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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6 20:39:09 조회 : 149         
   브엘세바190206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브엘세바(창세기 4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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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링크 : https://youtu.be/dCormYP8z18, Hit:15
 이근호 19-02-06 21:22 
브엘세바

2019년 2월 6일            본문 말씀: 창세기 46:1-4

(46:1)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발행하여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니

(46:2)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고 불러 가라사대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46:3)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6: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겉으로 보면 아버지 야곱이 아들 요셉을 만나려가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러나 요셉은 ‘아버지 없이’ 자라난 사람입니다. 요셉이 만나야 될 사람은 육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언약을 제공받은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본인은 그 언약의 자식이 되는 겁니다. 야곱 입장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에게 요셉은 벌써 ‘잃어버린 자식’이요 ‘죽은 자식’입니다. 살아있다는 풍문은 있지만 눈으로 목격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확정된 것은 없습니다. 이런 야곱의 앞길에 개입하시는 분이 있었으니 그 분이 바로 조상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요 이삭에서 찾아오신 그 하나님이십니다.

즉 이번 일의 기획자는 하나님이셨던 겁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됨이란 그냥 하늘에 계신다고 해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상에 일을 벌려서야 합니다. 즉 ‘누구누구의 하나님’이 되셔야 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다움의 전개입니다. 일종의 자작극입니다. 이 작업에 하나님께서 사람이 필요하신 겁니다.

이처럼 구원이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일입니다. 인간의 구원 열의와 구원소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이 구원받고자 하는 것도 욕심입니다. 인간은 나름대로 자기초월을 시도합니다. 그러니 교회 와서 억지스러운 자기조작에 나설 뿐입니다. 평소의 인간들의 삶은 자기가 주인공입니다.

자기가 아니면 자기를 지킬 줄자가 없음을 분명히 하는 방식으로 일생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이런 정신상태에서 자기구원을 시도하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잃어버림’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못놓고, 안 버림받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하면서 평생을 끌고 왔는데 새삼스럽게 버릴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야곱의 경우, 이름이 특이합니다. ‘속이는 자’가 본 이름입니다. 이런 이름은 하나님께서 이삭의 가정에 개입하므로서 얻어진 이름입니다. 아마 본인이 본인의 이름을 짓는다면 결코 이런 식으로 짓지 않았을 겁니다. 이름이 어쨌든 야곱은 자기에게 충실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자신이 사랑하고 싶은 자식에서 마음껏 모든 사랑을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로 야곱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요셉을 잃어버리고 죽어버리는 계기가 된 겁니다. 야곱 가정 내에서 벌어진 사태입니다. 요셉은 고향 야곱집과 관련된 모든 관계가 단절된 공간으로 이동해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일생이 진행됩니다.

부모와 형들의 일체 도움없이 순전히 하나님이 주신 꿈의 내용대로만 요셉은 애굽에서 생존하게 됩니다. 이는 곧 ‘구원이란, 기대하는 인간의 그 어떠한 의도가 삽입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진행됨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이스라엘’로 그 본색을 드러내는 과정 속에 하나님의 개입을 말해줍니다.

야곱은 두 개의 이름을 지녔습니다. ‘야곱’이 그것이고 ‘이스라엘’이 또 그것입니다. 한 개체에 두 개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건지면서 진행하는 절차를 말해주는 겁니다. 즉 성도는 구원되고자 하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는 작업이 하나님에 의해서 실시됨을 말합니다.

성도는 일종의 그릇이라면 성도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담는 그릇입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 9:20-21)

이 그릇에 담길 내용은 장차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게 됩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통해 두 개의 상반된 경로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는 ‘내려오는 것’, 또 하나는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이 두 경로가 야곱의 두 이름으로 중첩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이름으로 야곱을 철저하게 사용하시는 겁니다.

야곱이 복을 소유한다든지 구원을 받아 챙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하시는 일에 참여함을 받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죽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죽음없는 주님도 없고 구원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죽으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셔야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은 이 땅의 환경을 통해서 죽고 잃어버리고 버림받기 위해 오신 겁니다. 이는 곧 ‘버림받음’이 없는 구원은 없다는 겁니다. 또한 이 원칙은, 인간의 구원열망을 하나님께서 거부하신다는 겁니다.

