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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4 21:10:05 조회 : 604         
   야곱의 대처180214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야곱의 대처(창세기 32:3-6)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FWT0oXiI3g4, Hit:226
 우리교회 18-02-14 21:59 
야곱의 대처

2018년 2월 14일                 본문 말씀; 창세기 32:3-6

(32:3)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32:4)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32:5)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

(32:6)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야곱과 에서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야곱에게는 전쟁을 마무리 지을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편이기 때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만나려 온 큰 무리의 천사를 야곱은 만났습니다. 에서와의 축복 쟁탈전에서 자기를 도와 전쟁을 치를 천사라고 여겼습니다.

창세기 27:41에서 에서의 결심은 확고합니다. 동생을 죽여버리겠다는 겁니다. 이점을 야곱도 너무 잘 압니다. 그래서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형의 분노로부터 떼놓아서 오빠 라반의 동네로 피신시킨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야곱이 에서와 왜 싸워야 하는지 이유를 모릅니다.

그리고 쌍방간에 서로 만나지 않으면 그것으로 다툼은 해소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마무리는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지시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고향을 어디입니까? 야곱에게는 고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에서와 여전히 다투고 있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야곱의 고향은 창세기 25:26에 나옵니다.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싸움이란 둘(2)이 있을 때나 성립합니다.

야곱의 진정한 고향은 그 둘(2)이 성립되기 이전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즉 2가 나오게 되는 근원적 1의 자리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1의 자리는 야곱 혼자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출산할 때, 에서와 붙어서 싸운 채 나왔기 때문입니다. 즉 싸움이라는 1이 쌍둥이란 2를 낳은 겁니다.

진정한 야곱의 고향은 에서와 싸우기 이전에 무슨 내력이 있었는지를 말해줄 그 지점입니다. 야곱은 그 지점을 영적 세계 곧 천사들이 있는 그 세계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28:12에서, 야곱은 꿈에 하늘의 천사들이 자기를 향하여 사다리를 놓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즉 야곱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의 영적 선도적 직위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형 에서에게는 이런 경험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에서와의 싸움에서 야곱은 기어이 이겨낼 것이라고 믿고 먼저 에돔지역에 살고 있는 형에게 전갈을 보내었습니다. 내가 준 선물받고 좋게 화해하자고 말입니다.

하지만 형이 400명을 이끌고 직접 야곱 자신을 만나려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즉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이 언명을 야곱쪽이 승리하는 식으로 마무리 지을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겁니다. 아예 에서쪽으로 야곱을 작살낼려고 덤벼드는 겁니다.

야곱의 선물 같은 것은 안중에서 없습니다. 야곱은 여기서 위기를 느낍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시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야곱이 이런 생각을 갖는 근거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야곱이 챙긴 자식 11명과 재산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늘나라에 합당하게 제공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즉 야곱은 형과는 달리 자신이 복의 근원으로서의 합당하게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이미 자신을 승자로 자부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고향 돌아가기’란 야곱 자신에게 승자의 자격으로 돌아가는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야곱이 오해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야곱의 의식이나 에서의 의식이나 하나님 보시기에 둘 다 육적이라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육적인 인간이 영적 존재의 관계에서 필히 ‘죽음’이라는 단절성이 끼어 있었던 겁니다. ‘죽음’이란 아브라함 언약으로부터 내려오는 언약 실현의 원칙입니다. 즉 아브라함 언약의 핵심은 아들 이삭을 죽여서 하나님께서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이 원리는 언약 안에서 결코 취소되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형 에서와 출생 때부터 싸웠고 그 싸움의 결과에서 승자에게 복이 주어지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창세기 25:23에 보면, 야곱과 에서가 출생했을 때의 하늘의 계시가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그래서 이 계시에 부합되는 인물은 야곱과 에서 이 둘 뿐인고로 야곱 자신에게 일어나 일들을 통해서 계시가 성취되는 줄로 알았던 겁니다. 당연히 ‘죽음’이란 단절성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던 겁니다. 실은 야곱에게 찾아온 하늘의 천사는 야곱을 복의 근원으로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에서를 의식하고 싸운다고 미처 알지 못한 제 3의 인물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과 만나는 바로 그곳이 육의 야곱이 찾아가야 될 고향입니다. 즉 귀향해야 될 고향이란 ‘야곱의 고향’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고향’입니다. 육의 사람으로는 도저히 찾아갈 수 없는 곳입니다.

