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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6 20:47:57 조회 : 77         
   에돔의 족보180516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에돔의 족보(창세기 36:1-3)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gSYBA1AbuZ8, Hit:13
 이근호 18-05-16 21:24 
에돔의 족보

2018년 5월 16일             본문 말씀: 창세기 36:1-3

(36:1) 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36:2) 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고

(36:3) 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맞이하였더니

에서는 실존 인물입니다. 사실 모든 인간들이 다 실존인물입니다. 그럼에도 유독 오늘 본문에서 에서에 주목하는 이유는 에서는 야곱과 더불어 지상에 언약의 실체를 드러내는 두 중심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최종적인 중심인물은 자기만을 내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현실 세계에 두 개의 중심으로 짝을 이루는 식으로 언약을 드러내는 이유는 하나(1)가 이 세상에서는 둘(2)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즉 둘(2) 없으면 언약이 설명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둘은 화합하거나 타협할 성격들이 아닙니다. 영원히 따로 갈라서게 되는 성질을 보이게 됩니다. 이게 바로 언약을 드러내기 위한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에게 있어 이런 언약적 현실상은 낯섭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하나(1)의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언약이 없기에 그 어떤 대비되는 요소가 없이 자기 자신만이 절대적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느껴지는 인생은 오직 한 길입니다. 자신이 지금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새롭게 변화할 가능성이 늘 있는 오직 단선의 미래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래의 개척은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렸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항상 비완료요 미완성입니다.

하지만 언약이 개입되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두 개의 길이 이 현실을 이끕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의 길이 있는 반면에 아벨의 길이 있습니다. 서로 섞이지 않습니다. 창세기 6장에 노아가 나옵니다. 노아의 길이 있는 반면에 그 외의 길이 있습니다.

그들 보기에 노아는 자기와 다를 바 없는 일반인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질 겁니다. 이는 홍수가 오기 전에는 말입니다. 하지만 홍수가 왔을 때, 노아는 그들이 속해 있는 영역이 아닌 다른 영역에 속한 인물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노아에게는 언약이 주어지므로서 두 개의 길로 구성된 현실임을 압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오직 하나의 길만 생각하고 평소의 삶을 살았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단순히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에게는 이미 미래의 일이 곧 그의 현재가 된 겁니다. 현재에서 미래의 상황을 재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와 같은 예가 열왕기하 7:10에도 나옵니다.

“드디어 가서 성 문지기를 불러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아람 진에 이르러 보니 거기 한 사람도 없고 사람의 소리도 없고 오직 말과 나귀만 매여 있고 장막들이 그대로 있더이다” 아람 나라가 북이스라엘을 철저하게 봉쇄했습니다. 성 안에 있는 자들이 집단적으로 굶을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엘리사 선자자가 말합니다. 얼마 안가서 이 성 안에 먹을 것이 풍부해 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문둥이 네 사람이 성 안에서 판단하기를, 이런 식으로 있다가는 성 안이나 성 밖이나 죽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성 밖에 나가보니 이미 적군은 다 떠나고 그들이 남기고 간 먹을거리가 가득했습니다.

바로 이런 상태가 최종 상태입니다. 언약을 공격했던 자들은 흔적도 없이 다 사라진 세계, 그것이 최종 언약이 마감되는 상황입니다. 언약의 사람은 미래의 삶을 현재로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싹쓸이 되는 것을 고대하는 자들입니다. 당연한 조치로 여깁니다.

세상에 미련없습니다. 걱정할 것이나 두려워할 것이 없는 이유는, 모든 결정은 언약에 의해서 확정지어졌다는 사실을 현재에 미리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언약의 현실은 언약을 아는 자들에게 보입니다. 세상은 언약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확연하게 갈라집니다. 이러한 상황은 언약의 가정을 통해 미리 보여줍니다.

언약의 가정이란, 언약으로 전개되는 세상의 현황을 좁은 가정 범위 안에서 기능적으로 작용하는 가정을 말합니다. 노아 가정이 그러하고 아브라함 가정, 이삭 가정이 그러합니다. 창세기 16:12에 보면,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고 해서 이스마엘의 운명을 미리 말해주고 있습니다.

