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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1 20:36:40 조회 : 543         
   제단쌓기 180411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제단쌓기(창세기 35:1-5)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e6HV8vKKEDU, Hit:221
 이근호 18-04-11 21:18 
제단 쌓기

2018년 4월 11일                   본문 말씀: 창세기 35:1-5

(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35: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5: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35: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35: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성경에서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로부터 수동적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자기 결정, 자기 결심, 자기 각오, 자기 선택은 주님으로부터 늘 거절당할 요소가 됩니다. 주님의 살아계심에 ‘나의 살아있음’는 늘 눌리는 처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야곱의 구원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드님과 창세 전에 정해놓으신 그 게약을 지상에 구체화하려고 하십니다. 이게 ‘언약 세우기’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시면서 ‘언약을 세우는 것’과 같은 겁니다. 노아에서는 ‘방주’이지만 야곱에게는 벧엘에 ‘제단 세우기’입니다. 물론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을 사다리 꿈을 꾸고 난 뒤에 나름대로 돌 배개에 기름부어 ‘하늘의 문’이라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밤의 천사와 만나기 전의 야곱이기 때문입니다. 밤의 천사와 씨름하고 난 뒤,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바뀐 야곱으로 벧엘에 올라와서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지정된 장소에 그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의 의미를 지닌 인격의 만남이 진정한 하나님의 언약을 담는 ‘하늘의 문’이 되는 겁니다.

이 제단 쌓기에는 필히 ‘우상’에 관한 것을 제거되어야 합니다. 우상이란 ‘벧엘의 정신’이 누락된 신을 말합니다. 곧 언약의 실재화가 되지 못하는 제단이 우상의 제단입니다. 인간들이라면 누구나 신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대지 위에서 산다는 것은 오류와 시행착오의 연속인 것을 누구나 경험합니다.

즉 본인들이 완전치 못함을 절감하는 것과 동반해서 완전하고 전지전능한 분으로부터 용서와 자애와 도움을 구하고 싶은 겁니다. 누구를 위해서 말입니까? 자신의 안녕과 안식과 번영을 위해서 말입니다. 문제는 이게 ‘창세 전의 언약의 내용’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런 정신은 마치 야곱이 밤의 천사와 만나서 씨름하기 이전의 마음 상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겨냥해서 복을 주셨다고 이해하는 겁니다. 야곱은 자기에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현재 자아가 확정된 자아가 여기고 있습니다. 마치 연극의 관람객 입장에서 결과로 주어진 성과를 알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에서 성도는 관람객 입장이 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라는 소용돌이에 참여시켜서 정신없이 세상 수모와 수치에 휘말리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당하셨던 그 배척과 비난과 고난을 함께 경험토록 합니다. 세상에서 떨어져나가는 아픔을 강제로 겪게 하십니다. 이 상황에서 성도는 세상이 주는 비웃음을 온 몸으로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지옥에서 성도가 아닌 자들이 받아야 될 수모와 수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옥에 살기에 고생스러운 것은 물론이고 언젠가 복역을 다하고 빠져나온다는 희망이 영원히 차단되어 있다는 사실이 가공할 만한 절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이렇게 수동적인 태도를 유지하도록 이끄시는 이유는, 창세 전에 확정된 계약 때문입니다.

마치 회사에 입사할 때에 ‘서류 심사→실습→면접’ 순으로 합격시켜듯이, 창세 전에 야박한 분류를 하나님 아버지와 아드님이 하셨습니다. 천국 아니면 지옥, 이 두 종류의 운명만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서류에 입각해서 이 땅에 사람들을 태어나 실습시킵니다. 이 실습은 철저하게 수행됩니다.

아무리 천국이 좋아도 서류에 지옥갈 자라면 용납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세상쪽으로 나아가고자 하여도 서류에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기로 되어 있다면 지옥가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이 실습 과정에서 성도는 구경꾼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시던 길을 가게 됩니다.

