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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5 20:38:36 조회 : 121         
   하나됨 201125 이름 : 우리교회(IP:119.18.87.190)   

하나됨(아모스 5:4-6)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6Zs27uUDoDI, Hit:24
 우리교회 20-11-25 21:23 
하나됨 

2020년 11월 25일                본문 말씀: 아모스 5:4-6

(5: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5:5)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5: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

장소를 언급하면서 결국에는 인간성 자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지적하십니다. 이들 이스라엘은 나름대로 꾸준히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의 하나님이라고 인정한 자들입니다. 이는 곧 오늘날에 종교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하나님 찾기란 옛적으로부터 신령한 장소라고 소문난 곳에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그곳에서 하나님을 찾아도 결국 주목하는 것은 신에게 정성을 다하는 자신입니다. 곧 신을 찾아가는 자신에게 그다지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하지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 선지자 아모스가 등장합니다. 아모스는 벧엘이나 길갈이나 브엘세바에 가서 하나님을 찾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신성한 곳을 찾는 방식 외에 달리 다른 방식을 모르고 있는 자들에게 ‘여호와를 찾으라’라고 외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난감함을 안겨줄 뿐입니다. 길갈, 벧엘, 브엘세바 말고 또다른 특별한 장소에서 하나님께서 기다린단 말입니까? 그런 뜻은 아닌 겁니다. 바로 그런 곳을 찾아가면서도 이스라엘은 자기에게 문제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겁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방법에 대해서는 선지자와 같은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모세를 비롯해서 선지자들은 장엄하신 하나님과 마주하는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이는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사람이 서게 되면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신경 쓸 것이 남아 있지 않는 겁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보면, 이미 벧엘은 하나님께서 저주하기로 작정하셨다는 겁니다.

이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집’에 불같은 벌을 내리시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 말은 곧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그 장소를 찾는 북이스라엘 인간들이 문제라는 겁니다. 본인에게 문제가 있으면서 아무리 신성한 곳을 찾아가봤자 그것은 하나님을 찾아오는 길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원래 신성한 장소라고 알려진 벧엘이나 길갈이나 브엘세바나 모두 하나님께서 나름대로 인간을 만났던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인간들은 자기쪽에서 내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명확히 하는 장소였습니다. 창세기 28:17에 보면,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쪽에서 먼저 인간에게 찾아오신 곳이 벧엘입니다. 찾아오신 하나님 앞에서 야곱은 한없는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것은 곧 인간이 단독으로 인생을 살게 되면 전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게 없음을 뜻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악마의 꾐에 빠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고 난 뒤에는 본인이 마지막 유혹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삶의 목표물이 된 것입니다.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면서 평생을 보냅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매료된 상태요 중독된 상태이기에 맨날 자신을 심적으로 못살게 굽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실망했다고 닦달합니다. 꾸지람합니다. 자기에게 행패 부리다가도 행여 뜻대로 되면 자기를 대견해 합니다.

사람들이 기본 정신이 이런 식으로 망가져버렸기에 자신의 진짜 모습을 말해주는 선지자들의 말을 안 듣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는 점을 마음에 담아두려고 하지 않는 겁니다. 홀로 사는 것이 습관해 하다보니 늘 자기 계획 세우기에 몰두 합니다. 자기 인생을 자꾸만 단락지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내리는 자기 평가는 허무하고 소용없음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즉 자기 자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뜻 달성이 중요한 겁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대로 다 성취하신 분입니다.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 찾는데 헛수고 했는지도 보여주시고. 그러면서도 제대로 하나님 찾게 된 것도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 자체가 “저희들을 자기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기에 여기에 부합되는 기능을 해내십니다. 길갈이라는 장소는 약속의 땅에 막 들어서서 최초로 유월절을 드린 장소입니다.(수 5:12) 이는 이스라엘은 홀로 살아서는 아니되고 하나님의 유월절 취지가 계속 유지되는 영속성을 보여주어야 될 민족이라는 겁니다.

브엘세바라는 곳도 이삭이 단을 세운 곳입니다.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창 26:25) 거기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연속됨을 하나님으로부터 전해받게 됩니다.(창 26:24) 따라서 이 세 곳의 공통점은, 자기 백성을 홀로두지 않고 찾아오심을 증거하는 곳입니다.

