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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1 14:56:45 조회 : 90         
   지적질 201011 이름 : 우리교회(IP:119.18.87.190)   

지적질(욥기 15:1-6)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5FjzRdCrNJI, Hit:18
 우리교회 20-10-11 15:54 
지적질

2020년 10월 11일                 본문 말씀: 욥기 15:1-6

(15: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15:2)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을 그의 복부에 채우겠느냐

(15:3) 어찌 도움이 되지 아니하는 이야기, 무익한 말로 변론하겠느냐

(15:4)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그만두어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15:5)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좋아하는구나

(15:6)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네게 불리하게 증언하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명확히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의 명확한 나에 대한 규정은 내일되면 도로 희미해집니다. 이것은 ‘동일시’라고 합니다. 어제와 나와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를 같은 요소로 명백하게 결정해보겠다는 것은 실은 오만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명확하고 확정되었다는 그 자아를 안 놓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마련입니다.

곧 자신이 자신의 모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욥의 친구들이 자신을 명확하게 잘 안다고 자부하게 되면 필히 욥을 비난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서 실은 먼저 욥이 욥의 친구를 향하여 선방을 날렸습니다. “너희들은 내가 받은 고통이 없잖아”라는 식으로 선제 공격을 한 겁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방문한 것은 위로차 온 겁니다. 하지막 막상 욥을 보고서는 할 말을 잃은 겁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유독 할 말은 다하고 있는 자는 고통 중에 있는 욥이었습니다. 따라서 엘리바스의 입장에서 욥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 ‘말하는 입술’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상대방에 대한 이러한 선제공격은 실은 하늘나라에서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악마에게 시비를 걸으신 겁니다.(욥 1:7) 여기에 대해서 악마가 반격합니다. 바로 이러한 차이는 다 욥의 존재로 인하여 발생된 시비입니다. 즉 욥은 ‘차이’를 나타냅니다. 이 차이는 인간과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전제로 하지 않고 반대로 하나님과 인간이 끊어져 있음을 나타냅니다.

쉬운 예를 들면, 대단한 작곡가 두 사람을 견줄 때, 베토벤은 이 세상 모든 작곡가 가운데 최고로 휼륭한 작곡가로 부추겨 세워놓고서는 모차르트에 대해서는 ‘다른 작곡가’라고 해서 베토벤보다 모차르트는 더 쳐주는 경우와 같습니다. ‘다른 작곡가’란 곧 ‘유일한’ 작곡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상급보다 유일함이 더 초월적입니다. 왜냐하면 최상급은 하급에 있는 것들을 여전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유일함이란 다른 것들이 아무리 대단해도 따라 올 수 없는 다른 영역에 속해있다는 말입니다.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차이’는 하급과 최상급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초월적입니다.

오늘날 성도는 ‘차이’를 품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차이’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발시켜 세상을 향하여 선방을 날립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이 ‘최상급’이기 때문입니다. 초월이 아니라 최고가 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욥의 차이성, 혹은 욥의 초월성은 의외에 ‘비참함’, 혹은 ‘초라함’으로 나타납니다.

‘난데없이 고통받음’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누구나 싫어할만한 모양새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의 거부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식입니다. 따라서 이 욥의 고통에 대해서 욥의 친구들이 강력하게 자신의 건전함을 사수합니다. 이제는 그 사수함을 가지고 역으로 욥에게 듭니다. 욥은 현재 살아 있는 게 입밖에 없기에 입을 통해서 욥의 본질을 뿜어낸다고 말입니다.

왜 욥을 공격할까요? 그것은 욥의 친구들이 동질성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즉 살아있는 인간과 인간들 끼리는 얼마든지 동질성을 나타낼 수가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이 보기에 욥은 지금 이러한 동질성 추구에 반발하고 여겨져서 기분 상한 겁니다. 그래서 욥을 평가하되, 말하는게 문제가 있다고 단정짓습니다.

전혀 타인에게 도움이나 보탬이 안 되는 내용들을 말로 쏟아내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는 겁니다. 결국 인간들은 논쟁을 하면서도 진리에 대한 관심사 보다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로 자신을 더욱 견고히 하고자 하는데 있는 양보가 없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다들 서로가 사로를 보고 옳다고 인정받는 관계를 수립하고 싶어합니다.

