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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0 20:36:28 조회 : 156         
   요셉의 오해 190410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요셉의 오해(창세기 48:17-22)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j10K0LxdcvE, Hit:32
 이근호 19-04-10 21:21 
요셉의 오해

2019년 4월 10일           본문 말씀: 창세기 48:17-22

(48:17)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48:18)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48:19)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48:20)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이 너로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너로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리라 하여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48:21)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48:22)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일부분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야곱은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 언약에 의해서 움직인 자식입니다. 이는 요셉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언약을 받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과연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야곱과 요셉은 의견차이를 보입니다. 요셉은 요셉대로 자신이 뭔가 안다고 우깁니다.

하지만 그 요셉의 앎이란 언약을 직접 받은 아버지 야곱에 의해서 여지없이 무너져야 할 내용입니다. 사람이 뭔가 알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지식에 머무는 것이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뭔가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정상적인 존재로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인간치고 자신을 비-정상이라고 여길 사람은 없을 겁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쌓아놓은 그 모든 체험과 지식들은 전부 모아져서, “지금의 나는 이 정도다”라는 식으로 자아정립에 소모하게 됩니다. 즉 과연 내가 누군가 내가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가를 아는 용도로 쓰입니다.

따라서 뭔가 자신의 의견을 대외적 펼칠 때면, 이는 “나는 이런 정도의 사람입니다”라는 사실도 아울러 비쳐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견을 통해서 자신이 이 정도로 괜찮은 존재인 것을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자기를 정상인으로 간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만남으로서 여지없이 파괴당해야 합니다.

요셉과 야곱의 만남을 통해서 요셉은 평소의 자기 생각이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을 충분을  못 보여주고 있음이 들통납니다. 요셉은 안일하게도 자신에게 먼저 나온 므낫세를 장자로 간주해서 복받을 자라고 여긴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생각이 직접 하나님께 언약을 받은 아버지 야곱의 생각과 같은 것이라고 여긴 겁니다.

그래서 노쇠하신 아버지를 돕는 차원에서 축복을 내리는 손인 오른손 밑에다 맏이인 므낫세를 배치하고 왼손 밑에는 에브라임이 있게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야곱은 요셉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즉 요셉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자신을 근원적으로 변화시키는 언약의 작용에 대해서 몰랐던 겁니다.

모래시계를 전복시키듯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자기 백성 만들기에 나서게 되면 기존의 인간들의 정상적인 생각을 뒤집어버리시는 경과를 보여주십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그는 하갈에서 태어난 자식인 이스마엘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손으로 이해했습니다. 이것이 이삭의 등장으로 뒤집어집니다.

이삭은, 먼저 태어난 에서에 대해서 지극한 애정을 보내었고 마지막 죽을 때에서도 자신의 복을 야곱이 아닌 먼저 세상에 나온 에서의 몫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개입으로 복은 에서에서 야곱으로 옮겨갑니다. 이를 통해서 이삭의 본 생각이 뒤집어집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자기를 복받은 자로 실현하고자 했던 야곱은 하나님의 천사를 만남으로서 평소의 자신의 힘을 의존하는 생활방식이 곧 하나님과 대적하게 되는 상황을 유발했음을 압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방식은 기존의 인간의 생각을 반(反)-언약적 생각으로 자아를 구성하고 있음을 밝혀냅니다.

창세기 48:15에 보면 이런 내용으로 복을 내립니다.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가로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하나님에 의해 언약적 개입은 안일하게 신을 생각한 모든 인간의 기존 생각에 문제가 있음을 밝혀주시면서 접촉하십니다.

요셉의 두 아들에게 할아버지인 야곱이 축복을 하시면서 두 손자의 자리를 바꾸지 않고 의도적으로 그 자리를 지키면서 자신의 팔을 어긋맞게 해서 복을 내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어긋맞게 축복’하시는 행위가 변동의 경과를 보여주는 겁니다. 즉 ‘너 인간의 생각은 이런 식으로 나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뀌야 한다’는 겁니다.