이 찾아오심의 완성은 예수님의 피흘리심입니다. 왜냐하면 이 피 안에 인간들의 헛됨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6:18에 보면,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품어 주십니다.

하지만 이 품었던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마 16:23) 이는 그냥 베드로와 만나지 않고 예수님쪽에서 베드로에 의해서 죽으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사람과 사람이 만나듯이 껴 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만나게 되십니다. 따라서 이 원칙을 그대로 적용시키게 되면 인간들의 사적으로 내놓은 것으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고린도전서 10:3-4에 보면,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내 믿음, 네 믿음’ 따로가 아니라 모두가 같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 10:16-17) 모든 성도는 주님과 동질성을 이룹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행함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예수님의 희생에 근거 안에 자기 백성을 집어넣어서, ‘결코 나의 행함으로 만남이 성사될 수 없음’을 늘 감사하고 고백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 새이스라엘과 같이 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사적인 단락성을 버리고 주님의 영속성에 늘 합류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20-11-26 13:05 
13강-암 5장 4-6절(하나 됨)2011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5장 4-6절까지입니다.

아모스 5:1-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선지자의 말씀은 신약에 들어와서 예수님 자신이 수행해야 될 계획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활동을 말씀에 입각해서 활동하기 때문에 오늘 읽었던 이 말씀에 대해서 그 당시 사람들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잊는다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자기에게 적용시키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활동사항은 뭐냐? 오늘 말씀에 의하면 두 가지가 되겠지요. 벧엘에 갔을 때, 길갈에 갔을 때, 브엘세바로 갔을 때에, 그 때 가게 되는 인간들이 당해야 될 하나님의 저주, 6절에 나옵니다. “불 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이런 것까지 주님이 다 몸소 체험하십니다. 그래야 아모스 말씀이 그대로 자기에게 적용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찾으라.” 하는 것 까지 예수님께 다 이루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하나님 아버지만 찾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벧엘 가서, 길갈에 가서, 브엘세바에 가서 헛된 짓 한 것 까지 예수님께 직접 체험을 하십니다. 하시고 그 인간들이 하는 체험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게 되고, 저주받고 그 다음에 나를 찾으라, 할 때 하나님을 찾는 그런 성취까지 예수님께서 몸소 다 자기의 사역으로서 포함을 시키게 됩니다.

그렇게 아니해야 될 일과 그리고 그렇게 해야 될 일이 아모스 5장에서 읽었던 본문에 다 나와 있다면 그 두 가지 일을 주께서 하시고 그 다음에 주께서 하신 그 하지 말아야 될 것과 해야 될 것을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들에게 주님이 이루신 그것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을 시켜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의 체험에 동참하게 되지요.

아, 이런 것을 주께서 싫어하시는구나, 라는 것을 성령 받은 성도도 이 세상 살아가면서 체험을 하게 되어 있고 아, 그래서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은 이런 것을 의미하는구나, 라는 것도 성도가 체험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볼 때 성도는 결과적으로 마지막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보면서 이 말씀을 선지자가 이야기했다는 것을 여러분 아시지요.

그러면 선지자가 누구보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요셉의 집’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 당시의 북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라는 이 나라는 요새 식으로 이야기하면 그냥 종교인이에요.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자기 나라를 세웠다는 것을 익히 아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쉬지 않고 여호와를 찾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향하여 아모스 선지자가 외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5장 5절의 말씀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라는 말씀을 아주 정말 알기 쉽게 설명한다면 영락교회 가지 말고, 순복음교회 가지 말고, 우리교회 가지 말고, 그런 식이지요. 왜? 그것이 종교인들이 하는 종교활동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요일은 짜파게티 먹는 날이 아니고 교회 가는 날. 그게 신앙인, 천국 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할 일이라고 해서 그들은 정기적으로 교회라는 것을 찾아갔습니다. 찾아간 사람보고 이런 이야기 하는 거예요. 절에 간 사람보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찾아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주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네가 지금껏 시도한 그 방식으로 하지 말라,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종교인이 종교생활 하고, 신앙인이 신앙생활 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 하겠지요. 여기서 아모스 선지자가 이런 이야기, 오늘 본문 같은 이야기하기 전에 그냥 아모스 선지자가 없다고 한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정상적으로 제대로 신앙생활 한다고 여겼을 겁니다.

