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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1 20:37:16 조회 : 255         
   제 3일 200101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제3일 (호세아 6:1-2)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AZCsaIDFAoA, Hit:46
 이근호 20-01-01 21:20 
제 3일

2020년 1월 1일                 본문 말씀: 호세아 6:1-2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이 본문을 통해 우리는 세 가지를 물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왜 하나님께서는 이틀만에 일을 마무리 짓지 않고, 또는 사일이나 5일만에 일을 마무리 짓지 않고 하필이면 제삼일인가?
둘째는, 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기어이 찢으셔야 하는가? 찢지 않고서는 왜 일을 못하시는가?
셋째는, 그렇게 하시기 위해 실제로 이 역사상에 나타나신 분이 누구신가?입니다.

제3일에 모든 일이 완료가 되고 마감이 된다는 것은 이 지정된 시간적 활동이 특정 인물을 지정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3:32-33에 보면,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이 구절에서 ‘오늘과 내일’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제 3일 되는 날은 모든 일을 마감하시는데 그 마감의 모습이 예루살렘에 죽게 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에게 있어 3일 이후의 시간은 없으시는 겁니다. 나흘이니 닷새니 하는 것은 없습니다. 시간만 무한정 보낸다고 해서 천국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시간 노선에 같이 실려야 합니다. 제3일 이후의 시간은 없어야 합니다. 수학의 수(數)에는 두 가지로 쓰여집니다. 하나는 서수(序數)요 다른 하나는 기수(基數)입니다. 서수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식으로 헤아려집니다. 순서를 나타내지요. 기수는 개수를 나타낼 때 사용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서수는 방향성을 보입니다. 어느 한곳으로 접근해나가는 표시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3:33에서는, ‘오늘, 내일, 모래’는 시간 자체가 어떤 분이 하실 특정 사건을 유발하는 쪽으로 쏠려 있음을 나타냅니다. 오늘 호세아에 있어 제3일은 모든 것을 완료해서 마감하기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의 효용은 끝나고 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기수가 됩니다.

즉 ‘제3일’로 표현될 수 있는 어떤 분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부활되시는 것 다 아시지요. 십자가 사건으로 사흘이란 시간이 그 효능을 다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십자가 사건이 확대되면서 제3일은 주님의 연속적인 기능을 기수로서 표현하는 바가 됩니다. 요한계시록 11:8-9에 보면,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십자가 못박히신 곳’이 되게 하시는 주님의 연속적 작업은 두 증인, 예수님의 종에 의해서 이어지고 있는데 그 현상을 ‘사흘’이라 하지 않고 ‘사흘 반’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이 이해하는데 있어 ‘사흘’이라는 시간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시간 용어로 표현의 말이 됩니다.

즉 예수님의 인하여 이 세상은 애굽이 되어버렸고 불심판받는 소돔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그것을 ‘사흘’이라는 시간적 용어로 표현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이후에 세상에 잡혀서 죽어버린 자들은 예수님이 아니라 고난받은 예수님의 성도입니다. 그럴 경우에, 그 성도의 기능성은 ‘반(半)’으로 표현합니다.

이는 ‘사흘’의 본질에서 유발된 ‘반나절’이 됩니다. 예수님의 동일한 기능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두 성도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반(半)’ 시간이란 이 세상이 저주받아 마땅함을 확인하기 위한 주님의 일관된 작업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흘 반(半)’은 이 두 증인이 활동하기 위해 이 더러운 세상에서 허락맡은 기간과 일치됩니다.

그것이 마흔 두달입니다.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마흔 두 달은 요한계시록 12:6에 나오는 1260일입니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즉 ‘반(半)’은 성도와 악마가 정면으로 마주해서 성도가 고난 받아야 될 기간을 통해 왜 이 세상이 저주받아 마땅한 가를 들추어지는 주님의 연속된 기능을 말합니다. 이는 곧 오늘 호세아 본문을 통해, 왜 하나님께서 굳이 이스라엘을 찢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찢는 그 행위가 이 세상의 때를 ‘반(半) 때’로 쪼개어 그 내막을 공개하는 겁니다.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계 12:14) 이 구절에서는 역시 한 때와 두 때는 서수로서 작용해서 ‘반(半) 때’는 특정 인물이 하시는 기능으로 시간이 모아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짐승, 혹은 악마를 폭로시키기 위함이라면 도대체 지금 악마는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 걸까요? 이 질문은 곧 현재 악마의 지배하에 인간은 어떤 식으로 존재하느냐와 같은 질문입니다. 요한계시록 9:1에 보면 ‘무저갱’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바닥이 없는 우물에 악마가 갇혀 있는 겁니다.

