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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4 20:32:06 조회 : 416         
   이스라엘 180314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이스라엘(창세기 32:26-29)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tByZ34ivMW0, Hit:232
 이근호 18-03-14 21:09 
이스라엘

2018년 3월 14일                       본문 말씀: 창세기 32:26-29

(32: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32: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32: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32: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야곱은 언약의 사람입니다. 언약의 사람이란, 지상에 남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담긴  사람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오해할 소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라는 개인 인물이 중요한 사항인가 아니면 그를 다루고 있는 ‘언약’이 중요한가 하는 점입니다. 이 점을 파악하는데 있어 기본 전제는, ‘모든 인간은 이미 범죄한 자’라는 사실입니다.

즉 창세기 2장과 3장에서 아담은 두 실존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범죄하기 전의 아담’과 다른 하나는 ‘범죄한 후의 아담’입니다. 범죄가 후에 아담과 하와에게 일어난 별난 현상은 자기 신체를 ‘가린다’는 점입니다. 가린다는 행위는 뭐가 감추려고 시도한다는 겁니다. 뭘 감추고 싶어하지요?

아담과 하와는 그것을 찾을 수가 없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부끄럽기만 했을 뿐이지만 정작 참으로 자기에게 뭐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이미 범죄한 인간으로서 알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범죄하기 전의 상황을 나란히 견줄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인물들도 언약으로 인해 그들의 죄성이 노출되는 처지에 있는 겁니다. 그 노출되는 성격들은 범죄한 아담으로부터 물러받은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택하여 언약을 제공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택하여 언약을 주신 겁니다. 그들이 그들이 노출시키는 성격은 바로 인간들 자신들조차 미처 알지 못한 죄들입니다.

특히 야곱에게 있어 그가 보여줄 언약의 깊이는 족장 언약의 마무리에 해당될 내용입니다. 곧 인류를 대표해서 전면적인 특징을 야곱이 대표해서 보여주게 됩니다. ‘야곱’이 천사와 만나면서 유감없이 보여주는 성질은 야곱 개인의 성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근저에 깔려있는 본래의 성격입니다.

야곱은 창세기 28장에서 밤에 위로부터 사다리가 자기에게 설치대고 천사가 왕래하는 사실에 직면합니다. 즉 세상 바깥 밤에서 아래로 제공되는 복을 야곱은 받은 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밤은 바깥이 아니라 세상의 안쪽에서 야곱이 만나게 되는 밤입니다. 어떤 밤이든 상관없이 야곱은 한결같이 자신을 ‘복 소유자’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오해가 한 두가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위에서 오는 복은 야곱의 근성을 다치지 않고, 지적할 필요도 없이 야곱은 소유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소유해서 복된 사람되는 겁니다. 바로 그 복이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야곱은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리고 범죄한 아담의 본성이 이 복을 유지하는데 가동됩니다. 지키는 겁니다. 결사적으로 지켜낼 때만 복이 여전히 유지한다고 믿었습니다. 밤에 정체가 모르는 자가 등장했을 때, 야곱의 이 본능을 자동적으로 발동이 됩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주신 복들을 지켜내기 위해서 그는 사력을 다했습니다.

이 사력을 다한 투쟁에 천사가 야곱에게 밀렸다는 말은, 야곱에게서 나올 수 있는 근원적 속성들이 마저 다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사는 일거에 야곱을 좌절시키고, “해가 떠니 나는 밤의 세계로 철수해야겠다”고 말하십니다. 즉 “싸움은 이만하면 됐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보여줄 것 다 보여주었다는 말입니다.

상대가 복의 구원인 영적 존재임을 알게 된 야곱은, 해가 떠오르면서 사라지는 밤 속으로 같이 철수하는 천사로 인해 야곱이 속해 있는 인간 세계는 전면적으로 복은 없고 오로지 저주뿐임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야곱은 자신을 ‘복받은 자’로 저처했기에, 자기를 기준으로 이 땅에 복과 저주로 나뉘어진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정작 복을 주신 천사와의 만남에서 이러한 야곱의 성질은 복과 대결구조에 놓여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즉 ‘야곱’이라는 인간에게 있어 복이란 진정 복이 아니라 저주였던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사람이 전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바뀐다는 사실은 곧 '다른 현실‘에 속한 인물이다는 말입니다. 기존의 해 떠는 인간 세계에서 행세하던 그런 존재는 결코 천사의 나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해 앞에서 천사의 밤의 세계는 물러갑니다. 이것은 곧 결별입니다. 야곱은 이 결별에서 오는 상실을 느껴야 했습니다. 축복은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밤의 세계와 낮의 세계를 가름하는 경계선, 기준 그 자체였던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새 이름을 줍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먼저 밤에 찾아오신 까닭입니다.

