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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7 20:38:22 조회 : 286         
   천사와의 만남180207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천사와의 만남(창세기 32:1-2)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Q3HEy9HlVsA, Hit:165
 이근호 18-02-07 21:15 
천사와의 만남

2018년 2월 7일                  본문 말씀: 창세기 32:1-2

(32:1)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32: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야곱의 고향은 야곱만의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천사들의 주둔지였습니다. 천사들은 전쟁하는 기계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움직입니다. 이 말은 곧 천사의 기능 속에서 본래의 하나님의 뜻이 공개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군대’를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난다는 것은, 야곱에게나 천사에게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분명 ‘복의 근원’입니다. 따라서 야곱은 자신의 존재 의의를 ‘복의 근원’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자기 홀로 있을 때에도 ‘복의 근원’으로서 있다고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은 천사와의 만남에서, 수정되어야 될 위상이었습니다. 그것은 천사들이 어디까지나 ‘미래의 존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야곱의 ‘현재의 존재자’입니다. 즉 지금껏 그는 ‘복의 근원’답게 유지해 왔다고 여겼습니다. 자신에게 많은 자식과 재산의 증식이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복의 근원’답게 대우한 결과로 본 겁니다. 즉 현재 자신이 가진 것이 곧 복이라고 본 것입니다. ‘현재’말입니다.

하지만 천사들에 있어 ‘현재’는 싸우는 기능을 발휘한 때입니다. 그 모든 싸움이 끝나면 비로소 ‘복 수립’이 마감됩니다. 복이란, 하나님이 시키시는 전쟁에서 승자의 전리품을 두고 말하고, 패자는 저주받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복이란 야곱처럼 자신이 소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 기능’을 경유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야곱은 누구하고도 싸우고 있지 않습니다.

복의 근원으로서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상태까지 이르렀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자기와 자신이 가진 것과 가족, 이 모든 것이 곧 복의 내용이라고 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복을 위한 전쟁’에 있어 새로운 이해와 의미가 부가되어야 될 요소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부리시는 ‘하늘의 군대’을 야곱과 만나시게 하시는 이유는, 복을 나타내는데 있어 야곱의 일생이 시범케이스가 되기 때문입니다. 복에 속한 자의 모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이란, 미래에 과연 하나님께 영원히 할 수 있느냐로 판정됩니다. 그런데 미래의 요소는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반대로 ‘전쟁 기계’ 같은 천사로부터 공격을 받아야 하는 절차가 남아 있습니다. 야곱이 지니고 있는 속성은 곧 결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복이라고 여기는 것들은, 야곱의 희생과 인내와 노력과 속이는 재주의 결실물입니다. 곧 야곱은 ‘자기 전쟁’을 하고 온 겁니다.

하나님의 전쟁이 아닙니다. ‘복의 근원’답게 되기 위해 그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은 사람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 그는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 라헬은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그는 자기 것을 지키는데 성실했고 책임감을 다 하였습니다.

불철주야 라반 집의 일군으로서 주인님의 양과 염소는 겨울이나 밤이나 지켜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그는 무려 14년이라는 세월을 견뎌내었습니다. 그래서 얻은 결과가 바로 11자식입니다. 야곱이 이 재산과 자식을 지킨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주신 복을 지켜낸 ‘복의 근원’다움을 지켜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의 명예과 자신의 가치를 지켜낸 결과로서 그는 ‘복’을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야곱이 몰랐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복의 근원’은 ‘불임의 원칙’에 따라 정해진다는 겁니다. ‘불임의 자식’이란 이 세상을 ‘없는 자식’입니다. 본인이 있음으로 인해 ‘없는 존재’가 따로이 등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야곱을 몰랐던 겁니다.

