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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1 20:40:50 조회 : 97         
   태어남과 나타남 190911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태어남과 나타남(호세아 2:11-13)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qqE0Z7hvblM, Hit:7
 이근호 19-09-11 21:20 
태어남과 나타남


2019년 9월 11일              본문 말씀: 호세아 2:11-13

(2:11) 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2:12) 저가 전에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연애하는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로 먹게 하리라

(2:13) 저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을 따라 내가 저에게 벌을 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람들은 자신이 멀쩡하다고 여깁니다. 따라서 멀쩡한 자신을 멀쩡하게 보존하게 위해서 모든 것을 쏟아 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나에게 모든 것을 쏟아 넣어도 나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입니다. 이런 의식으로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거기에 나오는 ‘음녀’에 대해서 자신과 상관없는 자라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음녀’는 누가 봐도 ‘나쁜 사람’이기에 멀쩡한 자기 자신과 상관없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호세아에서 ‘음녀’는 주인공처럼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즉 결코 우리의 현 모습과 무관한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겁니다. 이 ‘음녀’라는 단어가 우상숭배와 관련해서 율법에 준해서 등장한 인물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음녀’는 특수한 개인이 아니라 ‘특수한 계시’가 되는 겁니다. ‘나쁜 여자’가 ‘나쁜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율법에 의해서 등장된 이 여인은 ‘율법’과 연동해서 새로운 일들을 겪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철수시키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희한한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그동안 풍족하게 누렸던 자연의 혜택도 같이 철수한다는 점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신을 염두에 두면서, ‘자기 몸’을 살려주는 신‘으로 이해했습니다. 즉 자신들의 삶이 풍성하고 말썽없으면 그것으로 충분히 자애로운 신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자신들이 그런 혜택을 마땅히 받을 자인가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어떤 인간이든지 자신을 변호하고 옹호하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들의 본성입니다.

이 본성 자체가 문제가 될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즉 자신이 ‘살 가치가 없는 자’라는 생각을 감히 아무도 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노아 홍수 때를 생각해보세요. 자신을 노아 방주에 탔다고 여기지 말고 노아 방주를 못 타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물을 다 받고 있으면서 저만치 떠나는 방주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광경을 생각해보세요.

과연 하나님께서 ‘다 죽이시는 하나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묻지도 따지지 않고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 때문에 다 저주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경을 개인적으로 알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신을 정상적이고 멀쩡한 자라고 평소에 자부하며 살아오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자신이 속해 있는 세상이 전면적으로 저주의 대상이라면 그 중의 한 사람인 우리도 당연히 정상이 아니라 저주받을 만한 겁니다.

하지만 아담으로부터 태어난 우리 인간들로서는 이런 전면적인 저주 취지를 알 길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당하는 겁니다. 이번에는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에 떨어진 유황불저주를 생각해 봅시다. 노아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가정을 롯의 가정에 속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소돔과 고모라에 남겨진 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봅시다.

그러면 이 저주의 유황불 도성에서 누군가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정은 롯의 가정입니다. 자신을 멀쩡하다고 여기고 이 멀쩡한 나를 계속 살겠다는 것은 항상 ‘나 위주’를 포기 못하는 자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율법의 철수로서 약속의 땅의 복도 같이 철수된다는 점을 감안합시다.

그렇게 되면 없던 율법의 나타남과 ‘음녀’라는 개념의 나타남이 같이 출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성도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는 겁니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율법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율법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한 역할자로서 성도가 나타나는 겁니다.

‘나타남’이란 인간에게는 ‘없는 일’이 새삼 나타난 것을 말합니다. ‘나타난 율법’을 위해서 성도는 비로소 ‘나타난’ 겁니다. 그것도 ‘음녀’로서 말입니다. ‘음녀’란 그동안 우상숭배한 여자라는 겁니다. 자신의 몸을 지켜내고 유지하기 위한 신과 거래한 자들이 음녀였던 겁니다. 인간은 자신을 멀쩡한 존재로 보기에, 자신이 상상한 천국도 실재하는 천국으로 오인합니다.