쉴틈없이 주어지는 환란과 핍박 속에서 들어서기에 참으로 그 어떤 세상의 힘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음’을 증명해내는 도구가 됩니다.(롬 8:39) 그리고 마지막에는 감격의 상봉이 있습니다.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하게 될 것입니다.(고전 13:12)

그동안 야곱도 이 원리에 따라 이 땅에 태어나서 실습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창세 전의 서류 대로 실습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야심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많은 자식과 많은 재산을 모으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복받은 증거라고 여기고, 그럴 경우에만 자신의 진정한 ‘복의 근원’이라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은 ‘자기 것 챙기기’ 사고방식입니다. 즉 ‘면적 형식’으로 자아를 인식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자아를 꽃꽂이 할 때 등장하는 녹색 스펀지 블록이라고 본다면, 그 물에 젖은 부드러운 스펀지에 평생에 살면서 당했던 모든 고상하고 경건된 것들이 꽃가지처럼 꽂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저런 고생담이 자신의 거룩함을 장식하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자임을 증거하는 훈장처럼 작용할 것이 뻔합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들고 나간다면 기꺼이 저도 그 수난을 감당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이는 또 하나의 요란스러운 경건의 꽃이 자아의 마음에 꽂혀서 자신을 찬란하게 빛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은 어디까지 우상숭배적입니다. 야곱 언약은 야곱의 마음을 고귀한 것으로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야곱을 ‘하나님과 싸운 인물’로 만드는 겁니다. 육에서 영으로의 이르는 과정은 ‘화해’가 아니라 ‘전쟁’입니다. 이 전쟁을 통해서 야곱은 거룩한 스펀지가 아니라 골판지가 되어야 합니다.

자체적으로 폭을 갖지 않는 하잘것 없는 합판 종이 말입니다. 찢으면 쉽게 찢어지고, 손가락으로 쑤시면 구멍이 뚫리는 연약한 골판지입니다. 그저 천국과 지옥, 사랑과 미움의 대치 속에서 그 경계를 장식하는 ‘선’이 됩니다. 면이 아니라 선입니다. 성도의 삶은 매일같이 지옥같은 세상에 시달리고, 천국의 복에도 흠뻑 젖어보는 경계적 삶입니다.

‘틈 사이 인간’ 이것이 성도의 실존입니다. 고난과 구원의 기쁨을 늘 함께 맛보고 있는 삶이 곧 ‘움직이는 벧엘, 움직이는 성전, 움직이는 하늘의 문’으로서의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온갖 수모조차도 면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조치임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8-04-12 14:21 
133강-창 35장 1-5절(제단 쌓기)1804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5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53페이지입니다.

창 35:1-5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야곱이 하나님 만나고 난 뒤의 경험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일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다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봐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야곱을 다루고 계십니다. 야곱은 수동적인 사람이 되는 거지요.

믿음만 있으면 이것보다 더 편한 인생은 없습니다. 믿음만 있다면, 믿음이 없어서 문제지 믿음만 있다면 이것이 제일 수월하지요. 죽으라면 죽고 더 살라면 하루치 배급받아서 살면 되거든요. 어서 주와 함께 거하기를 바라는 이러한 수동형 인생은 사실은 창세전의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야곱의 출생을 보게 되면,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한 것으로 로마서 9정에 보면 이미 결정 난 것으로 되어 있어요. 결정 났는데 왜 야곱과 에서가 이 땅에서 무던히도 고생을 많이 해야 되는가? 그것은 이렇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이미 서류심사가 야박하게 사랑받을 자, 미움 받을 자로 딱 구분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땅에 야곱과 에서를 태어나게 해서 철저히 실습단계에 들어갑니다. 서류에 분류된 그 분류의 원리를 실습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지요. 여기는 어떤 유동성도 없습니다. 아무리 구원받고자 해도 정해지지 않았으면 주께서 내치십니다. 그리고 아무리 주님 앞에서 도망쳐도 주님께서는 자기 택한 백성을 끄집어내십니다. 아주 철저해요.

가혹할 정도로 하나님의 수동적인 작업은 완벽하고 빈틈이 없습니다. 실수가 없습니다. 오류도 없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세 번째가 뭐냐? 영광스런 면접이 있습니다.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볼 것입니다. 주께서 저를 이렇게 만들었잖아요, 라고 기분 좋게 고백할 수 있는 그날.

그래서 인생이라 하는 것은 실습과정인데 이 실습을 통해서 주님께서 내 뜻대로 되지 않고 이미 내가 모르는 주님께서 정해준 뜻대로 분류작업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걸 하면서 인간은 실습단계 속에서 사탄에게도 휘둘리게 되어 있고, 세상의 온갖 것, 이 세상 악마의 광풍의 소용돌이에 아주 연약한 자로 다뤄지게 됩니다.

