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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31 20:42:15 조회 : 344         
   파생언약 180131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피생언약(창세기 31:43-49)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LNtqOqxxsvo, Hit:91
 이근호 18-01-31 21:26 
파생 언약

2018년 1월 31일                 본문 말씀: 창세기 31:43-49

(31:43)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 내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

(31:44)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31:45)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31:46) 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

(31:47)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니

(31:48) 라반의 말에 오늘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며

(31:49)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

‘만남’에 대해서 사람들은 자유성을 갖는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만날 사람은 전화해서 만나면 되고 안 만날 것 같으면 가까이 하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남’이란 그런 겁니다. 하지만 ‘만남’ 이런 ‘만남’만 있을까요? 그저 인간들끼리의 만나고 헤어지면 그것으로 끝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이 만남은 인간들이 일방적으로 인간들 쪽에서 끊을 수 없는 만남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는, 하나님 쪽에서 준비해두신 일관된 계획이 그 만남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창세기 28장에서 하나님과 야곱의 만남이 그러합니다.

단순히 야곱을 구원하기 위한 취지로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신 것이 아닙니다.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야곱을 만나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언약의 형식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육적으로 보입니다. 언약 안까지 들어온 이러한 육적인 요소는 먼저 이 땅에 발생된 언약과는 그 내용이 더 깊어지고 추가된 요소입니다.

전의 언약이 아브라함 언약이나 이삭 언약에 있어 외부적인 요소가 언약의 내용으로 스며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야곱 언약에 오게 되면 내용이 더욱 깊어져서, 육적인 것으로 채워지는 ‘영적 언약’의 양상을 띠게 됩니다. 즉 아브라함 언약이나 이삭 언약은 외부 요소에 대해서 배타적입니다. 그것은 아비멜렉이란 지역 촌장을 만나면서 일방적으로 그들의 소유물과는 배타적으로 아브라함과 이삭의 소유물이 늘어납니다.

하지만 같은 복의 근원은 야곱 언약에 오게 되면 야곱이 가진 재산이 자체적으로 증식되는 것이 아니라 야곱 외부의 것이 야곱의 것으로 전환되면서 ‘복’이라는 것이 성립됩니다. 오늘 본문 43절에 보면,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라반으로 하여금 야곱의 일행을 뒤로 따라잡게 하십니다. 일단 만나고 난 뒤라고 각각의 소유가 별반 달라지지가 않았습니다. 라반이 단순히 딸들 하고의 작별인사나 나누려고 따라잡은 것이 아닙니다. 라반에게 있어 다급한 것은 야곱 가정이 자신의 ‘신(神)’을 훔쳐가져 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따라 왔으면 그냥 각자 자신의 길로 가면 그만인데 왜 돌무더기를 잔뜩 쌓고 거기서 서로에게 언약 한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까? 그리고 쌍방간에 확실히 해둘 내용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것은 야곱이 갖고 있는 모든 실은 라반 본인의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야곱의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빼앗기도록 허락하셨음에 대해서 쌍방간이 인정하겠다는 겁니다.

이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라반은 급하게 야곱의 일행 뒤를 추적해온 것이라고 합니다. 즉 라반 자신의 것으로 구성된 야곱의 언약이라는 겁니다. 딸도 라반 자신의 것이요 양도 또한 라반 자신의 것이요 그 딸에게 넣은 11아들도 라반 자신의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것이라고 우기면 도로 가져가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라반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야곱의 하나님이 그러지 못하도록 계속 지금 감찰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이는 라반의 입장에서, 야곱이 믿는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 것이 야곱 것으로 이동했다는 겁니다. 이는 곧 야곱이 정당하게 가져갈 것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로서는 도로 뺏을 권리있고 그럴만한 힘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개입으로 그것이 용납되지 않음을 압니다. 그래서 라반 입장에서, 내 것이면서도 야곱의 된 것은 다 야곱의 하나님의 개입임을 증거한 결과이기에 이런 조치에 대해서 쌍방간에 문제삼지 않기로 약속하자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선조들과는 달리 외부인의 것으로 야곱의 가정의 복을 삼는 겁니까?