교회 와서 온갖 귀하게 좋다는 정보는 다 멀쩡하다고 자부하는 자신을 위해서 활용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와서 철수하면서 그동안 우리 자신의 것을 다 벗겨내어 우리가 얼마나 초라하고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고 저주받을 자인 것을 노출시키는 작업이 개시되면 어느 새 우리는 ‘우상숭배자’로 교회 출석한 자로 들통납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 와서 이론적으로 바른 복음과 교리를 취득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러한 지식이 자신을 구원하고 천국 보내 줄 것이라고 여깁니다. 십자가 피를 믿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고 등등의 바른 지식으로 단단히 무장한 그것이 나를 정상적이고 바른 신앙인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여깁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과 우리 자신이 동시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이 있다면 우리는 없는 것이요, 우리가 없다면 신앙은 있는 겁니다. 신앙을 예수님으로 대입하면,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우리는 죽은 자가 되고, 우리가 살아 있다면 예수님은 없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 나가서 우리는 항상 나 우선이며 나의 살아 있음을 생생하고 느낍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우리를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평소에도 예수님이 사시고 나는 죽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주님께서 우리 몸을 아프게 하면, 우리는 우리 우선으로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아픈 몸으로서 ‘남이 아프다’고 우길 수는 없는 겁니다.

바로 ‘내가 아픈 겁니다’ 그리고 몸의 아픔 뿐만 아니라 나랑 엮여진 자들이 나를 가만 두지 않고 골치 썩게 만듭니다. 가족관계가 특히 그러합니다. 아무리 나는 죽고 없다고 우겨봤자 소용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우리 자신이 예민하게 몰고 가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곧 ‘음녀’이기 때문입니다.

음녀는 이처럼 막다른 데 가서 거기서 비로소 주님만 보여야 합니다. 자력으로 천국에 자신의 자리가 마련될 자격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동안 자기 자신 위주로 살아온 자임을 압니다. ‘태어난 자’로 ‘나타난 자’로 전환되는 것은 도저히 예측하거나 예상 못한 식으로 ‘마침 자리가 마련되었음’을 알리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음녀를 위해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미리 자리를 마련해 놓으신 겁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의 삶은 계속해서 ‘예측 못함’, ‘예상 못함’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한 평생이 ‘구원의 자리가 마침 나타난 그 한 순간’이 되는 겁니다. 성도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살 권한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아무리 관리해봤자 소용없는 음녀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9-09-12 17:03 
7강-호 2장 11-13절(태어남과 나타남)1909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2장 11-13절입니다. 구약성경 1258페이지입니다.

호세아 2:11-13

“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저가 전에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연애하는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로 먹게 하리라 저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을 따라 내가 저에게 벌을 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성경이 남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보고 있는 우리 자신들을 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내용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처음에 인간을 만들 때 한 아담, 그리고 하와, 그 인간을 만드시고 모든 인간들이 거기에서만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다른 조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처음자리로 가봅시다. 하나님과 처음 만났던 아담이 있었고 우리가 그 아담 안에서 못 벗어나지요. 이 몸이 아담이 복제물이니까요. 아담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어떤 말씀을 줬다는 말은 곧 누구한테 준 말씀이냐 하면, 우리 자신들보고 준 말씀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말씀이 남의 이야기라고 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신들을 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들을 보고 하는 이야기일 때 그 이야기의 내용이 뭘 하라는 뜻이 아니고, 그렇게 하겠다는 선언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빼도 박도 못한다는 거지요. 이미 네가 결정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생각한대로만 움직이고 너희는 그 세상 안에서 지내게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 9장 29절에 보면 그런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성에서 나가자 곧 내 손을 여호와를 향하여 펴리니 그리하면 뇌성이 그치고 우박이 다시 있지 않을찌라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 이 대목은 모세와 바로가 한바탕 붙었을 때에 바로는 저 모세만 떼놓으면 여전히 이 애굽나라는 자기세상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자기 앞에 모세라는 인간이 등장했을 때 모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 어느 것도 여호와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당신의 결정과 마음 자세와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다 하나님이 의도한 계획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당신이 어떤 예상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뜻입니다. “어떤 예상이나 예측, 어떤 기대를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이야기하는 모세 본인은 어떤 예상이나 예측을 할 수 있느냐? 모세 본인도 예상이나 예측이 되지를 않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이런 이야기를 바로왕이 알아듣지를 못하는 겁니다. 출애굽기 11장 7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모든 세상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뜻이 뭐냐? 그게 바로 출애굽기 11장 7절에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애굽을 구분하겠다. 구별 짓겠다.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을 구분 짓기 위해서 하나님은 세상을 장악하고 있다. 그렇게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구분점, 출애굽기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호세아 여기서도 분명히 나오겠지요.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오늘 본문에 음녀가 나옵니다. 음녀가 나온다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음녀는 저 지옥 갈 여자고 저주받을 여자다.’ 그렇게 생각이 되겠지요. 그러나 호세아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예상을 완전히 뒤집어버립니다.

음녀는 바로 구원받을 사람의 모델이다. 바람피운 그 여자, 구원받으려면 저 절차를 거쳐야 된다는 겁니다. 나쁜 여자기 때문에 우리는 “나쁜 여자 저리가!” 나쁜 여자를 나쁜 여자라고 규정한다는 것은 그만큼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고 좋은 쪽에 서 있다는 티를 스스로 내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의외로 그 음녀를 자꾸 등장시키는 겁니다.