이 세상은 힘이 세고 성도는 스스로 헤쳐 나갈 힘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 과정 가운데서 내 뜻대로 나를 구원하겠다는 이 모든 시도가 다 헛수고라는 것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창세전에 결정한 그 결정이 세상의 어떤 악마의 힘보다 더 세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되지요.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말씀대로 환란이나 핍박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그런 것을 허락하시는 겁니까? 그 어떤 경우, 심지의 사탄의 권세, 그런 어떤 경우라도 주님 주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성도가 흔히 복음 좀 알게 되면 아는 공식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 죄를 알게 되면 그 죄에서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 그 사랑이 더 크게 느껴진다는 공식이 있는데 그 공식은 곧잘 이야기들 해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내가 묻고 싶은 것이 뭐냐? 당신이 어느 정도 비참하게 될 때 그것을 인식하게 되느냐를 묻고 싶어요.

“주여 죄인입니다. 나 같은 죄인……” 이렇게 할 때 그 사람은 분명히 뭔가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고 자기 형편이 지금 엉망진창이라는 뜻이거든요. 망가졌다는 뜻이 아닙니까? “주여, 제 죄 때문이니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이런다는 말이지요.

“이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십자가 보혈의 피를 흘려서 저를 용서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공식처럼 외우고 있는데, 그렇다면, 진짜 그게 진심이라면, 하나님이여, 내 형편이 더 비참하게 되게 해달라고 그런 기도는 왜 안하는지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주님에 대한 고마움은 더욱 더 커질 것이니까. “주님, 이 정도 비참해가지고는 감사가 제 성에 안찹니다. 더 비참하게 해주셔야지요.”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을 저는 못 봤어요. 마치 식겁했다는 뜻으로, 큰일 날 뻔 했다는 자기단도리가 더 급하게 나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 고백이 거짓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후딱 듭니다. 그냥 이론적으로 “주여, 이 어려움 가운데서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말은 하는데, 그 어려움 때문에 주님에 대한 감사가 더 컸습니다, 라는 후기를 이야기하는데 그런 논리라면 그 정도 망가져서야 되겠어요? 집구석이 더 망가져야지요.

그쪽으로는 또 안 가려고 하네요. 그러면 뭘 원한다는 거예요? 주님에 대한 감사를 원한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내 인생 좀 곱게 갑시다, 하는 그것을 원한다는 말인지. 자기 생각이 우선인지 주님에 대한 감사가 우선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어쨌든 간에 이 야곱은 수동적입니다. 야곱의 남은 인생은 자기 인생이 아니에요. 그래서 수동적이니까 자기 인생을 자기가 계획 세울 이유가 없지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 교회 나올 때 기도하러 나오고 어떤 목적을 세우고 나오는데 그들의 기도제목이나 내용, 그들이 목적하는 바를 가만 들어보게 되면, 안 듣고 싶어도 다 듣기거든요, 들어보게 되면, 은혜를 주게 되면 인간이 은혜를 더 많이 달라고 하는 그것이 문제에요.

주신 은혜는 기본으로 여기고 그것보다 더 달라는 겁니다. 은혜 줘도 문제에요. 그걸로 나가떨어지면 참 고맙겠는데 그게 아니고 ‘애걔? 이정도 밖에 안 됩니까?’ 이런 식이에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광야를 한 번 보세요. 광야에 양식이 전혀 없습니다. 광야에 양식이 없다는 말은, 너는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침에 나와 보면 만나가 떨어져 있거든요. 허겁지겁 주워 모읍니다. 그런데 또 욕심내는 자들이 이틀 치를 긁어모으다가 나중에 썩은 냄새가 집안에 풍기지요. 그걸 염두에 두고 주님께서 주기도문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내일 치를 달라고 기도하지 말라는 거예요.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하는 것은 내일 목숨은 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의 양식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걸 더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이 땅에 더 살려고 하지 마라. 너는 이곳에서 이방인이잖아.” 영어로 ‘gentile’이라고 하는데 이방인, 이곳은 너의 세상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우리는 이방인이고 객이라는 말이지요. 나그네라는 말이지요. 나그네, 이방인 언급을 제가 하는 이유가 있어요. 주께서 수동적으로 주시는 그 명령이 뭐냐 하면, 1절에 보면,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는 겁니다.

