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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5 20:39:39 조회 : 188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200115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호세아 6:6)

음성       동영상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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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20-01-15 21:23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2020년 1월 15일                본문 말씀: 호세아 6:5-6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사람은 결국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만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한결같이 제시하시는 바는 성경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 해당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니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니요’란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거절하시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이 이 땅에 가득차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안다고 여기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시도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아니요’에 해당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이 ‘아니요’ 상황 안에 있다가 알라지는 겁니다. 즉 인간은 그 누구도 ‘아니요’ 상황 밖으로 나가서 관측자 노릇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특히 이스라엘에게 있어 번제와 제사는 생활의 중심에서 필수적인 일이 됩니다. 그들은 번제와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연결이 된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번제와 제사가 빠지면 그야말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도 마땅하다는 겁니다. 이 말은 곧 ‘번제와 제사’를 정기적으로 드리기에 여전히 하나님과 정상적인 교류가 유지된다고 알고들 있습니다.

즉 그들은 ‘아니요’를 모릅니다. 이스라엘이 그 어떤 경우에도 부정될 수 없는 ‘번제와 제사’가 정작 하나님에 의해서 거부당합니다. “나는 번제와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안다고 여기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냥 ‘인애(사랑)’ 아니라 ‘제사가 아님을 아는 사랑’입니다.

이는 인간으로서 자기가 드리는 제사와 번제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도 아니요 받으시는 것이 아님을 아는 상태, 그 안에서 인애를 보고 있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제사와 번제를 안 받으시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은 자기를 표현하면 ‘나는〜행했다’는 식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뭘 하기 전에 이미 인간들에게 하나님께 주신 게 있습니다. 이 먼저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인애에 대해서 그 어떤 자도 그것을 대신할만한 행위를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니요”라고 하신 것은 인간 세계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이는 곧 평소에 인간들이 가는 길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만날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인간들이 총체적으로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겁니다. 사람이 자신의 행함을 부각시키는 이유는, 자신의 멀쩡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그 어떤 경우라도 못버리겠다는 겁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께 매달리면 “내 가치 돌리도”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무너지기 싫은 나, 내가 무의미하게 되는 내가 되는 것을 본능상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번제 행위와 제사 행위를 통해서 자신들이 어느 정도까지 대단한 일을 벌릴 수 있는가를 측정하려 합니다. 그러나 번제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 해체요 인간 조각냄’입니다. 레위기 4:-7에 보면,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문 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그는 또 그 번제 희생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단 위에 불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치 실험실의 개구리를 해부해서 유리판 위에 일단 진열해 놓은 것 같습니다.