다시 말해서 ‘벧엘 가는 것이 하나님 찾는 방식이고, 길갈로 가는 것이 방식이고, 브엘세바로 나아가서 정기적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찾는 방식이며, 이 방식 외에는 다른 방식은 있을 수 없다. 내가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지정된 공간에 가서 지정된 시간에 예배드리는 것은 결코 나쁜 짓이 아니다.’ 이렇게 자기는 확신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아모스 선지자가 하는 말이, ‘가지 말고 여호와를 찾으라’ 했으니까 벧엘이나 길갈, 브엘세바 안가면서도 여호와를 찾는 방식에 대해서는 그 당시 종교인들 입장에서는 난감한 거예요. 다른 방식을 생각해 볼 수가 없습니다. 벧엘이 시시한 장소가 아니거든요. 길갈이 그냥 아무 장소가 아니에요. 브엘세바가 그냥 일반적인 역사를 가진 곳이 아니거든요. 다 여호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이 세 장소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제단을 세웠다는 거예요. 하나님께 단을 세웠던 곳입니다. “그 중요한 세 장소 말고 달리 다른 장소에 또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가고자 하는 그 장소가 어디입니까?” 선지자한테 묻고 싶을 정도일거예요.

‘벧엘 빼고, 길갈 빼고, 브엘세바 빼고, 그러면 어느 곳에?’ 이렇게 되거든요. 요새 말로 하면 “영락교회 말고, 새문안 교회 말고, 우리교회 말고 어느 교회 가면 구원받습니까?” 와 똑같은 이야기에요.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말씀 드리면 오늘 본문 말씀에 여호와를 찾는 그 방식에 대해서 신약에서는 어떤 공간이나 장소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인물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찾으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다는 겁니다. 벧엘 찾는 그 마음가짐으로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아를 찾을 수 없고, 브엘세바를 찾고 길갈을 찾는 그 마음씨로서는 비록 하나님이 이 땅에 온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그 분이 누군지를 못 알아보는 식으로 메시아가 오신다는 겁니다.

그 메시아가 오셔서, 예수님이 오셔서 보여주는 그 모든 사역은 길갈을 찾고 벧엘을 찾고 브엘세바를 찾는 그러한 사고방식 가지고는 절대로 내가 누군지를, 다시 말해서 여호와를 찾는 일에 실패할 것이다. 그 사역을 해주신 겁니다.

대전바닥 아무데나 파면 온천 나옵니까? 유성에 가서 파든지 해야 나오든지 하지요. 아무데나 판다고 온천 나오는 것 아니거든요. 브엘세바와 길갈과 그리고 벧엘, 이 장소가 문제이겠는가, 아니면 거기를 찾아가는 그 인간들이 문제겠는가? 거기에 대해서 6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그러니까 요셉의 집이라 하는 것은 인물들, 사람들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장소가 잘못됐다, 가 아니라 장소를 찾는 너희들이 잘못되었다, 너희들 위에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죽을 인간인 것을 모른 채 아무리 어느 교회 유명한 교회 찾아가고, 대전의 그 코미디언목사 찾아가고, 동치미 나오는 그 목사 장 동경 목사 찾아가고 아무리 해봤자 찾아가는 본인에게 뭐가 문제냐 하는 것을 모르는 이상은 어느 장소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좀 비약해서 말씀드린다면 벧엘이 어디 입니까, 또는 길갈이 어디며 브엘세바가 어디입니까, 그러한 취지 벧엘, 길갈, 브엘세바의 취지를 살리고 있는 그 특별한 장소는 어디 입니까, 라고 장소, 공간에 대해서 물으신다면 신약적으로 예수님입장에서 봐서는 장소로 대답하는 것이 아니고 인물로 대답하는 거예요.

