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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3 20:45:51 조회 : 126         
   해석자 181003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해석자(창세기 41:9-14)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MtpP-HSSRfY, Hit:30
 이근호 18-10-03 21:23 
해석자 등장

2018년 10월 3일                   본문 말씀: 창세기 41:9-14

(41:9)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날 나의 허물을 추억하나이다

(41:10) 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떡 굽는 관원장을 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41:11) 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징조가 있는 꿈이라

(41:12) 그곳에 시위대장의 종된 히브리 소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고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인에게 해석하더니

(41:13) 그 해석한 대로 되어 나는 복직하고 그는 매여 달렸나이다

(41:14) 이에 바로가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낸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 옷을 갈아 입고 바로에게 들어오니

해석을 요청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능력에 대해 한계를 인정한다는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한시로 해석없이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현상에 대해서 분주하게 해석하면서 환경에 대처하면서 살아갑니다. 만약에 자기 해석에 오류가 있고 근원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여태껏 자신이 이만큼이라도 살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썩 인생을 잘되었다고는 자부하지 않더라도 그럭저럭 무탈없이 살아온 것은 그동안의 해석이 크게 오류가 아님을 반증한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이런 인간들의 해석의 기조나 방침은 이러합니다. “나는 잘났다. 따라서 이 잘난 존재에 부합되게 사는 환경도 만족스러워야 당연하다”는 겁니다.

즉 어느 인간도 자기 자신에게는 신의 저주가 합당하다고 고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일방적 주장이요 소원입니다. 정작 복과 저주를 관장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은 오직 하나님의 자의의 뜻에 의해서만 적용시키십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스스로 대단한 착각 속에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저주를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복받아 마땅하다고 여기게 되면, 인간은 철저하게 단독적으로 살게 마련입니다. 즉 누구의 의견을 참고로 생각해 줄 수 있지만 그의 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지는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책임질 자기 인생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바로가 왕으로 있는 이 애굽 나라로 이런 존재들의 집합체입니다. 요셉이 풀어준 꿈의 예언대로 살아서 바로왕의 신하로 복직된 술맡은 관원도 그러한 사람입니다. 요셉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고 본성적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상관인 바로왕이 흔들립니다. 번민합니다.

그것은 난데없는 꿈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꿈이라면 신하의 입장에서 낙관적으로 해석으로 다같이 기분좋게 마감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꾼 바로왕의 꿈은 미래를 책임질 자로 나서지 않는 함부로 해석할 수 없고 목숨 걸어야 될 꿈입니다. 왜냐하면 그 꿈은 흉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꿈은 시작과 끝이 동일한 결과로 끝나지 않습니다. 끝을 주목해야 합니다. 끝이 파멸로 이어집니다. 그저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나란히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쁜 결과가 좋은 경우를 흔적도 없이 삼켜버리는 꿈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 인간도 자신이 저주받아 마땅하다고 자부하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의 끝이 저주로 모든 것이 종결되는 것에는 합당한 해석이 있어야 한다고 믿게 됩니다.

위기를 느낀 바로왕의 조바심이 술맡은 관원의 기억을 깨웠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었을 때에 꿈이 현실로 변하는 경우를 맞이했던 사람입니다. 그 때 그 사실을 제대로 알려준 자는 바로 히브리 소년 요셉이었음을 기억하고 내심 미안감을 갖고 바로왕에서 도움이 되고자 요셉의 존재를 언급해줍니다.

이미 바로왕에게 있어 이번 꿈은 바로왕 및 신하들의 한계를 넘어서는 내용이라서 해석자를 외부에서 개입시킨다는 것은 이는 애굽 운명에 관한 권한이 바로왕의 권한을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요셉은 단순히 해석자가 아니라 현실을 꿈의 내용에 맞추어 실행에 옮기게 되는 실행자입니다.

이는 요셉은, 어릴 때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졌던 꿈을 짊어지고 있는 겁니다. 전에는 요셉이 애굽의 일부였지만 꿈 이후에 애굽이 이제 요셉의(꿈) 일부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는 사람들의 위상이 정립됩니다. 욥의 경우, 욥은 단순히 자신이 살다가 죽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태어난 자가 아닙니다.