안정성이 없이 사는 팔자라는 겁니다. 이번에 에서와 야곱과 대비되어 에서에게 내린 확정된 운명을 봅시다. 창세기 27:39의 말씀입니다.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이스마엘이나 에서의 특징은, 혼자 힘으로 살아야 될 운명이라는 겁니다. 미래는 본인이 개척해야 하고 싸워서 얻거나 빼앗지 아니하면 살 수 없는 삶이 그들의 미래라는 겁니다. 특히 에서에게 ‘칼을 믿고 생활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칼을 사용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믿는 것이 칼 뿐이라는 겁니다. 요즈음 식으로 하면 돈으로 산다는 겁니다. 돈이 최고의 안전성을 제공한다고 믿고들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두 개의 길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직 자신의 길은 자신이 헤쳐나갈 수밖에 없는 그런 운명자입니다. 그들은 이들이 다음과 같이 주장입니다.

“현실이란 오직 인간들이 각자 자신의 길을 이어가기 위해 분투노력하는 현장이다”는 겁니다. 항상 미완료요 미완성입니다. 긴장을 늦추지 못한 삶을 보내고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언약을 아는 자들은 이미 언약으로 인하여 모든 게 확정적인 목적으로 향하여 나아가기에 끊임없이 언약과 연관성을 유지합니다.

즉 언약의 완성인 십자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응답을 받는 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즉 언약이 언약대로 펼쳐지기 위해서 저 에돔같은 자들인 언약 진행과정의 부산물, 혹은 폐기물로 등장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들은 쌓고 또 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선한 현실은 그 쌓은 것을 허물고 또 허무십니다.(말 1:4)

노아 방주 밖의 세상처럼 지금도 이 세상을 불로서 싹쓸이 당하는 대상자들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 각자가 그 위치에 오르기까지 참으로 참혹한 고생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높이를 올려도 기초는 변하지 않습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언약으로 최종 확정시켜 놓은 것을 감사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쌓아도 주님이여 속히 다 허물고 계심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8-05-17 12:25 
138강-창 36장 1-3절(에돔의 족보)1805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6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54페이지입니다.

창 36:1-3

“에서 곧 에돔의 대략이 이러하니라 에서가 가나안 여인중 헷 족속중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중 시브온의 딸 아나의 소생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취하고 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취하였더니.”

에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에서가 실존이라는 것, 허구적 인물이 아니고 실존인물입니다. 실존인물이라는 말은 현실에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었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현실에 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왜 성경 창세기 36장에서는 에서의 족보에 대해서 이렇게 나열했느냐 하면, 에서가 일반사람들과 동일하게 실존인물이지만 에서는 야곱과 관련되어서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이 땅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현실성, 실제성을 언급하기 위해서 각자의 자기역할이 있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이이 땅에 마치 현실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어요. 일부가 아니고 전부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이 언약에서 만들어진 현실이에요. 언약에 의해서, 언약법칙에 의해서 펼쳐진 세상이 이 세상입니다.

그 마지막언약이 새언약이라 해서 예수님의 살과 예수님의 피를 이 땅에 쏟으신 그 일입니다. 십자가지요. 이 세상은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 세상이 펼쳐지는 겁니다. 따라서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뭘 묻느냐 하면, 네가 홀로 있지 않다는 것, 너 자체만을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고 언약과의 관련성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이러한 언약의 실제성은 그 언약과 관련된 인물의 실존적인 활동, 그들의 살아가는 것을 통해서 마구마구 언약이라는 것이 생동감 있게 이 세상에 펼쳐지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세상을 살면서 열심히 살고 부지런히 살았는데 언약이 뭐꼬, 언약이 뭐지, 십자가가 뭐지, 십자가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십자가와 율법의 관계는, 이렇게 십자가 중심으로 생각을 못한다는 것은 세상을 살면서도 세상에 대해서 전혀 모른 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거짓이라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탑을 쌓을 때는 실제로 눈에 보이기 때문에 멋있는 탑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탑을 정성들여 높이 쌓아도 그 기초가 바뀌지 않습니다. 언약의 특징은 두 대비되는, 대조가 되는 두 개의 성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 뜻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창세기 4장에서 가인만 부른 것이 아니고 가인과 아벨을 짝을 이룹니다. 짝을 이루어서 하나님의 뜻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고 노아당시에는 노아와 그 외 사람들, 그리고 노아 이후에는 순서가 있어요. 함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셈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나온 아브라함에 있어서는 이스마엘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 오늘 본문의 경우에는 에서의 족보가 먼저 나오고 창세기 37장에 보면 야곱의 족보가 또 나와요. 하나님의 언약은 그냥 여기 하나(1)로 있다, 가 아니라 그 1이 이 땅에서는 2로, 두 개로 갈라져서, 파생되어서 2가 되는데 그 둘 사이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고립되어 있어요.