이 원칙은 아브라함부터 제시된 겁니다. 아브라함은 ‘없는 자식’의 아버지로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불임의 원칙’이란. 아담의 자손은 그 누구에게도 복받을 자격이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지상에 펼치시는 원칙입니다. 아담의 자손, 곧 인간에게는 복을 줄 수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복’이 발생되는 경우란, 전제로 이 인간들을 상대로 하늘에서 전쟁을 벌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전쟁을 치르는 자’가 곧 이 세상에 있어 ‘복의 근원’이 됩니다. 따라서 하늘의 군대는 야곱의 만나야 하는 겁니다. 야곱 안에 야곱이 미처 알지 못하는 ‘불임의 존재’가 따로 계시고 그 분이 진정‘ 복의 근원’입니다. 곧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존재는 ‘하나님의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분이라고 그 분의 기능은 세상의 모든 인간과 신들과 싸우시는 기능입니다. 바로 야곱에게 이 ‘전쟁의 기능’이 삽입되지 아니하면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따라서 ‘현재의 야곱’에 있어 알지 못하는 내용은 ‘미래에 마무리 될’ 죽음과 생명의 의미입니다.

‘죽음’이란 인간들의 자신의 노력과 희생과 헌신과 인내의 성과를 그대로 유지하는 상태를 두고 말합니다. 왜 그것이 죽음이냐 하면 그런 성향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하나님과 대적되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과는 ‘나 여기 있음’으로부터 출발해서 성립되는 의식입니다.

이런 의식에서의 싸움은 하나님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전쟁입니다. 나의 가치와 나의 보람과 나의 의미를 사수하려는 전쟁입니다. 바로 이런 의식의 판이 와장창 깨어져야 합니다. X-레이 촬영기사가 환자에 따라 사진판을 바꿔 끼어넣는 것처럼 성도는 새로운 판으로 교체되어야 합니다.

그 새로운 판에는, 내가 나밖에 모르는 죄인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전쟁의 요인이 되었음을 자인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현재 성도에게 미래의 최종적인 판이 미리 끼어넣어지는 겁니다. 내가 고생했기에 부정당하기 아까운 바로 그것을 향하여 하나님은 전쟁을 벌리시는 겁니다.

내가 아니라 내가 없는 그곳에서 새로 생겨나시는 그 분이 곧 복의 근원입니다. 그분 덕분에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평소에 우리가 무엇을 지켜내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지 살펴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8-02-08 18:01 
126강-창 32장 1-2절(천사와의 만남)1802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2장 1-2절입니다. 구약성경 49페이지입니다.

창 32:1-2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야곱이 지금 가고자 하는 방향이 고향입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곳은 벧엘이었지요.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야곱을 떠나게 조치해놓고 야곱이 멀리 지금의 터키 중부지역까지 갔을 때 하나님께서 또 찾아오셔서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벧엘쪽으로 가라고 언급을 했습니다. 보내놓고 다시 돌아오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늘에서 진두지휘하게 되면 야곱은 이 땅에서 누구와 만나면 되는가 하면, 사람만 만나면 돼요. 야곱이 외삼촌 만나서 돌아오는 그 과정 속에서 야곱이 손에 쥔 것, 야곱이 획득한 이 모든 것은 사람과 만나서 얻어진 겁니다. 그리고 야곱은 내가 아버지로부터 복의 근원으로서 이미 인정을 받았기에 그 인정은 하나님께서도 확정지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벧엘에서 사다리를 통해서 천사가 자기에게 집중해서 오는 그런 체험을 한 뒤에, 자신은 이 땅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중심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일과 연결되는 자연스러운 생각은, 자기가 만나는 라반, 이것도 하나님의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주셨다고 이해되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일을 하실 것이라는 것도 얼마든지 짐작할 수가 있지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과 만났던 이 야곱이 오늘 본문에서는 누굴 만났는가 하면, 천사들을 만나요. 사람이 아니지요. 사람이 아니고 이질적인 분들, 천사를 만나면서 여기서 야곱은 하나님의 일의 진행에 있어서 본인의 역할이 어디까지인지를 새로 정립해야 될 새로운 순간이 닥쳐온 겁니다.

사람과 만나서 얻어진 것, 야곱은 의심치 않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했고 복의 근원이니까 재산이나 풍성한 자식들이 마땅히 나에게 돌아온다고 생각한 겁니다. 자기가 복의 근원이니까 그러한 것들이 자기중심으로 몰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외삼촌과 함께 있으면서 양과 염소를 키우면서 막대한 재산이 자기에게 굴러오도록 아이디어를 제공하신 분도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부자 되게 하시고 자식도 많게 하시고. 그만큼 자신의 존재입지가 하나님 보시기에 더 단단히 굳혀지는 것처럼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 천사 떼를 만나요. 한분의 천사가 아니고 여러 천사를 만나게 됩니다. 여러 명의 천사를 만나는데 야곱은 한 명이고 저쪽은 천사가 여러 명이에요.

