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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6 11:14:39 조회 : 2461         
   '피'와 주권 이름 : 김성환(IP:125.178.0.183)   

'피'란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중 하나는 인간은 수동적 존재이지 능동적 존재가 아니다란 사실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그 마음과 행함에 죄 밖에 나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성령이 성도 마음에 내주하더라도 육신에 이끌리는 연역한 인간은 성령의 소욕을 거역하고 육신의 죄를 범하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맞나요? 그래서 성도는 십자가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수동적 존재란 것입니다. 비록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 선택조차도 십자가란 잣대에 벗어날 수 있는 경향이 농후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모두 부족하기 때문이죠. 맞나요?

그렇다면, 목사님, 인간이 움직여서 죄밖에 나오지 못한다면 차라리 성도와 목사와 교회를 야단치기 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는 것이  이롭지 않을까요? 목사님이 아무리 십자가의 피와 도를 외치지만 인간은 아예 들을 귀가 없는 고로 복음은 뒷전이고 인간은 성도조차 죄의 뭉치안에서 꿈틀거리는 존재밖에 안되기에 그냥 하나님의 소관에 맡겨버리시고 목사님은 그저 하나님이 있게 하신 곳에서 십자가의 피와 복음만 전파하는 것이 편한 것이 아닐까요? 언젠가 목사님처럼 하나님의 자녀라면 예수만 알고 믿고 사랑하고 그 이름만 증거하겠죠.

그러니까 인간들 생각과 마음보다 높으신 하나님의 생각과 주권에 모두 맡겨버리고 십자가의 피와 진리를 예수님오시는 그날까지 힘차게 전하는 것이지요. 아담의 타락과 구원이 창세전에 하나님의 계획속에 담긴 것이라면 아담의 후손인 인간들도 같은 하나님의 입장(하나님의 주권)에서 보는 것이 어떨런지요?  내 양은 내 음성을 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느니까 언젠가 오늘도 주님의 음성을 듣는 하나님의 자녀가 여기저기서 툭툭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지듯 생기겠죠. 너무 편한 신앙이 아닐까요? 맞나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단지 그들을 주관하시는 예수밖에 없는데 그냥 예수만 전하는 것이지요. 그 예수가 다른 예수가 될 수 있겠지만 성경대로 약속대로 진리대로 성령의 인도하심따라 십자가의 복음만 증거하고 사는 것이 피에 속한 자녀가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목사님 조언과 충고부탁드립니다.

 

 

 

