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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9 22:39:23 조회 : 3524         
   상한 심령? 이름 : 김홍배(IP:220.122.53.98)   

목사님,

시편 51편 17절에 나오는 '상한 심령'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제가 어떤 분께 질문을 받았는데

상한 심령의 범위부터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상한 심령의 범위와 내용이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요점과

이에 대한

설교 말씀이나 소개 글이 담긴

자료나 사이트 안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근호 11-06-30 11:18 
상한 심령이란 다윗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예견된 언약으로서 모든 성도에게 다 해당되는데 내용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나는 인간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를 자인하는 마음을 두고 말합니다. 특히 요나 선지자가 겪는 '상한 심령적' 일이 요나 4장에 잘 나와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약간의 해설은 [피] p191에 나와있습니다.
다윗 본문이 갖는 의의는 [다윗언약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라는 저의 논문에 나와 있습니다.
이 논문은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라는 책 안에 담겨 있습니다.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라는 책은 [성경신학]난에 들어있습니다.
 김홍배 11-06-30 19:14 
목사님의 답변과 안내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자인하는 마음이 상한 심령일진대, 요나 4장의 박넝쿨사건과 상한 심령과의 연결 고리를 알고 싶어 이 사이트를 샅샅이 뒤져도 [피]p.191내용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일단 제가 가지고 있는 책 '뒤에서 본 한국교회'17.시편과 한국교회 p.130의 내용 즉, '또 시편은 다윗의 자기 실수를 자책하는 많은 귀절이 나온다. 이는 전쟁의 승리는 오직 만군의 여호와에게 있는 것이지 자기의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님을 고백하느 것이다...'의 내용으로 시편을 평가한 글을 접하고 나서, [다윗언약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를 읽었습니다. 특히 결론 부분 '그 죄악이 긍휼로 극복되기 위해서는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 자신의 소유, 즉 의인 우리아를 제물로 내 놓음으로 가능한 일이다(시51:8).'라는 내용에서 우리아에 대한 발견은 저에게 큰 깨달음이었습니다. 제가 읽은 부분을 소개(철자법 등 틀린것 임의대로 교정해 보았습니다)한 후 질문을 세 가지 드리고자 합니다.
 거룩이란 원수로부터 배척받은 것을 오히려 긍휼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의 심정과 동일한 차원이기 때문이다(삼상23:21/24:17). 그때부터 다윗은 없이 지내는 왕, 악인들에게 오히려 쫓겨다니는 왕, 비천하고 소외된 자로부터 오히려 환영받는 왕(삼상22:1-2), 그런 속에서도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카리스마적인 구원자의 역할을 수행한다(삼상30:7-20). 여호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그 전리품을(헤렘) 유다 장로들에게 나누어준다(삼상30:26), 이는 여호와 전쟁에서의 자신의 위치가 여호수아와 동일한 차원에서 이루어짐을 유다지파에 알리는 셈이 된다(여호수아22:8). 이처럼 그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카리스마적인 직능인 기름부음에만 기대를 건다(삼상24:5-6). 그는 왕 직능을 원초적인 이스라엘의 모습을 대변하는 가운데서 발견하고자 한다.
  그 원초적 모습은 긍휼 이외에 그 어떤 것으로 이스라엘은 구원될 수 없는 존재로서의 이스라엘을 규정한 모습이다. 따라서 구원이란 곧 긍휼이다. 긍휼을 이해 못하는 자는 비 이스라엘적이다.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은 다윗이 왕으로서 보여준 긍휼에 무관심함으로 하나님이 그를 친히 치시게 된다(삼상25:38). 뿐만 아니라 결국 사울 왕도 그 아들과 블레셋 전쟁에서 사망한다. 한 왕의 죽음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진노를 경험하고(삼상28:18) 새로운 왕이 그 사실을 애도함으로서 앞으로 새 왕이 등장해서 통치하는 방식은 이스라엘의 실패로 받아들임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기대를 거는 방식임을 알게된다(삼하1:16-27).