욥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욥을 아프게 해도 기어이 죽지 않게 하십니다. 이는 욥은 죽고 사는데서 의의가 있는 인생살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욥이 존재 의미는 고통과 복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즉 인간에게 주어진 고통은 인간은 온 세상의 모든 지혜를 다 알고 아무리 바르게 산다 할지라도 벗겨질 성질이 아님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욥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조치요, 욥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 복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조치입니다. 즉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와같이 요셉이 애굽나라에 나타난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야곱 언약에 의해서 복이 등장하고 저주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복은 필히 저주 안에서만 나오는 복입니다. 저주가 전제되지 아니하면 결코 등장하지 않고 알려지지도 않을 복입니다. 따라서 애굽나라가 자체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고 자족할 때, 요셉의 존재는 애굽에서 무의미하고 무가치합니다. 요셉이 애굽나라의 중심부로 등장하게 된 것은 애굽나라의 운명이 저주스럽게 끝난다는 꿈으로 인한 겁니다.

마태복음 3:7에 보면,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메시야의 오심은 고대했던 하나님 나라의 복이 자신들을 제공되는 날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등장은 전제가 ‘임박한 진노상태’라는 겁니다. 즉 저주가 저주대로 나타나지 않는 상태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지 않는 상태라는 겁니다. 이처럼 요셉의 존재가 애굽 나라의 저주를 유발한 겁니다. 즉 애굽나라는 요셉의 가치를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그 이유는 애굽나라는 자체적으로, 단독적으로 충분히 나라가 존재할 수 있다고 자부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라는 히브리 소년이 그다지 필요치 않는 나라 양식으로 그동안 나라가 지속해왔던 겁니다. 이는 자기 안에서 저주의 요소를 찾아내지를 못한 겁니다. 만사에 있어 자기네들의 지혜와 노력으로 얼마든지 자기 나라를 복된 나라로 키울 수 있다고 믿은 겁니다.

여기에 위기가 온 겁니다. 이 위기와 저주성은, 요셉을 품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적 꿈이 이제는 현실로 등장될 순서라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인 겁니다. 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저주의 흔적과 징조를 발견할 수 있는 이가 곧 요셉같은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재능을 개발해서 저주를 제거하려는 이 세상이 곧 저주받은 상태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8-10-04 19:34 
158강-창 41장 9-14절(해석자)1810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1장 9-14절입니다. 구약성경 63페이지입니다.

창 41:9-14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날 나의 허물을 추억하나이다 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떡 굽는 관원장을 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징조가 있는 꿈이라 그곳에 시위대장의 종된 히브리 소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고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인에게 해석하더니그 해석한대로 되어 나는 복직하고 그는 매여 달렸나이다 이에 바로가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낸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 옷을 갈아입고 바로에게 들어오니.”

바로가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에 대해서 자기 신하들과 술객들을 불러서 자기 꿈에 대해서 해석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해석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약간 의아해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왕이 꿈을 이야기하고 해몽하라고 한다면 아무렇게나 할 수도 있는 문제거든요. 왕의 기분에 맞춰서 “잘 되실 겁니다. 아주 길조입니다. 이제 왕과 우리나라는 정말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도 어차피 꿈이잖아요. 뭘 이야기해도 기분 좋게만 마감되면 될 텐데 해석자가 없다는 말,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꿈의 내용대로 그대로 실시한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 꿈의 해몽자는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려요.

하나님이 바로 왕에게 꿈을 꾸게 하셨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어떤 사람만이 꿈의 해석이 가능하냐 하면, 하나님과 바로 사이에 꿈을 유발하는데 참여한 사람이 아니면 그것은 해석할 수도 없어요. 실제로 그렇게 되어야 되니까. 흘러가는 꿈같으면 바로 왕이 꿈 해석하라고 이렇게 닦달내지를 않습니다.

실제 앞으로 될 운명이고 현실인 것이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장담하는 사람은 나와 보라고 하는데 누가 장담하겠어요? 입 다물고 있는 것이 낫지요. 건방지게 나서다가 목 잘릴 일 있습니까?

그래서 이 꿈의 해석에 대해서는 아무도 자기 목숨 걸고 나설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자신감을 가질 사람도 없고요. 본인이 조작해 낸 꿈이 아니고, 본인이 집어넣은 꿈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개입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왕이 번민한다는 거예요. 8절에 보면 “아침에 그 마음이 번민”했다는 겁니다. 걱정거리가 늘어졌다는 거지요. 그 이유가 꿈이 내용이, 처음에는 잘 나갔어요. 상당히 번창해서 기분 좋았다는 말이지요.

