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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1 20:36:40 조회 : 506         
   얍복강가180221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얍복강가(창세기 32:22-26)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nviyX77BiWE, Hit:154
 이근호 18-02-21 21:35 
얍복강 가

2018년 2월 21일               본문 말씀: 창세기 32:22-26


(32: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32: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32: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32: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야곱은 여전히 해결해야 될 미진한 일이 남아 있음을 감지합니다.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복을 받아내었을 때, 그것으로 형 에서와의 싸움이 종결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비록 형 에서로부터 공격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복의 전수자’라는 사실은 달라짐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즉 야곱은 자신의 존재가 곧 아브라함 언약과 이삭 언약의 계열에 속해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외삼촌 집에서 자식 11명과 막대한 재산을 얻도록 조치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왜 형 에서가 400명의 인원을 거느리고 자신을 직접 공격하도록 하나님께서 허용하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어쨌든 야곱은 자신의 직위인 ‘복의 근원’의 자리를 필히 지켜내겠다고 다짐을 했고 이것이 사명이라고 여겼습니다. 얍복강 너머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복의 증거물들은 미리 옮겨놓습니다. 그리고 형 에서에게는 단판을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 전에 야곱은 형 에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종들을 1차, 2차, 3차로 보내놓았습니다.

하지만 그 조치들이 무용지물이 돌아갈 마지막 경우까지 야곱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밤입니다. 홀로 남았습니다. 사방을 제대로 대처할 시야가 확보되지 않습니다. 이럴수록 자기 방어를 위한 긴장도는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일단 그 누구라도 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적이 분간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밤새 야곱은 그 누군가와 사투를 벌립니다. 지게 되면 죽게 됩니다. 야곱은 본인이 죽는다는 말은 ‘복의 근원’으로서 죽는 것이 되기에 사력을 다해서 밀리지 않으려고 싸웁니다. 승부의 축이 야곱가 우세해져서 미지의 인물로 지게 되는 경계선으로 넘어서자 그 미지의 인물은 결정적인 타격을 야곱에게 날려 승부를 멈추려고 했습니다.

야곱이 얻어맞은 곳은 야곱이 힘을 쓰는 원천부입니다. 야곱은 더 이상 상대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지금껏 야곱이 상대했던 그런 대상자가 아니었습니다. 상대는 말입니다. “낮이 되려하니 나를 놔주어라” 이것은 하나님의 세계에서 온 영적 존재가 아니면 말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전에 야곱이 사다리 환상을 보았던 것도 밤이었습니다.(창 28:12) 낮은 인간들의 활동 때라면 밤은 인간의 활동이 멈추는 시기입니다. 그러면서도 대자연이 운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쉬지 않는 활동으로 관장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에서의 싸움을 마무리하는 것이 온통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이 승리의 요건은 필히, 자신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복의 근원의 자격으로 살아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야 한다는 일념이 야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역까지 본인 아니게 침범한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야곱이 있는 곳에 천사가 시비건 것이 아니라 천사에 대해서 야곱이 시비건 셈이 된 것입니다.

결국 천사와 싸워야하게 만든 사건 조성에서 야곱은 ‘나는 살아야한다’는 생존의지가 바탕으로 계속 작용했던 것입니다. 비록 형 에서의 공격소식이 원인이 되었다고는 하나 자신이 획득한 복은 계속 지켜내겠다는 의지가 강렬합니다. 하지만 야곱이 크게 잘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이란 ‘획득’하거나 ‘소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야곱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복 자체가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즉 ‘복을 받은 야곱’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복’으로 간주된 야곱이 구원되는 겁니다. 복과 야곱이 관련되려면 야곱이 복을 위하여 야곱을 포기해야 하고 죽어야 하는 겁니다.

야곱이 죽은 그 현장에 복이 비로소 나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복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참된 뜻이 나타나는 방식입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아담의 후손으로 이 지상에 등장한 겁니다. 따라서 당연히 사단의 정신을 계속 이어오고 있었습니다. 이 사단의 입장에서 하나님이란 결코 참된 하나님일 수가 없습니다.