이는 곧 야곱에게는 ‘없는 곳’이고 ‘죽음으로 막혀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되면 쌍둥이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들을 상대로 싸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계시였던 겁니다. 즉 천사들은 지상에 오실 그 하나님을 겨냥해서 오르락내리락 한 겁니다. 요한복음 1:51에 보면,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지상방문은 모든 인간과 싸움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요, 이로 인해 모든 인간들의 평소의 생활이나 생각이나 행위는 전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본인들이 갖고 있는 ‘신의 축복’이라는 것도 실은 육적 소유에 불과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죽음을 기정사실화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과의 승부는 무의미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죽어 마땅함을 안다는 것이 곧 복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8-02-15 09:43 
127강-창 32장 3-6절(야곱의 대처)1802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2장 3-6절입니다. 구약성경 49페이지입니다.

창 32:3-6

“야곱이 세일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사자들을 자기보다 앞서 보내며 그들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너희는 이같이 내 주 에서에게 고하라 주의 종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가 있사오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고하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더라 하라 하였더니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가로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야곱과 에서의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싸운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상 뭔가 해결될 것이 있습니다. 납득이 안 되는 요소가 있습니다. 개체라 하는 것은 이 몸 따로 있고 저 몸 따로 있어요. 물리적으로 손잡고 다니는 것은 아니잖아요. 상대방이 저쪽에서 나에게 욕을 한다 할지라도 욕은 피부에 와 닿는 완력 같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냥 음파만 들릴 뿐이지요. 그런데 시비걸 때 욕부터 먼저 나오고 나중에는 주먹이 동원되고 나라 같으면 미사일까지 동원되어서 서로 싸울 때에 우리가 납득이 안 되는 것은,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어떻게 무엇으로 엮여 있는가가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따로 놀거든요. 식사를 해도 네 밥그릇 따로 있고 내 밥그릇이 따로 있고, 숟가락 따로 있고 칫솔 따로 있고. 그걸 개체라 합니다. 개체는 서로 떨어져 있어요. 따로 떨어져 있기에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너는 네 인생 살고 나는 내 인생 살면 되는 겁니다. 저쪽이 어떻게 살든 의식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의식이 안되던가요? 누가 평창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면 기분 좋고 예선탈락하면 기분 별로 안좋고.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인생인데 왜 기분 좋고 안 좋고, 내가 왜 영향을 받는가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과학은 이러한 인간의 기분, 근원적인 감정, 마음, 심정에 전혀 어떤 해답도 제시될 수가 없습니다.

눈물 흘리는 이유는 소금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이 안 되거든요. 눈물 흘릴 때는 뭔가 슬프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현미경을 가지고 들여다본다고 슬픔이 보이는가.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 과학시대에 있어서 개체와 개체가 따로 살면 될 터인데 서로 언성이 높아지고 서로 미워하면서도 엮이고 엮이면서도 “이러러면 헤어져”라는 말이 쉽게 나오고, 이런 이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원초적인, 근본적인, 개체와 개체사이에 어떤 것이 연관되어 있는가를 야곱과 에서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여기에 두 개의 사물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물은 가까이 놓여 있어도 서로 밀고 당기고 하지 않아요. 그런데 유독 인간은, 몸은 따로 있으면서도 왜 티격태격 하느냐 그 말이지요. 원초적으로 인간은 타인과의 어떤 관계 속에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개체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힘을 몰고 다닙니다. 힘이 있어요.

힘이라 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거부당하지요. 왜냐?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니까. 물리적 힘 외에는 과학에서는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지남철이라든지 물리적전기력, 약력, 강력, 중력, 전자기력, 이 다섯 가지 외에는 힘을 인정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 세상 살아가는 것은 전혀 그런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힘과 관계없이 다른 힘이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과학으로 보면 우리 몸은 60조개의 세포로 되어 있는 하나의 신체로 되어 있지만 그 신체를 세상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신체라고 하지 않습니다. 네 신체 내 신체라고 하지 않고 너는 ‘너’라고 하고 나는 ‘나’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나와 너, 나와 너는 다만 다른 신체가지고 표현을 다 할 수 없어요.

