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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4 20:31:18 조회 : 201         
   시므온과 레위에 대한 예언 190424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시므온과 레위에 대한 예언(창세기 49:5-7)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CJh_fG_Ztqs, Hit:55
 이근호 19-04-24 21:14 
시므온과 레위에 대한 예언

2019년 4월 24일           본문 말씀: 창세기 49:5-7

(49: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49: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49:7)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프리즘을 통과한 빛은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깔로 퍼집니다. 비록 구별되어 보이는 색깔이지만 다 빛의 고유한 성질 안에 같이 공유하고 있는 특성들입니다. 분명 야곱은 12아들에게 ‘축복’을 합니다.(창 49:28). 이 축복의 내용 중에 ‘저주 예언’이 같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시므온과 레위 지파에게만 해당된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단지 전체 이스라엘에 잠복되어 있는 육적인 본성이 이 두 지파를 통해서 드러난 것에 불과했고, 그 드러난 성질에 대해서 아버지 야곱이 비-축복적이고 비-언약적이고, 악마적 요소인 점을 놓치지 않고 겨냥해서 저주를 선포하신 겁니다. 시므온과 레위가 과거에 행한 일에 대해서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미래의 그림을 위해 그들의 과거에 ‘잔인성’이 드러난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미래가 과거의 거울이 아니라 과거가 미래의 거울인 겁니다. 최종적 의미상 미래가 먼저 있고 과거는 그 미래를 위해서 차후적으로 사건들이 일어나야 했던 겁니다.

미래를 위해 과거는 유도되는 겁니다. 최종적인 의미는 미래에 완성됩니다. 그 미래가 곧 신약시대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것은 구약시대입니다. 곧 신약에 비해서 과거가 되고, 신약은 구약에 대해서 미래가 됩니다. 미래의 최종적인 것을 위하여 12지파는 각가지 경험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유일한 여자 형제인 디나가 세겜의 추장에게 강간당한 사건입니다.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련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그 아비 하몰에게 청하여 가로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주소서 하였더라”(창 34:2-4)

여기에 대한 대처는 오빼들에게는 단호하고 잔인하게 진행됩니다. 거짓말로 혼인하는 것처럼 하면서 세겜에 속한 모든 남성들을 살해해버립니다. “제삼일에 미쳐 그들이 고통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부지 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칼로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 오고”(창 34:25-26)

어떻게 보면 과도적 정의감을 앞세운 복수극을 단체로 벌린 겁니다. 아비되는 야곱에게 사전에 의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에 대한 야곱의 평은 ‘저주’입니다. 즉 시므온과 레위가 주도해서 저주받을 짓을 했다는 겁니다. 이러한 저주선포의 배경에는 이들 야곱의 12아들들이 복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12아들에게는 각자 이름들이 따로 있는데, 이 이름들이 품고 있는 내용을 다 합치면 그것이 바로 야곱이 하나님에게 받은 복입니다. 레아 계통의 자식은 모두 8명입니다. 르우벤(보라 아들이라), 시므온(기도를 들으심), 레위(연합), 유다(찬송함), 잇사갈(값), 스불론(함께 거함), 그리고 여종 실바를 통해서 갓(복됨), 아셀(기쁨)이 그것입니다.

라헬계통은 모두 4명입니다. 여종 빌하를 통해서 단(억울함을 풀다), 납달리(경쟁에서 이기다)를 낳게 되고 마지막에 요셉(수치가 제거됨)과 베냐민(오른손의 아들)이 그들입니다. 이들 자식들에게 붙어 있는 이름들은 실은 개인적인 운명이 아니라 전체 이스라엘이 다 공유해야 될 축복입니다.

바로 이런 축복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미래(=신약)의 일입니다. 이 미래의 최종 의미를 낳기 위해 그들은 비-언약적이고 저주적인 요소들을 경유해야 필히 경유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실패마저 자신의 실패로 간주하시므로서 비로소 하나님께서 주가 되시는 겁니다.