아예 지적질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사람 관계를 얻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이런 의도가 통하지 않습니다. 열왕기상 18:17-18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엘리야를 볼 때에 저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이 당시 이스라엘의 왕은 아합왕입니다. 결코 엘리야가 아닙니다. 따라서 아합왕은 엘리야와의 동질성을 갖고 싶은 겁니다. 즉 내가 통치하는 이 나라와 나랑은 다른 의견을 내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왕과 다른 의견을 내게 되면 이는 곧 이스라엘 왕인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 자체를 괴롭게 하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반면에 엘리야는 반대되는 주장을 합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것은 왕 본인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요건을 충족시키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우상을 섬기게 했다는 것은 다른 이스라엘상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이는 곧 엘리야 본인이 아합왕에서 지적질라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왕다우신 책임을 다하신다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인간 세계에 선제공격을 행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봐서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일들이 인간들의 예상을 벗어납니다. 이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기존의 세상관을 의도적으로 피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르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움직였습니다.

창세기 18:27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 ‘티끌’에 비유합니다.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이는 곧 자기 자신이 누군인지를 먼저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세입니다. ‘티끌’이라는 표현은 곧 자신을 없는 존재로 인식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발생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아브라함이나 욥은 ‘차이’로서 자신을 내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이 ‘차이’ 속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명백하고 명확한 자인식으로 자신을 무장하려 합니다. 곧 자신을 ‘없는 자’로 여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인간 대 인간의 비교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장점으로 타인을 평가하려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확하게 평가해도 주님이 주신 고통을 빼놓으면 그 평가는 소용없는 헛된 평가입니다. 하늘과 땅의 평가는 아무리 인간들이 용을 쓰고 알아내거나 접근할 수 없는 고난을 통해서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강도는 주님과 같이 고난 받는 것을 통해서 초월적 동질성을 이해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고통을 우리의 평화로 이해하지 말게 하옵소서. 오직 십자가 안에서 주님과 하나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20-10-11 20:37 
52강-욥기 15장 1~6절(지적질)20201011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5장 1~6절입니다. 구약성경 774페이지입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으로 그 품에 채우겠느냐, 어찌 유조치 아니한 이야기, 무익한 말로 변론하겠느냐,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폐하여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택하였구나,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너를 쳐서 증거하느니라”

엘리바스가 욥을 계속해서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습니다. 욥의 입장에서 볼 때 엘리바스로부터 이런 공격을 받는 이유는 욥 자신을 명확하게 규정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명백하고 명확하지가 않아요. 어제까지 구성한 나는 오늘이 되면 다 흐지부지가 돼요. 또 어떤 상황이 주어 지면 나답지 않은 것들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인간은 갈수록 희미해집니다. 젊을 때 바짝 정신 차리고 열심히 했지만 동일한 인간이 나이가 들어버리면 머리가 온통 무너지는 것 같아요. 행동하는 것도 어설프고 그 어설픈 것에 대해서 타인이 힘들어하는 것도 나에게 힘들고 그래서 연세 많은 분이 자식들 만나면 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어요. “죽어야 될긴데, 죽어야 될긴데, 이 목숨줄이 길어서 못 죽어서 미안하다”라고 하는데 복음을 아시는 분들은 알게 될 거예요. 미안함이 오만함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남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그런 자격조차 안 됩니다. 내 힘으로 내가 살아온 것이 아니에요. 우리 자리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내 자리 만들고 내가 내 인생 꾸려가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물어야 해요. ‘도대체 내 자리는 누가 이렇게 몰아넣은 거야. 누가 이렇게 만든 거야. 어떻게 해서 생긴 거야’라는 질문을 지금 욥은 하나님을 상대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지요’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지켜보고 있던 옆에 있던 친구 엘리바스가 이야기하기를 “네 인생이 그렇게 조져버린 것은 바로 너야. 네가 그렇게 조진 거야. 나봐. 멀쩡하잖아. 너는 아픈데”라고 하는 이 말이 뭐냐 하면 “욥아, 네가 생각하는 방식이 살아가는 방식이 하나님 앞에서 저질이고 내가 살아가는 방식은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인정받기 때문에 이렇게 복을 받고 사는 거야”라고 엘리바스라는 친구가 아주 엉뚱하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욥이 그 친구에게 해줄 말은 이겁니다. “이 친구야, 맞는 것도 복음이다. 내가 세상 이렇게 아픈 것도 복이라는 거 너는 모르지.” 우리가 성경 보면서 항상 사람을 볼 때 자기 처지에서 사람을 보게 되어있거든요. 그럴 때 내가 남을 지적한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지적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번 해보세요. 내가 남을 지적하는 그 사실이 제대로 하나님이 지적하는 것을 앞에 서서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정답을 미리 말씀드릴게요. 이 세상에는 주님만 있습니다. 다른 존재는 없어요. 그게 창세기 18장 27절에 나온 말씀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있어 보이지요? 있어 보이지만 세월 얼마 안 가서 다 돌아가십니다. 없어요. 잠시 있습니다. 잠시. 잠시 있다가 잠시 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내가 없을 경우를 생각하세요. 내가 없을 경우에 나는 누구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가. 그게 복음입니다. 그게 바로 구원의 원리고 원칙이고 복음의 내용이에요.