그러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야곱을 구태여 여러 천사가 만날 필요가 있느냐, 만나야 될 그 이유, 목적, 분명히 야곱이 그것을 알아야 되는 거예요. 자기는 정상적으로 복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지금 야곱은 본인이 요청하지 않은 상황을 맞닥뜨린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천사를 만나게 하는 것은 뭐냐? 사람만 만났던 야곱에게 사람 말고 천사와의 만남에서 벌어지는 그 만남의 의미를 주님께서 전체의미로 사용하시려는 거예요. 야곱의 일대기에서 전체의미로 덮어버리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야곱의 할 일이 따로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또 천사는 노는 분들이 아니거든요.

천사 할 일이 또 따로 있잖아요. 그런데 각자 따로 할 일을 갖고 있는 분들이 저쪽은 숫자가 많고 이쪽 야곱은 혼자인데 이렇게 만났다 이 말이지요. 그리고 만났을 때 야곱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군대’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군대라 했으면 자기 고향은 주둔지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군대의 기능은 뭐냐 하면, 전쟁이에요. 싸움입니다. 침략이고 침투해서 그 지역을 빼앗아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군대니까, 군대의 기능은 싸움이고 전쟁이니까, 여기서 야곱의 사적인, 자신의 중심으로 생각했던 이 복의 근원에 대한 진행과정이 이제는 누구 쪽으로 넘어가느냐 하면, 야곱 본인의 사건이 아니고 주님의 사건으로 넘어갈 지점에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야곱 본인은 누구하고 싸울 의사가 없기 때문에.

자, 야곱은 룰루랄라, 복 얻어서 챙깁니다. 이제 곧 성공한 자, 정말 나야말고 복의 근원답다, 라고 남에게 증거 할 마음준비에 들떠 있지요. 그렇게 모든 것이 안정되고 평안하다고 여기는 그 야곱이 가는 길에 싸움을 해야 될 천사들이 등장했다는 것. 무슨 싸움? 이 바닥, 이 상황에서 웬 싸움?

싸운다 하는 것은 반드시 적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군대거든요.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시비 걸어서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저쪽 세계를 그냥 두고는 못 보겠다는 뜻이거든요. 가만 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감사해야 될 것은 뭐냐? 사람이 뭔가 여유가 있고 만족스러우면 안주하는 버릇이 있어요.

죽치고 그저 태평을 즐기는 경향이 있어요. 계속해서 어떤 일을 하지는 않아요. 어느 순간이 자족하게 된다면. 그런데 야곱이 천사를 만나게 되면, 천사는 자기만족 하는 것이 아니고 일종의 전쟁기계에요. 냉혹한 킬러. 감정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시키는 대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야곱을 만나서 하나님의 전쟁을 하겠다는 것은 아직 모든 일이 마무리 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정리해봅시다. 야곱은 현재에 만족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아 있고 마하나임, 하나님의 군대는 전쟁을 치르는 일, 기능을 하나님 앞에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면 야곱은 현재의 사람이고 천사와 야곱이 만났다는 것은 야곱으로 하여금 현재의 사람에서 미래의 사람으로 전환시키는 일에 있어서 야곱과 합세를 하고자 야곱을 만난 거예요.

미래의 사람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장차 미래에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사람으로 야곱을 전환시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야곱이 천사를 만나지 않고 혼자서 간다면 야곱은 미래에, 장래에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인간인 거예요.

그렇다면 이 야곱을 만났다는 것, 천사가 야곱을 만나서 손을 잡고 일을 한다든지 야곱을 앞장세워서 일을 한다는 것, 현재 상태로서는 야곱이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야곱이 모르고 있거든요. 그걸 모르고 있는 야곱이 장차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야곱에게 어떤 요소가 기입되어야 되고 주입되어야 되느냐?