그것은 언약이 단순히 구원되는 자들에게만 국한해서 작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 구석구석에 다 영향력을 키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즉 언약의 구성에 있어 얼핏 깨끗해보이고 순수해보이고 잘나 보이는 것으로만 추려서 내용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것으로 꽉 채우는데 조건는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 본질의 상실’입니다.

노아 언약에 있어 노아는 방주에 들어가서 살게 되는데 여기에 동승한 귀한 것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정결한 제물이 되어야 될 짐승’입니다. 물이 거둬지고 땅이 드러나게 되면 방주 운행은 멈추게 되고 나아는 새 땅으로 딛고 최초로 하는 일은 정결한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서 연기를 피어올라 흐뭇하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노아는 방주 안에서 희생재물의 뒷면이 되는 겁니다. 뒷짐이 되는 겁니다. 비록 현실상에 나타나는 것이 노아이지만 그 속에는 정결한 짐승의 희생이 담겨 있습니다. 이와 같은 원리가 야곱 언약에 그대로 재현됩니다. 야곱의 재산이 증식되고 자식이 많아졌다고 해서 그 자체를 언약의 핵심으로 여기면 아니됩니다. 복의 전부가 아닙니다.

정작 복이란, 야곱의 가진 모든 것이 라반의 것이라는 점입니다. 즉 죄 속에서 의가 나오고 육 속에서 영이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의가 죄 속에서, 육 속에서 나오는 원리는 ‘상실’ 곧 ‘잃어버림’입니다. 이 ‘잃어버림’을 성사시키는 채널이 있게 마련인데 그것이 바로 ‘라헬’입니다.

라헬은 아버지의 신, 곧 드라빔을 훔쳐서 남편과 함께 도주했습니다. 남편은 이미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언약의 상대자’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언약의 내용은 라반쪽과 연결되는 라헬을 통해서 유입됩니다. 야곱이 야곱을 사랑했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20년을 봉사했고, 라헬은 야곱의 가정을 일으키기 위해 아버지의 신마저 훔치고 왔습니다.

이런 라헬의 성향은 어디까지나 하늘 쪽이 아니라 극히 육적이라고 할 수 있는 라반의 요소입니다. 하지만 그 라반의 요소가 언약 안으로 들어와서 ‘야곱 언약의 뒷면’이 되는 겁니다. 언약의 실제 주인공은 하나님이시지만 세상에 드러나기는 야곱가정의 행적으로 비치게 마련입니다.

마치 선악과는 생명나무의 뒷면이요 죽을 아담은 생명인 하와의 뒷면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의 요소는 더 이상 땅과 하늘과 직접 교류하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출현하는 ‘하늘의 요소’를 통해서 언약형태로 등장합니다. 멀리 있는 하늘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 코 앞에 등장하고 우리 곁에 나타난 ‘상실의 형식’으로 천국은 성도와 만납니다.

마땅히 죽을 죄인임을 십자가 새언약 앞에서 고백하는 자가 곧 지금 살아움직이는 언약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천국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천국의 등장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8-02-01 19:36 
125강-창 31장 43-49절(파생언약)18013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1장 43-49절입니다. 구약성경 46페이지입니다.

창 31:43-49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떼는 나의 양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날 내 딸들과 그 낳은 자식들에게 어찌할 수 있으랴 이제 오라 너와 내가 언약을 세워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취하여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칭하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칭하였으니 라반의 말에 오늘날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칭하였으며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 피차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감찰하옵소서 함이라.”