너는 너의 주체, 나는 나의 주체라고 하는 겁니다. 물리적 힘에서 너와 나의 주체가 생기는 것이 아니고 그 물리적 힘 말고 다른 힘에 의해서 너와 나가 구분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너 나하고 한판 붙을까? 네가 힘이 얼마나 세?” 이랬을 때 힘이 세다는 말은 역기를 몇 킬로 들고 그런 것이 아니에요. 내가 아는 사람이 청와대에 있다는 그런 거라는 말이지요.

우리 집안이 빵빵하다. 나는 말빨이 세다. 그런 힘이거든요. 그런 힘이 어떻게 과학적으로 포착이 되겠어요. 오늘 본문에서 야곱과 에서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싸움이 끝나지 않음에서 우리는 무엇을 파악해야 되느냐 하면, 야곱이라는 그 개체와 에서라는 그 개체사이에 무엇이 찌릿찌릿 통하고 있는가를 파악해야 돼요.

남의 일 파악해서 뭐할거냐, 이렇게 퉁명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게 남의 일 같으면 성경 볼 필요도 없겠지요. 남의 일이 아닙니다. 성경 창세기 25장 23절에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삭의 부인 리브가가 불임여성으로 아기를 못 낳는데 하나님의 특별한 때가 되매 아기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이 아기를 원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기를 주는 것과 차원이 달라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 집안 자식 대를 잇기 위해서 아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 언약의 가족에서 자식을 주는 것은 그 자식을 통해서 언약의 내막, 내용을 담기 위한 거예요.

그러면 언약의 내용을 담는 그것과 사적으로 육적인 자식을 낳는 것은 대립관계에 있어요. 이런 것이 어려운 거예요. 보통 자식을 달라 할 때는 우리 집안 잘 되기 위해서 자식을 달라, 나는 죽더라도 내 자식을 통해서 우리 집안은 계속 살리기 위해서, 라고 자식을 달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이 준 자식은 그런 사적인, 개인적인 소망, 여망과 전혀 관계없이, 나는 이 지상에 하나님 내 뜻을 펼치겠다는 취지에서 던져주는 내용의 자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은, 언약적으로 기도해야 된다는 말이지 사적인 희망과 여망을 담아서 뒤에다 예수 이름을 붙일 수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 이름은 언약적 이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된 인물이 예수기 때문에 안에 있는 기도내용도 언약에 관한 내용일 경우에만 뒤에 예수 이름이라는 것이 연결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내 사적인 욕구와 욕망을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짓밟아 주옵소서. 내 몸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발휘되어야지 내 개인적인 욕구와 욕망이 발휘되지 않도록 주께서 친히 역사해 주옵소서.” 이게 기도 아닙니까?

예수 이름이라 하는 것은 소망하는 자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소망입니다, 주여.”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소망은 내 소망을 갖다 붙여놓고 “하나님, 이것이 예수님의 소망입니다.” 이렇게 해버리면 그것은 반칙이 되는 겁니다. 네 멋대로 하나님의 언약도 아닌 것을 가지고 어디에 그 거룩한 이름을 뒤에 붙여요.

차라리 “내 뜻대로 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렇게 해야지요. 내 뜻대로 되지 않게 하옵소서. 내 뜻대로 될 것 같으면 하나님의 언약가족에서 불임이라는 것이 필요가 없어요. “아기 낳았냐? 그래, 아기 낳았으면 내가 언약 담아줄게.” 이런 식으로 언약이 흘러갈 것 같으면 제가 이야기를 이렇게 복잡하게 할 필요가 없어요.