이는 제물의 내부를 알게 하십니다. 멀쩡하게 통으로 살아있는 제물이 아니라 갈기갈기 찢어놓은 그 찢힘 속에서 진정 제물 속에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요 인애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행함에 주목하고 그 행함의 실적에 하나님께서 주목하고 관심가져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이미 주어진 바가 있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친히 산 제물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있어 완료된 번제와 제사가 담겨 있는 겁니다. 히브리서 9:11-12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의 주기적 반복성과 예수님의 단회성이 상호 대비가 되는 대목입니다. 인간들은 뭐가 되었던 자기가 한 것을 잊을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의미 있다는 것은 되풀이해서 자신의 가치있음을 하나님 앞에서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다른 하나님’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번제의 제물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바꿔치기’를 통해서 ‘온전한 번제와 제사’를 사랑 완성으로 이해되기를 원하십니다. 온전한 번제란 먼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겪은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대규모 물 홍수속에서, ‘자력으로 구원을 타고 무서운 새 땅에 안착’되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단지 이미 구원됨 자체가 자기에게 일방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압니다. 창세기 4장에서 아벨과 가인, 두 사람이 제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둘 다 제사를 받은 것이 아니라 어느 한쪽만이 그 제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십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죽음을 경험하는 조건 하에 미리 제사드리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행함에 의해서 받으시는 제물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 가 양 옆으로 두 강도가 달렸습니다. 누가봐도 사형만한 사람들입니다. 한 강도, 즉 지옥간 강도가 예수님과 거래와 흔정에 나섭니다. 예수님을 이용하겠다는 정작 더 중요한 자기 자신을 어떤 수를 써서라도 구원받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다른 강도는, 자기 이익을 챙기는 강도를 나무라면서, 자신들은 죽어 마땅한 일을 한 것이 맞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둘 사이에 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진정 자신의 처지마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가 곧 천국에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이 땅에서 그분은 ‘움직이는 죽음’으로 활동하시는 분인 것을 아는 것을 두고 말합니다. 번제와 제사는 주님이 이 세상으로 오시는 자체적인 경로입니다. 성도는 이 경로에 본인이 드러선 것을 말합니다. 죽어 마땅함이 곧 시편 51:16에 나오는 ‘상한 심령’과 통하는 사이입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이로서 진정한 인애 곧 사랑이란, 예수님께서 세상 지를 지고가는 어린양임을 드러내기 위해 모든 양상을 만들어냄을 아는 것입니다. 이때에 이 사랑으로 성도는 감사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이 세상이 십자가 아래의 강도의 세계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20-01-16 21:32 
24강-호 6장 6절(하나님이 원하시는 것)2001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6장 6절입니다. 구약성경 1261페이지입니다.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성경에서 뭐가 아니오, 라고 하는 그것은 우리가 잘못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먼저 언급하시는 말씀입니다. 인생을 잘못 살아왔다는 말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길이 없다는 말씀이에요. 인간이 정상적으로 가고 있다면 주님께서 ‘아니오’라는 말을 구태여 하실 이유가 없거든요.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딱 보기에 너희들의 길은 없어. 막혀 있어. 그쪽은 아니거든.” 그런 뉘앙스가 그 ‘아니오’라는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걱정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고요. 주님께서 ‘아니오’라고 말씀하신 것은 막다른 길로 갈 수밖에 없는 너희들, 그 ‘아니오’ 길, 막다른 길로 갈 수밖에 없을 때 결국 너희가 가는 길에 덩치 큰 어떤 건장한 자이언트, 그분을 만약에 만나게 될 때 그 마지막 인생길에 만나는 그분도 역시 오늘 분문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내가 아니라고 했잖아.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니라고 했잖아.”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호세아 6장 6절 말씀을 대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죽게 되면 우리를 심판하실 분이 하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우리가 행운이죠, 감사하게도 일찍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인생 끝까지 살아봐야 알지”라고 보통 하는데 안 살아봐도 성경 말씀이 우리 앞에 탁 다가와서 이 말씀을, ‘아니오’라는 길을 내가 구태여 이야기 할 정도로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거지요. 미리 우리에게 통보해주는 겁니다.

‘아니오’라고 할 때는 우리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아시면 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을 주님께 감사해야 돼요. 그러면 성경에서 ‘아니오’라고 한다면 ‘아니오’ 아닌 것은 뭐냐? 하나님께서 ‘아니오’라고 하시면서 제시한 그 단어가 뭐냐? 본문 6장 6절에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여기 ‘아니오’에 해당되는 것이 제사와 번제입니다. 이게 사람들에게는 납득이 되지 않는 거예요. 구약성경에 제사와 번제, 하나님과 인간의 구약 이스라엘의 만남에서 핵심되는 요건이지요. 제사와 번제에다 신약에 와서 하나 더 보탠다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도 안받으시고, 번제도 안받으시고, 예배도 안받으시는 거예요.

할 게 없지요. 하나님은 예배를 기쁘시게 받으신다, 해가지고 각 교회마다 예배에 치중하고 충실하고 얼마나 은혜를 유발하는 예배를 위해서 모든 아이디어를 다 끄집어내거든요. 우리교회 같은 경우에는 이 뒤가 커튼으로 되어 있지만 어떤 교회는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돼 있어요. 몇 억이 넘는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했습니다.

그 파이프오르간 왜 설치했습니까? 예배를 아주 웅장하게 드리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지요. 왜 예배를 웅장하게 하는 것일까요? 예배 웅장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고 예배야 말로 인간이 하나님과 교류하고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매개가 되기에, 만남의장소가 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에 제가 쓴 책에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주님께서 일요일 오전 11시부터 12시까지 만나시는가, 10시 반은 약속시간이 아니라고 안만나 주시는가, 하는 그런 내용이 책에 있어요. <뒤에서 본 한국교회>라는 책에 나와요.

보통 예배시간에 교회에서 날리는 멘트가 “하나님은 성전에 계시니 조용할찌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요새 말로 번역하면 “휴대폰 꺼라.” 그 말이지요. 공연시간 다 되었으니 휴대폰은 끄라는 말이에요. 일종의 쇼지요. 쇼는 보기 위한 거지요. 쇼보고 구원받고. 편하기는 참 편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와 번제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아주 분명합니다.