오늘 본문 보게 되면 삼촌이 야곱을 따라 붙여서 야곱에게 따지게 되는데 따져봤자 삼촌이 야곱에게 가져간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만나기 전이나 따지고 난 뒤에나 둘 소유 사이에 변동이 일어난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자기 자식하고 챙긴 재산하고 그냥 가져가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라반으로 하여금 자기가 얻을 것도 없으면서 기어이 야곱을 뒤따라가서 만나서 누가 잘했는지 혹은 못했는지를 따지게 하는 이유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그냥 야곱이 자기 식구 데리고 야반도주하듯 도망치면 너는 너고 야곱은 야곱이잖아요. 둘이 바이바이, 하면 끝나는 겁니다. 야곱은 복의 근원이고 라반은 복의 근원 아니고, ‘너는 네 볼일 보고 나는 내 볼일 보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그렇게 되면 무엇이 모자란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놓친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이점을 알아야 돼요. 야곱은 언약의 사람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아버지 이삭처럼, 야곱도 언약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사적으로 얼마나 부자가 되었고 행복한지는 하나님이 야곱에게 주신 원래 취지하고는 전혀 달라요. 취지가 그 취지가 아닙니다. 무슨 취지인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언약은 어떻게 구성되느냐, 그 사실을 점차점차, 아브라함보다 더 추가된 내용이 이삭에게, 이삭에게 추가된 언약의 내용이 야곱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하나님은 뭐라고 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칭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얻어지는, 나타나는 그것이 언약의 전부가 아니고, 이삭을 통해서 나타나는 언약이 세밀해지기는 하지만, 내용이 더 증폭되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야곱의 하나님을 통해서 모든 언약의 내용, 그 형식이 다 갖춰지는 겁니다.

놀라운 사실은, 놀라운 사실도 아니지만 요셉의 언약이라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야곱의 언약이 마지막 세상 끝날 까지 줄곧 이어집니다. 하나님 자신을 소개할 때 아브라함을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종결되지요.

나중에 나오는 모세언약이라든지 다윗언약은 어디까지나 여호와 하나님이 야곱언약으로 모든 형태는 다 갖춘, 형식적인 것은 이미 야곱언약에서 갖춰놓고 그 형식을 구체화하면서 율법도 주어지고 왕도 주어지는 것, 율법주실 때는 모세언약, 왕 주실 때는 다윗 언약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언약의 완성으로서 새언약을 이미 다 이루셨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믿는다, 할 때 뭘 믿어요? 뭘 믿는데? 어떤 내용을 믿는데? 이야기를 해보라고요. “예수의 피를 믿습니다.” 피 왜 흘리는데? ‘글쎄, 왜 흘릴까? 정치범인가?’ 바짝 마른 내용, 아무 내용이 들어 있지 않고 그냥 믿습니다, 하는 자기의 오기, 이것이 행함이거든요. 믿습니다, 하는 자기의 행함을 믿고자, 껍질밖에 없는, 알맹이가 전혀 없는 그런 십자가, 그런 피, 그런 믿음이 되면 안 되겠지요.

창세기 28장에서 밤에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 만난 사람 같으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까지 만났으니까 인간은 시시하게 만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생각이 들겠지요. 높은 사람을 만났는데 아랫사람 만난들 무슨 보탬이 되겠느냐, 이렇게 오해할 수 있는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구성은 높은 사람이 위해서 제정한 것은 맞지만 그 구체화는 땅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게 뭐냐? 야곱의 하나님과 야곱이 먼저 만나고, 그 만남의 실제적인 그 형태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하나님과 야곱의 만남이 본 언약이라면 외삼촌 라반과 야곱의 만남은 예비적 언약이라 할 수 있어요. 파생적 언약, 예비적언약이지요. 하나님과 야곱의 만남이 하늘과 땅의 만남이라면 그 하늘이라는 요소가 점차 땅 가까이 와서 땅에 밀착해서 착륙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밀착형 언약이 되면서 하늘의 요소는 하늘만 쳐다본다고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땅에서 새롭게 마련되는 하늘의 요소, 하늘 쳐다보고 ‘하나님, 어쩌고’ 하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성사되는 하늘의 요소를 인정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천국 못갑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서 언약을 이루고 그 언약은 땅 밀착성이에요. 땅 밀착형언약으로 바뀝니다.

땅에서 일어나는 신기한 천국의 현상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실질적으로 천국 못갑니다. 하늘나라하고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땅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천국현상으로 알아봐야 됩니다. 마태복음 20장에 예수님께서 이야기하기를, “천국은 이와 같으니” 마태복음을 비롯한 복음에서 계속해서 천국은 이와 같으니, 천국은 이와 같으니,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저 별자리 뒤의 어떤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하늘은 애초부터 거짓이고 가짜라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직접 하나님이 하늘나라 들어갈 기준과 요소를 땅에 점점이 뿌려놓았다는 말이지요. 그게 씨 뿌리는 비유 아닙니까? 말씀을 뿌려 놓았잖아요. 그러면 땅에 떨어진 그 천국의 요소, 아하, 천국은 저런 방식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면, 벌써부터 천국을 모른다면 죽어서도 천국 몰라요.

