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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7 22:10:17 조회 : 3289         
   팔복...? 이름 : 김홍배(IP:121.182.26.240)   

마태복음 5장에 나타난 팔복에 관한 설교나 글,

우리교회 사이트 어느 곳에 있는지요?

기독신문 사이트 홈피 왼쪽 하단 '백동조목사의 팔복강해'글을 읽다가

질문을 던져 봅니다.

시간이 나신다면 이 글을 읽으신 후

소감을 적어 주시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또 귀찮은 질문일지 모르겠습니다.

샤론교회 노우호목사님의 팔복에 관한 설교나 글에 대해서도

강평을 해 주신다면 더욱 더 고맙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을 제대로 알고 싶어서 입니다.

 이근호 10-02-08 09:10 
[주일 오전 설교]란에 보면 과거 마태복음 설교가 쭉 나와 있습니다.

천국 백성
2002년 11월 17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5:1-10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5: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사람이 아무리 눈을 굳게 감았다할지라도 다시 눈을 뜨게 되면 세상이라는 현실이 눈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속일 수 없는 현실이며 그 현실이 전부라고 여깁니다. 사실 인간은 세상이 보고 싶어서 자진해서 이 지상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다 보니 세상 안으로 던져진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거부하고 싶어도 이미 그 안에 놓여져 있습니다. 따라서 좋든 싫든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남아야 합니다. 허우적대면서도 말입니다.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경우가 하나 둘이 아닙니다.



인간은 세상을 자기 손을 넣으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세상이 요구하는대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야 합니다. 세상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이처럼 어쩔 수 없이 준어진 이 현실 세계조차 인간은 감히 감당을 못하는 입장에서 또다시 천국까지 고려해야 한다면 더 큰 짐으로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으로 살아남기도 힘든데 거기에다가 천국의 백성까지 되어야 한다면 두 배 이상의 노력이 소모될 것이라고 짐작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타협이 나올만도 합니다. "하나님, 우선 사는데까지 살아보다가 나이가 약 95세쯤 되어서 더 이상 이 세상에 버틸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아 떠나게 될 때에, 그 때 가서 천국에 대해 관심을 가져볼랍니다." 식으로 말입니다.



과연 이런 타협이 용납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리고 10절 끝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좀 이상한 느낌을 받습니다. 천국이라는 것이 이 세상 사람이 죽어서 다 들어가는 데가 아닙니까?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문을 활짝 열어놓으신 것이 아닐까요? 보통의 상점들은 문을 활짝 열어놓고 물건을 사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환영한다는 의사를 표시합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천국도, 나이가 많든, 적든, 처음부터이건 나중이건 상관없이 천국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다 들여다 보내주어야 하는 것일 아닐까요?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은 그런 것이 아니라 '저희 것임이라"고 해서 '저희'에 해당되는 그 사람들의 나라가 될 뿐이라는 겁니다. 즉 '저희'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도 부지기로 많은 법입니다. 그 사람들은 천국 백성이 아닙니다.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로지 천국은 '저희 것'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 흔히 있는 상점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고객이든 대환영한다는 그런 취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저희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달리 보면 이렇게 됩니다.



예를 들면, 오늘 본문은 다음과 같이 수정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심령이 가난하지 않는 자는 복이 없나니 결코 천국이 저희 것이 되지 못한다. 애통하지 않는 자는 아예 천국에 들어갈 생각이나 거기서 위로를 받을 생각을 아예 먹지도 말아라. 온유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을 수도 없나니 저희가 세 하늘과 새 땅과 상관없는 존재들이다.