이는 곧 하나님 보시기에 현재 인간의 실존은 ‘바닥 없는 쓰레기통’과 같습니다. 아무리 고상하고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을 자기에게로 끌어모아봤자 바닥없는 쓰레기통에 쓰레기 투척한 행위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모아도 텅텅 비워있습니다. 여기서 아예 ‘무(無)’과 ‘텅텅 비워있음’과 구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6:24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즉 가룟 유다는 차라리 무(無)가 되는 것이 본인에게 더 나은 상황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귀신을 인간의 허락없이 마음놓고 인간 몸에 들락거리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 12:43-45)

오늘날 성도는 사흘 되시는 예수님의 마감능력으로 인해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헛된 나의 이름의 명예와 가치를 위해 악마로부터 사주받고 살았는지가 드러났고 주님으로부터 부정당합니다. 따라서 전에는 악령이 설치는 몸통이 성령의 몸통이 되었지만 이제는 주님의 성전dl 된 형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후 6:16)

이로서 성도는 이미 구원받은 입장에서 주님의 남은 고난의 기능을 다합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지옥인가를 들추어내기 위해 주님의 연속적 기능을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모든 이름이 주님에 의해서 헛된 것으로 찢어졌음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20-01-02 12:51 
22강-호 6장 1-2절(제 3일)2001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6장 1-2절입니다. 구약성경 1260페이지입니다.

호세아 6:1-2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이 대목에서 세 가지를 찾아내야 됩니다. 첫째는, 3일후에 우리를 일으키신 다는데 왜 4일이 아니고, 5일이 아니고, 6일도 아니고 왜 3일로 마감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왜 모든 일이 3일로서 끝을 맺느냐? 왜 3이 없고, 5가 없고, 6이 없느냐? 일주일 뒤에 하겠다든지, 10일 뒤에 하겠다든지 그런 것이 아니고 왜 이틀 후에 그리고 3일, 왜 이틀은 안되고 꼭 3일이어야 하느냐는 그 이유입니다.

그 다음에, 그 일을 하면서 우리를 왜 찢으시느냐 하는 거예요. 찢으실만한 이유가 우리한테 있다는 뜻인데 도대체 우리를 왜 찢으시려고 하느냐? 우리를 찢지 아니하면 3일이라는 마감날짜가 등장하지를 않을 거지요. 찢으셔놓고 이틀도 아니고, 4일도 아니고, 5일도 아니고 3일이라는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이 마감, 종결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지요.

찢으시는 것, 그 찢는 이유와 그리고 3일로서 마감이 종결되는 것과 뭔가 관련성이 있는 겁니다. 이틀 아니에요, 4일 아니에요, 5일 아니에요. 3일이에요. 마지막 세 번째, 누가 그 일을 하시는가? 찢고 3일 만에 모든 것을 마감하시는 그분이 실제로 이 땅에서 어떤 분이며 누구였던가? 여기는 여호와로 되어 있는데 ‘이 땅에 나타나실 그 여호와는 우리에게는 어떤 분으로 나타나느냐’ 하는 세 가지 문제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4일이 아니고, 5일이 아니고, 3일이냐의 그것은 도저히 구약 호세아서에는 알 길이 없는데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누가복음 13장 32, 33절에 보면, 그 해답이 나와 있어요. 누가복음 13장 32절에 보면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제 3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 여기에 일하는 주체가 누구냐? 지금 이 3일은 누구에게 응축이 되는 시간들이냐 하면, 다른 사람의 3일이 아니에요. 이것은 귀신 쫓아내는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3일입니다. 33절에 보면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오늘과 내일과 모레.

로켓 쏘아 올릴 때 10, 9, 8, 7, ……, 이렇게 카운트다운을 하지요. 미국 나사에서. 마찬가지로 숫자가 어떤 한 방향을 지시합니다. 오늘, 내일, 모레. 이 시간자체가 이정표가 되어서 이 쪽으로, 이쪽으로, 이쪽으로, 이렇게 누구 하나를 겨냥하는 듯, 곧 예수님을 겨냥하는 식으로 움직이고 시간이 활용되는 겁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간다. 그리고 그 3일이 되는 날은 모든 것이 완전하여 지리라. 모든 것이 마감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충족되리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귀신 쫓아내는 것은 뭐냐? 귀신을 쫒아낸다는 것은 인간에게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인간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다시 호세아 6장으로 돌아오게 되면 주께서 우리를 찢으시는 거예요.

