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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8-07 00:07:12 조회 : 2774         
   김세윤 교수님께서 피력하신 구원, 복음에 대한 논평 이름 : 부탁드립니다(IP:)   

평소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내용 중에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며, 신학이 구원하지 못한다"는 말씀의 의미를 저로서는 "잘" 알고 있다는 확신을 전제로 하여 다음과 같이 여쭈어보고자 합니다.


 평소 간간이 웹사이트 몇 군데를 둘러보곤 하는데, 그 가운데에는 말씀보존학회도 있습니다. 매우 오랜만에 그 곳에 들러봤더니, 김세윤 교수님께 대한 비판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분에 대해서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신학계에서는 탁월하신 분으로 정평이 나있고, 또 예전에 십자가마을에 손무성 목사님께서 올려놓으신 그분의 강의 녹취록을 부분적으로 훑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보존학회 입장에서의 비판에 전적으로 동조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만,) 아래에 인용된 내용을 읽어보고서 저로선 개인적으로 김세윤 교수님께 대해 탐탁치 않게 느껴졌다고나 할까요. 왜냐하면, 말씀보존학회의 비판글에 인용된 출처인 김세윤 교수님의 저서들을 실은 저도 얼마전에 대형기독교 서점에 간 김에("베스트 셀러" 코너에 놓여 있더군요) 거기서 직접 어느 정도 훑어 보았는데요, 그때 제가 부분적으론 어느 정도 유심히 본 것도 바로 구원과 복음에 대한 개념정의 부분이었답니다. 유명세(?)와는 달리, 책의 부피로 보아도 그렇고, 일반 독자들을 위하여 쉽게 쓰려고 노력한 것 같았지만, 한편으론 그다지 깊이 있게(?) 쓴 것 같지는 않았다는 느낌 - 물론, 내 주관적인 느낌이었겠지만 - 을 받아서 전체적으로는 대충 훑어보고  구입은 하지 않고 서점을 나왔습니다.


 제가 왜 김세윤 교수님께 대해 탐탁치 않은 인상을 받았을까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신뢰하는 십자가 마을에 손무성 목사님께서 그 방대한 분량을 애지중지(?) 녹취하셔서 올려놓기까지 할 정로도 귀한 강의를 한 분이 김세윤 교수님이라면, 저로선 그만큼 십자가 마을 쪽에서도 그분의 가르침을 신뢰하고 있구나 라고 판단했었는데, 한편으론 제가 직접 어느 정도 그 책들을 훑어본 느낌과 더불어 아래에 인용된 내용들을 중심으로 비판한 글을 읽어 보니, 결과적으로 탐탁치 않은 생각이 든 것 같습니다.


 제가 말씀보존학회의 비판글 중에서 퍼온 글은 그들이 곧잘 주장하는 바른 성경론에 대한 딴지 걸기 부분과 기타 잡다한 토달기 부분은 생략하고, 구원과 복음에 대한 부분만을 게재하였습니다.


 과연 김세윤 교수님께서 구원, 복음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하신 내용들이 이근호 목사님께서 보실 때, 복음적으로, 신학적으로 타당한 것인 지 궁금합니다(제가 "얼핏" 듣기로는 이근호 목사님께서 오래 전에 대구 노회로부터 오해를 받으신 적이 있으셨을 때, 아무 이상없다는 신학적 판정(?)을 내린 분이 바로 김세윤 교수님인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렇게 알고 있기에 그만큼 김교수님께 대한 신뢰성 여부가 제겐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제가 들은 내용이 맞다면, 제자되시는 분께 이제는 스승을 판정해보라는 식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결례가 되지나 않을 지 우려도 됩니다. 죄송합니다). 한편으론, 평소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사람이 변하고, 그의 신학적 입장도 변할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이 기억나기도 합니다만...