결합이 안 되어 있습니다. 결합이 안 된다는 것은 아주 날카롭게, 철저하게, 고립적으로, 강제적으로 분리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철석같이. 협상도 필요 없고 타협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섞이는 것을 용납지 않으십니다. 흔히들 아는 말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관계, 그렇게 보시면 되지요.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천국과 지옥, 모든 것이 날카롭게 갈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노아 같은 경우에는 노아에게 처음으로 언약이 주어지는데 노아언약이 주어진 그 실체는 방주라는 물체로 되어 있습니다. 그 방주가 우리보기에는 나무로 만든 배 비슷한 물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보지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 노아가 쓸데없는 것을 만들고 있다, 그렇게 본 거지요.

그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는 언약이 오기 전까지는 그들은 둘로 갈라진다는 것은 생각도 못한 겁니다. 인간이면 다 같은 인간이에요. 여기에 에서 곧 에돔의 대략이 이러하니라, 여기서 에돔은 국가 이름이고 에서는 조상 이름인데요. 에서 곧 에돔의 대략, 대략은 족보를 말합니다.

족보가 이러하니라, 라고 되어 있는데 족보가 36장 가득 채워집니다. 그런데 이 족보 전체를 보게 되면 , 마치 막대모양의 쌀강정 같은 모양을 학 있지요. 쌀 알갱이가 엿을 통해서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형태. 원기둥처럼.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두 개의 원기둥이 고정된 막대모양으로, 그렇게 고정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에서의 족보를 죽 보면서 우리가 뭘 느끼느냐 하면, 언약적으로 볼 때에는 이쪽 편과 저쪽편이 나누어지겠지만 그걸 개인적으로 볼 때는, 한 사람으로 두고 볼 때는 그냥 한 사람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에요. 도서관에서 책 보는 학생 하나, 수영하고 있는 가정주부, 중국집에서 짜장면 뽑아내는 주방장, 이 모든 사람은 그냥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그 사람은 각자 나름대로의 인생을 힘들게 살아왔어요.

고생 없이 그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굉장히 힘들어요. 자기 인생 살아오면서 비도 맞고, 눈도 맞고, 바람도 맞고, 자기 딴에 억수로 고생고생 하면서 살아온 사람이에요. 각자각자 그래요. 그러니 이 사람들이 무슨 언약을 생각하겠습니까? 자기가 고생한 것이 그렇게 지독한데요.

길가는 사람을 보고 “당신은 주님의 언약을 생각하세요.” 하면 그 사람은 이상한 사람 취급받습니다. 지금 언약을 생각하기보다도 하루하루 밥 빌어먹고 산다는 이것이 얼마나 힘든가, 그 힘든 생각이 내 생각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지 그 외 달리 하나님의 언약이 어떠니, 하나님의 율법이 어떠니, 그런 생각은 들지를 않는 거예요.