6. 다윗의 통치
 사울이 죽고 난 뒤, 다윗의 과제는 자신이 단순히 다윗지파만의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전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왕 됨을 어떻게 그들에게 납득시키느냐에 있다(삼하2:4,10-11). 이런 점에서 사울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왕가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를 존속시키는데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사울 자체보다도 그가 이스라엘의 왕의 자격으로 죽었다는데서 사울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왕 체제 자체를 계속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통치양식으로 고정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또 하나의 해결 되어야할 문제가 남아 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겠다고 나선 것이다(삼하2:10).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를 모르는 무리한 시도였다. 애들 장난거리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삼하2:14). 다윗은 모두를 용서받고 싶었다(삼하4:10-12). 그러나 요압은 개인적 복수심 때문에 과도한 반응을 나타낸다(삼하3:27-39). 어쨌든 자연스럽게 사울의 집은 약하여지고 다원의 집은 강해진다(삼하3:1). 사울 집의 약화는 백성들로 하여금 나머지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삼하5:1-3). 다윗은 카리스마적인 언약자로서 백성에 대한 자기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남은 이방인들을 치기 시작한다(삼하5:3,6,19,25).
  여호와 전쟁에서의 중심은 법궤에 있다(수6:6). 그 법궤는 여호와 이름을 부르는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남자들이 1년에 3차례씩 여호와를 뵙기 위해 이 곳에 와야 한다(출23:17/34:23/신16:16). 여호와의 임재 장소를 일정하게 규정했다 할지라도 법궤의 이동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가나안 땅의 성소와 여호와가 임재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은 출애굽기 20:24의 제단법에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 토단을 쌓을 것을 명령하시면서,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라고 약속했다. 나중에 이 토단에 성막이 들어서고서 안치된다. 그럼으로 해서 그 여호와의 이름에 어떤 의미가 부가되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실패로 말미암아 부서져버린 들판을 극복하고 그 자리에 새롭게 제공된 돌판이므로 말씀대로 하자면 당연히 멸망당해야 될 이스라엘 민족을 '노하기에 더디하고 인자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출33:19/34:6) 현재 동행하고는 물증으로서의 법궤(시은좌 또는 속죄소)의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약속의 땅을 전부 점령했을 때, 바로 그 자리가 여호와의 승리를 영원히 빛날 장소이다(민10:35).
  다윗은 신명기에 나오는 “여호와 이름을 두시려고 선택된 장소”를 카리스마적인 사명이 완수된 최종적 장소로 이해했다. 왜냐하면 거기에만 비로소 안식이 실제적으로 보장된 것을 천명을 할 수가 있는 그러한 장소이기 때문이다(신12:5,10-11,14,18,26, 14:23-15:20/16:2,6-7,11). 그 택하신 장소까지를 이끌어 가는 그 당사자가 바로 신명기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함 받는 자라는 견해를 다윗은 가지고 있다(신16:16/17:15). 다윗이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도읍을 정한 것은 여부스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추방되어야 할 최종의 족속인데 그것마저 정복했다는 뜻이 있다(창15:21/수3:10/삼하5:7).
  드디어 전쟁이 그치고 평정상태에 들어가게 될 때 법궤로 구현된 하나님의 理想도 이제는 이스라엘 앞에 보여질 때가 된 것이다. 법궤가 일정한 장소에 영구히 안치될 때 이스라엘의 영원성도 함께 보장받는다. 다윗이 법궤를 자기가 거처한 곳으로 가져(삼하6:10), 여기서 사울家에 속한 왕비 미갈은 왕의 체통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다윗은 왕의 임무가 바로 법궤의 유지 보존에 있음을 주장한다. 그 자체가 가운데서의(왕제도) 긍휼이기 때문이다(법궤). 심판과 긍휼이 왕제도에서 만 미갈의 不姓은 이러한 다윗언약에 이탈되는 생각이므로 다윗왕가의 후손을 왕후의 자격에서 벗어남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다윗의 생각도 다윗언약을 세 우시는 하나님의 생각에 미흡하다.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어야겠다고 했지만 하나님은 반대로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어주겠다고 하신다(7:5-17). 여기서 말하는 집이란 궁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 가문 자체를 언급한다. 그러나 누가 다윗의 진정한 가문에 속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단순히 혈통 서열로 결정되지 않음에 다윗 언약의 신비가 있다.