번제와 제사와 예배 십일조내기 기도하기 모든 것을 한 항으로 묶어 버리면 “나는 지금 ……을 합니다.” 이렇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나는 ……을 합니다.”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인간이라는 나는 뭘 합니다.” 안받는다는 겁니다. 나는 그걸 원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뭐냐? 이미 주어진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미 주어진 것.

내가 뭘 하게 되면 내가 함으로서 새삼스럽게 생기는 것이 있다고 여기고 인간은 뭘 해요. 기도하기 전에는 기도가 없을 것이고, 제사하기 전에는 제사가 없을 것이고, 번제하기 전에는 번제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번제하고 제사하고 예배드리는 주체가 되고 주인공이 된다면 “네가 나에게 예배를 드렸구나. 번제를 드렸구나. 제사를 드렸구나. 너는 합격이야.” 이러한 이야기를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오늘본문에서는 너희들이 잘못된 길로 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겁니다. ‘…… 아니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뜻이고 그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현상들을 보니까, 하나님은 번제를 원할 것이다, 예배를 원할 것이다, 제사를 원할 것이다, 더 포괄해서 ‘나는 ……을 하는 것을 주께서 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게 바로 너희들이 내가 말한 ‘아니오’에 해당되는 잘못된 길입니다.

실컷 해봐야 덩치 큰 천사가 와서 “그거 내가 아니라고 했잖아.” 이미 인생 다 끝났는데요? 기회는 더 이상 없는데요. 평생 동안 ‘아니오’라고 했는데, 평생 동안 너는 내가 ‘아니오’라고 한 것은 듣지도 않고 이만큼 했으니까 천국 문을 열어주소서,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결국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나님께서 ‘아니오’라는 항목을 제시하고, 그리고 뭐라고 제시하는 것은 인간들이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씀을 주신 것은 인간들이 아는 하나님 말고, 인간들이 생각하는 ‘내가 무엇을 행함으로만 만날 수 있는 하나님’ 말고 내가 행함으로 말미암아, 전에 내가 그렇게 자꾸 뭘 하고자 함으로 말미암아 전혀 나에게 들어올 기회조차 없었던 다른 하나님으로 교체해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 바꿔치기에요.

그러면 여기서 제가 이렇게 하게 되면 많은 사람이 의문을 가질 거예요. ‘그럴 것 같으면 애초부터 제사와 번제를 하지 말아야지 왜 옛날에는 제사와 번제에 대해서 기뻐한다고 명령을 하시고 그런 말씀은 애초에 왜 있느냐’라는 생각이 들 겁니다. 번제라는 말이 처음 나오는 것은 창세기 8장에 나옵니다. 20절에 노아홍수가 끝나고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단에 드렸더니 어떻게 되었다? 21절에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그러면 이 본문을 보면서 사람들은 말하기를 “거봐. 노아가 번제를 드려서 하나님이 흠향했으니까 오늘날도 우리가 번제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흠향해서 우리에게 복을 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제시한 공식이고 원칙인데 왜 이 본문에서는 ‘나는 번제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는가?” 말이지요.

원하지 않을 것 같으면 애초부터 노아의 번제도 안받으시고 “노아야, 내가 언제 번제를 원했느냐?” 이렇게 나오셔야 되는데 노아의 번제는 받으시고 지금에 와서 번제를 안 받으신다고 한다면 우리하고 노아와의 차이점이 뭐냐, 그렇게 나오겠지요. 그것은 노아가 죽음과 더불어 있었다는 겁니다. 죽음과 더불어 보냈다는 거예요.

자기가 애초부터 ‘나의 어떤 행위도 내가 사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해 줄거야.’라는 생각을 가진 노아가 노아홍수 속에서, 방주 안에 있으면서 ‘내가 남보다 더 뛰어나고 바르게 뭔가를 행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저들과 같이 죽어 마땅함’을 몸소 목격하고 경험한 사람이에요.