아무리 내가 나를 봐도 매일같이 고생해온 나 그게 전부입니다. 성경에서는 일방적으로 에돔에 속한 자들, 이쪽은 야곱에 속한 자들, 이렇게 분류를 하지만 그 사람 하나하나 핀셋으로 끄집어내 보면 그 사람 하나하나가 무심하게 그냥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 개인은 이 땅에서 살아보려고 온갖 고생을 다하고 지금도 노력을 멈추지 않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당신의 소속은 에돔이요?” 하게 되면 그 사람들에게 그게 와 닿지를 않아요. 지금 소속이 문제가 아니고 내 몸 하나, 내 가정 하나 건사하기 바쁜데 언제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쓰겠어요? 그리고 그들은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현실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들의 현실 속에는 뭐가 없느냐? 언약이 빠져 있어요. 언약이 없습니다. 내가 내 가정을 살려야 된다는 이것 때문에 그 사람들 각자의 길은 단선이에요. 선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길이 하나가 아니고 길이 두 개에요. 지금 자기 일과, 자기직업에 분주하게 몰두하고 직장생활 하는 사람에게는 두 개의 길이 나타나지 않아요.

오직 어떻게 하면 내일 챙기고, 모레 챙기고, 어떻게 하면 구조조정 안당하고, 어떻게 하면 직장에서 안 쫓겨나고 어떻게 하면 노후대책 세우고, 어떻게 하면 아픈 몸 병원에 가서 빨리 낫고, 거기에 매진되어 있고, 지금 내가 이렇게 하면 이런 결과가 오겠지, 하는 순간 그 길은 두 개의 길이 아니고 단지 하나의 길 뿐이에요.

제가 교회에서 언약을 이야기해 봐도 그들은 관심도 없습니다. 오직 내가 개척해야 될 하나의 길, 나의 미래, 거기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언약, 이런 것에 전혀 관심 없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볼게요. 서울 강남의 아파트 재개발 하는데 나라에서 초과이익환수부담금을 준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예상이익을 4억으로 잡았다면 1억 3천만 원을 바로 내야 된다는 거예요.

방금 제가 한 이 이야기가 언약보다 훨씬 더 관심을 갖게 되지요. 언약보다 더. 부동산이 값이 오른다면 내가 세금을 얼마나 더 내야 될까, 그런데 관심이 더 있지요. 거기에 관심이 있다는 말은 평소에 마음가짐이 두 개의 길이 아니고 오직 내가 잘되는 길만 있으면 돼요. 오직 하나의 길이에요.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2020년도에 대학입시 요강이 바뀐다. 사람들의 관심을 끕니다. 중학생, 고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들. 그런데 2020년도에 언약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관심 없어요. 미리 대학입시에 대해서 정보를 잘 챙겨서 내 자식이 잘되는 오직 한 길, 오직 그 길만 알아요.

프랭크 시나트라 라는 가수도 마지막 부른 노래가 그거예요. 마이 웨이. 오직 자기의 길이에요. 늙수그레한 아저씨들이 그 노래 부르면서 눈물 흘린다고요. 내 인생 끝나 가는데 마이 웨이, 나는 최선을 다 했다고. 그러나 그 아저씨들이 언약 이야기를 하면서 울지는 않아요.

인간들은 오직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거기에 매진했기 때문에 자기 길 그것이 전부고요, 언약의 의해서 이 지상에 새겨버린 현실, 두 개의 길이 있다는 이 현실에 대해서 전혀 그들은 깜깜 무소식이에요. 들은 바 없습니다. 이야기 해줘도 들은 바가 없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면서 길이 하나가 아니고 두 개의 길이라는 것이 드디어 드러났습니다. 그걸 구약에서는 미리 언약을 통해서 들어오게 되면 같은 인간, 똑같은 인간인데 졸지에 완전히 갈라져버려요. 그 갈라지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그것이 하나의 운명으로 굳어진다는 겁니다. 그들의 운명이 언약으로 인하여 완전히 다른 한쪽과 또 다른 한쪽으로 확정되어버린다는 사실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몰라요.