이게 불임이라는 말이지요. 잉태치 못한 자만 천국 가거든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에요. 잉태치 못한 자만 천국가요. “쉽게 말해서 이 땅에 태어났느냐? 그러면 지옥이야.” 이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요한복음 3장에서 간단하게 이야기하지요. 육으로 난 것은 지옥이고 영으로 난 것은 천국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하는데 구약에서는 이것을 잉태치 못한 자, 불임이라는 경계, 단절을 먼저 설정해놓고 그 불임은 이 지상에서 인간들이 뚫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불임이라 설정해놓고 “너는 자식 없어. 자식 못낳아.” 해놓고, 육으로 올라오는 것을 차단시켜 놓고 그 다음에 불임을 뚫는 것은 불임경계선의 그 위쪽, 영적세계, 주님의 세계에서 불임이라는 막을 뚫고 이 쪽 지상에 자식을 낳아버리면 그 자식에 담겨 있는 언약의 내용은 한 가정의 사적인 희망, 여망과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 펼쳐지는 겁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보면서 이삭가정, 야곱가정, 아브라함가정을 보면서 ‘그렇고 그런 일반가정이겠지’ 한다면 네 가정은 그렇게 살고. 다시 이야기할게요. 개체라 하는 것은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언약이라는 것이 그렇게 되지를 않습니다. 두 국민이 태중에 있고 두 민족이 나누인다는 말은 이 두 민족이, 하나는 복을 받는 민족이고 또 하나는 저주받아야 될 민족이에요.

따라서 리브가를 통해서 낳은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는 모든 인류를 두 패로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중립지역은 없어요. 중간지역도 없고 중립지역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저주 아니면 복, 복 아니면 저주, 모든 인류는 두 조각난다는 겁니다. 뱀의 후손 아니면 여자의 후손, 여자의 후손 아니면 뱀의 후손, 그거지요.

이렇게 되면 우리는 야곱의 가정이 사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 우리의 운명과 직결되는 이야기를 성경을 통해서 계속해서 펼치려 하고 있습니다. 그 언약이 어떻게 어떻게 전개되어서 어떤 사람은 천국으로 또 어떤 쪽은 지옥으로 완전히 구분되는 절차가 어떻게 되는가? 그 절차에 대해서 우리는 야곱에게 물어야 되지요.

왜? 언약을 우리보다 먼저 받은 사람이 야곱이기 때문에 야곱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을 우리가 봐야 되는 겁니다. 자, 아까 이야기했듯이 야곱과 에서, 에서와 야곱이 두 개체인데 두 개체사이는 따로따로 몸이 다르기에 서로 연결고리가 없는 것이 당연한데 왜 싸우는가, 그거예요. 연결고리가 없는데 마치 연결된 것처럼 왜 싸우냐 하는 겁니다.

연결 안되는 것이 아니라 연결이 되어 있어요. 창세기 25장 24절을 보게 되면,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동이가 있었는데”라고 해서 쌍둥이라도 따로 따로 개체가 나뉘어졌으면 신기할 것이 없는데 뭐라고 되어 있느냐? “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다고요. 그러면 이것은 숫자로는 분명히 2인데 이게 하나가 돼요. 에서와 야곱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서 2가 아니고 1, 하나가 되는 겁니다. 이게 뭘 의미하느냐? 나중에 둘이 성장해서 어른이 되어서 ‘너는 네 인생 나는 내 인생’ 되어서 따로 살면 되는데 이 쌍둥이가 붙들고 날 때부터 서로 싸웠어요.

그러면 천국 가는 사람과 지옥 가는 사람은, 너는 네 갈길 가고 나는 내 갈길 가라, 가 아니라 둘이 이 지상에서 죽어서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기 이 전까지 계속해서 끊임없이 싸우는 관계입니다. 죽기 살기로. 계속 싸우는 관계에요. 과학적으로 네 신체 따로 있고 내 신체 따로 있고, 너는 미국살고 나는 한국 살고 그래서 별 볼이 없다.

별 볼일 없는 게 아니에요. 미국 살던, 북극에 살던, 남극에 살던 서로 싸우는 관계로 엮이게 되어 있는 것이 원본이라는 말이에요. 원래 인간을 제대로 보려면 서로 엮여 있다는 것을 봐야 돼요. 서로 엮여 있다는 관계가 뭐냐? 바로 힘의 관계에요. 서로 다른 힘이 작용하는 것으로 봐야 돼요.

창세기 32장 이전에 창세기 31장, 30장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뭐라고 명령하느냐 하면, 네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창세기 27장 40절에 보면 거짓말을 해서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여서 야곱이 아버지의 유산을 다 빼돌리거든요. 엄마와 공모해서.