조금 어려워지지요.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이 제사를 드리는데 아벨이 제사 드렸으니 아벨은 복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아벨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지 아니함으로 이 땅의 형에게 맞아죽도록 한 것이 아니고요, ‘아니오’가 또 나오지요, 제사를 드려서, 그래서 ‘응답이 되었기 때문에 내가 친히 너를 보호해주리라.’ 해서 형에게 미움을 안산 것이 아니고 오히려 거꾸로에요. 하나님께서 응답을 한 그 이유로 인하여 아벨이 졸지에 형에게 맞아죽습니다.

이 말은 ‘아벨이 제사를 드려서 죽었다.’라고 순서를, ‘아벨이 먼저 제사를 드리고 형에게 맞아 죽었다.’ 이렇게 봐도 되는데 정답은 뭐냐? 아벨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형에게 맞아죽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치중해서, 편애해서 아벨의 제사만 받아주신 거예요. 제사를 받은 자가 제사를 받아주지 않은, 가인이죠, 제사를 받아주지 않은 자에 의해서 죽게 되는 요소가 그 번제 안에 담겨 있고, 제사 안에 담겨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가 더 어렵게 되어버렸어요. 번제와 제사라 하는 것은, ‘이것 드리면 복 받아서 더 산다’가 아니라 ‘인간은 왜 애초부터 죽어 마땅하냐’ 하는 사실을 주께서는 번제와 제사를 통해서 확인시켜 주겠다는 거예요. 번제와 제사를 드릴 때 번제와 제사를 드리는 인간 당사자가 그 가치가 더 높아지고 싶어해요. ‘나는 지금 번제를, 나는 지금 제사를 드린다.’ 그런데 막상 그런 말을 내뱉기에는 자기가 드린 번제와 제사가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거예요.

죽음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할 잽이냐, 그 말입니다. 양과 소와 염소가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 진정, 정말 제사와 번제를 드린자는 노아 홍수가운데서 살아남은 노아처럼, ‘내가 저 제물과 같이 죽어 마땅한데 웬 은혜인지 이렇게 살려주십니까?’라는 것, ‘내가 번제 드렸습니다.’가 아니라 ‘번제 드리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께서는 나를 어떤 경우라도 살려주는 요소를 왜 저에게 주십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드리기 전에 먼저 주신 것이 뭐냐? 너는 죽어도 나와 함께 살 것이라는 요소가 먼저 제사 드리면서 확인되는 거예요.

그게 뭐냐? 인애요 그게 자비가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돼요. 레위기 1장 4절에서 9절에 보면 번제가 나옵니다. 4, 5절을 보면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찌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이 내용은 뭐냐 하면, ‘제물이 어떻게 해체되느냐’ 에요. 피는 피대로 고기는 고기대로. 아주 작살나는 거지요. 가죽은 가죽대로 각을 뜨고, 고기는 단위에서 맹렬한, 무서운 저주의 불 위에서 홀라당 다 타버리고요. 이것은 우리가 멀쩡하다고 여기는 나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분해를 시켜버리면……, 생물시간에 개구리 해부할 때 몸통은 여기에, 다리는 여기에 이렇게 늘어놓지요.

여러분이 치킨 살 때 닭 한마리 튀기라고 해놓고 진짜 닭 한 마리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하나하나 퍼즐처럼 꿰어 맞춰보잖아요. 이게 진짜 한 마리인지 날갯죽지 하나라도 없어졌는지 확인해 보세요. 그렇듯이 멀쩡한 21세기에 사는 우리를 주께서는 번제와 제사를 통해서 쪼갭니다. 쪼개시는 하나님이에요. 우리는 나를 통으로 봐서 “제가 번제드렸잖아요. 제사 드렸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를 보호해서 지켜주세요.”라고 요구하지만 나는 번제와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고 그 번제 안에 실려 있고 담겨 있는 그 인애와 자비와 사랑은 왜 못보느냐는 말이지요.

나는 인애, 사랑이지요, 사랑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그 말을 방금 제가 설명한 이 시점에서 다시 이야기 하면, “나는 사랑을 원하고 사랑을 원한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거예요. 더 심층 있게. 또 “나는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는 이 말은, “나는 네가 행한 것보다 이미 내가 너에게 번제라는 정신을 제공한, 번제의 용도로 제공한 이 하나님을 알기를 원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이 그렇게 알면 되지 이제 와서, 호세아를 보내서 심하게 책망하십니까?” 하는 것은, 인간에게 번제와 제사를 명령으로 주게 되면, 인간의 자기본성은 그래요, 뭘 하게 되면 뿌듯함을 느끼고 거기에 의미를 주는 겁니다. 그동안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었어요. 남쪽 북쪽 다 줬지요. 다 줬는데 그들이 율법대로 산다고 하면서 자기자신이 누군지를 몰라요.