“내가 바로 브엘세바고, 내가 바로 길갈이고, 내가 바로 벧엘이다. 너희들은 장소가 인격체 자체가 된다는 생각은 너희가 상상도 못했지?” 왜 너희들은 그걸 상상을 못하느냐 하면 그 장소를 찾아가고자 하는 자기 자신이 굉장히 대견하고 기특한 거예요. 참, 내가 바쁜 시간에 교회를 다 오다니, 교회 온 본인에게 아주 감동을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제 모습 어때요?”라고 주님한테 묻고 싶은 거예요. 그것은 인간이 자기에게 주목한다는 겁니다. 어디를 가도 교회를 가나, 길갈에 가나, 브엘세바에 가나, 어디를 가도 뭘 주목하느냐?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고 그 하나님을 쳐다보고 있는 나 자신의 잘남에 대해서 자기가 주목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주목할 것 같으면 여기에 뭐가 빠지느냐 하면, 6절이 빠지지요. 요셉의 집에 하나님의 벌을 내린다는 이 대목이, 하나님의 뜻이, 자기자신을 기특하고 참하게 보는 사람한테는 이 대목이 빠져버린 거예요. 반면에 예수님한테는 이 대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셉의 집에 벌을 내린다는 그 벌,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그 벌을 직접 다 받아 버려요.

그런데 우리는 ‘착하디착한 내가 벌 받을 이유가 없지 주여 벌이 나에게 떨어지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떨어지게 하옵소서.’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근사하고 좋게 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겁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창세가 3장, 인간이, 아담이 유혹을 받아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이 세상에 가장 유혹거리가 누구냐 하면, 본인이 유혹거리에요.

이 세상에 본인보다 더한 유혹거리가 없습니다. 나를 한 번, 우리 자신을 분석해 보세요. 퇴근하면 밤에 집에 누워서 자기 자신을 한번 살펴보게 되면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불만이 있고 닦달을 하게 됩니다. 불만이 있다는 말은 기대를 엄청 걸었다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누구한테 행패 부리느냐 하면, 자기한테 행패부리고 자기가 진상이라.

본인을 못살게 굴어요. 왜 똑바로 못하느냐, 그런 식으로. 나는 너를 믿었는데 너는 왜 내 믿음에 부응 못하느냐 하고 본인 붙들고 그렇게 닦달 낸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은 창세기 3장 이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인간에 대해서 그냥 홀로 두지를 않았어요.

이사야 2장 1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만큼 하나님께서 영광스럽다는 뜻이고요.

거기에 비례해서 상대적으로 22절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네가 너 자신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다루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본인이 생각하는 본인의 이상체, 어떤 유혹, 내가 가장 매력적인 존재를 소망하면서 살아가고 있거든요.

자기가 자기에게 경배하고. 자기가 자기에게 반해서 눈물 흘리고 있고. 노래하나 불러놓고, 드라마 연기해놓고는 12월 되면 저희끼리 상을 다 받아요. 트로피 들고 “참 아름다운 밤입니다.” 이래가면서. “팬들에게 감사합니다.” 자기에게 자기가 찬미하는 시간. 그걸 부러워하는 거예요. 그 맛에 연예인 하는 겁니다. 자기가 자신에게 반하는 것.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를 전혀 모르고 있는 거예요. 네 호흡은 코에 있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주께서 멱살을 쥐고 있는 거예요. 멱살 쥐는 폼 한번 상상해 보세요. 주님께서 멱살을 꽉 쥐는 거예요. 너무 조여서 숨도 못 쉬어. 그러니까 주님은 호흡을 장악하고 있는 거예요. 이리 와, 주께서 조금만 손에 힘을 가해버리면 호흡 끊어져요. 죽어버려요.

어떤 분은 저녁 먹고 그 다음에 바로 돌아가신 분도 있다는데. 우리가 어디가도 이 호흡은 내가 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쥐고 있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어떤 분이 내 멱살을 꽉 쥐고 지금 평생을 질질 끌고 다닌다고 보시면 돼요. 밤에 자다가 약간 숨이 좀 편하잖아요. 그건 약간 잘 자라고 약간 숨통을 풀어놓은 것인데 그것도 알 수 없어요. 언제 가는 잠에 목 졸라버릴지.

그러니까 우리 목숨은 간당간당 한 거예요. 내 관리대상이 아닙니다. 내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분이 관리해요. 이걸 누가 아는가? 선지자들이 알아요. 모세가 하나님한테 나아갈 때는 마치 맨발로 화산에 올라가는 기분입니다. 그 뜨거운 산에 맨발로 올라간다 생각해 보세요. 맨발인지, 샌들 신었겠지만 맨발이라고 생각하고,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산꼭대기가 진동을 해요.