다시 노아 이야기로 돌아가서 노아와 다른 사람의 운명이라 하는 것은 깔끔하게 끝나버립니다. 그들은 물에 잠겼고 노아는 물에 잠기지 않았다. 깔끔하게 끝나지요. 그 물에 잠겼느냐 안 잠겼느냐의 여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방주를 통해서 미리 알려줬습니다. 방주 안에 들어간 사람은 살고 그렇지 않으면 다 죽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사람들 보기에 동일한 인간으로 보이지만 완전히 두 조각을 내고 그 두 조각을 낸 멸망 받을 인간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오직 하나의 길밖에 없다고 우기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오직 하나의 길. “우리 대한민국은 북한이 핵개발을 하고 불바다가 되어도 우리는 괜찮아요. 왜? 우리에게는 십자가언약이 있기 때문에.” 이런 대한민국헌법 봤습니까?

kbs뉴스 시간에 “국제정세가 아무리 흔들리더라도 우리는 십자가의 길, 주님 가신 길이 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이렇게 이야기 하던가요? 두 개의 길을 염두에 두지 않지요. 오직 하나의 길을 염두에 두기 때문에 만약에 북한에 핵이 있으면 우리가 위태위태하다는 거예요. 오직 그 길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데 그 길에 사람들이 동조를 하느냐? 다 동조해요, 다 동조합니다. 강남 재개발에 관심이 있듯이. 평소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다는 것을 유감없이 티를 다 내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의 길이 어떤 길인 것을 언급합니다.

언약이 투입됨으로 말미암아 언약을 모르는 인간들은 고립되어 있으며 그 고립된 인간들의 운명에 대해서 언약을 통해서 미리 알려주는 겁니다. 인간의 길이 하나밖에 없다면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서 지금 준비를 해야 되겠지만 언약의 길이 따로 주어지게 되면 언약의 길에서는 미래를 대비한다든지 준비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미래가 여기에 도달되어 버렸어요. 그 예가 열왕기하 7장 10절에 보면 엘리사 시대에 나옵니다. 엘리사시대에 북쪽 이스라엘이 하도 우상숭배를 해서 하나님께서 아람나라, 지금의 시리아, 내전이 일어나고 있는 시리아, 그 아람을 보내서 계속 침공하게 하셨습니다.

어느 날 아람나라가 와서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완전히 굶어죽게 되었어요. 북쪽 사마리아 지방을 완전히 포위해서 굶어죽게 되었을 때에 거기에 문둥병자들이 있었는데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여기 있으나 성 밖에 나가나 이래저래 죽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으로 성 밖으로 나갑니다.

열왕기상 7장 10절에 “드디어 가서 성 문지기를 불러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아람 진에 이르러 보니 거기 한 사람도 없고 사람의 소리도 없고 오직 말과 나귀만 매여 있고 장막들이 그대로 있더이다.”라고 이야기해요. 이미 모든 것이 싹쓸이되고 난 뒤의 상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이미 엘리사가 예언을 했거든요. 엘리사는 미래에 가서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미래가 들이닥치는 거예요. 문둥병자들이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진짜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마음으로 가보니까 엘리사가 이야기한 미래의 상황이 문둥병자들에게는 현재가 되고 말았어요.

미래의 말씀이 곧 현재였어요. 모든 일이 마무리 된 이후의 상황을 미리 안 겁니다. 언약의 길을 가는 사람이 언약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들 인생 속에 언약이 미리 와서 마중 나와서 개입해 버린 겁니다. 완성이 되어버려요. 그러나 언약의 길이 아닌, 언약의 길도 모르는 사람들은 항상 미완성, 미완료에 초조감을 느끼고 시달리게 되고 불안과 걱정 근심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왜? 자기가 살길은 자기가 개척하는 그 길밖에 없기 때문에. 언약이 어떻게 개입하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가지고 현실이 그렇게 구성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대조되는 작은 현실을 언약적가정에 만들어줬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아브라함에 있어서 이삭이냐, 이스마엘이냐? 이스마엘이 먼저고 이삭이 나중에 태어나거든요. 이스마엘과 이삭 중에서 이스마엘의 운명에 대해서 창세기 16장 12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노아 때는 언약 바깥에 있는 사람이 싹쓸이돼요. 다 물에 잠겨버려요.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언약이 점점 더 진행되는 그 과정에 맞추어서 언약이 아닌 것들을 작은 현실로 개개의 언약가정에 보여줬는데 저는 그걸 언약의 폐기물이라 합니다. 언약의 부산물이지요. 언약이 살아 있어서 그 여파로, 부산물로, 또는 폐기물로 나오는 것들이 이삭에게는 이스마엘이 그러한 거예요.