찢으신다고 되어 있는데 그걸 달리 표현하면 쪼갠다고 하고 싶어요. 인간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쪼개는 거예요. 쪼개야 인간이 왜 찢어지고 쪼개져야 되는지, 뭔가 드러나야 그 이유를 알게 되겠지요. 인간이 보통 시간을 생각할 때, 아까 누가복음 13장에서 시간이 순서를 가지고 어떤 한 분을 향하여 나아가는데 예수님이, ‘어제는, 내일은, 모레는, 이렇게 일을 하다가 세 번째 날에는 내가 모든 것을 완수한다.’는 그 말도 맞는 말이고요.

그것을 설명을 위해서 변형을 시켜보게 되면, 마지막 때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해서 시간이 작용한다, 움직이고 있다고 그렇게 보시면 돼요. 시간이 시간으로 계속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인물중심으로 모든 시간은 정확하게 꽂히게 되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사물이, 물체가 아니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사물입니다. 물체입니다. 실체가 있어요.

실체 없는 시간이 하나의 실체를 향하여 방향을 튼다는 자체가 무척 신기한 일이에요. 자, 이게 어느 정도 신기한지 잠시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 배운 수학을 동원하겠습니다. 수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서수가 있고 기수가 있습니다. 벌써 골치 아프지요. 서수라 하는 것은 순서를 정하는 겁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이것을 서수라 하고요.

“저 사과가 몇 개 있어?” “한 개 혹은 네 개가 있다.” 이렇게 딱딱 집어서 이야기할 때는 기수라고 해요. 예수님은 실제로 물체, 실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기수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 이 세상 시간은 방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수가 돼요.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이것은 서수가 됩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제 3일에 대해서 서수의 기능을 마감하고 예수님 자신을 기수화시키지요.

예수님 한분이 거기 계시다. 예수님이 계시다, 하는 말도 되고 예수님이 계시다, 하는 것을 서수로 움직이는 숫자가 예수님을 표현할 때 기수로 숫자화시켜서 표현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인간을 왜 쪼개고 찢어야 되는지의 이유를 보여줄 수가 있는 거예요. 시간으로서 예수님을 표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기능을 표현한다고 해도 되고, 시간으로 예수님을 표현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설교를 다시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왜 4는 안되고 왜 5는 안되느냐 하는 겁니다. 2, 이틀은 안되는 것이 뻔하지요. 왜? 3일이 있으니까, 중지시키면 안되니까, 3까지 가야 되니까. 왜 4는 안되고, 왜 5는 안되느냐 하는 거예요. 왜 7은 안되고 왜 10은 안되느냐? 왜 3으로서 멈춰야 되는 이유가 뭐냐? 3은 더 이상 서수에 해당되지 않고 완료된 기수로서 모든 시간의 목적이 예수님한테 완성이 되기 때문에 4와 5까지 넘어갈 숫자가 필요치 않아요.

예수님이 3을 표시한다, 그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고 난 뒤에 3일 만에 부활하셨어요. 부활하실 때 그 중간에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하고 동시에 인간세계는 더 이상 예수님 세계와 이어지지 못하고 끊어졌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3이라는 숫자가 단절을 의미해요. 예수님 때문에 이 세상과 주님의 나라가 단절되어 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13장 마지막에 베드로가 그 단절을 모르고 제안을 합니다. “제가 목숨 바쳐서 주님을 끝까지 따라가겠습니다.” 베드로는 끝까지 따라가겠다는 연속성을 주장한 겁니다. 주님께서 하는 말이, “너는 죽어도 나 있는 곳에 올수 없다.” 이것은 단절을 의미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너의 처소가 없기 때문에. 너의 처소가 없는 거예요. 하늘나라에 인간의 처소가 없는 거예요.

그 말은 뭔 뜻이냐? 예수님 오시기전에 평소에 인간들은 하늘나라 하나님 계시니까 그 나라에 자기자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연속적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도 교회에서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내자리가 있다고. 그러나 우리 자리는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찢음의 대상이기 때문에. 주님의 찢음의 대상이 돼요.

