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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4 20:35:24 조회 : 334         
   강간과 할례180404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강간과 할례(창세기 34:1-7)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vgiwk0Yxkbs, Hit:136
 이근호 18-04-04 21:13 
강간과 할례

2018년 4월 4일                 본문 말씀: 창세기 34:1-7

(34:1)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

(34:2)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의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34:3)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34:4)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청하여 이르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하였더라

(34:5)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의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고

(34:6) 세겜의 아버지 하몰은 야곱에게 말하러 왔으며

(34:7)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그들 모두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하지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
     
야곱은 ‘야곱언약의 산물’입니다.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취지에 따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야곱의 주변에 언약적 사태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늘 새롭게 ‘발생되는 하나님상’을 제공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벧엘로 가는 도중에 만나게 되는 세겜이라는 동네에서 그곳 추장에 의해 강간당하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야곱 진영에서 의견이 둘로 나뉘어집니다. 즉 야곱의 11아들의 의견과 야곱의 견해가 다릅니다. 당한만큼 적들에게 크게 복수하는 것이 하나님과 함께 있어 늘 승리하게 되는 우리 가문의 성격에 합당하다는 것이 아들들의 주장입니다. 이 아들들은 집단적으로 일체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즉 피해자 입장에서 가해자에 대한 복수는 지극히 당연하다는 점에 그들의 이의를 갖고 있지 않는 겁니다. 도리어 이런 당연한 일에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아버지 야곱은 아들들의 조치에 반대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결정이 바로 야곱이 하나님을 얍복강에서 만나기 전에 지녔던 그 육적인 사고방식으로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여기서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친히 일을 벌이지 아니하면 왜 인간은 구원될 수 없느냐 하는 점과 같은 취지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난 뒤에, 바로 인간의 육적인 요소가 하나님의 구원을 훼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남에게 이기는 것이, 그리고 그렇게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의 실현이라고 야곱은 하나님 만나기 전에 의식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밤에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일은 희생으로만 진행된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쪽에서 먼저 희생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희생없이, 손해남이 없이 성공하기를 원하고 이러한 자신의 열망이 곧 하나님의 뜻과 합치된다고 우기고 싶었던 겁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복받은 아버지 야곱과 동행하고 한 가족이니 그들도 하나님으로부터 복받을 만한 의식을 같이 지니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잠복된 육적 생리를 노출시키기 위해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언약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희생을 알려주려고 하십니다. 여동생 디나가 강간당하고 난 뒤, 아들들은 세겜쪽과 거래에 나섭니다. 세겜이 원하는 대로 두 집안 간의 혼사를 성사시켜 주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거래에 있어 조건을 제시하면서 야곱의 아들들은, 모든 세겜의 성인 남성들이 할례를 행하기를 요구했습니다. 이처럼 야곱의 아들들이나 세겜이나 모두 결혼이란 흥정이나 거래로 성사된다고 여긴 겁니다. 서로 양쪽이 약간씩 양보를 하여 힘의 균형을 유지하게 되는 식으로 혼인이 가능하다고 본 겁니다.
 
하지만 강간이란 뭘까요? 강간이란 두 남녀 사이에 한 사람의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의 내용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상대방에게 그대로 전달되지 않고 도중에 배달사고 나는 것이 강간입니다. 강간이란 두 사람의 마음이 동일하게 나타나지 않게 되는 성관계입니다. 따라서 거래나 흥정에 의해 혼인하는 것도 강간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모든 혼인도 다 강간입니다. 사랑이란 상대의 마음이 손실없이 그대로 전달되어 들어오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그릇을 싹 비우는 것을 뜻입니다. 부부 둘 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는 겁니다. 1+1이 2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1이 0이 되고, 다른 1도 0이 되면서 비로소 그 현장에 새로운 등장되는 1인 경우를 말합니다.