물론, 아래의 인용글 가운데 예컨대, 구원과 관련된 부분에 대한 글들을 읽노라면, 목사님께서 평소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걸 언약이 아니라 인간 개인의 구원에다 초점을 맞추다 보니 결국 그런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밖에 없는 게 구원에 대한 말씀보존학회의 입장이라는 것 등은 이해가 갑니다만...어쨌든 정작 말씀보존학회가 토를 달아놓은 사이사이 부분들은 배제하고서, 순전히 김세윤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들만 조합해보면, 아무리 그분의 저서를 옆에 갖다놓고 전체 문맥을 살펴본다 하더라도 저로선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도 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조금더 조심스레 구체적으로 말씀드린다면, 김교수님의 글을 통해 현세중심적인 냄새, 다소 에큐메니칼한 냄새 등등이 나는 것 같다...는 점입니다.


 부디 인용된 김세윤 교수님의 글들 전체에 대한 목사님의 고견 부탁드립니다. 목사님의 고견을 통해 말씀보존학회의 비판의 정당성도 자동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으리라 내심 기대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 인 용 글 -----


...전략...


2. 구원에 대하여
  김세윤 교수의 저서 <구원이란 무엇인가>(두란노 출판사)에 보면 구원이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구원이란 포괄적인 개념으로 모든 악과 고난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거짓, 불의, 증오, 개인적인 결핍이나 아픔, 이웃과의 갈등, 사회적 국가적 국제적 차원의 갈등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는 악과 고난에 둘러싸이고 짓눌려 있습니다. 이런 악과 고난들은 죽음의 증상들로 대개 인간이 겪는 최대의 악이요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1쪽).
  잘 보라. 구원을 정의하면서 죄인에게 있어 가장 심각한 문제인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과 지옥과 불못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는 엉뚱하게도 사회의 여러 가지 갈등과 아픔들을 “인간이 겪는 최대의 악이요 고난”이라고 하고 있다. 그는 그 책에서 구원이 무엇인지를 몇 번이고 거듭해서 말하는데, 책 전체에 단 한 번도 지옥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는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중략...


 “이제 인간은 자기를 스스로 닫아 버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에서 분리되어서 자기의 제한된 자원에 갇혀 모든 악과 고난의 상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인간이 이러한 악과 고난의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24쪽). 여기서도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빠져 있다. 인간의 능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 행복하게 사는 것, 이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이렇게 써놓았다. “만일 인간이 스스로의 자원으로 생명과 행복을 추구하고 영위할 수 있다면 구원받아야 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26쪽). 정말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도 혼자 잘 살고 행복해 하면 구원받을 이유가 없는가? 누가복음 12:16-21에 나오는 부자는 혼자서 잘 살며 아주 행복해 했고 만족해 했다. 그러나 죽은 후가 문제였다. 성경에 따르면, 구원받아야 할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죽은 후의 문제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지옥의 불길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회개해야 하는 가장 주된 이유는 “사회악을 없애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회개가 바로 지옥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눅 16:30).
  김교수는 이와 똑같은 소리를 그 책 곳곳에서 수도 없이 반복함으로써 그 책을 읽는 독자들을 세뇌시키려 하고 있다.


  “우리가 제한된 자원 속에 갇혀서 사는 것이 곧 죽음이요, 악과 고난입니다. 이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구원입니다”(73쪽).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끌어다 씀으로써 신적인 삶에 참예하는 삶이 곧 구원이라는 것입니다”(81쪽).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오는 구원은... 이 세상에서 좀더 많은 정치적 자유의 형태로도 나타나야 하고, 이 세상에서 좀더 큰 풍요로도 나타나야 합니다...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으로도 나타나고, 사회 정의와 평화로도 나타나고, 육신의 건강으로도 나타납니다”(168-169쪽). “이 세상의 정치적 압박으로부터의 해방, 경제적 빈곤으로부터의 해방, 질병으로부터의 해방 등 이런 것들도 다 그리스도의 총체적 구원의 구체적 반영으로서 절실한 것입니다... 더 많은 정치적 자유, 사회적 정의, 경제적 풍요, 환경적 건강 등을 위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투쟁하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172쪽).
  심판과 지옥의 문제는 <구원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책에서 단 한 번도 논의되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이 단 한 번도 관여하지 않았던 문제, 바로 “사회 문제에 관한 투쟁”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한국의 개항 초기 기독교는 여성의 해방, 계급 철폐 등 많은 역할을 해냈습니다. 하지만 지금 기독교가 남북통일, 노사갈등 등 사회적 이슈 해결이나 인권의 발전과 같은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신약성경에서 단 한 번도 명령하지 않은 일을 교회가 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어떻게 “세계적 권위의 신약학자”라는 평을 받았는지, 또 이 “바울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가 바울 서신을 과연 제대로 한 번 읽어 보기라도 했는지 그야말로 의문이다.