그 찢는 이유는 누가복음 13장에 약간 언급되어 있어요. 32절에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이틀 동안은 귀신을 쫒아낸다는 말은, 인간은 자기 속에 귀신이 들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귀신이 시키는대로 뭐하느냐 하면, ‘저 하늘나라에 내 자리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고 여기는 거예요. 전혀 단절을 의식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 악마가 인간위주로 나서기 때문에, 주님위주가 아니고 인간위주로 나서기 때문에 찢는 것도 필요 없고 쪼개는 것도 필요 없고 그냥 믿기만 하면, 열심, 열심, 계속 열심가지고 연결되면 들어갈 수 있다는 거예요. 시간의 끝에 천국은 온다는 겁니다. 네 인생을 다하면 천국이 온다는 거예요. 이것은 시간을 선형적으로, 선으로 보는 거예요.

선으로, 선형적으로 보게 되면 뭐가 문제냐 하면, 오늘과 내일과 모레가 계속해서 1, 2, 3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4, 5, 6 계속 간다는 말은, 나라는 인간은 오늘과 내일이 동일하다는 그 동질성, 모레도 동질성, 일주일이 지나도 동질성, 10년 뒤에도 동질성, 우리는 그 동질성을 유지하는 한 그게 나라고 여기는 겁니다. 나는 동질성으로 계속 변하지 않고 지금의 나가 내일의 나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거기에 어떤 단절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있어요. 내가 나로부터 끊어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해요. 그런 일은 생각도 못하고 있습니다. 3일을 마감으로 하고, 서수가 아니고 기수가 된 예수님의 ‘3일’, 예수 그리스도가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3’은 주님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3일 다음에 나오는, 인간의 힘으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시간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요.

요한계시록 11장 8절에,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두 증인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두 사람이 죽게 돼요. 죽게 되니 그 시체가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두 증인이 복음을 전하는데 그 두 증인이 예수님처럼 죽임을 당합니다.

죽임을 당하니까 예수님을 죽였던 사건의 연속성으로서 두 증인이 죽을 때 하나님의 계시로서 죽었던 그 공간을 새롭게 규정을 해요. 거기가 애굽이고 소돔과 고모라다. 전부 다 심판받을 세상공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라고 했어요.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고 또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에요.

그런데 그 죽인 그 사람들이 시체를 사흘반 동안 목도한다고 되어 있어요. 3일 반입니다. 3일이 아니고요. 예수님은 사흘이지만 3일 반 동안 목도한다고 했어요. 그러면 그 ‘반’은 어디서 나오는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에서 적용되는 시간이거든요. 예수님 죽을 때 사흘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3일이라는 것과 그리고 여기서 죽은 것은 예수님이 아니고 두 증인이 죽었으니까 예수님이 3일 동안 죽어계시는 것과 이 두 증인이 죽었던 3일반이라는 것은 사흘에서 연결된, 사흘에서 엑기스된, 농축된,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었던 그 본질을 그대로 이어받았던 시간적, 기수적 표시가 뭐냐? ‘반’이에요.

사흘에서 나왔던 속성으로 빠져나온 그 ‘반’, 대게 먹을 때 껍데기에서 알맹이를 쏙 빨아먹는 그게 바로 ‘반’, ‘반’의 역할로 인하여 이 세상에 십자가의 고통과 고난이 성도에게 그대로 남은 이 세상에 그대로 계속해서 확산되고 확대된다는 것을 ‘반’이라는 것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쉽게 이해할거라고 기대는 안합니다. 시간이야기를 하면 좀 짜증이 날 거예요. 보통 이해가 안되는 것이, 우리가 아는 시간은 그냥 똑같은 시간이에요. 어제나 오늘이나 어떤 방향성도 없고요. 그냥 천체의 변화가 동일하면 동일한 시간, 우리가 정하기 나름, 우리가 시계를 갖고 있으니 그 시계가 일정하게 째깍째깍 가면 그만이다.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시간의 주인공은 우리기 때문에 우리한테 의미가 있다, 그렇게 보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시간이 어떤 용도가 있다는 겁니다. 시간은 인간을 말하기 위한 시간이 아니고 왜 인간이 작살나고 박살나느냐, 그걸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인간을 찢으시고 쪼개시고 박살내는, 인간을 마지막으로 불심판 만드는, 소돔과 고모라의 불심판처럼 어떤 정해진 때까지 인간을 질질 끌고 가는 그런 용도로서의 시간본래의 기능이 있다는 거예요.

