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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9 20:54:46 조회 : 149         
   요셉의 울음 190109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요셉의 울음(창세기 45:1-5)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Xj6TsS8PO_E, Hit:20
 이근호 19-01-09 21:08 
요셉의 눈물

2019년 1월 9일              본문 말씀: 창세기 45:1-5

(45: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45:2)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45: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45: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볼까 하는 것은 사실 소용없는 짓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어떻게 볼까가 관권입니다. 우리 인간쪽에서 생각하는 하나님은, 평소에 자신의 품성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여기에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일말이라도 공통되는 것으로 연결되어야 하나님쪽으로 다가가는 것이 의미가 생긴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다리가 여전히 이어져 있어야 힘들더라도 한걸음 두 걸음 나아가는 것이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만약에 완전하 다리가 끊어졌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리가 끊어졌는지 아니끊어졌는지를 현실속에서 확인하는 방식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계시, 곧 하나님의 꿈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요셉과 그리고 하나님의 꿈이 없는 형들 사이에는 '낯선 광경'이 벌어집니다. 형들은 요셉이 보여주는 태도에 대해서 감히 관여하지 못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저 분이 왜 울지?" 의아해 여깁니다. '울고 있다' 현실 상황을 두고서 양편으로 분명하게 갈라져 있습니다.

그것은 동일하게 주어진 현실에 대해서 계시없는 인간과 하나님쪽에서 상반된 의미를 내놓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요셉이 형들과 만나는 결정적 순간에 있어 그 균열된 지역을 보다 분명해졌습니다. 형들은 애굽의 총리대신이 자기네들과는 비교도 안되는 직위에 앉아있으면서 초라한 자기네들 앞에서 마구 울고 있는 광경을 자신들의 삶 속에서는 이해될 수 없었던 겁니다.

이게 '균열됨'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구원자요 심판주되시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맥없이 잡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나약하게 죽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인간들이 평소에 생각하는 '울음'이란 '자기 것'이 훼손되었을 때, 불행을 느끼면서 우는 겁니다.

즉 '울음'이란 그토록 지키고 싶고, 키우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나의 가치, 나의 의미' 상처를 입을 때 우는 겁니다. 그 관점으로 봤을 때 애굽의 국무총리는 자, 애굽의 모든 전권을 가진 자가 힘없는 자기들 앞에서 울 때에, 형들은 평소의 자기 삶으로서는 납득될 수없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그러나 요셉의 울음 속에는 형들의 과거가 담겨 있습니다. 즉 인간들에게 있어 자신의 과거란 본인이 책임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경우는 자신의 잘못으로 우는 것이 아니라 형들의 잘못으로 야기된 결과로서 우는 겁니다. 요셉은 지금 옛날에 형에게 미움받아 갈라서야했던 그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있습니다.

형들과 자기 사이의 '갈라짐'을 울음으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이는 곧 '갈라짐'을 분명히 하므로서 형들쪽에서 요셉과 통합하는 경우는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균열이란, 균열로 인하여 피해입은 당사자가 그 균열의 부담 속으로 가담하므로서 통합되는 겁니다. 따라서 갈라섬의 원인자인 형들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일을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서 완수하신 것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형들 나름대로의 미래상이 '자기 의미 사수'차원에서 따로 생각해둔 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점이 요셉과 갈라서게 하는 국면을 지속하게 한 겁니다. 인간은 미래를 걱정하되, 현재 자신이 자기를 사수하는 그 방식을 그대로 지속시키려 합니다.

'구원의 표준형'을 사람들은 평소에 본인이 본인을 지켜온 그 방식에 준해서 다듬어나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생각하신 '구원의 표준형' 속에는 '인간들의 배척요소'가 함유된 표준형입니다. 즉 구원 속에는 일체 인간들의 자기 의미 사수하기 원칙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즉 인간이 자신의 장래를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의지를 거부하고 끊어버리십니다. 구원의 표준모델은, '이미' 해결된 상태에서 출발해서 인간들의 죄된 요소를 알리면서 하나님의 고통(울음) 속으로 참여시키는 방식입니다.  이 안에서 인간들은 자기의 의미와 가치를 철회해야 하는 겁니다.