야곱에게는 본인의 이익이 중요하겠지만 하나님께서 야곱이 가졌다고 오해하는 그 ‘언약’이 중요합니다. 그 언약의 내용을 이 땅에 심어놓기 위해 야곱을 복의 근원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복을 ‘야곱’ 자신의 소유로 전환하므로서 계속 ‘야곱됨’을 긍정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야곱의 속성’은 정작 하나님께 대결을 야기 시킨 겁니다. 공통성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야곱식의 축복과 새이름인 ‘이스라엘 식의 축복’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야곱의 복은 소유의 대상이지만, 이스라엘의 복은 소유가 아니라 ‘기능’입니다. 그 기능은 바로, 야곱이라는 육적 요소를 내용으로 하고, 그 죄악된 내용을 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기준으로 정해버린 하나님의 개입을 나타내는 겁니다.

즉 ‘복’이란 인류를 대표한 야곱이 인류를 대표해서 동일한 성질로 하나님과 싸웠다는 그 요소를 이 낮의 세계 안에 ‘밤의 요소’로서 집어넣어, 바로 그 점을 복과 저주의 기준으로 계속 유지하려는 취지에서 비롯된 겁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더불어 이겼다’는 것은 실내용이 죄인이 야곱이 제공한 겁니다.

그것은 왜 인간이 죽어야 하고 저주받아야 하는지를 계속해서 말하여 주게 됩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주셔서 그 범죄의 요소를 부각하므로서 ‘저주 속에서만 비로소 나타나는 축복’의 기능을 야곱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이처럼 야곱이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은, 훌륭해서가 아니라, 야곱을 죽은 자로 만드는 그 범의 세계의 경계선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소유가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하는 기능이 바로 마지막 때에 복받은 천국백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늘의 언약이 아니라 지상에 나타난 언약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8-03-15 10:09 
129강-창 32장 26-29절(이스라엘)1803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2장 26-29절입니다. 구약성경 50페이지입니다.

창 32:26-29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야곱이 복의 근원이고, 야곱이 형 에서와의 경쟁에서 이겼고,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복을 받았으나 형 에서는 오히려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우리도 알고 야곱 본인은 너무나 잘 아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면 야곱에 복이 실렸다고 할 수 있지요. 야곱에게 복이 실렸으니 야곱은 복을 자기가 소유했다고 생각하지요.

내가 복을 소유했다. 나는 복의 사람이다. 내가 가는 곳에 복이 있다. 계속해서 줄곧 복과 자기를 결부시켰던 겁니다. 이것은 옛날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반복이지요.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받는다. 너로 인하여 만백성이 복을 얻으리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 순간, 아브라함 이외에는 복의 기준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 그 말 한마디로 인하여 이미 확정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인간이라고 해서 다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다루시는 인간이 따로 있는데 그 다루시는 인간과 하나님을 결합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했어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그리고 그 다음에 이삭한테는 “이삭의 하나님” 야곱에게는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느냐?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이삭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야곱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보라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는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지요. 하나님께 갔다가 예수님께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 집합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 점은 요한복음 6장에서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했어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내게 오라고 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말씀은, 집합장소가 하나님이 아니고 집합장소가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 온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는 거지요. 쉽게 말해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코앞에 있어도 자력으로, 자기 행위로, 자기 의사로 예수님 앞에 올 수 없다는 뜻으로 이야기하신 거예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가 아니면 내게 올 수 없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예수님 앞에 온 많은 사람들은 뭐예요. 예수님 앞에서 같이 이야기하고 식사해도 예수님께 온 자가 아니에요. 가까이 있다고 해서 왔다고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런 상황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도 동일하게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신약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봤다고 해서 예수님에게 온 것이 아니듯이 구약에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라고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그들이 경솔하게 자부했지요. 경솔하게. 하나님이 나에게 찾아왔으니까 나와 하나님이 함께 있다고.

