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전예배

               주일오후예배

               수요예배

 

 

 

 

수요예배

HOME > 설교듣기 > 수요예배

 

 

 

 

 
2020-07-29 20:40:57 조회 : 75         
   실패의 기적200729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실패의 기적(호세아 13:15-16)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M9J59FBf3Sk, Hit:10
 이근호 20-07-29 21:17 
실패의 기적

2020년 7월 29일           본문 말씀: 호세아 13:15-16

(13:15) 그가 비록 형제 중에서 결실하나 동풍이 오리니 곧 광야에서 일어나는 여호와의 바람이라 그의 근원이 마르며 그의 샘이 마르고 그 쌓아 둔 바 모든 보배의 그릇이 약탈되리로다

(13:16) 사마리아가 그들의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 아이는 부서뜨려지며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라지리라

‘실패의 기적’이란 실패에서 벗어나는 기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하게 됨’ 그 자체를 복으로 이해하게 된 기적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기적’이라는 용어는, 내가 원하는 바를 내가 이루지 못할 때 대신 이루어주는 것이 아니라 아예 나 자체를 없애주시는 것이 기적입니다.

즉 나를 ‘있는 존재’에서 ‘없는 존재’로 바꾸어주는 바로 그 기적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한데 모여서 살아가는 군상들에 있어 경향성은 다들 ‘자기 자랑’입니다. ‘자기 자랑’이란 ‘내가 여기 있음’ 자체를 자랑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그냥 ‘있음’만 자랑하기 쑥스러우니 뭐라도 걸치고 자랑하고 싶은 겁니다.

‘이 이 정도 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면서 살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런 ‘나’가 없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 있음을 ‘없음’으로 이해할 줄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최종적인 가치는 본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상식적으로 굳이 증명할 필요조차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방민족은 몰라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은 그런 식으로 자신을 봐서는 아니됩니다. 자기네들이 있기 전에 선행해서 있는 ‘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계약, 혹은 계약서입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시내산 정상에 올라가서 40일 간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산 밑에 있는 남은 사람들은 자기네들 끼리 ‘있음’으로 느껴지는 군상을 이루어 애굽의 신을 여호와라고 여기면 화려한 파티를 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황소신은 여호와 신에 대한 객관성을 구현한 형상입니다. 즉 인간들은 객관성을 원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를 보면서 객관적으로 그 있음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나에게 거울을 통해 분명히 ‘있다’는 것이 확인되는 것처럼, 하나님도 자신들의 객관성처럼 객관적으로 나타나 주기를 원했던 겁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과 만나고 내려오던 모세의 양팔이 들고 오던 하나님의 객관성은 ‘돌판’이었습니다. 곧 계약서였습니다.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모습을 본 모세는 화가 나서 들고 있는 돌판을 던져 깨어버립니다.

이로서 백성들은 모두 죽어 ‘없는 존재’가 됩니다. 즉 인간들에게 있어 객관성이나 ‘있음’은 본인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되는 하나님의 계약성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하는 처지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계약서인 돌판이 깨어져 없다면 그 자체로 언약과 관련있는 자들이 없다는 이유로 그들은 ‘없는 존재’입니다.

출애굽기 34:1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깍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 바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 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어버린 계약서를 다시 만들라고 모세보고 지시하십니다.

이처럼 계약서가 다시 살아나게 되면, 이 계약서 자체에서 나오는 경향성에 의해서 백성들이 모집됩니다. 오늘 본문에 ‘배반’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북이스라엘 나라가 의견을 맞지 않는 이유는, 원래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초기조건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주변 나라들과 같이 자신들도 ‘계약서 없는 신’을 섬기고 싶었습니다.

‘계약서 없는 신’의 특징은 인간들의 존재를 최우선시하는 신들입니다. 곧 ‘나를 위한 신’이 곧 우상입니다. 이들 신은 계약서가 없으니 만사가 나 자신의 성공을 위하여 생겨나기를 원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 아이는 부서뜨려지며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라지리라”

북이스라엘이 망할 때, 주변 강대국인 앗수르가 이 나라를 침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다루게 된다는 겁니다. 북이스라엘 주민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계약서에 나온대로 주어진 역사적 객관성입니다. ‘신이 누구며 나는 누구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제시한 객관성은 곧 ‘그들의 실패’입니다.

‘내가 여기 있다’라는 의식이 계약서의 선재를 막아서도록 하나님께서 방치하지 않으신 겁니다. 하나님과 계약을 맺어서 역사 안에 등장한 이스라엘은 그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께서 받은 계약관계를 보여야 하는 겁니다. 이 계약관계가 없으면 아무리 해도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내가 있음’을 근거로 해서, 나의 헌금과 나의 봉사와 나의 찬양과 나의 예배와 나의 헌신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계약서에는 그런 내용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약서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너를 없애는 일이기에 너의 몸에 집결시켜라”입니다.