내가 착실하게 예배드리고 제사하고 번제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할 줄 알고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할 줄 알았지요. 그런데 본인도 모르고 자기가 반복적으로 하게 되는 이 제사와 번제로 인하여 하나님이 좋은 것이 아니고 자기자신이, 하나님의 명을 실천에 옮기는 자기자신이 뿌듯한 거예요. 이게 자기 동정심인데요. 제사하고 번제하고 이런 것이 있을 때마다 다른 민족과 비교해서 ‘야, 우리 민족이 이렇게 대단하다’는 그 자부심, 그 자부심으로 인하여 정작 내가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하고는 점점 멀어지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반대잖아요. 뭘 행하게 되면 나는 가치 있는 인간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제사와 번제는 ‘너는 무가치하다’ 하는 것을 새삼 확인해주는 거예요. 살 가치도 없다고. 그런데 하나님이 생각하는 번제와 제사 드리는 취지하고 인간이 제사 드리는 그 결과하고 갈수록 점점 멀어지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제사와 번제를 율법대로 드림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본인이 본인도 몰랐던 뭔가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때려죽여도 나는 나의 가치를 포기 못하겠다.’ 여러분이 주무실 때 천장보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았는가? 일기 쓸 때 아침에 뭐 하고, 오전 11시에 뭘 하고, 오후 두시에 뭐하고, 이렇게 쓰겠지요. 그걸 한꺼번에 설명하는 그 바탕 되는 의식이 뭔줄 알아요? 나는 이대로 무너지기 싫다는 거예요. 나는 내 가치를 포기하기 싫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것이 왠지 싫은 거예요. 이유도 없이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자체에 대해서 내가 그걸 거부하고 싶은 거예요. 그걸 모르지요. 하루 일과를 통해서 기특하게 살았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고 ‘이 정도로 나는 고귀하다.’ 자꾸 이런 생각이 들고 ‘내가 사는 것은 살만해서 산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이야기한 그 번제와 제사의 취지와는 다르지요. 제가 번제와 제사가 양이 죽는다, 소가 죽는다고 한 들 ‘아이고 뭐 양이나 소야 번제드릴 용도니까 죽어 마땅하고 나는 그 덕에 살아야 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러면 제가 말씀을 바꿔보겠습니다. 그 죽는 소나 염소나 양이 그냥 짐승의 소나 양이 아니고 그분이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하나님이라면?

제사와 번제라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거예요. 노아가 그냥 노아가 아니고 홍수심판을 경유해야 노아가 돼요. 그래야 노아가 번제드릴 마음 자세가 된다고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타고, 율법이란 하나의 경로에요, 그 경로를 타고, 미끄럼틀이거든요, 하늘에서 내려오는 사다리라는 말이지요, 사다리에 주님께서 죽 미끄러져서 그 번제와 제사를 타고 이 땅까지 오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나는 번제보다 하나님을 알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도대체 하나님을 알기를 원한다는데 여러분이 알기를 원해서 “하나님은 뭡니까?”라고 물으면 하나님은 죽음이에요.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이 땅에서는 죽음이 활동하고 있다는 겁니다. 왜? 이 세상은 모두가 죽음의 세계인 것을 정작 죽어야 될 인간들은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죽음이에요. 하나님이라도 이 땅에 오게 되면 인간과 마찬가지로 죽습니다. 그 정도로 이 세상은 죽음의 세계에요. 그걸 분명히 보여준 것이 하나님마저 제사와 번제, 율법을 통해서 이 땅에서 참된 제사, 참된 번제로 돌아가신 겁니다. 자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가 히브리서 9장 12절에 나옵니다.

히브리서 9장 11절부터 보면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그 다음 단어가 결정적입니다.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 단회성입니다. 단회성과 반복성을 여기서 언급하거든요.