자아를 절대화시키는 의지에 부응해주는 그런 하나님상을 가지고 계속 생존을 염원해온 겁니다. 야곱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야곱은 ‘복의 근원’으로 지정해주셨습니다. 야곱의 갈 길을 이끌고 오셨습니다. 이는 야곱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야곱을 통해서 숨겨진 참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참된 하나님 모습은 ‘야곱의 분열’을 통해서 그 틈을 통해 나타납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이길 때나 얍복강에 형 에서를 기다릴 때나 한결같이 ‘나는 나로 전부’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자기 안에 또다른 자기가 잠재되어 있을 줄을 전혀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형 에서의 움직임을 통해서 야곱의 본색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로 야곱은 하나님마저 이겨버린 특이한 존재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는 아담의 본성상 ‘약한 하나님’, ‘패배한 하나님’, ‘죽어버린 하나님’이란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음을 하나님께서 감안하신 겁니다. 즉 야곱으로서는 타고난 그 아담의 본성으로서 아무리 시도해도 하나님께서 설치하신 차단막을 뚫어낼 수가 없는 겁니다.

마치 평생 교회에서 시킨 대로 다 했는데 막상 천국으로 통하는 길을 완전히 막혀 있음을 발견하는 그 황당함과 같은 겁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천국에 갈 수가 없는 존재였습니다. 야곱처럼 복의 근원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 점을 알려주셨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이처럼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음에도 사단은 그동안 줄기차게 인간들에게 구원의 희망을 노래하고 유인한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단의 호소가 인간은 태생적으로 친근하게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구원에 성공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인간 구원의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통해서 복의 근원을 뽑아내시고 그 복의 근원되시는 분이 이 지상의 모든 신과 인간에게 이기는 분으로 오신다는 것이 참 하나님의 뜻이라는 점을 나타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서 야곱의 힘에 지게 되는 시점에서 야곱의 환도뼈를 친 겁니다.

“야곱아, 너는 나를 이기는 존재가 되라”라는 식으로 야곱이란 인간 존재로만 하나님은 자신을 알리시는 겁니다. 이것이 새언약 시대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마 27:46) 분열된 하나님, 죽으시는 하나님, 십자가를 통해서만 참 하나님께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구원이 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8-02-22 16:23 
128강-창 32장 22-25절(얍복강가)1802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2장 22-25절입니다. 구약성경 49페이지입니다.

창 32:22-25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쌔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야곱이 계속해서 어떤 소식을 듣게 되느냐 하면, 4백명을 거느리고 오는 형이 자기에게 복수하겠다고 친히 저 남쪽 에돔에서부터 자기를 맞닥뜨리기 위해서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야곱의 방책, 대책은 무엇이었는가 하면, 첫 번째 종, 두 번째 종, 세 번째 종을 에서가 오는 길목에다 먼저 줄줄이 파견해서 마중하도록 합니다.

첫 번째 종의 제안이 무너지면 두 번째 종이 나서서 제안하게 되고, 그것도 무너지면 세 번째 종이 나서서 하겠다는 내용이 18절에 나옵니다. 이 모습은 뭐와 같은가 하면, ‘함 사세요.’ 하고 비슷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뭐냐? 야곱은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자기가 삼촌 집에서 모아놓았던 그 많은 재산과 열 한 아들은 하나님이 내게 허락한, 복의 근원에 합당한 조치라고 자부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달리 생각하면, ‘나는 복 받을 만 해서 복을 이렇게 가졌다. 따라서 복의 근원으로서 전에 형에게 이겼듯이 하나님이 주신 복과 자식도 절대로 형에게 빼앗길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내가 복의 근원이라는 것을 계속 증명해줄 수 있는 하나님이 허락한 하나님의 복이기 때문에 이것을 내가 보호하고 지킬 의무가 있다.’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이 말은, 에서가 자기에게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야곱은 감 잡고 있는 거예요. 미진한 일이 있는 거예요. 복의 근원으로서 자격을 자기에게 부여하고 싶은데 일이 아직 끝나지를 않았어요.

에서가 그렇게 열 내면서 자기에게 다가올 때에 일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지막 결전이라 할까요, 배수의 진을 치고 에서와 담판을 짓기 위해서 밤에 얍복강가에 먼저 안전처로 자기자식들과 재산을 다 빼돌려놓고 밤에 그는 혼자 남았습니다.