이 계약 내용대로 실행하신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이 짊어지신 죄가 있기에 모든 세상 일은 저주와 폭력을 동반해서 하나님쪽으로 몰려와서 기어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돌판의 기능처럼, 깨어졌기에 새롭게 만들어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기에 예수님은 부활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성도도 예수님과 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에 의해 12사도는 궁지에 몰립니다. 마태복음 10:19-20에 보면,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제자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실패자로 만드십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한 일의 여지를 없애버리고 그들 속에 있는 선재(先在)적 계약서가 활약하게 하십니다. 즉 계약서가 나올 때까지 모든 것들을 다 제거하는 식으로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다루십니다. 갈라디아서 2:20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계약서가 안에서 살아나는 자들은 계약서 자체를 막아서는 것을 하나님께서 발라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죽은 자는 더 이상 자기 자랑할 게 남아있지 않습니다. 오직 탑재된 계약서만 자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죽었다가 다시 살게 된 계약서의 효과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는 증거가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일들이 나를 실패자로 만든다는 사실을 도리어 감사의 복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20-07-30 12:47 
52강-호 13장 15-16절(실패의 기적)2007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13장 15-16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7페이지입니다.

호세아 13:15-16

“저가 비록 형제 중에서 결실하나 동풍이 오리니 곧 광야에서 일어나는 여호와의 바람이라 그 근원이 마르며 그 샘이 마르고 그 적축한바 모든 보배의 그릇이 약탈되리로다 사마리아가 그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 아이는 부숴뜨리우며 그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리우리라.”

오늘 본문에 주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것이 사마리아라는, 사실은 사마리아를 수도로 갖고 있는 나라, 이스라엘 중에서도 북쪽에 있는 나라 북 이스라엘이 나옵니다. 눈에 보이는 나라지요. 역사적인 근거를 갖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또 여기에 등장하는 분이 계신데 15절에 “여호와의 바람이라” 해서 여호와가 나옵니다. 여호와는 눈에 보이지를 않아요.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와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과의 만남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바람, 하나님의 일하시는 그 객관성을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의 변천을 통해서 파악이 가능합니다.

보통 신앙은 주관적이라고 하지만 성경을 보게 되면 주관적인 것은 변화가 되어서 그다지 믿을 것이 없어요. 신빙성이 없습니다. 인간의 주관이라 하는 것은 나중에 세월 따라 기억도 사라지고 정신도 없어버리면 주관도 희미해지기 마련이지요. 성경을 통해서 늘 하나님 쪽에서 제시하는 것은 객관적인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그 하나님이 계시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어디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객관적인 하나님의 증거를 보고 믿겠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은 객관성의 함정이에요. 왜냐하면 객관적인 사실, 주로 역사적인 사실, 문화유산도 포함되는데 하나님에 의해서 조성되었다는 그 객관적 증거를 우리가 붙잡을 때에 이게 왜 함정이 되느냐?

그냥 붙잡지 않고 다른 객관을 전제로 하고 붙잡습니다. 그 다른 객관이 뭐냐? 내가 여기 있다, 는 사실입니다. 여기 있는 내가 하나님이라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객관을 파악해서 그것을 내가 인정하게 되면 보이지 않는 천국에 내가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누가? 객관적인 여기 있는 내가, 거울에 비추이는 실제로 있는 내가.

‘실제로 있는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를 이루면 그 실제로 있다는 하나님나라에 갈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을 믿을 용의가 되어 있으니까 하나님 쪽에서 성의를 보여서 내가 믿을만한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해주세요. 맘 팍 열고 그 하나님이 주신 증거를 받아들여서 믿겠나이다.’