그것은 곧 가정을 뜻입니다. 없던 자식까지 생기면서 부부는 자식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1’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세겜이나 야곱의 11아들이나 모두 희생없이 힘의 균형을 빙자해서 복수에 나서려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희생되는 것은 특정 인물이 아니라 ‘할례’라는 개념 그 자체입니다.

할례개념은 피를 양산합니다. 피는 곧 희생입니다. 즉 육적 요소인 복수의 반대말은 ‘복수 안함’이 아닙니다. ‘희생’입니다. 울분과 분노와 짜증과 화남 앞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화가 되는 경우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발하셨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점잖게 살아갈 때에,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과 친하고 여깁니다.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만약에 화가 날 사태에 직면하게 되면, 그에게는 ‘언약적 희생자’ 앞에서 섰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마치 1억을 손해 본 친구를 위로한답시고 평소에 친구가 좋아하는 떡볶기를 3000원치 사가면 과연 친구은 손해 본 고통을 싹 잊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평소에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그 육적인 성품을 지닌 야곱 앞에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내셨습니다. 거기서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달성은 힘이 아니라 희생으로 성사됨을 알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할례라는 것은 형식적으로 육체에 문신시킨다고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할례정신이 자신의 인생 전체를 희생적 인생으로 변모시키는 작업을 통해서 도출됩니다.

인간은 스스로 희생적인 삶을 살 힘이 없는 이유는, 인간사가 불가피한 참여와 어쩔 수 없을 지경으로 세상 일에 같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수하자”라는 시므온과 레위 주장에 다른 아들들이 동조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인간들의 삶은 이처럼 무기력합니다.

자신의 본질은 이미 뿌리가 악에 잠겨 있습니다. 이로 인해 할례의 피, 곧 예수님의 흘린 피는 인간들의 승리감을 놓지 않는 고집으로 인해 반복적으로 희생당하게 됩니다. 물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언약 안에 놓여 있는 성도의 그런 고집은 예수님의 희생과 만나는 ‘죄’를 새롭게 드러내는 형식으로 전환되고 그 형식 안에서 ‘하나님의 피’가 내용이 되는 식으로 언약으로 십자가를 향하여 달려가게 됩니다. 이것이 언약의 진행모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이 주님의 일방적으로 제시되는 식으로 이끌리게 됨을 명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8-04-05 14:20 
132강-창 34장 1-7절(강간과 할례)1804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4장 1-7절입니다. 구약성경 51페이지입니다.

창 34:1-7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 히위 족속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련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그 아비 하몰에게 청하여 가로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하였더라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의 돌아 오기까지 잠잠하였고 세겜의 아비 하몰은 야곱에게 말하러 왔으며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사람 사람이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치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

이스라엘 북쪽에서 볼 때 얍복강가라는 것은 이스라엘 서쪽이 됩니다. 요단강 건너 서쪽입니다. 가나안 땅이 아니고 가나안 땅 맞은편의 땅에 얍복강이 있는데 얍복강에서 북쪽으로 10여키로 떨어진 곳에 숙곳이라는 곳이 나오고 요단강을 건너면 등장하는 마을이 세겜이라는 마을입니다. 거기서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벧엘이 됩니다.

지금 야곱은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창세기 33장 17절에 보면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그러면 형은 어디로 가느냐 하면,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바로 남쪽으로 내려가면 세일산이 나와요. 나중에 그곳은 에돔이라 해서 에서이 후손들이 살게 되고 야곱은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넘어오게 됩니다.

숙곳에서 세겜으로, 그 세겜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벧엘이 되는 겁니다. 야곱은 숙곳에서 벧엘로 가고 있는데 중간에 세겜이라는 곳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세겜땅의 추장 세겜이 야곱의 하나밖에 없는 딸인 디나를 보고 강간했다고 되어 있어요. 강간을 하고 난 뒤에 야곱의 딸 디나를 너무 사랑해서 디나와 혼인하고자 야곱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야곱에게는 아들이 열 한명 있었거든요. 그 열 한명의 아들이 세겜 추장이 강간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집안에 대한 모독이다.’라고 생각해서 복수를 하게 되는 겁니다. 복수하는 방법이 34장에 죽 나와 있습니다.