이상하다. 음녀 같으면 저주하고 내쳐서 지옥이나 가라, 이 바람피운 여자야.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움과 정의로움에 부합된다고 생각하는데 자꾸 호세아에서 음녀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한테 어떤 낌새를 자꾸 주고 뉘앙스를 주느냐? 음녀같이 되지 아니하면 구원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 이유를 우리가 알아야 되겠지요? 우리가 멀리했던 그 음녀를 우리가 주목을 해야 된다는 거지요. 11절에 보면 “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희락, 절기, 월삭, 안식일, 이게 전부 다 율법이거든요. 그런데 폐한다는 것은 율법이 사라진다는 뜻이에요. 율법이 사라진다는 것은, 율법이 사라지기 전에 율법이 나타난 거예요.

없던 율법이 나타나고 그 율법이 나타났다가 이제 폐해진다, 사라진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없었던, 예측 못한 율법이 이스라엘에게만 등장했어요. 이방나라에는 율법이 없고 이스라엘에만 나타났다가 이스라엘이 다른 신, 이방신을 믿으니까 이제 율법이 사라진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은, 이스라엘을 음녀라고 했는데 그 이스라엘을 통해서 뭘 보이느냐 하면, 율법은 나타난 거지요. 이 말은 이스라엘은 나타난 거예요.

이스라엘이 나타났다는 말, 이방민족은 나타난 것이 아니고 태어난 거지요. 우리 성도는 태어난 것이 아니고 나타난 거예요. 태어남과 나타남의 경쟁, 싸움을 벌이는 겁니다. 내가 여기 태어났느냐, 나타난 존재냐를 보라는 겁니다. 율법이 있음으로서 비로소 등장하는 것이 음녀거든요. 율법이 나타남으로서 다른 신은 신도 아니고 우상이니까 섬기지 말라는 지시와 명령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처음으로, 최초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이스라엘이 이방신을 섬겨버리면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이스라엘답지를 못하고 이방나라가 되기 때문에 “그래? 그렇다면 나는 너희에게 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사라지게 하겠다. 내가 은퇴할게. 여기 있어봐야 소용도 없으니까 내가 떠날게.”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진짜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이 땅에서, 아담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없는 이스라엘이 나타나야 되는 거예요.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조선시대 정철의 시조에 그런 것이 있지요. “아버님이 나를 낳으시고 어머님이 나를 기르시니 두 분이 아니셨다면 이 몸이 살 수 있을까” 그런 시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것은 태어난 거예요. 아버지 어머니에 의해서 내가 태어난 거예요.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태어난 것이 아니고 율법의 나타남을 드러내기 위해서, 거기에 부합되는 새로운 인물로서 이스라엘이 율법의 나타남과 연동해서 등장된 민족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없는 민족이에요.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율법 때문에, 율법이 있어야 하는 이유 때문에 비로소 이 세상에 나타난 거예요.

나타났다는 말은 자신의 뿌리를 이 세상에 찾을 필요 없고 자신의 뿌리는 나타난 율법, 다시 말하면 말씀이 우리의 뿌리가 되는 거예요. 혈육적인 뿌리는 없어요. 그래서 음녀는 나쁜 여자가 아니고 나쁜 역할을 하는 여자지요. 나쁜 역할을 하는 여자. 그리고 그 역할은 하나님의 언약, 율법,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주어진 거예요.

이 음녀는 그 여자가 특수한 것이 아니라 계시의 특수성 때문에, 계시의 특수성을 알리기 위해서 음녀라는 여자가 등장한 겁니다. 쉽게 말해서 성도라 하는 것은 각자 그 시대에 맡은 역할이 있어요. 음녀가 그 역할인데 호세아에서 음녀가 나왔기 때문에, 음녀가 바로 구원된 자의 전형적인 모델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그 음녀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성도의 모습으로 21세기에 나타난 거예요.

그런데 역할이면 좀 좋은 역할, 성녀로 나타났으면 좋겠는데 왜 음녀냐? 율법 앞에서 모든 인간은 음녀로부터 출발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기존의 이방민족들을 봅시다. 이방민족들에 있어서 그들의 신은 자신의 목숨만 부지하면 별 탈이 없는, 자기의 목숨부지해주는 신만 있으면 만족하는 그러한 입장에 있습니다.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났다는 것은 내가 있는 것이고 그 있는 것을 계속 있게 해주는 신, 그게 바로 그들이 믿는 신이에요. 그러면 뭐가 중요하냐? 태어난 내가 중요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본인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율법이 중요한 거예요. 율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연결고리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받은 말씀이거든요. 그걸 언약이라 하는데요. 모세언약. 그 하나님의 언약이 더 중요한 거예요.