탕자가 집 나갔는데 돌아왔다. 이게 천국의 원리 아닙니까? 집 나간 적 없는 맏이는 천국 못갑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포도원비유에서, 아침 10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오후 3시에 온 사람, 오후 5시에 온 사람. 예수님이 그런 이야기했다고요. 만약에 설교자가 우리가 여기 앉아 있다면 “천국은 이와 같으니” 하면 우리는 미리 막 생각을 해요.

천국은 양하고 이리하고 놀고, 이렇게 온갖 상상, 뷰티플 월드, 아름다운 세상, 캐나다 로키산맥, 그런 것 연상하면 되지요. 멋진 광경 그런 것 생각하는데, “포도원비유를 이야기하겠습니다.” 해서 죽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까 얼마나 잘 살고 얼마나 행복하냐가 아니라 먼저 된다가 나중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먼저 온 사람이 삐지고 5시에 온 사람은 아무 행한 것도 없는데, 노동한 것도 없는데 하루치 품삯을 다 받아요. 그것도 놀고 섰던 자를 억지로 불러다가 한 시간 동안만 일하게 했는데 하루치 품삯을 다 주거든요. “이것은 내 노동의 대가가 아닙니다.” “천국은 이와 같으니.” “이것은 내가 천국 가려고 애쓴 대가가 아닙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이 “천국은 이와 같단다.”

아니라고 하는 것이 천국 백성의 고백이라는 거지요. 해야 될 고백이 뭐냐? “저 천국 갈만한 인간이 못됩니다. 천국 갈만한 밑천 투자한 적이 없습니다.” “천국은 그와 같으니.” 이것이 예수님,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언약, 이삭언약, 야곱언약을 통해서 미리 개진되었어요. 그중 하나로 우리는 지금 야곱의 언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야곱이 자기재산 챙겨서 도망치듯 그냥 튀면 돼요. 너는 네 인생이고 나는 내 인생이라서 두 번 다시 볼일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억지로 라반을 따라 붙게 만들었습니다. 따라붙었으면 뭔가 빼앗길 것 빼앗기고 양보할 것 양보하면 되는데 만나기 전이나 후나 자식의 숫자, 재산에 있어서 하등 변동사항이 없습니다.

변동사항이 없는데 왜 만났는가 그 말입니다. 거래가 일어난다든지 협상이 일어난다든지 뭔가 있어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 거래와 언약의 차이점이 뭐냐는 거지요. 오늘 본문에 보면, 라반이 뭐라고 하느냐? 43절에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떼는 나의 양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여기 소유개념의 단어가 네 번 나옵니다. 딸도 내 딸이고 자식도 내 자식이고 양 떼도 내 양떼고. 두 딸이 내 딸이기 때문에 그 두 딸 사이에서 나온 열 한 명의 아들도 내 자식이다. 양떼도 내 것이다. 없는데서 생기지는 않았잖아요. 내 양 이용해서 네 양 만들었다. 그래서 보이는 것은 다 내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라반과 야곱을 만나게 했고 그것이 야곱과 하나님과의 만남에서의 성취된 야곱언약의 예비적 언약, 또는 파생된 언약, 지상에 구체화된 언약의 내용을 이런 식으로 표출하게 하신 겁니다. 여러분, 만남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세상 사람들의 만남이라 하는 것은 전화 걸고 만나면 되고, 그 집에 가서 만나면 되지요.

만나고 싶으면 만날 수 있어요. 헤어질 마당이라도 억지로 만나면 만나는 거지요. 만나고 싶으면 만나고 안 만나고 싶으면 안 만나면 돼요. 세상 살면서 우리의 만남이라 하는 것은 기껏 그겁니다. 결혼해서 살다가 헤어지면 그만이고 또 살다가 만나면 그만이고. “좋은 친구로 남겠습니다.” 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 만남이 만남의 전부라고 여깁니다. 그것은 천국 백성이 아니지요. 천국백성은 기껏 인간들이나 만나는 만남이 아니고 누굴 만나야 되느냐? 하나님을 선행해서 만나야 돼요. 글로바라는 사람, 누가복음 제일 마지막 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소문 듣고 실망해서 한 사람 더해서 두 사람이 다시 엠마오로 내려가는 도중인데 중간에 한사람이 눈치 없이 끼어들어서 세 사람이 내려갑니다.