“인간들아 그냥 그 자리에서 버림받은 채로 있으라”는 겁니다. 이 잃어버림의 공간에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들어오시는 겁니다. 같이 잃어버리겠답니다. 예수님은 곧 죽음의 코드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이 죽으신 겁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즉 당연히 죽어야 될 자들의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마땅한 아이디어라는 겁니다. 구원에는 잃어버림의 노선말고 또 다른 노선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김의 노선’이요 ‘올라가심의 노선’입니다. 야곱에게 있어 그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마저 이겼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이 부합된 그 언약적 성과는 지금 애굽에서 요셉이라는 존재로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언약에 의해서 제공된 ‘하나님의 구원이 야곱과 함께 하므로서 야곱은 요셉을 만나는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과 다시 상봉하시는 장면을 연출하게 됩니다.

그 경로가 야곱과 요셉의 만남입니다. 야곱을 모시기 위해 보내준 수레에 야곱은 하나님과 함께 타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타셔야 될 수레입니다. 야곱을 잃고 이스라엘은 얻는 그 하나님의 구원은 요셉의 승리로 인하여 확인됩니다. 오늘날 십자가 죽음과 빈 무덤으로 하나님의 일관된 구원을 확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우리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버려야 될 인생을 붙들지 말게 하옵소서.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9-02-07 17:17 
176강-창 46장 1-4절(브엘세바)1902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6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73페이지입니다.

창 46:1-4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발행하여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니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고 불러 가라사대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야곱이 보기에 약속의 땅이라고 있었던 그곳을 떠나서 남쪽으로, 애굽나라로 가게 된 이유가, 죽은 줄 알았던 자기 아들 요셉이 성공해서 거기서 자기를 불렀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식솔들 70명 데리고 내려가는 중입니다. 요셉이 아버지와 헤어질 때 17세였는데 지금 세월이 22년 지났어요. 만나게 된 것은 서른아홉 살 때입니다.

많이 변했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보게 되면 지금 야곱은 요셉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다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요셉에게는 아버지가 있지만 야곱에게는 요셉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에 일찍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는 과정 속에 반드시 어떤 요소를 집어넣느냐 하면, 자기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상실케 하는 겁니다. 잃어버리게 해요. 죽음이라는 요소를 집어넣습니다. 죽음 속이 아니면, 죽음이 제시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모든 축복이라는 것은 얻을 수가 없어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제일 기피하는 것이 뭐냐 하면 죽는 거예요. 왜냐하면 평소에 인간은 산 사람과만 상대했습니다. 죽은 사람과 상대한다는 그것은 인간에게는 무슨 솜씨가 발현될 수 없게 되느냐 하면, 자기 잘남과 솜씨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게 되거든요. 죽은 귀신한테 무슨 솜씨를 발휘하겠습니까?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뭐가 있는 척이라도 해도 그것이 먹혀 들어갔는데 이미 죽었다는 말은 없어졌다는 말이지요. 없는 대상을 향하여 우리가 무슨 아양을 떨고 솜씨를 부리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은 평소에 산 사람하고만 상대합니다. 교회 와서 흔히 이야기하지요.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행동하는 것을 보면 주님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 온 같은 교인들을 의식하면서 교회 목사나 장로나 중직자들, 그런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교회 왔다가 후딱 가버리지요. 평소에 습관이 그렇게 때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그런 것밖에 할 수 없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해서 요셉은 아버지를 만나지만 아버지에게 요셉은 없는 존재에요. 빈 수레를 보냈습니다. 죽었던 아들이 수레를 보냈다는 설이 있지요. 그런 소문이 있어요. 그래서 자기아들들이 요셉을 만났다 하니 진가민가 하지만 자기 눈으로 보기 전에는 확실치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라, 예수를 믿으라, 할 때 약간은 속에 짜증이 나는 이유가, 꿈에라도 주님 보여주고, 꿈에라도 하나님 보여주면 믿지 말래도 믿어요.

그런데 아무것도 안보여주고 예수 믿고 하나님 살아계심을 믿으라고 하니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습니다. 나보고 사기꾼 되라는 이야기밖에 안되거든요. 옛날의 그 예수 믿으라, 옛날의 그 하나님 믿으라고 하면 성경책에 나와 있는 그 예수, 하나님이야기를 보고서 교육을 받아서 머릿속에 기억을 하게 되면 그것은 성경의 그 예수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에요.

성경책 속의 것을 내가 교육받았던 예수고 교육받았던 하나님이지, 이것은 내가 시도해서 구성된 이미지가 내 머릿속에 있을 뿐이지 현재 살아계신 주님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차라리 예수나 하나님을 안 믿었으면 좋을 뻔 했는데 보이지도 않는 분을 억지로 믿으려고 하니 이게 얼마나 어색한지 마치 맞지도 않는 옷을 늘 걸쳐놓고 교회 가서 연출을 해야 돼요.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을 해야 되니까 교회 다니는 것이 어떤 모험같이 느껴집니다. 내가 기도한대로 응답해주면 그 때 하나님이 살아있는 것을 믿어줄까, 이런 식으로 자기 나름대로의 제안을 하기도 하고, 교회 한 10년 다니면서 자식들 잘되고 집안 잘되면 ‘혹시 살아 있는가, 라고 내가 감은 잡아드릴게요’ 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지요.