마치 혼인해줄것 같은 마음으로 위장을 해서 그들에게 다가섭니다. 조건을 거는데 그 조건이 뭐냐 하면, 야곱집안은 할례를 행해야 되기 때문에 모든 남자들에게 우리처럼 할례를 행하게 되면 당신이 사랑하는 디나와 혼인하는데 동의하겠습니다, 해서 세겜을 비롯한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행했습니다.

할례를 행한지 3일째 되는 날, 가장 고통이 심할 때에 시므온과 레위 두 아들이 주동이 된 야곱의 열 한 아들이 세겜의 아버지 하몰 뿐만 아니고 그쪽 남자들을 다 죽였어요. 다 죽이고 재산까지 다 빼앗습니다. 26, 27절에 보면 “칼로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 오고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 누이를 더럽힌 연고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28, 29절에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그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 자녀와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30절에 보면 시므온과 레위가 주동이 되어서 아주 속 시원하게 복수를 했습니다. 이 복수한 것에 대해서 오직 한 사람만 동조하지 않았으니 그 사람이 누구냐?

아버지 야곱입니다. 야곱은 이 일에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을 놓고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족의 험악한 상황에 부딪히도록 세겜에서 이런 급작스럽고 가나안 족속과 마주치는 일을 일으키셨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됩니다.

특별히 생각할 때에 주의해야 될 것은, 야곱은 동조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열 한 아들은 총체적으로, 집단적으로 어떤 일체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일체감을 갖게 되었다는 말은, 거기서는 ‘왜’라는 말이 필요치 않아요. 딱 보면 모르겠느냐. 여동생이 강간당했다. 오빠가 나서서 집안의 명예회복을 위해서 복수한다. 복수 안하는 것이 도리어 이상하다.

“복수할까? 하자.” “형님, 복수합시다.” 여기에 무슨 토를 달 일이 있겠느냐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이 거룩한 집안, 하나님의 언약의 집안의 딸을 욕되게 했다면 신의 심판은 당연한 귀결이다. 여기에서 동조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동조하지 않는 야곱, 하나님의 언약의 복의 근원되는 야곱이 거기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그 점에 우리가 유념해야 됩니다.

여기에 주목해야 돼요. 뭔가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야곱의 아들들과 야곱이 다른 거예요. 야곱의 아들들은 잠복된 어떤 생래적인 성질을 그대로 표현했느냐 하면, 옛날에 야곱이 이스라엘 되기 전에,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그 성깔을 아주 생생하게 그대로 보여주고, 그리고 그렇게 보여주는 그것에 대해서는 누구 하나 이의를 거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한 마음이 된 겁니다.

그렇다면, 이 디나가 강간당하는 사건이 없었더라면 외부로 봤을 때는, 아버지가 하나님 만난 일로 복을 받았으니 아들들도 당연히 아버지 따라서 같이 은혜 받았겠지, 라고 그냥 당연한 논리처럼 자연스럽게 하나라고 생각이 들 거예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디나가 강간당하는 사건을 유발시킨 겁니다.

아버지가 겪었던 그 경로는 육에서 영이 된 겁니다. 야곱이 이스라엘 된 거예요. 야곱이 이스라엘 될 때는 하나님 앞에 야곱이 선겁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이 뭐냐?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 하는 겁니다.

교회에서 예배당 지었을 때는, 옛날에 오래도록 신앙생활 해온 장로클래스, 장로급 사람들이 재산 내서 예배당 지었겠지요. 그러면 더 이상 돈 들어갈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젊은 사람들은 헤헤거리면서 뒷자리에 앉아 있는 거예요. 목돈 들어갈 일이 없으니까, 관리비만 내면 되니까.