3. 복음에 대하여
  김세윤 교수의 저서로 또 <복음이란 무엇인가?>(두란노 출판사)란 책도 있는데, 거기서도 비성경적인 주장들을 계속 반복해 놓았다. 그는 에베소서 2:11-19, 골로새서 1:20-22 등을 근거로 내세우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사도 바울의 모범을 따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꼭 ‘의인됨’의 범주로만 선포할 것이 아니라, ‘화해’의 범주로도 선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을 하나님께 화해시키고 서로에게 화해시켜야 하며, 심지어 인간들로 말미암아 파괴되어 가면서 인간들에게 복수하는 자연 환경과도 화해를 도모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화해’의 구원이 개인들 간에, 사회 공동체 내에서, 민족들 간에, 그리고 온 우주적으로 실재화하게 해야 합니다”(180-181쪽).  


  바울은 에베소서 2:11-19에서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그 둘이 하나님과 화해됨을 말하고 있지, 전혀 유대인 사회와 이방인 사회, 또 각 민족들끼리의 화해를 촉구하고 있지 않다. 골로새서 1:20-22에서도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죄 있는 모든 자와 화해하시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지, 사회 공동체나 우주 만물의 회복을 위해 일하라고 촉구하고 있지 않다. 신약의 복음은 “악한 현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을 말씀하지(갈 1:4), “악한 현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을 말씀하지 않는다. 그 누가 아무리 사회 공동체와 우주 만물의 회복을 위해 노력해도 결단코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은 성경이 100% 보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그것을 위해 일하라고 절대로 명령하지 않는 것이다. 김세윤 교수는 자기식 해석으로 마치 신약성경이 그런 것을 명령하는 듯 가장하려고 애쓰지만, 신약성경 어디에도 그런 것을 위해 일하라는 명령은 한 군데도 없다. 성경은 세상을 선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으며(요일 5:19, 갈 1:4) 더욱 악해지리라는 것을 말씀한다(마 24장, 막 13장, 눅 21장, 딤후 3장 등). 자연환경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만물이 회복될 때?(행 3:21)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가 오기 전에 친히 전 세계의 자연환경을 엉망으로 만드실 것이다(계 8,16장). 현재의 피조세계는 주님의 재림과 함께 회복되지만, 그것도 1,000년 동안만 유지될 것이다. 마지막에 하나님께서는 현재의 자연과 우주를 맹렬한 불로 태워서 녹여 버리실 것이다(벧후 3:10-12). 참으로 대단한 “화해”가 아닌가? 김교수는 성경을 엉망으로 확대 해석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제도들과 과정들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생명의 통치가 나타나도록 애써야 합니다”(198쪽).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말씀해 주신 일을 이루기 위해서 멋대로 애쓰는 것은 교회가 할 일이 아니다. 김세윤 교수는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도 성경적 복음은 다루는 둥 마는 둥 하고, 심판과 지옥은 아예 다루지도 않으며, 엉뚱한 문제에 관해서는 바로 그것을 놓치지 말고 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람들을 교란시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개시키려는 것이다.


  참고로, 이제 복음 전파의 은사가 전무한 이 “바울 연구 권위자”가 기본적인 속죄의 복음은 어떻게 설명하는지 보라. 복음이란 참 얼마나 이해하기가 까다로운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적 죽음, 대표적 죽음이 ‘내포적 대신’이라는 말로 종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내포적이요 대신적 죽음입니다. 우리 각자를 대신하되 자기 안에 내포하는 것같이 대신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대표적 성격’은 그의 죽음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대표해서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결정에 의하면) 우리의 죽음이 그의 죽음 안에 내포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두 성격, 곧 대신적이요 대표적 성격은 ‘내포적 대신’이라는 개념에 의해 종합됩니다”(64-65쪽)!!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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