  그 신비는 누가 진정 다원의 차기 왕이 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절정에 달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다원언약을 통해서 언급하셨듯이 다원의 후손이 곧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특권을 지니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삼하7: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그래서 다윗이 왕이 되고 난 뒤 대외적으로 어떤 눈부신 실적을 남겼느냐(삼하8장), 혹은 대내적으로 얼마나 정치제도를 안정되게 정비했느냐 보다는(삼하9장) 사무엘 저자가 많은 분량을 다원의 사생활과 가정에 초점을 맞추고 다윗언약이 가진 실체는 세속적인 政街에서만이 밝혀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사울의 집에 남은 자를 찾아내어 후대함으로 자기의 관대함을 정가에 비치고 주위의 이방나라의 관계에서 힘의 우위를 선포함으로 내외적으로 말썽의 소지를 없앤 다윗은 다윗언약의 대상인 왕의 실체를 힘에 의한 통치라는 차원에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즉 힘의 대결에서 승리자가 왕이 되고 또 하나님의 양자의 자격을 갖는 것이 아닌가 하고 여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열왕기 저자는 다윗이 사방에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성전을 지을 수 없다고 했고 역대기 저자는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왕상5:3/대상22:8/28:3).
  전쟁에서의 승리가 결코 다윗언약에 들어 있는 왕의 표상과 상관없음이 다윗 자신의 전쟁 중에 한 행위로 드러난다(삼하11:1). 이미 남편 있는 여인임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 여인과 관계를 가짐으로 율법과 마찰되는 왕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이 여기에서 무마되면 좋았을 터인데 임신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난 뒤에는 임신케 한 장본인을 휴가 나온 남편으로 돌리기 위해 일을 꾸몄지만 거룩한 여호와전쟁 수행에만 관심 있는 우리아에게는 다윗의 술책에 말려들지 않을 수 있었다(삼하11:11). 이러한 우리아의 일관성 있는 태도는 다윗의 다음 범죄를 유발하도록 하는데 성공(?)한다. 하나님은 우리아 부부를 통해 다윗이라는 인간의 범죄성을 밝힐 수 있는 데까지 밝혀내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나단이 다윗을 지적할 때 간음이나 살인의 차원에서 고발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 주목해야한다(삼하12:1-6). 나단의 지적은 가난한 자와 부자라는 두 신분계층을 예를 들면서 신분적인 특권이 이스라엘에서 허용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특권이란 개인이 지닌 신분의 차이 때문에 각기 서로 다른 법에 의해 규제를 받는 것을 허용하는 제도이다. 그런데 과연 이스라엘에서 보편적인 법을 제쳐두고 특정인이 그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먼저 이스라엘 왕인 다윗에게 나단은 묻고있다. 여기에 대한 다윗의 대답은 명쾌하다.
  소위 이스라엘의 왕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그런 자의 존재는 용납피지 아니한다(삼하12:5). 율법의 적용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이다(출24:5-8). 쌍방이 책임지는 관계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러한 하나님과의 언약 때문에 유지가 가능했다.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나라이며 하나님의 긍휼을 거부하는 자는 그 누구든 그 모세언약의 저촉을 받아 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때 나단은 이야기해 준,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여기서 나단은 왕의 임무에 대하여 중요한 사항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왕이 백성들 보기에 솔선수범해야 된다든지 모범적으로 먼저 율법을 지켜야 되지 않느냐 하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왜나 같이 부족한 자를 왕을 세웠는가 하는 하나님의 의중의 뜻과 관련되는 것이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나단에게 지적 받고 난 위에 한 기도가 적혀 있다. 여기서 보면 내가 주께만 범죄했다는 것과 성신에 관한 언급과 주님은 제사를 원치 아니하시고 심령을 원하고 있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온 성이 어떻게 변모되어야 하는 희망사항까지 거론하고 있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에 행하시고 그때야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율법 이전에 먼저 주의 은혜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윗은 강조하고 있다.
  위와 같은 기도를 하게 된 다윗의 신학적 기반은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죄악을 범한 자는 반드시 여호와께 벌을 받는다는 강렬한 율법수호 정신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킬 때 어떤 경우에만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면 자기가 그 범죄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소유했다는 것이 증명될 때만 가능하다. 다윗은 자기가 늘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고 표적으로 여겼던 그 죄 자체를 어디서 발견했는가 하면 자기 자신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하나님이 나단을 통해서 바로 이 소리를 했을 때 다윗은 비로소 자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존재임이 파악된 것이다. 그러면 나단이 자기를 찾아오기 전에도 이미 자신은 수많은 범죄를 행하고 있었던 셈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내가 어떻게 버티고 살아왔으며 이스라엘의왕이라는 위치에 있는가? 여기에 대해 다윗은 하나님의 수많은 인자와 긍휼로 인한 결과라고 이해한다. 결국 왕이란 다윗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 인자하신 하나님의 자리임을 인식한다. 하나님의 긍휼의 자리이다. 다만 자리가 타인보다 왕의 위치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를 누구보다도 절감하여(시편51:4), 오직 긍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道를 전하고 가르치기 위함이다(시51:13). 진정한 제사와 번제는 통회하고 傷한 심정이다(시51:17/40:6).