우리가 이런 태도로 교회도 나오고 성경을 보기 일쑤지요. 그걸 가지고 객관적인 경향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객관적인 경향성. 경향성이라 하는 것은 고유의 성격이 나오고 성질이 나오는 것을 경향성이라고 해요. 그러면 이것은 함정이 되는 이유가 그 문제, ‘나는 객관적으로 여기 있고 하나님은 저기에 계시다. 둘 다 있으니까 증거만 일치되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이러한 논리를 증거 할 때 뭐부터 따져야 되느냐?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과연 있기는 있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해보셔야 돼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어 내 모습 저기 있네.’ 할 때 거울에 비췄으니까 나 여기 있는 것이 맞다고 할 때 그게 나의 경향성이에요. 그것은 진리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에요. 객관성도 아닙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내 눈에 그걸 확인하는 거예요. 객관성이라 해도 내주관성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누가 뭐래도 분명해 꼬집어보면 아파. 꿈은 아니야. 여기 있는 것이 맞아. 누가 뭐래도 내가 여기 있어.’라고 여기면서 ‘여기 있는 내가 정말 객관적인 증거만 딱 쥐면 나는 신자 될 수 있고 천국갈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거 틀렸습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뭐가 있는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계약서가 먼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계약서,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계약,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율법, 내가 있기 전에 먼저 언약이 있었고 그 언약을 언약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잠시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그렇다면 나보다 먼저 있는 그 계약, 계약서, 거래할 때 계약서 있잖아요, 하나님이 제시한 그 계약서 그게 객관적인데요. 그 계약서에서 나름대로의 경향성이 나와요. 나름대로의 성격, 성질이 나온다고요. 그러면 우리는 시작을 ‘나는 여기 있다. 어떤 경우라도 나는 여기 있다. 이것은 부정 못해. 나는 이것을 도저히 부인할 수 없어.’라는 고집에서 나온 나의 경향성이 있어요.

이 경향성이, 둘이 일치되지가 않아요.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배반, 배신이라고 해요. 배반한 거예요. 안 맞으니까. 누가 먼저 있음에 선점했는가에 대해서 ‘나는 내가 여기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 쪽의 객관성을 차지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너보다 먼저 계신 분이 계시고 그분, 하나님의 계약서가 먼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시면 되는데 계약서가 왜 필요하냐? 계약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뭐 그냥 머리 들이민다고 넣어주는 데가 아니에요. 그럴 것 같으면 아예 지옥이라는 데가 필요치 않지요. 하나님의 계약에 위배된 자는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계약에 합당한 사람, 그 사람만 계약에 합당하다는 것 때문에 의인이라 여겨서 그 사람만 천국 가는 겁니다. 우리가 고집 부린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넣어주세요, 한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몸은, 이 존재는 못 들어가요. 계약서를 품고 있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계약서를 품으려면 내가 먼저 있고 계약서를 취득하는 것이 아니에요. 계약서가 먼저 우리에게 도달해서 오직 계약서에 나오는 내용만 고스란히 드러내기 위해서 그 계약서를 덮고 있는 모든 훼방되고 방해되는 것을 삭제하는 작업을 계약서의 객관성 경향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계약서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딜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해? 가려? 그거 다 지워버려. delete, 삭제해 버려.” 삭제해버리는 거예요. 삭제하면서 뭐가 날라 가야 되느냐 하면, 바로 ‘나라는 존재는 있는 게 아니다. 없다.’ 나는 있다, 는 그것도 날라 가서 나는 없다, 가 되어버려야 돼요. 내가 여기 없다는 겁니다.

미친 거 아니에요? 내가 여기 있는데 없다니. 내가 여기 있는데 없다고 했을 때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출애굽기 32장과 34장을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32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 만났습니다. 다른 백성은 못 만났어요. 하나님 만나고 빈 손으로오지 않았습니다. 시내산에서. 계약서를 들고 온 거예요.

15, 16절에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 오는데 증거의 두 판이 그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편 저편에 글자가 있으니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두 돌판 십계명이 적혀 있는 계약서 계약서를 들고 왔는데 산 아래 가까이 왔는데 소리가 들리는데 무슨 소리냐 하면, 애굽에서 우상을 섬기던 그 소리가 들렸어요.

우상파티를 열었다는 말이지요. 그럴 때 모세가 뭘 했느냐 하면 들고 있던 계약서를 깨버렸습니다. 18, 19절에 “모세가 가로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나의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 진에 가까이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을 보고 대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들고 있는 계약서를 깨버렸으니까 들고 있는 계약서가 온전한 계약서는 없어요. 계약서 없는데 저 산 밑에 사람들은 있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계약서가 인간보다 먼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인간보다 우선되기 때문에. 그래서 계약서가 깨지면 계약서는 없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 쪽에서 없는데 인간 쪽에서는 아모르파티를 열고 난리도 아니에요.

뭐 대단했지요. 축제를 즐겼지요. 축제를 즐기니까 그 사람들이 같이 춤을 추고 우상을 섬길 때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고 둘이 손잡고 춤추자.’ 이게 충분히 객관적으로 보장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계약서가 없는 입장에서 ‘계약서 없음’이 되면 이쪽에 있는 것은 전부 다 없음이 되는 거예요.