같이 이치에 준해서 ‘저주’를 언급하시면서 야곱이 받은 복에 의해서 어떻게 결국 전체 축복에 합류하는 경로가 되는지를 아버지 야곱이 미리 언급하시는 겁니다. 시므온과 레위가 판단한 것은 어디까지 개인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인간들은 태어나면서 육에 속하기에, 자신에게 잠복되어 있는 저주거리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세겜이 정착하고 있는 지역을 통과하게 하시고, 의도적으로 세겜이디나라는 처자에게 반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 세겜이라는 자가 자기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디나를 강간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시고 그 소식을 들은 오빠들이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고 자신들이 느낀 분노를 한껏 발휘하게 하십니다.

즉 인간들이 세상 살아가면서 겪게 되고 마주하는 모든 일들이 언약적으로 볼 때에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속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밝혀지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특정 인간에게만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에게 다 공통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각자 자신의 삶을 통해서 그 죄가 반영되게 되어 있습니다.

죄는 짓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한 상황에 따라 특화되게 됩니다. 시므온과 레위이 받는 저주는 그들만 받는 것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이 다 겪게 되고 오늘날 성도들도 겪는 일이 됩니다. 레위지파는 다른 지파와 같이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각 지파에 파견되는 형식으로 살게 됩니다.

이처럼 오늘날 유대인이나 성도들도 세상 각국에 흩어지게 살게 됩니다. 즉 이 세상에서 그들만의 가시적 공동체를 허락받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저주일까요 축복일까요?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가 무엇인가를 아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비-언약적인 죄라는 것은 단독적인 의미로 모든 것을 환원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최종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고린도후서 1:20에 보면,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28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자기 의미로 돌아오는 성질을 버릴 수는 없지만 성령으로 복을 받게 되면 그런 죄마저 최종적인 하나님의 자기 만족을 위한 필수적 코스로 이해됩니다. 예수님의 모든 활동도 소경된 자, 귀머리기, 앉은뱅이, 귀신들린 자, 죽은 자를 대상으로 그들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의 최종만족성을 드러내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당연히 소경된 자, 죄인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비로소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애초부터 잘난 사람이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9-04-25 12:24 
187강-창 49장 5-7절(시므온과 레위에 대한 예언)1904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9장 5-7절입니다. 구약성경 78페이지입니다.

창 49:5-7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찌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찌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서 분명히 축복한다고, 창세기 49장 28절에 보면 그들에게 축복했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 그 축복내용 속에 저주를 받을 것이요, 라고 저주이야기가 나옵니다. 저주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볼 때에 어떻게 이 저주를 받는 것이 복이 되느냐를 우리가 그 과정을 놓치면 안 됩니다. 저주조차도 복이 된다면 그동안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에 주눅 들고 살았는가를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고 기회가 되는 겁니다.

시므온과 레위, 이 사람들에게 야곱이 저주에 대해서 예언했을 때에 다른 열 명의 형제들은 아주 신바람이 날 수도 있겠어요. 꼬시다, 나는 저들보다 낫잖아, 아주 다행이다, 그들은 저주를 예언 받았지만 우리 자손은 복을 받았으니 상대적인 여유로움, 넉넉함, 승리감에 도취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 하나 형제 중에 저주를 받음으로서 거기에 대해서 신바람이 나고 고소하다 느낄 때에 그것이 바로 우리의 감추어놓은 죄성과 저주성이 폭로되는 순간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스라엘이, 야곱이 받은 축복은 야곱에게 주어졌지만 그 다음 세대에서 열 두 지파, 열 두 자녀로 분산이 될 때에 이것은 일종의 프리즘이라고 보면 됩니다. 햇빛을 받아서 삼각형의 유리를 통과할 때에, 햇빛이라는 색깔은 빨주노초파남보라는 그림자로 좍 비추지요. 빨주노초파남보에서 빨강색의 저주를 받았다면 자주색 입장에서 그걸 신나할 문제가 아니에요. 모두 다 한통속이고 한 몸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열 두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야곱의 언약, 야곱의 축복에 의해서 열 두 자손이 태어났습니다. 원래 자손이라 하는 것은 자식이 있는 자체를 축복으로 간주하거든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할 때에 하늘의 별만큼 자손이 번창한다고 했는데 그 별 같은 자식 하나하나가 다 복이에요. 그래서 야곱에게 두 아내가 있어서 자식을 열두 명을 낳게 됩니다.