  다윗언약에 의한 진정한 후계자는 누가 될 것인가? 다윗의 통회하는 심정을 영원히 담아 둘 수 있는 출생의 경험을 지닌 자에 한한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 해당되는데 그 사랑이 포함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원의 범죄로 잃어버린 자, 그 바탕 위에 다시 태어난 자에 한해서 비로소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해 질 것이다(삼하12:15-25). 다윗은 말없이 죽어버린 아이의 모습에서 자신의 죽음과 동일시하고 있다. ‘나는 저에게 가려니와'(삼하12:23), 여기서 다윗의 하나님의 용서의 의미를 발견한다. 하나님의 용서행위를 ‘주께서 꺾으신 뼈에 참여시켜 그것으로 기뻐하게 하는 행위'를 두고 말한다(시51:8). 다윗도 아이의 죽음을 자기 죽음으로 간주하여 참여를 선언함으로 자기 말고 자기의 죽음, 그 현장에서 나타날 하나님의 그 다음 의 행위에 기대를 건다. 그것이 여디디아, 즉 하나님의 사랑행위이다. 다윗언약은 다윗의 혈통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내막을 알고 있는 자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다윗의 경험을 자기 경험으로 여기는 자 말이다. 따라서 이 이후에 나타나는 다윗왕가의 내분은 혈통적 다윗왕가가 얼마나 다윗언약하고는 상관이 없는가를 보여주는 實例가 될 것이다.
  사무엘하 13장에 넘어가면 다윗왕가에서 일어난 私的인 일 하나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사무엘하 12:10-12에 나오는 다윗부분의 재난의 예고가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밝히고 있으며 그 원인은 결코 힘의 불균형에서 야기된 것이 아니라 다윗왕가의 부도덕성과 비윤리성과 그것을 제어할 수 없는 개인적인 자질과 연관됨을 보여주고자 한다. 바로 그러한 가치관의 혼란이 다원언약과 상관없는 세력들의 준동을 방치할 수밖에 없는 다윗 및 다윗왕가의 한계이기도 하다. 이처럼 저자는 다윗언약이 수립된 후에도 그 기반에는 모세율법이 지향한 정신을 변동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잦은 후계자 문제로 혼란해지는 이스라엘의 정치상황도 원래의 노선을 빨리 찾아가지 아니한데 책임이 있다. 그 원래의 노선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다윗의 현 시점에서 다윗의 부도덕성 때문에 일어난 일이 다시 반복되는 가운데서 누가 실패자이며 그 실패자 때문에 누가 또 헷 사람 우리아 같은 희생을 치르게 되느냐로 밝혀진다. 즉 의인의 죽음을 값으로 하여 언약의 根底를 이루고 있는 사상을 알아보는 것이다.
  이복 오빠 암논의 다말공주에 대한 범죄는 다윗의 분노는 샀지만 결코 다윗으로부터 왕자 지위가 박탈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피해자의 입장에 있는 왕자 압살롬에게 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싸잡아 공격하고자 하는 기회를 차후에게 한다(삼하13:21-22). 그러나 이는 다윗 왕의 생각에 정면 도전하는 것으로 다윗언약은 보복으로 유지되어지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못에 대한 후속조치는 있어야 했다. 公義性을 생명으로 하는 왕으로서 피해 당사자로 하여 복수라는 최후의 방법으로 사태를 해결하도록 방치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욍이 지근한 범죄자에 대한 태도는 피해 측으로부터 가해자를 싸고돈다는 의혹을 하게 만든다. 그렇게 될 경우에 복수하는 측에서는 결국 가해자뿐 아니라 그 가해를 보호했다고 여기는 배후까지 공격해 버리는 실수를 유발케 하는 것이다. 왕의 혼란은 이래서 야기된 것일까? 그것만은 아니다 다른 이유에서 왕의 정책에 혼선을 조장하는 세력이 있으니 요압이다.