벧엘로 올라가는데 구경하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단을 쌓으라는 겁니다. 자,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는데 이미 은혜 받고, 복의 근원되고, 하나님의 천사까지 만났으면 이제 새사람 되었으니까 그냥 살면 되는데 왜 야곱으로 하여금 벧엘로 가게 하시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야곱은 자신의 생존문제, 이 땅에서 자기 인생만 살면 자기 임무가 끝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뭔가 증거 해야 될 사람입니다.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이 증거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일을 벌였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일을 벌이는데 그것은 땅에 있는 인간들이 상식선에서 하늘을 향하여 냅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고 정리하는 그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 하나님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4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이방 신상, 그러니까 야곱과 야곱외의 다른 사람들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야곱외의 사람들은 신을 자신을 출발점으로 해서 자신의 상식에 납득이 되는 하나님을 이미 섬기고 있었어요. 야곱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야곱도 똑같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야곱언약, 아브라함언약, 이삭언약, 야곱언약,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특별하게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찾아오셔서, 네가 방주를 만들고 언약을 세우라, 하는 그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통해서 언약을 세우는데 그 하나님을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뜻은 야곱에게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던 그 계약을 지상에 구체화시키는 작업에 야곱을 통해서 나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야곱은 뭘 하느냐 하면, 그 당시에 유일하게 하늘과 땅의 접점이 되는 거예요. 다른 민족,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몰라요. 그냥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의 정성을 바치는 거지요.

정성, 성의, 가인처럼 자기가 농사지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은혜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표시를 하지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연결되는 중보자적 기능이라는 것이 없어요. 확실하게 연결되었다는 증거가 없다는 말이지요. 그 증거를 하나님께서는 벧엘로 정했습니다. 야곱보고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는 거예요.

벧엘이라는 말은 뭐냐? 창세기 28장에서 벧엘이 나오는 대목에 보면,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라고 했어요. 벧엘이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라는 것은 다른 곳에는 하나님의 문, 하나님의 성전을 하나님께서 인정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야곱이 가지 않아도 그 벧엘은 하나님의 전이고 하늘의 문이 되겠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벧엘이라는 그곳이 하나님의 전, 하늘의 문이 되려면 그 벧엘에 있게 했을 때 일어난 상황을 유일하게 경험했던 자가 야곱입니다. 야곱으로 하여금 그 벧엘에 올라가게 해서 인격과 장소를 매치시키고, 연결시키고, 결합시키는 작업에 주께서 나서시는 겁니다.

알기 쉽게 말해서 고정된 장소가 하나님의 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벧엘이 야곱 속에 들어와서 야곱이 움직일 때마다 움직이는 하늘의 문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고, 수동적으로 그렇게 다루시겠다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내가 있는 곳이 곧 하늘나라, 라는 것과 같은 이치에요.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염두에 두느냐? 기존의 인간들은 땅의 존재입니다.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나온 뒤에 땅에서 살아야 돼요. 땅의 존재들인 인간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거기서 어떤 틀을 잡아야 돼요. 틀을 잡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 인간이 놓여 있습니다.

특정시간, 또는 특정지점에서 하나님과 만나겠다는 식으로 이미 인간들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어떤 거점, 아지트, 본부, 그런 것들을 마련하기 마련이거든요. 그래서 벧엘에서 단을 쌓으라고 할 때 그 벧엘에서 처음으로 특수한 장소에 특수한 기호를 한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아니고 야곱 본인이었습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라고 17절에서 19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을 하나님이 인정하셨느냐? 인정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성급했어요. 야곱은 자기에 대해서 자기가 오해하고 있습니다. 지금 나와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하고 계약을 맺은 것이 아니고 야곱 속에 있는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하나님하고 계약을 맺은 거예요. 그걸 풀이하면 하나님은 언약에 의해서 성취된 하나님 자신이 계약을 맺는 겁니다. 이게 마지막 때 아버지께서는 아들만 계약자로 삼고 그 외 어떤 인간도 계약자로 삼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해요. 나는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는 말은, 십자가를 지지 않은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계약에 대해서 책임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책임자가 되려면 창세전에 사랑하는 자와 미워하는 자를 분류하는 그 서류봉투를 갖고 있어야 돼요.