저녁 먹을 때쯤 되어서 식사하다가 예수님께서 눈 뜨게 해줬어요. 죽었다는 그분을 산채로 만났습니다. 여러분, 글로바라는 제자와 또 한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잖아요. 그러면 글로바에게 삼성그룹 회장직을 주면 그가 기분좋아하겠습니까? 대통령 시켜주면 기분 좋아하겠습니까? 평생을 살면서 최고의 만남, 그 한 번의 만남만 있어도 오늘 밤에 죽어도 괜찮아요.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예수님 따라다닌 제자들도 아니었습니다. 딱 한 번의 만남이었습니다. 그것도 마지막 밤에 십자가 동기생으로서 만났어요. 정말 성령 받았어요? 정말 신자입니까? 세상 일가지고 징징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시렁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징징대는 것은 그렇고 그런 만남들이에요. 그렇고 그런 만남에 실망했고, 그렇고 그런 만남에 사기 당했다고 짜증내고, 그렇고 그런 만남에 낙담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화풀이하잖아요.

그러나 그렇게 실망스럽지 않은 만남, 최고의 만남을 이미 야곱이 만났어요. 사다리 타고 만났어요. 사다리 타고 내려오는 그 만남, 그 만남에서 야곱은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최고였습니다. 자신만만합니다. 하나님의 그 만남이 이어져 간다는 것. 한 번 만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 만남은 죽을 때까지 다시 얼굴과 얼굴을 볼 때까지 죽 연속성을 가지고 이어지는 만남이니까 더 이상 추가될 것도 없다고 여긴 겁니다.

야곱의 입장에서는 이미 구원이에요. 개인적, 사적인 구원은 된 겁니다. 문제는 야곱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야곱을 만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야곱은 장차 나타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의 언약, 지상의 천국이 어떤 형식과 모양새로 사람들에게 드러날 수밖에 없느냐, 그 내용은 어떻게 구성되느냐,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찌감치 야곱의 하나님으로 오신 거예요.

참,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 자체가 굉장히 어려워요. 야곱 있고 하나님 있고 둘이 만나는 것이 야곱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야곱 안에 하나님이 들어오는 것이 야곱의 하나님이에요. 들어와서 야곱을 어떤 식으로, 야곱 본인이 원하는 인생을 못살고 이미 야곱 안에 삽입된 거지요. 세상 만남은 그냥 얼굴의 만남이고 전화 통화하는 그냥 만남이에요.

주님의 만남은 고취튀김처럼 고추의 씨앗 다 빼내고 고기 다져서 그 안에 집어넣어버립니다. 껍질만 야곱이고 그 안에는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어떤 형태로 들어가느냐 하면, 라반의 형태를 가지고 이 땅에 천국을 보여준다는 사실, 이게 언약입니다. 야곱아, 너는 라반을 만나야 돼요. 라반이 어떤 인간이냐 하면, 저것도 내 것, 이것도 내 것, 내 것인데 상실되었다는 겁니다.

너 때문에. 야곱 네가 내 것을 빼앗아 가고 앗아갔다는 겁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분명히 합니다. 야곱은 분명히 복의 근원 맞아요. 그런데 그 복, 재산 증식된 것, 자식 많이 낳은 것,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겁니다. 그게 어디서 유입된 거예요? 그것은 야곱의 주변에서 유입된 거예요. 복의 근원이라 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주변의 저쪽 소유를 이쪽 소유로 전환시키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대목이 어려워요. 야곱은 자기 갈 길 가고 라반도 자기 갈 길 가면 돼요. 억지로 만날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만나서 재산의 유동이 일어난 것도 아니에요. 만난 후에 자식을 양자형식으로 빼앗기는 것도 없어요. 전혀 변동사항이 없는데 왜 하나님이 만나게 했던가? 47절에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칭하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칭하였으니.”