그렇게 했을 때 앞자리에 앉은 장로들이 염치없이 앉아 있는 저 뒷자리의 젊은 사람들보고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네가 앉아 있는 그 의자, 그리고 네 머리 위에서 내리비치는 형광등 하나하나, 마이크, 앰프하나, 거기에 네 희생이 담겨 있느냐를 물을 거예요.

“이 예배당, 벽돌 하나하나 올리는데, 땅 사는데 젊은 집사들아! 장로가 젊을 때의 큰 상실, 손실을 경험한 그러한 희생을 너희들은 한 적이 있느냐? 이 염치없는 것들아.” 그렇게 되겠지요. 같은 예배당에 앉아 있어도 이 교회를 바라보는 감이 달라요.

만약 어느 교회가 아무리 봐도 이상하게 돈만 밝히는 목사가 왔다. 그러면 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 그 교회 지을 때 목돈 낸 사람들은 교회를 사수하려고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교회가 뭐 여기밖에 없나? 딴 데로 가면 되지.’

왜? 낸 돈이 얼마 안 되기 때문에 미련 없이 쑥 빠져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 목사가 가고 난 뒤에 다른 목사가 왔다 하니까 다시 우르르 와서 채우는 겁니다. 내가 서울 가서 누구한테 들었던 이야기에요. 실제로 있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지어내기도 할 수 있지만.

야곱이 갖고 있던 것은 뭐냐?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경험이 마음속에 스며든 것, 심지어 야곱 내부까지 다 파고든 하나님의 원리가 지금 아들들에게는 전혀 없어요. 그냥 아버지의 덕을 보고 있는 겁니다. 아버지의 덕을 보고 있을 뿐인데 사고방식이 본인들이 아버지와 같은 신앙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과연 그럴까’ 야곱의 내부까지 스며든 하나님의 것이 야곱언약이거든요. 하나님의 약속, 그 약속이 이제 야곱 내부에 자리 잡아서 야곱의 인생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인생이 되거든요. 하나님이 주도하는 인생을 산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과연 야곱의 아들들도 하나님이 주도한 인생이구나, 하는 것을 야곱언약이 함께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은 원치 않는 상황에 맞닥뜨려야 되는 겁니다. 그 상황이 뭐냐 하면, 자기의 잠복되어 있던 본심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사태를 하나님께서 마주치게 했습니다.

아까 이야기했습니다만, 오늘 본문이 뭐냐? 자기 여동생이 강간당한 것에 대한 복수심이지요. 이 복수심에 대해서 누구도 이의를 건 형제가 없었어요. 당연한 것이라고 보는 거예요. 강한 것 보다 더 강하게 당하게 해줘야 그게 바로 언약 있는 자, 승리한 자가 갖고 있는 본래의 권한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 복수의 반대말이 뭐냐 하는 겁니다. 야곱은 자기 딸이 강간당한 것을 복수할 근거로 보지 않고 언약의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 필요한 희생이라고, 희생물로 본 거예요. 희생이 없이는 언약을 알 길이 없다는 겁니다. 언약 속에 들어갈 길이 없다는 겁니다.

희생 속에서는 인간의 그 죄악 된 본성은, 그냥 즉각적인 반응은 보복이에요.

그러나 그 보복에 의해서 누가 희생되었는가? 오늘 본문을 그냥 건성으로 보면 이 형제들의 복수심으로 희생된 것은 세겜족속의 남자들이라고 생각하겠지요.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급하게……, 급한 것도 아니고 당연한 거지요. 당연한 이 복수심에서 희생된 것은 바로 할례라는 의미입니다.

할례라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지시, 할례에 담긴 그 개념이 이 복수심으로 인하여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언약, 이삭의 언약, 야곱의 언약이 실현되는 장소에서 그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은 뭐냐? 하나님이 누구냐를 새롭게 알게 하는 사태라는 것의 의미를 가지고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저는 그것을 ‘생겨나는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옛날에 알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때그때마다 새롭게 생겨나고 새롭게 조성되는 하나님이에요. 거기에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생겨날 때는 하나님 쪽은 희생을 당하게 되고 그리고 그 희생을 유발하는 것은 인간 내부에 잠복되어 있는, ‘누구든지 내 것을 건드리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는 타고난 복수심, 야곱정신이거든요, 지고는 못사는 것, 이겨야 된다는 것, 이겨야만 된다는 근성이고 세상은 이기는 재미로 살아가는 거예요.