그 바뀜의 경과과정에 참여해야 하는 운명, 이것이 곧 복입니다. 히브리서 11:21에 보면,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축복하는 자리가 ‘지팡이입니다. 야곱에게 있어 지팡이란 자신이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필요치 않는 물건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천사를 만나서 천사에게 얻어맞고 난 뒤에 야곱은 지팡이에 의지해서 걷게 됩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창 32:31) 즉 야곱이 천사를 만나고 난 뒤에 언약이 야곱에게 있어 유일한 가치요 존재 의미가 됩니다. 이는 ‘내가 나답게 되겠다’가 아니라 ‘언약이 언약답게 되겠다’에 자신이 관여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내가 구원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언약이 자체적으로 목적을 위해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언약의 목표는 어디일까요? 여기서 야곱의 오른편 자리가 복의 자리인 것이 언약적으로 이미 보여주게 됩니다. 시편 110:1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언약의 ‘최후의 1인자’를 둘 자리가 하나님의 오른편의 자리입니다. 이는 어느 인간을 스스로 최고의 1인자 되는 것을 주님이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인간들이 무심코 살아가는 모든 방식은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이 자신을 최후의 1인자로 여기면서 움직이기에 이 인간을 둘(2)로 쪼개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내부에 흐르는 언약의 경로를 삽입시켜 버립니다. 그 언약의 경로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시려 가는 경로입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 계신 분이 이 땅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가시는 겁니다. 가장 처참하고 망가진 자리가 곧 십자가 죽으심의 자리입니다. 그 죽으셨던 분이 곧 시편 110:1에 의하면 원수를 유일하게 다스릴 수 있는 자격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영생얻은 자는 최후의 심판의 자리에게 왼편이 아니라 오른편이 됩니다. 주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우리 인간의 생각을 파괴하시고 주님의 언약적 성과를 집어넣어서 그 언약적 성과만을 계속 살려는 방식으로 우리 하나님께서는 일하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우리 인간 위주가 아니라 언약 그 자체 위주로 일하신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9-04-11 13:00 
185강-창 48장 17-22절(요셉의 오해)1904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8장 17-22절입니다. 구약성경 78페이지입니다.

창 48:17-22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이 너로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너로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리라 하여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일부분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야곱이 마지막에 자기의 임종을 앞두고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을 하는데 열 두 지파의 축복 이전에 먼저 자기 손자 두 사람에게 축복을 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요셉의 아들로서, 자기 아들의 아들로서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보지 않고 자신의 직접적인 아들로 간주해서 지파가 열 두 지파에서 열 세지파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 이것은 야곱의 자손,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던 언약이 요셉의 두 아들의 생겨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언약은 확실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축복이라는 방식으로 두 손자에게 임하는 겁니다. 야곱은 자기 집안이 얼마나 번창하느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육적인 집안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된 약속의 자식들이 얼마나 번창하냐에 대해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기 때문에 차질 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그 흔적과 증거를 지금 축복이라는 방식으로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우리 집안이 아니고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약속대로 진행되는 거지요. 보통 세상에서는, 네가 사람 믿을래, 약속 믿을래, 하면 사람을 믿지 약속은 안 믿잖아요. 약속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것은 자기가 유리하면 지키고 불리하면 안 지킨다고 생각하잖아요.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성경도, 보통 “하나님 믿을래, 약속 믿을래?” 하면 사람들은 보통 하나님 믿는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너무 모호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그 약속의 실효성, 현재 약속대로 모든 것이 차질 없이 진행된다는 사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하나님 믿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약속을 앞장세우시고 자기가 던진 약속을 뒤따라가면서 성취하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운영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 약속이 우리가 있는 곳에 멀쩡하게 다가오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다가오게 되면 인간의 비약속적인 것, 약속이 아닌 것, 약속과 반대되는 적대적인 요소가, 인간은 자기에게 그게 있다는 생각을 못하지요.

그러나 약속이 접촉하게 되면 내 안에 약속에 위반되고 반대되는 성질이 내 안에 이미 장착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약속은 우리에게 약속을 적용할 때는 그냥 추가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갖고 있는 잘못된 약속, 약속에 위배되고 반대되는 요소를 폭로시키면서, 그걸 탄로시키면서 약속과 교체시키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중국집에서 음식을 시키는데 친구가 전화 건다고 주문받을 때 없었어요. 그래서 친구도 당연히 자장면 좋아한다고 “자장면 두 그릇” 해놓았는데 친구가 뒤늦게 와서 “뭐 시켰느냐?” “자장면 시켰다.” “난 자장면 알레르기 있어서 못 먹는다. 짬뽕으로 시켜 달라.” 그러면 짬뽕을 그냥 시키는 것이 아니고 짜장 빼고 짬뽕을 추가해야 되지요.