먼저 만들었던 이 세상은 안식일이 주기적으로 반복적으로 움직입니다. 이번 수련회 제 9강에서 했지요. 안식일은 되풀이해서 오잖아요. 주기성. 반복성. 그러나 그것은 옛창조에 속한 거예요. 그런데 옛창조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이 손으로 만들지 않은 새로운 것이 뭐냐 하면, 반복해야 될 필요도 없고 주기적으로 되풀이할 필요도 없다. 단번에, 단번에 하나님께서는 길을 뚫어놓은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을 알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반복적인 번제도 아니고 반복적인 제사도 아니에요. 하나님을 알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죽어서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꼭 이 말씀 그대로 적용시키지요. 내가 원하는 것은 뭐냐? 만약에 반복적으로 “나는 이것을 행했습니다.” 하는 사람은 “저는 매일 쉬지 않고 제사하고 번제 드렸습니다.” “너 반복쟁이구나. 반복함으로서 너 자신의 반복했다는 그 행함,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그런 인간이구나. 내가 그거 아니라고 했잖아. 그것은 인생 잘못 산 것이라고 했잖아. 그렇게 하면 그것은 하늘나라 가는 천국길이 막혔다고 미리 이야기했잖아.”

2020년 1월 어느 수요일에 이야기했거든요. 그게 아니라고요. 반복적인 예배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고요. 반복적인 성만찬 그게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반복적인 예배출석 그게 구원이 아니에요. 도무지 내가 뭘 했다는 자체가 이게 구원의 길이 아닌 겁니다. 아닌 것을 좀 말리지 왜 하게 했느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 때 어떤 말씀을 줘도 인간들은 자기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가지고 내 구원이라는 어떤 성과를 얻는데 포기할 인간들이 아니에요.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지금 호세아시대는 어떤 시대냐 하면, 모세언약 시대가 아니고 다윗언약시대거든요. 다윗에게 준 약속대로 한다고요. 그 약속대로 하면서 모세 전에 있던 율법, 모세언약에서는 번제를 드려라, 제사를 드려라, 그렇게 되지만 다윗언약이 되면 번제의 취지, 제사의 취지가 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이를 때까지 더 구체화되고 더 심화되고 깊이를 더하는 겁니다.

그 깊이 더하는, 십자가까지 오는 그 중간에 시편 51편 16절, 17절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제사를 드리든 번제를 드리든 네가 하는 제사, 네가 드리는 번제를 나는 더러워서 안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구 제사를 받습니까? 하나님이 내세운 그 번제, 그 제사를 하나님이 그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번제를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 옆에 선 인간은 어떻게 됩니까? 17절에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너는 상한심령으로 옆에 서라는 말이지요. 그동안 너는 상한심령으로, 나는 번제 드렸다, 제사 드렸다, 하는데 상한심령으로 십일조 하고, 상한 심령으로 예배참석하고, 상한심령가지고 어디에도 쓸데없는 그것이 상한심령이에요.

방금 난로에 기름 넣다가 온통 손에 기름을 묻혔다 합시다. 기름을 손에 잔뜩 묻혔는데 마침 영덕대게가 왔다는 말이지요. 다른 사람 보니 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대게를 막 뜯어먹고 있어요. 훅훅 빨아먹고 몸통도 핥아먹고 그렇게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방금 자기 손에 기름이 범벅이가 된 줄도 모르고 막 뜯어먹으면 그게 기름 맛이지 대게의 속살 맛입니까?

상한 심령으로 헌금을 하고, 예배에 참석하고, 수련회참석하고, 또 참석을 안하고, 어떤 짓을 하고, 번제를 드려봤자, 자녀교육 시키고, 부모에 효도하고 백날 해봐야 그것은 상한심령이라는 것을 스스로 자기가 더 느끼도록 만드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

그동안 그 일을 누가 했느냐? 기름 넣는 사람이 한 것이 아니고 제사장들이 한 거예요. 이스라엘 제사장들. 이스라엘 레위인들이 한 거예요. 제사와 번제가 빠지면 이상하게 나라꼴이 안돼요. 꼭 복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저주 쪽으로 가요. 그래서 호세아가 알려주는 겁니다. “내가 그길 아니라고 했잖아. 천국 가는 길이 아니라고 했잖아.” 그러면 사람들은 “그러면 하지 말까요?” 그걸 안하게 되면 본인속이 상한심령인 것을 알 길이 없는데요? 알 길이 없어요.