내가 나를 지키겠다고 노력하는 바로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메시야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야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다. 요셉의 형들은 그냥 요셉의 울음 속에서 자기들을 향한 용서가 완료되어 있음을 알고 그 울음을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 통합되어야 하는 겁니다.

형들은 더 이상 동생을 팔아먹은 죄책감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질 필요가 없습니다. 요셉의 눈물 안에는 이미 형제가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종합은 분열 다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분열 안에 들어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유독 요셉에게만 꿈으로 계시를 내려주셨고, 아버지 야곱이 유독 요셉에게만 유별하게 사랑하신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에 의한 균열이 시작된 겁니다.

이 하나님의 균열을 통해서 인간들은 자기 본성이 곧 악 쪽에서 살아가고 있음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미 자기에게 모든 것을 다 헌신하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믿음이나 악이라는 것은 바로 자신의 이런 경향을 방해하는 모든 것이 됩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예수님을 밀치고 돌아서는 것은 본성상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놓고서도 인간들은 현실에 대해 가장 명확하게 해석을 내리고 싶어합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그 현실을 두고서 인간들이 이해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이해하는 것이 상호 다릅니다. 마치 요셉이 흘린 눈문을 두고서는 형들이 이해하는 것이 요셉이 이해하는 것이 다른 겁니다.

요셉의 눈물 속에는 형들의 과거가 담겨 있습니다. 누군가 우리 자신의 과거를 일방적으로 다 가져가서 다 책임졌다는 소식을 들려온다면 진정한 우리 자신은 자체적은 의미와 가치를 마땅히 십자가 앞에서 포기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요셉을 앞세워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이미 용서하셨기에’ 본격적으로 그 요셉의 눈물과 예수님의 피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죄들을 발생시키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스스로 만든 구원의 표준형이 곧 가짜요 우상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9-01-10 11:54 
172강-창 45장 1-5절(요셉의 눈물)1901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5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72페이지입니다.

창 45:1-5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한 자가 없었더라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성경에서 요셉의 이야기, 형들의 이야기가 이렇게 나오는 것은, 우리의 위치, 우리의 현 주소가 요셉 앞에 있는 형들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셉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함께 있고 형들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없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꿈이 있고, 혹은 없고가 아니라 그 꿈이 있는 쪽과 없는 쪽이 서로 대조를 이루고, 한쪽이 다른 한쪽을 밀치게 되어 있다는 그 원리를 요셉 이야기 내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합니다, 라고 이야기할 때 그저 평온하게, 나는 하나님을 모르니까 조용하게 살겠다고, 그저 말썽만 안 부리면 되지 않겠느냐 하지만 그 말썽부리지 않는 모습이 결국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공격성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셉이 형들 앞에서 울고 있습니다. 요셉이 운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형들은 모르지만 요셉은 모든 사태의 마지막 대목을 형들 앞에 지금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꿈에 의해서 형성된 그 최종지점, 그 변곡점, 변화가 일어나는 그 특이점은 웃음이 아니고 울음이라는 겁니다.

요셉의 울음 속에, 형들은 거기에 집결해야 돼요. 지금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처신, 그 결정에 따라서 그들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그런데 자기의 운명을 결정하는 요셉이 도리어 자기 앞에서 울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형들은 의아해하는 겁니다. 우리가 뭐가 잘못되었지,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울 일이 뭐가 있겠느냐, 라고 하겠지만 요셉의 울음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과거에 요셉과 형이 처음 헤어졌던 그 처음자리의 심정을 지금 요셉은 다시 한 번 형들에게 진솔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형이 날 버릴 때 나는 그 때 울고 있었습니다, 라는 그 모습, 그 원래상황을 다시 형들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이제 와서 형들 앞에서 요셉이 운다는 것, 형들은 그저 옛날 일을 잊어버렸다고 넘겨버린 일이지요. 그러나 형들이 했던 그 과거가 어디로 넘겨가 있느냐 하면, 요셉에게 다 넘어가 있는 거예요.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에요. 내 인생을 내가 책임져 버리면 이것은 구원이 안 됩니다.