친구가 늦게 왔기 때문에 알게 된 거예요. 친구는 자장면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그런 노래 있잖아요. 우리 어머니는 자장면이 싫다고 한다는 노래가 있거든요. 친구가 자장면 안 좋아하는 것을 부재할 때 비로소 의견 차이를 통해서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몰라요. 우리는 그동안 살아온 모든 경험이 응축이 되어서 오늘날 나를, 자아를 형성한 겁니다.

인간이 경험하고 만나는 모든 경우들은요 모든 것이 어디에 초점이 맞춰지느냐 하면, 나는 이런 인간이다, 에 결론적으로 다 뭉쳐져 있어요.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이, 이렇게 경험했으니 나는 이 정도 되는 인간이다, 하는 자기 확인, 자기증명, 여기에 몰두하면서 거기에 모든 경험이 뭉쳐지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지난 이야기에 토 달면 지금의 나 자신에 대해 시비 거는 것으로 이해하기 마련이에요. 자기 자식을 건드리면 부모가 가만 두지 않지요. 왜냐하면 자식은 자기의 모든 인생의 체험이 담겨 있는데 자식을 욕하는 것은 곧 나를 욕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식이 뭔가 잘못되면 아버지가 그것을 뒤집어쓰고 아버지 자기가 감옥소 가는 경우도 있지요.

한 뚝배기 하실래예, 하던 그 분. 아들이 마약을 했는지 본인이 했는지가 분간이 안 되지만 어쨌든 아버지가 ……, 이것은 그저 하나의 설이지만 어쨌든 간에 인간이라 하는 것은 모든 것에서 그저 자기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점검하는 차원에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것은 자기가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과 직접 접촉이 되고 부딪히지 아니하면 나에게 얼마나 반하나님적이고 하나님의 적대적인 요소가 있는지를 모릅니다. 오늘 본문의 요셉도 마찬가지에요. 요셉에게는 애굽에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가 므낫세, 두 번째가 에브라임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자기자식들에게 축복을 해준다 하니까 요셉은 당연하게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다 응축해서 므낫세가 맏이고 에브라임은 차자니까, 지금 아버지가 눈이 어두운 판이고 돌아갈 때가 다 되어서 정신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걸 감안해서 친절을 베푸는 겁니다.

아버지의 오른손이 장자에게 가도록 므낫세를 있게 하고 아버지의 왼쪽에는 에브라임을 두었어요. 오른손에 장자 왼손에 차자, 그렇게 하나님이 축복을 해주기를 기대를 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이 요셉의 이러한 생각이 아버지 야곱의 생각 앞에서는 이게 반대가 되는 겁니다. 잘못된 거예요. 아버지는 오히려 14절에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맞겨 얹었더라.”고 되어 있어요. 어긋맞게.

이 대목이 정말 신기해요. 아들들을 바꿔서 하면 되는데 그냥 아들들은 아들대로 두고. 이것이 보통 인간들의 생각이지요. 언약을 모르고 평소에 편한 대로,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하고 편한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큰 아들에게 복이 오고 둘째아들은 큰 아들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그냥 살아간다.’는 것, 둘째아들은 큰 아들의 보조, 맏이의 보조라고 하는 것이 그 시대의 풍습이었거든요. 관습이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아버지는 인간들이 갖고 있는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이고 관습적인 것을 그대로 두면서 힘들게 팔을 어긋맞게 해요. 이렇게 한다고요. 요셉이 그걸 보고, 18절에 보면,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요셉이 야곱을 한 수 가르치려고 “아버지, 지금 잘못되었습니다. 지금 눈이 어두워서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얘가 장자고 얘가 차자입니다. 제가 맞습니다.”

