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질문 / 답변

            가족나눔터

            사진첩

            주일학교

            중고등부

            청년회

 

 

 

 

질문 / 답변

HOME > 게시판 > 질문/답변

 

 

 

 

 
2005-02-24 13:42:42 조회 : 1540         
   평해주십시요.(펀글) 이름 : 장병엽(IP:)   
1.선한 창조계
성삼위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로 선하게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모든 것을 지으셨다.
특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땅을 정복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에덴에서의 그들의 "문화적 삶의 방식"이었다.
아담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며
그의 삶의 방식을 영위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였다고 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이 분명하며,
그에게는 "자유"와 "능력"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 선한 창조계를 바라보시며 심히 기뻐하셨다.
6일 동안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안식"에 들어가셨다.
하나님은 제 7일에 "안식"하셨다.

2.창조의 마지막 단계; 하나님의 안식
하나님께서 창조계를 선하게 지으셨음이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그 모든 사역을 완수하셨다.
인간을 포함하여...
그러나 그것이 "창조의 끝"이었는가?
하나님께서는 제 칠일에 안식에 들어가시며,
인간에게 "한 가지 금령"을 주셨다.
그것은 선악과 언약이었으며,
이것은 "언약"인 동시에 "시련의 명령"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완벽하게 창조되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자유와 능력이 있었다.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영화로운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즉,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에게는 "절대적인 확실성"이 아직 있지 않았다.
그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자유와 능력이 있는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었지만,
아직은 "불확정적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계획하셨는가?
선악과 금령, 선악과 언약을 통해
무엇을 계획하셨는가?
이것은 언약인 동시에 시련의 명령이었으며,
이 시련의 명령을 통과함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케 하시기를 원하셨다.
인간에게는 장차 그의 운명을 결정지을
"시련의 명령"을 통과해야 했던 것이다.
이 시련의 명령을 통과함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
그것은 인간의 영화로운 상태에 이르게 됨을 말한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뿐 아니라,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
불확정적 존재에서 절대적인 확실성을 소유한 상태...
그러나, 인간의 영화로운 상태 뿐만이 아니다.
모든 완벽하고 선하게 지음 받은 창조계 전체가
아담이 시련의 명령을 통과함으로
영화로운 상태에 이를 것이었다.

3.선악과 언약=시련의 명령=십자가
하나님께서는 동산 중앙에
두 나무를 두셨으니
하나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요,
또 다른 하나는 생명나무였다.
인간이 시련의 명령을 통과하면
인간을 포함한 전 창조계가 영화로운 상태에 이를 것이었다.
결국 하나님의 창조는
성삼위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로 선하게 6일 동안 지으셨으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감으로 종결되는 것이다.
도대체 하나님의 안식이 무엇이었길래,
인간을 포함한 전 창조계가 영화로운 상태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나님의 안식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었다.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세 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하셨던 것이다.
아담이 시련의 명령을 통과함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참된 안식에 들어가게 하셨다.
아담이 시련의 명령을 통과하면
인간을 포함한 전 창조계가 영화로운 상태에 이를 것이었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이었다.
그러나...자유와 능력이 있었던 인간에게
뱀이 등장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
시련의 명령은 사실은 시련의 명령이 아니었다.
그것은 언약이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하여 영화로운 상태에 이를 것을 계획하셨다.
아담에게 주어진 시련의 명령은 시련의 명령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며, "영광스러운 명령"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영광스러운 명령을 계속해서
시련의 명령이라고 표현하는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아담이 시련의 명령을 통과치 못하나,
그 시련의 명령을 통과함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도래케 하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 분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포함한 전 창조계가
영화로운 상태에 이른다.
새 하늘과 새 땅,
성경은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함이라" 하며,
그리스도를 통한 온 우주의 회복과 완성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분명히 할 점은,
아담이 시련의 명령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지음 받은 것이 아니다.
그는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신 존재였다.
단,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에 있었으나
죄를 지을 수 없는 영화로운 상태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선악과 금령을 통과함으로 가능하다.
그가 선악과 금령을 통과했더라면
"영화의 단계"에 들어갔을 것이다.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하였을 것이다.