출애굽기 34장 1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그러니까 있던 계약서가 인간의 범죄로 없어졌어요. 없어진 계약서가 모세를 근거로 해서 다시 계약서가 만들어집니다.

그러면 ‘있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있으나 마나한 인간들은 객관적으로 ‘없음’이고 하나님 보시기에는 백성이 없어요. 백성이 없으니까 백성 떼버리고 그냥 없는 거예요. 천국 갈 백성은 없는 거예요. 계약대로 된 사람은 없는 겁니다. 숫자는 많지만 여전히 없는 거예요.

그런데 깨진 계약서를 대체해서 새로운 계약서를 하나님께서 모세보고 만들라 할 때는 계약서가 있으면 이제는 없던 인간들 중에서 이제는 이 계약서와 만남이 되는 사람한테는 드디어 없음에서 있음이 되는 가능성이 높아지기 시작합니다. 계약서에 맞는.

이스라엘백성이 다른 민족과 다른 특수성은, 다른 민족은 자기를 위한 신을 그냥 상상해서 믿으면 돼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객관성이 있습니다. 모세가 직접 독대했어요. 청와대에 대통령이 있는데, 대통령 지금 휴가 갔을 걸, 지금 근무 안 할걸, 청와대 대통령 지금 미국 순방 중일 걸, 청와대에 대통령 지금 있다는 소리 못 들었는데, 그런 식으로 열사람이 있다가 지금 청와대에 대통령이 있는지 없는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칩시다.

제일 좋은 방법은 객관성이에요. 그 중 한사람이 “우리가 이렇게 논쟁할 것이 아니고 내가 가서 청와대 한 번 보고 올게. 올 때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는 객관성을 양팔에 쥐고 올게.”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불러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그 객관성인 그 계약서를 양쪽에 끼고 왔다 이 말이지요.

왔는데 그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은 생각도 안하고, 청와대 대통령 빼놓고 자기들 자체 내에서 대통령 만들어서 자기들끼리의 대통령하고 파티를 열고 있으니까 이 계약서는 소용이 없는 거예요. 모세는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없다. 하나님의 백성은 없다. 아무도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아무도 없는데 “얘들아, 나 여기 있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먼저 계약서부터, 없는 계약서가 만들어지는 것부터가 이스라엘 백성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뭐냐? 이스라엘이 초기조건이에요. 초기조건,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천국 갈 때 뭐가 필요합니까?

계약서만 있으면 그 사람이 이 땅에서 어떤 직업으로 뭘 먹고 어떻게 살았는지 상관하지 않고 계약서보고 그냥 들어가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실 때 양쪽에 누가 있었느냐 하면 강도가 있었어요. 세상적으로 저주받아 지옥 갈 사람이라고 지목당한 그 강도에 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네가 오늘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여러분, 강도와 낙원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살인강도질을 해서 한 집안을 거덜 낸 흉악범과 정결하고 깨끗하고 순수하고 순결로 소문난 천국과 이게 매치가 된다고 여러분이 생각하십니까? 세리와 창녀가 천국 가는 것이 매치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버지의 돈 기생파티 해서 다 날리고 온 그 탕자와 천국이 매치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회사 다니면서 회계담당직원이 되어서는 회사 돈 횡령해서 자기수입으로 빼돌린 그 불의한 직원 불의한 김 대리가 누가복음 16장에 나오지요. 그 불의한 김 대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으로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우리는, 기생과 창녀와 도둑놈과 강도가 천국 갈 사람이라는 것을 왜 우리는 못 보느냐 하면, 내가 여기 존재하고 있다 있다는, 여기서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나름대로 내 인생을 살아왔던 이 경향성이 나의 판단을 흐리게 만든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있음 그 자체를 자랑거리로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의 이 자랑거리를 궁지에 몰아넣지요. 궁지에 몰아넣는데 어디까지 궁지에 몰아넣느냐 하면, 계약서 나올 때까지 궁지에 몰아넣어요.

“주님, 주를 위해서 헌금을 했습니다.” “그거 말고.” “주를 위해서 제가 전도를 했습니다.” “그거 말고.” “제가 교회를 열군데 세웠습니다.” “어허, 그거 말고.” “제가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거 말고.” “제가 목사님을 섬겼습니다.” “그거 말고.” “내가 처자식을 잘 키웠습니다.” “그거 말고” “그러면 뭐요?” “계약서 내놔라. 계약서.”