아름답고 살찐 일곱 암소가 나올 때는 자신의 희망사항과 같았는데 그 뒤에 나오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흉악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나오는데 원래 소는 풀을 뜯어먹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소가 풀을 뜯어 먹은 것이 아니에요. 같은 소를 집어먹으니까 이 세상에서 존재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세상에서 일어났던 기억이 없는 것,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마음이 상당히 혼란스럽지요. 사람의 마음이 안정되는 것은 과거에 경험했던 것, 알고 있던 것이 되풀이되어서 꾸준하게 반복될 때는 사람이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얻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도저히 과거에 체험 못하고 경험 못한 일이 일어났을 때는 당황스럽지요. 당황스러우면 자기안정감이 없으니까 자기 마음을 안정화하려면 이런 사태에 대해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는 자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래서 신하를 불렀고 그 신하 중에는 꿈을 해석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되면 그 때서야 지난 날 요셉의 꿈의 해몽을 들어서 복직이 된 그 신하가 요셉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던 그 허물을 비로소 추억했다고 되어 있어요.

9절에 보면 “내가 오늘날 나의 허물을 추억하나이다.” 요셉을 소개해야 되는데 자기 잘되는 것에만 정신이 빠져서 잊어버렸어요. 그런데 그 요셉이라는 히브리소년이 어떤 신통방통한 재주가 있었는데 그게 뭐냐 하면, 꿈을 현실로 바꾸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지금 임금님이 궁금한 것이 뭡니까? 꿈이 현실로 바뀔 때 어떤 현실로 바뀌는지 그게 궁금하시잖아요. “적절한 사람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제가 통보해서 불러올릴까요?” “당장 데려오너라.” 그래서 요셉이 드디어 바로의 꿈에 일어난 그 사건 속에 합류가 됩니다.

이 때 요셉은 어떤 자격이냐 하면, 해석자의 자격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통해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애굽 나라는 그 자체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자체적으로 일어난 현실인데도 그걸 해명을 할 수 없고, 해석을 할 수 없고, 미래를 측정 못한다는 것은 애굽나라 자체가 한계가 있고, 한계가 있다는 것은 애굽나라가 잘못살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이 애굽나라는 오늘날 인간들의 나라,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나라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애굽나라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자체적으로 한계가 없다고 자부하고 계속해서 꾸려나가는 나라에요.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우리가 해결한다. 우리에게는 지혜자도 많고 박수도 많고 해석자도 많고 똑똑한 사람도 많고 아이큐 뛰어난 사람도 많기에 어떤 역경과 난관도 우리가 해결할 수 있다, 라고 자부한 거예요.

불가능성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이것을 가지고 단독적인 체제라고 제가 표현하겠는데요, 애굽나라는 단독적인 체계에요. 외부의 어떤 개입이나 도움이 전혀 필요치 않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애굽나라의 한계성을 드러냈습니다.

여기에 누가 요청받느냐? 해석자가 도입되어야 된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실행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해석자가 도입되게 되면, 그동안 애굽에 대한 바로왕의 모든 권한은 축소될 수밖에 없습니다. 권한과 미래에 대한 모든 예측을 바로 왕에서 손을 떼고 해석자에게 인수인계할 수밖에 없어요.

그냥 꿈만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말씀 드릴까요? 요셉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면, 애굽의 시위대장의 감옥에 있어요. 요셉은 애굽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로 왕에게 꿈을 꾸게 한 뒤에 나타난 결말은 애굽나라는 요셉의 나라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오늘날 이 꿈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이 자기인생을 살 때 항상 본성적으로 단독으로 살아가요.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거예요. 이것은 바로왕도 마찬가지고, 애굽나라도 마찬가지고, 이 현대의 인간세계의 성질이 그래요. 성격자체가.

어떤 어려움이 있으면 자기가 해결 다 하면 된다는 겁니다. 외부에 손을 내밀기가 싫어요. 외부에 손을 내밀게 되면 단독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해석자의 투입을 요청하기 때문에 그분의 관여와 간섭과 통제와 지배를 받아야 된다 그 말이지요. 타고난 인간으로서는 그게 싫은 거예요.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 따먹고 어떤 면으로도 자기가 신이라는 그 속성을 본성상 자기가 어떻게 거부할 수가 없어요. 나는 오직 나만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 그것이 철칙으로 되어 있고 그것은 배워서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우러나는 인간의 건방짐이라고나 할까요, 본성인데, 그 인간들이 모여서 애굽나라를 이뤘고.

어지간하면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고, 자기의 약간의 한계가 있는 것은 남에게 안 알리고 싶고. 우세스러우니까. 그걸로 버티듯이 인생을 살아가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애굽나라에 뭐가 문제냐 하면, 4절이 있으나마나가 돼요. “그 흉악하고 파리한 소가 그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은지라.”라는 이 꿈의 내용이 일종의 저주거든요. 파멸이고.

