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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8 20:41:41 조회 : 86         
   하나님의 자기절차210908 이름 : 우리교회(IP:119.18.78.122)   

하나님의 자기절차(요나 4:1-3)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Loiv66C-RMQ, Hit:12
 우리교회 21-09-08 21:21 
하나님의 자기 절차

2021년 9월 8일              본문 말씀: 요나 4:1-3

(4: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4: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4: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이 보이는 세계는 모든 사물들이나 존재들이 쉬지 않고 만나서 반응을 나타나고 흩어지고의 연속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인간들은 항상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뭔가 보다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는 근원적인 것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그것을 찾고자 했습니다.

왜 궁극적으로 최종적인 것을 찾고자 합니까? 그것은 세상의 모든 변화를 설명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왜 설명하고 싶어할까요? 그것은 지금 있는 자기 자신들을 안정적으로 붙잡기 위해서입니다. 문제는 궁극적인 원천은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고대인들은 세상의 원천을 동양이나 서양이나 가릴 것 없이 물, 불, 공기, 흙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다가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자꾸만 발견했습니다. 즉 세상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의 근원적인 구성요소를 찾았고 인간들은 그 원소들의 결합과 반응을 통해서 생활에 편리를 도모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활동을 인간들이 멈출 수가 없는 이유는, 결국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나서를 보게 되면, 니느웨 사람들의 집단 행동을 이해하기 곤란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집단적으로 극단적인 자기 부정적 행위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요나’라는 인물이 던진 말 때문입니다. 즉 “내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지목해서 이 니느웨성의 운명을 말씀해 오셨습니다. 40일이 지나면 필히 망한답니다”라는 말을 요나가 던졌습니다.

따라서 니느웨 사람들에 있어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요나가 나타난 겁니다. 이것은 일종에 보이는 인간과 인간들의 만남과 충돌과 반응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요나는 니느웨 사람이나 여타의 사람들과 확연하게 다른 인생입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교류하고 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특수성으로 인해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는 자들은 감히 요나의 행동이나 태도에 대해서 질책하거나 평할 수가 없습니다. 요나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 믿을 수 없는 세상인 것은 압니다. 그리고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보이는 인간과 인간들 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작용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요나에게 있어 믿을 만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따라서 만약에 요나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요나처럼 세상에 대해 아무런 신임이나 믿음을 갖지 않는 자에게 국한 됩니다. 이는 눈에 보이는 원소가 세상에 변화를 일으키는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이 근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나 주장의 논리는 세상을 믿고 사는 자들에게는 난해합니다. 풀이하면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이스라엘편에 계셔서 이방민족이 죄를 지으면 가차없이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벌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셔서 재앙을 철회하시는 비일관성을 보이곤 하셨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스라엘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일관성을 알릴 사명이 당연히 유지되어야 하기에  저라도 하나님의 비-일관성에 참여하지 않고자 단독으로 결행해서 다시스로 빠졌습니다. 그런데 다시 와서 심판의 현장에 참여하여 심판 이야기를 하니 그 결과가 바로 재앙철회였습니다. 따라서 저라도 일관성을 유지하겠다고 다시스로 빠진 저의 조치는 저 입장으로서는 당연한 것이고 마땅한 것이었습니다.”라는 논리를 폅니다.

지금 요나는 하나님 결정의 일관성을 옹호하면서 전혀 하나님 하시는 일에 감사가 없습니다. 그 대신 단단히 마음이 상해있습니다. 이런 요나의 태도에 대해서 눈에 보이는 세상으로 인해 사는 일반인들은 요나에 대해서 평할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나는 세상사람들에게 없는 존재로 인식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자신에게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요나의 분노를 유발하게 하신 하나님쪽의 뜻이 있을 겁니다. 그것은 바로, 요나가 지금 품고 있는 극렬한 분노가 곧 하나님께서 죄악된 니느웨성에 품고 있는 그 분노였습니다. 다만 요나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바로 그 분노에만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심판의 일관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요나라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하나님 자체적으로 하실 일을 드러내십니다. 그것은 바로 스스로 품은 그 분노를 자체적으로 해소해야만이 영구히 존속되는 긍휼과 자비가 나온다는 점입니다. 대중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이별은 두렵지 않아
눈물은 참을 수 있어
하지만 홀로 된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해”