천사가 벌이는 기능, 전쟁을 해야 된다는 그 기능적 내용이 야곱 속에 침투되어야 되고 삽입되어야 돼요. 이걸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우리는 룰루랄라, 예수 믿고 죽으면 천국 간다, 하는데 먼저 마중을 나온다는 말이지요. 천사 또는 성령 쪽에서 마중을 나오겠지요. 성령 쪽에서 마중을 나오면서 “안 돼, 안 돼. 너는 그런 식으로는 천국 못가.”

영원히 하나님과 미래에 함께 하려면 지금 네 요소에 하나님과 네가 같이 있을 만한 요소가 성령님과 맞닥뜨려서 그것이 우리 속에 기입되어야 돼요. 이게 들어와야 된다니까요. 지금껏 야곱은 어떻게 살았느냐 하면,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났어요.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났기 때문에 야곱이 뭔가 얻고자 하고 요청하는 것은 뭐냐?

자기가 생각했던 복의 근원은 이정도면 되겠지, 라는 극히 육적이고 인간적인 생각에서 나름대로의 노력을 했던 그것, 많은 재산과 자식들을 얻은 것, 그것을 야곱은 하나님의 도움의 결실로 보면서 그걸로 룰루랄라, 고향에 돌아가서 내가 복의 근원이라고 내세울 만 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그 가는 길에 마하나임, 전쟁만 치르는 전쟁기계들을 만난 거예요. 그런 야곱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복의 근원에 합당치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쉽게 말해서 만남이 없이는 그것도 하늘의 이질적 요소와의 만남이 없이는 우리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십자가질 때 도망갔잖아요. 그들이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간단한 문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 뒤에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구원받는 거예요.

복잡하게 이야기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만남이 아니고 하늘의 요소와의 만남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누구만 만나느냐 하면, 목사 만나고, 교인들 만나고, 자꾸 사람들하고 만나서 교회놀이 하면서, ‘이정도 하면 되겠지. 이정도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현재 야곱의 생각입니다. ‘이정도면 하자가 없겠지.’ 그리고 남은 생애는 자기 구원받은 것을 자랑하는 거예요.

그러나 모든 시간은 나의 인생, 나의 의미와 나의 가치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으로 채워져야 돼요. 주님의 것으로 채워지려면 주님 쪽에서 파견한 분이 내 쪽으로 와야 돼요. 만남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만남이 이루어진 것과 안 이루어진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지요.

‘성경공부해서 될 문제가 아니구나. 하늘의 요소가 있어야 되는구나. 그렇다면 내가 정말 하늘의 요소를 만났는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느냐?’ 그 문제가 발생되지요. 지금 야곱이 모르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요. 야곱이 복의 근원으로서 야곱이 해야 될 일은 야곱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 인간들은 자기 인생을 누가 결정하는가? 본인이 결정해요. 다른 사람의 일을 참조해서 본인이 결정하는데 성도의 일은 주님이 직접 제시하고 주께서 직접 일을 맡기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이 먼저 주님한테 요청하거나 요구한 사항이 아니에요. 그래서 여기서 벌써 답변의 힌트가 나왔지요. 주님을 만난 사람과 만나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뭐냐?

내가 요구하지 않는 삶을 주께서 덮치게 할 때, 내가 기대했던 삶이 아니고 내가 생각하지 않은 미래에요. 뭔가 내가 예상한대로 일이 안돼요. 예상한 대로 일이 안되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갖느냐 하면, 간단하게 즉각적으로 느끼는 것이 뭐냐? ‘나 죽어버릴까?’ 그게 바로 주님이 원하는 바에요. “그래, 죽어라.” 그 말이지요.

매사가 내 뜻대로 안되는데 사니 무슨 재미가 나겠습니까? 구약에 보면 요나가 그런 것을 이야기했고 모세도 두 번씩이나 “나 죽어버릴래.”라는 말을 했어요. 백성들이 말을 안 들으니까, “이렇게 말도 안 듣는 백성들을 나보고 책임지라고 하는데 내가 그냥 죽게 만들어주옵소서.”라고 민수기에 나와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이미 모세나 요나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야곱이 지금 그런 상황에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가지고 야곱이 생각하지도 못한, 야곱에게 없는 존재를 야곱 속에서 끄집어내는데 그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스라엘 이름이 싸움하는 야곱이에요. 싸움하는 어떤 분이에요. 이 세상신과, 이 세상 인간들과 싸우는.