4.죄와 언약의 관계
죄가 무엇인가?
죄는 언약과 뗄 수가 없다.
언약을 어긴 것이 아담의 죄였으며...
언약에 불순종한 것이 이스라엘의 죄였다.
"언약의 내용"이 무엇이었길래 그러한가?
선악과 언약안에서도 이 금령을 통과하면
생명나무를 향한 길로 가게 된다.
즉, "영화의 단계"에 진입한다.
(보통, 죄를 과녁에 관련하여 많이 설명한다.
무시할 수 없는 것이며, 당연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언약과 관련하여
죄를 다루고자 한다.)

죄는 언약을 어긴 것,
즉 언약은 지키면 생명에 이르고,
지키지 못할 시는 사망에 이르도록 되었는데
언약을 어긴 이것이 "죄"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생명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듣지 못한 것...
그래서 찾아온 것이 "사망"이다.
언약은 "생명의 말씀"인 것이다.
선악과 언약도 그러했다.
언약을 지키지 못하면 사망이요,
지키면 영생이 약속된다.
그러면, 생명의 말씀인 언약의 궁극적 내용은 무얼까?
개혁신학자들이 이 언약의 중심주제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를
말하고 있다.
언약의 중심주제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다.
왜 언약을 어긴 것이 죄인지 이제 이해가 되는가?
언약을 어겼다는 것은
생명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듣지 못했다는 것,
언약을 어겼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약이 하나님과의 관계성과 관련되어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면, 언약이 궁극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을 성취하신다.
아담이 통과하지 못했던 시련의 명령...
그것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시련의 명령을 감당하신다.
그것은 십자가...
그러나, 그는 시련의 명령을 시련의 명령으로만 여기지 않았다.
즉, 고난으로만 여긴 것이 아니다.
그는 그것을 영광으로 이해하였다.
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셔다.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영화로써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의 그의 외침이다.
그것은 고난의 길...시련의 명령,
그러나 단지 시련의 명령만은 아니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도래케 할
영광스러운 명령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언약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본다!
그 때에야 비로소...
인간을 포함한 전 창조계가 "영화의 단계"에 진입한다.