서류심사니까. 처음부터,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서류부터 먼저 있었으니까.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거든요. 예수님이 말하기를,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왔다고 했으니까 그 뜻, 아버지가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한 그 서류봉투, 그 뜻, 그것을 손에 쥔 자만이 수동적으로 받는 실습을 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어요.

그리고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나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인 나를 아는데 목자는 그 양을 세상 어떤 권세에도 빼앗기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다 했다는 겁니다. 절대로 빼앗기지 않는다는 거예요. 제가 이쯤 이야기하게 되면, 머리 좋은 사람은 이렇게 나와야 돼요. “목사님, 교회 필요 없네요.” 이게 탁 나와야 돼요.

인간이 세운 교회가 필요치 않아요. 기독교부터 천주교 등 모든 종교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기독교, 천주교, 불교는 전부 다 인간들이 만든 거예요. 하나님이 만든 것은 따로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 살기 얼마나 빡빡합니까? 남의 돈 빼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어요. 이 세상에서 남의 돈을 빼먹는다는 것은 큰 사기 치든지, 아니면 중간사기 치든지, 작은 사기 치든지. 어쨌든 사기 쳐야 돼요.

사기 치지 않고 돈 버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가족의 생계를 보장하려고 해요. 그렇게 살다보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미안스러운데 아침이 되면 또 사기를 쳐야 되니까 그런 것을 좀 해소하고 싶은 생각이 들겠지요.

뭐 없는 가 두리번거리다가 보니까 첨탑이 보이고, 십자가 보이고, 성당 보이고, 로만칼라라 해서 유니폼 입고 티내는 사람들 보이고, 거리의 수녀들 머리에 쓰고 돌아다니고, 절에 가면 목탁 들고 세상을 초월한 양 머리 깎고 있으니까 ‘저들이 뭐라도 알겠지. 저들이 내 영혼 책임지겠지.’ 그래서 온 거예요.

수동적이 아니고 능동적이라니까요. 그들은 능동적으로 온 거예요. 그리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빡세게 하게 되면, 신이 계시다면, 진짜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렇게 세상 살면서도 짬짬이 시간 내서 교회 와서 열심히 한 것에 대해서 눈 만들고 코 만드신 분이 다 알아주겠지, 보험 들듯 교회 한 번 다녀보자, 이렇게 해서 교회라는 것이 사람들이 필요해서 만든 거예요.

그러나 구원은 주님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거예요. 주님 쪽에서 주체가 되어서 시작하는 겁니다. 야곱이 돌베개 해서 기름 부은 것, 그거 소용없어요. 그건 야곱이 했거든요. 야곱이 했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도 언제든지 할 수 있어요.

정말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네가 지금 은혜 받았다고 돌베개에 기름 붓는 그것 말고 그 야곱을, 그 잘난 체 하는 야곱을 하나님이 직접 만나서 어떻게 그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죽여 버리는가, 참여시키는 그 과정이 필요한 거예요. 야곱에서 이스라엘 되는 그 과정이 필요한 겁니다. 그 과정 된 자가 벧엘에 가서 단을 쌓아야 돼요. 제단을 쌓아야 된다고요. 다른 인간이 하면 안 되고. 옛날 그 야곱은 안돼요.

제가 창세기 32장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설교한 적이 있어요. 얍복강 그 대목에서. 그 때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야곱은 본인이 복을 소유하는 자라고 여겼다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복 주시니까 나는 그 복을 받으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자기는 있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복을 줬다는 거예요. 복을 줬으니까 주는 복을 수동적으로 받아서 주님 복 가지고 구원받으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 야곱 같으면 하나님께서 일부러 야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천사를 밤에 나타나지 않게 했을 거예요. 밤에 굳이 나타날 이유가 없어요.

그런 훌륭한 야곱 같으면, 그게 정답이라면 밤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야곱하고 씨름까지 할 이유가 없어요. 그래서 구원받는다면. 야곱이 벧엘을 두고 하늘의 문이라고 한 것은 낮이 아니고 밤이에요. 밤에 꿈에 사다리를 통해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야곱에게 약속을 준 겁니다.

그러면 야곱은, 나는 여기 있는데 하나님이 약속을 줬으니까 내 몸과 약속이 그냥 부드럽게 결합이 되고 하나로 통합이 되면 그것이 최종적인 복의 근원으로 합당하다, 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이스라엘>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면서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 했지요.