제가 어제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는 모르는데 상대가 나타나게 되면 갑자기 자기가 주관이 되고 상대는 객관이 되어서 주관과 객관사이에는 주관이 지배해야 속이 풀리는 거예요. 아까 예를 든 것처럼 교회가 있는데 문제가 있을 때 후딱 교회를 빠져나가게 되면, 나는 이 교회 문제 때문에 신경 안 써도 되는 사람이라는, 그 일을 유발시킨 하나님에 대한 일종의 복수가 되는 겁니다.

내 것은 조금이라도 흠집 나거나 다치면 안 된다는 그 근성이 뒷자리에 앉았다 가는 사람들의 근성이에요.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신앙에 문제 있다는 뜻은 아니고요. 하여튼 내 것은 털끝만큼도 건드려지는 여지가 있다면 후딱 나는 손해 보는 장사는 안하겠다고 나오는 것, 이게 바로 언약 속에 있던 야곱의 열 한 아들의 근성이에요.

그런데 그 아들들이 근성이 야곱의 딸이 강간당했을 때 그걸 어떤 식으로 대처했는가? 강간이 뭐냐를 한 번 따져봐야 돼요. 강간이란 두 사람 사이에 동일한 것이 전달되지 않는 상태를 강간이라 합니다. 양쪽의 동일한 마음, 이쪽 마음이 저쪽에 동일한 마음으로 전달되지 못하고 배달사고 난 것이 강간이에요.

그래서 사랑 없는 결혼도 강간이에요. 일방적으로 좋아한다고 해서 결혼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생각에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좋아합니다. 당신이 그립습니다.’ 하는 이 마음이 상대방에게 누수 없이, 빠짐없이 그대로 쏙, 하고 전달되어야 돼요. 그럴 경우에만 그것이 강간이 아닙니다.

그 외에는 모든 것이 강간이 돼요. 세겜은 디나를 일방적인 욕정에 의해서 강간해놓고 그 다음에 거래에 나선 거예요. 세겜이라는 추장이 거래에 나선 그것과 야곱이 열 한 아들이 세겜에 복수하면서 어떤 거래를 시도하는 것과 둘 다 똑같은 종류의 인간들입니다.

자신들이 하는 복수는 하나님 보시기에도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정당함은 거래나 합의에 의해서 되지 않아요. 세상에 합의에 의해서 되는 신앙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을 보세요. 성도 말고 교인들을 보세요. 모든 것이 합의입니다, 합의. “하나님께서 이번 일을 성사시키면 제가 십일조 드리겠습니다.” 이거 합의잖아요.

“하나님, 교회 안 나오는 내 남편이 교회 나오게 하시면 이제부터 교회 충성하겠습니다.” 이것도 합의라는 말이지요. 합의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둘 사이에 정치적인 양보를 통해서 대충 균형을 맞추자는 것이 합의에요. 로마서에서 화목, 화해, 이것을 사람들은 합의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협의, 합의. 협의이혼이라는 것도 있지요.

서로간의 협상, 거래.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것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그래야 어떤 일을 타개했을 때에 그 일을 타개했다는, 괜찮은 결과를 낳았다는 거기에 자신의 노력이 성과로서 계속 살아 있다고 여길 때 인간은 만족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강간이란 동일한 것을 유지한 채 상대방속에 들어가지 못할 때인데, 그리고 그런 거부를 당할 때 나오는 것은 거래인데 거래는 교환입니다. 교환하자는 거예요. 교환이라는 것은 선악체제에서 나온 거예요. 악을 행했을 때는 그 양만큼 선을 행해서 그걸로 상쇄시키자는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요.