공모하고 난 뒤에 그것을 안 형이 뭐라고 다짐을 하느냐 하면, 창세기 27장 41절에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이렇게 했어요. 에서 입장에서 야곱은 뭐냐? 동생이 아니고 내가 살해해야 될, 내가 쳐죽어야 될 하나의 적이 되는 겁니다. 그 소리 듣고 엄마가 야곱을 빼돌려서 외삼촌 집에 피신을 시켜서 야곱이 피신했어요.

그래서 둘이 떨어져 있는 입장입니다. 둘이 계속 떨어져서 살면 서로 만나서 다툴 일도 없어요. 그런데 그 뒤에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해요. 여기서 오늘 설교에서 첫 번째 마주치는 어려운 대목입니다. 야곱의 고향이 어디냐 하는 거예요. 제가 결론적으로 이야기할게요. 야곱의 고향은 없어요.

야곱이 왜 고향이 없느냐 하면, 야곱이 현재 살아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고향이 없어요. 야곱이 살아 있는 인간의 고향 같으면 자기의 출생지로 돌아가거든요. 그런데 그 출생지로 돌아가려면 혼자서 돌아가면 안돼요. 왜? 태어날 때 붙잡고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데 지금 형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가까이 할 수가 없습니다.

둘 중 하나는 죽든지 살든지 해야 돼요. 그런데 하나를 죽이면 안 됩니다. 둘이 같이 붙들고 있어야 되는데 하나가 죽어버리면 하나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영원히 고향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야곱은 자기 고향이 없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고향이 있다고 자부하게 됩니다. 고향이 있다고 자부하는데 그 고향이 어디냐? 창세기 32장 1절입니다.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하나님의 군대, 천사지요. 지난 시절에 야곱이 형을 피해서 도망치면서 밤중에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점점 북쪽으로 올라갑니다. 창세기 28장 11절, 12절 이야기입니다. 사닥다리가 내려오면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했지요. 야곱은 삼촌 집에 가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아내 둘 얻고 자식 열 한명 얻고 막대한 양과 염소를 얻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쓰신 반칙이에요. 그냥 해서는 양과 소가 늘어나지 않습니다. 양과 소가 새끼 밸 때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서 보여줘서 얼룩진 것이나 점 있는 것으로 태어나게 하는 이것은 하나님이 가르쳐 준 것이지 유전학을 연구한다든지 목축노하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거든요.

야곱이 생각하는 고향은 어디냐 하면, 바로 사다리가 내려왔던 그곳이에요. 벧엘인데 벧엘에서 머물면 안돼요. 벧엘에서 더 올라가야 돼요. 벧엘에서 수직적으로 올라가야 돼요. 거기가 어디냐 하면, 천사들이 나를 마중 나오는 거예요. 영적세계입니다.

야곱은 배후에서 누가 도와주느냐 하면, 영적세계가 자기를 언약완성의 지점, 거룩한 장소로 생각해서 사닥다리가 내려오고 그 사닥다리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자기에게 집중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그대로 그것을 인용했습니다. 인자의 머리위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야곱은 생각했어요. 하나님의 모든 언약은 자기한테 집중해서 그대로 응집되듯이, 질주하듯이 자기를 향하여 오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는 영적세계를 몰고 다니는 선두주자가 되는 겁니다. 이 지상의 복의 근원은 오직 야곱밖에 없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는 모든 천사들의 활동은 이 지상의 복과 저주를 구분하는데 일이 집중되기 때문에 결국 천사는 어디를 경유해야 되는가?

나를 경유해서 저쪽의 에서의 패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런 조치를 취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 32장 1절, 2절의 이야기거든요. 그러고 난 뒤에 오늘 본문 3절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자신감을 얻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준다. 많은 재산과 자식뿐만이 아니고 이제는 에서와의 싸움도 끝장내고 마무리 지을 그 시점에 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에서는 그 당시 벧엘에 사는 것이 아니고 에돔이라고 해서 유다보다 더 남쪽에 있어요. 일부로 메신저를 보내서 형과의 전쟁을 끝내겠다는 겁니다. 창세기 25장에 보게 되면,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계시를 받거든요. 23절에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하나인데 둘로 나눠지는 거예요. 그리고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큰 자는 에서가 되고 어린자는 야곱이 되니까 하나님의 계시로 끝나는지 알았더니만 사다리 내려왔지요. 마하나님, 천사의 떼를 자기를 집중해서 만나게 되었지요. 그 천사들이 하는 일이 뭐냐 하면, 마하나님이니까 하나님의 군대잖아요.

