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질문 / 답변

            가족나눔터

            사진첩

            주일학교

            중고등부

            청년회

 

 

 

 

질문 / 답변

HOME > 게시판 > 질문/답변

 

 

 

 

 
2016-11-10 12:56:25 조회 : 1366         
   [질문] 에스라(느헤미야),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해야 하는지요? 이름 : 하늘아이(IP:47.145.107.64)   
제사장이자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율법학자)인 에스라(스7:6). 그는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을 마감하고 본국으로 귀환하게 되자 훼파된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착수한다. 성전(성벽) 재건사업에 딴지를 거는 방해 세력이 있었지만 에스라는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그의 이같은 집념은 이방인에 의해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되고 그들에게 포로가 된 것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지 못한 것에 대한 징계요 처벌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본국으로 돌아올 기회가 주어지자 예배와 신앙의 구심점을 성전(성벽) 재건과 율법 신앙 강화라는 데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또한 에스라는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이스라엘 공동체 내부에서 이방인과 통혼한 자들을 색출하여 강제 이혼을 명령하였다. 에스라의 사역은 한 마디로 ‘말씀으로 돌아가자. 말씀대로 실천하자’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같은 에스라(느헤미야)의 사역과 활동을 예수님의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과연 긍정적으로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부정적으로 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1) 에스라는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성전(성벽)에 가치를 두고 재건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시는 분이 아니며 진정한 성전은 예수님 자신이라는 점을 시사하셨던 것이죠. 2) 에스라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과 통혼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난다고 판단하여 하나님의 뜻에 입각하여 강제 이혼을 명령하였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방 창녀 라합의 구원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고 또한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이방 모압(신23:3) 여인 룻의 혈통에서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는 것을 성경 역사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에스라는 율법을 더욱 철저히 준행해야 두번 다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판단,율법 중심의 신앙 강화에 역점을 두고 실천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예수님이 그토록 저주한 바리새파,사두개파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는 점입니다. 4) 에스라(느헤미야)는 유대 멸망 이전에 하나님을 섬겼던 것보다 더욱 열심히, 더욱 철저하게 율법에 기준하여 실천하려 했던 종교개혁자요, 종교 부흥의 역군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은 이 때부터 약 400년 동안 입을 굳게 다물고 침묵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소위 ‘신구약 중간기’(하나님의 침묵기간=암흑기).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전달하던 선지자 역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에스라(느헤미야)의 활동과 사역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해야 하는지요? 1) 바벨론 포로 70년 이후 본국으로 귀환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측면(언약 관계)에서 그 가치를 두어야 하는지요? ('에스라'라는 이름의 뜻이 ‘여호와가 도움’이듯이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이었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어진다. 인간 에스라의 배후에 보이지 않는 손, 즉 하나님이 하셨다는데 무슨 질문을 던지겠는가.) 2) 아니면 에스라의 '성전,율법,제사 중심의 신앙'과 '말씀의 생활화'는 성령을 받지 못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 인간적인 열심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요? 3) 또다른 관점은?
 이근호 16-11-10 15:05 
[에스라, 느헤미야 속으로]라는 책(대장간:2013) 의 203페이지부터 206페이지의 대목을 인용하여 대신 말씀드리겠습니다. 
 역사마저 돌려세우는 율법의 기능

산다는 것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살고자 하는 세상을 꿈꾸고 그것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애쓰면서 산다. 그런데 진리란 마냥 드러나기만을 기다린다고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에 의해서 드러난다. 창조의 일부로서 인간은 활동하면서도 인간 나름대로 성찰해서 그 성찰의 결과물로 진리를 뽑아내는 실천도 아울러 병행하고 있다. 자신의 성찰과 탐색하는 노고를 거치지 않는 것을 사람들은 진리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제대로 된 불신자(不信者)들이다. 

하지만 진리는 이런 인간들의 역사 꾸려나가기를 비켜가면서 다른 역사관을 소개한다. 그 이유는, 결코 인간은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최종 종결 상태를 천국과 지옥으로 상정하지 않기 때문이요 하나님께서는 창조 작업을 끝까지 꾸준히 밀어붙이시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서 거룩과 관련된 사건들이 돌발적으로 침입하듯이 일어난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거룩에 관심 있는 자들이 난데없이 등장하는 것이다. 