바르르 떤다고요. 산은 떨지요. 온도는 올라가지요. 주의 음성은 뇌성처럼 큰 소리로 등장하지요. 그 장엄함과 마주치는 마음으로 모세는 살아가는 겁니다. 비록 산 위에서 내려오더라도 마찬가지에요. 장엄한 분. 이걸 이사야 2장 22절에서 네 목숨 줄을 쥐고, 내 멱살을 쥐고 한 번도 그 멱살에서 손을 놓지 않고 질질 끌고 다니시는 주님, 그런 입장에서 그러한 자세로서 주님께서는 요셉의 집에다가 내가 불로서 너희들을 저주해버린다고 하시는 거예요.

불같이 요셉의 집에 대해서 멸해버리신다고. 그러면 이 벧엘이라는 곳, 길갈이라는 곳, 브엘세바, 이걸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지런히 찾아갔습니다. 찾아갔으니까 찾아가지 말라고 한 거지요. 정기적으로 늘 상 찾아갔으니까. 찾아가면서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저주 내린다는 것을 벧엘에서 찾지를 못했고, 길갈에서 찾지를 못했고 브엘세바에서 찾지를 못했어요.

한달에 네 번 다섯 번 그리고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 11시에 왔는데 교회 와서라도 내가 저주받아야 된다는 그런 이야기를 못 들어보고 왔다갔다 한 거예요. 물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교회가 있기는 있습니다만 그 다음부터 안 나오지요. 왜냐하면 나는 내 잘난 맛에 살아가거든요. 내가 유혹거리니까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는 이 세상에 없어요.

항상 나는 잘되리라, 잘~ 될 거야, 맨 날 자기한테 잘된다고 주문 외우고, 쨍 하고 볕들 날~ 오늘도 해는 떴는데 뭐, 뭐 될 거야, 전진, 전진, 맨 날 전진, 노래를 불러. 쉽게 말해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너무 자기에게만 주목하는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온 겁니다. 나만 주목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벧엘이라는 곳이 어디인가?

창세기 28장 16-19절에 보면 벧엘은 이런 곳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하나님이 여기 계시도다, 했거든요.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 두렵도다.” 그러니까 벧엘과 길갈과 이 브엘세바의 공통점은 뭐냐? 혼자 있지 않다는 거예요. 인간은 혼자 있으라고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야곱은 실감한 겁니다. 그러면 혼자 있지 않다면 내가 혼자 있을 때 내 뜻이 있을게 아니겠습니까?

내가 혼자 있을 때 내 뜻은 언급했어요. 뭐냐 하면 내가 유혹거리다. 내가 매력덩어리다, 그 말입니다. 내가 사랑스럽고 내가 소중하다, 그 말입니다. 혼자 있을 때. 그러나 나 말고 두려운 어떤 분이 있다면 그 두려운 장엄한 하나님의 뜻 앞에 내 뜻은 없어도 괜찮아요. 없어도 괜찮다고요. 혼자 있으면 내가 제일 소중하기 때문에, 최후의 남은 자가 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내가 조기에 죽거나 병들기 싫고 나는 기어이 살아남고 싶은 거예요. 혼자 있을 때 특징은 기어이 살아남겠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다른 거짓된 하나님, 우상 하나님, 엉터리 하나님으로 자꾸 변경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는 내 몸을 살리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내가 사는데 유리한 하나님으로 조건을 맞춰서 자꾸 바꾸는 겁니다. 내가 살고 싶어요. “주여, 저를 저주해 주옵소서.” 라는 그런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살려 주옵소서, 하는 신을 찾아서 계속해서 오늘은 길갈, 오늘은 브엘세바, 오늘은 어떤 교회, 다음 교회, 이렇게 하는 거예요.

좀 살만 하다 싶으면 이왕 사는 것 내가 이정도로 잘나고 훌륭하고 대견하고 멋있는 존재라는 것을 좀 증명해줄 수 있는 그런 하나님, 그걸 격려해주고 더 채워줄 수 있는, 증명해줄 수 있는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가 말합니다. 선지자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세상 끝자락을 아는 사람이지요.

세상 끝자락에 가면 너희들은 하나님에게 진노 받아야 될, 불로서 진노대상이라는 사실을 너희들은 알아야 된다, 라는 것을 아모스를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벧엘이나 길갈이나 브엘세바는 뭐냐? 그 사실을 이미 그 장소에 하나님이 알려 줬어요. 두렵도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더 이상 내 생각을 못하겠다, 그런 뜻입니다.