야곱의 이런 생각은 뭐냐? 하나님께서는 약속, 그 언약이 있고, 언약에 의하면 복의 근원 따로 있고 복의 근원은 계속해서 대대로 이어져오는데 하나님의 약속대로 복을 받은 사람은 바로 나다, 라고 생각한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복의 근원이 누구지?”라는 질문을 하게 되면 ‘그 질문의 답은 나다.’라고 이미 그 질문과 합당하게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연결이 제대로 갖춰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갖춰졌으면 현실 돌아가는 것이, 에서가 이미 한번 게임에서 졌으면 남자답게 포기하고 “그래. 네가 복을 가져간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내가 저주 가져갈게.” 이렇게 마무리되었으면 참 좋겠는데 계속해서 에서가 자기에게 달려든다는 소식을 들으니까, 지금 내가 분명히 복의 근원이 맞기는 맞는데 이 복의 근원인데도 불구하고 에서가 이렇게 나한테 분을 품고 4백 명을 끌고 나를 죽이겠다고 달려든다면, 현재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의 결과라면 이 결과에 부합되는 그 질문, 원천적인 그것을 뭔가 새롭게 정리를 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답은 나인데 그 답이 속 시원하지가 않아요. 깔끔하지가 않은 겁니다. “하나님, 제가 복의 근원이 맞잖아요. 맞는데 왜 일이 이렇게 지저분합니까?”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답은 답이지만 그 질문과 답이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이래서 복의 근원이 맞다는 그 답에서 따로 뭔가 내 쪽에서 마무리 짓고 해결해야 될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 때가 밤이었습니다. 밤이라 하는 것은 누가 달려들지 않더라도 나는 살아야 되겠다는 의식이 강렬하게 생겨나는 시점이 밤이에요. 낮에는 구체적인 대상이 보이기 때문에 저 인간만 처리하면 그만이지만 밤은 어디서 달려올지 모르고 밤이 되면 사람은 더욱 더 자기방어에 철저를 기하게 되어 있어요. 어디서 적들이 올지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밤이 되면 무엇이 강렬해지느냐? 나는 내가 지켜야 된다는 의식이 아주 강렬하게 되는 그런 시점이 밤이에요. 나를 지키는 것은 나밖에 없다는 것. 컴컴하니까 어디서 달려들지 모르기 때문에. 그 밤에 야곱은 혼자 남았다고 했습니다. 혼자 남았으니까 자의식이 더욱 더 강하게 피어오르지요.

그래서 긴장을 늦추지를 않습니다. 긴장도가 극에 달할 정도로 높았을 때에 어떤 사람이 밤새도록 야곱과 씨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적을 분간 못해요. 적을 분간은 못하지만 내 인생, 내 축복, 내가 가진 이 지위는 내가 지켜야 된다는 의식이 강렬한 야곱의 입장에서는 그게 누군지 상관없이 나에게 달려든다만 이것은 무조건 나를 공격한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맹렬하게 싸움입니다. 지면 빼앗기니까. 지면 하나님이 주신 복까지 다 빼앗기니까. 내가 무너지면 하나님이 주신 내 자식과 재산이 위태로워지니까. 이것은 필히 형이 보낸 자객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하고 야곱은 전에도 형을 이겼듯이 양보 없는 싸움을 하게 된 겁니다. 절대로 질 수 없는 거예요.

사람이 질 수 없다, 질 수 없다, 하면 할수록 강렬해지는 것이 뭐냐? 나는 기어이 살아남아야 되겠다는 겁니다. 나는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 살아남아야 되겠다는 겁니다. 밤새도록 씨름하는데 얼추 야곱의 희망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상대가 서서히 지쳐서 자기 힘에 굴복되는 낌새가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야곱의 기대대로, 목적대로 자기는 살아남은 겁니다. 여기서 야곱은, 복의 근원은 이 땅에서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가, 어쨌든 저쨌든 살아남는 이것이 복의 근원의 자격에 합당하다는 생각을 굳히겠지요. 살아 있다는 것, 내가 이겼다는 것. 이겨야 살아남으니까. 적으로부터.