내가 없기 전에도 주님께서 계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됨에 그가 없이는 생겨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그러니까 복음이라는 것은 성경은 뭐냐 하면 어떻게 나를 버리고 주님 쪽으로 옮겨가느냐 하는 그 능력, 그 내용에 관한 겁니다. 지금 욥은 경계선에 있어요. 친구는 지금 멀었어요. 친구는 지금 아무 생각도 없어요. 지금 욥 붙들고 시비 거는데 분주하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욥 친구도 말해요. ‘우리는 신을 믿는다’라고. 신을 믿는다고 할 때는 반드시 중간 단계를 이야기해 줘야지요. 신과 인간 사이에 중간 단계가 십자가거든요. 십자가를 언급해야 신이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이지 십자가 모르는 사람이 신을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에다 자기 자신을 투영한 거예요. 욥의 내용이 구약적으로 함축이 되어 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먼저 말씀드립니다.

결론적으로 이 세상에는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주님만 계신 거야. 주님만 계셔서 일하셨고 그 일의 결과가 바로 네가 있고 내가 있는 거야. 그게 바로 욥기에서 이야기하는 복음이고 성경입니다. 따라서 내가 나의 원인을 내가 일하는 곳에서부터 출발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없다고 했을 때 생겨난 원인이 지금 생긴 나의 바탕이 되는 겁니다.

내가 없다고 했을 때 뭔가 꾸역꾸역 하나님이 생각한 그것이 지금의 나를 나 되게 하신 거예요. 지금 욥이 답답한 것은 그 원인으로의 자기가 잘 매치가 되지 않고 연결이 되지 않는 것 때문에 답답한 거예요. 그러나 욥의 친구는 그 원인을 본인의 자리로부터 출발합니다. 본인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고난을 줘서 욥을 통해서 친구들에게 선방을 날리는 거예요. 너 한번 맞아 보라고.

“네가 이것까지는 모르지. 그지? 자, 한 대 맞았으니까 네가 맞은 것에 대해서 네가 한 번 입을 열고 나에게 이야기해봐라”라고 하면 욥의 친구들이 줄줄이 다 내놓지요. “그게 바로 네가 무식하다는 거야”라는 식으로 이렇게 계속 싸우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엘리바스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지 우리가 찾아야 합니다. 그런 점이 어려운 거예요.

방금 우리가 15장 1~6절을 보면서 엘리바스 친구는 전부 다 바른 이야기만 한 것처럼 느껴지죠. 이 문제가 엘리바스가 이야기했다는 것을 감추고 욥이 했는지, 엘리바스가 했는지, 주님이 했는지, 아니면 가롯유다가 했는지, 마귀가 했는지 딱 감추고 요 본문을 떼서 이 이야기가 옳은 이야기인지 그른 이야기인지 수능시험문제 낸다면 맞출 사람이 정말 없어요.