그럴 때 19절에 보면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쉽게 말해서 아버지 야곱이 아는 것과 요셉 네가 아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두 가지를 생각해야 돼요. 왜 야곱은 뻔히 알면서 팔을 어긋맞게, 크로스가 되게 축복을 해야 될 그 이유를 아버지 야곱은 알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언약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이 인간에게 다가올 때는 인간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을 반대로 뒤집어야 된다는 거예요. 전복시키는 거예요. 모래시계를 다시 가동하려면 뒤집어야 되잖아요. 인간은 뒤집어지지 않으려고 해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중심이고 내가 알고 있는 나를 하나님은 어떻게 천국에 보낼 것인가, 나는 정상적이고 하나님도 정상적이니까 정상적인 하나님이 정상적인 나를 정상적인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이것이 정상적인 하나님의 일관된 작업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를 비정상으로 여기지 않아요.

자기를 훌륭한 사람으로 인간은 자꾸 간주해요. 훌륭한 사람으로! 누가복음 18장에, 바리새인이 세리와 같이 있으면서 바리새인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저 저질스러운 세리와 같지 않습니다.” 손가락질을 하면서 저 세리와 같지 않다고 했어요. 바리새인은 저 세리와 같지 않아서 지옥 간 거예요.

자기는 십일조하고 금식하고 충성하고 구제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하나님이 율법에서 시키는 것은 다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옥 간 거예요.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자기 자신이 점점 잘나 보이고, 멋있어 보이고, 대단해 보이는 겁니다. 거기다 옆에 욕 얻어먹는 세리가 있으니까 ‘저 사람보다 내가 월등하게 나으니까 하나님께서 구원을 해줘도 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고 여긴 거예요. 이게 정상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왜? 그 시대에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것을 바꿔버리는 겁니다. 정상이라고 여기는 그것이 비정상이고, 하나님이 받아주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나는 천국 가지 못할 정도로 비정상입니다.’라고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천국가게 하시는 거예요. 이게 예수님의 본심입니다. 본 마음이에요. 교회가 외쳐야 될 것이 뭡니까? 사람들 비위맞추는 것을 해서는 안 되잖아요.

예수님의 본심을 전해야 되지 않습니까? 전부 잘난 얼굴로 오게 되면, 그 잘난 얼굴 더 잘난 얼굴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집단적으로 전부 다 지옥 보내는 교회 밖에 더 되겠어요? 뭔가 바꿔치기 하는 요소가 있어야 돼요. 하나님의 약속이 점잖은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질 좋은 사람이고 점잖은 사람이라고 간주하지요.

그러나 막상 약속이 우리에게 접촉이 되고 접근이 되면 우리에게는 이 어긋남이 필요한 거예요. 이게 복이에요. 축복을 할 때 이렇게 나란히 한 것이 아니고 어긋나게 축복을 했다고요. 요셉은 몰랐어요. 요셉이 그걸 몰랐다는 말은, 아버지 야곱 앞에서 요셉의 의견은 파괴되어야 됩니다. 묵살되어야 되지요.

그 말은 뭐냐? 요셉의 두 아들 축복하는 현장에서 아버지 요셉이 갖고 있던 사고방식을 언약 앞에서 깨져야 돼요. 부서져야 됩니다. 내 생각 같은 그런 것은 소멸되어야 돼요. 언약 앞에서. 그렇다면 이 야곱이 왜 어긋맞게 할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랬는지 창세기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창세기에서 두 손자를 축복할 때는 48장 2절에 보면 어디서 축복하느냐 하면, “혹이 야곱에게 고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야곱이지요)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요셉에게” 이야기하면서 축복을 했어요. 두 손자에게 침상에서 축복을 했는데 히브리서 11장 21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지팡이머리에 의지해서 경배했다 했어요. 경배를 누구한테 하느냐? 다시 창세기 48장 15절에 보면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가로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아버지를 어긋맞게 하고, 이삭을 어긋맞게 하고, 완전히 자신을 뒤집어버리신 그 뒤집으시는 그 작용이 이 두 손자에게도 그대로 임하게 하옵소서. 그러면 그 뒤집었다는 증거가 뭐냐?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지팡이로 되어 있는데 왜 지팡이냐 하면, 창세기 32장에 보면, 야곱이 전에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고 난 뒤에 얻어터진 적이 있어요.