이 모든 것이 어디서 잘못되었느냐 하면, 요셉이 보기에, 그러니까 하나님 보기에 야곱 본인이 살아있다 하는 그것은 실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야곱과 직접 관여하는 것은 아니고 야곱에게 분명히 죽었다 하는 요셉을 경유해서 야곱을 상대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사는 그 약속의 땅에 직접 올 수도 있어요.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어느 타이밍에 등장하느냐 하면, ‘살았나, 죽었나?’ 진가민가, 내가 분명히 죽은 줄 알고 있는데 살았다는 소문이 새롭게 들리니까 내가 직접 확인하러 요셉 만나러 가는, 쉽게 말해서 자기가 철석같이 믿는 자기 믿음이 파괴되는 그 사건을 통해서 새로운 모험의 길로 나서는 거예요.

이것은 그동안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는다 할 때 뭐가 방해되었느냐 하면, 멀쩡하게 내가 괜찮은 나, 살아 있는 나, 근사한 나, 착하기 이를 데 없는 내가 믿는 예수와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데 지대한 방해물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안 받습니다. 그런 인간 받을 것 같으면 하나님이 낚싯대로 건져서 구원하지요.

무엇 때문에 십자가로 구원하겠습니까? 십자가는 죽음사건이 십자가인데요. 죽음사건을 앞장세워서 구원하는 이유는 현재 네가 내세우는 모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다 하늘나라에 거부당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일 뿐이다. 네가 연출한 거예요. 네가 조작한 거고요. 그런 믿음 소망 사랑은, 내가 이만큼 잘났습니다,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혹시 있다면, 혹시 천국이 있다면, 거기서 자랑질 하려고 준비된 것 밖에 안돼요.

지금 야곱은 자기 자신이 뭐가 문제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자기 눈으로 요셉을 만나겠다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요셉으로부터 자기가 초청되었다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할 일은 멀쩡하게 산 채로 수레에 자기를 싣고 아들 요셉 만나러 가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되기는 뭐가 되겠어요?

야곱이 변화가 되어야 할 텐데 살아 있는 내가, 잘난 내가,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사실 하나 추가해서 믿으면 그러면 내가 변화됩니까? 나는 예수님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이 있다는 것을 내가 직접 눈으로 목격하게 되면, 그러면 나라는 인간이 달라질까요? 달라진다는 보장 있습니까? ‘안 달라지면 안 달라지는 채로 천당 가면 되지.’라고 생각하는데 천국은 안달라진 사람은 절대로 받아주지를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어떤 시도를 하느냐 하면, 야곱이 요셉을 만나지 않게 하는 겁니다. 야곱이 요셉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야곱과 함께 있는 하나님이 요셉을 만다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3절, 4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간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갑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야곱으로 하여금 야곱의 네 현 상태는 미완료된 상태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복도 미완료되어 있고요, 하나님의 구원도 미완료된 상태에요. 네가 혼자 덜렁덜렁 가봐야 미완료에서 미완료로 마감되는 거예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을 만나도 그게 완료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혼자 덜렁덜렁 가게 되면. ‘어, 요셉 살아 있었네? 볼라봐서 미안하다. 반갑다. 앞으로 잘 살자.’ 이것은 전혀 야곱이 달라졌다는 어떤 증거가 되지를 못해요. 그러면 어디에서 어디로 달라져야 되느냐 하면, 내가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이 심보, 이 심보가 달라져야 돼요.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하는 일에 엉터리 같은 내가 거기에 참여되는 존재로 변화되어야 돼요.

세상에 이것보다 더 큰 변화는 없습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주인공은 나입니다. 내가 주인공이에요. 내 인생이 좋으면 내가 웃고, 내 인생이 나쁘면 내가 웁니다. 이유가 뭐냐?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은 뭐냐? 혼자 사는 습성이, 버릇이 그래요. 혼자살기 때문에 내 인생을 가지고 내가 성공했다, 성공 못했다, 를 측정하겠다는 겁니다. 누가? 본인이 측정하겠다는 거예요.

본인이 멀쩡하게 살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런 인간은 요셉을 만날 수가 없어요. 비약해서 먼저 말씀드립니다. 논리를 뛰어넘어 비약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만약에 요셉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금 야곱은 일반성도고 요셉이 예수님이라면? 요셉이 예수님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요셉에게는 꿈,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졌고 그 계시에 준해서 요셉은 형들에게, 자기백성에게 죽임을 당했잖아요.