여기서 이별도 두렵지 않고 눈물도 참을 수 있다면 홀로 된다는 것도 견딜 수 있어야 하는 논리로 나아갈 수가 없음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이별이나 눈물은 어디까지 단발성이고 홀로 된다는 것은 쭉 계속 슬픈 처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제공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본질은 단순히 이방민족인 니느웨에 대한 혜택처럼 일시적인 것이 되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선지자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열왕기상 19:4에 보면, 엘리야가 우상 선지자 850명과 상대로 하여 속시원한 승리를 거두고 난 뒤, 그가 권력층에 의해 목숨이 위협받게 되자 하나님에게 한탄하면서 죽음을 요청하는 대목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여전히 하나님의 일관성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이런 선지자의 사명을 그대로 인수받아 장차 메시야가 오십니다. 메시야로 오신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선지자의 일을 수행하게 될까요? 이사야 53:7-8에 보면, “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분노하지 않습니다. 잠잠히 하나님의 뜻에 따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언약백성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분노를 스스로 자기 안에 담아버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놓은 것은 자비와 인자와 긍휼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이런 세상이 항구적이고 영원히 가는 세상인 것을 모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희생이 아니라 하나님 희생 안의 세계만이 일관성 있는 유일한 세상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21-09-09 12:36 
11강-요나 4장 1-3절(하나님의 자기절차)2109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나 4장 1-3절입니다.

요나 4:1-3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요나가 하나님과 이렇게 기도하면서 주고받고 한다는 이 자체를 대단히 놀랍고 신기하게 받아들여야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같은 인간하고 상대하지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하고 주고받고, 이런 식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상당히 특이해요.

우리는 쉽게 생각해서 요나는 선지자니까 늘 하나님과 교류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우리가 요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하려면요, 어떤 경우에라야 요나의 입장을 생각하느냐 하면,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눈에 보이는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아야, 그 정도 되어야 요나는 늘 하나님과 교류한다, 이렇게 언급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는 세상에 나가서 그저 눈에 보이는 인간들, 눈에 보이는 세상, 그걸 전부라고 여기면서 거기에 평생 빠져서 그 세상 변화에 주눅 들고, 세상 변화에 춤추고, 울고, 그렇게 살면서 ‘요나는 하나님과 잘 통한다. 하나님과 잘 교류한다. 나는 그런 식으로 요나를 이해한다.’ 이것은 잘못된 겁니다.

우리는 요나를 이해하려면 우리 자신부터 이미 세상에서 벗어난 사람, 다른 말로는 세상에서 나는 없다, 나는 세상에서 이미 유령같은 존재다, 세상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 있느냐, 이 정도 되어야 비로소 눈에 보이는 세상이 현실이 아니고 하나님과 교류한다는 이 자체가 제대로 된 실제 현실이라는 것을 요나의 입장을 같이 공유할 수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 빠져서 그게 전부다, 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마음 자세로서 요나를 이해한다는 것은 잘못이고 거짓말입니다. 동시에 요나가 어떤 행동을 했든 그걸 나무랄 수 있는 자격이 우리한테는 없어요. 요나는 선지자로서 세상에 대해서 포기한 사람이에요.

따라서 세상을 포기하지도 않은 주제에 요나보고 ‘네가 하나님 버리고 도망치면 되나?’ 어딜 주제넘게 간섭질이에요? 자기는 세상에 발을 딛고 살면서. 자기는 왜 세상에서 못 빠져나와요? 오늘 본문에서 요나가 하나님과 대화한다는 자체가요 그 자체가 놀랍고 신기한 일이에요.

인간으로 태어나서 태생 자체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지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이 전부다, 애초부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건방지게 요나에 대해서 한 수 훈수할 생각은 아예 먹지 말아야 됩니다.

특히 우리가 이방인이잖아요.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그냥 세상에서 살다가, 세상에서 북적거리면서 살다가 장례식장, 파티마병원 장례식장이나 경대병원 장례식장 혹은 대구시민장례식장에서 최후를 맞이하지요. 산부인과에서 태어나서 장례식장으로 골인. 그게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전부입니다.