그런데 캄캄하기 때문에 자기와 싸우는 상대방이 누군지를 몰라요. 적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마지막에 야곱한테 어떤 시점에서 경계선을 넘어서느냐 하면, 야곱에게 힘에 부쳐서 졌다는 쪽으로 기울어졌을 때에 상대방이 이 씨름을 끝장내는 결정적인 시도를 하게 됩니다.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다고 했어요.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를 쳐버렸습니다. 환도뼈라는 것은 힘의 근원이거든요. 야곱으로 하여금 더욱 살게 만드는 근원, 원천이 붕괴되는 겁니다. 이렇게 붕괴되게 되면 갑자기 이 씨름은, 누가 이기고 지느냐의 이 투쟁은 여기서 종결되고 말지요. 그리고 26절에 보면,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은 그 어두컴컴한 밤에 혼자 있었다고 생각해요. 야곱이 혼자 있는 공간에 낯선 사람이 야곱에게 침범했다고 야곱은 생각한 거예요. 왜냐하면 야곱은 복의 근원이고, 언약의 사람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자기가 정답이고, 이 정답은 하나님이 지정해준 정답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나에 대한 모든 권리에 대해서 침범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야곱은 결정적 한 방을 맞을 때 이것은 사람의 힘이 아닌 것을 알았어요. 그렇다면 야곱은, 자신의 영역에 그 사람이 침범한 것이 아니고 밤의 지배자 되는 그 분에게 자기생각에 몰두해서 그분의 영역에 침범한 거예요. 그쪽에서 야곱에게 시비건 것이 아니고 야곱이 에서를 염두에 두고 자기축복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그 일념 하에 본의 아니게 하나님의 영역에 야곱이 침범한 침범자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결정적 한 방을 맞고 위골되고 난 뒤에, 이런 힘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힘이고 이것은 밤을 지키는 자 ……, 밤에는 인간들이 노동을 안 하잖아요. 밤은 하나님의 시간이잖아요. 그 하나님이 시간의 지배자라는 것을 야곱은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26절에 보면,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낮에 일하는 것이 인간의 영역이라면 인간이 일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천지가 운행되도록 조치하는 것은 인간이 손댈 영역이 아니지요. 밤은 인간이 손댈 영역이 아닙니다. 낮을 인간이 가꾼다면 밤은 하나님이 가꾸어서 날과 날을 이어가게 하는 겁니다. 이제 날이 새려하니 나는 이곳을 떠나야 되겠다고 할 때, 내가 하나님과 씨름했다는 것을 야곱이 알게 됩니다.

하나님과 씨름했다는 것은 뭐냐? 하나님과 싸운 것이 되지요. 하나님과 싸운 것이 된다면, 지금껏 야곱은 누구와 싸워야 내가 복의 근원이라는 것이 증명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에서하고 싸운다고 생각을 했는데 정작 ‘내가 복의 근원이다. 따라서 나는 죽으면 안 돼. 살아남아야 돼. 나는 꼭 살아야 돼.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주신 복을 지켜야 돼.’라는 그 모든 의식들이 뭉쳐서 결국은 이 어두컴컴한, 적을 분간하지 못한 상태에서 에서를 이긴다고 공격한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공격한 바가 되는 거예요.

야곱이 여기서 모든 생각을 새로 가져가야 돼요. 야곱은, 나에게 사다리를 통해서 복을 주신 하나님, 그래서 자기는 뭐만 챙기면 되느냐? 하나님의 사다리를 통해서 천사들이 나에게 집중하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관심을 갖고 나에게 복을 주신다고 했고, 언약의 사람이고, 그 언약을 완성할 주인공이 바로 나라고 생각한 그 나의 대상이 저 하늘에 계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늘에서 나를 집중한다고 본 거예요. 자기는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은 언약대로 복 주고 나는 언약 받아 챙기면 끝난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야곱이 이제는 뭐라고 정리하느냐 하면, 내가 알고 있던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진짜 하나님과 싸우는 위치에서 하나님이 바로 내 곁에 있었다는 겁니다.

저 위에 계신 것이 아니고 내 곁에서 하나님이 나와 싸웠다는 말은, 내가 복의 근원이라는 이 답과 연결된 그 질문자체를 하나님 쪽에서 새롭게 재조정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졌다는 거지요.

내가 알던, 내가 복의 근원이니까 그것으로 연결되어서 하나님은 나에게 복을 주고 나는 복을 받으면 된다고, 시작과 끝이 이렇게 연결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싸울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로, 복의 근원이라는 내가 하나님과 씨름할 수밖에 없는, 얻어맞아야 정신 차리는 그런 인간으로 내가 전환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하나님 됨이 제대로 나라는 답과 문제가 연결된다고 야곱은 정리하게 된 겁니다.