그 고향을 떠난 겁니다. 마치 주님이 이 땅을 떠난 것처럼. 떠났다는 말은 그동안 요셉이 알았던 모든 혈육적인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분리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꿈대로 다뤘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나에게 주어졌다. 그러면 저절로 계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먼저 끊어짐이 있어야 돼요.

모든 혈육적인 관계가 단절되는 환경이 먼저 조성되어야 되는 겁니다. 요셉처럼. 예수님의 제자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제자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처와 자식과 모든 가진 것, 고향을 다 버린 사람들이에요.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너는 날 따르라고 할 때는 기존의 너의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중 하나의 아버지가 죽었어요. “아버지 장례 치르고 따르겠습니다.” 하니까 대번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마 8:22) 아버지장례 치르게 되면 장례 치러준 효자가 돼요. 아버지 장례를 치러주는 괜찮은 효자의 가치로서는 예수님의 일에 충분히 증인이 될 수 없어요.

제자들이 자기들 가정과 고향을 떠난 것은 예수님 자신이 이 땅과 무관한 분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주변에 제자들을 포진하게 하신 거예요. 따라서 예수를 믿는 것은 절대로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인간의 자기의 타고난 터전을 버립니까? 어떻게 인간이 자기의 지문을 지우고 자기의 얼굴을 버립니까?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자기의 dna를 어떻게 뽑아내요?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지금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복을 줬을 때 야곱은 가만있으면 자기에게 복이 온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것은 불가능이 아니고 야곱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이 능히 가능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겁니다. ‘아, 횡재했네. 하나님이 날 버리지 않는데. 땡 잡았어. 가만있으면 복 주겠지. 천국도 보내주고.’

이것은 얼마든지 사람들이 교회 앉아서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한 거예요. 그런데 야곱에게는 멀쩡한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아들이 아니고 사랑하는 아들이에요. 나머지 열 한 아들 버려도 그 버린 가치보다 더 큰 가치가 요셉 하나에 쏠려 있었던 거예요. 그 쏠린 요셉이 죽은 겁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바치듯이요. 우리는 여기서 물어야 돼요. “왜 하나님의 구원은 꼭 이렇게 잃어버림이 성사되어야 합니까? 왜 그런 일이 없이는 구원이 안 되는 겁니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그리고 앞에 있는 아브라함 이야기, 그리고 이삭 이야기를 보면서.

이삭에게 복을 받은 야곱은 오히려 저주받은 에서한테 쫓겨서 그 집안사람이 아니고 저 멀리 외삼촌 집으로 피신해야 했어요. 아버지한테 복 받아놓고는 복 준 사람과 복을 받은 사람이 갈라지게 되어 있어요. 떨어지게 되어 있다고요. 왜 하나님은 필히 그러한 요소가, 반드시 그러한 요소가 있어야 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냥 교회만 왔다 갔다 하면 안돼요? 시키는 대로 십일조내고 봉사하고 그러면 천당 가는 것 아닙니까? 집사 되고, 권사 되고, 장로 되고, 그러면 천당 보내주는 그런 것 아니에요? 그것은 사기입니다. 그런 천당은 없습니다. 장로 되면 장로를 잃어버려야 되고 집사는 집사를 잃어버려야 되고 목사 안수 받으면 목사를 잃어버려야 돼요.

전도사가 전도사직을 잃어버려야 되고 교인은 교인이라는 그 자존심도 잃어버려야 돼요. 다 잃어버려야 돼요. 그게 우리의 소원도 아니에요. 우리는 그게 싫어요. 돈 얼마나 교회에 처박았습니까? 그걸 왜 포기해요? 교회 없이 구원받을 각오를 하고 있어야 돼요. ‘교회 없이 집에서 하지.’ 집 없이도 구원받을 각오를 하셔야 됩니다. ‘집 없으면 자식하고 살지.’ 자식 없이도 구원받을 각오를 해야 돼요.

내 곁에 아무것도 내가 기댈 언덕이 없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잃어버림은 남으로 인하여 잃어버림이 아니라 나로 인하여 잃어버림, 다시 말해서 나에 대해서 잃어버린 내가 분리되어야 될 그 작업이 선행되어야 그게 구원받는 겁니다. 육에서 나온 육이기 때문에 육이라는 요소를 분리, 끄집어내려면 여기에 뭐가 투입되느냐?