그 기능은 인간들이 아무리 연구해도 모르고요.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 중심으로 시간이 죽죽 감겨가고 예수님 중심으로 방향성을 가질 때 비로소 그 시간은 우리가 아는 시간 말고 다른 본질을 가지고 우리 인간시간 속에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창세기 1장부터 시간이 나옵니다. 천지를 창조할 때 7일 만에 창조했잖아요.

그러면 그 7일자체가 뭐냐? 모든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과 마감이 그 안에 다 함축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했으니까. 7일 만에 주께서 안식하셨으니까. 하나님의 원래 뜻은 7일이라는 시간가지고도 충분히 설명해줄 수가 있다는 거예요. 문제는 그 7일안에 들어 있는 창조의 완성, 심히 기뻐했다는 그 내용이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 지상에 쏟아내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그 완성을 범죄한 인간세상에 쏟아내는 거예요.

다니엘 9장 27절에 보면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라고 되어 있어요. 7일인데 7일을 둘로 쪼갠다는 겁니다. 쪼개면 3일 반이 돼요. 3일 반을 그렇게 보 지 않고 ‘한 때 두 때 반 때’로 봐요.

그런데 인간의 머리로서는 아무리 납득이 안되는 것이 뭐냐? ‘반 때’라는 개념입니다. ‘반 때’라는 것은 인간의 머리에서는 나올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모든 때라는 그 자체로 최소 숫자가 1이에요. 어떤 때든 1로 설명해야지 그 1이 ‘반 때’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반나절이라는 것은 있는데 그것은 하루를 최소단위로 봤을 때 반나절이 되거든요.

그러나 좀더 명확하게 하면 반나절은 12시간이 돼요. 결국 1이 아니고 12가 된다고요. 인간이 사용하는 시간의 마지막 단위가 1초거든요. 하지만 1초도 2분의 1초가 나오면서 2분의 1초를 또 따로 뽑아내서 그것도 한 때가 돼요. 한때로 설명을 한다고요. ‘반 때’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원래 최종적인 마감이 되는 그것을 더 이상 시간이라는 의미가 날라 가버렸을 때 ‘반 때’라는 용어를 쓰는 거예요.

한 때, 두 때, 이것은 서수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 그 다음에 ‘반 때’가 나와요. 이게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옵니다. 14절에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한 때’는 인간에게 이해가 돼요. ‘나도 한 때는 잘나갔다.’ 이해가 되지요.

두 때, 이것은 뭐예요? “나는 두 때 잘나가갔다.” 두 끼를 먹는다는 말인가요? 두 때라는 말이 없어요. 인간에게 두 때는 없어요. ‘한 때 잘나갔지.’ 하나에 때를 붙이면 어떤 경우라도 한 때가 돼요. 그게 5년이 있어도 한 때고, 5개월을 있어도 한 때에요. ‘나는 왕년에 한 때 잘나갔다.’ 50시간이어도 그것이 한 때에요.

어떤 기능을 표현할 때는 내가 한 때 잘나갔다, 한때 내가 주먹자랑 했다, 할 때 주먹자랑이 목표가 되기 때문에 그 ‘때’라 하는 것은 주먹자랑을 보여주기 위한 보조적인 기능이기 때문에 그것은 몇 시간이 되든 몇 년이 되든 관계없이 ‘한 때 내가 주먹 셌다.’ 그런 뜻이에요. ‘나도 고등학교 때 17대 1로 붙어서 깨진 적이 있다.’ 이런 것이 한 때거든요.

‘두 때’라는 말은 없어요. 인간에게 두 때는 없고 반 때는 더더욱 없습니다. 이것은 아까 말한, 하나님이 인간의 시간을 마감이 되는 곳을 향하여 방향이정표로 사용하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현재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시간을 사용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작살내고 찢어버리고, 오늘 본문처럼 찢어버리는 거예요.

찢어버려야 되는데 인간은 자기를 스스로 못 찢어요. 못찢기 때문에 인간이 동질성을 갖고 있는 그 시간을 해체해야 돼요. 시간 가지고 시간을 해체하는 겁니다. 인간이 알고 있는 선입관적인 시간을 낯선 시간개념을 가지고 해체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 ‘반 때’라는 것은 뭐냐? 한때를 둘로 쪼개는 거예요. 인간의 시간대를 쪼개는 거예요.