언약이 중요한데 그 언약은 없던 데서 나타났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이스라엘은 그 존재자체가 태어남이 아니고 나타남이 되는 겁니다. 둘 사이에 경쟁한다 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 12절에 “나를 연애하는 자들” 우상이지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이렇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입장에서 이방민족이 너무 잘 사니까 자기가 나타난 존재임을 잊고 태어난 존재로 여기고, 이방민족처럼 이왕 태어난 것 잘 먹고 잘 살면 그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혜택이라고 생각해서, 그 이방민족을 따라가서 이방민족으로부터 주어진 여러 가지 풍성한 것을 그들의 신 덕분이라고 여깁니다.

일단 얻어먹었으니 따라서 거기에 대해 나름대로 이방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 “저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13) 곧 이방신을 꾸미기 위한 신전꾸미기, 그들에게 제물을 바쳐서 더 많이 얻어내기, ‘나는 이 정도로 당신에게 헌신하니 당신이 30배, 60배, 백배나 채워주기를 고대합니다.’라는 식으로 이방민족을 섬겼던 거예요.

이런 것들이 바로 바알인데, 13절에 “바알들을 섬긴 시일을 따라 내가 저에게 벌을 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벌을 줄때는 그 벌의 기준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어떤 근거에 의해서 줘야 되는데 그 기준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 나타난 율법에 의해서 그것은 우상이라고 규정하는 겁니다.

자, 이렇게 이야기해서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요. 노아홍수 때를 생각해 봅시다. 비가 많이 와서 방주가 물에 떴다 칩시다. 세상에 물이 찼으니 방주가 물에 떠 있고 물에 떠 있는 그 모습을 지금 높은 산에 올라가서 버틸 대로 버티겠다고 나무 꼭대기에 원숭이처럼 매달려서 비가 그만오기를 기다리는 어떤 사람이 있다 칩시다.

그 사람이 방주를 볼 때 어떤 생각을 하겠어요? 생각해 봅시다. 나무 꼭대기에 올라갔는데 자기는 방주 바깥에 있지요. 비가 줄기차게 내리고. 곧 내가 있는 이 산꼭대기까지 물이 다 찰 판이라는 말이지요. 그럴 때 무슨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상을 다 저주했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하겠지요.

방주라고 할 때 우리가 방주 안에 들어있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방주 바깥에 있는 자들의 심정을 헤아려 봅시다. 방주 안을 빼고 나머지는 그냥 다 죽인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다 저주받게 하신 겁니다. 노아는 훌륭해서 방주 없이도 구원받는다든지 그런 것이 없어요. 방주 때문에 살았지 노아도 방주 없으면 그냥 저주받는 겁니다. 다 저주받는 거예요.

태어난 것은 다 죽인다 그 말이에요. 그러면 이 태어난 것들이 뭘 상상하느냐? 신을 믿으면서 복 받을 생각하고, 신을 믿으면 천국가기를 생각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실제로 우리에게 준 것은 몽땅 다 저주입니다. 몽땅 다 저주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 같지도 않다는 뜻이거든요. 쉽게 말해서 멀쩡하지 않다는 말이지요.

이 멀쩡하지도 않은 인간이 자기스스로 멀쩡하다고 여기고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한다면 그 천국이 천국이겠습니까, 가짜겠습니까? 당연히 가짜지요. 왜냐하면 자기가 멀쩡하지도 않은데, 저주받아야 될 사람인데 내가 죽으면 천국 간다고 우기니까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생각하는 천국은 있지도 않은 천국이지요.

그것은 상상의 천국입니다. 상상하는 것과 실재하는 것은 달라요. 그러면 상상에서 실재로 어떻게 바뀌느냐? 그 바뀌는 방법이 오늘 본문에 나오잖아요. 내가 모든 율법을 철수하게 되면 네가 그렇게 좋다는 생존의 필요했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내 목숨 부지하는데 여유로웠던 그 모든 것도 같이 저주받고 벌로써 날아가 버린다는 거예요.

그러면 내 몸이 실재입니까, 아니면 율법이 실재였어요? 그동안 우리가 살도록 우리에게 주어졌던 혜택, 공기를 비롯한 모든 혜택이 우리가 잘나서, 우리가 예뻐서 주는 거예요? 아니면 율법이 율법답게, 하나님의 언약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준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그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다 알아요.