이 저주, 파멸, 혹은 절망 같은 것인데 이것이 의도적으로 빠진 상태에서 억지로 ‘괜찮아, 괜찮아. 내 인생 괜찮아. 아무 문제없어. 이 대한민국은 괜찮은 나라야. 우리가 믿는 공동체는, 우리 가정은 행복해.’ 이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겁니다.

바로 왕에게 이런 끔찍한 꿈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바로왕은 태평천국이라고 우기고 있을 거예요. 자기도 얼마나 꿈이 기분 나빴으면, 이것은 중대한 미래가 우리에게 도래한다는 것임을 눈치 채고 똑똑한 신하들 불러서 해석하라고 했겠습니까? 다급한 거예요. 자기로서는 급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지금 애굽나라에 요셉이 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애굽나라는 애굽의 바로왕이 꿈을 꾸기 전에는 언제 히브리소년의 가치와 그 중요성을 어떻게 짐작하겠습니까? 그냥 노예인 소년 하나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뭐? 그게 무슨 쓸모가 있는데? 아무 쓸모 짝이 없잖아요.

쓸모가 있는 것은 내가 구상하는, 내가 주인공이 되는 내 나라, 내 가정, 내 교회, 내 집단, 내가 평소에 일구어놓은 어떤 사업체, 내가 계속해서 주인공이라는 것이 있는 한, 복음? 예수님? 하나님? 그것은 액세서리지요. 그거 아무 소용없어요. 그냥 취미생활이에요.

인생의 위기가 오지 않는데 왜 예수를 믿어요? 말도 안 되지요. 내가 주인공인데 외부인을 내 안의 중심부에 바꿔치기 할 리가 없습니다. 나는 이 조시로 계속해서 평생을 내가 주인공인체로 평생토록 90까지, 100살까지 살고 싶어요. 이것은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도중에 내 주인이 바뀐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상상도 못할 일이에요. 어려울 때 참조로, 또는 훌륭한 사람에게 한 수 배울 수는 있지만 실행에 옮기는 것, 잔소리는 들어도 실행에는 내가 옮기잖아요. 그러나 해석자를 외부에서 유입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 쪽에서는 해석 끝, 우리는 해석 못해, 해석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나라를 다루는데 한계 느꼈음, 이런 뜻이거든요.

해석자를 도입한다는 것은 나라자체를 통째로 해석자에게 갖다 맡기는 거예요. 지금 바로왕은 잘 몰라서 해석만 해달라고 하잖아요. 나중에 바로왕이 알아요. 이것은 해석할 문제가 아니고 해석자가 실행자가 된다는 사실. 해석을 한다는 것은 곧 더 이상 내 인생은 거덜 난 거예요. 내 인생은 날라 가버린 겁니다.

방금 한 그 이야기를 쉽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생각하겠습니다. 해석자의 반대말이 뭐냐? 어떤 개념의 진리를 규정할 때는 반대가 뭐냐를 알아서 그 차이를 보면 둘 다를 알 수 있거든요. 해석자의 반대가 뭐냐 하면, 타고난 재능 개발해서 내 꿈을 이뤄나가는 것, 이것이 반대입니다.

해석자라 하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거고요. 해석자가 없이 자기 인생을 꾸려가는 방법은 뭐냐 하면, 나에게 잠재된 타고난 재능을 내가 개발해서 그래서 꿈을 내가 만들어요. 꿈을 내가 설계하고 그 설계한 꿈의 실행자인 나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서 실행을 하게 되면 그 모든 영광과 찬란한 그 모든 칭찬은 나에게 독점해서 얻어질 수 있다는 이것이 극히 상식적인 현대의 모든 사람들, 현대뿐만이 아니고 인간자체가 옛날에도 마찬가지지만, 그렇게들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재능을 개발해서, 그래서 자기재능에 준해서 적절한 꿈을 만들어서, 그 꿈을 내가 달성한다. 이게 사는 보람이고 희망이다. 이 이야기가 어디서 많이들은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이게 뭐냐? 달란트비유라는 거예요. 교회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달란트 비유가 뭐냐 하면, 탤런트, 말을 희한하게 엮어서 탤런트, “자기 재능을 개발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그 꿈의 결실은 교회부흥입니다.” 오늘날 애굽 같은 교회가 애굽나라 바로왕이 생각했던 그 일을 똑같이 해버려요. 심지어 교회라는 간판을 걸어놓고 똑같이 그걸 이야기해요.