네가 공부 잘하고, 돈 잘 벌고, 네가 열심히 남을 도와준 것은 그것은 뭐냐 하면, 일단 내가 여기 존재하고 난 뒤에 일어난 일이거든요. 존재하는 내가 착실하고 조심스럽게 자기관리 잘해가면서, 남한테 욕 얻어먹을 소리 안 들어가면서, ‘이 정도 하면 나의 가치와 내 윤리도덕이 남들 앞에 반짝반짝 빛이 날 것이다. 왜 내가 그렇게 관리해왔으니까.’ 하는 그 모든 내놓을 만한 것들은 그 배후에 뭐가 있느냐?

어쨌든저째든 “나 여기 있잖아요. 나 여기 있습니다.”를 대변해주는 거예요. “나 있는데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잘난 존재로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내가 이렇게 자랑거리가 될 줄을 몰랐습니다.”라고 내밀 때 그것은 “네가 여기 있고 네가 잘났다는 것은 계약서에 없어.” 계약서에 그 이야기는 없다고요.

계약서에 없는 것을 왜 교인들이 천국 간다고 속아서 그런 것을 들이밉니까? 계약서에 그런 것이 없는데요. 교회 몇 년 나왔어, 십일조 했어 안했어, 몇 명 전도했어, 너 집사야 목사야, 이웃구제 했어 안했어, 그런 것은 계약서에 없어요. 계약서에 그런 것이 없으면 계약서에 뭐가 있느냐? 계약서에 있는 것을 제가 아주 친절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호세아 오늘 본문 13장 16절에 나옵니다. “사마리아가 그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 아이는 부숴뜨리우며 그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리우리라.” 뭐가 계약서냐 하면, 칼로 그것도 임신한 배를 칼로 자르는 것이 계약서에 있어요. 이것은 사무라이도 아니고 할복자살하는 것도 아니고.

여성에게는 임신이 자존감이에요. ‘나 여성답잖아. 나 여성으로서 제할 일 잘하고 있지? 내 배 튀어나온 것 봐. 스타일은 구겼지만 나는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일을 하고 있어.’라고 했을 때 옆에서 누가 아이 밴 그 배를 좍 갈라서 애도 죽고 엄마 죽여보세요. 그 여성은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내 인생 실패했다고 느끼지요.

그 실패가 하나님의 복입니다. 살아 있는 내가 그냥 살아 있으면 안돼요. 계약서를 가려버려요. 계약서를 가리는 것은 뭐냐? 궁극적으로 내가 여기 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를 자랑으로 여기는 것, 그 자체를 의미 있게 여기는 것, 그 자체를 가치 있게 여기는 것, 그것을, 어떻게 내가 내배를 가릅니까?

주께서는 계약서대로 내 자존감이라는 그것을 무참하게, 그것도 무자비하게 가르실 때 그게 바로 하나님의 축복된 기적입니다. 기적이라 하는 것은, 내가 못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나를 없애주는 것이 기적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없애주는 것. 이 말에 동의할 사람 아무도 없는 것을 내가 알아요.

마태복음 10장 20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19절부터 보면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열두 제자를 일부러 악한 사람들 속에, 이리 속에 몰아넣습니다. 왜? 인간이라면 자기존재의 가치를 보존할 경향성을 띄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위험한 곳에 내 목숨이 위태로운 곳이 안 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계약서를 찾기 위해서 일부러 제자들을 거기에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으면 진짜 예수님의 사도, 제자라는 이름으로 악한 사람들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거예요. 몰아넣을 때 더 이상 갈 데도 없을 만큼 궁지에 몰렸기 때문에 사도들은 본인이 본인을 지킬 수 있는 역량은 완전히 소실되는 겁니다. 없는 겁니다. 그동안 그 나이까지 열심히 산 것은 대한민국 지키려고, 식구들, 자식 지키려고 한 것이 아니에요.

최우선은 뭐냐? 영순위는 내가 나를 지키는 거예요. 모든 인류의공통점은 뭐냐 하면, 내 인생은 나의 것이에요. 내가 아니면 누가 내 인생을 책임질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와 만났다 하는데 만난 적은 있어요. 만난 적은 있지만 만났다는 그것은 뭐냐? 그 상대방 앞에서 내가 자존적이고 자립적인 존재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만나는 거예요. 그게 사람들의 만남입니다. 자기 자랑하려고 만나는 거예요.

이 세상에 자기 눈으로 보게 되면 자기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의 저질 행동을 즐거이 찾습니다. 뉴스나 신문 이런 것을 통해서 개차반같이 살아가는 인간들을 발견해요. 그런 게 또 뉴스거리가 되고요.