인간은 덥석 물게 되어 있어요. 철딱서니 없는 애들 두 살이나 세 살 애들 보세요. 방금 바깥에서 모래가지고 놀다가 엄마가 맛있는 거 먹으라고 하면 씻어야 되는데, 안씻고 모래 있는 채로 덥석 집어서 먹고, 먹다 보니 자기본색이 드러나지요. 옆에 있는 같은 형제가 먹는 것이 궁금해서 한손으로 먹던 것은 그냥 먹고 있고 다른 손으로 다른 형제 것 가져가고, 그 애는 가져가는지도 모르고 멍청하게 그냥 앉아 있고. 총체적 난국이에요. 자기 연민, 자기동정, 자기애착, 이거 누가 말립니까? 평생을 두고 이거 말릴 사람 없어요.

연세 많으신 분이야 너무 연륜이 많고 인격을 수양했기 때문에 나이 70, 80되면 그저 자기를 비우고 남한테 베풀어주고 “나는 살대로 다 살았으니 너희나 잘 살아라.”라고 하면서 자기를 희생할 것이라고 생각 되겠지요? 개 코! 조금 자식이 와서 싫은 소리라도 하면 한달 두 달이 가요.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하나님의 말씀이 온다고 해서 그걸 더 아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이렇게 하세요. ‘아니오’가 내게 해당되는 겁니다, 라고 고백하세요. 그 고백을 어디서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났어요. 십자가에 강도 둘 달려 있는데 주께서 끼어들었어요. 주님이 두 강도 사이에 끼어드신 거예요. 두 강도가 고백하고 내뱉는 말은 우리 안에 둘 다 들어 있어요.

누가복음을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지옥 갈 강도였지요. 이미 지옥가고 있지만. 강도가 하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여. 당신이 구원자라면서? 구원자라면 날 구원해.” 오늘날 한국교회와 똑같아요. “교회 나왔으니까 당신이 솜씨 있게 날 구원해 보란 말이야.” 그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건 뭐냐 하면, ‘나는 가치 있으니까, 당신이 신이라면서, 메시아라면서, 구원자라면 나를 가치 있게 구원하면 그 다음에 당신은 구원자라고 이야기해줄게.’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주님이 십자가에 있을 때 로마 군인들도 그런 소리를 했어요. “지금 거기서 내려오면 당신 믿어줄게. 왜? 나는 고귀하니까.” 나는 다지고 또 다지고, 철저에 철저를 기하면서, 확인에 확인을 해가면서 정말 저 사람을 믿으면 나는 구원받을 수 있겠다는 용의가 있다는 거예요.

문제는 내가 구원받을 자격이 못돼는 상한심령이라는 것 자체를 몰라요. 그냥 막연하게 ‘나는 아마 구원될 걸. 그만한 가치가 있을 걸.’ 이렇게 이해하는 거예요. 그렇게 이해하고 교회 오니까 교회가 취미생활이 되고 오락이 되는 거예요.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사람이 좀 여유 있고 살만하면 교회 나오고 그렇지 못하면 인간은 뭘 하느냐? 술 마시지요.

숨 쉬는 것 외에는 다 오락입니다. 아파서 마지막 호스 꽂고 헉헉거릴 때 그것은 오락이 아니에요. 그것은 실제에요.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은 뭐냐? 죽음이에요. 하나님도 죽음이고. 인간의 문제는 뭐냐? 하나님은 죽었지만 인간은 안 죽으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다른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죽는 하나님 말고. 죽음을 통해서 나타나는 그런 하나님 말고 안 죽는 하나님을 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옆에 있는 강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죽어야 됩니다.” 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마땅히 죽어야 됩니다. 그리고 “일어나는 모든 경우의 수가, 내가 강도질 하고, 잡히고, 사형수가 되어서 십자가 형틀까지 오게 된 이 모든 경우가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한 자비요, 인자요, 사랑입니다. 모든 경우가 자비요, 인자요, 사랑입니다.”