내 인생을 누군가 다 가져가야 돼요. 누군가 다 가져갔고 그 가져가신 그 분이 그 다음에 우리에게 찾아올 때 그 때 그 심정자리에 우리가 집합해 있어야 합니다. 내 자리를 버리고, 내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가져가신 그 분의 최종자리가 우리의 처음자리가 되는데 그 최종자리 거기서 우리의 진짜 구원이 형성되는 겁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내 구원을 내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방금 제가 한 말은 뭐냐? 만약 우리가 요셉의 형이라면, ‘저 사람은 왜 울지? 국무총리가 된 사람이 왜 우리 앞에서 갑자기 울지? 희한하다. 왜 울지?’ 이렇게 된다면 요셉의 자리와 형들의 자리는 분열되어 있는 거예요.

서로 다른 자리에 와 있기 때문에 요셉이 우는 것을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납득이 안 되는 겁니다. 믿지를 못하는 거지요. 요셉의 형들이 낯설게 보는 이러한 태도는 뭐냐?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볼까에 대해서 우리가 지금 굉장히 낯설어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요셉은 지금 하나님 편에 서 있거든요. 요셉이 하는 행동이 형들 보기에 의아해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에 대해서는 우리가 미리 예측을 못하고 있고 예상을 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요셉이 형들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그 장소에서 보여주는 태도가 울음이었어요.

울음이라 하는 것은 좋아서 우는 것이 아닙니다. 형들 때문에, 당신들이 처신한 그것, 행동한 그 결론이 뭐냐? 나의 울음으로 총정리가 되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보면서 ‘저분이 왜 울지?’ 이렇게 돼요. 그러니까 동일한 일이 벌어졌는데 그 동일한 일에 대해서 양쪽이 서로 해석하고 보는 견해가 다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평소에 하얗다, 혹은 검다가 차이가 난다는 그 말이 아니고 같은 하얀색인데 서로 다르게 보는 관점, 그렇게 보시면 되지요. 제가 말을 너무 어렵게 했다면 쉽게 합시다. 사람들은 아무리 하나님, 예수님이 어떻고 성경이 어떻고 복음이 어떻고, 하지만 사람에게 가장 와 닿는 것은 현실입니다.

남자들에게는 20대 초반에 입영통지서가 나오면 군대 가는 것이 망상이 아니고, 꿈이 아니고 실제현실이라 하는 것이 확 와 닿게 돼요. 강렬하게 와 닿게 됩니다. 그리고 집을 소유하게 되면 취득세 날라 오는 것. 이것은 누가 봐도 꿈이 아니에요. 꿈속에 취득세가 날라 옵니까? 실제로 취득세가 날라 오거든요.

나는 예수 잘 믿습니다, 나는 교회 잘 다닙니다, 그런 것은 아무 소용도 없어요. 실제로 교회 잘 다녀도 입영통지서가 날라 오고, 취득세 날라 오고, 그리고 과속하다 단속에 걸리면 범칙금 통지서가 실제로 날라 옵니다. 우리는 맞닥트리는 현실 속에서 나는 현실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늘 직감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내가 현실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현실에 대해서 나는 제대로 파악하고 있고, 느끼고 있고, 그 안에 살고 있다는 이것은 분명하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요셉의 형들이에요. 오늘날 우리들이고. 현실에 대해서는 누구 못지않게 제대로 파악을 하고 있다는 입장인데 그 현실 속에서 누가 울고 있다는 말이지요.

자, 우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사람이 언제 웁니까? 우는 이유는 뭐냐? 나의 의미가 깨졌을 때, 들켰을 때, 나의 존재의미가 상처 났을 때, 쉽게 말해서 나는 지키고 싶은 것이 있는데, 나는 내 것을 지킬 가치가 있다고 장담하고 있는데 그게 훼손될 때, 방해받을 때, 그게 흔들릴 때, 그게 공격받을 때, 그것이 와해될 위기에 놓였을 때 우리는 왈칵 웁니다.

새벽기도 할 때 촌 교회의 경우에는 보통 마루에서 하잖아요. 새벽기도회 때는 본당은 잘 안 열어줘요. 난방비가 많이 드니까 주일학교 모이는 1층에 난로 펴놓고 새벽기도 하게 되지요. 새벽에 나와서 열심히들 기도합니다. 기도내용을 컨닝해서 어떤 내용인지 잠시 엿들어보세요. 내 것 지켜 달라는 거예요.