제일 먼저 자식을 낳게 된 그 레아한테는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잇사갈 스불론, 이 여섯 명의 자녀, 그리고 실바라는 종을 통해서 자기 아들로 입적된 갓과 아셀까지 포함하면 총 여덟 명을 낳게 됩니다. 르우벤은 ‘보라 아들이라’ 하는 뜻이고 시므온은 ‘기도를 들으심’ 레위는 ‘같이 연합함’ 유다는 ‘여호와를 찬송함’ 잇사갈은 ‘보상 받았다. 값을 쳐서 받았다.’ 스불론은 ‘함께 거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의미를 담고 자식들의 이름을 지었어요.

레아의 동생 라헬이 아이를 못 낳으니 여종 빌하를 통해서 자식을 두 명 낳았는데 단과 납달리입니다. 단은 ‘하나님의 심판’ 납달리는 ‘경쟁해서 이김’ 그런 뜻이고 실바라 하는 것은 레아의 여종인데 두 명의 자녀를 낳게 됩니다. 갓은 ‘복되다’는 뜻이고 아셀은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라헬이 자기의 몸에서 자식 둘을 낳는데 요셉과 베냐민입니다. 그래서 열 두 명의 자식이 되는 겁니다.

요셉은 ‘수치를 제거했다’ 베냐민은 ‘오른손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이름들, 보라 아들이라, 기도를 들으셨다, 같이 연합함, 여호와를 찬송함, 보상받음, 함께 거처함, 하나님의 심판, 경쟁함, 복됨, 기쁨, 수치를 제거함, 오른 손의 아들. 이 가운데서 부정적인 요소는 하나도 없어요.

장래에, 미래에 다 잘된다는 겁니다. 여기에 저주받는다는 것이 없어요. 결국은 장래가, 미래가 이런 식으로 다 되는 거예요. 그런데 주의할 것, 르우벤은 ‘보라 아들이라’ 시므온은 ‘기도를 들으셨다’ 할 때 우리가 여기서 이해를 잘 해야 되는데 기도를 들었다는 응답이 시므온 개인적으로 국한해서 환원되지 않는다. 자기 것으로 돌아가지 않는 거예요. 자기 것이 없어요.

전부 다 야곱으로 종속되는 겁니다. 야곱의 이름이 뭐냐? 뭘 로 바뀌는가? 이스라엘로 바뀌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프리즘처럼, 햇빛 비추면 빨주노초파남보처럼 야곱이 받은 그 축복의 내용이 최종적으로, 미래적으로 이러한 각가지의 복의 성향으로서 특징들이 나타나고 있는 거예요.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기도를 응답한다. 같이 천국에 사니 기도가 응답되지요. 연합한다. 천국에서 사니까 연합되는 거예요. 그래서 뭐할 거냐? 여호와를 찬송한다. 그 찬송하는 생활이 바로 천국생활입니다. 잇사갈 ‘보상받다’ 보상받는다는 것은 이 땅에서 고난 받는 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주어진다. 스불론은 ‘함께 거처한다.’ 전부다 천국생활을 이야기한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찌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찌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이렇게 할 때는 그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저주받았다, 개인적으로 그런 나쁜 짓을 했다, 라고 다른 형제들이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남이 갖고 있는 특징이 내 안에 내장되어 있고 잠복되어 있었던 거예요. 어떤 사람이 신종플루 걸렸다. ‘아이고 난 다행이다.’ 할 것이 아니라 나도 같은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신종플루라는 그 전염병에 걸릴 수 있는 여지가 항상 있는 겁니다. 여기 7절에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때 이 저주를 시므온과 레위 그 형제들에게만 국한된다고 생각하시면 그 자체가 바로 전체적인 통합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언약에 위배되는 겁니다.