그게 선악체제입니다. 아까 이야기를 다시 해보겠습니다. 사랑 없는 결혼은 안 된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사랑이 뭐냐 하는 거예요. 사랑은 나의 그릇을 비우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내 것을 비워줘야 저쪽의 것이 고스란히, 누수 없이, 빠짐없이 그대로 다 담기거든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건 일방적이잖아요.”라고 하잖아요. 남녀가 서로 연애할 때는 그게 일방적이 될 수 있지만 새로운 가정이라는 것을 형성할 때는 둘 다 그릇을 비웠기 때문에 일방적이 아니고 둘 다 다 비운 상태에서 나중에 아기를 낳고 가정이라는 것을 새롭게 구성하게 되는 겁니다.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는 거예요.

그 하나는 1+1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1+1은 어디까지나 2입니다. 한 몸에서 1은 1과 1이 상관없는, 다른 클래스에 있는, 1과 1이 각자를 포기를 했을 때 비로소 그 현장에 등장하는 1, 그 1이 바로 한 몸이에요. 또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사랑을 찾을 때까지 결혼 안하겠습니다, 하는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그런 사랑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온전히 자기를 비우는 그런 것은 없어요. 그러니까 야곱의 아들들에 대해서 우리가 충분하게 동의를 하고 납득이 될 수밖에 없어요. 지금 우리가 결과를 봐서, 나는 야곱 편, 야곱의 아들들 편은 나는 싫어, 이렇게 결과 혹은 정답을 미리 보고 내키지도 않는 결론에 도달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현실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불가피하게 참여하게 되어 있고 불가피하게 연루되어 있어요. 그것은 사회생활 해보면 발을 뺄 수가 없습니다. 한통속이에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무기력한 인생이라 하는 거예요. 무기력한 인생.

똑같은 생활을 하는데 내가 언제까지 이 생활을 계속해야 되는가, 거기서 오는 것은 정말 짜증나는 무기력함이에요. 하기 싫어도 살기 위해서 직장생활 계속 해야 된다는 거예요. 진짜 누구 말마따나,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할 정도로, 내가 이 짓이나 하려고 태어났나 하는 그 생각을 절로 할 수밖에 없어요.

치과의사, 서울대치과대학원 나와 가지고 잘하는 치과라고 소문났는데 그만 하루아침에 다 때려치우고 김밥 장사하는 것. 왜 그렇게 할까요? 잘 나가던 대기업 다니다 때려치우고 트로트 가수 한다고 나설 때. 그것은 미친 짓이지요. 장래가 촉망되는 공무원 때려치우고 아버지 따라서 커피점 하는 것. 멀쩡한 대기업 다니다가 집 팔아서 애 둘하고 넷이서 한 3년 동안 세계여행 다니는 것.

심심찮게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왜 그럴까요? 자기의 무기력함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 언약이 오묘해요. 그 무기력한 사람은 본인한테 정말 쓸데없이 세월만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하나님의 언약에 형식으로 주님이 개입해서 바꿔준다는 겁니다. 무기력한 내용조차도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데 소재가 되고 재료가 돼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나에게 마주치는 이 모든 것은 이 세상을 살맛 없게 만듭니다. 특히 성도가 그것을 깊이 느껴요. 심지어 모든 것이 불가피하게, 개인적인 주장 같은 경우는 드물어요, 불가피하게 거기에 참여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전부 다 같은 공범으로 연루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니잖아요. 이미 기존에 있는 그 스타일과, 기존에 흐르고 있는 맹목적인 권력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야곱의 아들은 뭘 간파했느냐 하면, 세겜이나 자기들이나 언약이라는 것이 있다 뿐이지 속은 똑같은 속성이라는 것을 간파한 거예요. 그래서 할례라는 것을 제시한 겁니다.