다시 말씀드려서 노아언약을 모르는 사람은 그냥 물에 수장되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다가 완전히 싹쓸이해서 물에 잠겨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뒤에도 싹쓸이냐? 아닙니다. 창세기 16장 12절에 보면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찌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끊임없이 자기의 칼을 믿고 살아야 돼요. 전쟁해야 돼요. 왜냐하면 언약에서 배제된, 언약의 뜻이 뭔지도 모르는 채 살게 되면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자기가 살 도리 외에는 다른 방안이 없어요. 다른 방식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을 언약이 살리는 것이 아니잖아요.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이 살린다는 것에 대해서 모든 대한민국 사람들이 동의합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이 살린다는 생각은 안 갖지요. 십자가지신 주님이 어떻게 살리는가? 대한민국 다 죽어도 괜찮다는 식으로 살리지요. 물이 넘쳐도 괜찮아요. 홍수가 나서 싹쓸이를 해도 괜찮아요. 언약대로 따로 구원될 자가 있기 때문에. 이게 언약이에요.

그런데 눈에 보이는 우리 식구들, 우리 사람들 살리자. 이렇게 되면 언약이 아닙니다. 언약이 아니고 본인의 뜻이 언약보다 먼저 앞서서 나만 살면 된다는 마이 웨이죠. 언약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런 현실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언약을 안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세상을 보는 눈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거예요. 언약을 모를 때는 나만 살고보자, 에요. 그리고 그것을 현실로 보고. 언약을 아는 사람은 나만 살고 보자, 가 언약에 의해서 저주받을 자의 성질이라고 보는 겁니다.

막대기 같은 두 개는 서로의 성질과 성격이 완전히 확정되었어요. 끼리끼리 모인다고요. 그래서 창세기 16장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마엘의 삶이라 하는 것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되고, 살려고 애를 써야 되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합니다. 내가 이렇게 노력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라는 생각으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저주받은 운명에 속하는 겁니다. 그들의 운명도 역시 확정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에서와 야곱의 경우를 봅시다. 창세기 27장 39절에 보면, 야곱의 형 에서한테 어떤 운명이 주어지는가를 하나님께서 미리 언약적으로 예언을 했습니다.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너는 믿기는 믿는데 뭘 믿는가? 칼을 믿고 섬긴다. 사무라이입니까? 그 사람이 칼을 믿는다는 말은 그 당시에 칼이 자기의 몸을 지키는 가장 안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안전빵은 뭐냐 하면, 돈이에요. 돈이 넉넉할 때 가정 안정감을 느낍니다. 돈이 빠지면 불안정감을 느끼겠지요. 초조하지요. 에서입니다. 에서성격이에요.

언약을 모르고 자기 인생밖에 모르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에서와 야곱의 살아가는 방식을 양쪽 다 구분해서 주어지도록 하는 것은, 그들이 가졌던 성질은 본인의 의도에 의해서, 본인의 노력에 의해서 절대로 바꾸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야곱은 야곱이고 에서는 에서일 뿐이지 에서가 야곱되는 경우는 없는 거예요. 확정된 겁니다.

에서같은 사람이 교회를 백날 나와 봐야 교회를 떠납니다. 아니 교회를 안 떠나더라도 하나님이 언약은 떠나겠지요. 교회 나오는 의도 자체가 내 인생 잘 풀리게 해보려고 교회 나왔기 때문에 그 사고방식 자체가 에돔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칼을 믿고, 내가 믿을만한 것을 설정해 놓고 그 칼이 잘 들도록, 나를 보다 안전하게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예수께 기도하러 교회 왔기에 그 성격은 에돔적 성격이지 야곱적 성격은 아닌 거예요.