천사한테 이겨보겠다고, 형에게 이겨보겠다고 설쳐대던 그 힘의 근원이 있어요. 힘이 나오는 그 근원에 대해서 천사가 주먹으로 가격을 해버렸거든요. 가격을 하니까 내가 힘을 쓸 필요도 없는 존재에 불과한 것을 야곱은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천사 앞에서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내가 힘을 쓴다는 것은 내 구원에 전혀 보탬이 되지 못하고 도움이 되지 못하는 힘을 내가 갖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갖고 있고 그동안 내가 주특기로 발휘했던 그 모든 것은 하나님과 싸움질하기에 동원된 것이지 오히려 하나님께 복 받는 데는 반대가 되는, 전혀 보탬이 안 되는 식으로 지금껏 살아왔음을 알게 되는 겁니다. 내가 스스로 살아보려고 애쓴 그것이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반대되는 처신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천사에게 얻어맞고 난 뒤에 창세기 32장 31절에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그 때부터 야곱은 지팡이를 짚고 간 겁니다. 이 지팡이는 뭐냐? 내가 하나님과 직접 만났다는 증거에요. 꼭 서울 안 가본 사람이 서울 가본 듯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하나님 모르면서 하나님 만난 것같이 우기고 있거든요.

직접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그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나로 하여금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힘 세다고 자부했던 내가 남에게 이길 수 있는 힘을 쏙 빼놓는 노림수를 가지고 찾아오신 주님, 그래서 내 힘으로 뭐든지 내가 될 수 없는 것, 내 힘으로 내가 약속의 백성, 약속의 사람이 될 수 없음을 일깨워주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증거가 뭐냐? 바로 지팡이가 되는 겁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뀐다는 것은 자기가 이름을 이스라엘로 지은 적이 없어요. 야곱 이름은 아버지가 지었지만 그 야곱 이름이 어디까지 유효 하느냐? 야곱이라는 뜻은 빼앗는 자, 남을 속이는 자거든요, 남을 빼앗고 속이고 내 힘으로 내가 이 땅을 살아보려고 애쓰는 그 모든 시도가 어디까지가 끝이었느냐 하면, 직접 자기에게 하나님이 축복을, 약속을 주기 전까지만 유효했어요.

만나고서부터 이름이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로 바뀌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사실은 자기 이름이 아니고 자기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이름이고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에요. 자기는 거기서 이미 죽은 자에요. 브니엘이라는 그것은 그 뜻이에요. 경부고속도로 부산톨게이트 언덕에서 보면 ‘브니엘여자고등학교’라는 것이 있어요.

브니엘. 하나님과 대면해서 사실은 내가 죽어야 되는데 죽은 나를 하나님께서 살려줬다는 것. 하나님 만나기 전에는 내가 죽어 있다는 것을 몰랐는데, 하나님 만나고 나서 내가 이미 살아도 산 인간이 아니고 죽은 인간이라는 것을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는 그 경우를 지명으로 이해한 것이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했다. 죽어야 되는데 내가 사는 것이 웬 행운이냐. 웬 축복이냐. 그래서 그 지명이 브니엘이에요.

그래서 그 이름이 죽었던 나를 다시 언약을 실었다는 조건하에, 언약을 담았다는 조건하에 새이름을 부여받았는데 그것은 야곱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살아 있다는 증거로 이름이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살아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 만드는 겁니다.

우리는 껍데기에 불과해요. 인간은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하고 안에는 언약이 살아 있는 거예요.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쉽게 말해서 십자가지요, 십자가가 언약의 완성이니까,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 안에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죽은 자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는 영원히 살아야 될 숙명을 지니게 된 사람으로 새롭게 만들어지는 겁니다. 이게 언약이에요.