쪼개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가 나오는 겁니다. 뭐가 들어 있는가? 거기는 짐승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세계에. 인간이 사용하는 그 시간개념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시간으로 보여주는 그 십자가, 방향성을 가지고 결국은 서수에서 기수로, 예수님께서 이루었다는 그것, 그것이 시간으로 인간의 시간에 찾아오게 되면 본격적으로 주님께서 이루어놓은 십자가가 시간을 쪼개는 칼이 돼요.

칼이 되어서 인간시간 속에 뭐가 있는가 한번 보자, 해서 쪼개버립니다. 그러면 인간은 한 때 두 때, 원래 기수였는데 갑자기 서수로 쓰여요. 한 때, 두 때, 세 때. 그런데 네 때, 다섯 때는 없어요. 한 때, 두 때, 그리고 세 번째는 뭐냐? 반 때가 돼요. 쪼개보자는 거예요. 7일을 둘로 쪼개는 거예요. 그러면 3일반이 한 때 두 때 반이 돼요. 또는 7년이 3년 반, 3년 반이 돼요. 7일이니까 그 ‘일’을 ‘년’으로 하면 7년이거든요. 그래서 쪼개면 3년 반이 돼요.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두 증인이 죽었을 때에 그들이 복음전하는 기간이 정해져 있어요. 2절에 보면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 마흔 두 달은 3년 반입니다. 3년 반이 요한계시록 12장 6절에 보면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이 ‘일천 이백 육십일’이 3년 반이에요.

인간들이 사용하고 있는, 균질성 있는 선형적인 시간, 우리가 캘린더에서 볼 수 있는 1260일, 그리고 3년 반, 우리는 그냥 무심코 ‘3년 반, 그래 보내자’ 하겠지요. 그러나 그 3년 반은 무엇을 뜻하느냐? 그것은 한 때, 두 때, 반 때인데 중요한 것은 그 반 때가 하는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찢었다, 쪼개버렸다는 거예요. 누가? 주님이! 뭘로? 십자가에 담겨 있는 시간적 개념을 가지고 인간의 모든 시간을 쪼개버린 거예요.

왜 쪼갰느냐?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를 보자는 말이지요. 뭐가 들어 있었겠는가?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 반 때가 무슨 때냐? 교회, 성도가 고난받는 때에요. 십자가의 고난을 반 때라는 의미로서 이어져서 이 땅에서 고난받는 모습을 보여주는 때에요. 그러면 고난 받는다는 것은 뭐냐? 공격하는 때가 있었다는 겁니다. 누가 공격했느냐? 악마가, 여자 곧 교회를 말합니다, 예수님을 낳은 여자가 한 때, 두 때, 반 때를 도망쳐서, 1260일을 도망쳐서, 3년 반을 도망쳐서 광야에서 고생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악마는 3년 반 동안 그 여자를 공격하고 있는 유한적인 시간을 하나님에게 허락받고요. 악마는 그 3년 반 동안 공격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 진짜 주인은 악마였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시간 속에 노니고 있는, 인간 속에 노닐고, 인간을 휘젓고 있는 그 실체, 진짜 괴물은 주께서 열어놓은 반 때를 통해서, 그리고 주님의 자기의 몸의 연속성, 교회의 고난받는 모습을 통해서 이 땅에 악마가 설치고 있음이 드디어 밝혀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 늘 본문 호세아에서 북이스라엘, 남유다를 주께서 찢어버리는 거예요. 그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찢어버리는 겁니다. 찢어야 진짜 예수님 중심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이스라엘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찢으시고 사흘 만에 살리신다는 거예요. 이 살리신다는 말은 뭐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은 그 안에서 교회도 자기 백성도 온전하게 살려내는데 있어서 이미 완료했다는 거예요. 그 근거가 이미 마련되고 장만되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는가? 죽고 다시 살려내는 그 모든 효과와 효력, 그 힘이 그 안에 다 들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그걸 모르고 자기가 하나님하고 좋은 관계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가지고는 구원이 안되거든요. 주의 나라에 갈 수가 없어요. 뭔가 주님 쪽에서 한 조치가 있어야 되지요. 그 조치가 뭐냐? 찢어지는 거예요. 쪼개고 찢어버리는 겁니다. 누가? 누가 그 일을 하느냐에요. 제가 오늘 설교 시작하면서, 첫째는, 왜 3일로 마감되느냐의 문제. 왜 4, 5는 안되는가의 그 문제.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곧 3이라는 숫자가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두 번째는 뭐냐? 왜 찢어져야 되느냐의 문제. 그것은 인간이 인간 속에, 자기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를 모른다는 그 문제. 세 번째는 누가 그 일을 하시는가의 문제에요. 그것은 바로 이 땅에서 주의 이름이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오게 되면, 쪼개버리면 인간이 갖고 있는 각자의 이름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악마의 이름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쪼개서 무효화시켜 버려요. 인간을 쪼개보면 인간 속에는 자기가 뭔가 이름을 걸고 뭘 모아놓은 것이 있다고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걸 보지 않고 인간 속에 악마가 있다고 보고 귀신, 짐승이 들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9장 2절에 보면 여기에 단어 하나 나와요. 1절부터 보면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여기에 무저갱이라는 단어가 나와요. 무저갱의 열쇠를 여니까 2절에 “저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이렇게 되어 있어요. 무저갱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어떤 감옥이 있는데 바닥이 없는 감옥이에요. 없을 無(무), 바닥 底(저), 바닥(ground)이 없어요. 쉽게 말하면 쓰레기통인데 바닥이 없는 쓰레기통.