왜 내 것을 지키는가? 이게 나의 의미기 때문에. 인간이 우는 이유는 지키고 싶은 나의 의미가 있고, 나의 가치가 있고, 나의 소중함이 있는데 그것이 훼손되고, 그것이 수월하게 지켜지지 못할 때 왈칵 울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에게 있어서 운다는 것은 내가 절실하게 느끼는 현실이 내가 갖고 있는 내 가치와 의미를 뭔가 훼손했다고 했을 그 때는 울 일이다,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울 일이라고 확신하는 그 형들 앞에서 요셉이 울고 있으니까 의아해한 거예요. ‘저 양반이 왜 울지?’ 모든 것을 가졌잖아요. 양식도 가지고 애굽의 총리대신이잖아요. 울어도 형들이 울어야지요. 본인이 왜 웁니까? 진짜 이것은 도저히 믿기지를 않는 거예요.

3절에 보면 형들이 놀라서 치고 들어갈 의미가 없는 거예요. 저 사람이 운다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인데 그 의미에 합류하려 하니까 내가 그동안 구축한 이 의미 가지고는 저 울음의 의미에 동참할 수 있는 울음이 아닌 거예요. 이모저모 따져 봐도 울 일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게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에요.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내 것 지키기 위해서 예수 믿거든요. 내 것 손상되지 않기 위해서, 내가 기대하고 소망 품고 있는 것이 안 깨지기 위해서, 단단하게 키워지기 위해서. 그런 경우에는 울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울지도 않아요. 내 것이 훼손될 때 우리는 그것을 불행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예수님의 울음을 봤을 때는 우리가 납득이 안돼요. 예수님의 그 울음에 참여하지를 못합니다. 동참하지를 못해요. 그러면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왜 고통 받고 십자가에서 왜 피를 흘렸습니까? 예수님이 고통 받은 것은 인간과, 자기백성과 주님 사이가 균열된 거예요. 그 갭이 벌어져 있었던 겁니다.

인간은 그 차이 남, 벌어짐을 그 다지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를 않아요. 설교 다시 해 드릴까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전혀 심각한 문제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나는 내 것만, 내 가치만, 내 소유만 지키면 그만이니까. 내 것 제대로만 지키면 불행이 아니고 행복이라고 자부하면서 살아온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나의 의미기 때문에 그래요.

내 것이 있으면, 내 것이 계속 튼튼하게 유지된다면 그것이 곧 나의 의미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나의 의미가 옛날에 형들이 요셉과 헤어질 때의 그 형들의 나의 의미가 요셉에게 어떤 학대를 가했습니까?

그 갈라짐, 분열된 그 지점을 지금 형들은 잊었지만 요셉은 형들이 한 그 짓거리, 형들이 어떤 의도에서, 어떤 자기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제일 나이어린, 막내에 가깝게 어린 동생 요셉을 그렇게 미워했는가, 하는 그 지난과거, 요셉은 그 과거의 연장선에서 이탈하지 않고 그 과거, 그 의미의 최종적인 상태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완성이 되고 최종적인 완료가 되는 그 지점까지 하나님께서 요셉을 계속 끌고 가신 거예요.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잊었지만 우리의 과거를 누가 가져가신 분이 있어요. 누구냐? 형들의 과거를 요셉이 다 품고, 안고 있었습니다. 그 품고 안은 결정적인, 최종적인 마무리가 뭐냐? 바로 울음이에요. 우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분열을 야기 시킨 사람이 통합을 할 재주는 없어요. 그런데 분열을 당한 사람이 통합을 할 자격이 있는 겁니다.

예수님과 우리사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예수님을 사랑한다, 하지만 예수님과 우리사이는 그동안 우리가 합류하지 못할 정도로 분열되어 있어요. 천국과 지옥이 갈라진 것처럼 갈라져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면 우리가 내뱉는 그 멘트,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믿습니다, 하게 되면 우리 식으로, 우리가 내뱉은 어떤 행함으로 통합이 되는 줄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행함으로 통합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인 의사에 관계없이 우리의 행동대로 살아가는 그것이, 형들이 평소에 하는 그 행동이 결국은 요셉을 죽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 것처럼 우리가 평소에 내 것 지키고, 나는 내 것만 지키면 행복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여기는 그 보통의 태도가 결국은 메시아를 십자가에 매달게 만들었고 피 흘리게 만드는 결과를 야기 시킨 겁니다.