그렇다면 왜 이 와중에서 할례라는 개념이 희생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할례라는 것이 뭐냐? 할례 행했다고 할례언약의 끝이 아니에요. 육신의 할례는 할례가 아닙니다. 야곱이 물론 육신의 할례를 행했고 아들들도 물론 육신의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러니까 3일째 되는 날 제일 고통이 심하다는 것을 아들들이 알았을 것 아닙니까?

할례의 의미는 희생에 있다는 것을 야곱은 알고 아들들은 몰라요. 할례를 행하면 뭐가 나오는가 하면, 피가 나오지요. 그래서 출애굽기 4장에 보면, 모세 아내 십보라가 할례를 행하지 않은 자기 아들의 양피를 베어서 모세한테 던지니까 모세가 하나님의 죽음에서 벗어나서 살게 되었어요.

그럴 때 십보라가 하는 말이, 당신은 피 남편이다, 피를 보여주는 남편이다, 피를 보여주는 기능을 해야 될 남편이다, 이렇게 했어요. 이렇게 할례언약은 피 흘림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오늘날로 바로 적용시키면, 예수님께서 피 흘렸는데 그 피와 상응할 정도로 우리 인생이 귀한 겁니까?

우리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라고 하더라도 주님의 피 앞에서 그게 짜증낼 일이냐는 그 말입니다. 짜증낼 일이에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쓴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이야기했어요. 지금 제자들은 정신을 엉뚱한데 팔고 있습니다. 예수님 나라에 가면 누가 높으냐, 그 소리 하면서 자기 생각만 하고 있어요.

지금 야곱의 아들들은 자기에게 있는 복수심을 못 풀어서 환장한 겁니다. 이것은 백배로 갚아주는 거예요. 이게 승리자의 권위니까,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승리했다는 것으로 본때를 보여주는 것이니까. 그런데 그들이 동원한 것은 뭐냐? 할례였습니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평소에 떡볶이를 좋아해요. 떡볶이를 좋아하는데 그 사람이 사업을 하다가 1억이 부도가 났습니다. 친구가 그 소식을 듣고 위로한다고 3천원어치 떡볶이를 사갔습니다. 그러면 평소에 좋아하는 떡볶이를 먹고 1억 부도난 상처가 낫겠습니까? 그건 말이 안 되지요. 떡볶이 3천원어치 먹고 1억 날린 것 잊어버리고, 그런 인간은 없지요.

지금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피를 흘렸습니다. 피를 흘렸는데 우리는 내 인생 망가졌다고 그 앞에서 불평을 하고 있어요. 이것은 1억대 3천원입니다. 떡볶이 같은 거예요. 지금 열 한 아들은 자기 분함, 내게 속한 내 형제, 집단적 일체감, 내 여동생이 강간당했다는 그 분을 못 이겨서 어떻게 복수할 것을 찾다가 뭘 끄집어냈느냐 하면, 할례를 끄집어낸 거예요.

그들의 입장에서는 할례는 3일째가 제일 아프다는 그것밖에는 모르지요. 야곱에게서 할례는, 자기 인생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그 할례언약은 그냥 고추의 끝을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죽어 마땅함의 그 내용이 실려 있는 그것이 바로 할례언약에 담겨 있는 개념인 것을 야곱은 알고 있습니다.

맞아요. 자기 딸이 강간당한 것이 억울합니다. 그러나 그 억울함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메시아가 장차 피 흘리는 그 값보다 더하겠느냐 그 말입니다. 내 딸이 할례 받지 못한 인간들에게 강간당하는 것, 세월호에 내 딸이 빠지고 내 아들이 빠져 죽는 것, 분하고 억울하지요.