그러면 그 기능은 누구 기능인가? 야곱을 만났던 마하나임, 천사들의 기능이에요. 지금 야곱이 뭘 오해하고 있느냐 하면, 꿈에 사다리를 통해서 야곱에게 왔잖아요. 야곱은 자기가 복의 근원인줄 알고 아주 기대에 부풀어서 좋은 제안을 했어요. 형의 위험을 피하고 다시 오게 되면, 자식 얻고 재산 얻게 되면, 내가 그 얻은 것 가운데서 십일조 드리겠다고 한 거예요.

야곱이 십일조를 언급한 것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 했느냐 하면,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상황이 공히 나에게도 연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은 야곱은 이미 수긍하고 있는 겁니다. 아버지를 축복되게 하신 분이 아브라함, 그 아브라함이 아버지를 축복했고, 아버지에게 축복한 그 복이 딴 복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그 복이 아버지를 거쳐서 자기에게 왔다는 것을 야곱이 알고 있어요.

그런데 야곱이 하나 놓치고 있는 것이 뭐냐? 복의 근원은 불임이라는 사실, 불임의 속성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는 거예요. 불임이라 하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인간, 존재하지 않는 인간을 겨냥해서 하나님께서는 복의 근원으로 삼는다는 겁니다. 야곱은 자기가 복의 근원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는 이미 존재하고 있잖아요. 이런 대목이 어려운데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되게 하면 순풍순풍 자식 많이 낳게 해서 다 복의 근원으로 만들면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이라고 해놓고 자식을 없게 합니다. 없는 존재 아버지가 아브라함이에요. 자식은 없는데 아버지만 덜렁 있는 그런 처지가 아브라함이라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서 복의 근원은 아담의 계통에는 없다는 겁니다. 아담 판, 아담의 세계, 인간들의 세계에는 복의 근원이 없어요. 없는데 있게 하시는 거예요. 그것은 아브라함 때문이 아니고 아브라함 언약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그 언약의 내용 안에 불임이라는 요소가 들어 있어야 돼요. 인간의 힘으로 낳지 못했다, 가 있어야 돼요.

더 노골적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릴까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자만 천국 갑니다.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자가 천국 가는데,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자가 천국가려면 이 땅에 있는 인간을 상대하지 말아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부르시고, 이삭과 야곱을 불렀잖아요. 아브라함이 있고 이삭이 있고 야곱이 있잖아요.

있는데 왜 없는 존재만 천국 간다고 이야기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이삭의 하나님이고,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왜 붙였느냐? 그 없음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이미 인간들이 있다고 여기는 그것에서 없음이 나와요. 있는 쪽에서 없음이 나와요. 불임이라는 형식으로. 이렇게 설명하면 상당히 난해하지요. 그러면 쉽게 하겠습니다.

병원에 가면 엑스레이 찍지요. 앞 사람 엑스레이 찍고 나면 방사선 기사가 엑스레이 사진판을 바꾸잖아요. 사진 판 안 바꾸면 어떻게 되겠어요? 앞 사람이 결핵환자인데 그 위에다 또 찍어버리면 멀쩡한 내가 결핵환자 되잖아요. 판을 바꿔요. 사진판을 바꾼다고요. 그런데 아담부터 쭉 내려오는 이 판은, 육의 판은 모든 자식들에게 그대로 전수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의 판을 똑똑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누굴 사용했는가? 야곱을 사용했어요. 야곱이 얻었던 자식과 복의 요소를 분석해 보면, 야곱은 형을 속였습니다. 그리고 외삼촌을 속였잖아요. 아버지도 속였지요. 형도 속이고. 속인다는 것은 살아보려고 애를 쓴다는 뜻이에요. 야곱은 속여서 빼앗을 정도로 얻을 것에 대해서 집념과 집착이 대단한 사람이고, 속여서라도 쟁취하는 것이 승리라고 여기는 그 인간적인 방식이 야곱을 사용했고, 그 다음에 야곱이 굉장히 성실해요.