율법이 빠져버리면 그 자리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옛날 제가 어릴 때 대구 달성공원에 유명한 어떤 가수가 왔었어요. 밤에 가수 왔다고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였지요. 그런데 너무 많이 모여서 무대가 보이지도 않아요. 사람은 움직이는데 누가 누군지 분간도 안 될 정도에요.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그 사람이 가버렸습니다. 그 사람 보려고 그 다음날 가면 그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그 사람도 없을뿐더러 사람들이 아예 없어요. 주인공이 누구냐? 이 세상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겁니다. 그 사람이 떴다가 사라질 때 그동안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있던 모든 포도나무와 축복도 같이 회수가 되고 날라 간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뻐서 우리의 생계를 유지시키는 것이 아니에요.

핵심은 따로 있습니다. 율법의 나타남이에요. 율법의 나타남의 의미를 모르고 태어난 자기 자신을 붙든다면, 태어났다고 우기는 이방민족적인 사고방식을 진짜 이스라엘답게 나타난 것으로 바꾸려면 이런 절차와 과정이 필요한 겁니다. 내가 걸치고 있던, 내게 필요하다고 여긴 모든 것이 다 발가벗겨지고 다 망해버리는 절차가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실제로 따로 있음을 깨닫는 것이 필요한 겁니다. 쉽게 해서 망하라는 이야기에요. 제가 질문 던질 테니 여러분은 속으로 답변해 보세요. “신앙이 있는 것과 내가 있는 것을 같이 겸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강의시간 같으면 묻겠습니다만 실례가 되기에 안 묻습니다. 신앙이 있는 것과 내가 있는 그것이 같이 있을 수가 있느냐?

신약성경에서 그것은 용납이 안돼요. 신앙이 있다는 것, 곧 예수님이 있다는 것은 내가 그 앞에서 제로가 되고 죽고 없다는 뜻이에요. 제가 설교시간에 했다고요.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은 그 앞에 우리는 죽은 자로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계신 그 앞에 또 내가 있을 필요는 없다. 나는 주께서 이끄시는 대로 갈 뿐 내가 있다고 우길 수는 없다. 왜냐? 두 개가 있어버리면 두 의지가 있어서 서로 나 잘났다고 할 수가 있어요. 내 뜻이 우선이냐 네 뜻이 우선이냐, 이런 식으로.

신앙이 있다는 말은, 주님이 내 안에 있다는 말은, 나는 있으나마나 없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으면 성경적으로 이것이 옳지만 이게 항상 우리한테는 이론이 돼요. 이론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에이. 그것은 이론이지 실제는 아니거든요.’ 이론이라는 말은 어떤 뉘앙스를 갖고 있느냐 하면, ‘그렇다는 이야기지 역시 나만 있습니다.’ 하는 이것이 실제가 되는 거예요.

내가 죽으면 천국 간다. 성경에 나오지만 이것이 이론이라니까요. 실제로서는 천국 본 사람도 없고 천국 손에 만져본 사람도 없어요. 따라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일을 하시느냐? 그동안 내가 있는 것이 주님이 있는 것보다 더 우선된다는 그 사실을 그냥 놔둬버리면 이것은 완전히 이방민족이 되고 말잖아요. 태어난 대로 난 살다가 때가되면 교회 가서 예수 믿지요.

예수 믿는 것이 이론인데요? 그것은 실재하지 않고 실재는 내가 있다는 그것이 더 실제스러운데 그 이론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들이 그렇게 붙들고 아까워하는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그들이 사는데 필수적으로 꼭 필요한 양식같은 것이거든요. 그런 것들을 수풀이 되게 하고 들짐승들이 먹게 했다면 이것은 이론이냐 실제냐 하는 겁니다. 이것은 실제가 되겠지요.

다시 말해서 내가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뜯어내는 거예요. 뜯어내면서 뭐라고 지적하면서 하느냐 하면, 너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우상을 섬겼다. 우상을 섬기고 있으니까 나는 내가 준 것인데 마치 네가 이 세상 열심히 살아서 얻은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하나 둘 뜯어내겠다는 식으로 주께서는 우리에게 일을 벌여버려요.

참, 이야기가 어렵지요? 그러면 이야기를 쉽게 해 봅시다. 신앙이 있다, 주님이 있다는 말은 ‘내가 없다’가 되어야 되는데 그것은 이론상이고 실제로는 주님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있어버려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나를 자극합니다. ‘나는 없다. 나는 분명히 없는 거야. 주님이 살아계신다.’ 하여튼 교회만 오면,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내 안에 주님만 삽니다.’

어디서 들은 풍월이 있어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그런 말씀이 있다고 기억은 잘해요. 백날 해봐야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 실제로는 교회 밖에서 살 때 주님께서 자극을 합니다. 자극하면 내가 아무리 없다고 해도 내 몸이 아프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없으면 안 아파야 되는데 내가 있기 때문에 아프잖아요.