의에 주리고 않고 목마르지도 않는 자는 저주받은 자니 저희에게만 배고픔만 있을 뿐이다. 긍휼히 여기는 않는 자는 지지리도 복이 없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턱이 없다. 마음이 청결하지 않는 자는 비극스러운 인생이니 저희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꿈도 꾸지 말라아 화평케 하지 못하는 자는 불행스러운 자니 저희가 악마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기는커녕 불의와 야합하고 굴복하고 타협하는 자는 곧 심판이 임하나니 지옥이 저희 고향이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언급하시면서 왜 '저희'라는 한계를 지으셨습니까? 그것은 천국과 팔복을 통해서 기존의 천국관과 축복관을 선제 공격하기 위해서입니다. 기존의 축복관은 '있음'의 축복관입니다. 넉넉히 있으면 하늘의 복을 받은 것이요 아무 것도 가진게 없으면 하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축복관에 준해서 보면 이 인간 사회에서 재물과 권력을 크게 가진 자가 복받은 것이 되고 여기서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아예 이런 축복의 양에 준해서 질서가 유지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못살고 가난한 자들은 신의 뜻에 의해서 저주받은 것이기에 이들은 필히 잘살고 힘이 큰 세력 밑에서 굴복당해야만 하는 것이 신에 의해 편성된 인간 세계의 바람직한 질서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이란 그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에 불과합니다. 큰 세력 앞에서는 아부하고, 하찮은 자들에게는 그들의 것까지 자기 것으로 변경시키려고 합니다. 이런 패역한 일들이 신의 축복론에 근거해서 정당화 되고 합법화되게 마련입니다.



가진 자은 원래 많이 가져야 하는 권리를 하늘의 축복에 의해서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인간 세계의 질서란 이런 대 원칙 하에 묵인된채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축복은 가짜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6:20-26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그러나 화 있을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 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대역전을 모의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배부른 자가 저주스럽고, 웃는 자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천국 이야기는 기존의 거꾸로된 이 세상의 정경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아무나의 것이 아니라 '저희'의 것일 뿐입니다. 두 사람이 쟁기를 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그리고 필히 다른 한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버려둠을 당할 뿐입니다. 두 사람이 잠을 같이 자지만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한 사람은 필히 버려움을 당합니다.



예수님은 너무나도 가까이 지내던 이 두 사람 사이에도 개입하셔서 기필히 떼어놓게 하겠다는 겁니다. 사람이 늘 같이 붙어다니다가 떨어지게 되는 아픔이 얼마나 큽니까?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도 괴로운데 같은 식구들 관계라면 오죽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이 소개하는 천국은 같은 인간들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늘 붙어다니는 것을 허용하지 않도록 주어지는 겁니다.

'백동조 목사의 팔복 강해'는 '예수님을 본받자'주의요 노우호 목사는 '하나님을 섬기자'주의입니다. 따라서 백동조 목사의 설교가 노우호 목사 설교보다 복음적이라고 오해할 수는 있겠지만 이 분 역시 복음 자체를 증거하기 보다는 추상적으로 인간들이 설정할 수 있는 그런 고상한 예수님을 본받자는 주의로 나오니 역사 둘 다 이단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심령이 가난한 것이고 무엇이 애통하는 마음입니까? 마태복음 5:11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여기서 예수님은 갑자기 앞에서 말씀하신 모든 내용을 자신에 관한 이야기로 전환시켜 버립니다.



즉 심령이 가난하지도 않고 애통하지도 않고 온유하지도 않는 마음을 예수님에 대한 핍박과 욕설의 마음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보고 계시는 겁니다. 이것은 진정 심령이 가난하고 온유한 자의 마음은 결국 오로지 예수님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기존 세계에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의'입니다. 예수님의 의는 오로지 예수님만이 만들고 주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마음을 가난하게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 봤자 자꾸만 자신의 의만 내부에 쌓이게 될 뿐입니다.



즉 마음이 가난하기는커녕 마음이 자신의 의로 말이암아 점점 부자가 될 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천국을 밀어넣기 위한 방책으로서, 자신이 행한 일 중에서 괜찮아 보이는 것을 놓치지 않고 수집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것은 결코 애통하는 마음이 아니요 의에 주리고 굶주리는 마음이 아닙니다. 진정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서 자신의 심령상태가 정말 거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세리와 창기와 같이 말입니다.



천국은 예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으로 들어갑니다. 결코 우리들이 행한 것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들의 마음 씀씀이가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지만 세상 사람에게 없는 것이 있을 때, 즉 예수님의 의가 있다면, 그것이 곧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자기 것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잘못된 복과 잘못된 인생관으로 인해 마음이 교만해졌다면 예수님의 의만 바라보는 가난한 심령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홍배 10-02-09 15:44 
어제부터 약 서른번 정도 읽었습니다. '오로지 천국은 저희것일 뿐' '팔복 역문패러디', '예수님의 의가 있다면 심령이 가난한 자(더이상 자기 것을 의지하지 않기때문)' 등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이란 이러한 것이다"라고 감히 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기도에 아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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