상당히 어렵지요. 에서가 4백 명을 끌고 왔습니다. 누가 그렇게 했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했지요. 야곱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뻔히 아시고 공격자를 보낸 거예요. 그것도 낮같으면 그게 에서인지 누군지를 아는데 밤에, 그것도 식구들 다 떠나보내고, 열 한 아들과 아내 둘을 다 떠나보내고 홀로 남게 되었어요.

밤에 홀로 남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이에요. 내가 살면 복도 살고 내가 죽으면 복도 날라 간다는 그 의식, 그 의식에 야곱이 집중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유도한 거예요. 어디 안에서? 하나님이 계시는 현장에서 그렇게 만든 겁니다. 그런데 그 야곱과 누가 싸웠다? 에서와 싸운 것이 아니에요.

지금 야곱은 에서와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에서와 싸울 준비를 한 그 마음가짐과 그 태도를 전부 다 어디에 쏟아 부었느냐 하면, 하나님과 씨름하는데 다 소용되도록 만들었어요. 하나님과 다투게 만든 겁니다. 왜 다툽니까? 왜 씨름합니까? 이것은, 야곱아, 진짜 하나님은 야곱 네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양립될 수가 없는 거예요. 양립이 불가능한 거예요.

야곱이 정리한 자신의 하나님과의 관계와 진짜 하나님은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씨름한 거예요. 씨름한다는 것은 그 간격이 생겼다는 거예요. 차단되어 있고 절단되어 있다는 겁니다. 야곱 쪽에서 하나님 쪽으로 넘어올 수 없는 생각을 야곱이 지금 하고 있다는 거예요.

쉽게 말씀드리면 이겁니다. 한평생, 5십년, 6십년 교회에서 신앙생활 했는데 천국 간다고, 목사고 장로고 선배신앙인들까지 전부 다 그쪽으로 가면 구원받는다고 했는데 막상 그쪽에 왔다고 했을 때 길이 막혀 있다면 그 황당함. 지금 한국교회가 그꼴 아닙니까? 천국 간다고 갔는데 천국이 막혀 있어요.

길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 믿으면 되고, 십자가 피 믿으면 되고, 자기를 부인하면 되고, 교회 봉사하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고, 선교헌금하면 되고, 하늘나라 확장하면 되고, 이렇게 구색 맞추고 갖추면 천국에 가고 거기에 봉사를 더 했다고 하늘나라 보너스까지 추가해서 받는다고 철석같이 알고 있었는데 가보니까 막혀 있어요.

왜 막혀 있을까요? 그 생각이 하나님의 진짜 생각과 양립될 수 없기 때문에. 왜 그러냐 하면, 그런 생각을 하는 내내 그 바탕에 뭐가 깔려 있느냐? 나는 살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나는 살아야 마땅하다. 왜? 내가 살아야 천국가도 내가 살아 있으니까. 여기에 살아 있는 내가 그대로 나를 천국까지 밀어 넣어야 되거든요.

이걸 가지고 쇼트트랙 계주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내 엉덩이를 미는 거예요. 매일같이 내 엉덩이를 밀어서 천국까지 쏙 집어넣는 겁니다. 집어넣으려고 다 왔는데 길이 없어요. 그러면 다른데 길이 있는가? 다른데도 길이 없어요. 처음부터 길이 없었던 겁니다. 이게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길이 없어요.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으로부터의 길을 차단시켜 놓았습니다. 그게 창세기 3장에 나오는데 에덴의 동쪽을 막아놓은 거예요. 처음부터 길이 없었어요. 야곱은 하나님에게 복을 받고 사다리가 자기에게 오니까, 자기만큼은 복의 근원 되었으니까 자기는 이 살아 있는 육을 가지고 그대로 천국 간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자기는 뭐만 이기면 되느냐 하면, 형 에서만 처리하면 된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런데 그 생각이, 그 사고방식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양립될 수 없는 사고방식인 것이 그 밤에 완전히 티가 나고 말았어요. 본색이 노출된 겁니다.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오히려 하나님과 싸우게 만들었고 하나님께 얻어터지게 만들었어요.