그리고 그 상식을 견지하고 유지를 해줘야 세상에서 밥이나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요나같이 이런 생각을 해서는요 타인과 대화가 안 돼요. 그러면 요나가 하나님과 지금 의견차가 났거든요. 의견차가 났다는 말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치중하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믿을 수가 없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는 믿거나 말거나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에요. 그 세상, 전혀 우리가 그것을 믿거나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요나 정도는 되어야 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이 세상에 푹 젖어 있는 사람들은 세상이 좋든 싫든 관계없이 세상 말고 내가 기댈 곳은 달리 없어요. 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기 때문에.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인간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에요. 제가 눈에 보이는 이것이 전부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이유는요, 인류의 역사 특히 서양 역사에 보게 되면 인간들이 눈에 보이는 것을 어떻게 활용했는가가 서양 역사 가운데 죽 나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니까 세상은 기본적으로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공기, 불, 흙, 물, 이것은 동양도 마찬가지고 서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4원소설이라 합니다. 공기, 불, 흙, 물.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전부 다 동감했어요. 공기, 불, 흙, 물. 동양철학 주역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여기에 대해서 아니오, 라고 나설 사람 아무도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즉 변화는 더 근원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들에서 파생되어 있으니까 눈에 보이는 것들의 모든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것은 달랑 네 가지다. 흙이 물 될 수 없고, 물이 공기될 수 없고, 공기가 불 될 수 없으니까 이 네 개는 원천으로 잡자. 이 네 가지 특징이 뭐냐? 다 눈에 보인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보이는 것들과 보이는 것들의 만남과 충돌과 거기서 생기는 반응으로 세상의 모든 현상을 설명했습니다. 그게 뭐냐? 보이는 것이 전부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 진실되기 때문에.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 그 자체로서 그 외에는 없다, 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눈에 보이는 것이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도 있잖아요. 하나의 예를 들게 되면 고대 서양에서는 세상 전체를 보면서 지구를 중심으로 볼 때 달을 은으로 보고, 수성을 수은으로 보고, 금성을 구리로 보고, 태양은 제일 빛나니까 제일 중요한 금으로 보고, 화성은 철로 보고, 목성은 주석으로 보고, 옛날에는 하늘의 행성을 총 7개로 봤기 때문에, 토성은 납으로 봤습니다.

나중에 17세기에 들어와서 천왕성이 발견되니까 그것을 백금으로 봤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은, 수은, 구리, 금, 철, 주석, 납, 이것이 모든 원소, 전에는 네 개로 봤는데, 이것은 일곱 개로 되어 있다. 좀 더 발달해서 일곱 개. 그러니까 아무리 이렇게 해도 결국 뭐냐? 눈에 보이는 것들과 눈에 보이는 것들의 만남과 반응, 이게 전부다. 이게 인간에게는 전부에요.

SO₃(삼산화황)에다 H₂O(물) 합하면 H₂SO₄, 황산이 돼요. 삼산화황과 물이 결합해서 황산이 되는 겁니다. 잘 아시지요. SO₂(이산화황)은 물에 녹으면 아황산용액(H₂SO₃)이 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 세상은 가만 있지를 않고 뭐든지 만나고 충돌하고 반응을 나타내면서 세상은 구성되는 거예요. 그러면 SO₃(삼산화황)은 나로 보고 H₂O(물)를 여러분 각자, 타인으로 본다면 인간세계는 뭐냐? 그냥 부지런히 만나고 부딪히고 충돌하고 그게 세상의 전부에요. 그게 전부라고요.

그러니 이것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현재 우리를 정신적으로 꽉 누르고 있는 입장에서 우리가 지금 뭘 보느냐 하면, 요나를 보고 있거든요. 이게 말이 됩니까?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말발 하나에 그들이 갑자기 이상한 변화를 일으키더라. 무슨 변화? 금식하는데 짐승에게도 사료를 주지 않고 어린애들까지도 곡기를 끊고 “우리가 잘못된 것이 있거든 용서해주세요. 오,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럴 때 이 세상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느웨 사람들은 누굴 만나기 때문이냐? 보이는 니느웨 사람은 보이는 요나의 말을 듣고, 즉 그 요나를 만나서 그 보이는 요나에게서 말이 한번 딱 나오니까 그들에게 정신적인 영향을 줘서 그들은 아주 희귀한 현상, 금식하고 회개하는 그런 현상을 나타냈다. 그게 설명 끝이에요. 이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는.

그들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만난 게 아니에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보이는 이 세상에서는 보이는 인간들만 상대하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분을 상대하는 것은 니느웨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냐 하면 바로 요나에요, 요나. 이 요나가 이 정도로 특이한 거예요.

