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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07 08:30:18 조회 : 1227         
   안산에서 있었던 질문과 답변 이름 : 이근호(IP:)   

안산 3월강의 후에 이어진 질문과 답변(답변은 이근호 목사)


(질문)


“산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답변)


그 말씀은 전도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전도서 9:3,4


(전 9:3)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전 9:4) 모든 산 자중에 참예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사람은 살았다고 아무리 이야기 해도, 살아보면 결국 늙고 죽습니다.
처음부터 사람에게는 죽음이 잡아 당기는 능력이 이미 내장되어 있습니다. 개는 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차라리 살아 있다는 것 자체를 기적과 축복으로 간주하라는 말입니다. 살아 있기에 허무한 것을 알게 된 것이 아닙니까? 살아 있는 동안 자기 분수를 알고 미래를 알아서 그 허무성을 알게 해주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질문)


아직 젊지만 죽을 병에 걸려서 병고에 시달리는 환자가 있다면 그는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답변)


너무 일찍 죽는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하고 비교하면서 억울해 하는 것인데 그 사람보다 더 먼저 죽은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만큼 오래 산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여길 일입니다. 우리도 결국 같은 길을 가게 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도 아직 살아 있다면 일찍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우리보다 그가 먼저 제대했다고 보면 됩니다. 다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영생을 주신 주님께 십자가를 통해서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질문)


일용할 양식은 무슨 뜻입니까?


(답변)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는 주기도문을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기 전에 나오는 주기도문이 있는데 거기에 실린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6:9-15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다
(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 6: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마 6: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전까지는 유대, 즉 구약의 풍토 즉 구약의 분위기입니다. 구약의 분위기란 현재의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보고 있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신약에서는 하늘나라가 약속의 땅입니다. 예수님자체가 약속이기에 예수님이 계신 곳이 하늘나라이고, 예수님이 구름타고 승천하신 그 곳이 약속의 땅이 됩니다. 예수님이 약속이기에 예수님 가신 경로를 그대로 따라가야 비로서 약속의 땅도 밝혀지는 셈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지신 뒤에야 부활이고, 승천이기에 십자가 이전까지는 아직도 약속의 땅이 구약에서 계시된 가나안땅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점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에 준해서 유대인들은 약속의 땅에서의 축복관이 있습니다. 약속의 땅에 있는 동안은 레위기에 있는 대로 축복을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입장에서는 너희들이 축복을 요구할 입장이 되느냐고 오히려 지적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보낸 메시야는 밀치고 핍박하면서, 자기가 살고 있는 이땅의 풍족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꾸짖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당시에 백성들에게 양식을 하루치씩만 줬습니다. 이틀치나 사흘치를 주시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하루치의 염려를 지날 수 없습니다. 내일의 것 까지 당겨서 염려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하루의 염려가 그날로 끝나 버리고 과거를 우리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영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라는 것도 있던데 성령은 지우개가 되어서 과거를 지워 나갑니다. 현재, 주님이 은혜를 주시기에 과거가 현재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 말은 지금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지 내 힘으로 하루를 버티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하루 하루, 자기 힘으로 버티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오늘의 하나님은 오늘 도우시고, 내일의 하나님은 내일 도우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늘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멀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기도는 “늘 하나님의 도와주심을 알게 하옵소서”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용할 양식이니까 은행에 저축도 하지 말라는 뜻이 됩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아직 십자기 이전에 구약의 풍토에서 그들이 이해하는 식으로 일용할 양식을 주는 땅이 약속의 땅이니 그 땅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기도가 변합니다. “주여 굶어 죽더라도 하늘나라 가게 해 주세요” 이것이 일용할 양식의 기도입니다.


사도는 굶더라도 하늘나라에 있으면 된다고 기도합니다.


(질문)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는 그곳에도 사단이 역사할 수 있습니까?


(답변)


있습니다. 이것을 주문처럼 사용할수 있거든요!
남묘호랑개교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이것이 주문이 됩니다. 어떤 문장을 외운다고 해서 마귀가 승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오히려 어떤 주문을 외우면 능력이 임할 것이라는 미신을 조장합니다. “자꾸 되풀이 해라!” 하든지 “기도할 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를 빼먹었으니 응답 안된다”는 식으로 조장합니다. 어떤 말을 되풀이 해서 외운다는 것 자체가 무슨 뜻입니까? 법적으로 정당하니까 효과도 있을 것이라는 공식을 세우는 것입니다. 거기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잊기도 하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작은 실수에 예민하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조장입니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내가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지, 어떤 실수를 내 힘으로 줄여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내 행동여하에 따라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질문)


거지 나사로와 아브라함의 관계는 어떻게 봐야 합니까? 거지 나사로를 보고 아브라함 품에 안겼다고 하는데요(눅 16:19-31).