영이 투입될 때 죽고 못 사는 그 육, 나라는 그 육, 내 집안은 이런 집안이고, 내 성씨는 이런 성씨고, 내가 과거에 이만큼 잘났다는 그 육, 훈장 같은 그 육, 남에게 자랑할 때 평생 살아온 인생살이의 그 자랑거리, 그걸 무슨 수로 나에게서 떼 냅니까? 하나님의 영이 개입해야 그게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분명히 단언합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죽어요. 죄의 세계에서 죽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십자가 지시고 하늘나라에서 승천하시고 그런 것 없어요. 주님께서 아버지로부터 필히 버림받아야 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이 땅에 의해서 예수님이 잃어버려야 돼요.

예수님이 잃어버려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덤이고, 십자가 죽음이고, 무덤에 가 계셔야 돼요. 그 코스가 모든 인류를 앞장서서, 선두해서 보여주는 현재 인간의 진면목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뭐냐? 예수 이름은 죽음의 코드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었다고 알려주는 죽음의 코드에요. 열심히 살아도 잃어버릴 것이고 죽고자 해도, 자살해도 잃어버릴 것이고. 죽음의 코드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everybody)이 죽은 것이라.” 예수님이 단순히 옛날 사람 아니지요? 예수님 안에 뭔가 코드가 있고 거기에 하늘나라 정보가 꽉 차 있지요?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이 실은 죽어 있다는 것,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살아 있지 않은 인간이 아무리 천국 간다고, “천당 가렵니다. 살려주세요.” 하는 그 모든 하소연, 외침도, 샤우팅도 하늘나라에서 보기에 그것은 죽은 자의 샤우팅이고, 고함이기에 안 받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인간을 하나의 그릇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어떤 그릇이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는 빈 그릇으로 사용된다면 그 사용되어짐 때문에 들러리로 구원되는 거예요. 주인공은 내가 아니고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갖고 있는 그 구원의 경로와 정보를 담았다는, 접시에 담기듯이, 그릇에 담기듯이 담았다는 이유 때문에 결합해서 구원받는 겁니다.

로마서 9장에 나오지요. 진노의 그릇이 있고 긍휼의 그릇이 있는데 인간에게는 제 3의 지역이 없이요. 달랑 이거 아니면 저것, 저것 아니면 이것이에요. 마치 초등학교 운동회할 때 청군 아니면 백군, 백군 아니면 청군이듯이. 대한민국 사람 따로 있고 일본 사람 따로 있고 북한 사람 따로 있고 중국사람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한국말 쓰는 사람 따로 있고, 영어 쓰는 사람 따로 있고, 스페인 사람 따로 있고, 그거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이런 분류와 구분 같은 것은 아직도 우리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일방적으로 그렇게 구분한 거예요. 주님의 구분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됩니다.

모든 인간은 죽은 것인데 단지 그릇일 뿐이다. 자, 하나님의 사랑이 담길 거냐, 하나님의 분노가 담길 거냐? 그것은 인간의 권한을 벗어납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겁니다. 그 일방적인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이야기하지요.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이지요.

언약을 받은 사람이기에 야곱의 앞으로 남아 있는 코스는, 내가 어떻게 해보겠다든지, 내가 스스로 구원하겠다는 모든 것은 상실되도록, 철회되도록, 그런 것은 안 받아주는 코스로 이끌림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이끌림을 받는 구체적인 방법이 뭐냐? 그것이 오늘 본문에 뭘 로 되어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발행하여”

여기 보면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2절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부르지 않고 “야곱아 야곱아”라고 부르는 거예요. 야곱으로서의 야곱이 있고 이스라엘로서의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야곱이라는 인간의 신체는 달랑 하나인데 하나님의 구원이 개입되게 되면, 언약의 개입, 약속이죠, 그릇입니다, 그릇에 담기는 하나님의 구원의 정보입니다, 그 약속이 담기게 되면 동일한 개체가 두 개의 이름을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두 개의 인생이 야곱 안에 중첩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작용을 하게 되면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인생이 둘로 갈라지는 겁니다. 이것은 야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겁니다. 구원은 뭐냐? 갈라짐이에요. 어떤 갈라짐이냐? 요한복음 3장에 보면 그 갈라짐을 이렇게 쉽게 했습니다.

내려오는 경로와 그리고 올라가는 경로, 두 가지 경로를 예수님이 표현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지상에서 죄도 없으면서도 죄인의 모습으로 사셨던 그 경로, 그 경로가 야곱에게 담기게 되는 겁니다. 쉽지요. 어렵지 않아요.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이름을 잃어버림이에요. 제일 쉬운 표현은 이렇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자작극이에요.

