그 하나님의 작업, 그 현장하고 동떨어진 거예요. 이게 끊어져 있어요. 이어지지를 않고 있는 겁니다.

아주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친구 보고 “너 교회 같이 가자.” 하니까 친구가 하는 말이 “교회 가서 뭐하는데?” 이렇게 나오지요. 그런 말 많이 들어봤지요. “나는 교회 안 가도 착한데 교회 가서 뭐하는데?” 이게 바로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단절, 끊어져 있는 거예요. 하나님 세계와 끊어져 있지요.

그 끊어진 세계가 인간 나름대로의 자기의 삶의 현장입니다. 삶의 현장. 옛날 KBS 프로 <체험, 삶의 현장> 조영남이 나온 것 있잖아요. 삶의 현장, 그게 전부에요. 인간에게는. 그게 굉장히 익숙해져 있습니다. 끊어진 것을 몰라요.

오늘 설교의 내용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시작점은 요나에요. 그러나 마지막은 니느웨로 끝나버립니다. 4장 마지막은 니느웨 이야기로 끝나요. 요나는 하나님이 생각한 정답의 세계, 하나님의 현장성, 거기서 현재 요나는 끊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생각하는 그 현장에는 요나는 없는 존재가 돼요. 그러나 니느웨는 있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처음에는 니느웨가 하나님 세계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없는 존재인데 그 도착지점, 오늘 이야기의 도착지점에는 니느웨는 하나님세계에 있는 존재가 되고 요나는 없는 존재로 들통났습니다. 그러면 요나는 왜 하나님에게 없는 존재가 되느냐? 왜 단절되어 있고 끊어져 있느냐? 자기가 여기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 설교 초반에 나오는 중요한 것은 그거예요.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하나님하고 단절된 겁니다.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내가 궁금해 하는 답은 내가 여기 있음에서 나온,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나온 내가 궁금한 답이에요. 그러나 애초부터 하나님 세계에서는 나는 없는 존재에요. 없는 존재기 때문에 애당초 요나가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것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요나가 자기가 있다고 여기면서 어떤 행동을 해도 하나님 세계는 변동사항이 없어요.

인간이 자기가 여기 있는 현장에서는 내 행동에 따라서 내 일이 변하고 주변 환경이 변하잖아요. 집에 머리카락이 있다. 그러면 나서서 청소기 가지고 윙~, 청소 한 5분 동안 하고 나면 깨끗하게 변했지요. 내가 행동에 나섰기 때문에 깨끗하게 먼지가 없어지면서 청소가 된 거예요. 인간이 아는 세상은 그 세상이에요. 내가 나서면 뭔가 달라진다는 세계에요.

아마 니느웨가 죄지을 때도 그런 생각 했을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 소식이 오기 전에 니느웨는 오직 니느웨 세계뿐이었을 겁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채로. 자기들은 살아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살아 있다는 것은 내가 어디에 있으며, 오늘 지금 몇 시이며, 내일은 뭐 할 것이며, 그것을 생각하면서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에 속한 기호가 되어버리면 내가 어디에 있느냐, 지금 몇 시냐, 하는 것은 다 이것은 삭제되어야 돼요. 이것은 다 빠져버려야 돼요. 아주 어렵게 표현하겠습니다. 요나의 최후는 애초부터 없었다. 애초부터 없어요. 나의 시작도 애초부터 없었고 나의 최후도 애초부터 없었어요. 박넝쿨이 애초부터 요나에게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박넝쿨과 요나를 뒤바꾸는 겁니다. 요나는 자기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있는데 예상대로 안 되니까 분노한 겁니다. 사람이 분노한다는 것은 본인이 안 죽어서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자기가 살아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분노하는 거예요. 그래서 요나는 말합니다. “하나님, 저를 죽여버리시옵소서.”

그러나 하나님이 요나를 죽이게 되면 요나는 죽지만 분노는 살아 있잖아요. 요나가 노리는 것은 그거예요.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품은 분노는, 나는 계속 불멸하고 싶다.’ 불멸의 이순신처럼. 요나의 이 생각은 뭐냐?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내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부정할 수 없는 내가 여기 있다는 그것이 하나님과 연결이 안 돼요. 단절되어 있어요. 그러니 요나는 막다른 지점에 도달한 겁니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을 뻔했어요. 죽었으면. 요나의 분노는 한마디로 해서 이렇습니다. 누구한테 삼킴을 당하는 것, 이게 싫은 거예요.

삼킴을 당하는 그것이 싫어서 요나는 하나님께 무엇을 제안하느냐? “나는 분명히 니느웨성이 망한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안 망하게 했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실망시켰습니다. 따라서 이 실망 때문에 나는 분노했으니까 내가 이 분노한 것, 하나님이 나한테 잘못한 것도 있고 나도 분노한 것은 잘못했으니까 하나님, 이걸로 퉁 칩시다.” 살아 있는 인간의 마지막 거래가 이 거래에요.