따라서 언약은 우리를 구원하는 목적이 아니고 언약자체 어떤 경로를 보이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야곱은 요셉이 배치한 두 손자를 그냥 그 자리에 가만 둡니다. 두고 어긋맞게 함으로서 큰 아들이 나중이 되고 나중이 장자가 되는 이 경로가 언약이 자기백성에게 왔을 때 보여주는 경로를 손자를 축복하면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1이 아니고 2가 되어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가 아니고 둘이 되어야 되는 이유는, 둘이 있어야 하나와 하나 사이에서 경로가 발생되거든요. “너희들보기에 누가 장자냐?” “얘가 먼저 태어났으니 얘가 장자입니다.” “너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그러니까 너희는 언약을 모르는 거야. 하나님을 모르는 거야.”

 “이건 누구지?” “둘째 아들이지요. 둘째 아들은 복을 못 받지요. 첫째 아들이 다 가져가니까.” “그러니까 너희들은 하나님의 약속도 모르면서, 하나님의 본심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우기고 있는 거야.” 꼭 서울 안 가본 사람이 서울 가본사람처럼 위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직접 주님을 만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구원하면서 목적은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적인분이 어떤 식으로 이 땅에 등장하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백성들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히브리서 11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입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히브리서에서 믿음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야곱은 껍데기라는 말이지요. 야곱은 껍데기에요. 아브라함도 껍질이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노아도 마찬가지고. 여기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은 전부 다 믿음의 껍데기인데 그 안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것이 있어요.

그 믿음은 뭐냐? 바로 실체기 때문에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그들 속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할 새로운 체험을 그들은 가진 사람들, 그게 믿음의 조상들이고 믿음의 계열들입니다. 이런 식으로 야곱이 고백할 수 있는 가운데서……, 아까 본 창세기 48장 1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조부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스마엘을 아들로 여겼거든요. 나중에는 이스마엘이 아들이 아니에요. 없던 자식이 이삭이 아들입니다. 이것도 전부 뒤집는 거예요. 어긋맞게 하는 거예요. 육적인 생각을 다 드러내놓고 그걸 뒤집어버리는 겁니다. “자, 네 생각 다 끄집어냈지? 그거 아니거든”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인간의 생각과 인간의 모든 경험과 체험은 뭘 증명하고자 하느냐 하면, 내가 잘났다는 것, 내가 이 정도 되는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은 생각과 체험을 하게 되고 그것을 바깥으로 발설합니다. 모든 인간은 마찬가지에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이삭도 마찬가지고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이정도로 아니까 저를 버리지 마시고 내치지 마소서.

그런데 하나님이 막상 언약과 약속을 가지고 오니까 “그래. 그게 네가 아는 거야? 그럼 내가 이제부터 뒤집을게” 그걸 뒤집는다는 말은, 내가 지금껏 나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높이기 위해서 했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약속과는 정반대되는, 하나님이 싫어한바 되는 것을 수십하고 쓰레기 같은 것들을 모아놓고 나 잘났다는 요소로 과시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제가 아까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과 세리 이야기를 했잖아요. 인간이 사는 것 뭐 있어요? 그거예요. 뒤집기에요. 하나님의 약속이 오면, 하나님의 십자가가 오게 되면 뒤집어지는 거예요. 어떤 나의 잘난 것도 내 구원에 보탬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건지지 나를 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약을 건지다 보니까 언약의 운반체가 된 그 사람을 건지는 거예요. 언약을 품고 있는 사람.

이래도 여러분이 실감이 잘 안 나는 것 같은데 제가 한 예를 들 테니 이 사람이 뭐가 문제인지 보세요. 40대 중반의 부부가 사업에 실패했습니다. 애가 셋이 있어요. 큰 애 있고 밑에 쌍둥이 둘입니다. 애들에게 감기약 먹이고 청 테이프 다 발라놓고 감기약 먹인 애들이 다 자니까 번개탄 피웠습니다. 사업실패를 비관해서 동반자살하기로 했는데 아침 되어서 다섯 명 다 죽어야 되는데 막내 애가 아침에 잠이 일찍 깨서 문을 열고 나갔다가 들어왔어요.

그 바람에 찬 공기가 밖에서 들어와서 식구들이 아침에 다 살아났는데 그 중에 하나가 거품 물고 죽었어요. 남편은 5년 징역 받았고 여자는 3년 징역 받았어요. 실제사건입니다. 우리가 그 가장 입장이 되어봅시다. 뭐가 잘못되었느냐? 요새 현대인치고 사업 안하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사업 잘해도 실패할까 걱정되고 못하면 못하는 대로 걱정되고요.