인간을 배제하는 거예요. 인간의 협의나 어떤 의논이나 어떤 도움도 필요치 않습니다. 자작극이에요. 왜 하나님께서 자작극까지 벌여야 되느냐? 창세기 3장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 뒤에 이미 흙이 되고 죽어야 될 자지요. 그렇다면 거기서 영생은 나오지 않습니다. 죽은 자에게서 영생은 나오지 않아요.

나오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아담도 아니고 하와도 아니에요. 아담과 하와를 제켜놓고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이 등장합니다. 여자의 후손은 하나님의 약속이 개입함으로 비로소 새롭게 등장하는 인물이에요. 기존의 아담계통이 아닙니다. 기존의 하와, 아니에요.

여자의 후손이 왜 등장해야 되는가? 기존의 아담과 하와가 왜 안 되는가? 기존의 아담과 하와는 이미 뱀에게 종속되어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뱀을 이길 수가 없어요. 따라서 뱀에 종속된 상황 말고 하나님의 약속, 창세기 3장 15절이 약속이니까,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그 약속된 아들이 등장할 때 비로소 뱀은 자기 정체를 노골화시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여자의 후손은 숨겨진 영적게이트,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가 되는 겁니다. 신약에서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이 비밀의 통로에요. 이 말은 예수님 없이는 천국에 가는 길도 막혀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 태어나서 그 후에 세례 받을 때 하늘이 열렸다고 하잖아요.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겨냥해서 열린 거예요.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왔다. 그런데 이것은 뭐냐? 이 세상은 막혀 있는 거예요. 인간의 구원의지, 구원욕구는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교회 천개 만개 만들어보세요. 하나님은 안 받습니다. 그 자체를 하나님이 안 받아요. 하나님이 친히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야곱아”라고 불러줘야 돼요. 야곱은 뭐냐 하면, 이게 죄인이에요.

“이 죄 덩어리야” 그런 뜻이에요. 이 얍삽한 인간아, 이 사기꾼 인간아, 라고 불러주는 거예요. 야곱 자체가 사기꾼이니까. 이름 자체가 그 내용을 담고 있어요. 내려오는 것은 야곱에게 새삼스럽게 뭘 열심히 하라는 뜻이 아니고 그냥 야곱이 가는 길을 주님께서 막아서고 음성이 들려오는 거예요. 그러면 야곱이 탄 수레에 누가 타야 되느냐 하면, 야곱이 타서는 안 되고 야곱에게 찾아온 주님이 타신 거예요.

그러면 야곱은 수레를 타면서 자기 혼자 있다는 의식이 전혀 없어야 되는 겁니다. 아들을 만나는 것이 내 아들 만나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는, 야곱에게는 이미 아들이 죽었어요. 야곱의 아들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아들을 만나러 가는 겁니다. 요셉이라는 아들을 하나님께서 왜 죽게 하셨는가? 요셉이 죽었을 때 야곱의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렸어요.

버림받음이 없고 잃어버림이 없으면요, 야곱은 구원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인생에 잃어버림이라는 사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는데 그 모든 것이 함께 날라 가버린 그러한 계기를 의도적으로 유발시킨 거예요. 요셉에게 하나님이 꿈을 안줬으면 절대로 요셉은 평생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 꿈 때문에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 받아서 아버지에게 잃어버린 자, 이미 죽은 자식이 되었습니다. 요셉이 입었던 옷에 짐승의 피를 발랐는데 그 당시에는 dna조사를 안하기 때문에 야곱에게 자식은 평생 죽은 자식이 되는 겁니다. 야곱에게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 것은 오늘날 우리를 이야기하기 위함입니다.

오늘날 성도라는 것이 뭐냐는 거예요. 성도라고 해서 일반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기 인생이라고 여기고 거기에 모든 것을 몰빵하지요. 인생은 하나의 도박 아닙니까? 찔끔찔끔 투자하다가 마지막에는 다 투자하잖아요. 내 인생 내가 살린다. 이런 정신 말고 다른 정신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봤습니까? 내 인생 내가 지킨다. 평생에 몸에 익힌 거예요, 평생에.

젊을 때는 남을 배려한다, 누굴 돕는다, 일가친척이 어쩌고 하지만 나중에 나이 들어 보면 도와준 것도 소용없고, 백날 해봐야 좋은 소리 안 들어오고, 역시 내 인생 지키는 것은 나지 내 인생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겠나, 그 말이지요. 행복은 내손에 달려 있다는 그것을 꼭 말로 해야 됩니까?