  요압의 눈에 다윗왕의 결정은 일관성이 없어 보였다. 도대체 다윗왕에 있어 선과 악의 기준은 무엇인가?  암논의 다말공주에 대한 겁탈 사건을 듣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던 왕은 이번에 또 압살이 양털을 깎는 축제기간에 왕자들을 몰살했다는 급서를 듣고도 압살롬에 대한 어떤 분노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아들이 자기 곁을 떠났다고 하는 그 사실에 대하여 슬퍼할 뿐이다(삼하13:37-39). 당황한 쪽은 다윗의 명확한 정책기준을 몰랐던 요압이었다. 그래서 요압은 다윗의 마음이 어떤지 시험해 보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요압의 이와 같은 태도는 모호하기만 한 다윗의 의중에서 도대체 누구를 진정 차기 왕으로 등단할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갖기 위해서다. 의도적으로 압살롬을 미리 천거해 보는 것이다(삼하14:1). 거기에 따른 다윗의 반응이 궁금했다. 연기에 능한 여인 하나를 내세워 여인 자기집안 일인 양 사건 하나를 의뢰케 했다. 두 아들이 서로 싸우다가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죽였는데 나마 남은 아들도 살인자로 해서 또 죽여야 하는가 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한 요압의 이러한 비유는 전혀 압살롬과 다윗과의 사이에는 적합하지 않는 것이 다윗언약에 의하면 왕의 후계자는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되어 있고 그 선택은 왕 알고 하나님의 심정에 참여된 자에 한하기 때문이다. 다윗이 알고 있는 간택문 는 율법의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압은 율법에 의한 형을 피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그것이 구현이라고 본 것 같다. 다원이 압살롬을 그리워한 것은 율법적 차원이 아니었고 사랑의 차원이었다. 다윗은 자기 말한 것이 있어 아들 압살롬을 다시 3 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올 수 있도록 허락하지만 진정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고 얼굴 마주 대하기를 거절한다(삼하14:24). 왕의 이러한 태도는 요압으로 하여금 다시 압살롬을 거론하는 것이 자기에게 손해가 될 것 같아 그와의 관계에 부담을 갖는다(삼하28-33). 이러한 추세가 압살롬으로 하여금 기존에서 탈피한 독자적인 방식으로 거사에 대비케 한다(삼하15:1).
  향후 4년간 그가 한 것은 무엇일까? 왕의 색다른 이미지를 대중 속에 심어나가는 일이었다. 감히 다윗 왕이 생각지도 못한 재판관 제도를 자기가 창안한 것으로 여겨 왕과 대중 사이의 대화와 삶의 유일한 창구를 틀어 막아버렸다(삼하15:2-6). 그리고 제사순례라는(예루살렘에서 헤브론, 다시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것) 합법적인 이유로 절차에 의해 왕으로부터 허락을 획득한 후에 헤브론으로 빠져버린다. 이는 압살롬 자기가 헤브론에 거처하는 것이 왕의 합법적인 승인에 의한 것임을 알림과 동시에 그 다음 시행될 일도 어떤 합법성에 기재되어 있을 것이라는 개연성을 백성들에게 유도해 내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초청받은 유지들이 별 의심 없이 압살롬과 행동을 같이 하는 것이다(삼하15:7-11). 다윗성을 떠나 피난길에 나선 다윗왕은 후궁 10명을 궁전에 남겨 둠으로서 언젠가 돌아오리라는 것을 기대한다. 압살롬의 반란을 일시적인 일로 여기고 법궤까지 이 동 시키려는 레위인들에게 제자리에 놓기를 당부한다(삼하15:24-29). 피난길에 오르는 다윗과 그 일행은 울음으로 비참한 현실을 맞이하고 있다(삼하15:30)