왜냐면 옳으냐 그르냐를 구분하라면 차이성, 그 차이성을 미리 갖고 있어야 해요.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 죄 많은 인간의 생각과 그 차이성을 모르게 되면 이러한 본문이 욥이 이야기 한 것인지 욥의 친구가 한 것인지 가려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차이성은 어떻게 만들어 내는가. 이 차이성을 만드는 방법은 나의 주관성, 나의 낭만적인 거, 나의 기분, 감정, 이런 거 다 제쳐버려야 해요. 사람은 기분에 살고 기분에 죽거든요. 기분에 살고 기분 따라 우울해 버리면 정작 진리의 객관성을 노출하게 돼요.

따라서 이걸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걸 제거하고 나면 남는 것이 뭐냐. 남는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동일하지 않고 비 동일성이다. 차이가 난다. 하나님과 나의 차이가 난다고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욥의 친구들도 그 정도는 이야기했다고 하실 텐데 “하나님은 높고 우리는 낮고 누가 감히 하나님을 존대하지 않겠느냐”라고 뒤에도 나오고 그전에도 이야기했거든요.

제가 말하는 차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제가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전에도 예를 들었지만, 이 세상 작곡가 가운데서 최고의 작곡가는 베토벤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와~~동의함!!”이라고 하면서 박수를 치죠. 그러면 모차르트하고 베토벤 중에 누가 최고냐 할 때 모차르트는 다른 작곡가라고 하는 거죠. 이건 최상급과 초월의 차이예요.

최상급은 따라붙을 수가 있어요. 연결, 연결돼요. 그런데 초월은 붙잡을 수가 없어요. 그걸 가지고 초월하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유일성이라고 해요. 유일성. 오직 하나. 여러 개 가운데 최고가 아니라 비교 대상도 아예 없는 거, 그게 유일성이에요. 그래서 여기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우리의 차이는 인간보다 더 월등하게 착하고, 인간보다 더 월등하게 진리답고, 인간보다 월등하게 훌륭한 그런 인간과 비교해서 인간보다 더 잘하고 더 훌륭하고 더 거룩한 그런 하나님이 아니고 족히 비교 대상도 안 되는 거예요.

비교 대상도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왔을 때는 도리어 위대하다고 존경받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로부터 혹독하게 무시당한 분입니다. 그 무시가 차이예요. 사람이 얼추 따라붙어 있을 때 그 사람이 존경이 되거든요. 그런데 터무니없이 나와 달라도 너무 다를 때는 존경의 대상이 아니고 밟아버려요. 그야말로 내쳐버립니다. 주님은 이 땅에 와서 존경을 받으신 분이 아니고 내침을 당하신 분입니다.

지금 욥이 바로 그런 처지예요. 욥은 분명히 고난 오기 전까지는 욥의 친구들이 욥을 어떻게 생각했느냐면 친구들도 알아요. 우리 어떤 친구들보다 더 최상급으로 착하게 살았던 자다. 그리고 우리보다 더 하나님께 복을 받을 만해서 받은 자로 욥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욥에게 난데없이 욥도 모르는 난데없는 차이성, 고난이죠, 내가 기대하지도 않은 어떤 차이성, 나를 당황시키는 어떤 인생에 뒤틀어짐, 꼬임, 원치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았는데 폭격 맞듯이 터져버린, 그걸 가지고 고상한 말로 김밥 옆구리 터졌다고 하는 데, 김밥이 끝까지 나가야 하는데 중간에 터진 것처럼 내 인생이 중간에 터져버린 거예요.

내가 예상한 미래, 기대한 내 인생이 오다가 중간에 터져버렸어요. 수습도 안 돼요. 그게 우리가 예상 못 한 차이성입니다. 비로소 그 자리에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주여, 제가 없었군요. 제가 있지도 않은, 애초부터 없는 존재였군요. 자꾸 내가 있다고 우기니까 하나님을 따라 붙이려고 하는 거예요. 지금 있는 나를 어떻게 하나님 앞에 잘 보여서 하나님 나라에 합류하려고 시도해 본 겁니다.