살아보면 그거 몰라요? 자식 좋지만 자식도 결국은 남이라는 것을 다 체험하기 전부터 이미 짐작하고 계시는 바지요. 주님은 말합니다. “그러니까 네가 지옥 가는 거야.” 왜? 놓아야 될 너 자신을 못 놓고 있으니까. 그러면 우리는 대꾸합니다. “무슨 수로 나를 놓습니까? 천하에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이 나인데 무슨 수로 나를 놓습니까?” 예수 믿고 하나님 믿는 것도 나를 더 키우기 위한 용도로서, 이용하기 위해서 믿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 주인공 되는 나를 놓칠 수가 있어요? 불가능하지요. 이런 우리 앞에 주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성령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는 그 말은 이게 너라는 겁니다. 이게 너다. 네가 쥐고 있는 너는 가짜고, 나이 들면 관속에 묻힐 가짜고, 너는 지금 흙을 쥐고 있어요. 흙덩어리를 쥐고 있어요.

손을 만지는 것은 손의 모양을 한 흙덩이를 만지고 있는 겁니다. 지금은 이렇지만 2046년도 가보세요. 흙이 되어 있지요. 조금 더 키울까요? 2062년도까지 갑시다. 혹시 이 중에 백 살까지 사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니까. 흙덩어리를 만지고 있어요. 이거 흙입니다. 왜 흙이냐? 주께서 흙이 되게 하셔서 흙이에요. 내 맘대로 흙이 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주님의 관여함이 우리를, 생생하게 지금의 나를 만들었어요. 내 인생 내가 혼자 산 것이 아닙니다. 흙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주께서 매일같이 관여합니다. 흙을 붙들고, 쓸데없는, 지켜도 지키지도 못할 것들을 계속 붙들고 이것 천당 보내 달라고 우리는 애걸복걸 하고 있습니다. 마귀한테 속아서 교회 와서 온갖 알랑방귀 다 뀌고요.

기도하면 됩니까, 헌금하면 됩니까, 그 속임수에 다 넘어가잖아요. “선교헌금하면 됩니까? 봉사하면 복 받습니까?” 주님은 말합니다. “네가 뭘 지키려고 하느냐?” 지킬 필요도 없는 것을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손에서 놔야 될 것을 지키고 있는 겁니다. 나는 저쪽 십자가 안에 있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야곱아, 네가 나고 내가 너다.”

야곱은 하나님이 아니에요. 그러나 야곱 안에 중첩되어 있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 자신을 이스라엘로 본 거예요. 구약이니까, 신약이 아니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덮칩니다. 그러면 야곱은 사라지면서 누가 부각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미 야곱 때 살아 있어요.

그걸 가지고 하나님이 육신이 되었다는 그 말이에요. 자작극에 뭐가 필요하냐 하면, 인간의 육신이 필요한 거예요. 하나님이 마귀를 이길 때 여자의 후손이라는 아들로 태어남이 필요했던 겁니다. 왜냐하면 죄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으면 죄에서 의로 전환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를 표현하지 않으면 진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로 넘어설 수 없기 때문에.

이게 제 이야기가 아니고 골로새서 2장 9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 안에서, 주님의 신체지요, 예수님 안에서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그리스도 몸으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고 되어 있어요.

성경이 없다고 치고 옆에 지나가는 사람이 어떤 글을 썼는데 이런 글을 썼다고 칩시다. 그러면 우리는 절대로 믿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있어도 무슨 뜻인지 띵한데, 어떻게 육체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까? 제가 부산에서 강의하면서 제일 자주 갔던 식당에서 무슨 밥이 나오는가 하면, 대통밥이 나와요.

대통밥이 뭐냐 하면, 대나무 마디를 끊어서 거기에 잡곡을 쑤셔 넣고 밥을 지은 겁니다. 모든 신성의 충만한 것이 대통밥 안에 담겨 있다 할 때에 이게 우리 몸하고는 다른 몸인 것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허접한 우리 몸도 모든 신성한 것이 담길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왜? 우리는 그릇이니까.

자비의 그릇이니까. 저쪽 안 믿는 사람은 진노의 그릇, 지옥 갈 그릇이고. 주님의 방식은 인간들이 예측 못하고, 예상도 못하고, 상상도 못하는 그 방식을 사용함에 대해서 우리는 무슨 말을 하리오. 우리가 아는 지식 가지고, 신학을 가지고 어떻게 거기에 대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게 성령이 아니고서 과연 믿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까?

기도하고 응답받는 그런 것 믿는다고요? 그런 것이 아니에요. 무슨 가시적 성과가 기적이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죄만 짓는 이 몸이 하나님의 신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과연 믿을 수 있어요? 이게 중첩되어 있어서 그래요. 야곱과 이스라엘이 중첩되어서 그렇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야곱을 뭘 로 변화시키느냐? 이스라엘로 바꾸려고 합니다.