우리의 불행이나 울음이라는 것은 내 것 훼손되면 우는 거예요. 그러나 요셉의 울음이라든지 예수님의 울음은 뭐냐? 내 것 지키겠다고 하는 것 때문에 배격당하고, 무시당하고, 거부당한 그 아픔을 가지고 우시는 울음이에요. 제가 지금 이야기한 것이 뭐냐? 울음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놓고 같은 울음인데 해석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는 것은 나 손해 날까봐서, 손해가 났기에 우는 것인 반면에 요셉의 울음이라든지 예수님의 울음은 내 것 지키겠다고 아등바등하는 그 상태가 너무나 안타깝고, 내 것 지키겠다는 그 후유증이 결국 누구한테 상처를 입히느냐 하면,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자를 상처 입히고 십자가에 고통당하게 만드는 결과인 것을 모르고 있다는 그것 때문에 안타까워서 우는 울음이거든요.

똑같은 현실을 두고 이렇게 크게 차이가 벌어지는 겁니다. 보통 생각하기는, 하나님은 넉넉하기 때문에 인간 일에 관심도 없고 그냥 평온하게 즐기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 건지는데 있어서 그 울음을 앞장세워서 우리에게 찾아와요. 그러면 우리는 그 울음 앞에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평소에 내가 갖고 있던 나의 의미와 나의 가치를 흔쾌히 철회해야 되지요. 그 십자가 앞에서. 지금까지 설교한 것을 아주 단출하게 줄이면 이렇습니다. 성도라면 우리의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구원의표준형은 내 쪽에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명심을 해줘야 돼요. 구원의 표준모델을 내 쪽에서 만들어간다면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게 돼요.

매사에 조심해야 돼요. 함부로 행동하면 안 되고. 그리고 내 인생의 잘못한 책임을 내가 져야 돼요. 그리고 구원받는 그 표준형을 익히 내가 짐작하고 있다면 그 표준형에 내가 조금이라도 간격이 벌어지고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절망 속에 있게 됩니다.

왜 우리는 구원의 표준형을 내가 생각한 의미에서 자꾸 상상을 하느냐 하면, 내 구원이기에 내가 나서야 내가 구원된다고 철석같이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 갈 때 천국에 가 있는 내 모습이 현재 내가 살아가는 내 인생의 의미와 균열된 것이 아니고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게 악마가 그렇게 속인다면 우리는 그 악마의 저주스런 굴레에서 못 벗어나요. 창세기 45장의 요셉의 울음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 즐거운 소식, 행복한 소식이 되려면 구원의 표준형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준비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이게 바로 구원이야, 라고 준비하시고, 그 다음에 주님 쪽에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형식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국무총리 저 사람 어디서 많이 봤는데.’ “혹시 총리님이 성형을 하셨습니까? 얼굴을 뜯어고쳤습니까?” “아닌데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아서요. 전에 우리가 노예로 팔아먹은 내 동생 비슷한데.” 그렇게 간파해서 “아, 맞다! 요셉 맞지!” 이렇게 하게 되면 이것은 성경이 아니고 드라마입니다.

성경이 되려면,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드러내는 성경이 되려면, 복음은 한결같거든요, 동일한 의미가 되려면 형들이 의아해 해야 돼요. 보세요. 요셉은 현재 국무총리잖아요. 국무총리가 울 일이 뭐가 있습니까? 누구한테 서러움 받았어요? 나쁜 소리 들었습니까? 전혀 그거 아니거든요.

형들이 보기에 울 일이 뭐냐 하면, 내 것이 깨어졌을 때에 사람은 울게 되어 있다, 라는 것이 형들이 살았던 그 의미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울 일이에요. 그리고 내 것이 잘되면 웃을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고 남 때문에 우는 경우는 형들의 세계나 오늘날 나의 세계에서는 그것은 없습니다.