창세기 18장 27절에서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라고 했어요. 저는 그냥 티끌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했어요. “나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마옵소서. 사람이 끝날 지점에서 생겨날 티끌, 그 티끌이 저입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욥은 아직 신약 성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은혜를 못 받았어요. 다만 지금 답답해서 발악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약적 관점으로 더 발전하게 되면 뭐가 됩니까. 하나님과 우리는 죽음 안에서야 비로소 동질성을 발견한다는 겁니다. 살아 있으면 그거는 어떻게 하나님과 따라 붙일 수가 없다. 죽고 나니 그것도 언약으로 하나님의 성령 받아서 죽고 나니 비로소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죽음 안에서만 동일하지 죽음 밖에서는 나를 자기 백성으로 쳐주지를 않는 거예요. 이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감히 십자가와 함께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이 사실이 이 사실이 나에게 영광입니다. 어떻게 주님 십자가 자리에 내가 감히 거기에 끼어들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십자가 옆에 강도 있잖아요. 강도의 믿음은 그거였어요. 이 십자가 자리에서 같이 예수님과 십자가에 죽을 수 있도록 혜택을 주셨사오니 거기서 감히 강도가 말합니다. 그는 벌써 자기가 주님과 한패를 먹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주님 나라 갈 때 저를 끼워주시옵소서. 세일할 때 1+1 하는 것처럼.

이미 같은 동질 아닙니까. 십자가 이 십자가가 주님 십자가 때문에 나에게 주어진 팔자가 주님과 십자가에 함께 죽는 팔자, 이 팔자가 보통 팔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얻어맞는 것이 복이었다는 겁니다. 얻어맞는 것이.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복이라. 사도바울이 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고난을 받지 않았더라면 사탄의 가시가 없었더라면 세상적인 은혜만 추구했을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뭐 그 정도까지는 안 망했잖아요’라고 생각하지 마시고요. 그 정도까지 망했다고 생각해야 감사하고 고맙소가 나와요. 그 정도까지 망했다고, 김밥 옆구리 터졌다고 억지로 감사하지 말고 안 터질 때도 이게 지금 혜택 입고 있는 겁니다. 안 터져도 혜택을 입고 있는 거. 제가 울산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죠. 모든 율법의 처벌, 징벌은 우리가 받는 것이 아니고 함께 하신 예수님이 그 저주를 다 받아냈다고. 그 증거가 십자가예요.

이건 주관적인 것이 아닙니다. 낭만적인 것이 아니에요. 지금 기분파 아닙니다. 확실한 십자가라는 확실한 사건이에요. 객관적 사건이 지금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를 꾀느냐고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말했잖아요. 사도바울은 지금 자기 기분에 도취 되어서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꽂혀버린 객관적 사실이 있는데 다른 소리 할 수 없다는 거예요. 빼도박도 못 한다는 거예요. 십자가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사람 기분 맞춰주는 교회 말고요.

그러면 욥의 친구가 모르고 있는데요 욥도 모르고 있고. 그렇다면 욥의 친구들은 이방 민족이기 때문에 언약이 없어요. 그러면 언약이 있는 사람을 찾아봐야겠지요. 열왕기상 18장 17-18절에 보면 두 사람이 만났는데 한쪽은 지적하고 한쪽은 지적을 받아요. 그 때 나온 대화입니다.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고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려 하여 가다가”라고 16절에 나오는데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간 거예요.

여기 또 아합 하고 엘리야 하면 골치 아파요. 옛날 사람까지 외워야 하나 생각하신다면 김정은이가 전광훈 목사를 만났다고 봅시다. 그렇게 생각하면 성경이 아주 쉬워요. 김정은이가 하는 말이 “네가 대한민국을 괴롭게 하는 자냐?”라고 한 거예요. 전광훈 목사가 믿음 좋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쉬운 예를 든 거예요. 또 당신은 그쪽 편이냐 하지 마시고.

“엘리야가 대답하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너다”라고 해요. 지적하는데 서로가 지적을 할 때 김정은이가 지적할 만 해요.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권세자들이 지적할 만 하단 말이죠. 왜냐 하면 사람은 꾸역꾸역 내가 생존하는 그 방식이 나에게는 옳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사는 방식에 네가 왜 토 다느냐? 왜 지적하느냐?’가 되는 겁니다.

네가 뭔데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느냐는 말이에요. 이해가 안 되는 거 같아서 좀 더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김포공항에 나이 60 중반 넘은 어떤 사람이 배낭 메고 가더란 말이죠. 그런데 어떤 기자가 막았어요. 막았을 때 “네가 뭔데 내가 미국에 요트 사러 가는 걸 막냐?”라고 나온 거예요. “네가 뭔데 내가 내 돈 주고 미국에 요트 사러 가는 나를 네가 뭔데 괴롭게 하느냐?”라고 한 거예요.