성실하다는 말은 삼촌이 맡긴 것을 밤 잠 안자고 덥거나 춥거나 책임감 있게 성실하게 맡은 일을 다 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를 얻기 위해서 7년을 덤으로 봉사했습니다. 못생긴 언니는 치우고 진짜 예쁜,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얻기 위해서 인내했어요. 성실하지요. 인내하지요.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생존에 대한 집착도 있지요.

또 한 가지는 뭐냐? 야곱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라헬에 대한 그 사랑의 힘, 어떠한 역경과 수모와 어떠한 난관도 그 사랑의 힘으로 이겨냈습니다. 그래서 얻은 것이 많은 아들이고 많은 재산을 얻었던 겁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것을 축복이라고 본거예요.

야곱이 받은 그 축복, 자기는 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복을 받을 만 하고, 그 복을 받게 된 과정들, 성실, 침착, 그리고 인내, 집착, 생에 대한 의지, 그리고 자기 사랑에 대한 포기하지 않는 마음, 이런 것들이 야곱의 판, 야곱의 엑스레이 판을 형성한 거예요.

아브라함에게는 없는 자식을 아내 태를 열어서 있게 하고, 이삭 같은 경우는 생긴 자식을 도로 죽음에 넘겨서 없는데서 있게 하고 그 다음에 죽은 데서 살리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언약의 내용을 그만큼 더 추가해서 줬다면 야곱에게 있어서 언약이란 뭐냐?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도리 다 하게 만들어요.

야곱적인 이러한 판에서 만약에 하나님의 구원, 천국 이야기를 결부시킨다면, 사람들이 성경공부를 하든, 성경모임을 하든, 교회 나오든 사람들이 어떻게 하겠어요? 성실하게, 성의 있게 하나님께 봉사하고, 인내심 있게 헌신하고, 참아야 하느니라, 하면서 어떤 역경도 이기면서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헌신할 것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모든 어려움도 다 이겨낼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 그 모든 것이 바로 개판이라 그 말입니다. 그게 악마의 판이다. 그 판을 완전히 없애야 돼요. 그것은 있는데서 천국가려는 야곱적인, 육적인 사고방식의 본 내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와서 목사를 통해서 듣고자 하는 설교내용이 뭐냐? ‘목사님, 우리 성실할 마음준비 되어 있습니다.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시켜만 주세요. 천국 간다는데, 영생 얻는다는데 뭔들 못하겠습니까?’

그런 마음자세로 나오는데 바로 그게 미래에 도저히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성질머리에요. 사고방식입니다. 그게 바로 죄고 그게 사탄이 짜놓은 판입니다. 결핵균 들어있는 썩어빠진 엑스레이 판입니다, 라고 하니까 듣는 사람이, 자기 할 도리 다 했는데 그것마저 아니라니까 뿔뿔이 다 헤어지는 거예요. 복음을 감당을 못합니다.

왜 복음을 감당을 못하느냐 하면, 주님을 안 만난 게 아니에요. 복음을 안 들은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복음을 듣게 되면 도망치기 바빠요. 왜냐하면 자기 판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게 악마가 짜놓은 판인데. 내가 이만큼 신앙생활 잘하는 것도 내가 그만큼 버텼고 인내했고 성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만큼이라도 바르게 되었다는 겁니다.

꼭 야곱 같아요. 천사 만나기 전의 야곱 같아요. 천사는 미래의 존재자들입니다. 이들은 야곱으로 하여금 어떤 사람 되게 하느냐? 복의 근원이라 하는 것은 네가 성실하게, 혹은 속여서, 노력해서 얻는 것이 복의 근원이 아니라 천사가 너를 통해서 전쟁을 벌여서 전쟁에 승리한 쪽이 복이고 패배한 쪽이 저주가 되는 거예요.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전쟁에서 이미 예시가 되었어요. 14절에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 십 팔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그래서 다섯 왕과 싸워서 이겼습니다. 이기고 난 뒤에 아브라함이 누굴 또 만나요.