여러분, 황사가 사람 가려가면서 오지 않지요.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황사가 알아서 피해가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밤도 마찬가지입니다. 밤은 사람 가려서 오지 않아요. 밤은 이 세상에 대해서 일률적인 하나님의 평가가 내장되어 있고 포함된 채 밤이라는 것이 자리 잡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밤이 되면 나타나고 낮이 되면 사라지는 그 밤의 천사는 야곱이라고 해서 안 죽을 사람으로 본 것이 아니고 야곱이든 누구든 모든 인간은 밤의 천사 앞에서는 죽어 마땅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일종의 황사 같은 거지요. 그렇다면 야곱이, 자기가 살아 있고 복은 살아 있는 이 나에게 온다는 것은 처음부터 야곱의 잘못된 공작이에요. 착각입니다.

이런 게 있지요.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우리가 하나의 관람객으로, 하나님 하시는 일에 구경꾼으로 보게 되면 그 결론만 우리가 딱 따먹어서 나 있는 곳에 소유, 내 것으로 가지면 우리는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성령이 올 이유가 없어요. 성령이 온 이유가 뭐냐?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 십자가로 구원받는다. 그 작업에, 그 십자가의 길에 우리를 관람객이 아니고, 관객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우리를 집어넣는다니까요. 그 과정 속에 참여시켜 버려요. 열매를 따먹는 것이 아니고 그 열매 만드는 작업 속에 구원받을 자기백성을 집어넣게 되지요.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지신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 소용돌이는 수모요, 수치입니다. 온갖 수모를 다 받고, 온갖 수치를 다 당하게 되지요. 그 분위기, 그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지요. 하지만 성도는 알아요. 지금 이 땅에서 당하는 이 수모와 수치는 지옥 갔을 때의 인간이 당하는 수치와 수모에 비하면 족히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성도는 이걸 알아요. 이 땅에서 어떤 수치와 수모를 당한다 할지라도. 지옥 갔다고 칩시다. 뭐 이런 세계가 다 있어요? 물 한 방울도 없는 세계, 구더기처럼 볶아지면서도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세계. 영원히 못 빠져 나온다는 것이 가장 큰 형벌 아닙니까? 백년 살고 빠져나온다면 희망이라도 있지요. 지옥에는 희망도 없어요.

십자가 복음 때문에 원치 않는, 내가 원하지도 않는 수모와 수치스러움과 모욕과 핍박과 배격을, 가만있는데도 얼마나 주위에서 쏘아댑니까? 환란과 핍박, 곤고, 정신적인 것, 육체적인 것, 신체적인 것.

지난 월요일 부산강의 가니까 어느 목사님이 그래요. 처음에 교인 열다섯 명이었는데 지금은 교인 한 명 남았답니다. 목사가 교인 수 없다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것이 없어요. 목사의 가장 수치스러운 것은 날마다 교인수가 줄어드는 것, 그깟 헌금 줄어드는 그것은 교인 수 비례해서 줄어가지만, 헌금 줄어가는 것보다도 자기 말씀 듣는 사람이 점점 없어지고 다 나가 버린다는 거예요.

그럴 때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나 신자 아닌가, 나는 주의 종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이러고도 설교를 해야 되나, 이러고도 목사 계속 해야 되나, 그런 생각이 왜 안 들겠습니까? 동기생들은 지금 오백 명 이상 모아가지고 고급차 굴리고, 넓은 아파트 교인들이 사줬다고 이야기하고, 어떤 집사님이 돈 줘서 여행도 시켜줬다고 하고.


그런데 있는 교인도 다 나갔을 때. 그것도 한꺼번에 다 나가면 모르는데 차츰차츰 나갈 때. 목회할 의욕이 확 빠지지요. 주에 대한 항변과 원망이 안 나올라야 안 나올 수 없겠지요. 주께서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그 이야기 하겠지요.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두려워한다는 것은 네가 심판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두렵다. 그러나 그 심판에서, 다시 말해서 지옥에서 네가 생명으로 옮겼다면 오히려 네가 세상 보기에 더 당당해야 되지 않느냐. 그게 자유 아니냐 하는 겁니다. 그게 기쁨이 아니냐 그 말이지요.