왜? 고객들이 그걸 원하니까요. 그런데 만약에 진짜 복음을 아는 교회라면 해석자를 유입할 수밖에 없어요. 해석자가 유입되면 애굽의 바로는 무슨 대상이 되느냐 하면, 흉악하고 파리한 소가 내 것을 다 갉아먹는 그 황폐한 현장에 홀로 초췌한 채 가진 것 없이 망해도 그렇게 망할 수밖에 없는 그 왜소한 모습으로 그 현장에 남아 있을 뿐이에요.

주께서 성도를 그렇게 만드실 겁니다. 기뻐해야 돼요. 왜?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제대로 예수를 믿지를 않을 거니까. 예수님한테 잔소리 듣고 참고로 인생지혜를 얻는 것은 할 수 있어요.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도움이 필요하다. 이렇게 되는데 여전히 내 꿈에 대한 자부심, 이것은 단독적이에요.

예수님은 시다발이가 되는 겁니다. 내가 주인공 되는 거예요. 어떤 경우냐 하면, 나한테 여전히 희망이 남아 있을 때, 나에게 열 두 척의 배가 남아있을 때, 그 때는 예수한테 간구를 하든 철야를 하든 내 꿈은 내가 주인공이었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그런 꿈을 우리가 포기할 줄 모릅니다. 끝까지 가는 거예요.

사기지요. 사기입니다. 애굽나라의 바로왕이 꿈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뭐냐 하면, 아무리 과거에 풍성하고 복 받았다 하지만 현재 이 꿈의 마지막 끝부분을, 시작부분을 주목하지 말고 끝부분을 주목하자는 말이지요. 끝부분에 주목해 보니 그것은 곧 저주였습니다.

5절을 봅시다. “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때는 좋았지요. 그런데 “그 후에 또 세약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이때까지도 괜찮아요. 곡식 중에 풍성한 곡식도 있을 수 있고 쭉정이 같은 곡식도 있는데 그 둘이 나란히 있으면 아무 문제없어요.

그런데 7절에 보면 “그 세약한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지라.” 그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은 어디에 있습니까? 없어요. 없다니까요. 과거에 잘나가니 뭐합니까? 끝은 저주인데요. 하나님께서 이 바로왕에게 꿈을 꾸게 한 것은 요셉을 애굽의 중심부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요셉이 알고 있는 세계, 요셉이 어릴 때 꿈을 받았잖아요, 요셉에게 실현되어야 할 그 나라가 애굽나라 무대를 통해서 본모습을 드러낸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꿈이 애굽나라에 오게 되면 애굽나라는 어떤 현상에 들어가야 되느냐 하면, 저주받는 현상에 들어가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요셉이 받은 꿈은 아버지 야곱이 받은 꿈이고 그 꿈은 야곱이 받은 언약이었습니다. 그 언약의 특징은 뭐냐? 언약은 하나인데 지상에서는 두 가닥이 나타나요. 하나는 저주, 하나는 축복입니다. 복과 저주로 나타나요.

아브라함언약도 마찬가지에요.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그걸로 끝이 아니에요. 너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복을 주시러 오셨다고만 생각하면 안돼요. 저주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그리고 복이라 하는 것은 먼저 이 세상에 저주라고 하는 것이 확연하게 규정되고 난 뒤에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 섞이지 않는 다른 요소가 복으로 발췌가 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방식이냐 하면, 예수님이 주신 영생이라든지, 복이라든지, 구원이라든지, 의라 하는 것은 반드시 이 땅에서 예수님이 버림받는다는 그 터 위에서만 비로소 영생이 나오고, 자유가 나오고, 의가 나오고, 축복이 나오고, 천국이 나오는 거예요.

이 세상에 죄밖에 없음을 분명히 해줘야 거기서 의가 나오는 겁니다. 의도 있고 죄도 있고 그런 세상이 아니에요. 죄만 있는 곳이에요. 찬송가에 그런 것이 있거든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그 가사에 보면, 처음에는 이 세상에는 죄만 있다고 했는데 나중에 가사를 고쳤어요. 너무 부정적이라고 해서 ‘죄만 있는 곳’에서 뭐로 바꾸었느냐 하면, ‘죄가 있는 곳’으로 바꿨어요. 우리나라 찬송가 협회에서.

그런 꼼수를 부렸어요. 너무 부정적이면 고객들이 교회 안온다고. 그런데 죄만 있을 때에만 비로소 인간은 우리의 행함과 무관하게 주님의 자기계획, 프로젝트에 의해서 주어지는 결과로서 우리에게 영생이나 복이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이런 경우는 욥에게 나오는데 여러분이 욥을 아실 것이니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욥이 죽고자 했습니다. 고통 때문에. 죽고자 했을 때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은 기어이 욥을 죽이지 않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요. 만약에 집안의 어른이 아픈데 너무 고통스럽다. 몰래 주사 놔서 돌아가시게 하는 것이 최고의 효도 아니겠어요?