하늘의 존재 멜기세덱을 만납니다. 만났을 때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라고 멜기세덱이 제사장이 되어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줍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이겼던 전쟁의 전리품을 십일조로 내놔요.

이것은 뭐냐 하면, 이번 전쟁의 승리는 결코 전쟁하시는 분의 의사지 아브라함 나의 의견이나 내가 복의 근원답게 되기 위해서 내가 노력한 결과로서 승리가 온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면 야곱이 복의 근원 되려면 야곱보다 선행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던 천사들, 야곱이 미처 몰랐던 적이 있는데 그 천사들이 그 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모델케이스, 승리해서 구원받은 모델케이스로 야곱을 복의 근원으로 삼은 겁니다. 그러면 천사가 벌였던 전쟁의 결과가 야곱의 인생을 통해서 그대로 반영이 되게 되면 야곱은 뭐에서 뭐로 바뀌느냐?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는 상대방을 속이면 나는 승자가 되잖아요.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도리, 모든 아이디어, 모든 희생과 노력과 끈기, 인내성, 이 모든 시도가 절대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님을 깨닫고 그것을 몽땅 천사한테 강탈당하는, 몽땅 빼앗겨버리는 현상이 벌어질 때 이러한 모델이 야곱이고, 야곱에게 일어난 그 현상, 그것이 모델케이스가 되어서 오고 오는 모든 성도에게 동일한 현상이 벌어질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성도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 다음 32자에 뒤에 보면 누굴 만나는가? 밤에 야곱이 천사를 만납니다. 천사를 만나면서 야곱은 자기의 본색을, 자기의 깊은 성격을 유감없이 드러냅니다. 왜 낯선 사람과 싸웁니까? 지킬 것이 있다는 거예요. 그 지킬 것이 뭐냐? 자식들이고 많은 재산이었습니다. 형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자기는 마음준비 하고 있었어요.

마음준비하고 있는데 밤중에 얍복강에서 정체가 불분명한 사람이 등장하니까 형이 보낸 어떤 자객인줄 알고 속임수로, 내 힘으로 형에게 빼앗았던 그 복을 내가 지키기 위해서 사력을 다해서 싸웁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천국 가는가? 천국 가는 사람의 특징에 대해서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걸 보게 되면 우리의 구원의 출발선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돼요. 로마서 5장 10절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 이지요.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고 예수님의 죽으심은 따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 아들되심과 원수됨이 야곱의 개체 안에 같이 들어 있어요. 그게 천사와 만나는 순간과 야곱이 살아왔던 일생과 두 가지의 절차를 통해서 따로 차이 나게 등장할 뿐이지요. 쉽게 말해서 야곱이 복의 근원인데 복의 근원 아니에요.
왜? 불임의 속성은 여전히 유지해야 되기에. 야곱이 야곱으로 태어났지만 정작 야곱이 복의 근원되는 것이 아니고 야곱이 생각지도 못한, 야곱에게는 없는 존재,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어디에 들어 있느냐? 야곱 안에 들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야곱 안에 이스라엘이 함께 들어 있는 거예요.

지금 천사가 밤중에 얍복강에 와서 이스라엘 뽑아내고 야곱은 죽여 버리는 겁니다. 야곱을 죽인다는 말은 뭔 뜻이냐? 야곱이 살아 있으면서도 야곱을 죽은 자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마치 사도바울이 살아 있으면서도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처럼.

죽음이라는 의미,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싸우고자 하는 것은 뭐냐? 죄와 율법과 저주와 마귀와 그리고 죽음과 싸우는 거예요. 그리고 의의 승리에요. 그런데 야곱은 아직까지 죽을 때가 안 되었으니까 죽음을 몰라요. 야곱이 미래의 사람이 되려면 미래의 죽음을 앞당겨서 야곱 속에 집어넣어야 되는데 그게 천사들과의 만남이에요.