그런데 함께 하신 그 하나님께서 뭔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본래의 생각과 뭔가 틀어지는 일들이 일어나요.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에게 특별혜택을 입었다는 그 사실로 하여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인간들은 왜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사람인가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다시 구체화시키는 작업을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함께 있다고 해서 일이 마무리 된 것은 아니에요. 그 속에서 무엇이 벌어져야 되느냐 하면, 왜 인간은 자기가 눈으로 분별해서 그것으로 나는 하나님 만났다, 는 말을 왜 하지 못할 존재인가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는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어야 되고, 이삭 같은 경우에는 본인이 죽어야 되고, 야곱 같은 경우도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이름 자체가 바뀌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제목이 ‘이스라엘’인데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그 전에 어떤 작업이 있었기에 이름이 필히 바뀌어야 하는가, 하는 겁니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전에도 이름이 있는 그 인간이 새로운 이름을 가진 인간과 바뀌었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사람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바뀐다는 것은 그 사람이 소속되어야 될 세계가 다른 세계로 이전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살고 있으면서 주어진 야곱이라는 이름은 어디에 합당하지 않느냐? 정작 하나님의 복의 나라에 있어서는 야곱이라는 이름, 인물, 존재로서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야곱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이 말은 곧 뭘 뜻하느냐 하면, 야곱이란 들어갈 수 없는 존재 야곱, 들어갈 수 없는 야곱이 기존의 야곱 뒤에 놓여 있는 모든 인간들의 속성을 야곱이 대표해서 보여주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야 신약의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아버지께서 보내지 않으면 누구도 예수님한테 올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원리가 되는 겁니다.

언약이니까, 야곱은 언약의 사람이니까, 언약으로 앞장서 있는 사람이니까 그 뒤에 있는, 언약과 상관있든 없든 간에 모든 사람은 야곱이 하는 행동을 주시하고 야곱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주목을 해야 돼요. 야곱에게 일어난 그 일은 무엇을 대변하느냐 하면, 현재 인간이 살고 있는 이 모든 현실의 사정을, 형편을 대표하는 식으로 야곱은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언약의 사람이니까요.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인류의 대표자입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렇고 그런 인간하고 다른 인간이지요. 하나님이 지목했다는 점에서 대표자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야곱이 오늘 본문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을 만나면서 야곱이 인생을 살아왔던 그 성질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든 야곱은 자기의 성질을 죽이지 않습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이렇게 해서 살아왔습니다, 하는 것을 그 앞에 누가 되었든, 하나님이든지 사람을 만나든지 야곱이 본래적으로 갖고 있던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를 하지요.

야곱은 밤에 얍복강가에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야곱은 자기의 성질을 주저 없이 발휘했습니다. 주저 없이 발휘한 그 결과적 현상이 뭐냐? 씨름이었어요. 상대가 누군지를 모르면서 그냥 씨름하는 겁니다. 싸우는 겁니다. 내 것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싸우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범죄하고 난 뒤에 인간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기의 수치를 가리지요. 그것을 통해서 인간이라는 것, 범죄하고 난 뒤에 인간의 속성은 근본적으로 자기방어체제를 가동시킨다는 겁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든지 간에 나는 나를 보호해야 된다는 속성이 최우선적으로 발동이 되는 거예요.

그게 범죄한 증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인간이 무엇을 지키는지를 몰라요. 부끄러워서 지키는데 도대체 나는 무엇을 숨겨놨느냐는 말이지요. 무엇을 숨겨놓고, 숨겨놓은 것이 무엇이기에 나는 결사항전으로 그것을 지키는 본성이 앞장서서 툭 튀어나오느냐는 말이지요.

못 지키면 수치를 느끼고. 그게 뭔데? 도대체 그게 뭐기에 수치를 느끼고 그게 뭐기에 결사적으로 지키려고 합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세요. 당신은 최후로 무엇을 지키렵니까, 하고 물어보세요. 몰라요. 그냥 지키고 싶어요. 뭔지도 모르고 지키고 싶어요. 그리고 이상하게 안 지키면 부끄러워져요. 뭔데?