군대는 전쟁하는 일이란 말이지요. 무엇을 위한 전쟁이고 무엇을 위한 전투의지입니까? 야곱은 천사들마저 내편에 서서 전쟁을 한다. 천사들이 갖고 있는 전투의지, 전쟁의지를 야곱이 그대로 인수인계 받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엄마에게 준 이 모든 계시가, 내가 복의 근원되는 그 과정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속여서라도 빼앗는다는 그 것조차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있고, 내 인생의 모든 진행과정에서 하나님이 안 도와준 게 없어요. 다 도와줬어요.

라반이라는, 자기보다 더 얍삽한 인간으로부터 모든 것을 낚아채고, 두 아내를 통해서 자식까지 낳았으니까. 전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좍좍 밀어주는 거예요. 그러면 에서와의 전쟁을 마무리 지을 때 어떻게 마무리 짓는가? 서열화 시키는 겁니다. 아까 제가 개체는 그냥 개체가 아니고 힘을 모으고 다닌다고요.

내가 가진 영적 힘이 저 에서의 육적 힘을 이겨서 나는 위에 있고 저 형은 아래 있다, 라는 이것을 고정화시키는 것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원래 뜻이다.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이렇게 해석한 겁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마무리 되어서 평온하게, 복의 근원답게 터치 받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이 내 자손을 통해서 팽창하도록 하나님의 시기가 된 모양이다. 안정권에 제대로 들어온 모양이다.’라고 여겼던 겁니다.

야곱의 오해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났고, 사다리가 내려왔고, 그래서 하나님은 내 편이라고요? 야곱의 이러한 오해는 어디서 생겼느냐? 하나님의 모든 계시의 마무리는 에서와 야곱 둘이 붙들고 싸우는 가운데서 그대로 출산했어요. 그러면, 야곱이 고향에 돌아가려면 에서와 만나되 야곱이 에서를 이기는 것이 아니고 야곱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있어서 에서의 위상을 경유해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돼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 바칠 때 이삭을 어떻게 바쳤느냐 하면, 죽여서 바쳤어요. 고향은, 하나님의 영적세계는 천사와 만난다고 해서 그 천사가 내 편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영적세계와 육적세계는 무엇에 가로막혀 있느냐 하면, 죽음이 가로막혀 있어요. 지금 야곱은 죽음을 빼고 계산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니까 이 몸, 지금의 자아, 주체, 이걸 그대로 하나님께서 받아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죽음이 여기에 게재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팍팍 도와주니까. 점점 더 자기는 죽음으로부터 멀어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제 조금만 있으면 생명 그 자체가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들이 하는 모든 일은 죽음이 이끄는 행동들이에요.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들은 그것이 어디로 달려가게 하느냐 하면, 인간을 죽이는 하나님의 작업이었던 겁니다.

죽음 앞에서 야곱도 에서도 전부 다 하나로 엮여 있어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일 때 이삭은 비로소 언약의 사람이 되는 것처럼 그 절차를 그대로 밟아서 야곱도 에서도 이 땅에서 죽어야 되는 거예요. 선하다고 살고 나쁜 짓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큰 일을 행하든 작은 일을 행하든,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든 요란스럽게 살든, 모든 인간의 움직임 하나하는 죽음으로 가고 있는 진행형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야곱은, 자기는 영적인 존재라고, 왜 영적인 존재냐 하면 하나님이 뒷받침하는 힘이라고 보고, 오늘 본문에 보면 4백 명을 데리고 오는데 죽이겠다는 거지요. 10절 보면 지금 야곱이 아주 바짝 떨고 있어요. 에돔에 자기가 찾아가겠다고 야곱이 그랬는데 에서는 그 소리 듣고 “찾아올 것 없다. 내가 마중 나오마.”

약간 불길해요. 그것도 혼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4백 명을 끌고 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뒤에 보면 당도리를 합니다. 두 패로 나눠서 이걸 치면 나머지 이쪽은 살리자, 이런 거예요. 야곱이 에서에 대처하는 그 방식이 에서가 야곱을 치는 방식과 전혀 다를 바가 없어요. 똑같아요. 하나님이 도와준다고요? 배후에서 하나님이 밀어준다고요?