야곱 너의 생각과 이 천사들의 기능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거예요. 야곱은 내 판, 내가 노력해서 얻은 판을 쥐려고 하는데 그게 바로 죽음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강탈하고 야곱 속에 있는 진짜 복의 근원, 예수 그리스도를 끄집어내는 이것이 생명이에요. 그래서 나중에 야곱은 ‘브니엘’ 얍복강가의 그 장소를 브니엘이라고. 하나님과 대면했으나 나는 죽지 않고 살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러한 변동이 있을 때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에요. 이 땅에 하나님 자신을 드러낼 때 야곱이라는 모델케이스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짜 뜻을 야곱을 통해서 드러내는 겁니다. 천사들은 기계 같아요. 냉혹한 킬러입니다.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감정이야 있겠습니다만 인간에게 휘둘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판이 달라요. 인간의 판은 뭐냐 하면, 자기자존심과 자기 명예, 결국 내가 이렇게 잘났다는 자기증인, 자기가 잘났음을 반증해주는 것 중심으로 인생 판을 짠 거예요. 무엇을 해도 그러니까 남은 죽어도 나는 살아야 되고, 남은 다쳐도 나는 안 다쳐야 되고, 그 정도로 나는 가치 있는 존재야, 라는 중심으로 엑스레이 판을 찍었는데 그게 하나님보시기에 폐병환자에요.

이것은 하나님의 원수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하고 싸우지요. 야곱과 하나님의 사자가 왜 싸우겠습니까? 다치면 안 되는게 있기 때문에, 이 내 것이 깨지면 내 노력도 의미 없어, 내 참을성도 의미 없어, 내가 형을 이긴 것도 의미 없어, 모든 것이 무의미로 끝나는 것을 도저히 자기로서는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나는 나로 인하여 산다는 그 말입니다. 그 판을 주님과의 만남이 아니면, 성령과의 만남이 아니면 그 판은 절대로 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교회 왔다가 복음 듣고 자기 판 깨지지 않기 위해서 다 가버리잖아요. ‘어떻게 나를 개 무시해? 어떻게 나를 경멸해? 어떻게 나에게 모욕감을 줘? 난 도저히 못 참겠다.’

그렇게 전쟁에서 죄에서 자기 판을 이기지 못하고 간 그 사람이 저주에요.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저주 안 받게 하려함이 아니라 저주받을 자를 저주 받을 자로 드러내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복의 근원은 여지없이 자기 판이 와장창 깨지는 거예요. 이런 것은 유리창이 깨져야 실감이 나는데요. 그야말로 평생 했던 두꺼운 유리판, 평생 동안 자기 그림 그렸던 그 판, 인생이라는 자기 일기장, 그것을 천사가 와서 박살내버려야 돼요.

“이제 네 것 없지? 네 것 없으니까 ‘주여, 저에게 왜 이러십니까?’라는 소리 하지 마. 네 것 깨졌어.” 이게 주님과의 만남, 그 만남이 신약에서는 십자가의 만남입니다. 주께서 아버지에게 깨졌을 때 주님만 깨진 것이 아니에요. 그 안에서 우리도 깨진 겁니다. 강도가 오늘밤에 낙원에 있을 것이라는 소리 들었지요.

강도는 주님 만난 순간 강도였던 현재의 존재가 아니고, 미래에 구원받은 자의 모습으로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의 강도라는 세월, 그것은 야곱과 함께 와장창 다 깨지고 만 거예요. 그 강도가 취미로 했겠습니까? 내 힘으로 밥 먹고 살려고 강도짓 했을 거 아니겠습니까? 내 힘으로 산다는 것, 내 힘으로 이만큼 일궈 왔다는 것, 그래서 이것은 내가 놓치기 싫고 깨지기 싫은 것, 이것 쥐고 싶은 것, 그것 와장창 깨진 겁니다.

제가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특히 자식 있는 여자분 들에게는 자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요. ‘모든 욕과 처벌은 이 어미가 받되 내 자식 손대면 나도 가만있지 않습니다.’하는 속성. 그게 불임이 아니잖아요. 그게 가임 아닙니까? 내 새끼라 그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내게 없는 존재와 합류시켜서 그 안에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분을 키워서 그분과 더불어서 천국 백성 되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성령을 통해서 만남을 이루게 하신 주님의 뜻 안에서 기존의 우리의 몸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야곱같이 내가 원하는 내 인생 산다는 것이 와장창 다 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주께서 친히 없는데서 만들어준 그런 몸으로 주와 영원히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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