‘저런 인간은 죽어야 돼. 북한에서 내려와서 남한에서 쌀밥에 소고기국 끓여주면 좋다고 가만이나 있지 무슨 성폭행을 해서, 그것도 걸려서 강화도에 가서, 헤엄도 잘 쳐요, 북한까지 3킬로나 헤엄쳐서 건너갔다? 잘됐다. 이런 인간은 북한에서 잘 관리해라. 이왕 가는 것 그냥 가지 말고 코로나나 잔뜩 짊어지고 개성에나 가라.’ 할 때 이건 의미가 뭐냐?

“세상에 저런 악한 인간이 있어?”라고 하거든요. 예수님의 의견은 달라요. 악한 일만 악한 일이 아니라 세상 모든 일이 악하고 음란한 일이에요. 이 세상 모든 일이. 예레미야 17장 9절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만물, 박테리아 식구까지 포함해서 코로나까지 이 모든 것을 포함해서 그 중에서 가장 심하게 더럽고, 추저분하고, 더럽고, 더럽고, 역겨운 것은 인간이라는 겁니다. 인간! 인간이 가장 더럽다는 거예요. 따라서 인간들의 경향성은 이 더러운 자기 자신을 좋게 위장하는 쪽으로 행동도 하고 말을 해요.

“나는 더럽지만 그 가운데서 얼추 괜찮은 쪽으로 분류시켜 줘.” 이런 식이라는 말이지요. 교회까지 다니니까, 말씀까지 들으니까 괜찮아 보이거든요. 여러분, 목사하고 사기꾼과 두 사람이 있을 때 사회적 통념상 누가 더 나쁘고 누가 더 선하다고 보시는 겁니까? 사회통념상.

이게 성경에 나옵니다. 바리새인과 사기꾼 둘이 있는데 바리새인이 먼저 시비 걸지요.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다행스럽게도 저 지옥 가는 사기꾼같이 되지 않은 나를 이렇게 만들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나는 저 사람과 같이 아니하니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어요.

여기에 심판주 되시는 예수님께서 순회재판을 엽니다. 간이재판을 열어서 판결을 내립니다. 그런데 저 사기꾼은 “주님이여, 제가 할 수 있는 역량은 사기 치는 그 방식이 내가 사는 방식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악한 일로 인하여 지금껏 나는 살아왔습니다. 따라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악이 나를 우세했고 나를 지배했습니다. 그래서 감히 선하신 하나님 앞에서 재판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재판받지 않아도 결론은 났습니다.” 하고 엎드려 있으니까 예수님께서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을 결정짓습니다.

“저 목사는 지옥가고 저 사기꾼은 천국가라. 누구든지 자기자신을 파악하는 사람은 천국가고 자기자신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은 지옥간다.” 그 세리는 요새말로 사기꾼이지요.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뿜어내는 죄를 내가 이겨낼 수가 없다는 사실을 그 사람은 알고 있는 거예요. 이게 객관성이에요. 나를 보는 객관성이 이것 밖에 없어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객관성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잘나고 성실하고 최선을 다해서 바르게 살고 싶어도 이 사회가 나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여, 주님의 계약서대로 저에게 심판해주시고 제 임신한 배를 차마 나는 못 가르니까 주께서 갈라주옵소서. 그래서 저로 하여금 내가 애초부터 실패자인 것을, 실패인생인 것을 주님께서 그렇게 선언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그게 주님의 계약서잖아요.”

그러니까 계약서를 가로막고 있었던 가짜들, 고기 먹을 때 가시, 또는 소고기의 살점을 뼈가 나오도록 발라내듯이 뼈가 보일 때까지 뼈를 가렸던 모든 살점들을 다 뜯어내는 그 작업을 하나님의 계약서대로 해 가시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기적이고 축복입니까?

우리는 그동안 기적을 어떻게 생각하고 축복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잘나고 잘났는데 힘이 모자라니까 “주여, 내 힘으로만은 더 잘난 존재가 못되니까 진짜로 하나님이 날 도와주셔서 대단한 잘난 존재로 내가 으리으리번쩍번쩍 세상에 나가서 나를 이런 존재다, 하고 자랑해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나도 좋고 하나님도 좋고, 그런 식으로 삽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기껏 그것밖에 안되잖아요.

여러분 빼고, 여러분은 빼고요. 결국 기적이라는 것, 인간들이 상정하는, 지옥 갈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적, 주님사랑이라 하는 것은 핑계고요, 자기자랑입니다. 내 자랑이에요. “나는 절대로 가난하면 안 되고 나는 절대로 아프면 안 돼. 왜? 잘났으니까.” “왜 잘났는데?” “내가 잘났다면 잘난 거지 너에게 물어볼 필요 없어. 내가 잘난 거야.”