내 것이 손해나면 화딱지 나고 분노하고 불행을 느끼지 만약 남들이 나보다 못하면 그것은 신바람 날 일이지요. 얼마나 고소합니까? 사촌이 땅 샀다 소리만 들어도 배가 아픈데. 땅 샀는데 사기를 당했다 소리 들으면 아팠던 배가 소화제 안 먹어도 금세 나아요. 남 못되는 것 너무 즐거워요. 왜? 상대적으로 ‘휴~ 나는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하잖아요.

그 말은 평소에 나의 의미나 행복이나 불행을 그저 내 의미, 내 것 지키는 것에 사력을 다해 온 거예요. 사력을 다하는 그 행동의 그 다음 행동이 뭐냐? 천국 가는 것, 내가 죽어서 좋은 나라 가는 것, 거기에 가 사력을 다할 거예요. 지금 내가 살아가는 방식으로 천국도 그 방식 사용해서 들어가겠다는 그 점에 대해서 우리는 양보가 없습니다.

그게 뭐냐? 내 구원, 내 인생의 미래는 내가 알아서 책임지겠습니다, 하는 이야기에요. 그렇게 되었을 때 나타난 후유증이 뭐냐? 하나님의 구원되는 이것이 모형이다, 표준이라고 정해놓은 것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내가 생각한 표준형이 계속해서 유효하다고 착각들을 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요셉이 형들과의 의논도 없고, 형들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울어버렸습니다. 우는 의미가 4절부터 나옵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방금 이야기한 그 하나님의 일이 지금 내 인생에 새로운 의미로 담겨 있기에 저는 여러분 형들 앞에서 울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의아해 하지만 나는 일방적으로 당신들 앞에서 울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울음을 가지고 내 쪽에서 찾아가겠습니다. 이렇게 자기인생이 아니고 남의 인생으로 인하여, 남의 인생 때문에, 남의 잘못 때문에, 형들의 잘못 때문에 슬퍼해야 될 인생을 짊어진 이 요셉이 형들이 나한테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형들의 잘못을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고, 그 간직된 그 결과가 울음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그 의미를 가지고 다시 제가 형들 앞에 일방적으로 다가서겠습니다. 이게 바로 구원의 표준형이에요.

십자가의 고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이것이 영생이요, 이것이 천국이요,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형들이 해야 될 일은 뭐냐? 형들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 요셉의 울음 앞에서 그동안 자기들이 지키고자 했던 자기들의 가치와 의미 그 모든 것을 포기해야 됩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내가 나 위주로, 내가 잘되기 위해서 미래에 천당 가야지, 라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인정하는 구원의 모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원의 모델은 우리 인간들이 의논해서, 머리 맞대고 의논해서, 교회가 제직회를 해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에게 현실로 나타났어요.

그 현실이 뭐냐? 아까 말한 대로, 입영통지서가 현실이고 취득세 날라 오는 그것이 현실인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현실이 뭐냐? 십자가 피 흘림이에요. 십자가 피 흘림에 대해서 일반인들은, 성도가 아닌 사람들은 굉장히 무의미하게 봐요. ‘뭐지 저거?’ 의아해 하는 겁니다.

오늘 형들의 태도처럼 ‘저분이 왜 과격하게 오버액션을 벌이지?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말씀대로 살라고 하면 끝날 문제를 가지고 저렇게 과격하게, 스스로 자기를 때리고 치고 채찍에 맞도록 유도하고, 왜 그렇게 과격한 모션을 의도적으로, 메시아라고 이야기하면서 우리에게 보여주느냐?’ 그 말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분은 그렇게 성경에 관심이 많고, 한국교회 썩었다고 하면서 성경대로 돌아가야 된다는 그 일념으로 출판사도 운영하는데 십자가마을 책도 거기서 많이 찍었어요. 그분이 목사님이니까 그 사장님의 설교나 글도 죽 봤어요. 그 사람이 추구하는 것이 이겁니다. 왜 한국은 성경대로 안 사느냐? 상당히 재미있는 말이지요.

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뜻대로 안 살고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느냐? 그 사람은 거기에 대해서 울분을 토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거기에 관한 책들을 그 출판사에서 수백 권 찍어냈을 거예요. 지금 문 닫기 직전이라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문 닫아야 닫는 거지만.