5.문화명령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리는 첫 사람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땅을 정복하라고 하심을 듣는다.
그리고, 그것을 소위 문화명령이라 한다.
아담은 에덴에서의 문화적 삶의 방식을 영위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조의 마지막 단계로서
안식을 계획하셨다면...
즉, 선악과 금령이자 언약인 시련의 명령을 통해
영화의 단계를 계획하셨다면,
문화적 삶을 살게 하는 것이 그가 계획한
창조의 궁극적 목적일까?
어떤 개혁신학자는
하나님의 창조의 동기가 "기쁨"이었다고 한다.
그의 자발적인, 자유한 기쁨...
성삼위 하나님의 기쁨...
그런데 창조의 마지막은 "안식"이었다.
하나님은 아담이 시련의 명령을 통과함으로
안식에 들어갈 것을 계획하셨다.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다 내게로 오라 그리고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셨다.
나(예수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십자가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온유, 겸소...그의 자발적인 낮추심)
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 하셨다.
그리하면, 주님의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이며,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하셨다.
주님은 우리에게 쉼을 주기 원하셨다.
마음의 쉼...
주님은 하나님이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안식하셨는데
언제 부터 일하셨을까?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안식이 깨어졌을 때
따라서 영화의 단계에 이르기는 커녕
도리어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을 때
하나님은 구원 사역을 펼쳐나가셨다.
하나님이 일하셨다.
그것은 일방적인 그의 은혜였다.
여인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비롯하여...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구원사역을 위해 일하시는 것이다.
참된 안식을 회복하기 위해 일하시는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주님은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참된 안식을 회복하기 원하셨다.
창조 때에도 그 궁극적 목적이 "안식"에 있었다.
그렇다면, 문화적 명령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하나님은 문화명령을 이행할 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두신 것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에게 땅을 정복하라 하셨다.
그리고, 문화 또한 선하게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계는 선한 것이었다.
전 영역에 걸쳐서...
그러나, 소위 문화명령이라 불리는
그 문화적 삶을 살아가는 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두신 것이 아니다.
처음 창조 때에
아담이 선악과 금령을 이행하였다면,
즉 언약을 지켰다면
영화의 단계에 들어갔을 것이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에서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였을 것이다.
인간을 창조하신 궁극적 목적은
문화적 삶을 살아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신칼빈주의에서는 문화낙관론의 영향이 있다.
기세론자들에게서도 그 영향력은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세(기독교세계관)가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세는 창조의 영역=타락의 영역=구속의 영역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문화도 선하게 창조된 것처럼...
창조의 구조는 선한데,
타락과 구속의 두 방향이 있다고 월터스는 말한다.
창조의 구조와 타락과 구속의 두 방향...
이렇게 창조의 영역=타락의 영역=구속의 영역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원론을 배제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문화낙관론이 그 안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신칼빈주의, 기세를 모두 비성경적이기만 하고
전혀 받아들일 것이 없다고 배척하는 태도는 위험하다.
기세가 이원론을 배격함을 안다면,
그 장점 또한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력이 필요하다.
문제는 "문화에 대한 이해"인데...
"문화에 대한 낙관적이해는 타당하가?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데 있다.
문화를 낙관적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아니면, 비관적으로 봐야하는가?
기세가
창조의 영역=타락의 영역=구속의 영역으로
이해한 것은 바람직하다.
단지, 문화명령이라는 이름으로
그 논리를 전개하는 것,
따라서, 땅의 문화적 진보가 하늘의 영광으로 편입된다
(문화낙관론의 영향)고 하는 것은 위험의 소지가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분명, 기세에서는 문화낙관론의 영향이 보인다.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에서는 이런 논리가 보인다.
땅의 문화적 진보가 하늘의 영광으로 편입된다.
그가 이런 논리를 펼 수 밖에 없는 것은
선한 창조계가 온전히 회복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보는데 이유가 있다.
선한 창조계가 죄로 타락하였으며,
따라서 구원의 영역도 창조의 영역=타락의 영역=구원의 영역...
이런 식으로 보기 때문에
선한 창조의 구조였던
문화가 회복되고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 문화가 선하게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동의할 수 있다.
문화는 선하게 창조되었다.
아니, 전 창조계가 선하게 창조되었다.
그러나, 그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문화적 삶이 "일시적인" 것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문화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처음 창조 때에도 그러했다.
에덴에서의 아담 또한 문화적 삶을 살았는데
땅을 정복하고 다스림으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형상의 전달자로서 하나님을 반영해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문화적 삶은 창조의 끝이 아니었고
안식이 창조의 끝이었다.
즉, 아담이 시련의 명령을 통과하면
에덴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단계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게
계획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계획하셨다.
그것은 창세 전의 예정이었다.
단,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는 예정이었다.
이것이 아담의 자유의지와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예정과 자유의지는 대립의 개념이 아니다.
또한 예정은 아담이 타락할 것을 조건으로 한 것도 아니다.
즉, 예지예정이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무조건적인 그의 은혜로우신 계획이다.
이 모든 것을 볼 때,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
얼핏보기에는 에덴동산의 창설이고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선하게 창조하신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궁극적 계획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으며,
따라서...
에덴에서의 문화적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전체 계획이 아니다.
문화가 선하게 창조되었음은 성경이 분명히 밝히는 바일지라도,