그 무엇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범죄한 인간의 분별력으로서는 그 수준을 밝혀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자기가 지키려고 하는 그것을 지키려면 인간은 어느 지점에 가야 되느냐 하면, ‘범죄 안했다, 범죄 했다.’를 가름하는 경계지점까지 가 있어야 돼요.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었다. 그것을 확연하게 가름하는, 그것을 구별시키는 그 경계선, 그 지점에 가서야 비로소 전에 나는 이런 인간이 아니었고, 가릴 필요도 없고, 지킬 필요도 없는 인간은 저쪽 편에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거든요. 그런데 이미 인간은 범죄한 이상은 본인이 본인을 지키다 보니까 누가 기준이냐 하면, 자기가 자신에게 기준이 되는 거예요.

무조건 나는 복된 사람이어야 되고, 무조건 나는 행복해야 되고, 내 인생은 성공적 인생이어야 되고, 남에게 져서는 안 되고, 무조건 이기고, 또 이기고, 또 이기는 이김의 연속의 인생을 살아야 나는 마땅한 존재라 하는 것, 이것은 근거도 없고 이유도 없고 무조건 무조건이에요.

그래서 이런 속성은 야곱이 대표하고, 야곱은 복의 근원으로서 자기는 복된 사람이고 복을 받았으니까 창세기 3장의 아담의 본성이 결부가 되면서 내가 소유한 복은 무조건 내가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지키고자 하는 이것은 하나님이 형에게 빼앗아서 나에게 준 복 그 자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밤중에 분간도 되지 않는 상태에서 어떤 사람이 등장했을 때 그 사람은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 야곱이 착각한 것,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복을 빼앗고자 하는 외부인인줄로만 알고 결사적으로 씨름하고 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누구냐? 그분이 바로 인간이 범죄하기 전부터 인간세계와 전 우주의 천지창조에 관여하신 영적존재였습니다.

영적존재. 영적존재가 밤을 통해서 왔어요. 이 말은 뭐냐?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밤에 자고 있는데 사다리를 통해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했습니다. 위가 있으니까 사다리가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그 때에는 바깥에 있는 밤, 위에 있는 밤, 밤인데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밤이었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밤은 세상 안쪽에서 야곱이 만나게 되는 밤이에요.

위에서 받을 때는 야곱이 일방적으로 받았어요. 자기는 자고 있었고, 천사가 내려왔고, 하나님께서 위에서 일방적으로 자기에게 복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창세기 32장에 나오는 이 밤은 위에서가 아니라 이 세상 안쪽에서 야곱이 직접 만나는 그런 밤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밤을 맞이할 때는 나에게 일방적으로 퍼부어주신 것으로, 나는 소유만 하면 되는 것으로 여겼는데 그 밤의 천사가 직접 세상에서 야곱과 대면하고 맞닥뜨릴 때는 곱게 주고 곱게 받는 것이 아니고 정반대가 되었어요. 복을 주셔야 될 사람한테 복을 받았다고 착각한 야곱으로 인하여 대충돌이 벌어진 겁니다.

둘 다 서로 튕겨져 나올 수밖에 없는 이질적 요소니까 씨름이라는 것이 성립되고 싸움이 성립되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하나님으로부터 밤에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야곱은 복의 기준점이 돼요. 복의 근원이니까. 나를 축복하는 사람은 복을 받고 나를 저주하는 사람은 저주받는다. 자기가 이 세상의 유일한 중심이고 기준점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밤에 어떤 사람을 만나고 그 분이 천사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는 그 기준점이 야곱이 현재 놓여 있는 이 세상으로부터 철수하려고 해요. 철수는 뭘 의미하느냐? 이것은 상실을 의미하는 겁니다.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복이 실은 복이 아니었어요. 해가 떠오르고 밤이 떠날 때 이 세상에서 복이 있다고 여겼던 야곱의 생각도 상실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잃어버림으로 변했습니다.

저 밤을 지배하는 천사가 해와 더불어서 사라져버리면 복도 영원히 두 번 다시 달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은 뭐냐? 애당초 복이 없는, 전면적으로 복이 없는 저주의 세상으로 판명 나버리는 겁니다. 아브라함에서는 복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어요. 이삭에게도 복이 이삭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언약과 이삭언약에서는 이 세상에 복이 있음을 의미해요. 그러나 야곱에 와서는 그 복의 의미가 더 심화되고 깊어졌어요. 이 땅에 복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복이 없는 거예요. 이 땅에 복이 없으면 어느 구석에도 복이 없는 거예요. 이 땅에 복이 없으면 어느 구석에도 저주밖에 없는 겁니다.