 이근호 08-12-26 12:33 
사도 바울은 명령과 훈계의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럴 때 주변의 사람들은 "네가 뭔데?"라고 합니다. 즉 그들은 '사도 개인적 신앙과 의견'을 피력한다고 본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도의 말을 이해 못했습니다. "천사가 할지라도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야"(갈 1:8) 여기에 대해서 거짓 사도들은 반응은 이러합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이 도리어 이단이니 조심하라"
복음이란 하나님의 주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이슬람교 쪽에서 도리어 더욱 심하게 주장하고 발달했습니다. 신의 주권과 섭리에 맡기고 마음으로 평화를 얻자는 주장은 불교쪽에서 강하게 주장합니다. '신의 주권'과 '십자가 복음'과의 차이를 아셔야 합니다. '신의 주권' 앞에서 우리는 그저 관찰자로만 머뭅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우리는 그 십자가 사건 현장 안으로 끌어당겨서 우리로 하여금 '가해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즉 초연하는 것처럼 행세하면서 구원만 챙기겠다는 우리의 이기심이 이 땅에서, 그것이 죄라고 지적하는 복음 증거자를 심하게 미워하고 배척하고 있다는 겁니다. 바로 '피'란 이처럼 자신의 죄를 근원적으로 파악하는 자에게는만 '전부'로서 작용합니다. 즉 '십자가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저주를 받을지어다'에 동참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소위 '자기 의'에 고수하는 자들을 향하여 진정한 사랑을 말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훈계와 명령으로 다가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즉 어느 누구도 자기의 힘으로 십자가 사랑을 행사할 수 없음을 알게 합니다. 이로서 왜 십자가 피만이 사랑이고 능력인가를 알게 합니다. 예를 들면, 에베소서 5장에서는 '아내 사랑하기를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것처럼 하라'고 하시면서도 고린도전서 7장에서 '아내 있는 자는 마치 없는 자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상반 되어보이는 명령으로 인해 성도는 더이상 자기 의 쌓기를 불가능함을 깨닫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즉 그 어떤 말씀도  십자가 사랑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지 아니하면 능력적인 사랑으로만 활동해서, 모든 영광을 예수님 공로로만 돌리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 능력이 바로 오직 피에서만 나오지요.
간추려 말씀드려서, '피'라는 책의 주제는, 피 사건 속에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도 초연할 수 없고 부정적으로 휘말려들어가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겁니다.
 김성환 08-12-26 18:39 
그럼 사도바울의 로마서9장의 토기장이 비유에서 토기장이의 권한을 어떻게 보면 될까요? 애굽의 바로를 세워서 어린양의 피로 자기백성을 불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단독적인 주권이 아닐까요? 불교와 회교권에서 말하는 신의 주권과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비교할 수 있나요? 내용적으로 의미적으로 차원이 다른 것이 아닌가요? 목사님의 말씀처럼'피'사건 속에 인간이 초연하다면 그건 인간의 '운명론'과 '숙명론'이겠죠.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은 '숙명론'도 '운명론'도 아닌 모든 만물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언약적 사랑안에 묶여진 존재가 아닌지요? 누가복음의 탕자가 아버지 집에 나가 텅비어 돌아오는 것도 십자가의 사랑(주님의 주 되심)에 묶여진 자기백성을 강권하여 부르시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지금껏 알고 있었습니다. 목사님 답변부탁해요. 기존사고체계를 정리하는 것은 시간을 요하는 것 같습니다. '피'란 책에도 인간의 근원적인 분석과 세상이치의 내막을 지적하고 있듯이 저 역시 그중에 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궁금한 것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또한 인간이기에 이렇게 질문을 올립니다.
 이근호 08-12-27 02:13 
아래의 글은 10 여년 전 제가 썼던 어느 글입니다. 참고가 되실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한 인간의 의지는 사실은 탐욕의 소산이다. 죄인은 징벌의 대상이지 구원의 대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구원받기를 소원하고 기독교로 몰려온다. 그러나 거기서 만나게 되는 것은 구원자의 죽음이라는 역설과 불 합리이다. 구원해야 할 자가 도리어 이 세상에서 매 맞아 죽어 버렸다. 이것은 구원의 성공이 아니라 실패이다.
여기서부터 사이비한 기독교는 십자가의 거침돌을 빼 버리려고 한다. 그 방법으로 등장되는 것이 신의 존재와 속성에 대한 사변적인 탐색이다. 십자가에서 구원관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신의 본성에서 구원관 시작한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인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죄인을 벌하실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는 점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속성을 공의로움과 사랑, 둘을 들고 잇지만 끝에는 공의 쪽을 놓아 버리고 사랑만 들고 있게 된다. 왜냐하면 이 둘의 속성은 상호 상충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둘 다를 말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변적 사이비한 기독교는 신의 속성을 신의 계시 활동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과 연관시켜서 이해하려 든다. 이렇게 되니 세상을 버리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이 거추장스럽기에 버리게 된다. 그들은 말하기를 세상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다고 말한다. 왜 세상이 헛되어야 되냐고 물으면 자기가 그 속을 이제 떠났기 때문에 자기 입장에서 헛되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세상은 이제 더 이상 자기에 불필요하다. 초월적 존재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 마음을 몰두시킴으로 세상은 더 이상 자기에게 도움이 않게 된다. 그래서 세상을 기피한다. 세상은 더이상 나를 살려내지 못한다. 세상은 더 이상 나의 동반자도 아니다. 세상은 더이상 나에게 위로할 것이 없다. 그래서 세상을 버리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죄 때문에 헛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자기에게 매달려 있은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죄인 자신을 끝까지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 죄이다.(요 12:25)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것이 죄이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죽을 때 자신과 함께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죄이다.(갈 2:20) 이렇게 되니 자기 구원에 집착해 있기에 세상을 도피하여 피안의 세계로 나아 갈려는 의지는 죄악의 의지이며 십자가를 거치지 않는 구원이기에 효력이 없다. 자신의 죄 문제를 자신의 의지에 의한 신앙으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바로 죄라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 이것은 사이비한 기독교인 동시에 종교로 위장한 철학적 허무주의의 한 단편이다. 초월적인 존재를 통해 자신의 허무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뜻하는 세상에 대한 기피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 십자가 사건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세상은 죄로 하나님께 벌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 인간은 죄악된 세상은 미워하면서 죄인 된 자신은 미워하지 않고 사랑한다. 여기서 죄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죄인 된 자기에게 계속 집착을 함으로 계속 심판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 자기 죽음으로 이해해야 될 십자가를 자기 위로로 이해하기 때문에 왜곡된 십자가 속에 놓이게 된다. 이 왜곡된 십자가의 토대 위에 전개되는 기독교는 니체에 의한 야무진 공격의 표적이었다.
십자가 사건이나 뒤이은 부활 사건, 또 승천과 성령의 강림 사건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심판의 표적들이었다. 우리보고 세계를 포기하라는 심판이 아니라 너도 죽어 마땅한 인간이라는 하나님의 의사 표시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있어 대립되는 두개의 주체를 보게 된다.단순히 나와 타인이라고 구별되는 주체의 대립은 '나'라는 의식에서 비롯된 발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발상은 '하나님의 나라'의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제외한 그 어떤 것도 독자적인 고유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 나라는 하나님 나라의 걸림돌이며 장애물도 인식된다. 세상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리를 물러 주어야 되고 그러기에 언젠가는 소멸되어야 한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의한 선택론과 주권사상에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분이 오셔서 이러한 신학을 근원적으로 붕괴시키고 말았습니다. "너희들은 악마의 새끼다"고 말입니다. 즉 너희들이 알고 있는 신학은 곧 악마가 가르쳐준 신학이다는 겁니다. 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나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이런 욕과 저주를 얻어먹어야 했을까요? 그것은 자신들의 근원적으로 죄인이라는 인식이 없었고, 그저 하나님의 주권사상으로 무장한 경건성만 갖추면 진리에 아무런 하자가 없을 것이라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즉 스스로를 근원적 죄인으로 지적할 수 있는 그 어떤 사건을 그들은 만나지 못한 겁니다.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의 허무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근원적으로 죄악된 발상임을 지적해주는 요소가 개혁주의 신학 자체내에 들어있지 않다는 점이 오류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인데 개혁주의자들은 개혁주의 신학이 곧 진리인 줄 알고 있습니다. 마치 바리새인들과 같습니다. 예정론이나 주권사상이나 모두 십자가에서 새롭게 도출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구원을 위한 예정론이나 주권사상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예정론이고 주권사상임이 새롭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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