야곱은 그동안 수치와 수모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인생 성공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그래서 많은 자식과 많은 재산을 악착같이 벌어 모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도와줬지요. 그러나 그것은 복이 아니라는 사실. 그러면 복은 뭐냐? 제가 보기에 한국교회 뿐만이 아니고 기존의 모든 기독교가 어떤 식으로 가르쳤느냐 하면 이렇게 가르쳐요.

기존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 뭐냐? 소위 개혁주의신학이라 하는 그런 거요. 여러분이 꽃꽂이 할 때 녹색 스펀지블록이 있지요. 장례식 화환 뒤에 보면 꽃을 꽂아놓은 스펀지가 있다고요. 거기다 물을 적셔서 꽃을 꽂습니다. 그러면 아주 부드럽게 쏙 들어가지요. 기존의 사람들이 성경을 천 독 만 독하고, 학자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내놓은 최종 안이 뭐냐?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셔서 그게 부드러운 녹색 스펀지 블록이 되는 거예요. 이 세상 어떤 시련이 와도 감사하고, 어떤 기쁨이 와도 감사하게 받고, 어떤 고난이나 환란이 온다 해도 ‘내게 은혜가 족하다’ 하는 마음으로 꽃을 꽂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모든 시련과 어려움도 주의 은혜라는 그 스펀지블록에다가 다 꽂아서 감당하겠나이다, 복음 들고 아골골짝에도 가서 전도하겠나이다, 파키스탄에 가서 선교하다 죽겠나이다,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그리스도형상을 본받고 예수님의 형상을 따라가는 십자가의 삶이라고 그렇게 가르쳐요.

그게 이단이라면, 그 주장이 이단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에서 그게 예수님의 형상을 그대로 닮아가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닌데요. 성경은 녹색스펀지블록이 아니고 골판지에요. 골판지는 자체적인 폭이 없습니다.

이걸 <이스라엘>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야곱은 자기가 복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가지는 것이 아니고 밤과 낮이라는 경계선, 그 경계선은 면적이 아니에요. 면적이 아니고 경계의 선이에요, 선. 선은 자체적인 폭을 가지지 않습니다. 골판지라니까요, 골판지.

부드러운 골판지는 찢으면 쭉 째져버려요. 선을 유지하는 거예요. 어떤 선? 이쪽은 천국이고 이쪽은 지옥이고, 이쪽은 사랑이고 이쪽은 미움이라는 경계선상에 있을 뿐입니다. 자체적인 폭을 갖지 않기 때문에 나를 위한, 내 것을 위한 복은 없어요. 이게 복이며 이쪽은 저주입니다, 라는 그 경계선으로 주님에게 다뤄질 뿐이라는 말이지요.

주여, 이것도 감당하겠습니다, 이 어려움도 이겨내겠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그것은 불교 같은 거예요. 모든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겁니다. 그렇게 고난 받고 역경도 이기면 남는 것은 뭐냐? 자기 찬란한 일대기에요. 대단한 일대기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섬기는 거예요. 우상숭배에요. 주님의 영광을 빙자해서.

왜 벧엘이 문제가 되느냐? 벧엘은 야곱의 이러한 자기면적을 갖지 않고 선으로만 작용하는 야곱으로 벧엘이라는 하늘의 움직이는 문과 결합함으로서 육에서 영으로 옮겨가는 것은 하나님의 전쟁으로 되는 것이지 앉아서 이론을, 어떤 정보를 내 것으로 만든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실제로 전쟁하는 과정에 참여해야 되는 겁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싸우듯이.

그 전쟁은 뭐냐 하면, 소유가 아니고 사건이에요. 면적이 아니고 그냥 폭이 없는 선으로만 움직일 수 있느냐를 묻는 전쟁이에요. 만약에 내가 널찍한 면적이라면 내 것 동원해서 전쟁에 나서려고 할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신명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붙이심의 전쟁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붙이심의 전쟁과 어울리지 않아요.

하나님의 전쟁은 붙이심의 전쟁이에요. 그들의 실력으로 이기는 것을 주께서는 허용하지 않습니다. 힘으로 강해서 이기는 것은 이방나라에서 알고 있는 하나님이에요. 이방나라도 하나님 믿고, 그들도 하나님 이름으로 전쟁을 하는 그 방식이 뭐냐? 자기 가진 힘으로 버티는 겁니다.