마치 노아에서 방주 없는 채로, 방주 없는 식으로, 방주 생각하지 않고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에돔입니다. 그러나 그 에돔의 운명은 결정났어요.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에돔이 사는 동네가 제일 척박한 동네에요. 척박한 동네에서 겨우겨우 사는데 열왕기하 8장에 보게 되면 유다나라 여호람왕이 죄를 지었을 때에 잠시 아우인 유다나라의 압제에서 잠시 풀려나온다는 예언을 하는 겁니다. 하지만 말라기 1장에 가면, 에서의 운명은 최정적으로 확정이 됩니다.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찌라도 나는 헐리라.”

에돔의 특징은 뭐냐 하면, 마이 웨이, 자기 잘되는 길밖에 모르기 때문에,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언약이고 뭐고 내 인생, 내 앞길은 나 하기 나름이라는 그 정신으로 완전무장 되어 있어요. 거기다가 십자가, 언약 이야기 해봐도 그 성질, 성격은 안 바뀝니다. 백날 해도 못 알아들어요. 이것은 고집 정도가 아닙니다. 완악정도에요.

본인도 본인을 어쩔 수가 없어요. 에돔족속은 야곱의 족속을 드러내기 위한 보조물, 부산물, 폐기물, 쉽게 말해서 쓰레기라는 사실을 본인들이 수용을 안 합니다. 노아 이야기 다시 할게요. 노아 때 물속에 잠긴 것은 노아가 만든 방주의 기능을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물심판이 온 거예요. 물심판이 오지 아니하면 노아방주는 완전히 웃음거리 되어 버립니다.

“저 영감쟁이가 쓸데없는 것을 만들었다. 비도 오지도 않는데 왜 만들었나?” 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언약을 제시할 때는 인간 위주가 아니고 언약을 돋보이게 하고, 언약이 왜 이렇게 주어져야 되는가, 하는 언약의 당위성, 적합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정없이 전부 다 양쪽을 싹쓸이해버리는 거예요. 아예 싹쓸이 할 때는 시원합니다.

진짜 인생 뭐 있어. 한 방이지. 언약 한 방에 다 날라 가버립니다. 혼란스러운 것도 없고 혼동스러운 것도 없어요. 만약에 내 앞길, 단선, 내 인생만 있다면 혼란스러울 때 우리가 어딜 가야 되느냐 하면, 점집 찾아가야 되고, 사주팔자 봐야 되고, 궁합 봐야 되고, 손금 봐야 돼요. 물론 그 대신 새벽기도 나오지만. 성경구절 보면서 큐티 해서 자기 미래가 잘 될까를 살펴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호하고 뭔가 불안하다는 뜻이거든요. 저에게 “목사님, 인생이 불안하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것은 어떤 모습입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세상 보면서 “저놈의 세상 불이 되든 물이 되든 완전히 싹쓸이했으면 좋겠습니다. 월드컵이고 뭐고 간에, 북한과 미국의 회담이고 뭐고 아예 싹쓸이가 제일 속 시원합니다.” 그런 눈, 그런 안목으로 세상을 보는 거예요.

교육감투표고 뭐고 소돔과 고모라의 불심판으로 해서 다 죽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니 골로새서의 말씀처럼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속했다는 티를 팍팍 내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창세기 27장 40절에 이미 에서의 운명은 고정되어 있습니다.

오늘 고정되었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데 확정되어 있어요. 고립된 거예요. 고칠 수 없는 방식으로. 그 다음 중요한 문제.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야곱에 속했느냐, 아니면 에돔에 속했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 판정을 내릴 수 있겠느냐 하는 그 문제가 남아 있지요.

그 문제는 이 문제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질문이 성립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언약에 대해서, 언약의 효능에 대해서 수시로 질문할 수 있는 사람. 지금은 새언약 십자가니까, 십자가복음에 대해서, 예수님의 피흘림에 대해서, 왜 피를 흘려야 되는가를 수시로 물어볼 수 있는 그 사람은 에돔의 길이 아니고 야곱이 길에 속한 사람이에요.