  도대체 누가 이 참담한 혼란으로 이스라엘을 몰고 가고 있는가? 그 때 누가 이런 소식을 전한다. 아히도벨이 적군 쪽에 붙어 있다고 그 때 다윗은 그 아히도벨의 책략을 무산시키는 것 자체가 사태를 원상 복귀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보고 그렇게 여호와께 기도한다(삼하15:31). 마침 후새가 자기 앞에 나타난다. 다윗은 후새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보내어 압살롬을 영접하게 한다. 그래서 압살롬으로 하여금 두 사람 의, 즉 자기와 같이 따라온 신하와 선왕을 배반하고 자기를 왕으로 환영하는 신하의 충성도 사이에서 번민케 하여 정책결정을 주저하고 있을 때, 다윗 일행은 안전 한 곳으로 피신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삼하17:22). 다윗왕에 대한 변란은 평소에 다윗 왕가에 대한 불만 세력이 누구였는가? 그리고 우호적인 자들이 누군 인가가 명확히 구분되는 계기가 된다. 같은 사울 집안에 속한 자들 중에서도 요나단의 아들 인 므비보셋의 사환으로 있는 시바가 왕의 호의에 대한 자기 주인의 변절을 이야기해 주면서 많은 양의 물자를 제공한다. 왕은 그에게 자기 주인의 것이 이제는 너의 것이 되리라고 약속한다. 주인이 바뀐 셈이 된다. 거기에 비해 베냐민 지파에 속한 시므이라는 자가 나타나 다원의 행렬을 보고 따라 오면서 저주와 악담을 퍼붓고 심지어 돌과 티끌을 뿌린다. 그의 이러한 행위는 다윗 자신이 사울 지파를 피 흘리게 한 그 범죄의 대가가 이제야 스스로 아들을 통해 완벽하게 보응을 받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다윗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여호와께 자신의 원통함을 알고 그의 모든 전주가 오히려 善으로 바뀔 것이라고 여긴다(하16:12). 다윗의 이러한 생각은 신하인 아비새와도 다른 것이었다. 다윗은 하님이 자기에게 주신 굴욕 속에서 다윗언약으로 이스라엘을 정비해 보려는 하나의 깊은 뜻을 이해하려고 한다. 자신이 굴욕 속에 있는 다 할지라도 그 순간에 하나님은 언약대로 움직여 나갈 것이다. 한편 예루살렘에서는 후세와 아히도벨 정책 대결에서 후새가 승리하고 있었다. 승리의 비결은 간단했다. 압살롬으로 하여금 다윗보다 훨씬 더 위대한 존재임을 증명한 쪽이 이기게 되어있는 것이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후궁을 차지하도록 권하는 이는 후궁은 왕에게 봉사하기 위한 왕의 전용물과 같은 의미가 있어 압살롬은의 實勢를 과시한다. 뿐만 아니라 압살롬으로 하여금 즉각 지쳐있는 다윗의 세에 덤벼들어 많은 피를 흘리지 않고서도 그들의 군대를 우리 편으로 삼을 수 있고 고립된 상태에서 다윗 왕을 제거할 수 있다고 부추긴다. 거기에 대해 후새는 다윗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는다는 점을 전제로 한 후에 성급한 공격은 오히려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만의 하나 전투 초반에 우리편이 밀리는 경우 군 전체에 미치는 영향도 고려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온 이스라엘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다윗군대를 공격하면 마치 이슬이 땅을 덮듯이 어느 누구하나 살아남을 수 없는 완전승리가 보장된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후새의 의견은 아히도벨의 의견보다 더 극적이고 환상적이라 참모들에게 감명을 끼친다. 이러한 압살롬편의 현실을 무시한 허망한 꿈은 후새의 계략에 의해 더욱더 자만에 부풀어 있다.
  다수의 지지가 후새에게 쏠리자(삼하17:14) 아히도벨은 스스로 죽는 길을 택했다. 전열을 가다듬은 다윗군대는 백성들의 요구대로 왕이 친히 나가지 않는 상태에서 압살롬 군대를 공격한다. 공격 이전에 다윗은 장군들에게 나를 봐서라도 압살롬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처리할 것을 부탁한다.  막상 전쟁이 벌어지니 압살롬 군대는 오합지졸이 된다. 압살롬 자신도 짐승을 고 숲 속으로 도주 피신하려고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외모의 장점인 긴 머리카락이 나무 가지에 매달려 생포되고 만다. 이 사실이 요압에게 알려지자 고의적으로 왕의 명령을 위반하고 사정없이 찔러버린다. 그리고 난 뒤 요압은 그 다음 행동을 염려한다. 압살롬의 전사 소식을 보류할 것을 지시하지만 그 이유를 모르는 구스인을 하나 보내어 일단 다윗왕의 태도를 엿보기로 한다. 예상대로 다윗은 전쟁에 승리한 병사들을 격려하기보다는 자기아들 압살롬의 죽음, 즉 다윗언약에 있어 하나님의 언약 상대자의 성실에 따른 것이었다(삼하7:14/18:33).