따라서 야곱이 처해 있는 이 세상에서는 저주를 피할 도피처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왔을 때는 아브라함이 있는 곳에 복이 있을 것 같고, 이삭이 있을 때는 이삭이 있는 곳에 복이 있을 것 같아서 야곱은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복을 빼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더 내용이 깊어지고 깊어진 야곱의 언약에서는 애당초 이 땅은 저주뿐이지 복이라는 것은 일체 없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하늘이 아니라 땅에 내려온 복의 근원되시는 분이 밤을 통해서 찾아왔을 때 해가 뜨는 낮에 활동하는 모든 인간들은 오직 저주뿐인 것을, 밤을 몰고 와서 밤을 통해서 나타난 그 분에 의해서 처음으로 그 사실이 확연하게 다 드러났습니다. 야곱에 있어서는 그 천사를 놓쳐버리면 복이고 뭐고 오직 저주뿐인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복을 받았으니까 복이 있다고 여겼는데 그분과의 싸움이라는 것, 대척관계, 원수관계, 싸워야 될 그런 관계로서 규정이 된, 그런 최종적으로 나타난 복의 입장에서는 자기에게 복을 주시는 분과 싸웠으니까 야곱이 속해있는 모든 인류가 갖고 있던 본래의 성격이 확연하게 드러났어요.

복과 싸울 정도의 저주스러움의 속성이 흐르고 넘치는 세상, 오직 저주만이 충만한 세상, 그리고 그 외에는 없는 세상, 야곱이 대표해서 그것을 보여줬습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야곱이 가졌다는 것, 야곱이 이 복을 따내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하고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하심을 얻었다는 모든 사고방식은 야곱에서 나온 거예요. 이게 야곱에서 나온 겁니다.

야곱은 소유성을 갖고 있어요. 뺏는 겁니다. 싸워서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거예요. 타락하고 범죄한 인간의 속성을 대표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걸 가지고 수치를 가리듯이 그걸 가리고 싶은 거예요. 그걸 지키고 싶은 거예요. 지킬 필요도 없는 것을 지킨 거예요. 야곱은 복을 지킨 것이 아닙니다. 더러운 인간성을 지킨 거예요. 오늘날 모든 인간들처럼.

길가는 사람을 툭 칩니다. “당신이 나에게 시비 걸어요?” 하고 화를 냅니다. 그 사람은 왜 화를 냅니까? 흔히 이야기하지요. “당신이 쳤으니까 화를 내지.” 치는데 왜 화를 냅니까? “나도 자존심이 있습니다.” 당장 나오지요. 자존심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자존심 가지고 구원 받습니까? 그게 생명입니까?

그것은 바로 지옥 갈 요소지요. 인간은 저주받을 요소를 최후로 지킬 대상인 양, 지킬 필요도 없는 것을 가지고 충실하게 마귀가 시키는 대로, 지옥 갈 요소를 마귀가 시키는 대로, 그게 뭐가 귀하다고, 죽자하고 결사 항쟁하듯이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게 kbs, mbc, sbs 뉴스를 통해서 매일같이 나옵니다.

매일같이 변명 나오고, 핑계 나오고, ‘미 투’ 이야기가 나오고, 모든 세상 이야기가 창세기 3장 이후에, 지킬 하등 가치도 없는 것들을 지키겠다고 아등바등 야곱과 야곱들의 군상들, 야곱과 야곱의 충만한 그것들, 내가 받은 재산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오늘날 교회가 얼마나 많이들 이야기합니까? 교회가 부흥된 것이 축복이라고. 그게 저주인 줄도 모르고.