이스라엘이 이렇게 앗수르 나라에 무자비하게 당합니다. 호세아 13장 16절,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 아이는 부숴뜨리우며 그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리우리라.” 자비가 없어요. 무자비하게 잔혹은 처벌을 받습니다. 이게 계약대로에요. 이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객관성입니다. 엉뚱한 객관성 찾지 마세요. 엉뚱한 하나님 찾지 마세요.

우리가 나의 성공을 위하여 하나님을 믿을 때 이미 그것은 조작된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그 조작된 하나님을 빌미로 자기 자신을 조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성도에게 혹독하게 하는가? 이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계약이라는 것은 한번 깨지고 난 뒤에 다시 만들어져야 이게 계약이 돼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죄에 관한 심판은 예수님 몸에 집결돼요. 그게 아버지의 뜻이에요. 우리가 안일하게 생각하는 아버지의 뜻이라 하는 것은 좋은 것만 주고 나쁜 것은 피해가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을 몰라서 그런 엉터리 같은 해석을 하는 것인데 진짜 해석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가 진짜 객관성이에요.

아버지가 줄 수 있는 모든 저주는 예수님 앞에 집결되었다니까요. 그게 바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죄 때문에 버리시는 것을 내가 수긍한다는 뜻이에요. 그 고백이 이제는 우리 고백이 되어야 돼요.

“하나님, 우리는 죄 중에서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죄 중에서 태어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정당한 처벌은 처벌대로 내리실 때 참으로 하나님의 객관성은 죄에 대해서 봐주는 것 없음, 하나님께서 그대로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지옥적인 처벌을 내리시는 그것이 바로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주옵소서. 나는 없어져도 하나님만 계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나는 죽어도 하나님의 약속만 있다면 그것으로 오케이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진짜 하나님의 모습이에요. 요한복음 1장에는 이렇게 되어 있지요. 사람보다 먼저 있었던 것이 말씀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무슨 뜻일까요? 아직 아무것도 생기기 전에 말씀이 먼저 있었다. 그렇다면 너희는 말씀의 객관성을 위해서 너희들이 만들어졌지 네 잘남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나 하나님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어떻게 하느냐? 그 계약이 줄 수 있는 모든 막다른 상황을 우리에게 덮치게 합니다. 그 중에 한사람의 예가 욥기 1장 21절에 나옵니다. 뭐라고 고백하는지 이 고백을 들으시고 여러분 마음속에 어떤 것들이 들었는지 스스로 물어보세요.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줄 때 찬송이 아니라 준 것을 도로 뺏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는 객관성이 드러나는데 내가 거기에 증거로서 쓰인다면 그보다 더 영광스러운 경우는 없습니다, 하는 고백이에요. 준 것을 빼앗는 것.

우리가 목숨이 있잖아요. 목숨은 누가 줬습니까? 주님이 줬지요. 주님이 준 그것을 빼앗으면서 내가 최초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약이 최초였다는 그것을 우리는 증거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아까 한 대로 초기조건이라 했지요. 하나님의 계약에 의해서 우리가 여기서 태어났다는 그 초기조건이 과연 우리 안에 들어 있는지를 끝까지 닦달 내시면서 궁지로 몰아넣어서 우리를 밀어붙이는 겁니다.

“아직도 네 성공을 위해서 기도하느냐? 왜 내가 찾는 것을 못 내놓고 자꾸 그 중간에 너의 성공을 끼워 넣느냐?” 그 말이지요. “비켜라. 그런 것 꼴도 보기 싫다.” 하나님이 성공해야지 내가 왜 성공해야 됩니까? 내가 뭔데, 내가 왜 인생 성공해야 됩니까? 나로 향한 주님의 계약서가 성공해야지, 계약의 내용이 성공해야지 자격도 없는 내가 왜 끼어듭니까? 그건 마귀 짓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계약서가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우리는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는가? 계약서가 들어왔느냐 안 들어왔느냐를 뭘 로 판정할까요? 그것은 바로 내 안에 나의 죽음이 들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약서에 보면 마지막에 십자가로 계약이 다 완료가 돼요. 내 살과 내피를 먹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완료가 되면 그 십자가는 예수님과 더불어 죽었던 나의 죽음도 예수님의 죽음 안에 내가 이미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죽은 자가 성령을 통해서 우리한테 택배로 선물로 안에 집어넣게 됩니다. 탑재가 돼요. 장착이 되는 겁니다. 하나의 칩처럼. 나의 죽음이.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나는 이미 죽었다. ‘이미 죽었다’가 탑재되어 있어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나는 죽었지만 누구는 살아 있느냐 하면, 나는 죽고 그 계약서가 살아 있지요. 그 계약서가 누구냐? 예수님이 살아 있지요. 따라서 내가 돌솥 밥 먹고 반찬 하나 집어먹는 그것도 주께서 하신 일이 되는 겁니다.