  다윗왕가의 고유성은 단순히 죄지었다고 처단하는 그런 율법의 차원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는 표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남겨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또한 다윗 왕 정책의 理想이었다. 그러나 다윗의 자기 가문에 대한 집착은 일부 신하와 전왕의 복권에 미련이 있는 세력들에게 지파 對 지파 감정대립으로 백성들을 몰아 자신들의 힘 규합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 준 셈이 된다. 특히 군대장관 요압은 그 와중 속에서 자기 판단에 의해 전쟁을 수행했는데 압살롬의 살해는 왕의 부재중에 벌어 졌다는데서 다윗이 없을 경우에 요압이 취할 태도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왕의 意思와 反하는 승리는 다윗언약 체제에 아무런 의미가 없이 이방적이다. 다윗언약에 의한 승리는 사사의 속성의 연장으로 힘과 多數에 의한 승리로 귀결될 수 없다. 가장 못한 자를 통하여 승리를 가져오게 하는 방식이 여호와 전쟁 방식이다(삿8:2). 다윗은 군대장관을 새로 요압에서 귀순한 아마사에게 맡기기를 원했다(삼하19:13). 그러나 그 사람도 다윗의 부재중에 요압에게 살해되고 만다(삼하20:10-13). 여기서 요압과 다윗이 전쟁을 보는 견해에 차이가 나는데 요압의 경우 승리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고 보며 전쟁을 수행하는 중에 다윗의 분노를 가지게 한 행위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삼하3:27-28/18:14-15/19:13/20:10). 요압은 다윗으로부터 우리아를 제거하는데 가담한 자였다(삼하11:16-17). 요압이 생각하는 왕정체제란 왕의 절대적 권한 하에 모든 권력을 집중시켜 질서를 유지하는 체제였다. 이것은 오직 정면 대결에서 힘의 우위를 차지하는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적과 동지의 구분은 정복당한 자와 정복자에서 결정된다고 여긴다.
  왕이란 항상 이겨야 그 자격을 인정받는 것으로 생각했다(삼하12:26-28). 요압의 이러한 견해는 귀순해 온 자에 대한 다윗의 파격적인 우대에 대하여 회의를 낳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 조금 전까지의 원수를 전우로 맞이할 수 있단 말인가? 또 배신하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러나 다윗은 이방인들과 전쟁과는 달리 국내 분쟁에 있어서는 그 의미를 달리 이해했는데 그것은 밧세바 간음 사건과 우리아 살해공작 이후 시온성에 대한 견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시온성은 어떤 분쟁에 휩싸인다 할지라도 그 은혜성을 인정하는 자의 차지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시51:18).
  밧세바에 대한 다윗 자신의 범죄는 바로 다윗언약이 내포하고 있는 그 思惠性에 대한 무지의 소치였으며 그것을 간접적으로 가르쳐 준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헷 사람 우리아였다(삼하11:l1/신명기 23:10). 우리아의 언약에 대한 이해는 왕이 행한 형식적인 율법관과 달랐다(삼하11:112:6). 언약에 대한 자신의 포기 내지는 헌신이었다. 결코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언약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윗이 자신은 비록 왕의 위치에 있지만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위한 충실한 종을 자신인 살해한 셈인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범죄로 모아진다(시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이스라엘에서 범죄는 율법의 규정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진정한 율법이란 우리아의 죽음에서 그 주체가 밝혀진다(시51:8 ‘주의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시34:20). 다윗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계속 왕으로서 존속되고 언약이 유지되는 것은 바로 우리아같은 의인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대표로 하는 왕, 즉 죄인에 의해 죽었지 때문이고 그 우리아의 아내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이(여디디아) 새롭게 창조. 혹은 회복된 것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마태복음1:16). 이로서 다윗은 국내 분쟁의 와중 속에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진정한 언약정신을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고 모든 변란과 반란을 이 정신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섭리로 간주한 것이다.
  잃어버렸던 자를 의인의 죽음을 대가로 하여 다시 찾아 나서시는 그 언약적 속성이 피 소용돌이 속에서도 피어나고 있음을 다윗은 증명해 보고 싶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진정한 사명은 이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쟁의 연속, 피 흘림과 칼부림으로 인해 얻어낸 힘의 우위를 가지고 질서를 잡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심판이 있다면 이러한 다윗의 언약적 통치를 이해 못하는, 사랑과 용서와 은혜를 배반하는 자의 것이 될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은혜성에 어두운 것이 언약과 무관한 자였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요압은 가장 비이스라엘적인 인물이며 그가 어떻게 제거되었느냐를 통해서도 언약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삼하22:25-26/왕상2:32-34). 압살롬의 난 평정 이후 왕이라는 제도가 다윗지파에게만 꼭 한정되어야 하느냐에 대해 불만을 갖는 무리가 등장한다(삼하l9:41/20:1-2). 이와 같은 불만이 마치 왕이 자기들의 기업을 다 차지할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생각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삼하20:19). 왕과 기업, 이 두 가지의 요소가 다 이스라엘에서 존속되어야 된다.