그런 소리 하는 그것이 지옥 가는 성질인줄도 모르고. 그런 성질 가지고 천국을 가요? 야곱의 언약은 그것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이야기하지요. 그런 성질 가지고는 천국에 못가는 겁니다. 내가 뭔가 지킬 것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여러분들은 천국에 못가는 사람입니다. 갈 수가 없어요. 야곱이 천국 못 가듯이. 똑같은 야곱의 성격, 성질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천국은 어림도 없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내려오던 그 천사를 왜 하나님께서 일부러 야곱을 만나게 해 줬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야곱에게 있었던 것이 있어요. 그게 복인데 그 복을 야곱은 오해를 했어요. 야곱이 소유의 대상으로 본 겁니다. 이 복은 내가 갖고 있다고 본 거예요. 야곱이 복을 갖게 된 것은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거니까 하나님의 천사가 마중 나와서 야곱을 일부러 만난 거예요.

만났는데 뭐가 문제냐 하면, 복을 소유대상으로 본 것이 문제거든요. 복을 소유대상으로 본 것을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천사를 보내서 야곱과 씨름하게 만들어서 복이라는 것은 소유대상이 아니고 이 세상과 그리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다른 세상 사이에 기준점이라는 사실을 밤에 일부러 야곱을 만나서 야곱에게 알려주게 된 겁니다.

기준점이라는 것. 소유가 아니고, 내가 뭘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기준점의 기능을 발휘하는 거예요. 그 기준점의 기능이 어디 있느냐 하면, 천사가 그 기능을 야곱 앞에서 하고 있습니다. 해가 뜨니 나는 떠나야겠다. 해 뜨는 세계에 속하지 않는 기준점, 해 뜨는 세계와 해가 없는 세계를 가름하는 그 기준점이 축복이냐 저주냐를 가름하는 유일한 기준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걸 모르고 해 뜨는 이 대낮에 내가 복의 기준점이라고 오해한 거지요. 그 오해를 야곱과 더불어 싸움함으로서 야곱과 천사는 해뜨기 직전까지 야곱과 더불어서 싸웠다, 잘못된 기준과 옳은 복의 기준을 가름하는 그 기준을 싸움을 통해서 돋보이는 기능으로 드러낸 겁니다.

그 기능을 가지고 천사는 떠나려고 했고 야곱은 천사에게 빌었던 거예요. “하나님이여, 나에게 복을 주옵소서.” 여기서 복이 뭐냐 하면, 밤에 하나님이 갖고 있던, 천사가 갖고 있던 그 기준을 이 낮의 세계에 심어주옵소서, 하나의 요소로서 남겨주옵소서, 라는 거예요.

그 남겨진 요소가 뭐냐 하면, 하나님과 사람과 싸워서 이겼다는 요소에요. 이것은 소유대상이 아닙니다. 기준점 그 자체에요. 선 그 자체에요. 그 이름이 네 자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복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무엇부터 저주며 무엇부터 축복인지를, 그 기준점으로만 기능해야 될 기능의 담당자, 그것을 철학용어로 담지자라고 하는데 그 기능의 담당자로서 하나님께서는 그 천사의 기능을 야곱의 몸에 결합시켜서 몸은 야곱의 몸이지만 그 기능은 천사의 기능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축복입니다. 축복은 우리가 예수의 증인되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의 어떤 기능을 하는 것이지 내 것 따로 소유하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야곱시절에 잘못 생각했던 축복이었습니다. 야곱시절에 생각했던 거예요.

그래서 기준점이라는 것은 양쪽을 다 보여주기 때문에 반드시 뭐가 필요하냐 하면, ‘싸우다’가 필요해요. ‘싸우다’가 필요하고 축복이니까, 싸웠으니까 그 다음에 ‘이김’이 필요해요. 하나님과 사람과 싸웠다는 것은 누구 이야기냐 하면 야곱 이야기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창세기 32장 28절에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다는 것은 야곱의 그 죄악된 속성을 그대로 세상의 기준점으로 정해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야곱은 뭐가 되느냐 하면, 죄인 중에 괴수가 되어버려요. 그 죄인 중에 괴수의 기능자가 이미 영생을 얻은, 구원을 얻은 사람입니다.

“나 까불다가 하나님과 싸웠다.” 그런 내용이에요. “나는 멋도 모르고 내 노력으로, 내 열심가지고, 내 수고로움으로 천국 간다고 여겼다. 그러다가 하나님한테 된 통으로 깨졌다.” 그 사람은 자기의 증인 아닙니다. 성령이 임해서 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거예요.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야곱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돼요. 야곱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모르는 내 더러운 속성을 누가 대신 대표로 알려줄 사람이 없는가?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지목했습니다. 아브라함을 지목했고, 이삭을 지목했고, 야곱을 지목했어요.