욥은 너무 고통스러워요. 기왓장 가지고 온종일 긁어대도 해소가 안 될 정도에요. 숨을 쉴 때도 어떻게 쉬느냐? 숨 쉬는 것도 자유롭게 못 쉬어요. 그래놓고도 꾸역꾸역 주께서 목숨을 지연시켜서 계속 가게 만듭니다. 이거 미치는 거예요. 오죽했으면 제발 죽여 달라고 욥이 기도했겠어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욥을 안 죽입니다. 왜냐하면 욥의 기능은 네가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죽고 사는 문제, 그것 때문에 네가 태어난 것이 아니라 고통이 무엇이며, 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욥을 쓰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탄과 내기 하시면서.

우리는 아프거나 좀 고통스러우면 칵 죽을까,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칵’자가 붙어요. 칵, 죽어버릴까. 인간이 그렇게 죽을 것 같으면 태어난 이유가 없잖아요. 인간이 태어날 때 칵, 죽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거든요. 칵, 안 죽어도 결국은 죽입니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해야 될 주의 기능을 다 하고 난 뒤에 마감하고 죽어야 돼요. 인간은 몰라요. 자기가 왜 태어났는지를. 그래서 욥이 너무나 답답해서 고통스러우니까, 욥의 해결책이 뭐냐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알게 되면 이 고통을 내가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지혜를 알게 되면 ‘내가 이래서 문제가 되었으니까 여기서 내가 빠져나가면 고통에서 면제되겠지’라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뭐냐 하면, 세상에 대해서 내가 해석자로 나서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에 엘리후를 통해서 이야기하기를, 또는 직접 하나님이 나타나서 욥에게 이야기하기를, 네가 세상 모든 지혜를 아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너는 염소새끼 낳는 것도 모르고, 하늘의 북두칠성을 만들 때 거기에 없었고, 황무지에 비가 왜 내리는지도 너는 몰라야 돼.”

그러니까 너는 몰라야 된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의 방법으로 자기의 주어진 고통과 저주를 내가 아는 지혜로서 조금씩 해결해서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고통에서 기어 나오는 방식을 하나님께서는 용납한 적이 없어요. 인간의 과학과 철학과 학문으로서, 그리고 종교로서, 기도하고 금식하고 착한 일 한다고 해서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차단했습니다.

애굽나라의 꿈을 꿨잖아요. 이 꿈의 해석을 애굽나라 자체적으로 차단을 시켜 놓았다니까요. 왜? 외부에서 도입되어야 돼요. 왜냐하면 애굽나라의 꿈, 애굽나라의 운명은 애굽나라가 잘되느냐 못되느냐와 아무 상관없어요.

요셉이 품고 있는 요셉의 나라, 축복받을 자는 복을 받고 저주받아야할 자는 저주를 받는 그 하나님의 일방적인 원칙을 위해서 보조나라로 애굽나라의 바로왕이 존재하고 그에게 꿈을 꾸게 한 거예요. 애굽나라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요셉이 더 중요한 거예요. 이 세상나라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땅을 방문하신 예수님의 나라가 더 중요한 거예요.

예수님이 해석자인 동시에 실행자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해석만 할 뿐이 아니라 실제로 해석대로 되도록, 꿈대로 되도록, 계획대로 되도록 몸소 모든 것을 운영해 나가는 거예요. 없는데서 새로운 사건들을 만들어 나가는 거예요.

우리가 예측 못합니다. 주님이 만들기 때문에, 우리가 만들지 않기 때문에 내일 일도 우리는 예측할 수 없어요. 내일 일은 주님이 알아서 만들 거예요. 그날 염려는 그날에 족한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못나서가 아니라 우리의 기능 때문에 그래요.

우리에게 맡겨진 기능과 의미, 주님 쪽에서 계산하는 그 기능과 의미하고, 내가 여기에 있기 때문에 육적으로 내가 뭔가 기대하고 포부를 품고 희망을 갖는 내 욕심과 결부된 그 꿈과 틀어지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뜻을 좌절시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 두 가지의 꿈을 통해서 현재 바로의 나라, 애굽, 또는 바로의 처지는 어떤 처지냐? 마태복음 3장 7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는 대목입니다.