제가 보기에요, 제가 보기에 그 사람은 아직도 복음을 몰라요. 복음을 모르고 평소에 내가 생각한 하나님의 뜻은 뭐냐?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거예요. 악마에 속아서 범죄한 인간이 성령이 오게 되면 이제는 말씀대로 살 것이고 말씀대로 살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데, 인간답게 사는 것이 뭐냐? 서로 사랑하고 공동체라는 그 현실성을 분명히 실적으로 분명히 내놓아야 그게 진짜 하나님의 복음이 복음답게 역사한 것이라는 거예요.

그 실적이 뭐냐? 서로 사랑하는 아름다운 모습, 공동체의 모습을 보이는 그 어떤 실적, 업적 같은 것이 눈에 띄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 사람한테는 예수님의 울음과 고통, 십자가의 피 흘림, 그런 것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설교 다시 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이라는 그 가치를 철회를 안 해요. 죽어도 포기 못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구원은 이런 것이라는 그 표준모델, 표준형을 인간 본인이 뭔가 만들어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 간직한 내용에서는, 하나님과 내가 완전히 분열되었다는 그 분열의 의식이 하나도 없어요. 조금만 열심히 따라 붙이면 주님처럼 살 수 있다는 가능성만 내비치고 있지 어떤 짓을 해도 이 분열은 우리식으로 합치되지 못한다는 의식을 안 갖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분열은 그 분열의 책임을 지신 분이 통합을 하게 되어 있어요. 분열이라 하는 것을 우리 인간은 몰라요. 하나님과 우리가 완전히 벌어졌다는 것은 누구도 인정 안합니다. 못났기는 하지만 따라 붙이면 천국 갈 수 있다는 가능성과 희망과 포부를 갖고 있지요. 완전한 분열은 아니에요. 완전한 분열을 아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어요.

완전한 분열이 이루어진 그 주님께서 그 분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주님이 자기 십자가 피 흘림으로 통합된 상태로, 그 자체로 우리 안에 선물로 찾아오시는 거예요. 그게 뭐냐? 십자가라는 현실상입니다. 십자가 피 흘렸다는, 현실적으로 피를 흘렸다는 그 피의 의미가 뭐냐? 네 구원 네가 책임지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그리고 십자가 피 안에 우리가 울 일도 없고 더 이상 구원 때문에 고민할 필요도 없고, 악마나 율법 때문에 좌절할 필요도 없고, 내 인생, 내 의미, 내 가치가 어디 있는지 그걸 찾을 필요도 없고, 그 안에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통합되어 있어요. 단독으로 우리가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이 완료된 상태로 있는 겁니다.

요셉이 형들 앞에서 울었다는 말은 이미 요셉은 형들은 용서했다는 말입니다. 우는 것 이해하면 용서해줄게, 가 아니라 이미 일방적으로 용서하고 우신 거예요. 정에 못 이겨 울었습니다. 형들 보기에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에요. 화려한 옷을 입은 국무총리가 뭐라고 하느냐하면, 나는 요셉이라 했을 때 형들 기억속의 요셉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거지같이 노예로 팔려가는 그 요셉의 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옷은 국무총리 옷을 입었더라도 요셉의 안에는 형들의 동생으로서의 요셉이 여전히 동일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형들이 저를 팔아 넘겼잖아요.”라는 그 심정으로 요셉은 울고 있습니다.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그러나 그 하나님 속에 “너희 인간들이 나를 미워했잖아. 너희들이 너희 의미와 가치 지킨다고 내 가치를 배척했잖아. 내 가치를 몰라봤잖아.”라는 그 심정으로 우리에게 도로 찾아온다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 쪽에서 뭘 하면 됩니까, 라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런 식으로는 분열된 것이 통합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시는 모습으로, 십자가 피 흘리는 모습으로 다가왔을 때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보세요. 저게 바로 현실이다. 모든 현실의 완료다.

마지막은 저 피의 모습으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하는 그 현실을 우리가 받아들여서 이제는 단독적으로 나 따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통합 안에 우리가 이미 함께 놓여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요셉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내 쪽에서 천국을 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천국에 합격된 자로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통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우리가 편하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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