남 못되는 것을 보고 고소해하고 신나하는 것, 그런 개인적이고 사적인 이득을, 대리만족을 찾고자 하는 그것이 이스라엘이라는 통합에서 배제된 사람에 불과한 거예요. 아까 제가, 르으벤은 ‘아들이다’ 시므온은 ‘기도를 들으셨다’ 이렇게 했는데 지금 본문 5절에서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찌어다.”

그들의 모의에, 그들의 선동에 가담하지 말라고 저주를 하는데 그게 누구냐 하면, 시므온과 레위거든요. 그러면 시므온은 뭐냐? 이름이 기도를 들어줬다는 거예요. 들어줬는데 오늘 본문 49장 6절에 보니까 그들은 잔해하는 기계다. 부정적으로 평가를 받는 거예요. 그러면 시므온이라는 이름 자체가 갖고 있는, 기도를 응답한다는 그 기도의 응답은 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게 아닌 겁니다. 레위는 그 이름자체가 ‘같이 연합함’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 7절 끝에 보면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다른 지파들, 가족들은 종족들끼리, 같은 씨족끼리 모여 사는데 레위지파는 48성읍으로 해서 이스라엘 온 지파에 파견근무하게 되어 있어요. 다 흩어져서 산다고요. 레위지파만큼은 뭉쳐져서 살지 못하고 열두 지파에 파견되어서 흩어져서 사는 운명이 되었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레위지파가 갖고 있는 이 뜻이 뭐냐? 같이 연합함인데 오늘 본문 49장 7절에 보면 그들은 흩어진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레위지파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본래의 그들의 운명 속에 다 흩어질 수밖에 없는 계기가 찾아온다는 뜻이에요. 결국은 이스라엘은 전 지구상에, 모든 민족에게 유대인이 흩어져서 살잖아요.

레위적인 예언이 그들에게 그대로 적용된 겁니다. 이것은 유대인뿐만 아니고 오늘날 성도에게도 마찬가지에요. 그대로 적용되는 겁니다. 성도가 새로운 이스라엘이니까.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가? 이것을 설명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과거에 일어났던 것을 통해서 미래에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되고 오히려 과거가 미래의 거울로 보시면 됩니다.

미래에 있는 것은 최종성이거든요. 인간은 단편적으로 살기 때문에 자기운명의 최종성에 대해서 본인이 몰라요. 나는 이런 인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예언을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너는 어떻게 된다는 것을 예언한 적도 없고 지시한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예언한 것은 네가 소속된 그 전체가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이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는 그 중 일부가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안에서의 구원이거든요.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 예수님께서 ‘저희’라고 했던 택한 백성들의 그룹이 들어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것을 따로 나만의 운명으로 뽑아내면 그게 반칙이 되는 겁니다. 이게 야곱언약을 주신 그 취지와는 정반대되는 성질, 악마적 성질이죠, 마귀적성질이 뭐냐? 단독적으로, 독립적으로, 독자적으로 자기 것을 당도리하고 자기 것을 챙기려는 그 의식, 사고방식, 이게 오늘 본문에서 저주받는 예언으로 시므온과 레위에게 해당이 된 거지요.

시므온과 레위가 이렇게 저주받는 이유가 있습니다. 창세기 34장25절에 보면, “제 삼일에 미쳐 그들이 고통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칼로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 오고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 누이를 더럽힌 연고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야곱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디나에요. 디나가 세겜이라는 동네를 통과하는데 디나라는 이 소녀를 세겜이 좋아해서 강간을 했어요. 창세기 34장 7절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사람사람이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라고 되어 있잖아요. 성폭행이라는 말이 최근에 나왔는데 성폭행이라는 말은 잘못된 거예요. 그냥 강간이에요. 폭행중의 하나로 보면 안 되고 따로 봐야 됩니다.