지목받은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다들 오해합니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 나는 너희들보다 낫다. 왜? 복 받았으니까. 나한테 잘못 보이면 너는 저주받아.’ 오늘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했는데 참 좋은 질문을 했어요.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왜 내려갑니까? 약속의 땅에 왔으면 거기서 스톱이 되어야 하는데 왜 애굽으로 내려갑니까?”라는 질문을 하셨어요.

답변을 이렇게 해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생각하는 약속의 땅은 소유개념이에요.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을 지나 약속의 땅에 왔을 때 ‘아, 여기가 내 땅이구나.’ 하는 그저 소유개념이에요. 그러나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가서 거기서 어떤 사건을 만나야 됩니다. 그 사건은 뭐냐 하면, “이 아내가 내 소유입니다.” 했는데 그 소유의 한계를 발견해요.

나보다 더 센 권력자 앞에서 이 소유를 아낌없이 내놓아야 될 일이 벌어져요. 사랑하는 아내지만 성상납을 해야 됩니다. 성상납을 하는 그 방법이 원래 아브라함이 갖고 있던 인간적인 속성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사건을 일으켜서 밤중에 사라를 건드리려던 바로 왕에 대해서 하나님께 직접 난리를 쳐버리거든요.

하나님의 그 사건,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스스로 조치할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동행하셔서 하나님이 배후에서 알아서 처리할 문제거든요. 애굽을 경유해야 비로소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내가 소유하거나 내가 성취할 땅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나에게 하나님이 홀로 일하셔서 그저 주기만 하고 아브라함은 믿기만 하면 되는 약속의 땅이라는 것을 발견하지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다 못난 사람이에요. 못났는데 그 못남을 통해서 동일한 양의 못남이 아니라 더 깊이 있는 인간의 근원적인 못남과 죄악됨을 들춰내는데 야곱에 있어서는 그게 최종적이 됩니다. 왜? 모든 인간 전체가 전면적으로 해 뜨는 나라고, 해 뜨는 나라인 동시에 축복은 전혀 존재할 수 없는 저주받은 해 뜨는 나라라고 판정 받습니다.

그 가운데서, 해 뜨는 나라에서 ‘내가 좀 낫다. 나보다 네가 좀 못하다.’ 하는 것은 의미 없지요. 해 뜨는 나라에서 태어난 그 존재 자체가 저주로 태어나는 겁니다. 그래놓고 야곱은 착각했습니다. 내가 복을 소유했으니까 내가 기준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 천사가 올 때까지 그 기준점이 바뀔 줄은 몰랐지요.

딱 오고 난 뒤에 나는 죽을 세상에서 죽어야 될 인간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게 바로 ‘브니엘’이에요. 하나님 만났는데 나는 살았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처럼 야곱으로서는 야곱자체가 죽은 인간이었다. 죽은 인간인데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이스라엘로 살아났는데 이것은 내가 살아난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주신 복이라는 그 기준점, 그 기준점의 기능을 이 죽을 몸을 통해서 마음껏 발산하는 거예요.

이걸 함축해서 말하면 야곱의 몸에서 미래가 발산되는 겁니다. 야곱의 몸에서 마지막 종말이 발산되는 거지요. 저주밖에 없는 세상, 세상 끝에 뭐가 있는지를 아무도 모를 때 야곱을 통해서, 세상 이렇게 작살나고 그리고 그 작살난 세상에서 이런 세계가 나온다. 죄 많은 야곱도 하나님의 복 받으면 죄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죄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생 얻는 나라, 그 나라가 바로 마지막 이스라엘, 예수 그리스도 아들의 나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남들처럼 가진 것을 가진 것으로 보기로 착각했고, 죽자 살자 그 가진 것 지키고자 했습니다. 자식 지키고, 재산 지키고, 명예 지키고, 자신의 체면 지키고, 자존심 지키고, 자기의 우수함을 지키고, 지키고 지키는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야곱 같은 존재. 주여, 이것이 바로 저주요 죽은 인간의 표상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고 이런 인간에게 십자가 피로 동행하여 주셔서 이미 영생을 주셨사오니 이제는 예수님만 증거케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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