그러면 아무리 성경에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더라도……, 이게 욕은 아닙니다. 이걸 안동말로 ‘씨부리쌌는다’고 하거든요. 안동 말인데 욕은 아니에요. 성경에서 뭐라고 씨부리싸더라도 몸이 아프면 주님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이 몸 아픈 것 좀 해결해달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주님이 일부러 자극한다고요. 약을 올려요.

‘주여, 저는 내가 없고 주안에서 살아갑니다.’ 하면 주께서 ‘이런 이론가가 어디 있어? 네가 맛을 못 봤구나.’ 몸이 아프고 이빨이 아프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이고 뭐고 다 귀찮아요. 내가 중요하다는 것은 아프면 확실히 느껴진다니까요? 몸이 아프든지 아니면 걸치고 있는 자들이 괴롭히는 것이 있어요.

자식이 애를 먹인다든지, 그리고 같이 사는 식구들, 오빠가 있으면 오빠, 남동생이 있으면 남동생, 누나가 있으면 누나, 아버지면 아버지, 남편이면 남편, 아내면 아내, 나를 좀 가만 두지를 않아. 하여튼 애를 먹여. 곁가지들이. 내가 걸치고 있는 가지들. ‘차라리 나가 죽어라’ 하는 말이 속에서 막 나오지만 그럴 수 없어요. 나와 아는 사이라.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얽히고설킨 사이라 내 일이 아니고 그쪽 일인데 내가 신경 써야 돼요.

또 나를 자극했어. 누가? 주님이. 그러니까 이게 아무리 이론적으로 주를 믿는다 해도 실제는 뭐냐? 내가 주를 믿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말씀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나만 편하고 나만 잘살고 건강하면 그만이라는 이것이 실제고 이것이 바로 음녀에요. 이게 하나의 역할이라니까요?

지옥 갈사람 같으면 ‘그것은 당연한 거 아니야?’ 이렇게 되지만 성도 같으면 하나님이 일부러 자극을 해서 그 출발점이 신앙 좋은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바로 그 호세아에 나오는 음녀 그 자체, 나는 이론상 음녀 안 되고 싶어도 실제로 나는 음녀였구나.’ 그것을 깨닫게 하는 그러한 현실 속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믿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무슨 믿음이 있어요? 믿음 없어요. 믿음 없음을 들통 내는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모델이라니까요? 구원받은 자는 반드시 그러해야 돼요. 그런 절차를 밟아야 돼요. 저는 이것을 관람의 한계라고 하는데 자꾸 성경을 관람하고, 구경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상상해요. 관찰하고 있고.

그래놓고 나는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모든 것을 저주했다는 것이 빈말이 아니고 실제로 그래요. 이 세상 자체가 율법 아래서 저주아래 있습니다. 예외 없이 다 저주받아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나 중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 저주받아도 상관없는데 나는 저주 안 받아야 돼.’라는 이것이 뭔가 처음부터 잘못된 거예요. 이게 멀쩡하지 않은 정신상태입니다.

멀쩡하지 않은, 저주받았으면서도 저주받는 이유도 모르는 이 멀쩡하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 나와서 죽어서 천당 가겠다고요? 어디서 그런 구라를 떨고요. 그걸 자극을 해줘보세요. 언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사랑합니까? 나만 믿지요. 이 본문에서 음녀가 나오거든 바로 우리 이야기에요. 우리는 절대로 우리자신의 최우선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노아방주를 상상하지만 실제로 방주 바깥 비가 쏟아지는 거기에 있어요. 그리고 거기 있으면서 왜 비가 오는지도 몰라요. 비를 맞음이 합당한데 그 합당함이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물에 빠져 죽는지, 물에 빠져 죽으면서도, 이 세상살이에 고생을 하면서도, 고생고생하면서도 우리는 납득이 안 된다니까요, 납득이. 납득이 알지요? 납득이 안돼요.

추석날 차 막혀서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고향을 찾는 그 고생고생이 납득이 안돼요. 오줌도 못 누고 휴게소 갔다가 30분이나 걸리고. 왜 그런 고생을 이 땅에서 하는지 납득이 안 된다니까요. 납득이 안 될 때는 호세아를 보세요. 당해도 싸다 그 말입니다. 음녀니까. 우리는 자꾸 안 망하려고 해요. 평소에 안 망해도 합당한 요소들을 마구마구 덕지덕지 짊어졌는데 하나님께서 은퇴를 하면서 말씀으로 그걸 다 뜯어내는 거예요.