성폭행이라 하는 것은 죽음의 의미가 함유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폭행중의 하나가 되어버려요. 그러나 강간이라 하는 것은 상대의 인격성을 죽여 버리는 거예요. 어쨌든 성경에는 강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번역을 성폭행으로 고치는 무식한 짓을 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강간을 했고 강간을 하고 난 뒤에 세겜이 아내를 삼고자 후속조치를 하는데 자기 딴엔 상당히 배려해주는 식으로 했어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오빠들이 용납을 못해서 세겜뿐만 아니라 세겜과 그 집안, 종족의 남자들을 다 죽이기로 모의했습니다. 죽이는 방법은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지요. 우리 집안 사위가 되려면 할례를 행해야 되는데 모든 남자들은 포경수술이죠, 그 수술을 하게 되면 정식으로 결혼을 승낙하겠습니다, 라고 거짓말을 했어요.

그래서 그들이 할례를 행하고 제 3일째 가장 고통이 심할 때, 꼼짝도 못할 때, 그들이 무장이 해제되어 있고 싸움할 여건이 되지 않는데 칼을 들고 시므온과 레위가 주동자가 되어서 성읍에 있는 모든 남자들을 다 죽여 버렸어요. 그 사건이 지금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축복하는 그 시점에서 과거사건이었습니다.

제가 아까 설교 시작하면서, 과거사건은 미래의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과거에 이런 짓을 했기 때문에 네가 미래에 벌 받아라, 가 아니라 미래에 드러나야 될 인간의 비언약적이고 지옥속성이고 인간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께 도전하고 대드는 악마적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과거에 이런 사건이 유발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신 거예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아담이 선악과 따먹었을 때 아담은 분명히 우리 보기에 실패한 것으로 보이지요. 하나님은 인간 아담이 실패한 것도 자기실패로 간주해버렸습니다. 이런 하나님이 없어요. 보통의 종족들은 하나님 따로 인간 따로거든요. 인간이 자기가 잘못했으면 하나님 앞에 벌 받을 것을 생각해서 각종 선물과 뇌물과 그리고 반성과 더불어서 귀한 것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그 선물을 받고 성깔을 누그러뜨려서 “그래, 봐줄게 앞으로는 조심하라.” 이런 관계가 신과 인간의 관계에요.

그런데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은 아담의 실패를 자기실패로 받아버립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선악과 따먹은 것이 과거거든요. 과거의 실패를 재료로 해서 미래에 나타날 하나님의 진짜 모습, 진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그러한 재료로 의도적으로 선악과 따먹도록 하게 하신 거예요. 아담이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아담이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성경이 그걸 가지고 로마서 8장 28절에 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가 신약이잖아요. 신약은 마지막입니다. 마지막 때 최종적인 의미와 최종적인 하나님의 자기만족이 죄를 통해서 오히려 비로소 획득된다는 사실이에요. 그런데 악마는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최종적인 만족을 훼손하기 위해서 아담이나 인간에게 독자적으로 폐쇄된 자기의미와 자기가치를 따로 챙기도록 그렇게 계속해서 부추긴 거예요. 악마가 그렇게 한 거예요.

그 방법이 뭐냐? 네가 잘못한 것은 네가 책임져야 된다는 거예요. 인생에 네가 잘못한 것은 네가 책임져야 된다. 그게 가장 인간답고 신께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이 그것이라고 악마는 우리 내부에서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그걸 계속 촉구하는 겁니다.

악마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과거에 네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미래에 네가 더 나은 운명을 위해서라도 하나님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도록 뇌물을 바치든지, 반성하든지, 회개하든지 해서 네가 네 운명에 대해서 당도리를 해야 된다. 그렇게 해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악마가 인간보고 그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모든 교회가 그렇게 해요, 모든 교회가. 모든 종교단체가 다 그렇게 해요. 배후에 악마가 있으니까 악마가 기독교를 가지고, 종교를 가지고 교인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회개하고 반성하는 것조차도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조차 주의 일이에요. 하나님의 고유권한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뭐냐? 인간은 야고보서 4장 14절에 보게 되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인간은 그냥 안개에요. 뭘 열심히 하고 대단한 것 같지만 나중에 하나의 작은 물방울로 소멸되어 버리는 겁니다.