가자 양반이 하는 말이 “당신이 대한민국을 괴롭게 한다”라고 나온 겁니다. 자기 돈 가지고 미국에 요트 사러 가는데 그걸 왜 막느냐는 겁니다. 나라 법이 지금 미국을 못 가게 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우리나라 외무부 장관 사택이 좁아요. 3000평밖에 안 돼요. 그러니까 답답해서 못 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미국 가서 요트 사가지고 태평양 한 바퀴 돌고 오겠다는 거예요.

네가 기자면 기자지 왜 그걸 막느냐는 겁니다. 왜 나를 괴롭게 하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강경화 장관 남편 하는 이야기가 남편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날 우리가 잠재된 우리 바탕에 깔려있는 우리 생각이에요. 아니 내 돈 주고 내가 사는데 네가 뭐냔 말이죠. 이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네가 뭔데 나를 간섭질이냐는 그것과 지금 열왕기상 18장에 나온 이것은 지금 그 나라가 누구의 나라냐 하면 엘리야가 왕이 아닙니다. 누가 왕이냐면 아합이 왕이에요. 왕이 나의 나라 내가 관리하겠다는데 네가 뭔데 지적질이고 간섭질이냐는 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 엘리바스의 생각이 욥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선방을 누가 날리느냐 하면 욥이 날렸다니까요. 잘 생각해야 해요. 지금 우리 보기에는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욥에게 시비 거는 줄 알지만 아니에요. 시비는 어느 쪽에서 걸었냐 하면 시비는 욥 쪽에서 걸었던 거예요. 욥이.

자, 욥기 처음으로 다시 가봅시다. 하나님 나라에 하나님이 계시고 악마가 있었어요. 천상회의 하는데. 시비를 누가 걸었느냐 하면 하나님이 먼저 악마보고 시비 건 거예요. 선방날렸다는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뭐냐. 세상은 성도를 먼저 안 건드리는데 성도가 세상을 건드리는 거예요. 예수님이 먼저 이 세상에 선방 날린 거예요. 우리는 그분을 믿습니다.

인간이 자기 노력해서 돈 벌어서 자기가 요트를 사든 붕어빵을 사 먹든 그냥 놔두면 안 됩니까? 인간이 자기가 노력해서 힘들여서 돈 벌어서 돈 있으면 뭐 합니까. 자기 기쁨을 위해서 소비해야지요. 소비하겠다고 마트 갔는데 그것 좀 놔두면 되지 않느냔 거죠. 마트 가보면 꼭 오지랖 넓은 사람들 있어요.

자기 카트 끌고 가는데 자기 동네 이장인지 뭔지 모르지만 가서 “아이고, 아줌마 그거 딴 데 가면 더 싼데...”라고 남의 것을 왜 보냔 말이죠. 자기는 도와준다고 하는데 자기 것만 보면 되지 남의 것 물건까지 수색하면서 수색영장도 없이 하면서 이건 잘못 샀고, 이건 속아서 샀고, 이건 이미 세일 기간 끝났고, 좀 있으면 세일 하고 하는 그런 지적질을 할 그런 자격 있어요?

지금 누구보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건 저보고 이야기하는 건데 남이야 침을 뱉든 담배를 피우든 가만 놔두면 되는데 왜 먼저 선방 날려서 욕을 얻어먹고 그러냔 말이죠. 사실 이야기하고 싶은데 제가 많이 참고 있는 거예요. 마트 가도 제가 참고 있는 거예요. ‘저건 한 개 더 주는데’라고.

성도라는 것은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것이 아니에요. 남을 보는 거예요. 왜? 그 남이 옛날에 내가 살던 내 모습이기 때문에. 내 돈 가지고 요트 사서 내 기쁨 누리겠다는데 예수 네가 왜 참견이냐. 하나님 네가 뭔데 왜 간섭질이야. 그런 관점으로 성경을 보세요. 성경이 눈에 확 다 들어옵니다. 성경 해석 안 될 것이 없어요. 우리가 예수님 편에 서니까 성경 해석이 안 되는 거예요.