길갈이라 하는 것은 여호수아 5장 9절에 보면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그 길갈에서 요단강 건너고 처음으로 유월절 지킨 곳이에요. 유월절 지켰다는 말은, 유월절은 어린양의 피 덕분으로 지금 내가 우리가 여기 왔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유월절 지키는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런 점이 정말 안 됩니다. 나 혼자 있지 않다는 것. 그러면 나 혼자 있지 않다는 것,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만약에 제가 여러분에게 부탁한다면 “아이고, 그 부탁정도는 들어드리지요. 함께 있습니다.”라고 하는데 제 뜻은 그게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있다 하기 전에 찾아야 된다는 그 과정이 하나 중간에 들어가야 돼요.

찾아야 된다는 그 과정이 들어가려면 내가 헛짓하고 있다는 그것부터 나 자신에 대해서 발견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헛짓하고 있다는 증거는 뭐냐? 우리 인생은 이상스럽게 시간 따라 단락을 짓습니다. 딱 단락을 지어서 ‘가만 보자 이번 주 말고 다음 주 김장해야지.’ 할 때 그게 단락 짓는 거예요.

인간의 어떤 계획이나 스케줄이 다 단락 짓는 겁니다. 단락을 짓는 이유가, 나름대로 연속성, 하나님의 연속성은 이해 못하고요, 내가 인생을 내 힘으로 하다보면 힘에 부치거나 숨 가뿔수가 있어요. 힘들때가 있고 집중력이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한 텀 쉬어가는 거예요. 마치 등산할 때 산에 오를 때 한 2백 미터 가고 좀 쉬고, 또 한 2백 미터 가고 좀 쉬고, 그 쉬는 것이 단락이에요.

그래서 인간이 혼자 사는 특징이 뭐냐? 늘 단락 짓는 삶이 혼자 사는 삶입니다. 단락 짓고, 다시 한 번 각오를 하고 결심하고, 또 힘을 내서 내 계획한 바를 이루려고 애를 쓰고, 이게 혼자 있는 사람, 혼자 사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내가 계획하고 내가 힘 조절해서 사는데 거기에 무슨 하나님이 필요하게요. 하나님이 안 필요하지요. 하나님 지켜 보옵소서, 이런 식이지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 그 특징이 속물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북 이스라엘의 특징이 속물이에요. 정기적으로 벧엘에 가고 정기적으로 브엘세바에 가는 거예요. 평소에 브엘세바에서 주어졌던 하나님의 취지 같은 것, 계속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 인생을 내가 살려고 하는 거예요. 가끔은 쉬어가면서.

그러니까 계속해서 주목되는 것은 ‘나는 이만큼 성과를 이루었다. 나는 이 정도까지 내 인생 남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 그것만 남는 겁니다. 자식들도 문제지만 부모들도 문제인데 속물 부모들이, 우리 집안에는 그런 분 없습니다만 그런 분 이야기 들어보면, 아들이 학교 갔다 오면 저녁을 지어줘야 되는데 엄마가 없어졌어요.

그러면 아들은 엄마 찾는데 어렵지 않아요. 동네 아줌마 집에서 화투치고 있기 때문에. 매일 화투치지요. 그럴 때 애가 엄마 밥 줘,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 아주머니가 아들 밥해준다고 일어섰는데 그 와중에 벌써 화투패가 돌아갑니다. 화투패, 화투장 돌리는데 그냥 일어설 인간은 나는 이 세상에 없다고 봅니다.

왜 화투패 앞에 앉아 있는가? 돈을 따기 위해서. 왜 돈 따려고 하는가? 돈을 딴 내가 매력덩어리고 유혹거리가 때문에 그래요. 돈 따면 성공하기 때문에. 누가? 내가 성공하는 거예요, 내가. 못 따면 내가 진상이지요. 내가 나를 원망하는 겁니다. “가만 있어봐라 이번 한판만 하고 갈게.” 한판이 벌써 두 시간 반 걸려요.