그 근본적인 오해가 어디서 생겼느냐 하면, 나는 여기 살아 있으니까, 내가 여기 있으니까 이제 남은 것은 그 복을, 영생을 내가 획득해서 내 것으로 가지면 내 안에 영생이 들었고 생명이 들었으니까 천국에 쑥 들어가겠지, 라고 생각한 거예요. 내 안에 예수님 소유해서 가지면 내 안에 예수 있으니까 예수가 나를 구원해주겠지, 라고 하는 거예요.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예수기 때문에 양립이 되지만, 같이 존속이 되지만 진짜 예수님은 나와 양립이 안 된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를 못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은 복을 획득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복의 근원되게 하는 것은 야곱이 복을 가지는 것이 아니에요.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에 잠식되도록 하지요. 복에 포함되도록 하는 겁니다. 내가 구원받는 게 소중한 것이 아니에요. 내가 천국 가는 게 소중한 것이 아니고 뭐가 소중한가? 복이 소중해요. 복을 가진 내가 소중한 것이 아니고 복이 소중하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야곱은 뭐냐? 복을 내가 가졌으니까 역시 나에게는 내가 제일 소중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소중 안해야 돼요. 진짜 성령을 받고 예수를 알면 나는 소중하지 않아야 되는 겁니다.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어야 돼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 지신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예수님이 이스라엘이고 예수님이 복의 근원이에요.

야곱은 복의 근원을 드러내기 위해서 껍데기로, 껍질로 주께서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껍질이 오해투성이의 껍질로 얍복강가에까지 이끌어온 거예요. 야곱은 그동안 누굴 상대했느냐 하면, 에서를 상대했지요, 아버지를 상대했지요, 삼촌 라반 상대했지요, 전부 다 속아 넘어갈 수가 있는 대상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밤중이라 야곱은 그 대상자가 누군지를 몰랐어요. 어두컴컴하니까 누가 누군지를 모른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밤에 집어넣었어요. 대상자가 누군지 모르니까 야곱의 본색은 그대로 살아 있어요. 그 본색이 뭐냐? ‘나는 죽으면 안 돼. 나는 실패하면 안돼. 나는 반드시 이거야 돼. 지고는 못살아. 왜? 나는 복의 근원이니까. 나는 천국 갈 사람이니까.’

바로 그 마음자세가 전혀 엉뚱한 하나님, 엉뚱한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 그 본색이 들통난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과 싸움으로 말미암아 야곱아, 그게 육이고 그것이 사탄의 생각이에요. 악마의 생각이라니까요. 이미 아담의 후손들은 내내 사탄의 생각이 친근해요. ㄱ사탄의 생각과 쉽게 동화가 됩니다.

왜? 마음가짐이 사탄의 마음가짐과 똑같은 것을 전수받았기 때문에 그래요. 사탄의 마음을 가지고 어딜 가요? 천국을 가요? 누구 맘대로요? 사탄의 마음이 있는 것도 모르고 ‘나는 살아야 돼. 무조건 천당 가야 돼. 남은 제키고 내가 가야 돼. 그게 승리야. 그게 남는 장사야.’ 오로지 자기생각밖에 없어요.

어제 강남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한국교회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은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교회 예배당 지어놓고 외부에 이야기하기를, “구원받고 싶지요? 우리교회 오세요. 죽어서 천국가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교회가 천국가게 해주겠습니다.” 이런 제안자체가 악마가 제안하는 거예요.

우리들은 천국갈 수 없습니다, 라는 말을 하는 교회가 없어요. 창세기 3장을 이야기하는 교회가 없다니까요. 우리는 천국 못가는 존재입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교회가 없어요. 있겠지요. 그런 교회가 있으면 나는 아주 감사하지요. 아직까지 그런 교회는 나는 못 봤어요. 그저 사람 구원 못시켜서 환장을 했어요.

꼭 맛 집 같아요. sbs, kbs에 나오는 맛 집 같아요. 돈만 주면 광고하는 것 있잖아요. “와, 맛있다.”하는 것처럼. 야곱이 밤까지 도착한 것은 야곱에게는 내일이라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겁니다. 지금 에서하고의 일을 처리 못하면 내일을 보장받지 못하지요. 그런데 그 내일을 보장받지 못하고 내일에 뭐가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금 회개를 해야 될 일을 하나님께서 잘 형성시켜 놓았을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현장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내일 문제는 문제꺼리도 되지 않아요. 네가 건방지게 내일까지 왜 생각하느냐. 지금 너나 걱정하세요, 너나! 네가 문제 있다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복의 근원이라는 것은 정답입니다. 그러면 어디서 이것이 문제가 되느냐?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야곱은 하나님이 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니까 사다리가 꿈에 내려와서 천사가 왔다 갔다 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이 둘로 분열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없어요. 복의 근원이 해야 될 일은 분열입니다. 야곱은 철저하게 처음도 야곱이고 나중도 야곱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순진한 자기생각이에요. 야곱은 순수한 나, 순수한 나를 발굴하고 싶어 했고 순수한 나를 자기가 알고 싶어 했습니다.