 기업이란 하나님의 고유한 것이라서 그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다. 또한 그러나 왕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용서되지 못한다. 베냐민 사람 시바의 반란은 이로서 정당성을 얻을 수 없다. 왕의 이스라엘 내부에서의 위치는 다윗의 인구조사에서 밝혀지듯, 이 모든 것이 자기 소유가 될 수 없고 자신은 오직 이스라엘에 대한 종으로서 그들이 범죄 했을 때(삼하24:1) 그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역할이 중심이다(삼하24:25).
  그 후 다윗은 누구하고도 동참하기를 거부한다(삼상20:3/왕상1:4). 이미 후계자는 이스라엘 내부의 그 누구와도 결탁 이 되지 않는 인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 솔로몬이 차기 왕으로 등극함으로 비 우리아적인 존재들은 하나 둘씩 그의 면전에서 사라진다.


3. 결 론
 인간이 왕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왕 되심이 희석되거나 포기되고 말까? 그럴 수는 없다. 광야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죄악 때문에 그 임재가 취소되지 아니한다. 왕을 달라는 백성들의 죄악을 사사시대의 카리스마적 직능과 결부시켜 그들을 긍휼과 자비의 통로로 전환시키셨다. 하지만 그 죄악이 긍휼로 극복되기 위해서는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 자신의 소유, 즉 의인 우리아를 제물로 내 놓음으로 가능한 일이다(시51:8).
  다윗언약이란, 이름은 다윗이지만 실제로 우리아같은 신앙의 차원에서 맥을 이어간다. 하나님 자신의 것의 ‘버림'을 이해 못하는 사람은 언약을 조금도 이해 못할 사람이다. 구원이란 종교적인 용어 나열과 그것을 외운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표상이 안고 있는 내용과 의미에 자신의 삶을 걸어야 한다. 그것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

질문1. 다윗 누나의 아들인 요압장군의 행적을 복음적으로 해석하신다면?(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언할 때 왜 요압장군을 죽이라고 했는지?를 포함해서)
질문2. 렘브란트의 그림 '밧세바'를 보면, 다윗을 유혹하고자 한 밧세바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한 남편의 아내가 대낮에 다윗 산책길 옆에서 목욕을 한 것을 두고 '밧세바'의 부정으로 접근한 부분에 대해 복음적으로 해석하신다면?
질문3. 앞에서 언급한 대로 [피]p.191 내용을 알고 싶습니다.
 이근호 11-06-30 23:11 
1.다윗 언약 속에서 장차 오실 메시아의 희생과 그로 인한 긍휼이 담겨 있는데 요합은 그것은 이스라엘을 지배할 수 있는 권력뭉치로 이해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비-언약적 안목에 비친 언약에 대한 핍박입니다.
2. 언약문제를 치정문제화 삼을 수는 없다.
3.요나는 자신이 당연히 하나님 편인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깨서 자신을 멸망당할 도성인 니느웨에 파견근무 갔으니까요. 그러나 막상 가보니, 요나의 생각을 정면으로 무산시키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시자 그는 기존의 자기 생각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참으로 없는 모욕감에 견디지 못하고 차라리 자살을 시도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그대로 하나님 앞에 노출되는 것이 '상한 심령'입니다. 왜냐하면 참으로 하나님이 벌리시는 일에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내놓을 것이 없이 오히려 반발을 하는 자신의 모습만 노출당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하나님께서는 다윗언약 속에서 유발시키므로서 오직 십자가 공로의 능력만 드러내시는 겁니다.
 김홍배 11-07-01 18:03 
복음전도자의 역할에 늘 충실하신 목사님의 명쾌하신 답변에 감사를 드립니다. 늘 강건하시길 빕니다.
 최양순 11-07-05 14:00 
늘 놀랍니다 목사님! 우린 늘 자기가 그물에 걸린 좋은 고기인 줄 확신하는 교만함 가운데 살고 있는데, 어쩌면 아닐 수도 있는 거라는 무서운 선포가 모든 말씀 속에 있습니다. 믿어져도...그 믿어짐이 내 소유가 아님을 염두에두지 않을 때 우리는 늘 손가락질입니다. 저 못된 고기, 저 못된 고기하면서요ㅠㅠ 우린 언제나 온전히(슬쩍 걸치는 것 없이)하나님 편이 될까 애통하는 마음 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목사님 오늘도 잘 뜯어먹고 갑니다~ 주님의 오병이어를 목사님 모델로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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