(답변)


그것이 바로 십자가 이전의 구약의 풍토로 답변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사도바울은 예수님 품에 안기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나사로도 예수님 품에 안겼다고 봐야 합니다. 십자가 이후는 그렇게 완성된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빌 3:20,21


(빌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자 주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 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질문)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의 고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눅 23:39-43)


(답변)


“우리는 다 같은 죄인인데 어떻게 죄없는 분을 이렇게 정죄하는가? 우리는 죄인에 불과하나 저분은 죄없으신 분이다” 라는 놀라운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피차 초라한 입장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물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입장에서는 물에 안빠진 상태에 놓인 사람보고 건져달라고 할 문제인데, 같이 허우적 대는 입장에 놓인 예수님을 향해서 건져달라고 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믿음입니다.


또 다른 한편에 있는 죄수는 예수를 비웃습니다. ‘자기도 구원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구원자가 될 수 있느냐’고 비웃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웃는 것이 정상입니다. 


(질문)


그렇다면 그 고백을 한 강도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까?


(답변)


아마도 제 생각입니다만 평소에 그 강도는 예수님의 설교나 그밖에 이야기들을 풍문으로 많이 들었을 것이고 예수님 옆에 있게 된 그 순간에 그 고백을 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할수 있을 것입니다.


(질문)


말씀을 알면 알수록 이 세상은 허무 그 자체임을 깨닫게 되는 것일까요?


(답변)


세상이 허무한 것이 아니고 본인이 세상을 쳐다 볼 것이 없습니다. 세상은 내가 조작을 해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기분이 좋으면 세상이 밝아 보입니다. 로또라도 당첨되면 직장생활이 신나겠지요? 반대로 자기 기분이 침울하면 세상이 온통 어두워 보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이러쿵 저러쿵, 핑계 할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의 정당함을 법적으로 추구한 그 자체가 허무합니다. 그것이 참으로 헛된 짓을 한것이기에 허무합니다. 양심껏 산다고 노력한 그 사고방식 자체가 허무하다면 허무합니다. 그런데 그 허무한 것이 슬픔의 허무가 아니고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나자신과 세상을 제대로 아는 데서 오는 허무가 되기에 즐거움이 될 수가 있습니다. 즐거움!


흡사 꼭대기층에 이미 올라섰기에 아래층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훤히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산정상에 올라갔기에 중턱쯤의 것들이 다 알아진 것 같이, 이미 정상에 섰으니 이제는 허무하죠. 올라가면서 허무한 것은 아닙니다. 올라가면서 허무하면 도로 내려오는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질문)


세상은 어떤 목표가 있어야 성취도 있고 그래서 살맛이 납니다. 그런 것이 없이 살수가 없지 않습니까?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맞다고 쳐도, 목표는 내쪽에서 정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답변)


목표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조정이 됩니다.


(질문)


어떤 목표를 두고 그것이 내 인간적인 욕심인지, 하나님께서 주신 목표인지 그것을 어떻게---


(답변)


그러니까 그것이 내부에서 조정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내가 타워펠리스 80층 짜리에서 살고 싶다’고 할때 자기 내부에서 스스로 압니다. ‘참 눈도 높다’ 그러면 알아서 낮추겠지요? 그것은 사정과 상황에 맞추어서 자연스럽게 내려가서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이렇게 살아라”고 하실 때 인간 내부에서 “저는 그 정도는 못되고 이 정도는 됩니다” 하고 조정이 됩니다.


그 조정은 다만 인생을 살면서 자기 욕망대로 조정할 뿐입니다. 그렇게 조정하는 것은 뭐하고는 상관없습니까?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를 조정하든지 관계없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자기 욕망대로 스프링을 ‘늘렸다가 줄였다가’ 하는 것처럼 조정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다가 무슨 계기가 오면 ‘내가 너무 교만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만 알아야 할 것은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를 이런식으로 다루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질문)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알수는 있는데 구분하는 인식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내 인간적인 욕심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신 뜻인지 그걸 구분할 수는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답변)


그것을 구분하겠다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다만 ‘나는 이런식으로 사는 이것이 항상 상식이다’고 해야 합니다. 지금 문제가 무엇입니까? 나를 개선하고 고치겠다는 발상이 문제입니다. 고치려고 하지 마시고 있는 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있는 대로 사시는데 다만 구원은 내 바깥에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고치는 것과 관계없습니다. 구원은 고치는 것과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부지런히 고쳐 왔습니다.