강도가 자기 것을 내놓을 의사는 전혀 없어요. 옆에 지옥 가는 강도는 “구원자여 나와 협상하고 타협합시다.” 이렇게 나오는데 천국 가는 강도는 그런 것이 없어요. 뭐라고 하느냐?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마땅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죽게 하는 이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보는 거예요. “우리는 마땅하다. 하지만 저분은 우리와 같은 분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누가복음 23장 42절에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 말씀과 제가 아까 읽어드린 시편 51편 16, 17절에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그 상한심령을 천국가는 강도가 아주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목사님 저도 십자가에 달리면 그렇게 합니다.” 이렇게 하지 마세요. 지금 사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살아가는 것이 십자가 못지않아요. 원서 백군데 넣어도 안되는 취직이 안되는 그 청년은 지금 십자가에요.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고 이게 죽음의 실습이고 체험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왜 이 모든 경우에 사랑과 인자가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을 아시느냐? 제가 아침에 산책을 하는데 어느 날 많은 낙엽이 없어졌어요. 어디 갔나 보니 낙엽 쓰레기를 봉지에 따로 담아요. 한곳에 담아서 치웁니다. 널브러진 낙엽을 한곳에 모아놓더라는 말이지요. 번제와 제사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각자 노는 인간을 한 봉지에 모아놓는 거예요.

그러면 그 봉지 안에는 다 쓰레기에요. 봉지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이 쓰레기입니다. 상한 심령들이지요. 그 상한심령이 되게 된 것조차 하나님의 이미 주신 창세전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자비라는 것을 누가 알겠어요? 인간은 각자도생, 자기밖에 모르는데요. 그래서 십자가에는 결국 극단으로 서로 갈길 다른 대조되는 두 강도를 같이 모아놓고 두 강도, 천국에 가든 지옥에 가든 둘 다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냥 죽어 마땅한 것이 아니고 죄 값으로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둘 다 상한심령이 마땅한데 지옥 가는 그 강도는 흥정에 나서려고 하지요. 자기자신을 전혀 몰라요. 그 가운데 주께서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번제가 되시고, 예수님 자체가 제사가 되고, 예수님 자체가 희생제물이 된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보여주시지요. 그리고 반복되는 제사와 번제로 멈추는 것이 아니고 단 한 번의 번제와 제사로 말미암아 우리 쪽에서 이것저것을 한다, 안한다, 의 어떤 아무런 의미를 우리가 스스로 갖지 않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러나저러나 상한심령이기 때문에, 헌금을 하나 안하나 상한심령이기 때문에. 하나 안하나 상한심령 같으면 안하고 돈이나 모으면 상한 심령 되면 어떻습니까, 하는데 돈을 모으겠다는 그 말은 상한심령이라는 말이 거짓말이지요. 왜? 돈 있는 만큼 자기는 더 살고 싶은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주장하기 때문에, 내가 상한심령이라는 것은 빈말이고 거짓말 하는 거지요.

로마서 12장 1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너희 몸을 제물로 바쳐라. 이것은 이 명령이 우리보고 새삼 뭘 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내가 하기 전에 이 명령이 우리 안에 이미 주어져 있어요. ‘내가 주님의 산 제물이 된 것을 너무나 고맙고 너무나 감사합니다.’라는 생각을 성령이 오게 되면 참된 성도는 그런 고백을 한다는 말이지요.

만약에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내가 산제사 드리는데 난 이 모양 이 꼴이냐’ 하고 자기자신에 대해서 다른 견해를 갖게 돼요. ‘난 상한 심령이 아니고 뭔가 멋있는 존재가 되어야 돼.’라고 하면서 “예배 참석했잖아요!”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자기주제도 모르고. 그것은 쇼인데. 그것은 오락이거든요.

마지막으로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시편 69편 30, 31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것이라.” 감사하는 겁니다. 자기 행함을 보고 ‘내가 이정도로 하다니’ 이 감사가 아니고 주께서 일방적으로 이미 제물이 되신 그 자체, 그것도 내가 반복할 필요 없이 단번에 드린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한테 모든 것이 해결되었음을 깨닫게 하는 것, 이게 성도로서의 주님 만날 때의 기쁨을 지금부터 갖게 하고 지금부터 그 감사를 하게 하는 거예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라는 것을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해야 돼요. 일찍 죽기 전에, 어차피 죽게 되면 이 말씀을 또 만나니까. “‘아니오’라는 것, ‘저는 아니올시다.’ 이런 고백하게 된 것이 주님의 ‘예’고 주께서 ‘아니오’ 라고 할 수 있게 하신 것조차도 주님의 사랑의 흔적이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증거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되겠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매사가, 어떤 모든 경우가 우리를 상한심령 되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이고 예수님의 번제됨을 알리는, 통보하는 성령의 일인데 우리가 그것을 몰랐습니다. 따로 내가치를 챙기려 하는 어리석은 그 길이 안 되는 길인 것을 미리 당겨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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