따라서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요나에 대해서 함부로 해석하거나 함부로 이해했다고 해서는 안 돼요. 인간에게는 보이는 것이 전부기 때문에 그래요. 공기, 불, 흙, 물, 그리고 지금은 추가해서 118개의 원소가 되었거든요. 그것들의 다양한 마주침과 변화, 분자와 분자의 결합과 해리, 원자와 원자의 만남과 헤어지는 것, 에너지의 충돌, 눈에 보이는 세상은 그걸로 설명하는 거예요.

거기에 뭐가 빠졌다? 여호와가 빠졌지요. 그러면 여호와는 누구의 몫인가? 인간의 몫이 아니에요.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기 때문에. 인간은 기껏 목사 만나고 목사의 말을 듣지요. 그러면 성도는? 성도는 바로 그런 세상, 보이는 것과 보이는 세상, 그 세상을 믿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처음 설교할 때 했지요. 인간들은 믿고 자시고 간에 오직 믿을 것은 보이는 세계만 믿는 거예요. 그러나 요나는 보이는 세계에 대해서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주님의 명을 어기고 주님의 낯을 피한 거예요. 세상에 대해서 믿지 않기 때문에. 아, 이게 무슨 뜻이냐? 요나 4장 1절과 2절을 보셔야 돼요. 이게 무슨 뜻이냐를 아셔야 됩니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되어 있지요. 요나가 심히 분노를 품고 여호와께 대들었지요.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는 보통 인간들은 여기에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요나에게 ‘요나가 잘못했네’라고 평할 수 있는 위인은 없어요. 이것은 아무도 몰라요. 요나하고 하나님만 아는 이야기를 내놓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성질이 더러워서 분노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왜 그러냐 하면, 2절을 계속 봅시다. 요나가 왜 노했느냐?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2절에서, 세상이 전부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그저 눈에 보이는 세상 이것만 붙잡고 살 수 있다고 여기는 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2절의 앞뒤 논리가 무슨 뜻인지 여기서 큰 갭이 생겨버렸어요.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이게 지금 논리가 연결이 됩니까? “하나님, 하나님께서 고국에 있을 때 니느웨가 40일이 지나면 망한다고 이야기하셨잖아요. 그래서 내가 그 말 듣고 다시스로 도망했습니다.”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일반인들한테는. 지금 요나가 도망하는 그 이유가 명쾌하지 않아요. 분명하지 않다고요.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일반 사람들에게.

그 뒤에 요나가 왜 도망갔는지를 설명합니다. 그 설명 들으면 더 어려워요. 뭐가 어렵냐 하면,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을 피해서 다시스로 도망한 것은 정당한 조치였잖아요,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요나의 설명 들으니 더 어렵지요. 또 논리가 연결이 안 돼요. “고국에 있을 때 이러하겠다, 말씀하신 그 이야기와 왜 틀립니까? 그래서 도망갔습니다.” 이것 두 개도 연결이 안 될뿐더러 도망간 이유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롭고 그래서 재앙을 철회할 수 있는 분이라서 도망쳤습니다.” 재앙을 철회할 수 있는 하나님인데 너는 왜 도망을 쳐?

그러니까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이 말이 안 되는 것을 제가 쉽게 통역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평소에 늘 이스라엘 편에서 서서 이방 민족을 벌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나님 스스로 우리에게 알려주셨고 그중에 하나가 니느웨라는 이방인의 죄가 하늘까지 상달되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다운 태도, 이방인들의 죄가 하늘에까지 상달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참지 못하고 벌을 내리는 조치를 단행하겠다, 라고 하나님께서 하셔서 나 요나는 그런 하나님인 줄 내가 알았습니다.’