그것을 또 미스바라 하지요. 이게 뭐냐 하면, ‘증거의 무더기’ 하나님의 언약을 세우는 거예요. 이 지상에서 언약을 세우는 겁니다. 언약을 세우는데 언약의 내용이 뭐냐 하면, 라반은 언약을 세우면서 “야곱아, 네 것이 된 것은 원래 내 것이었다.”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야곱의 아들들 죽 모아놓고 돌무더기 세워놓고 언약을 체결한 겁니다.

이제부터 진짜 어렵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생각해 봅시다. 빼앗긴 놈이 짜증낸다고 해가지고 그걸 재삼 확인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거지요. 졌으면 진 것이지 비겁하게 “그거 내 꺼다.” 질투합니까? 약 올라서 화를 내고 있습니까? 왜 증거라고 하느냐 하면, 오늘 본문 49절에 보면, “이는 그의 말에 우리 피차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감찰하옵소서 함이라.”

너와 나 사이를 끈으로 봅시다. 야곱과 라반 사이에 끈으로 이어졌어요. 그러면 어느 것이 시작인지 어느 것이 끝인지가 구분이 안 됩니다. 왜? 이게 끈이니까 전체가 시작이고 전체가 끝이니까. 전류가 통하듯이 통하는 것이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다 라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네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것을 감찰한다고.

감찰한다는 말은, 너와 나 사이가 끈이 찢어지듯이 끊어지는 관계가 아니고 융합된 관계로 하나님께서 조성을 했다는 겁니다. 야곱은 빈털터리고 라반은 부자였는데 이쪽 라반의 재산이 어디로 이동했느냐 하면, 야곱 쪽으로 다 이동을 해버렸습니다. 이동을 하면서 그냥 이동을 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야곱에게 복을 주셔서 저것을 빼앗아서 야곱 것이 되게 했다.

수월하게 그렇게 넘어가버리면 어떤 요소가 삭제되느냐 하면, 아브라함의 요소가 삭제되고 이삭요소가 삭제돼요. 아브라함과 이삭 이전에 노아언약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노아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 때에 노아가정만 구원하기 위해서 방주를 만들라고 하는 그것이 노아언약이거든요.

그러면 노아는 방주에 있어서 땅의 요소가 되고 방주는 하늘의 요소가 돼요. 방주 안에서 하늘의 요소가 노아와 같이 동승을 하게 되는데 그 동승하는 요소가 뭐냐? 정결한 짐승이 되는 겁니다. 나중에 이 정결한 짐승은 땅이 마를 때 나와서 노아가족을 위해서 피를 흘리는 희생제물이 되는 그 요소가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노아는 언약의 뒷면이 되는 거예요. 또는 뒷짐. 지게 질 때의 그 뒷짐. 에녹처럼 “노아야! 하늘로 오너라.” 그렇게 하면 되는데 에녹언약은 없습니다. 언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노아로 하여금 구원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다지는 요소로서 노아가 언약에 참여되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언약의 주인공은 따로 있어요. 정결한 짐승, 피 흘려야 될 제물이 중심이 되어야 되고 노아는 그 덕분에 언약을 구성하기 위한 뒷면, 뒷짐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실제적으로 이 땅에서는 뒷짐이, 뒷면이 나타난다고요. 선악과 따먹은 것을 하나님께서 무효화시키지 않고 생명나무가 이 땅에 정착할 때 선악과를 생명나무의 뒷면으로 결합을 시키는 겁니다.

그냥 뒷면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에다가 붙여요. 아담은 흙이 되게 하고 죽음의 징후를 갖고 있는, 죽음의 징조를 보여주는 존재로 만들고 하와는 이름이 생명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하와의 뒷짐, 뒷면이 되는 겁니다. 그래야 여자의 후손이 성도를 살리지요. 여자의 후손이 하나님의 약속된 백성들을 살리는 겁니다.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입니다. 하와의 후손 때문에 죽을 아담이 살아요. 이것은 누가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택한 성도들은 이 땅에서 해야 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사적인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천국은 어떤 식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들이 구원되었느냐? 선악과 따먹은 죄인이 분명한데 선악과 따먹었는데 나중에 천국에 가 있더라. 어떻게 그러한 희한한 일이 벌어졌느냐 그 말이지요.