지적받으려고 해보세요. 우리는 지적 덩어리가 천지삐까리입니다. 이건 나훈아 말인데. 지적받을 것이 천지삐까리예요. 전부 다 지적받을 거예요. 진짜 하나님의 오지랖중에 오지랖 하려고 예수님 보내신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욥의 친구가 욥에게 얻어맞았으니까 자기가 되지도 않는 반격에 나선 겁니다. 반격에 나설 때 욥의 친구가 얼마나 억지를 부리는지 “너는 내가 네 몸 아픈 것 가지고 시비 걸지는 않는다. 그러나 너는 몸은 아프면서도 왜 입은 살았느냐?”라고 시비 거는 것이 오늘 본문이에요.

네 모든 지식은 너만 괴로우면 되는데 괜찮은 훌륭하고 착실한 친구들 다 욕 먹였다. 네가 아프다는 것은 내가 참았는데 아무리 아프다고 해도 그렇게 남에게 지적질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느냐. 그래서 나는 도리어 반격 나선다. 여기에 무식이라는 말이 나와요.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헛된 지식으로”라고 나오고 3절에 보면 “어찌 유조치 아니한 이야기”라고 나오는데 유조치 아니한다는 말은 보탬이 되지 않는, 도움이 되지 않는 유익이 되지 않는 그런 말, 그런 이야기, 무익한 말이라고 하고 6절 끝에 보면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네게 불리하게 증언하느니라”라고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네가 말하는 것으로 네가 책임져야 한다고 하는 거예요.

이 친구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욥도 참고자 했으나 아픔이 하나에 자기의 외침으로 나온 거예요. 그리고 그게 지적질로 나온 거예요. 지금 욥은 뭘 모르느냐 하면 열왕기상 18장 18절에 엘리야가 아합과 있을 때 엘리야는 무슨 백을 믿고 이스라엘 전체를, 왕을, 나라를 공격하는지를, 그 기준을 몰라요. 엘리야가 드디어 850대 1로 붙습니다. 이건 숫자와 관계없이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과 통한다고 보는 겁니다.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불 질러야 하는데 물을 열두 통을 갖다가 붓죠.

이렇게 할 때 엘리야가 생각한 바는 바로 그거였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 세상에는 내가 여기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나는 허상이고 허구고 내 자리에 주님이 계시다. 욥은 그 사실을 아직 모릅니다. 자꾸 내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나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점점 더 명확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울증 있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가 자기가 살수록 명확해 져요. 너무 명확해서 잠이 안 와요. 밤에. 잠을 못 자요. 자기를 하나하나 점검한다고. 자기 행동 다 조사한다고. 희미해지지 않고 모호해지지 않아요. 아브라함은 자기가 먼지라고 했거든요. 모호해요. 훅 불면 흩어질 있으나마나 한 존재예요. 저 자신에게도 하는 이야기지만 제발 우리 자신을 죽을 때까지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살아주시길 바랍니다.

있으나마나예요. 우리는 고민할 자격도 안 됩니다. 그냥 주신 혜택 입고 사는, 주님께 배급받고 사는 입장인데 능력도 배급받고 은혜도 배급받는 입장인데 뭐 배급받는 주제에 뭐가 내가 명확해야 하고 또렷해야 하고 앞으로 행동 조심하겠습니다. 바르게 살겠습니다. 앞으로 이런 실수는 두 번 다시 안 하겠습니다. 이러지 말고 두 번 다시 하세요. 해도 괜찮아요. 세 번 하세요.

교회를 다니고 아무리 신앙생활 해도 갈수록 자기가 또렷해져서 나중에 미쳐버릴 정도예요. 욥처럼. 이만큼 깨끗했는데 왜 벌을 내리십니까 하면서. 무슨 벌을 줘요. 태어난 자체가 벌인데 또 무슨 벌을 줍니까. 주께서는 주님과 상대해서 덤으로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여러분, 욥은 모르지만 엘리야는 알았어요.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나라이지 네 나라 아니야.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은 우리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 속아 넘어갔습니다. 같이 휩쓸렸습니다. 나는 내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얼마나 욥같이 반항기가 나타났는지. 진리를 모르고 진리를 아는 척하는 우리가 이제는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님께서 우리 자신을 통해서 주님 자신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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