쓰레기를 투척을 하게 되면 그냥 빠져요. 우리 몸통이 악마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우리 모든 각자 인간의 몸통이 하나의 쓰레기통이에요. 자기 딴에 온갖 고상하고 품위 있는 것 다 집어넣어 놓았는데 넣어봤자 밑으로 다 빠져요. 인간은 텅텅 비어 있는 거예요. 빈공간입니다. 허무하지요.

악마가 그 ‘허무하지 않기’를 방해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너는 이 정도 착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이 정도 되면 아마 하늘나라 갈 때 공로로 인정해줄 것이다.’ 계속해서 인간다움, 자긍심, 자존심같은 것을 계속해서 강요해 왔던 겁니다.

마태복음 26장 24절에 보면, 인간을 빈 통이라고, 쓰레기통이라고 봤는데요. 인간이 그런 쓰레기통 같으면 아예 인간을 태어나지도 말게 했어야 하는데 없다는 것 하고 비어있는 것을 구분을 해야 돼요. 24절에 보면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차라리 나지 않았다면. 차라리 나지 않는 것은 무, 없음이 돼요. 그러나 가룟유다는 없음의 존재가 아니고 텅텅 비어 있는 존재라니까요. 우리는 텅텅 비어 있는 쓰레기통이에요. 마태복음 26장 69, 70절에 보면, 예수님은 잡혀 있고 베드로가 그 근처에 와서 불을 쬐고 있을 때입니다. 69절에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여기서 베드로가 극구 부인하지요.

나는 저 사람 모른다고 하지요. 자 이 대목에서 “저 체포된 예수라는 분과 너와 같은 한패다. 내가 봤다.” 하니까 베드로가 “아니야, 아니야. 나는 저 사람과 한패가 아니야.”라고 해요. 사람이 누구를 이용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 중에 기분 되게 나쁜 것이 뭐냐? “너 누구하고 한편이지? 너 누구 쫄따구지?” 되게 기분 나빠 합니다.

제 귀에 들려오는 것도 많아요. “너 이근호와 한패지? 이근호는 교주고 너는 쫄따구잖아.” 듣는 사람이 격분합니다. ‘수련회 가는가 봐라. 내가 그런 소리 들으려고 가느냐?’ 그래서 수련회 안와요. ‘나는 나지. 나는 누구 편 안먹는다.’는 거예요. 왜? 그 정도로 세요, 인간은. 나는 누구를 이용하지 나는 누구편에는 속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물론 사도바울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내가 너희들 위해서 십자가 진 적이 없다. 주님만이 십자가를 지셨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각자 놀라고 했습니까? 서로 사랑하라 했지요. 각자 독방 차지하고 캡슐 모텔방 같은데 들어가서 자기혼자 놀면 그만이라는 뜻으로 이야기했을까요? 인간의 악마적 본성상 ‘내가 누구 쫄따구다, 나는 누구의 시다바리다.’ 이것을 굉장히 듣기를 싫어합니다. 베드로도 듣기 싫어했어요.

왜 그런가? 자기 이름의 가치를 인간은 못놓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2장 43절에서 4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우리 몸인데요. 이 우리 몸을 누가 들락날락하느냐 하면, 귀신의 자기공간이에요. 귀신의 자기 쓰레기통이니까 자기 맘대로 왔다갔다해요. 일곱 귀신 들린 여자가 막달라마리아입니다. 그 여자가 일곱 귀신 들린 여자였어요. 자, 그렇다면 그 ‘반 때’라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 참된 성도는 예수님과 똑같은 고난의 길을 가게 되는데 그럴 때 ‘반 때’라는 것, 그 ‘반 때’의 기준이 순서가 아니고 기수에요. 예수 그리스도만이 최종적인 한 때입니다.