“이것은 네 모습 아니야.” 벌거벗은 모습, 에스겔서 16장 37절 말씀, 이스라엘아 너는 네가 좋아하는 세상 앞에서 아무것도 없는 수치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다 들춰낼 거야. “내가 너의 즐거워하는 정든 자와 사랑하던 모든 자와 미워하던 모든 자를 모으되 사방에서 모아 너를 대적하게 할 것이요 또 네 벗은 몸을 그 앞에 드러내어 그들로 그것을 다 보게 할 것이며.”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우리가. 제발 어두운 얼굴 하지 마세요. 우리가 어두운 얼굴을 할 권한이 없습니다. 어두운 얼굴을 하는 것은 우리가 자꾸 자기에게 부합되는 합당한 미래를 예상하고 예측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는 망하면 안 돼. 나는 부끄러우면 안 돼.’ 아무 근거도 없이. 주님이 이마를 팍 쑤시면서 ‘이게 네가 멀쩡한 게 아니야. 네가 정상이 아니야.’

이것은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 떨어졌지요. 아까 노아 이야기와 똑같아요. 자꾸 탈출에 성공한 롯 입장에서 보지 마시고 남겨진 입장에서 봅시다. 유황불 떨어진 그 소돔과 고모라에 누구 하나가 없어요. 조금 전까지 살았던 롯의 가정, 딸 둘하고 아내가 없는 상태에서 지금 유황불이 떨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혹시나 저 롯의 말이 맞을 수가 있다는 생각을 해야 돼요. 그들이 피신하자마자 유황불이 떨어졌거든요. 유황불이 떨어지는 그 현장에 우리가 있다고 칩시다. 자꾸 롯 따라 가지 말고요. 남겨진 사람들, 유황불에 저주받는 그 입장에 있을 때에 그 저주의 이유를 평소에 몰랐던 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왜? 호세아를 안보니까.

자기는 음녀 아니라고 우기니까. 나는 죄 안 졌다고 우기니까. 나는 우상숭배자 아니라고 우기니까. 저주받으면서 저주받는 이유를 몰라요. 신앙전체가 전부다 상상에 불과해요. 이론에 불과해요. 실제로 느끼는 사람은 별로 되지도 않아. 그게 진짜 성도인데. 내가 음녀라는 것을 아는 사람, 말씀에 의해서 내가 뜯겨져서 나는 수치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성도인데 그렇지 않고 교회 올 때 전부 다 멀쩡하게 와요. 자기가 대단한 사람으로서. ‘목사님, 교회까지 오니 얼마나 착합니까?’ 이러고 오더라는 말이지요.

그게 아닌데. 그것은 상상일 뿐인데요. 자기위주로. 새턴로켓이라는 것은 로켓을 운반하는 운반체에요. 지상에서, 나사에서 쏘아 올릴 때 우주공간의 궤도에 올릴 때까지 1차 떨어지고, 2차 떨어지고, 3차 떨어지면서 분리되거든요.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떠나면서 사위와 떨어지고요. 1차 분리. 2차분리가 뭐냐 하면, 자기 아내 롯의 처가 뒤돌아봐서 떨어졌거든요. 2차 분리.

3차분리가 뭐냐? 자기 딸들과의 사이에서 나온 자손들인 모압과 암몬, 이것은 아브라함의 나라와 관계없어요. 이게 떨어져요. 1차, 2차, 3차 다 떨어지면서 떨어지는 그 과정 속에서 아브라함언약의 의미가 그 과정 속에서 나온다고요. 어떤 인간도 자기가 태어난 것을 스스로 포기할 위인이 아무도 없어요. 하지만 음녀에게 조치되는 그 과정, 음녀가 망해가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이 나온다니까요.

자기 힘으로 태어남에서 나타남으로 옮겨줄 재주가 없어요. 그러면 나타남은 뭐냐? 나타남은 예측이 안돼요. 예상이 안 된다니까요. 없는데서 나타났기 때문에 우리가 예측할 수가 없어요. 성도의 삶은 뭐냐? 없는데서 나타나는 식으로 주께서 이끄시는 겁니다. 제 아내가 독일에서 한국에 올 때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요.

인천공항에 내렸는데 집에 오려면 대구로 가는 리무진 버스를 타야 되거든요. 좌석을 보니 딱 한 좌석이 남았어요. 제일 뒷좌석이. 그 때 마침 한 자리가 생겨서 그거 타고 왔다는 거예요. 마침 한자리. 예측 못한 거지요. 예상 못한 거지요. 그 말은, 구원의 자리라 하는 것은 우리가 예상하고 내 자리라는 것이 없어요.