아담과 더불어 온 우주는 선하게 완벽하게 창조되었을지라도,
아담이 시련의 명령을 통과함으로
아담을 비롯한 온 우주가 영화의 단계에 진입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문화는 선하게 창조되었다 하더라도
문화적 삶은 일시적이며,
그의 안식에 동참하게 될 때는
문화는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문화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땅의 문화적 진보가 하늘의 영광에 편입되는 것도 아니라,
인간을 비롯한 온 우주가 새롭게 변화된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감히 꿈꿀 수 없는 영화로운 모습으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궁극적 창조 목적인 안식에 비추어 보면,
소위 문화명령이라 불리는 문화적 삶의 방식은
안식에 들어가기 이전까지만 허용되는 것이요.
그 이후는 감히 상상하기 힘든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성경도 이 땅의 체질이 바뀌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문화는 인간의 삶의 방식이며,
에덴에서의 문화적 삶도 역시 아담의 삶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안식 이전까지만 허용된 것이다.
비록 선하게 창조된 문화라고 할지라도
성경은 선악과 금령을 어긴 인간이
타락 이후에 문화적 삶을 어떻게 오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성경은 문화가 선하게 창조되었을지라도
또한 타락의 결과 오용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인간은
그 스스로 영생에 이르지 못하자
문화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오늘날의 현대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문화를 통해 스스로를 높이고자 한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그러나, 명심할 것은 문화는 선하게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성경에서 발견되는 아주 이상한 점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셋 계열에서는
가인의 계열과는 달리
그토록 문화가 발달한 것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문화는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그 열망으로
발전하며 오용되고 있는 것이다.
처음의 문화의 본 뜻과는 달리...
하나님의 의도와는 달리...
창조 때의 아담은 그 문화적 삶을 통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형상의 전달자로서
하나님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동물의 이름을 짓는다.
그러나, 타락 이후 문화는 가인의 계열에서 발전한다.
오히려, 셋의 계열에서는
예배는 있을지 몰라도 문화의 발전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리고 성경은 땅의 체질이 바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면, 기세의 단점이 무엇인가?
앞서도 말했지만, 이 단점으로 인하여
기세자체를 완전부정하는 것은 금물이다.
거기서도 배워야 할 것이 있다.
기세는 선한 창조계이기 때문에
문화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으로 보기 때문에
문화가 창조의 구조임과 같이
구원도 문화의 회복과 완성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쉽게 말해서
땅의 문화적 진보가 하늘의 영광에 편입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은 땅의 체질이 변화될 것을 분명이 말하며,
문화낙관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구원은 문화의 회복과 완성이 아니라,
온 우주의 회복과 완성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온 우주의 회복과 완성...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면, 성도는 문화적 삶을 살지 말아야 하는가?
문화는 종말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에
문화를 무시해야 하는가?
나태해야 하는가?
카이퍼, 바빙크 등의 신칼빈주의자들은
특히, 카이퍼는 영역주권으로 유명하다.
영역주권을 주장하게 된 것은
그 시대 상황과 관련있다.
우리는 또 다시, 교회는 거룩하며,
세상은 거룩하지 않다고 말할 것인가?
모든 창조계가 하나님의 통치 영역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땅의 체질이 변화될 것이다.
그러나, 문화적 삶을 사는 데 있어서
즉, 문화명령을 회복하고 완성하는 것을 구원으로 착각하는
문화낙관론과는 다른 관점에서...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관점에서
문화에 대해 접근해야 한다.
땅의 문화적 진보가 하늘의 영광에 편입될 것이기 때문에
구원을 문화의 회복과 완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 때의 형상의 전달자였던 아담의 모습을 통해
문화적 삶에 충실함으로
하나님을 반영하였던 그 지혜로움...
즉, 동물의 이름을 짓는 그 모습...
우리는 이런 측면에서 문화를 접근해야 한다.
문화 역시도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일 뿐
땅의 문화가 하늘의 영광에 편입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이 문화의 회복과 완성이기 때문에
문화적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단지, 부르심을 받았기에
형상의 전달자로서 문화적 삶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문화낙관론적 견해로서
문화에 접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형상의 전달자이기 때문에
모든 삶의 영역에서 형상의 전달자로서
하나님을 반영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문화적 삶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나, 땅의 문화적 진보가 결코 하늘의 영광에 편입되지 않으며,
이 땅은 체질이 바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론; 크게는 두 가지를 논하였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언약을 지킴으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데
아담은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었으며,
아담이 시련의 명령을 통과하면
참된 안식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
그러나, 아담은 실패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한다는 것
이 때, 아담은 자유와 능력이 있었고,
하나님의 창조는 선하고 완벽했다는 것,
단 창조의 목적은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
둘째는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창조의 궁극적 목적에서 비춰보면,
소위 문화명령이라는
특히나, 땅의 문화적 진보가
하늘의 영광에 편입된다는 그런 논리,
즉, 구원이 문화의 회복과 완성이라는 문화낙관론의 영향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
그러나 문화는 선하게 창조되었으며,
인간이 영위해야 할 삶의 방식이기에
형상의 전달자로서 아담의 모습과 같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 속에서 문화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또 한가지 문화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땅의 체질이 바뀌며 임하는 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사실이다
    ◁ 이전글 다음글 ▷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986-0172, 010-3511-0172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copyright ⓒ 우리교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