에서를 속여서 이길 때에도 이 순수한 야곱이 순수한 에서를 이겼다고 생각한 거예요. 내가 순수하니까 하나님이 승리를 나에게 줬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야곱은 야곱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서 야곱이라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복의 근원은, 진짜 하나님의 모습은 그 야곱에게 주어진 언약이 둘로 쪼개지면서 그 사이에서 진짜 하나님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아담 자체에 하나님의 형상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악마가 왜 인간을 노리느냐 하면, 하나님의 뜻은 아담에게 소복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담의 마음을 빼앗으면 곧 하나님의 마음의 모든 것을 훼방 놓는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사탄이 선악과 따먹으라고 한 겁니다.

계속 아담을 노리는 거예요. 하나님은 저 하늘에 인간이 상상한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두 조각 날 때 그 틈새에서 나와요. 두 조각 날 때 인간은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사탄과 한통속이 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과 싸울 때 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은 복의 근원이거든요, 복이 계속 나오려면 야곱과 씨름할 때 어떤 시점에서 야곱의 환도뼈를 치느냐? 처음부터 야곱을 꺾어버리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처음부터 야곱은 통째로 하나님 앞에 진 사람이 되어버려요. 하나님은 기다렸습니다. 야곱의 힘이 하나님을 이길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기고 난 뒤에 쳐버렸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야곱에게, 복의 근원에게 뭐가 남는가 하면, 하나님이 야곱에게 “너는 나를 이기는 존재가 되라.”는 겁니다. 이기는 존재가 될 때, 그 하나님과 만나서 죽고 다시 살게 될 때는 어떤 이름을 부여받느냐 하면, 하나님도 이기고 인간도 이긴, 모든 것을 이겨버린 그 이름은 바로 야곱의 이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야곱을 통해서 넣어주셨던, 야곱 안에 계셨던 진짜 하나님의 기능과 역할로 하나님의 본 모습이 드러나는 겁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죽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 다시 말해서 아담이 사탄과 한통속이 되고난 뒤에 인간세계에서 통용되는 모든 개념이 유발하는 하나님, 삼위일체, 예수, 성령, 이 모든 것은 전부 다 반대로 뒤집어야 돼요. “예수 믿으면 영생 얻습니다.”라는 말을 뭘 로 뒤집는가 하면, “예수를 믿으나 안 믿으나 우리는 지옥 갑니다.”라고 뒤집어질 때 그 사람은 구원받는 사람인데 왜 그런가?

“내가 옛날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예수 믿으면 천당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악마가 나에게 알려준 구원의 방법이었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허물로 벗겨 내놓습니다. 구원은 옛날식으로 하면 내 쪽에서 뭘 알고, 뭘 믿고, 해서 구원받는데 구원은 그렇게 받는 것이 아니고 도저히 들어갈 수 없도록 완전히 차단되고 막혀 있는 그 길을 오직 예수님의 자기 피의 능력으로만 구원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이 생명이에요.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생명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구원의 능력이에요. 사도바울은 부활이 복음이 아니고 십자가가 복음이에요. 아까 이야기했듯이 모든 인간은 야곱처럼 자기는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마귀가 인간을 계속 그런 식으로 세뇌시킨 거예요. 교회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남에게 지면 안 됩니다. 이겨야 됩니다.” 이겨야 됩니다, 라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아담으로부터 온 육, 그 ‘이겨야 됩니다.’가 결국 예수님을 죽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누가복음 5장 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났는데 베드로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져보라고 했을 때 그렇게 해서 많이 잡혔어요. 좋아해야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재주가 보통이 아니다.’ 그런데 고기가 많이 잡히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베드로의 직업이 고기 잡는 일이기 때문에 고기가 많이 잡혔다는 것은 지금껏 살아온 것보다 더 풍요하게 살 수 있다, 산다, 그 ‘산다.’에 유리한 조건을 저 예수라는 분이 나에게 줬다, 그래서 신이 나야 되는데 베드로가 뭐라고 했느냐?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이 떠났습니까? 오늘 야곱이 하나님 만난 것과 똑같은 겁니다. 야곱은 구원되지를 못합니다. 야곱이 둘로 쪼개지면서 야곱은 구원되지 못하고 죽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야곱의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야곱 속에서 이스라엘을 만들어서 끄집어내는데 야곱이 그냥 재료소서 쓰일 뿐이에요.