가룟유다가 그 거래한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배신했으니까 그 대신 퉁 치는 식으로 내 목숨 죽을게요.” 이게 사탄이 하는 짓이에요. 자살이지요. 요나는 하나님께서 박넝쿨 준비했다는 것은 생각도 못 했어요. 하나님의 구원은 뭐냐? 너는 애초부터 없었다, 너의 탄생도 없고 너의 최후도 없다, 아예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없음에서 있게 하고, 있는 것을 없이 하는 이것이 기호의 운명이거든요.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기호의 운명> 요나에게는 박넝쿨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상 밖으로 박넝쿨을 준비하사 그걸 키워서 짜증 내고 있고 분노하고 있는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이 되게 했습니다. 요나에게는 뭐가 없느냐 하면, 그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요나는 누구의 기호가 되기 싫고 나는 그저 자기이고 싶어합니다.

요나가 지금 분노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는 이유는, 분노에서 막히는 이유는, 인간은 계속 새로움이 있어 줘야 분노가 멈춰요. 그것도 일시적으로. 새로운 게 없으면 인간은 분노합니다. 요나가 분노하는 이유는 그거예요. 하나님한테 지금 윽박지르는 겁니다. 계속 새로운 것을 내놔라, 그 말이지요. 내 욕망을 만족시켜 달라, 내 욕망이 목마르지 않게 해달라, 그것을 지금 요구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잖아요.’

그래서 요나가 퉁 치자,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그렇게 내 예상대로 안 된다면 나도 혼자 죽을게요’ 이렇게 되었잖아요. 그러나 기호라고 한다면 혼자 죽는 법은 없어요. 기호가 되려면 그 기호는 하나님이 운명을 함께 하시는 겁니다.

지금 요나는 분노하면서 ‘그래.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하시고 나는 나 대로 내 인생 내 목숨이니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나는 죽겠습니다. 차라리 내 생명을 취하소서.’ 4장 3절에 그렇게 되어 있잖아요.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여기 8절에도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요나는 하나님 따로 있고 자기 따로 있어서 자기가 선지자로서 일을 할 수 있다고 어떤 나의 있음, 나의 존재로서 하나님 존재와 협력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구약의 한계에요. 가스펠송에 <주 예수 나의 산 소망>에 이런 게 있어요. 2절에 보면 “그 누가 주의 자비를 다 알아 한없는 은혜 측량할까~”

여기까지는 다 아는 이야기지요. “영광을 떠나 이 땅에 오신~” 여기까지도 사람들은 알아요. 그다음 가사, 번역하는 사람이 여기서 실수를 한 것 같아요. 이런 경우는 신학에는 없거든요. “죄가 되신 구주 예수” 죄인이 되신 구주 예수가 아니고 “죄가 되신 구주 예수” 죄가 되신 구주 예수.

제가 좀 변호하듯이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죄가 되셔 버린 거예요. 죄가 되신 거예요. 그래야 요나는 기호가 될 수 있습니다. 요나는 지금 혼자 죽으려고 하거든요. 주님은 죽어도 나의 답이 되는 식으로 같이 죽자는 겁니다. 나의 답이 되는 식으로.

그래서 준비한 것이 뭐냐 박넝쿨이에요. 요나는 자기의 오기를 인정받기 위해서 ‘고상하고 거룩한 하나님은 그냥 영원토록 살아 계시고 나만 달랑 죽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퉁 칩시다. 내가 죽을게요. 하나님 앞에 이렇게 대드는 못난 나는 꺼져줄게요.’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요나가 이미 기호가 되어버리면 그렇게 되게 하신 그 기호 속에, 요나 속에 우리 주님이 같이 뛰어든다는 생각은 구약 사람인 요나는 감히 생각지도 못한 일입니다. 아이고, 구약 사람만이 아니고 신약 때도 마찬가지지만요. 내 인생은 없는 거예요. 요나는 자기가 있는 현장, 자기가 있는 세계에서는 자기가 엄연히 있어요. 그러나 주님의 세계에서 요나는 없는 겁니다.