알지만 요나는 또 무엇까지 알았느냐 하면, 고국에 있을 때 말씀은 그렇게 해도 벌하겠다 해놓고는 자기가 벌하겠다 한 그것을 언제든 취소할 수 있는 하나님일 수도 있다는 것을 대략 내가 감을 잡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나 생각은 뭐냐? 하나님께서 니느웨 벌하겠다, 40일 지나면 망한다, 그렇게 해도 그 뒷부분에 내가 내린 재앙의 명령을 스스로 철회할 수도 있다, 라는 분이라면 이것은 하나님이 일관성이 없는 거잖아요. 요나입장에서. ‘하나님의 일관성 없음에 나까지 동조할 수가 없어 다시스로 피하여 나 요나라도 일관성 있는 존재로서 주님의 일관성 없음에 관여하지 않기로 단독 결행했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하나님의 그 일관성 없음, 우유부단, 그 우유부단에 나 요나까지 일관성 없음, 아무 맥아리 없이 참여하는 것 나는 못 참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을 어떻게 하시든 간에 나는 일관성 있게 그래, 니느웨는 벌 받아 마땅해, 그게 하나님의 일관성이야, 라는 그 정도로 하나님을 정리하고 나는 그 일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왜? 나라도 일관성은 유지되어야 되니까, 나는 이스라엘 선지자니까요.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해까닥 하지 않고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난 다시스로 갔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예상한 바대로 그것도 구체적으로 40일 지나면 멸한다 해놓고 그 재앙을 철회했으니까 그 일관성 없는 하나님보다도 일관성 있는 내가 더 진실답지 않습니까? 그런데 일관성 있어야 된다는 그 나의 결심이 결국 하나님의 뜻과 틀어졌으니까 이럴 것 같으면 나는 더는 하나님과 동업자로 일 못합니다.’

3절에 보면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저를 죽이시옵소서 이런 식으로는 일 못 합니다. 차라리 죽이시옵소서.” 그렇게 나온 겁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요나가 잘못했다고 지적하지 말고요, 아까도 처음부터 계속 제가 이야기한 것이 지금 요나의 세계는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인, 눈에 보이는 사람과의 만남과 흩어짐 그게 세상 인생살이고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감히 이 요나의 생각에 토 달면 안 됩니다.

이것은 있음과 있음으로 구성되는 세계의 만남이 아니고 요나는 특수하게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인간들 보기에 없어 보이는 그 하나님과 요나의 있음, 그 있음과 없음의 만남이에요. 특수한 공간입니다. 왜 이 특수하다는 말을 제가 언급하느냐? 여기서 인간은 끼어들 수가 없거든요.

끼어들 수가 없다는 말은……, 논리로 하면 어렵기 때문에 그냥 쉽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요나의 분노가요, 이게 하나님의 분노에요. 특수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분노, 하나님의 자체적인 자기 절차를, 요나를 불러다 하나님과 하나님 내의 자체적인 일하심의 절차를 그걸 요나를 통해서 전개 시켜 내보이는 거예요.

“요나, 지금 니느웨 보고 재앙이 철회되는 것을 보니 너 화나지? 분노스럽지? 하나님은 죄를 징벌하시는 그것이 일관성인데 그 일관성이 엎어지는 성싶으니 너 지금 화나지? 그 화남, 분노가 내가 니느웨성을 멸하겠다는 그 분노야.” 하나님의 본질이 요나에게 전달되는 거예요.

왜 전달되어야 되는가? 전달되어야 될 이유가 뭐냐? 니느웨 성의 금식과 재앙철회는 단발성입니다. 일회성이에요. 일시적인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준 하나님의 언약은 영구적이에요. 항구적이고 영구적입니다. 계속 가야 돼요.

이래도 어려우면 제가 어떤 가사를 이야기하게 되면 ‘아, 그런 뜻이구나’ 하고 아실 거예요. 가사를 읽어보겠습니다.

이별은 두렵지 않아
눈물은 참을 수 있어
하지만 홀로 된다는 것은 나를 슬프게 해~

딱 듣는 사람은 가락이 절로 나오지요. 여기서 노래를 부를 수는 없는 거고요. 변 진섭씨가 부른 <홀로 된다는 것>이라는 노래인데요. “이별은 두렵지 않아 눈물은 참을 수 있어 하지만 홀로 된다는 것은 나를 슬프게” 한다는 그 말은 뭐냐?

이별은 한순간이에요. 일시적이에요. 단발성이에요. 두렵지 않아요. 눈물도 참을 수 있어. 늘 울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 뒤에 오래오래 지속 되는 것이 뭐냐 하면, 이별 뒤에, 눈물 뒤에 더 길게 끌어가는 것은 내가 이제 혼자라는 그 사실, 이것은 나를 슬프게 한다는 거예요.