그러나 시편에 보면, 애굽의 말이나 칼이나 활로 이기는 것이 아니고 오직 젖먹이도 이길 정도로 여호와의 이름, 또 다른 말로 하면 여호와의 의로만 승리케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방식이에요. 예수님의 방식은 사람의 힘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처럼 그냥 얇은 골판지같이, 아무 폭을 갖지 않는, 누가 와서 손가락만 대도 구멍이 뚫리는, 누가 밀어도 넘어질 수밖에 없는 약한 모습, 얇은 막같이 이 땅에 오셔서 천국을 이야기했고 지옥을 이야기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겠고, 라는 말을 굉장히 연약한 막의 입장에서 했어요. 거기서 빼먹을 능력은 없어요. 어떤 것도 빼먹을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는 생명은 죽음에 옹위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중앙에 있다면 그 주변에 죽음이 빙 둘러서 포진해 배치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생명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따라서 야곱도 능동적으로 갈 수 없습니다. 수동적으로 갈 수밖에 없고 예수님의 가는 고난을 앞당겨서 맛보는 인생으로, 하나님께서 수동적으로 야곱을 이끄시는 겁니다. 죽음을 통해서 생명에 이르는 그 길,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그 길입니다.

자, 그렇다면 세상에서 말하는 벧엘은 뭐냐? 저는 이 대목 보면서 어떤 것이 훤하게 떠오르는가 하면, 벧엘로 올라가자는 이 제목의 설교가 한국에 한 2만개 될 겁니다. 벧엘로 올라가자는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 은혜 받았으면 돈 내서 성전 세우자는 그 말입니다.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어요. 벧엘로 올라가자. 여러분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에게 바칠만한 벧엘같은 성전을 세워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전 짓는데, 하나님의 제단 짓는데 돈 아끼면 그것은 신자 아니라는 겁니다. 제목도 벧엘로 올라가자. 올라가서 뭐하는데요? 올라가서 성전을 세우는 것이 아니에요. 신전을 세우는 거예요. 그것은 고정된 거예요. 그것은 인간의 정신적 안식처고 자기가 만드는 아지트입니다. 이것 만들면 주께서 복 주신다고 여기게 만들어요.

제단 세우자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잖아요. 기도원 이름도 벧엘기도원이에요. 무슨 뜻이에요? 고정된 장소에서 은혜가 나온다, 그 말 아닙니까? 이게 바로 우상숭배라니까요. 움직이는 인간 안에 성전이 있는 것을 모르고 내가 나 위주로 살다가 하나님에 의해서 압축되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주께서 지옥과 천국 그 틈새에 나를 존재케 해서 납작하게 만들어요.

한쪽은 지옥에 밀리고 다른 한쪽은 천국에 밀리고, 어쩌란 말인가, 그 틈 사이에서. 이쪽 보면 지옥이고 이쪽을 보면 천국이고. 울다가 웃다가, 웃다가 울다가. 날마다 롤러코스터 타는 인생, 그게 바로 하나님께 은혜 받은 선으로서의, 야곱이 이스라엘 된 그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의미입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고요.

예수님 그 자체가 예수님 뒤에는 천국이고 앞에는 지옥이고, 예수님은 그 선으로서 존재했던 겁니다. 나를 믿는 자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거기에 무슨 예배당이 필요합니까? 거기에 십일조가 왜 필요하지요? 거기에 고정된 아지트가 왜 필요합니까? 정신적인 마음의 안식처가 왜 필요합니까?

그것은 어디까지 오늘 본문에 나오지요, 이방정신, 내가 아는 상식선의 신을 믿는, 내 정성과 성의를 표하겠다는 이런 것이, 이방신상에 관한 것이 우리 손가락에서 전부 빠져야 돼요. 그 빠지는 것조차 우리 힘으로 안 되고 주께서, 폭이 넓은, 내 것이 이만큼이라고 한 그것을 납작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골판지로 만들어가지고 하나의 선으로 작용하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역사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고정된 벧엘이 아니라 이미 움직이는 하늘의 문,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우리는 자주 잊어버립니다. 세상 살면서 양심 다치니까 잠시 교회 들러서 하나님 앞에 자복한다고 해서 새사람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의 폭을 제거하고 주님의 이미 사랑받은 자와 사랑 받지 못한 세상 지옥의 그 경계선에서 늘 자아가 압축되어서 좁아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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