왜? 오늘 내일 모레, 3일로 완성이 되기 때문에 그 완성이 된 그것을 표준으로 했을 때 ‘반 때’라는 것은 그 표준을 칼로 삼았을 때 비로소 한 때를 갈라지게 하는, ‘이 세상에 뭐가 들었나 보자. 마귀가 들었구나.’라고 내칠 수 있는 그러한 기능을 예수님이 지금도 하시는 거예요. 이것을 기수적 표시로 하게 되면 한 때가 되지 못하고 쪼가리 난 ‘반 때’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이 세상의 형편을. 완료되지 못하는, 스스로 자기가 한 때로 나아가지 못하는, 쪼개진 세상. 그리고 그 쪼개진 세상에서 “요거, 마귀가 들었네. 요거 귀신이 들었네.” 하고 포착해서 찾아낼 수 있도록 성도를 통해서 모든 것을 공개시켜 버리는 그것이 바로 반 때입니다.

세상에 ‘반 때’라는 말은 없어요. 인간세계에서는 반나절은 있어도 ‘반 때’라는 말은 없습니다. 반나절이 있더라도 내가 나중에 기억할 때는 그 반나절이 한 때가 되어버려요. ‘그 때 그 반나절에 내가 참 좋은 일을 했다.’ 할 때는 이미 자기중심이 되는 그 반나절, 그 열두시간이 자기에게는 이미 한때로 환원되고 말아요. 나를 위한, 나의 의미의 마감, 괜찮았던 그 한때가 되어버려요. 내가 한 때 잘나갔으니까. 그러나 ‘반 때’라는 것은 이 세상 형편은 절대로 한 때로 완성될 수가 없는 때가 됩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성도의 모습은 어떠냐? 그러면 살렸다는 말은 우리 몸통이 어떻다는 말인가? 고린도후서 6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제는 우리의 이 쓰레기통에 누가 들어오시는가? 성령이 들어오셨어요. 성령이 마음대로 노니시고 활개쳐버려요. 그 안에 성령이 들어옵니다.

성령은 뭐냐? 우리 몸이 아직까지 이 세상에 있으니까 이 세상에 있을 때 성령이 들어왔다는 말은 먼저 모델이 있어요. 육신의 몸을 갖고 있는 예수님에게 누가 왔느냐? 하늘에서 성령이 왔거든요. 성령을 받았던 예수님의 육신의 모습은 이 세상이 얼마나 악마적 세상이고 지옥인가를 미리 보여주면서 고난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그런 삶을 살았던 겁니다.

예수님 자체가 성전이고, 이제 성령이 오게 된 우리 모습도 이 땅에서 복음을 위해서 애매하게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살아가야 될 주님의 가신 길을 밟아서, 두 증인이 갔던 길을 밟아서 이 세상이 기어이 소돔이며, 이 세상이 기어이 애굽이며, 이 세상이 저주받을 세상인 것을 다 드러내는 주님의 기능을 우리가 계속 이어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 번째로 살려냄을 당한 진짜 이스라엘이 이 땅에서 남아 있는 사명인 거예요. 이미 우리는 완성되었어요. 왜? 3일로 마감되었으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마감이 되었으니까. 이 마감된 우리 모습, 맘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주께서 데려갔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주의 말씀 가운데 악마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예수님을 낳은 여인처럼, 마리아처럼 한때 두 때 반 때를 경유해야 됩니다. 반 때를, 고난의 때를.

그 고난의 반 때를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날마다 확인하면서 주께서 이미 다 우리 안에서 성령으로서 이미 천국백성된 것을 날마다 확인시키는 그런 기쁨이 있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의 시간대로 살다가 자기자신만 내세우면서 마치 자기가 훌륭해서 구원받는 것처럼 우리가 오해했습니다. 일곱 귀신이 막달라 마리아속에서 설치는 것처럼 그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명예와 자기잘남을 위해서 얼마나 설쳐댔습니까? 빈 쓰레기통에 불과한데, 뭘 집어넣어도 다 빠져버리는 빈 통을 주께서 사용해주시니 늘 이 은혜, 이 사명에 감격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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