어쨌든 저쨌든 간에 힘의 우열, 누가 힘이 센가로 승패 봅시다, 라는 사고방식은 죽어 마땅한 사고방식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 에서도 야곱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야곱에게 천사가 찾아오느냐? 반드시 하나님의 언약은 오해를 거쳐서 하나님의 언약에 도달되게 되어 있어요. 곡해와 오해를 통해서.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둘이 싸울 때부터 둘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과 인간끼리 싸우는 거거든요. 둘 다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끼리 싸우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여, 제 편 들어주세요. 제가 헌금 많이 하고, 제가 봉사 많이 하고 헌신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제 편 들어주고 쟤는 지금 절에 가니까 저건 내 앞에서 작살나야 마땅합니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자기위주의 요소들이 있다는 말이지요.

교회 가니까 천당 갈 거고 절에 가니까 지옥 간다. 이 사고방식이 지옥 가는 사고방식이에요. 이게 바로 지옥 가는 사고방식입니다. 물론 교회는 그거 가지고 장사나 하겠지만. 야곱은 철저하게 야곱과 에서 그 둘이 싸움을 붙음으로서 ‘싸우는 둘 다 똑같아.’라는 사태, 내용을 둘이 붙어서 연출해줘야 돼요. 그게 지상의 언약의 구체화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행함으로 그 언약을 자력을 뚫을 수 있는 인간은 애초부터 없어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천사가 내려왔을 때 싸움하는 천사 맞아요. 마하나임 맞습니다. 그러나 그 전쟁은 야곱 편에 서서 에서를 치는 전쟁이 아니에요.

그리고 창세기 25장 23절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서열화 시키는 겁니다. 갑과 을. 강한 민족과 상대보다 약한 민족. 그 다음에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했을 때 이 모든 내용은 야곱에게도 해당이 안 되고 에서한테도 물론 해당이 안돼요. 둘 다 해당이 안돼요.

그러면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어요. 없다면 이 계시는 헛방이 되지 않느냐? 둘 다 다 같이 마땅함을 아는 현장에서 비로소 이 계시가 그 죽음의 자리에서 새롭게 등장되는 겁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창세기 25장에 나오는 이 큰 자, 여기에 나오는 복 받는 근원은 누구냐?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은 야곱이 죽기 전에는 절대로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나타나는 조건이 반드시 있어요. 그것은 야곱이 죽어야 되는 거예요. 야곱이 죽어야 되는데 야곱이 죽을 때 이유가 있어야 돼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다리 내려주고 천사 만나게 해주고 복 줘서 자식이 번창 하도록 했는데 이것은 야곱의 개인적 죽음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열 한 자식 다 죽어야 되고 그 많은 재산 다 날라 가야 돼요. 그 많은 자식이 복이 아니고 열 한 자식이 복이 아니에요. 복이 아니지만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많은 재산이 복이 되고 그 자식이 복이 돼요.

이것은, 단절을 경유해야 된다는 거예요. 십자가를 걸림돌이라고 하는데 단절을 넘어서는 것, 극복하는 것은 결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아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 자체가 잘못됐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야곱이나 에서가 인간이 그것을 극복하는 당사자, 주인공이 되어서 야곱이나 에서나 둘 다 싸우고 달려드는 입장에서 있어요.

반발하는 입장이고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고 반항하는 입장에 있지요. 인간은, 같은 인간인 저쪽만 이기면 나는 승자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사고방식이 패자도 마찬가지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둘이 붙어서 싸울 때는 둘 다 하나님의 복과 상관이 없기는 맨 마찬가지에요. 자, 야곱은 에서와의 전쟁을 끝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끝내는 방법은 야곱이 이기고 에서가 져서 끝내는 것이 아니고 둘 다 패자로 만들어버려요. 둘 다 죽임으로서 승부라는 것이 의미가 없게 만들어버려요. 둘 다 죽임으로써. “한평생 살다가 그래, 죽어라. 살아가면서 네가 기도한 것 아무 의미 없어. 헌금한 것 의미 없어.” 그냥 네가 하는 그 행위 하나하나, 교회 와서 하는 그것이 모아모아져서 너로 하여금 ‘너는 죽어 마땅함’으로 응집이 되고 통합이 되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하나의 오물통, 쓰레기통이에요. 쓰레기통에 평생 살면서, 90까지 살면서 계속 쓰레기가 쌓이는 거예요. 쓰레기에서 복 달라는 근거는 전혀 마련되지 않습니다. 에서한테는 이런 경험이 없고 야곱한테는 하나님의 사자가 직접 야곱과 싸우지요. 야곱은 정작 에서하고 싸우는 것 신경 쓰면 안 되고 야곱이 정말 싸워야 할 그 대상자가 야곱에게 나타난 그 자체가 야곱의 복이에요.