그만큼 이 중독이라는 것, 화투중독, 알코올중독, 그게 무서운 겁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으니 그건 뭐냐? 인간이 자기한테 중독된다는 사실, 이것은 인류의 영원한 질병입니다. 이건 백신도 없어요. 영원히 저주의 바다가 되는 이유가, 자기가 혼자 사는데 중독되었어요. 함께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 벧엘이라는 이름, 길갈, 브엘세바는 뭐냐? 하나님이 너 때문에 죽었다. 죽음의 취지를 살려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건을 일으킨 장소가 벧엘이고, 길갈이고, 브엘세바에요. 브엘세바라는 것은, 이삭이 같은 동네에 있는 사람들 이웃주민들과 계약을 맺어서 거기서 자기의 목숨을 부지했다 할까요, 자기생존의 숨을 쉬게 되었다, 여유가 있게 되었다, 이걸 기념해서 단을 쌓았다고 창세기 26장 23-25절에 되어 있어요.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장소가 브엘세바에요. 벧엘은 아까 말한 대로 단을 쌓은 곳이고, 길갈은 첫 번째 유월절을 행하고 할례를 행한 장소가 길갈입니다. 그런데 브엘세바, 길갈, 벧엘의 이 지명의 이름은 나중에 인격적인 이름이 되지요. 그 이름이 마태복음 1장 21절에 나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그러면 주님의 이름에 참여하는 것이 여호와를 찾는 게 돼요. 그 이름의 기능, 그 이름이 벌이는 기능 속에 합류되는 것이 바로 여호와를 제대로 찾은 게 되는 겁니다. 그 기능이 뭐냐 하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내는 거예요. 그러면 그 죄라는 것은 나를 포함해서 내가 살던 화투패, 막 돌아가는 그 현장, 화투패를 다른 말로 하면 펀드가 돌아가는 그 현장, 주식시장, 할아버지가 증권회사 아침부터 가서 하루 종일 그것만 쳐다보고 언제 팔까, 그것만 기다리는 그 객장, 그게 바로 죄에요.

왜? 거기서 홀로 내가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게 우리 직장일 수도 있고 직업일 수도 있고요. 그러니 죄 아닌 적이 없지요. 혼자 살고 싶은 거예요. 남 살리려고 직장생활 합니까? 빵공장 한번 들어가 보지요. 40킬로그램짜리 부대 들어가면서 열 두 시간 노동하고. 사흘도 못 버티고 나오지요. 모든 현장직, 중소기업이나 대기업의 현장 생산직은요, 인생막장입니다. 해병대출신 같으면 한 12시간 버티고, 다른 사람들은 거의 죽을 지경이고 못 버티고 나오는 그런 곳이에요.

그러나 회사 입장에서는 너 없으면 다른 사람 줄 수가 있다는 거예요. 공급은 많고 수요는 작으니까 사람 뽑는 게 그렇게 아쉽지 않아요. 기술도 필요 없어요. 힘만 쓰면 돼요. 특히 남자들은. 들어갔다 나갔다 들어갔다 나갔다, 맨 날 직장생활이. “목사님, 내가 무슨 직업 해서 살 수 있습니까?” 맨 날 이러고 있고. 주님은 이 땅에 와서 아모스 말씀처럼 죽었어요. 그러니까 그 주님의 죽으심에 합류하는 것이 바로 여호와를 찾는 겁니다.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했던 일, 그 일, 예수님 만나서 예수님 따른다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주께서 제공한 만남의 장소는 한국말로 한자입니다. 피, 피, 그 피 흘림으로 ‘다 이루었다’가 성사가 된 거예요. 접합이 성공된 거예요 죄인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그 접합, 예수님의 그 찐득찐득한 피가 성공시킨 겁니다. 예수님의 모든 언약, 이 아모스 말씀을 포함해서 모든 말씀은 예수님의 피안에서 다 성취를 본 겁니다.

바로 성경말씀 전체는 이 말씀을 위해서 기록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의 경우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일단 자기가 안아요. ‘너는 베드로다 반석이다. 내가 네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베드로를 일단 안았다 이 말이지요.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안고 난 뒤에 이제 말씀대로 하십니다. 일단 18절에서는 베드로를 안아서 받아주시고 그 다음에 마태복음 16장 23절에 보면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를 예수님께서 안아버렸어요.