소멸되는 이런 존재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악마는 자꾸 모든 가치와 의미는 너한테 있다는 거예요. 네가 행동 똑바로 안하고 네가 죄를 지으면 나중에 너만 손해 본다는 거예요. 너만 지옥 간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지옥 못가요. 우리 마음대로 지옥을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죄를 짓고 조현병 걸려서 사람 죽이고 아파트에 불 지르고 해도 지옥 못가요.

지옥은 주님이 가게 한 사람만 갈 수 있습니다. 지옥 가려고 원서 백군데 내고 면접 봐도 지옥 못갑니다. 지옥불합격! 끝나는 문제에요. 그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마지막 때 최종적인 의미로 나타난, 최종적으로 마지막 시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미에요. 고린도후서 1장 19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으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앞에서 사도바울이 예수님 이야기하면서 그 예수님이 어떤 예수님이냐 하면, 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 즉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아멘, 이라 것은 과거에 대해서 아멘이라 하지 말고 자기를 미래의 작품으로, 결과물로 보자는 말이지요. 자신을 하나님이 만든 결과물로 본다면 그 자체가 찬송이에요.

그 자체가 오늘 본문으로 보면 유다에요. 유다의 뜻은 여호와를 찬송함이라. 그게 하나님이 같이 연합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대로 하면 레위에요. 같이 연합함. 그게 하나님의 기도에 응답하는 그게 뭐냐? 시므온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백성이고 아들입니다. 그게 르우벤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의 고난을 보상합니다. 그게 잇사갈이에요.

그리고 영원히 천국에 삽니다. 그게 하나님의 스불론입니다. 우리의 솜씨가 아니에요. 그러면 우리의 할 일은 뭐냐? 아들을 위반하고 기도를 듣지 못할 요소를 보여주고, 연합되지 못할 요소를 우리가 드러내고 여호와를 찬송할 수 없는 행동을 드러내는 거예요. 죄는 짓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드러나는 거예요. 자동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육이기 때문에. 육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최종적인 의미와 하나님의 자기만족에 대드는 요소가 육 안에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육을 가지고 일하시면, 스멀스멀 육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언약에 반대되는 요소가 계속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예언한 겁니다. 예언은 과거에서 미래로 달려가거든요.

과거에서 미래로 달려가기 때문에 그 과정을 오늘 본문 49장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서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게 예언을 한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고정되는 예언이 아니고 이스라엘전체가 다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성질이고 본질입니다. 특징들이에요. 그 사람에게 있는 특징이 나에게도 같이 공유되어 있는 겁니다.

만약에 유다가 찬송이라면 유다가 아닌 다른 지파, 단지파도 찬송이 되고 찬양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안개기 때문에. 그런데 악마는 나를 특화시켜서 너의 의미, 이걸 최종적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나 야곱언약은 나라는 최종적인 것은 애초부터 없다는 거예요. 그것은 망상에 불과하고 환상에 불과한 거예요.

우리는 ‘우리’ 이름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나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 ‘우리’는 어디서 도출된 우리냐 하면 하나밖에 없는 ‘나’ 예수님으로부터 도출된 거예요. 이스라엘은 뭐냐? 야곱의 이름이에요. 야곱이라는 한 사람이 받은 그 언약의 내막이, 그 범위가 이스라엘로 프리즘으로, 빨주노초파남보로 확대된 거라는 말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딱 하나입니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자기만족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죄를 짓든, 우리가 개인적인, 사적인 악마의 일을 했든 간에 그 자체가 주님의 자기만족이에요. 자기의미고. 주님의 주 되심을 위해서 이런 일이 벌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반격하고 거기에 대해서 육적으로 도전하고 그 도전하는 형식이 오늘 본문에도 나와 있지만 그 도전하는 것이 뭐냐? “그러면 나는 뭐꼬?”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내게 돌아올 이익은 뭐냐는 식이에요. 내게 돌아올.

우리는 단독성을 포기해야 됩니다. 이 단독성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언약에 도전하는 성깔을 부리게 되어 있어요. 시므온과 레위가 이렇게 저주받는 예언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결정한 것이 전체의 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전체의 의견이 아니었어요. 그러면 그들의 의견은 뭐냐? 사적인, 개인적인 감정이고 분노를 폭발한 겁니다.