직장 다니면 언제 쫓겨날까 걱정하고, 직장 잘 다니면 퇴직하면 뭐할까 걱정하고. 자, 인간이라 하는 것은 도대체 태어나서 머릿속에 매일같이 생각하는 것들이 다 어디에 집중하느냐 그 말이지요. 둘로 쪼개져야 돼요. 므낫세와 에브라임으로 둘로 쪼개져야 된다고요.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를 둘로 쪼개버립니다. 쪼개고 그 경로를 밟혀주는데 인간은 마귀한테 훈련받기를 오직 최후의 1인자가 누구냐 하면, 본인밖에 없어요.

내가 사업실패 했으니 부끄러우니까 이 부끄러움을 내 자식한테 물려주기 싫다고 애 세 명과 동반자살 시도한 겁니다. 그래서 징역사는 그 사람이 남의 이야기입니까? 굉장히 친숙한 이야기 아니에요? 우리도 언제든지 동반자살 후보감으로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그 사람의 문제점이 곧 우리들의 문제점이거든요.

우리는 하나님 믿고, 예수 믿고, 백날 교회 나와도 마지막 최후의 일인자는 누구냐 하면, 가장 가치 있고, 나의 모든 행동과 모든 열심, 모든 것을 퍼부어서 마지막 최후로 남기고자 하는 가치는 뭡니까?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아니면 나입니까? 나잖아요. 나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언약에 반대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적입니다. 하나님의 원수에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뭐냐? 오른손으로 언약을 맏이에게 주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오른 손으로 언약을 준 그 맏이가 단순한 인물이 아니에요.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결과물, 하나님의 언약이 살아 있다는 증거물로 남겨주는 겁니다. 그러면 왜 오른손이 축복의 자리냐? 시편 110편 1편에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왼쪽은 안 되고 왜 오른쪽이냐는 말이지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예정하신 계획에 의하면 마지막 최후의 일인자로 하나님의 오른편의 그 자가 궁극적으로 언약의 목표가 되는 인물이에요. 모든 하나님의 약속은 뭐냐 하면, 오른편에 앉을 최후의 인물을 등장시키는 그것입니다.

오른편에 앉아 있는 그분은 어떤 기능을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를 퇴폐시키고, 원수를 통제하고 지배해서 꽉 밟아버리는 그러한 기능을 완료한 분, 그 분이 오른편에 있는 거예요.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으로 인하여 두 개의 상반되는 영역이 발생됩니다. 하나는 뱀의 후손 하나는 여자의 후손이에요. 둘 사이에는 곱게 지나가지 않습니다. 평화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뱀의 후손은 어떤 분의 발꿈치를 물게 되고 여자의 후손인 어떤 분은 물게 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뱀의 머리를 친다고 했어요. 이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이스라엘 속에 흘러들어왔는데 그러면 장차 오실, 곧 최종적으로 모든 것이 내용이 다 드러날 때에 여자의 후손으로 오른편에 계실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을 공격하는 하나님의 원수는 모든 인간 속에 내장되어 있어야 돼요.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반대되는 요소들이 인간내부에 계속 흐르고 흘러 들어와야 되는 겁니다. 그게 아브라함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잡으려고 했고, 이삭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삭은 맏이 되는 에서에게 복 주려고 했고, 두 번째인 이삭을 저주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개입해서 두 번째, 작은 자가 복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도발적인 현상은 하나님이 직접 약속으로 개입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 결과로 인하여 야곱은 복을 받고 에서는 저주를 받는데 그 현상이 바로 야곱의 솜씨도 아니고 에서의 무능함도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실제성, 언약이 실제로 여기 계시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가장 낮은 자를 통해서 가장 높은 자를 배출하고 알리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누가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진해서 의인이 저주받은 분 누가 있습니까?

십자가에 죽기까지 내려가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가장 내려가신 예수님을 가장 높은 곳, 하나님이 일하시는 주의 오른편까지 올려놔버렸다는 말이지요. 그 경로를 지금 야곱이 두 손자를 두고 어긋맞게 하면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쌍둥이 애까지 포함애서 애 셋을 자기 사업 실패했다고 해서 비관하면서 동반 자살하는 사람, 그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라고 했지요.