니느웨 성을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니느웨성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요. 단발성이에요.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지금 요나와 하나님이 관계를 맺는 것은요, 눈에 보이는 한시적인 것, 그냥 눈에 보이는 만남과 만남,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충돌, 눈에 보이는 것들의 마주침, 헤어짐, 이거 아니에요. 영원한 세계의 영원한 본질이 이스라엘 속에 담겨야 돼요.

그게 성사되려면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누가 여기서 뽑혀 나왔느냐? 선지자 요나, 하나님께서 일시적인 세상에서 어떻게 영구하고 영원한 것을 뽑아내는지를 요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알려주시는 거예요. 요나를 통해서 표현케 하시는 겁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본질을 인수인계받음으로 말미암아 저 죄지은 니느웨를 그냥 단칼에 속 시원하게 처벌하는 그 처벌의 상쾌함, 그것을 요나는 느끼고 있어요. 저것들 40 일만 지나면……, 요나가 얼마나 카운트했겠습니까? 35, 36, 37……, 이제 사흘만 지나면 저것들 다 죽는다. 기분이 좋아가지고요.

요나에게, 40일이 지나면 니느웨성이 망한다는 그것이 너무너무 좋아서 ‘역시 하나님은 일관된 분이야. 하나님은 죄 있는 곳에 반드시 벌을 내리는 그 일관성이 있는 하나님을 나는 찬양한다.’ 이러한 기쁨이 있잖아요. 이 기쁨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나님이 원래 갖고 있던 내부에 있던 기쁨이에요. 죄를 처벌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이 본성, 이 기쁜 본성이 하나님 내부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요나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곧 이스라엘의 한계에요. 요나는 알고 있어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이 은혜롭고 자비로움에 대해서 요나는 뭘 생각했느냐 하면, ‘언약이 있는 이스라엘에게만 이 조건 채워주시고 이방인 니느웨 한테는 이걸 안 채워주는 것이 옳습니다.’ 왜? 이방인들은 단회성이고 단발성, 단회적이거든요.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나라는 이방 나라가 아니에요.

어느 나라냐? 언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오직 이스라엘과 함께 해야 돼요. 그게 요나가 알고 있고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들었던 계시의 내용이고 그것이, 이스라엘과 요나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본질이라고 본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애롭고 자비로운 것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어야 되지 다른 이방인에게는 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초등학교 애들이나 유치원 애들 키우는 부모들이 잠시 정신 안 차리고 해이해질 때 하는 애들에게 자주 하게 되는 충격적인 행동들이 있어요.

집에서 엄마가 호떡 해줄까, 핫도그 해줄까, 하면서 마트에서 재료 사다가 간식해줄 때요. 남들 보기에 눈에 보이는 엄마와 눈에 보이는 아들입니다. 항상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들의 만남이고 충돌이고 대화고 연결이고 그래요. 엄마가 해주는 핫도그, 엄마가 해주는 호떡 먹는다고 얼마나 기다렸겠어요?

그러나 엄마가 애의 심정을 놓친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엄마가 만든 호떡과 핫도그는요, 오직 유일한 아들인 나한테만 해줘야 돼요. 그런데 엄마가 호떡 해줘서 막 먹으려고 하는데 난데없이 친구가 와서 “아줌마, 안녕하세요? 친구야, 나다.” 하고 들어왔다 그 말이지요.

들어오니까 엄마가 어른의 예의상 “너도 먹어라” 하고 그 핫도그를 내어 줄 때 그다음부터 그 아들은 호떡과 핫도그 맛 하나도 없어요. 삐져 있습니다. 이게 요나의 분노예요. ‘난 엄마가 그런 엄마인 줄 몰랐습니다. 차라리 어머니여, 나를 죽여주옵소서’ 그 식이에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독점한 거예요. 왜 독점한 그것을 깨느냐 그 말이지요. 우리 엄마 인자하고 자비로워서 (잔뜩 삐져서) “예~ 예~ 예~ 자비롭습니다. 인자하십니다. 많이 혜택 주세요. 그러니 나는 죽여주옵소서. 예~ 훌륭한 어머니, 친구 몫 가지 계산해서 예~ 예~ 잘하셨습니다.” 단단히 삐져가지고요, “아주 잘~하셨습니다. 어머니, 저 오늘 어머니 아들 아닙니다. 나 집 나갑니다.”