거룩이 성전을 건축하고 백성들을 율법에 종속시키는 것은 과거 심판성을 현재 심판성으로 적용하기 위함이다. “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조상들이 주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며 주의 명령과 주께서 그들에게 경계하신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들이 그 나라와 주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큰 복과 자기 앞에 주신 넓고 기름진 땅을 누리면서도 주를 섬기지 아니하며 악행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가 오늘날 종이 되었는데 곧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사 그것의 열매를 먹고 그것의 아름다운 소산을 누리게 하신 땅에서 우리가 종이 되었나이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주께서 우리 위에 세우신 이방 왕들이 이 땅의 많은 소산을 얻고 그들이 우리의 몸과 가축을 임의로 관할하오니 우리의 곤란이 심하오며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을 치나이다 하였느니라”(느 9:34-38)

즉 “성전을 건축하라”는 하나님의 진정한 취지는, “존재보다 율법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이는 옛 영광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는 도저히 납득될 수 없는 하나님의 조치다. 왜냐하면 현 자신의 존재가 부정적으로만 조상과 연계되어 있다는 역사관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거룩만을 그리워하는 자들에게 있어 이 세상관은 어떻게 비취게 되는가? 그것은 ‘저주받아 깨어진 성전 마당’으로 보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거룩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성전의 범위를 전 인류사로 확대하시려고 하신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 성전 자체에 적용되는 거룩과 더러움을 가름하는 기준점이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그 기준점을 언약 펼침을 통해서 역사로 말해진다. 곧 말씀화된 역사가 전개되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가난’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을 것이다. 영생의 창조 작업에 휘말린 자들은  ‘거룩’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 따라서 거룩을 확대하려는 하나님의 뜻과 생존 위주로 삶의 목적으로 삼는 인간들의 의 충돌은 ‘공동체 구성’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보여지는 데 그것이 바로 에스라, 느헤미야에 담긴 계시적 의미다. 곧 심판의 연속작업으로서 공동체이기에 그 내부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거룩에 준한 심판행위가 벌어진다.

성전마저 깨어지는 사태를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를 구성하시는 하나님의 구성 원리이기도 하다. “그들이 그들의 원수와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에게 둘러싸여 곤경에 빠질 때에 내가 그들이 그들의 아들의 살, 딸의 살을 먹게 하고 또 각기 친구의 살을 먹게 하리라 하셨다 하고”(렘 19:9/겔 5:10/왕하 6:28-29) 생존 위주로 사는 것을 곧 우상숭배 차원에서 판결하신다. 아무리 하나의 공동체로 단결되어도 심판을 막아내는데 는 소용없다.
“초석은 나중에 놓인다”

초석이 놓이기도 전에 거주하는 위층들을 먼저 건설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역사를 다루시는 방식이다. 반면에 인간들은 투쟁과 경쟁을 통해 적절하다고 여겨진 것만 살아남아 다시 초석이 되고자 하고 어쩔 수 없이 주변으로 밀려난 자들은 그 인물을 역사의 핵으로 옹립한다. 이로서 공동체는 영원히 우상이 된다. 

에스라, 느헤미야를 기억하는 유대인들이 수상하다. 이들의 관심사는 유대교라는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의 중보자는 예수님이 아니시다. 신을 도용하여 모든 벽에다 신의 이름을 새기면서 도배질하는 본인들이다. 자진해서 지상의 역사와 하늘의 신을 중재하는 중보자적 기능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교뿐만 아니라 모든 공동체의 역사는 영원히 마감되지 않는다. 게임은 한없이 연장되기 때문인데 이 와중에서 승자도 패배자로 사라진다. 누가 최후의 승자인지는 항상 보류되는 상황, 그래서 기어이 해답을 손에 쥘 수 없기에 더 서러운 곳이 이 세상이다.

이 모든 것이 떠난 그 뒷자리에는 십자가의 핏자국만 선명하다.
    ◁ 이전글 다음글 ▷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986-0172, 010-3511-0172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copyright ⓒ 우리교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