그 이스라엘이 어디 가 있느냐? 요셉이 이스라엘의 최종상태를 말합니다. 지금 야곱은요, 애굽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애굽에 있는 잃어버린 자기 아들 만나러 가지요. 그냥 아들이 아닙니다. 꿈의 계시의 완성상태로 도달된 아들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본인의 사랑으로 인하여 추방된 아들이에요. 야곱 본인의 뜻은 아니지만 미움을 받아서.

그러면 그 코스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두 종류의 인간을 마련했습니다. 현재 눈에 여러분 자신들이 보이지요. 또 하나의 인간을 마련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죄도 없으면서 죄인으로 내려오신 분, 그 분의 몸을 마련했어요. 이게 한 코스입니다. 또 한 코스가 뭐냐? 이스라엘인데 죄도 없으신 분이 죄인 된 경로가 야곱이 되는 경로, 주님이 야곱이 되는, 죄인이 되는 경로.

그 다음에 올라가는 것이 있어요. 이것은 승리자입니다. 이스라엘의 뜻이 뭐냐? 이겼다는 거예요. 승리한 거예요. 야곱은 사기꾼입니다. 사기꾼 안에 뭐가 중첩되어 있고 담겨 있는가? 인간은 못해내지만 장차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기어이 달성해야 될 최종상태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이겼다는 것, 하나님이 하나님을 이겼다는 것, 자작극이니까, 하나님이 하나님한테 이겼다는 것, 버리신 하나님이 다시 되찾아서 승리케 하신 하나님으로 변모되었다는 그 내용, 그 드라마가 담길 때 그 담긴 것을 가지고 두자로 ‘성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 인생 없지요. 내 것 없지요. 우리는 고집스럽게 내 것이라고 우기는, 사라져 가는, 흙이 되어가는 엉터리 같은 내 인생만 그동안, 악마에게 속아서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애지중지 했습니다. 거기에 전념하다 보니까 자동적으로 무엇이 없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죽음이 평소에, 하루 일과 가운데 아무 생각이 안나요. 십자가복음은 아무 생각이 안나요.

사도바울은 강조합니다. “십자가가 보이거늘. 십자가만 자랑해라.” 사도바울이 백날 그런 소리를 해도 나는 안 듣겠다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현실입니까? 내 인생 내가 붙드는 것이 현실이에요, 아니면 나밖에 모르는 인간에게 십자가를 강제로 코앞에 들이대시고 결국은 너는 잃어버린 너 말고 주께서 마련하신, 너 없이도 승리하신 너의 진짜 두 번째 인생을 네가 천국에서 만나는 그게 네 인생인지를, 진짜 네가 어디 있는지를 보라는 겁니다.

골로새서 3장 4절에 방금 이 말씀 나옵니다. 땅에서는 네가 죽었지만 진짜 너는 하늘에 감춰졌다. 그 장소가 어디냐?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브엘세바’입니다. 브엘세바는 영생의 나무가 있는 곳. 그래서 아브라함도 브엘세바에 집합해요. 창세기 21장 31절에 보면 브엘세바라는 것은 아브라함에 의해서 처음으로 맹세의 우물로 되어 있고 창세기 26장 24절에 보면 그 아들 되는 이삭도 브엘세바에 합류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또 받습니다. 브엘세바라 하는 것은 영생의 증표가 있는 나무, 영생의 나무니까 거기서 영생에 의해서 출발하는, 영생을 분배받고 할당받는 모든 사람은 결국 영생의 나무, 브엘세바를 경유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담는 사람으로 전환되는 것이 구원의 필수코스라는 겁니다.

마지막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그동안 구원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내가 소유하는 것으로 여겼습니까? 내가 갖고 다니는 신분증으로 여겼습니까? 이대로 살다가 죽으면 천당 간다고 그렇게 자격증같이 생각했습니까?

이제는 우리 자신의 인생의 수레를 바꿔야 됩니다. 내가 타는 수레가 아니고 주님이 이미 함께 타셨다는 것, 주님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 긍휼의 그릇, 사랑의 그릇으로서 우리는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을 정도로 주님 안에서 십자가에 함께 죽음으로 벌써 모든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해서 미련두지 않고 살아가시는 하나의 영생의 나무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계획을 알았습니다. 그 계획에 우리가 도와주거나 협조할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도리어 날마다 주께서 우리 인생에 잃어버리고 버림받는 사태를, 영생이기 때문에 유발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애지중지 내 것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이, 십자가를 대신해서 가졌던 모든 것이 이제는 교체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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