이것이 천국 가는 백성에 대한 주님의 활용법입니다. 여러분, 보일러공이 필요할 때는 보일러 고장 날 때뿐이에요. 보일러공이 대통령 하겠다고 나서면 물론 나설 수는 있지만 사람들의 표 별로 안갑니다. 보일러나 잘 고치라는 거지요. 구원받겠다, 이것은 주님 앞에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아무짝도 소용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야곱을 사랑하사 복의 근원으로 지정해 버렸어요. 선택해 버린 그 때부터 야곱은 자기가 복의 근원이니까 이제 으스대기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내편이다. 돌아오면 십일조 드리겠습니다. 와, 사다리 기적으로 천사가 나를 반기네. 그렇다면 앞으로 주께서 도와주시겠지.’ 전부 다 ‘내가 잘된다. 내가 복의 근원이다. 그러니까 내가 형을 이기는 것이 마땅하다. 형이 쳐들어오면 한 판 붙는다.’ 그 모든 것이 무조건 나는 살아야지, 나는 성공해야 되고 지면 안 된다는 그 생각의 절정이 하나님과 가장 근접해서 싸웠던 인물이 되고 말았어요.

진짜 하나님과 싸우면서 야곱이 보여주는 것은 그래서 인간은 가짜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가짜고 그 가짜에서 상상된 모든 하나님은 다 가짜고. 그런데 어느 인간이 자기가 가짜인 것을 알겠습니까? 인간의 이기주의, 나는 죽으면 안 돼, 나는 무조건 살아야 돼, 라는 것이 극단적으로 높아져 있을 때 그 앞에서 십자가가 비로소 유의미, 의미가 있는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하나님이란 택한 백성, 언약의 백성이 쪼개지면서 비로소 나타나요. 그러면 마지막 택한 백성이 누구냐? 언약의 주인공이 누구냐? 새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뭐냐? 예수님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십자가 지실 때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외친 것이 있어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마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예수님 자신의 능력으로도 막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막혀 있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이미 살아 있으나 죽은 자에요. 어떤 인간도 천국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언약대로 죄도 없는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희생 제물로 삼으셔서 예수님의 공로에서 나온 그 피의 능력으로 차단막을 넘어서서 하나님 쪽에서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공로를 선물로 줘서 십자가의 공로로 건지니까 성도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할 수밖에 없어요.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육의 모습은 뭐냐? 그것은 바로 베드로가 한 것처럼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왜? 고기 잡아 주니까 신나서 주께 감사헌금 드리지?” 아니에요. 어느 누굴 만나도 비로소 내가 죄인인 것을 몰랐는데 예수님만나고서 죄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한 고백이 나중에 십자가 이후까지 실효성이 있으면 그 다음부터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인간은 내 쪽에서 하는 어떤 것도 내 구원에 보탬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게 바로 언약입니다. 언약의 중심에 누가 있느냐? 야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져줌으로 말미암아, 패배함으로 말미암아 복 받으려고 했던 야곱은 죽고 그 안에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의 모든 하나님의 진짜 숨어 있는 뜻을, 이스라엘 민족과 야곱의 후손들 사이에 하나님은 동행하는 모습으로 역사적으로 자기 뜻을 펼치게 됩니다.

그 이스라엘의 끝은 어디냐? 하나님이 이 땅에서 죽었다는 것, 죽으신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도 살고 주님도 살고, 그런 식으로 생각했던 저희들, 양립이 불가능한 것을 그동안 우리가 받아들이지를 못했습니다. 나는 살아도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서도 구원받지 못함을 왜 우리가 진즉 몰랐습니까? 우리가 구원되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 새로운 피조물 됨을, 그 피조물을 거지같은 우리 육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끄집어내는 주님의 약속의 결과물로 천국 간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이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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