다 선악과 따먹은 죄인이거든요. 죄인이라고 다 죄인이 아니에요. 생명의 뒷면으로서의 죄인이 있어요. 언약의 뒷면, 언약의 혜택을 입는 죄인들이 따로 존재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바로 노아가 되고, 아브라함이 되고, 이삭이 되고, 야곱이 되는 겁니다. 야곱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만남은 사다리를 통해서 하늘과 땅의 만남으로서 야곱은 신이 났어요.

희희낙락이지요. “나 하나님 만났다. 구원되었다.” 구원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구원되기 위해서는 누가 이 땅에서 희생해야 되는가? 그 희생자는 라반에 속한 여자 라헬입니다. 라헬이 죽어요. 라헬이 드라빔을 훔쳤잖아요. 지금 라반이 끝까지 7일 동안 지독하게 추격해서 야곱을 만난 이유가 딸 보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손자나 야곱이 보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딸 라헬을 보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신을 상실했다는 것, 잃어버렸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라반이 갖고 있던 그 신, 드라빔을 누구 쪽에서 가져갔느냐 하면 야곱 쪽에서 가져갔어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야곱 본인이 금시초문이라는 거예요. 우리 신 여호와가 있는데 그 신을 왜 믿습니까?

거짓 신에서 숨어 계신 하나님으로 넘어오려면 거짓 신을 가진 자가 죽어야 돼요. 라헬이죠. 라헬은 라반의 딸이에요. 라반이 그랬잖아요. 저 딸은 내 것이라고요. 그 내 것으로 살았던 존재자가 죽지 아니하면 야곱의 세계, 야곱의 영역으로 넘어올 수가 없습니다. 라헬이 드라빔을 훔쳤다는 말은, 성경에서 그것을 강조하는 것은, 신에 대한 주도권이 야곱 쪽에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세상신이 있잖아요. 드라빔 같은 이 세상신도 하나님의 언약에 다 쓸모가 있는 겁니다. 내가 죽는다는 말은 내가 자살한다는 말이 아니고 그동안 내가 알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게 우상이고, 악마고, 가짜라는 사실을 느끼지 아니하면 이쪽 언약영역에 속한 인간이 아니에요. 삼위일체 하나님, 이게 사기고 거짓이라는 것을 느끼지 아니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기독교신학의 삼위일체가 거짓된 하나님이에요. 왜? 삼위일체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죽이신 그 만남의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기 때문에 그래요. 삼위일체 외워서 뭐할 건데요? 그 정보를 알아서 뭐할 건데요? 신이라는 것은 인간의 상상이 투영된 거예요. 백날 신학 연구해보세요. 지옥 갑니다. 신학교 나와서 지옥 가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잖아요.

목사들 보세요. 신학해서 교회 장사해서 지옥 가잖아요. 그들에게는 이 교회 따위도 소용없다는, 이 교회 따위도 가짜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목사 가운데 몇 명이나 되겠어요? 성령 받은 내가 교회고 내가 성전이라는 것을 알아야지 돈 좀 나오는 그 교회가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건 몸집 키우는 거잖아요.

교인들에게 천국 팔아먹고 자기는 교회라는 몸집 키우고. 그게 라반의 신이에요. 라헬이 죽었을 때 그것은 곧 라반의 신의 죽음과 마찬가지입니다. 라반이 아버지의 드라빔, 그 신을 왜 훔쳐갔을까요? 우리 남편이 여호와 하나님의 주도권이 있다. 훔칠만한 위치에 있기에 훔쳤다는 것도 되고 또 뭐가 있느냐?

우리 아버지가 그것 가지고 부자 되었으니까 나도 이쪽 신에다 드라빔까지 추가하게 되면 그야말로 물 셀틈 없는 복이 온다는 것, 여호와 가지고 모자라는 것은 이 드라빔을 가지고 보충할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교회 나오는 권사가 예수 믿으면 되는데 예수도 믿지만 1월에는 점을 보는 거예요. 재미로 본다고들 하지요. 여성주간지에 나오는 별점 있잖아요.