언약에 대해서 묻는다는 겁니다. 언약이란 뭐냐? 확정된 하나님의 원리에요. 이미 결정 난 운명의 법칙입니다.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달라지지 않는 그 무엇,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반대로 내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상관없이 고정불변으로 결정 난 그 법칙, 그게 언약이에요. 한 번 주어진 언약은 변동이 없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살아야만 돼요. 말라기에 보면 야곱은 어떻게 살든 사랑 받아야 되고 에서는 어떻게 살아도 미움 받아야 돼요. 말라기 1장 2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이렇게 주님의 결정적 뜻이 결정적인 언약을 통해서 새언약,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최종적으로 확정 나버렸어요.

변동이 없어요. 고정적으로 확정이 났다는 것은 유도리도 없어요. 달라질 것도 없어요. 내가 설친다고 변경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언약이 얼마나 확정적인가를 성도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환란과 핍박과 기근과 곤고와 적신, 위험, 칼, 그런 것들을 가지고 마귀가 와서 의도적으로 흔들기를 허락을 해요.

흔들어보게 되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고 “주여, 십자가가 뭡니까? 언약이 뭐예요? 십자가가 있는 현실이 어떤 현실이기에 나는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지요?” 또는 “나는 이렇게 여유가 있지요? 잠이 잘 오고 걱정근심이 왜 없지요? 대체 십자가가 뭐길래?”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와 연결된 질문과 거기에 대한 응답을 주고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람, 이것이 바로 언약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 야곱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에돔 사람들은 길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남들을 모델로 삼아요. ‘저 사람 좋겠다. 저렇게 잘 살다니.’

어제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이 세상권세, 악마의 권세에 눌린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1과 2가 있다 했어요. 1은 뭐냐? 내 돈 내가 쓰는데 네가 왜? 이런 사고방식. 두 번째는, ‘나 저 사람처럼 되면 소원이 없겠다.’ 이런 것.

드라마에 그런 것이 나오잖아요. 남자가 하나인데 아내가 졸지에 두 명 생겼어요. 지금 나와 함께 있는 그 여자가 굉장히 아파한다고 하니까 진짜 아내가 하는 말이 “나는 안 아프나?” 이렇게 해요. 그게 1번에 해당돼요. 남이야 아프든 말든 내가 아프면 안 된다는 거예요. 2번은 뭐냐 하면, 남들처럼 잘 살고 남들처럼 행복한 가정이 되어야겠다. 이것이 2번이에요.

그리고 그것을 현실의 전부로 보는 겁니다. 그게 방주 바깥의 풍경이에요. 언약 바깥의 풍경입니다. 이것이 이삭이 아니고 이스마엘이 가는 길이고 이것이 에서가 가는 길이에요. 우리는 모든 것을 모르니까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확정적으로 미래의 모든 모습을 깔끔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노아에서는 물에 잠기는 식이었지만 요즘에 언약 밖의 사람들은 자기 힘을 믿고 자기가 자기를 안전빵으로 지킬 수 있는 그걸 붙들고, 돈이면 돈, 건강이면 건강, 자기 가족이면 가족, 권세면 권세, 그걸 붙들고 이것만이 날 살릴 수 있다고 그것만을 현실로 보고 거기에 온 마음과 정신을 매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언약 밖에 있는 에돔의 사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설교 초반에 이렇게 이야기했잖아요. 그들은 나름대로 굉장히 고생을 많이 해요. 지금도 고생하고 있고요. 힘들게 고생고생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 고생한 길이 지옥인데. 싹쓸이하면 화내요. 자기 공들였던 것이 너무 아까워서. 그들은 그것이 현실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야곱과 분리되는 에돔의 운명입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날 사람들에게 얼마나 먹힐 것인가? 그것은 우리 몫이 아니고 주님의 몫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똑바로 보게 하옵소서. 십자가 달린 예수님의 눈으로 보게 해주시고 방주 안에서 노아가 보는 것처럼 세상을 심판 아래로 볼 수 있는 눈을 허락해 주옵소서. 이유 없이 무조건 사랑받았던 자의 모습이 같이 멸망당해도 마땅한 자에게 십자가 피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는 기회가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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