그 아들이요, 그 엄마의 아들이 놓친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분노 살만한 짓을 했던 그 니느웨가요, 40일 만에 필히 망해야 될 그 니느웨의 죄, 그 죄, 그 망해야 된다는 망함에 이스라엘이 참여하지 아니할 경우에는 결코 이스라엘이 그동안 알았다는 인자함과 자비를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가 되는 거예요.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있으려면 단발성이 있는 그 사건, 눈에 보이는 그 사건, 눈에 보이는 것들만 추구하는 그것이, 얼마나 이 세상이 믿을만한 것이 못되고 하나님 앞에 저주받을 짓인지 나는 상관없다고 하지 말고 그것을 껴안아야 돼요. 그게 하나님 안의 자기 절차에요.

요나는 그 자기 절차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겁니다. 이럴 것 같으면 저를 왜 선지자로 부르셨습니까, 하고 삐졌는데 요나 말고 요나가 했던 그 사명을 감당하시는 분은 요나처럼 그렇게 삐지지 않아요. 이사야 53장 7절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에 세 번 나오지요.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한번 나오고요. 잠잠한 양같이, 할 때 잠잠하다는 말이 나오고 또 마지막에 그 입을 열지 아니한 거예요. 분노하지 않는 거예요. 자살하겠다고 설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대해서 엘리야는 이렇게 합니다. 이세벨이 엘리야를 현상금 걸어서 추격하거든요. 지난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싸워서 이겼는데 이기고 난 뒤에 쫓기니까 뭐라고 하느냐? 열왕기상 19장 4절에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즉 “하나님 됐습니다, 그만. 하나님이 날 잘 쓰셨으니까 지금 내가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냥 죽여주옵소서.” 그 때의 엘리야의 그 모습이나 오늘 본문 요나의 모습에서 뭐가 빠졌느냐 하면, 감사가 안 나오고 있습니다. 감사가 없어요. 그냥 삐짐이에요. 감사가 안 나와요.

엄마가 핫도그 해주면서 “아들이 네 친한 친구잖아. 너의 친한 친구가 너처럼 맛있는 것 먹 으면 얼마나 그 친구가 기뻐하겠느냐? 네 친구가 기뻐하면 너도 좋잖아. 그래서 네 친구니까 내가 핫도그를 준 거야.”

아들이 하는 말이 (툴툴거리면서 삐져서 하는 소리로) “예~ 예~ 잘 하셨습니다. 예~ 제 친구 맞습니다. 저도 제 친구가 맛있는 것 먹도록 하겠습니다. 예~ 잘~ 하셨습니다. 꼴까닥.” 이게 인간의 한계에요. 인간은 아무리 하나님 믿어도 그저 같은 눈에 보이는 육신과의 마주침에서 나 너보다 잘났다, 그거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줄 모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놓고 말합니다. 세상은 믿을 것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네가 믿을 것이 없어 네가. 세상 탓 하지 말라. 하나님 보시기에 네가 믿을 것 없어.”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아! 요나야! 네가 니느웨가 되어야 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해서가 아니고 니느웨와 똑같이 너도 40일이 아니고 3일 만에 작살을 내도 마땅한 너 자신인 것을 왜 너는 모르느냐. 그런 것도 모르고 니느웨만 욕했고 자기는 뭐 하나님의 백성이라서 괜찮다고요? 그래놓고 외우기는 잘도 외워요.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인자하시고 어쩌고저쩌고……, 혼자 쇼하고 있어요, 혼자서 쇼를!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만 성도가 세상을 사는 이유는 뭐냐 하면, 바로 요나같은 입장이에요. 자기 자신의 하자, 잘못된 것은 모르고 하나님은 내 편이니까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은 아까 말씀드린 주님 이사야 53장을 전혀 이해 못하고 있어요. 주님은 입을 다물었어요.

지금 이사야 53장의 주님은요, 본인이 죄지은 것이 아니에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분이 채찍에 맞고 그분이 징계를 받아도 예수님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니까요. 잠잠하게 끌려가는 양처럼,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이게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점이에요. 하나님을 지식으로 아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입만 열면 십자가인데 전혀 십자가가 아니에요. 십자가 안다고 떠벌이기는……! 아이고, 참 내!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이스라엘에게 진짜 하나님의 본질을 알려주기 위해서 다시스로 도피한 요나를 죽음으로 도피하도록 유도해버립니다. 다시스로 도피하는 것이나 네가 방금 자살하겠다고 나를 죽여달라고 한 그 죽음의 도피를 요나는 겪어야 돼요. 왜? 이스라엘은 죽음에서 건짐을 받아야 그제야 인자와 자비가 이게 너 때문이 아니고 누가 대신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그 혜택을 네가 입는 거예요.