내가 하나님의 적이 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 이게 에서가 받을 수 없는 진짜 복을 받은 겁니다. ‘내가 이 정도로 하나님의 원수였구나. 하나님이 내편 이라고 여기고 죽으면 천당 갈 거라는 이 사고방식이 이게 바로 육적이고 하나님에 대해서 다른 하나님을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결론에 도달했구나.’

그런데 이것을 깨닫게 된 것은 뭐냐? 이게 바로, 네가 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야곱아, 네가 아니고 네 속에 있는, 잠재되어 있는 언약적, 영적인물, 이스라엘이 쓰레기통인 네 안에 들어 있기에 그 이스라엘을 끄집어내는 방편으로 껍데기를 쳐나가는 거예요. 조각 할 때 네모난 자연석으로 시작하지요.

자연석 속에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끄집어낼 때 어떻게 합니까? 조각가가 바깥에 있는 것을 쳐내잖아요. 우리는 쳐내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방식을 사용한다 그 말입니다. 쳐 낼 때 뭘 쳐내는가? 육적인 것을 쳐내기 때문에 육적인 것을 쳐내는 작업에 야곱이 동원된 거예요. 하나님이 심부름꾼으로 거기에 참여된 그 자체가 야곱으로서는 정말 천하가 얻을 수 없는 큰 복을 받은 겁니다.

“주여, 저를 직접 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야곱을 쳐주시고 이스라엘을 끄집어내 주시니 이것이 바로 주님의 구원 작업입니다.” 그러면 그 사다리에 왔던 천사, 마하나임은 누구 편에 서는가? 야곱편이 아니고 에서편도 아니고 바로 야곱 속에 있는 어떤 잠재적인, 진짜 언약을 완성하실 그 분, 그 분을 겨냥해서 천사들의 사다리가 내려오는 겁니다.

아까 제가 요한복음 1장을 언급했지요. 51절에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야곱이 아니고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러면 야곱은 구원받습니까? 구원받지요.

왜? 야곱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야곱의 하나님. 야곱 속에 들어 있었던, 그 때 야곱도 몰랐던, 속에 들어 있었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고 아브라함 속에 들어 있었던 하나님, 이삭 속에 들어 있었던 하나님, 이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자력으로 천국 오지 못하도록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기 때문에 없음, 죽음을 칸막이로 쳐가지고 칸막이가 있음을 나중에 야곱은 알아요.

얍복강에서 천사를 만날 때. 그 전까지는 모르지요. 모르니까 마음껏 까불어요. 촐랑대고. 하나님은 내편이라고. 저 형만 이기면 이 재산과 자식은 내 것이 된다고. 그거 야곱 소유 아니고 이스라엘 소유였습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모든 행동은 죽기 위해서 살아가는데 우리는 다른 사람하고 다 같이, 똑같이 죽는데, 죽기는 다 죄 값으로 죽지만 그 죽음이 생명과 연관되어서 있는 죽음이에요.

생명과 연관된 죽음이 야곱 쪽이고 생명과 관련 없이 저주와 관련된 죽음은 에서 쪽이 됩니다. 포인트는 이거예요. 이 땅에 살면서 십자가를 만났는지, 진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만났는지 그 여부로 결정 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상에 오신 하나님의 활동이 주님의 사적인 활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택하신 백성을 데려가고 건져가는 활동인줄 압니다. 그 원리와 원칙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배웠사오니 날마다 쓰레기 같은 우리를 쳐내시는 그것이 바로, 죽어 마땅함을 깨닫게 하시는 그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증거라고 저희들이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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