그것도 보고 사주팔자도 봐서 물 셀틈 없이 복이라는 복은 다 받아내겠다는 그 의식, 그 의식은 끝까지 라반의 내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야곱은 이제 라헬이 죽기 전에 먼저 죽어요. 야곱 죽는 장면이 32장에 나옵니다. 거기서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하는 말은, 지금껏 내 식으로 살아온 것은 생명도 아니었다. 이것은 살았다고 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는 산목숨이 아니고 지옥 갈 저주받은 목숨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아니고 직접 자기하고 씨름판을 벌였던……, 강호동이지요, 씨름을 한 그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하늘에 있을 때는 “하나님, 제가 어떻게, 어떻게 하겠습니다.” 하고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요. “하나님, 십일조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막상 그 멀리 있는 하나님이 코앞에 등장하니까 내가 삼촌 집에서 얻었던 그 풍성한 재산과 자식을 지키고자 달려드는 나의 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지킬 때 순서를 정하는데 라헬을 제일 마지막에, 제일 위험이 없는 곳으로 빼돌려 버립니다. 빼앗겨도 그만인 것은 제일 앞자리에 세우고 ……, 진짜 야곱이 라헬을 너무 사랑했어요. 야곱언약이 아니라 라헬 언약 같아요. 모든 것을 빼앗겨도 이 여자만큼은 허락하소서. 임재범의 고백처럼 이 여자만큼은 허락하소서. 정말 그 정도로 사랑했던 라헬인데 그 라헬이 라반과 언약을 이루면서 하나의 가교, 다리역할을 합니다.

그 라헬이 라반의 신을 가지고 왔습니다. 야곱은 “나는 몰라요.” 결국은 증거의 언약, 이 지상의 착륙언약, 이 지상의 언약을 구성하는 동기가 되었던 그 일은 라헬이 아버지의 신을 훔쳐온 것입니다. 이게 속임의 승리에요. 얼마나 야곱과 라헬이 그리고 라반이 얼마나 세속적입니까? 진짜 야곱의 언약의 뒷면, 뒷짐은 야곱이고 라헬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뒷짐은 라반이 되는 겁니다. 언약이 그런 식으로 세상 속속들이 그런 식으로 다 파급되어 들어갑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세상은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새언약의 관할 하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김 정은이가 뭘 해도, 핵폭탄을 만들어도 그것도 새언약의 관할 하에 그렇게 하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것이 육의 요소고 그 육의 요소 속에서, 죄 속에서 의가 나오니까, 죄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나오니까 그 죄의 편만, 죄의 보편성, 심판과 죄의 보편성, 거기에 구원받은 우리도 같이 녹아져 있어요. 여러분, 아이스크림 난로 앞에 있으면 다 녹지요. 얼어 있을 때는 모양도 나지만 녹아버리면 이것이 완전히 죽이 되잖아요.

우리도 육이에요. 육이지만 우리 속에 있는 예수님의 그 새언약의 뒷짐이기 때문에 그 점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에요. 똑같이 우리는 세상 것으로 살고, 세상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는 하나님의 십자가 안에서 날마다 죽어야 되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만 살아나야 돼요.

그 언약적 작업이 계속해서 생동감 있게 유지되는 겁니다. 주님의 만남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제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야곱은 이미 하나님과 만났어요. 야곱언약은 체결된 겁니다. 체결될 때 야곱은 자신이 움직이는 언약이라고 해서 자랑질 했겠지요. 하나님은 내 편이다. 복 주신다. 나는 부자 되었다. 자식 열한 명까지 낳았다.

나는 이제 자신만만하고 아버지처럼, 할아버지처럼 이제 나는 복의 근원이다. 나는 힘을 가졌다. 그랬는데 그 힘은 육의 힘이었고 그 속의 본인도 육이었습니다. 이제 창세기 32장에서 육속에서 나는 것은 육이고 육속에서 영이 되는 것은 직접 진짜 핵심 되는 언약의 그분이 야곱과 한판 목숨 거는 싸움을 벌이고 난 뒤에 야곱은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 할 때 비로소 야곱 속에서 언약의 하나님은 낮아진 모습으로 이 땅에 그 구체화를 다 드러낸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멀리 있는 신 찾지 말고, 우리가 외우고 있는 가짜 신 말고, 직접 우리 인생 속에, 네가 죄인이며, 강도며, 세리며, 창기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전혀 거룩하지 않음을 까발려 주시는 이 만남의 하나님을 십자가를 통해서 찬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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