임박한 진노. 지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자기의 유대나라에 하늘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대했던 겁니다. 하늘나라가 임박하기를 기다린 거예요. 하늘나라가 임박하기를 기다렸는데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너희에게 진노가 임하는 그것이 이 땅에 임박한 하늘나라가 오셨다는 징조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이 말씀 드리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살면서 성도의 눈으로, 또는 성도가 무엇을 찾아야 되느냐 하면, 복의 징후를 찾지 말고 저주의 징후를 찾아가면서 남은 인생을 살아가시라는 그런 뜻입니다.

저주의 징후. 저주의 징후라는 것은 제가 마태복음 3장 7절을 방금 언급했는데 거기에 준해서 설명해 드린다면, 저주의 징후라는 것은 하나님이 내 뜻 중심으로 오실 것이라고 여기는 그것이 점점 더 저주를 가중시키는 겁니다. 판단착오지요. 아주 망상을 해도 보통 망상이 아니에요.

왜 그러냐 하면, 다시 오늘 본문에 들어가게 되면, 요셉이 애굽나라에 이미 도달했어요. 도달했는데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면, 감옥소에 갇혀 있습니다. 요셉의 가치를 아무도 알아 모시는 사람이 없어요. 애굽나라에 바로가 목적하는 것은, 아까 단독이라 했지요, 폐쇄적입니다, 애굽나라 자체가 융성하고 잘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첫 번째 꿈의 내용이 뭐냐 하면, 현재 바로가 애굽나라를 볼 때 이상적으로 보고 있는 그 모습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 살찐 암소 일곱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고 싶어요. 우리 교회 부흥되고 싶어요. 우리 집안 잘되고, 우리 가정 잘되고, 개인적으로 나는 성공한 사람으로서 앞으로 끝날 때까지, 죽을 때까지 칭송받고 싶습니다.

이게 살찐 일곱 암소에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나와 보라고 해요.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여기 존재하기에 무조건 나는 잘되어야 된다는 것, 복 받아야 된다는 것. 어느 교회, 어느 성당, 어느 절, 어느 가정이고 그걸 마다할 가정과 인간, 개인과 단체는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그게 바로 저주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뜻인데, 소박하고……, 소박하지도 않지만, 욕심덩어리 죄지만 이런 포부와 희망 속에 누가 와 계시는가 하면, 초라한 모습으로, 채찍 맞아 피 흘리는 모습으로 그리스도가 우리와 이미 함께 있는 겁니다.

지금 바로는 요셉의 가치를 몰랐어요. 그리고 바로에게 혜택 받은 요셉의 술 맡은 관원장도 복직되고 난 뒤에는 요셉을 까맣게 잊어버렸어요. 왜냐하면 나만 잘되면 되지 요셉까지 계산할거 뭐 있어요. 나중에 바로 왕이 흔들리니까, 바로 왕이 흔들리면 애굽나라가 흔들린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누구도 흔들리느냐? 왕의 신하도 흔들려요.

가만 보니 신하가 자기한테 손해된다 싶어서 ‘아차, 이런 위기상황에 뭐가 없을까? 내가 이참에 왕을 기쁘게 하면 또 승진되겠지. 아, 있었다.’ 그제야 생각나는 거예요. 인간들이 예수님을 찾을 때는 자기의 이해득실과 관계있을 때 예수를 찾아요.

그렇게 찾는다는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를 도외시하고, 예수님의 존재를 무가치하게 도외시하고, 그러니까 예수님 빼고 나름대로 나는 융성과 축복과 행복을 원했던 겁니다. 이 말은 자기 인생에서 저주가 빠져 있었다는 겁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그것인데.

나는 살아봤자 죽을 때는 다 버리고 결국 죽음이라는 그 자체가, 흉학하고 파리한 소가 살아온 멋들어진 인생을 다 갉아먹고 다 삼켜버린 그 결과가 마지막 순간, 링거 꽂고 산소통 옆에 두고 헉헉거리는 그 순간이 헛되고 헛된 인생 살았다는 그 징조, 저주의 징조, 죄의 징조, 심판의 징조거든요.

한평생 날 위해서 살았는데 남는 것이 뭡니까? 헉헉거리는 바짝 말라 파리한 피부만 남았어요. 사람이 돌아갈 때 되면 살이 다 빠져요. 뚱뚱한 사람도 똥배 빠지지 말라고 해도 다 빠져요. 남녀노소 관계없이 다 빠지게 되어 있어요. 돌발적인 죽음 아닌 이상은. 서서히 죽을 때는 다 빠지고, 다 내놓고, 주께 받은 은혜 다 내놓고 갑니다.