그러면 그 사적이고 개인적인 분노의 폭발, 그런 것들이 레위와 시므온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사전에 몰랐습니다. 몰랐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야곱의 가족을 어디로 인도하느냐 하면, 세겜땅으로 의도적으로 인도한 거예요. 세겜땅에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디나라는 딸을 세겜이라는 추장에게 예쁜 여인으로 보이게 한 겁니다.

그것은 배후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예쁜 것도 죄에요, 정말? 우리한테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만. 예쁜 것도 죄입니까? 아니에요. 예쁘다 하는 것은 주관성이지 객관성이 아닙니다만 어떤 사람에게는 예뻐도 되게 예뻐요. 너무 예뻐요. 옛날에 본 뽀빠이라는 만화가 기억납니다. 거기에 올리브라는 연약한 여인이 등장하고 뽀빠이와 부르투스라는 두 남자가 그 여인을 두고 경쟁을 버리는 내용의 만화를 여러분도 아시겠지요? 뽀빠이라는 과자도 있으니까요.

거기에 올리브라는 여인이 등장하는데 어린 마음에 아무리 봐도 예쁘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그런데 두 남자가 그 여자에게 미쳐서 서로 빼앗겠다고 하고 한쪽은 힘이 없어서 시금치 먹고 힘을 내는데 힘을 내도 그 힘이 단기성이라 오래 안 가요. 그것은 뭐냐 하면, 그 여인에 대한 사랑을 건드릴 때 갑자기 뽀빠이가 시금치 먹는 마음이 들었고 힘을 내서 부르투스(짐승)에게서 그 여인을 다시 빼앗아 온다는 거예요.

과연 저 여자가 빼앗기고 또 다시 빼앗을만한 인물인지 지금 생각해도, 아무리 봐도 내 타입이 아닌 거예요. 어떤 사건이 있는데, 자기 딸이 어떤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하는데 아버지가 반대했어요. 그래서 딸과 딸의 남자친구가 모의해서 아버지를 죽여 버렸어요. 실제 있는 사건이에요. 어제인가 그 사건이 있었어요.

그 딸은 어느 정도로 그 남자가 좋으냐 하면, 아버지를 죽여버릴 정도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건드리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게 아버지가 되든 엄마가 되든 죽여 버린다 할 정도로 좋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게 얼마나 주관적입니까? 객관적이 아니에요. 인간에게는 객관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없어요. 인간은 자기가 뭘 좋아할지를 몰라요. 세상 모든 여자 다 줄 세워서 골라잡는 것이 아니거든요.

인간은 그 때 그 때 달라요. 왜? 안개기 때문에. 그냥 물방울로 있다가 터져버리면 없는 안개기 때문에. 아담 자체가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가 인간이에요. 어느 누구도 착해서 천당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만그만해요. 너는 네가 드러낼 죄가 있고 나는 내가 드러낼 죄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창기 짓 하는 죄를 드러내고 어떤 사람은 세리 하는 죄를 드러내고 어떤 사람은 강도짓 하는 죄를 드러내요.

그러나 천국가고 지옥 가는 것은 누구의 결정이냐 하면, 주님 맘 대로에요. 주님은 왜 주님 맘대로만 합니까, 라고 물으면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이게 내 만족인데 네게 왜?” 이게 주님 만족이거든요. 그 주님만족이 성령을 통해서 와버리면 주님만족에 입각해서 우리가 존재함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면 개인적으로 나는 어떻다, 내가 뭘 했다는 그 자체가 바로 뭐냐? 우리는 수시로 그런 맘이 들 수밖에 없고 또 주관적으로 살 수밖에 없지만 뭘 인식하느냐? 이게 바로 내가 감추고 있었던, 내 안에 잠복하고 있었던, 주께서 이것을 의로 바꿔줄 재료로서의 죄라는 사실을 본인이 미래를 통해서 소급해서 알게 되는 겁니다.