그 사람은 도대체 뭘 모르는 겁니까? 이야기가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의 잘못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을 모른다는 말은, 곧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거예요. 언약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 사람이 만약에 하나님에게 기도를 한다면 “하나님이여, 사업 왜 실패하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면 나는 하나님 못 믿습니다. 주님이 살아있다면 절 좀 도와주세요. 살고 싶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는 말이지요.

그게 바로 야곱이었어요. 그게 야곱적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진짜 하나님은 그 야곱을 뭘 로 바꾸느냐 하면, 그 야곱을 죽여 버리고 그 죽은 야곱을 가지고 야곱이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야곱, 이스라엘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 때 등장한 것이 뭐다? 지팡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뜻은 내 생각과 정반대였습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언약이 사는 것이 주의 뜻이었습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 것.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처럼. 내가 사는 것은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살리기 위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나 이렇게 훌륭하다, 나 이렇게 괜찮다, 나는 이 땅에 존재할만한 가치가 있다, 남은 가난해도 나는 부자가 될 그만한 자격이 있다. 전부 다 나에 대한 선호와 나에 대한 옹호, 나의 가치에 대한 사수, 내 의미 높이기. 인간이 그거 외에 할 줄 아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게 지옥인데요. 나 중심의 세계가 지옥인데요. 그게 바로 지옥이에요. 우리는 지옥 일만 해 왔던 겁니다. 주께서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옥으로 가는 거예요. 끝으로 마태복음 25장 33절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심판하시는 대목입니다.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왜 양은 오른편일까요? 오른편에 바로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오른편에 주님이 계셔요. 그 오른편이 무슨 자리냐 하면, 자기가 원하는 자를 살리고 원치 않는 자를 지옥으로 내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하는 자리, 그게 하나님의 오른편의 자리, 구약에서는 그걸 주의 이름의 자리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 주의 이름의 자리가 그냥 말로만 자리가아니라 거기서 뭐가 쏘아대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쏘아대고 그 약속이 아브라함의 가슴에 맞았고, 이삭가슴에 맞았고 이제 야곱 가정에 맞았고 이제는 그 약속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가슴에 와 맞고 그것을 통해서 그 다음에 보면 열 두 지파 전체가 야곱이 알게 되었던 하나님의 진짜 본 뜻을 이스라엘 전체가 알기를 원해서 야곱은 어긋맞게 하는 겁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것. 인간들에게 개무시당한 자가 주님인 줄 상상도 못했지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자기가 위대한 만큼 하나님도 위대하기를 원해요. 지금도 이슬람사람들 신을 뭐라고 합니까? 신은 위대하다 하지요. 신을 초라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인터넷을 찾아보면 저에 대해서 욕한 대목들이 나올 거예요.

이 근호 목사가 주장하는 십자가는 철저하게 패배하는 십자가라서 엉터리라고 하는 거예요. 얼마나 속으로 감사한지. 제가 끼어들 자리는 아닙니다만 다만 뭐는 드러났느냐 하면, 그들은 자기가 위대해지기를 원해서 십자가를 믿는다는 사실이 폭로된 거예요. 제가 잘났다는 것도, 잘했다는 것도 아니에요. 폭로당한 거예요. 잘못된 십자가입니다. 잘못된 예수에요.

“하나님, 이보다 더 나를 망친다 할지라도 그것이 언약만 드러낼 수 있다면 기꺼이 저를 주의 언약에 의해서 쓰이게 하옵소서.” 이게 사도바울이잖아요. 더 이사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심 뚝. 관심 없어요. 남하고 비교할 필요도 없어요. 남하고 경쟁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 우리는 주님하고 상대해야 될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그동안 잘못 안 것 있으면 이 순간 완전히 뒤집어주옵소서. 주님의 뜻에 의해서 갔던 모든 선지자와 사도들이 스데반집사가 어떻게 살았는지 뻔히 보면서도 우리는 세상부귀영화, 세상 것을 탐하지 않았습니까? 주여, 이러한 나 중심의 생각이 오히려 지옥인 것을 이제는 비로소 실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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