어떤 예상 못할, 특정하지 못한 한 순간에 주께서 자리를 마련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 음녀라는 그 과정을 거쳐야 네가 구원된다는 것을 예측 못할 순간에 들릴 때에 그 사람은 태어나면서 마침 나타난 존재로 전환되는 겁니다. ‘에이, 이게 은혜가 안 되는구나…….’ 우리는 구원의 자리가 없어요. 왜냐하면 끝까지 태어난 나를 포기 못할 위인들이거든요.

‘예수 믿으면 내가 천당 갈 거야.’ 이미 예상하고 있잖아요. 기대하고 있잖아요. 그것은 다 가짜거든요. 그것은 우상숭배나 마찬가지에요. 나 우선이니까. 예상도 못했어요. 이 음녀가 구원받는 것은 예상도 못했잖아요.

율법이라는 것이 마침 등장하듯이 평소에 십자가를 천번 만번 들었던 그 사람이 어느 날 교회 다닌 지 52년 4개월 26일 만에, 그 어느 날 어느 순간에 십자가로 모든 죄가 없어진다는 것을 마침 그 때 성령으로 딱 아다리가 되면서 ‘맞아. 십자가 어린양의 피로 끝났잖아.’라는 것이 마침 주어질 때 지금껏 그 사람 신앙이라는 것은 이론이었습니다. 다 헛방이었습니다.

아, 어두운 얼굴을 할 권한이 없다는 것. 교회 오면서 죽상이 되어서 찡그리고 교회 들어올 하등의 권리는 없습니다. 그런 권한도 없고. 사람이 얼굴을 찡그린다는 것은 예상하고 예측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잘되어야 될 텐데. 태어난 내가 잘되어야 될 텐데. 나는 더 뜯겨나가면 안 될텐데.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은 자기위주지 율법위주, 말씀위주, 언약위주가 아닙니다. 뭐든지 태어난 나 위주에요. 그런 식으로 시키는 대로 예수 믿고, 시키는 대로 피도 믿고, 언약 믿고, 좋다는 것은 다, 보약 믿듯이 뭐 오메가 -3부터 해서 교회 오메가-3, 영적 오메가-3, 전부 다, dh니 뭐 그런 것, 하여튼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영적보약은 다 먹는데 얼굴은 늘 어두워. ‘이것 더 해야 되나, 헌금은 얼마를 해야 되나……’ 맨 날 어두워요.

왜? 예측하고 예상하기 때문에. ‘마침’이라는 그 한 자리가 없고요. 천국 자리를 자기가 용 써서 만들려고 하기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기어이 한자리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마침’이라는 그 경험이 없어요. 한평생을 살아도 ‘마침’이라는, 그 ‘마침’이 주는 희열, ‘뭐 이런 것이 다 있나? 어떻게 창세전부터 내 자리가 있었어? 그것도 ’마침!‘ 뭐 이런 것이 다 있어?’ 이게 바로 아브라함 언약이에요. 이것은 달란다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마침이라는 한순간을 열어줄 때 ‘아, 주께서 그런 혜택을 주려고 하셨구나.’ “그렇다면 목사님, 그 ‘마침’이 언제 적을 말합니까? 몇 년도? 2017년도를 말합니까?” 아닙니다. 성도는 평생이 마침, 그 순간입니다. 응축되면 모든 성도의 한평생이 예상 못한 ‘마침’, 한자리가 났다는 그 한자리가 평생을 계속 인도하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는 아무것도 예상하고 기대하면 안돼요. 그저 주어진 것이 ‘마침’ 한자리, 또 ‘마침’ 내일 되면 또 ‘마침’ 그 한자리. 모레 되면 또 ‘마침’ 그 모레. 그게 음녀, 이 더러운 인간, 멀쩡하지 않은 인간을 하나님의 막다른 길에 몰아세워서 막다른 길에 가보니까 ‘음녀도 구원되는구나.’ 하고 마침 깨닫게 되는 그 방식입니다.

그 방식, 하나님이 이론을 실제로, 태어남을 나타남의 존재, 뿌리가 없는, 이 세상에 미련을 둘 어떤 뿌리가 없어요. 뿌리에 대한 어떤 미련도 필요도 없어요. 왜? 말씀 안에서 새롭게 나타난 ‘마침’의 존재로 만들어낸 그 증거물이기 때문에, 그 소산물이기 때문에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남과도 비교하거나 경쟁할 필요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은 말씀대로 구원받는데 우리는 애써서 나를 근사하게 지키면 구원되는지 알았습니다. 시키는 대로 온갖 것 하면 착한 사람 되고 그러면 천당 간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주여, 이게 바로 우상인 것을, 바알 종교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음녀와 다를 바 없음을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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