이게 하나의 과정이고 절차거든요. 베드로도 오해해서 주님께서 자기를 안아주고 보듬어주니까 그것으로 줄곧 천국까지 계속 가는 줄 알았지요. 그게 아니고 주께서 베드로를 안는 순간 이제는 예수님이 해야 될 그 과정 속에 베드로가 포함이 됩니다. 참여가 된 거예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는다 하니까 “아이고, 고난이 있을 리가 있습니까?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한 거예요. 21, 22절에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 때 예수님이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한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는 어떤 과정을 거쳐야 되느냐 하면, 베드로가 내가 사탄에 속했다는 그 체험을 베드로가 해야 되는 거예요. 사탄의 체험을 하는 그 순간 자기는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아야 될 대상인 것을 체험해야 되는 겁니다. 베드로가 혼자 있을 때는 천하에 자기보다 귀한 것이 없지요. 최고 귀하지요.

하지만 주님과 함께 있어버리면 내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아야 될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을 눈을 떠서 새롭게 자각해야 돼요. 그것은 뭘 만나야 자각하느냐? 피를 볼 때 그 피를 보면서 “아, 내가 주님을 살해한 자구나. 내가 주님을 죽도록 넘겼던 자구나.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런 자들 중에 내가 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파악할 때 그것이 바로 주님의 완성된 영생의 말씀이 베드로와 함께 있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전번에 제가 낮 설교에서 한 이야기, 12년 동안 피 흘린 그 여인이 있었지요. 그 여인이 마가복음 5장 27 28절에 보면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게 뭐냐 하면, 혼자 있지 않아요. 혼자 있지 않고 바로 예수님과 함께 동질성을 인정하는 겁니다. 이 여인이. 이게 교회라는 이름으로 집단적으로 적용된 것이 고린도전서 10장에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 4절에 보면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래서 사람이 수십만이 되든지 몇 백만이 되든지 전부 하나의 돌에서 나온 신령한 물을 마신 거예요. 그 반석은 그리스도라. 어떤 장소, 어떤 물체를 그리스도라고 하는 거예요. 브엘세바, 벧엘, 그리고 길갈,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금은 어느 장소가 없고 어느 장소든 그리스도가 찾아오시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만날 수가 있습니다.

만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인간이 혼자 있으면 떡가래처럼 딱딱 떨어지지요. 방앗간의 떡가래가 내려오면 뚝 끊고 또 내려오면 끊고 하잖아요. 그처럼 인간은 자기 혼자 있으면 자꾸 단락을 짓는데 만약 혼자 사는 식으로만 자기를 구원하려고 교회 온다면 그것은 내 믿음 따로 있고 네 믿음 따로 있어요.

그러나 고린도전서 10장에 의하면 네 믿음도 없고 내 믿음도 없어요. 오직 믿음은 하나밖에 없어요.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내려와서 다시 아버지로 돌아가면서 형성된 그 믿음, 그 하나의 믿음이 신령한 음료가 되고 신령한 양식이 되는 겁니다. 생명의 양식은 오직 하나의 믿음뿐이에요. 성령으로 오신 믿음, 예수님의 믿음을 너도 공여 받고, 너도 공여 받고, 다 같이 할당 받은 겁니다.

네 믿음이 세나 내 믿음이 세나 멱살 쥐는데 멱살은 아까 말한 대로 주님이 쥐고 있지 우리가 남 멱살 쥘 수가 없어요. 진짜 주님과 함께 있고 진짜 믿음을 받았으면 이제는 누구 믿음을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습니다. 질적으로 동일한 믿음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 몸이라. 에베소 4장에 4, 5절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그렇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6, 17절에 보면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아무리 주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떡을 나눠줘도 그 떡은 예수님에게서만 나온 거예요. 예수님에게만 종속된 떡이에요. 따라서 성도가 된다는 것은 나 잘났다 너 잘났다, 혼자 있을 때 자기 자신에게 반하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보려고 한 그런 마음가짐이 아니라 “주님보시기에 진즉에 저주받아야 되는데 예수님의 거저주시는 그 떡, 거저주시는 그 생명의 음료로 인하여, 거저주시는 그 믿음과 거저주시는 그 주님의 소망과 사랑으로 우리는 살았습니다.” 할 때 바로 그 사람이 움직이는 벧엘이고, 움직이는 브엘세바고, 움직이는 길갈이고, 새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홀로 사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고 이 세상의 속물로서 배운 것은 그것 밖에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성령으로, 선물로 믿음을 주시니 내 것은 없고 다 주의 것인 것을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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