주님의 세계에 요나가 없으면 요나 구원받지 못합니다. 제가 설교 처음에 했잖아요. 어떻게 죄인이 의인 되고 구원되느냐? 주님에다가 요나에게 없는 박넝쿨로 주님세계를 새로 시작하듯이 주께서는 요나가 아니라 기호로서의 요나를 새로 시작하려면 그 요나 속에 주님이 같이 합세를 해줘야 요나는 주님의 일에 기호로서 구원이 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 박넝쿨의 운명을 보게 되면 개인의 존재라고 여겼던 요나, 인간이라고 여겼던 그 요나를 어떻게 기호로 변형시키는가? 그 과정을, 박넝쿨의 과정을 통해서 거기에 입혀버려요. 박넝쿨이 준비되어 있는데 요나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그 박넝쿨로 서늘하게 해줬어요. 요나는 기분이 좋지요. 그래, 이왕 죽는 거 시원하게 쉬다가 죽자 했는데 여기에 뭐가 또 준비되었느냐 하면, 박넝쿨 벌레를 준비했어요.

하나님이 박넝쿨 준비하고 또 7절에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씹게” 했어요. 그러니까 죄가 주님을 잡아먹듯이, 삼켜버리듯이 그렇게 되어버린 거예요. 인간들이 왜 단절되고 왜 분노하느냐 하면 누구한테 삼킴을 받기 싫어하는 겁니다.

그런데 분명히 요나는 이미 큰 고기한테 삼킴을 당했잖아요. 지금 요나는 분노한테 삼켜진 거예요. 삼켜지니까 그 단절성, 하나님과의 단절성이 또렷하게 드러난 겁니다. 있는 것을 벌레가 준비해서 삼켜버렸어요. 그러면 좀 전에 있었던 그 박넝쿨은 있음이 없음이 돼요.

요나가 생각하는 그 현장성에서 박넝쿨 때문에 자기 머리 위가 시원했어요. 시원했다고요. 이게 요나가 자기 있음으로 해서 느끼는 그 현장감에서 자기가 만끽하고 있는 상쾌함, 기분좋음이에요. 그런데 박넝쿨이 벌레에 먹혀서 날아가니까 그 상쾌함도 같이 날아가 버린 거예요. 날아가 버리니까 여기서 요나가 바짝 분노한 거예요. 요나는 없어지고 분노만 남은 거예요.

분노 속의 요나, 그게 인간의 세계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세계가 그게 무슨 세계냐? 그게 분노의 세계에요. 모든 인간은 매일같이 분노합니다. 말은 안 해서 그렇지. 손님 오면 “어서 오이소!” 속으로는 ‘안 사기만 해봐라.’ 속으로 분노하고 있지요. 교인 하나 오면 “아이고, 어디서 왔습니까?” ‘헌금 좀 되겠다. 교인 수도 늘어났구나.’ “아이고, 어디서 오셨습니까?” “동사무소에서 나왔는데요.” ‘아 …….’

“하나님이여, 저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왜 저를 가만두지 않고 흔들어대십니까? 저보고 어쩌라고!” 갑자기 분노하지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생산물입니다. 기호라는 자기 생산물이에요. 주께서 함께한 생산물만 구원받습니다. 주께서 운명을 같이한 그 대상자만 천국 갑니다.

분노하는 그 과거, 낯을 피했던 그 과거, 알아서 자기 자존심 세운다고 물에 풍덩 빠진 그 요나의 과거, 그 과거를 일거에 한꺼번에 처리하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요나 죄 속에 들어오는 거예요. 같이 죄인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같이 죄인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애초부터 박넝쿨이 없었던 것처럼 애초부터 요나는 없고 요나가 주님이 관여할 때, 비로소 요나라는 이름의 기호가 발생 될 때 주님은 그 기호를 영원히 자기 세계로 들여보내지요.

그러면 그 기호는 몇 가지냐? 요나 4장 11절에 보면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어린애가 12만 명이에요. 어린애가 12만 명이니까 어른까지 합한 숫자를 다섯 배로 계산하면 총 인구가 60만에서 80만쯤 되겠지요.

그러면 이 12만 명을 주님은 12만 명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인간들의 현장감에서는 이게 12만이에요. 그러면 뭐냐? 단 한 명입니다. 이것은 하나가 구원받은 거예요. 니느웨성 통째로 구원받은 거예요. 숫자로 치면 12만이 아니고 하나에요. 요나가 하나듯이, 이스라엘을 하나로 다루듯이.

이 말은, 구원받은 천국 안에서 또는 예수 안에서, 성령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는 너와 나의 구별이나 차별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똑같은 처지고 똑같은 운명이기 때문에 그래요. 똑같은 형편이거든요. 수요일에 여기서 예배드리나 파주에서 예배드리나 주님께서는 같은 공간으로 생각해요. 같이 취급해 버립니다.

이미 너, 나는 주께서 요나의 그 죄 속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요나로 하여금 죄에 물린 벌레로 취급하는 그 순간부터 요나는 없습니다. 그래서 끝에 요나의 이야기가 없어요. 요나나 이 순간 니느웨 사람이나 주님한테는 모두 다 하나가 된 거예요. 하나 되는 주님의 은혜가 도착한 곳.