내가 나밖에 모르는 이것이 바로 주님에게 대드는 악마적 요소인 것을 우리가 기쁨으로 자인하게 되지요. 왜? 이런 죄는 주님이 손댔기 때문에만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죄가 되기 때문에. 그냥 죄가 아니고 주님의 용서와 결부된 죄인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이게 이스라엘이에요. 내가 개인적으로 뭘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라는 전체에서 다 공통적으로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만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같이 연합할 수 있고……, 연합한다, 함께 거한다, 스불론이지요, 같이 연합한다, 레위가 되고, 잇사갈이 되고, 단이 되는 거예요.

내 안에, 성도 안에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다 들어 있어요. 그리고 저쪽 것도 다 들어 있어요. 그것을 한꺼번에 말하면, 내 안에 이스라엘 요소 들었고, 저쪽 안에 통합된 이스라엘 나라 들었고. 나도 통합된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다 들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르우벤, 시므온, 레위, 이런 이름들은 뭐냐? 결과적이에요. 미래적이에요. 최종적입니다.

최종적으로 이렇게 되도록, 육적인 죄인을 통해서,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통해서 기어이 하나님의 찬양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기 때문에 이것은 과정으로서의 저주지만 결론적으로 이게 축복이 되는 겁니다. 야곱은 열 두 아들에게 축복을 한 거예요. 저주라는 경로를 통해서.

아까 참고로 했던 로마서 8장 28절을 제가 다시 읽어드리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과거가 아니고 미래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내가 하는 내 일에 대해서 걱정한다는 그 자체가, 염려한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최종적인 자기만족에 대드는 악마적요소인 것을 미리 우리가 눈치 채고 감을 잡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책임질 것은 일체 없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것은 내 소관이 아니에요. 그리고 인간은 죽을 밥으로 만들 재주도 없고 밥을 죽으로 만들 재주도 없어요. 자기 여동생이 강간당했는데 ‘나는 좀 참아야지.’ 이렇게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없는 것을 알고 다 같이 분노하고 다 같이 잔인하게 살해하는데 참여하게 될 것을 아시고 의도적으로 주님께서는 여동생 디나를 강간당하도록 유도하시고 지켜보신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기만족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그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것, 그 하나님의 자기증명을 위해서 인간들인 피조물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어떻게 드립니까, 기도를 어떻게 합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의 몰랐던, 감취었던 죄를 경유해서만 찬양이 되고 감사가 되고 기도가 돼요.

그게 예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군지를 아는 것은 절뚝발이 된 사람, 소경된 사람, 그리고 귀머거리 된 사람, 그리고 귀신들린 자, 이들이 거기 있을 때 예수님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된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경이 되어야 돼요. 절뚝발이 되어야 되고, 우리는 죽은 자가 되어야 됩니다. 우리는 앉은뱅이가 되어야 돼요. 우리는 정상이 아님을 알아야 됩니다.

비로소 우리는 죄인이며 2천 마리의 귀신이 들어와도 합당할 수밖에 없는, “이건 아니지요” 하고 대들 수 없는 그러한 존재인 것을 인식해야 돼요. 비로소 그 안에 있을 때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이 없음을 우리는 짧은 순간이나마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찬송이고 그게 감사고 그게 아셀, 기쁨이고, 갓, 그것이 복됨이고, 그게 요셉처럼 수치를 제거하는 것이고, 그게 베냐민처럼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지요.

단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느낄 때 비로소 우리가 진즉에 심판받아야 될 대상인 것을 알 때 그 심판이라는 대상이 이미 심판 받아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과거사로 돌려주신 그 모든 혜택은 바로 하나님의 자기만족과 최종의미는 너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사적인 너에게 최종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일의 최종의미는 이 예수님에게 있음을 우리가 믿고, 알고, 고개 끄덕이고 수용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 다시 말해서 야곱에게 주었던 언약의 완성, 언약백성에게 준 주님의 축복이고 혜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딴 생각하지 않게 하옵소서. 사적이고 단독적인 것 생각하지 않게 하옵소서. 그러면서도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나밖에 모르는 이러한 나의 어쩔 수 없는 고질병을 도리어 찬양하고 감사케 하옵소서. 이런 죄를 위해서 귀하신 피를 흘리신, 목숨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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