주께서 나를 억누르는데 어떻게 억누르느냐? 백인경관이 흑인 도둑놈의 모가지를 밟듯이 아주 밟아버리면서 예수님이 일을 하셔요. 예수님이 우리한테 부탁합니다. “너는 계속 임신한 배 갈린 여자로 살아라. 너는 실패자가 되어라. 너의 성공은 아예 없음을 네가 수긍해라. 내가 성공해야 돼. 네가 비집고 고개 내밀고 나오지 마. 내가 두더지 게임하듯 칠 테니까. 너는 존재하지만 이미 죽은 자야.”

죽은 자기 때문에 주님의 살아있음이 가리워지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나의 성공이 드러나게 되면 주님은 있으나마나 에요. 세상 사람하고 똑같아요. 자기자랑하기 바빠요. 이스라엘에 있어서 하나님께 책망 받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 계약과 이스라엘의 뜻이 달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초기조건이 없었던 거지요.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 이런 것을 왜 줬는지 감을 못 잡고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살고 싶었던 겁니다. 다시 말해서 신약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혹시 누가간음한 사람 없는가, 도둑질한 사람 없는가, 사기 치는 사람 없는가, 그런 사람을 찍어서 골라내서 상대적으로 자기가 하늘나라에 가깝다는 것을 증명하는 그 재미로 살았어요.

신문보고 방송보고 “저 인간은 죽여야 돼. 저 인간은 15년 형이야.” 자기가 판사 다 되어가지고 “저거 밟아야 돼. 저건 3대를 멸해야 돼.”라고 남과 비교해서 비평하는 재미로, 상대적으로 자기가 우위에 섰다는 그것을 즐거워하는, 내 존재에 대해서 저들과 같지 않음에 대해서 자기 존재에 대해서 기쁨을 만끽하는 재미로 살았던 사람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결사적으로 마음을 합쳐서 누구를 죽였는가? 하나님을 죽였어요. 하나님의 계약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였으니 예수님이 없는 거예요. 없으니까 그들도 없는 거예요. 아까 했지요. 모세의 돌판, 계약서가 깨지니까 그들은 죽은 거예요. 자기들은 죽었다는 것도 모르고 멀쩡하게 살았다고 산사람들끼리 모여서 정치하고, 민주당이니 미래통합당이니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다 죽은 인간들인데.

그 사람들 하는 것이 뭡니까? 남을 차는데서 내가 더 살아가는 어떤 에너지를 얻으려고 해요. 남보고 죽어라, 죽어라, 하는 그 말이 뭐냐 하면, 나는 살아야 돼, 살아야 돼, 하는 나를 유일한 객관성으로 보고 이 객관성을 돈독히 하는 그 힘을 얻기 위해서 상대방을 비난하고 치는 겁니다.

뉴튼이 말한 힘의 작용과 반작용법칙에 의해서 반발작용으로 도리어 내가 힘을 축적하는 수법으로서 상대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식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우리, 그러나 그것조차 예수님보기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하나의 모습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십자가권한으로 심판하는 인간을 없애는 일입니다. 나한테 덮치는 모든 일은 나를 없애는 일이에요. 나를 살려주는 일이 아니고 나를 없애주는 일이에요. 내가 없어져야 나보다 선행하는 계약의 조건이 내 안에 계속해서 드러날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내가 객관의 시작점이 아니라 초기조건이 되는 것은, 모든 것은 하나님에 합당해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 초기조건이고 그 초기조건이 우리 안에 성령을 통해서 장착돼야 됩니다.

그러면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나를 실패하게 해서 내 살점을 발라내는 일에 대해서 성공작입니다. 주님 일 잘하고 계신 거예요. 다만 우리가 내 인생의 실패를 주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성령의 안목이 있으면 그 성령의 안목이 아직도 우리 안에 살아 있는 하나님의 계약서입니다. 그 계약서 들이밀고 천국 가시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전혀 세상과 달랐던 주님 가신 길, 세상 사람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사도들이 가는 길, 도리어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 받았던 선지자의길, 그 좁은 길, 저희들이 성령을 통해서 인도받게 해주옵소서. 실패하는 것이 즐겁고 실패하는 것이 도리어 축복인 것을 알게 되는 인식의 발상의 전환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이전글 다음글 ▷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986-0172, 010-3511-0172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copyright ⓒ 우리교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