(질문)


강의 중에 정리한 사항을 다시 한번 정리해주시기 바랍니다. 벌써 다 잊어 버렸습니다.


(답변)


1번, 바보같이 살자.
2번, 요구하는 것이 없다.
3번, 내 인생 내맘대로 안된다.


내부에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욕망의 조정과는 전혀 상관없이 구원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정하겠다고 덤벼드는 것이 아주 위험한 발상입니다. 그것은 또다시 법이 동원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법을 동원하는 것은 위에 정리한 것들을 다 무너뜨리겠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첫째로, 바보같이 살면 안된다는 반발이고,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자신에게 요구했다고 속이는 것이고, 세번째는 내 인생을 내 맘대로 조정하겠다는 뜻이 됩니다. 아주 위험합니다.


제가 늘상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성깔대로 살자는 것입니다 그 성깔이 조정이 됩니다. 나이가 들수록 거친 성질이 부드러워집니다. 20보다는 30대에, 30대 보다는 40대, 50대가 되어서 성질이 더욱 완화됩니다.


(질문)


정리 2번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다고 하셨는데 우리를 이렇게 살게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살아가지고---


(답변)


아닙니다. 살고 싶다는 것은 우리의 요구일 뿐입니다. 살고 싶다는 것은 내 요구지만 핑계는 하나님 쪽으로 돌립니다. 지금 질문하시는 것을 들어보면 인간이 백지상태라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백지 상태가 아닙니다. 다 과거에 한가락씩 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한가락 했다는 내용은 본인의 욕망일수도 있습니다.


또 타인의 시선, 요구조건, 논평등이 우리의 빈그릇 속에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부합하는 식으로 살게 됩니다. 이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멈추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멈춰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것대로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것대로 가는데 구원은 그것과 관계없이 그냥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질문)


그래도 우리를 살게 해 주시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답변)


살게 해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살아도 구원은 예수님 덕분에 구원되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욕망의 수위가 늘 조정이 됩니다. 어떤 이는 80을 살았어도 더 살고 싶어 합니다.


100살까지 살아야겠다면서 더 살고 싶어 합니다. 어떤 사람은 30이 되어도 살만큼 살았다고 자족할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남들 보기에 이유가 없는데도 자살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 조정이 됩니다. 오늘 자족해도 내일은 불만할수 있습니다.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다는 것은 그것이 내부에서 조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고민거리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고민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구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깔대로 살되 그런 것 때문에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두려움은 마귀가 조장합니다.


(질문)


호세아 4장에 보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하는데 그 지식이 무슨 뜻입니까?


호세아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세아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따라서 호세아 선지자의 책망의 내용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모른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계속 외부에서 와야 합니다. 사랑이 내 소유가 되어 버리면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사랑을 알려면 계속 자신의 죄인됨을 알아야 하는데 호세아 당시, 이스라엘의 사는 형편이 괜찮았습니다. 한마디로 잘먹고 잘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런 형편속에 있다보니 “나에게 이렇게 돈이 있고 살만큼 사는데 애닯게 하나님을 찾을 일이 뭐 있겠나. 좀 쉬었다가 믿지 뭐”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니까 호세아 선지자가 “왜 너는 첫사랑도 모르는가”라고 외쳤습니다.


(질문)


그렇다면 구원받은 이후의 생활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까?


(답변)


구원받기 전에도 모릅니다. 각자 각자 계획도 있고 결정한 것도 있지만 어떻게 될줄은 아무도 모릅니다. 저도 이시간 이후에 차를 타고 가다가 어떻게 될줄을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된 자에 대해서는 오늘 밤에 죽는다 할지라도 낙원에 있도록 조치하신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근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버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세상에서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하든지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상관이 없잖아요.


(질문)


아까 강의중에 “학생이 시험문제를 풀때 10문제중에서 7문제는 자기 능력으로 되니까 자기힘으로 풀고, 자기 힘가지고 안되는 세문제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다는 식으로 한다”고 했는데---


(답변)


구원받은 자라면 자기에게 7문제를 알수 있는 지식도 자기 능력이 아니라 그 지식을 하나님께서 주셨으니까 안 것 뿐이고 자기가 잘나서 7문제를 푼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도록 인도하십니다. 만일 그 때에 정신이 어질어질 했다고 하면 7문제는커녕 3문제도 맞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질문)


그러면 모든 것이 은혜라는 뜻입니까?


(답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인도하신다는 것이 명확하다면 모든 것이 다 은혜임도 명확하지 않습니까? 다시는 법적으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없이 죽을때까지 법적입니다. 다만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법적인것과 상관없이 십자가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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