우리는 입만 열면 나불나불나불……. 어제 강남 강의에서 했지요. 인간이 산다는 것은 누굴 찾아가서 만나고 싶고 누가 찾아오기를 기다려서 계속해서 나불나불 말을 하는 그것으로 살아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왜냐하면 말할 때,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삶을 체험하게 돼요. 삶을 느끼고 만끽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말할 때는요, 한쪽이 이야기할 때는 다른 한쪽에서는 입을 다물어야 돼요. 그래야 내가 살아 있어요. 같이 이야기해버리면 이것은 싸움이 되고 내가 살아 있는 게 안되는 거예요. 그래서 같이 이야기하고 떠들고 특히 부부싸움 할 때 아내 쪽이 후라이팬 쳐들고 이야기할 때 한쪽이 입을 다물잖아요. 그때야 ‘그렇지. 내가 이야기할 때 진즉에 가만 있으란 말이야. 그렇게 내가 이야기를 다 하고 난 뒤에 당신 이야기해.’

그래서 자기 이야기는 다 했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살아 있지요. 그다음에 남편이 이야기할 차례지요. 이야기하게 되면 “어어어어~ 귀에 하나도 안 들어온다. 됐다 그만! 나 연속극 봐야 된다.” 하고 방에 들어가 버려요. 왜? 나만 살아 있어야 되니까.

나만 살아 있어야 돼요. 이것은 전혀 하나님본질에 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노, 니느웨성은 반드시 죽여줘야 돼, 하는 그 분노가 원래 하나님이 갖고 있던 분노였어요. 그 분노를 요나는 자기 빼놓고 니느웨 사람들에게 부여했잖아요. 하나님은 요나에게 부여하는 거예요. 그 분노를 요나에게 유도하는 거예요.

“네가 지금 니느웨성 안 망한다고 그 분노하지? 처음에 니느웨성이 죄지었을 때 내가 니느웨성에 갖고 있던 그 분노가 네가 보여주는 그 분노였어. 하지만 그 분노가 있는 곳에 내가 자비를 베푸는 것은, 지금 네가 속해 있는 이스라엘이 그런 혜택을 입고 있다는 것이 단발성이 있는 니느웨를 통해서 영원해야 될 이스라엘에게 함께 하기 위해서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요나는 땡, 탈락입니다. 요나는 탈락이지만 요나의 기능과 역할은 누가 인수인계 받는가? 우리 주님이 인수인계 받아서 이사야 53장 7절에서 억울하게 저주받아도 그분은 잠잠한 양처럼 입을 다물어버립니다. 왜? 세상은 아무것도 믿을 것이 못 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어떤 것도 믿을 게 못 돼요. 왜? 보이는 금속과 금속, 보이는 원소와 원소, 에너지와 에너지, 그냥 아무 의미 없는 만남과 흩어짐이거든요. 인체 자체가 세포로 되어 있고 세포는 원자, 분자로 되어 있잖아요. 아니에요? 불에 한 번 태워 볼까요? 118개의 원소로 다 흩어지지요.

그러니까 세상은 믿을 게 못 됩니다. 이 이야기를 누구한테 오늘 전하는가? 있음과 있음으로 만나는 게 전부라고 여기는 사람 말고 진짜 없는 하나님에 의해서 택함 받은 사람들에게, 요나 같은 사람에게, 바로 요나서 이 성경 말씀이 주의 말씀으로서 전달되는 겁니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너나 잘하세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낮아진 마음이 아직도 네 속에 있느냐. 우리보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애초부터 아무것도 믿을 게 못 되니까 세상에 대해서 일체 다투거나 미련 두지 말고 주님의 이미 구원하신 낮아지신 마음만 감사하면서, 감사가 나와야 돼요, 감사하면서 저 세상 벌 받아 지옥 가는 그것이 바로 납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게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단발성이고 일시적인 것에 마음 빼앗겼습니다. 저들처럼 잘 살고 저들처럼 잘 되지 못해서 화났습니다. 때로는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십자가를 알 수 있도록 세상을 동원했다는 그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계획을 이제는 찬미하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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