“내가 너에게 평생 살도록 은혜 줬지만 네가 은혜 받을 자격이 되는가를 보라, 네 꼬라지를 봐라.” 지금 바짝 마른 네 꼬라지가 원래 네 모습이라는 거예요. 어릴 때는 통통하니 모르지요. 중력을 이기지못하고 허리가 다 내려앉잖아요. 전도서에 보면.

그런 인간들이 모여서 똑같이 좀비 같은 인간들의 말만 듣고, 그들의 철학과 과학과 노벨상이 어떠니 그런 것들만 듣게 되면 잠시 잠간 자극적이고 행복하고, 이것이 자기의 본성에 부합되는 양, 이것이 합당한 양, 그렇게 착각들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은 도외시되고.

예를 들면 어떤, 공부가 제일 쉬워요, 하는 인간이 서울 법대 3학년 쯤 되어서 3차까지 사법고시 합격되었다 봅시다. 남들은 축하한다고 하지만 본인은 ‘뭐 나니까 당연한 것 아니야?’ 모든 인간이 뭔가 되고 난 뒤에는요, 자기가 지극히 당연하다는 거예요.

사업이 잘 되면 ‘당연하지. 나니까 이 정도는 되어야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아. 앞으로 더 키울 거야.’ 사람이 잘나갈 때는 인간의 가치도 같이 잘 나가는, 급이 같은 급인 줄로 착각을 하게 되어 있어요. 모든 인간은 다 그래요. 병원에 가 보세요. 내가 아플 만해서 아픈 사람은 병원에 아무도 없습니다. 운 없어서 아파 있는 거예요.

병원 창문 밖을 내다보면서 제일 화딱지 나는 것은, 자기보다 못한 인간이 멀쩡하게 걸어 다닌다는 사실. ‘저 놈의 인간은 교통사고도 안 일어나고 나는 착하기만 한데 왜 내가 허리디스크 걸려서 누워나 있고. 저 인간은 마음대로 활개치고. 이 착한 나는 누워있고. 주여, 불공평합니다. 어찌 이럴 수가.’

교회 기도가 다 그런 기도잖아요. 왜 내 값을 안쳐줍니까, 그 말이에요. “그동안 헌신한 것, 십일조 한 것을 계산해보세요.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그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그럴 때마다 뭐가 도외시 되느냐 하면, 나보다 더 못하고, 나를 위해서 채찍 맞으신 예수님은 계속 배제되는 거예요.

끊임없이 배제되는 겁니다. 교회도 부흥이라는 목적가지고 살아가잖아요. 끊임없이 배제되는 거예요. 바로왕이 요셉을 요청해서, 그동안 이것은 누가 뭐래도 내 세계, 영광 받아도 내가 받는 그 세계에 해석자를 도입해 버립니다. 그런데 그 해석자는 그냥 해석자가 아니에요.

12절에 보면,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인에게 해석하더니” 그 다음 13절에 “그 해석한대로 되어” 해석이 바로 현실이었다는 사실. 꿈이 아니고 현실이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바로왕에게 소개합니다. 그렇다면 꿈이 꿈으로 남지 않고 현실로 바꿀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못살아도 축복이지요.

그리스도 빠진 것이 현실인줄로 알았는데 이제는 그리스도가 들어온 그것만이 현실이고, 전에는 내가 필요한대로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예수님을 이용하려 했는데 이제는 내가 예수님의 일부고 예수님이 주체라는 것을, 주객이 바뀌었을 때 이런 축복 말고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이제는 욥처럼 아파도 괜찮고, 부자 되어도 괜찮아요. 죽어도 괜찮고, 거지 되어도 천당 가고, 어디에 있어도 하늘나라 가고. 바로 꿈이라 하는 것은 내가 꾼 꿈이 아니고 주께서 집어넣어준 꿈의 일부를 오늘도 우리는 한 모퉁이 받아서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감사와 고마움을, 우리 속에 쏙 들어와 버린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님에게 영광 돌려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 잘되기 위해서 교회 나와서 얼마나 그동안 주님 부려먹었습니다. 주님의 프로젝트도 모르고 나는 마땅히 성공해야 되고 밥 먹고 살아야 되는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주님은 얼마나 고생하고 미움 받고 매몰차게 배제 당한다는 것을 생각 못하고 다른 예수 섬기지 않았습니까? 주여, 우리가 주님의 일부가 되어서 고통이 오든 복이 오든 쓰실 대로 쓰시다가 주께 영광 돌리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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