박근혜 대통령이 그 때 머리만 손질 안했어도 살아났다. 그런 억울함을 갖겠지요. 하지만 억울한 내 인생 어디서 찾느냐, 내 인생 괴롭다, 괴롭다, 하지만 그 괴로움이 과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십자가 피 흘린 그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게 불평거리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는 잘도 알고 있어요. 아브라함은 할례를 행했다. 그리고 할례를 행한 자는 거룩한 백성이다. 우리는 성경보고 잘도 알고 있습니다.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은 할례대신 세례를 받았다. 세례 받은 사람은 구원받는다. 누구 맘대로 구원받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잘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야곱이 알고 있는 할례는 할례함으로 끝이 아니고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야곱인생 자체를, 야곱의 열 한 아들과 같은, 남에게 지고는 못산다는 그 성깔머리, 잠복된 우리 내부의 그 생리, 그 복수심 앞에서 주님이 친히 희생물이 되셔서 그런 인간도 주님 자신의 희생으로 건져냈다는 그 증거가 바로 할례입니다.

야곱은 야곱언약 안에 그 할례의 정신이 살아 있는 한 이것은 저 세겜족속이 나쁜 것이 아니고 세겜족속 못지않게 똑같은 통속의, 똑같은 속성을 갖고 있는 우리 집안 아들들을 할례언약 속에 집어넣어서 내가 경험한, 소위 실패함으로 성공하는, 실패했기에 비로소 웃을 수 있는 그 하나님의 언약의 기쁨을 제공하는 계기를 하나님께서 언약사람에게는 특별히 제공한다는 그런 차원에서 야곱은 이 사건을 이해한 겁니다.

누가 누구를 복수를 한다는 것, 그것은 이 땅에서 승리한다는 것, 힘과 힘의 마주침에서 이기는 것, 그것은 할례 없는 인간, 모든 인간들의 공통점이고 일반이에요. 뭔가 달라야 된다는 겁니다.

제가 어제 유-튜브 두 번째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장벽>이라는 제목으로 유-튜브 강의를 했습니다.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여리고성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리고성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팔을 불면서 언약궤를 앞장세울 때 여리고성이 무너진 줄 알았어요. 그러나 그 여리고성은 무너진 것이 아니고 그 여리고성이 이스라엘 내부에 새로운 장벽으로 자리 이동한 겁니다.

여리고성 무너지니까 그 다음부터는 안에 교만이 넘치고 자만심이 넘쳐서 그 다음에 그 보다 더 작은 아이성을 이겨내지를 못했어요. 패배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잠언서에 보면, 사람이 성을 빼앗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자기 마음이 깨지는 거예요.(잠 16:32) 절대로 자기 마음을 자기가 못 깹니다.

언약 속에 있는 사람들, 구원될 사람들은, 하나님의 새언약속에,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당했던 그 당함, 성령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당했던 그 삶을 그대로 반복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야 주님의 언약적인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깨어지는데 그 십자가의 능력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목걸이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인생 자체가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주께서 언약적으로 작용을 해주시는 겁니다.

분통, 울분, 원망, 짜증, 자살충동, 이제는 난 예수 안 믿을래, 라는 저돌적인 반발심, 우리 속에 있는 배설물들이 다 노출될 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죽어 마땅함, 말이 그런 것이 아니고 참으로 죽어 마땅한 거예요. 그렇다면 결론이 뭐냐? 주님은 우리하고 합의도 안 해주고, 거래도 없이 구원하는 겁니다.

뭐냐? 일방적 구원이에요.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그 십자가 아픔을 우리 속에 집어넣고 그 십자가를 회수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덩달아 껍데기로 구원받는 겁니다. 내용은 십자가, 형식은 몸부림치고 반항하는 우리의 모든 일상이 형식이 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는 껍질, 형식으로 만들어주시는 식으로 해서,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원리를 추진해 나가시는 주님의 일방적 조치에 대해서, 우리는 근심 뒤에 큰 기쁨으로 주님께 찬미해야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알았다고 구원된 줄 알았는데 본격적으로 구원이 개시된 신호인지를 우리가 몰랐습니다. 얼마나 더 우러나와야 될 주에 대한 불평과 원망입니까? 주여, 마음껏 주님 앞에 불평과 불만이 터져나도록 조치해 주시되 결국은 그것이 주님에 대한 찬미와 감사와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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