추석이라고 어떤 기업체의 사장이 직원들에게 고구마 한 상자씩 다 보냈다 합시다. 그러면 사장님이 추석 지난 뒤에 대리, 과장, 부장, 그리고 일반사원들 만나서 묻습니다. 묻는 인사가 뭡니까? 추석 잘 보냈는지, 그거 아닙니다. 고구마 잘 받았는지. 과장도 고구마, 부장도 고구마, 대리도 고구마, “고구마 잘 받았어요? 내가 준 것 잘 받았어요? 내가 준 것 맛있게 먹었어요? 맛있었어요?” 그거지요.

“내가 준 박넝쿨의 그늘이 어땠는지?” “시원했어요!” “내가 네 죄 속에 뛰어든 그 은혜가 어땠어?” “짜릿했습니다. 쩔어, 쩔어! 은혜 쩔어!” 할 말이 없게 만들어요, 할 말이. 자기 단독으로 나 잘났다고 살아가는 이 요나, 주님께서는 주의 뜻을 전하는 하나의 물질화된 기호로, 문자로 사용해버려요. 말씀으로 사용해버려요. 요나를.

요나가 그 많은 과거 있지만 박넝쿨 하나를 가지고……, 니느웨 밖에 있다고 우기는 요나는 니느웨속에 있지 않기 때문에 니느웨쪽에서는 없는 존재거든요. 니느웨 밖에 있지 니느웨 속에는 없는 요나를 니느웨 속에, 니느웨가 받은 그 은혜의 균질성, 다 같이 은혜라는 동질한 성질의 균질성의 은혜 속에 이제 요나 있음이 되게 하는 거예요. 요나 있음!

그러면 그때 나오는 것이 뭐냐? 박넝쿨이라는 기호지요. 박넝쿨 기호에요. 이게 이스라엘이 기호고 니느웨의 기호인 동시에 누구, 바로 예수님 자신의 기호를 박넝쿨로 묘사한 겁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예수님, 하늘에서 오셔서 죄한테 씹혀 먹혀서 죽어버린 그 박넝쿨, 그 운명에 참여되지 못하고, 같이 죽고 같이 살지 못하면 그것은 하늘나라에 없는 존재가 되어버려요.

결국 인간의 이 현장성 자체가 이런 박넝쿨의 존재를 생각 못 하고, 주님 존재를 생각 못 하고 동떨어진, 완전히 끊어진, 저주받은, 심판받아 마땅한 니느웨 같은, 지옥 같은 세상에 우리가 지금 멀쩡한 채로 잘살고 있습니다.

그런 세계에서 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연인 사이에 속닥속닥 얼마나 대화가 많이 오고가겠습니까? 서로 사랑한다, 선물도 주고받고, 우리 결혼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인생 설계도 하고요. 연애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수년간 이이오면서 사랑의 깊이를 더해간 그 연인 사이, 정말 너 나 없이 사는 경우가 있잖아요. 서로가 반해서.

그래서 여자가 ‘이 정도면 내 평생을 이 남자에게 맡길 수 있겠다’ 해서 결혼 앞두고 이런 이야기를 해요. “너는 나랑 같이 죽을래?” 그럴 때 남자가 갑자기 경직되면서……, 경직 알지요. 근육이 갑자기 굳어지는 것, 근육이 뭉치는 것. “오빠 나랑 같이 죽을래?” 하니까 “싫은데? 왜냐하면 나는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 나의 인생의 목표였어.”

단절이었습니다. 단절. 내가 여기 있는 것 그것보다 더 좋은 더 시급한 중요한 것은 없다고 자기의 내부의 본성이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그게 바로 요나에요. 자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는 것. 그러면 하나님께서 요나를 주님을 드러내는 기호로 사용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초기화시키는 겁니다.

초기화라는 것은 컴퓨터나 휴대폰을 다 끄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 휴대폰 살 때의 그 시점으로, 아무것도 모를 때로, 지금 여기 어디지, 몇 시지, 내 나이 얼마지, 내 친구 누구지, 다 없애버리는 것, 초기화시키는 거예요. 없는 박넝쿨 있게 하시고, 벌레 먹히게 하시고 없애 버릴 때, 이게 인간세계에서는 도저히 해석 불가한 오직 택한 자만 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현장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요나가 보여준 그 많은 과거들이 요나의 잘못이 아니라 요나의 있음 자체에서 나온 단절이었음을 주님의 안목에서, 십자가 안목에서 저희들이 동감하게 해 주옵소서. 이 땅에 있다고 우겼던 저희들,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 땅에 없는 존재요, 천국에 있는 존재인 것을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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