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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6 14:53:53 조회 : 89         
   단절과 부활200726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단절과 부활(욥기 12:7-12)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1cmSMRq_-_E, Hit:8
 이근호 20-07-26 15:27 
단절과 부활 

2020년 7월 26일           본문 말씀: 욥기 12:7-12

(12:7)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

(12:8)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12:9)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12:10)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12:11) 입이 음식의 맛을 구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간하지 아니하느냐

(12:12)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

사람 대 사람을 만나게 되면 비교하는 것으로 각자 자기 위상을 정하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상대에게 기죽지 않기 위해 자신이 가진 총역량을 동원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인간 대 인간끼리의 경쟁이 하나님에게 의미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를 놓고서 저돌적인 논쟁이 벌어져도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논쟁에 끼어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래봤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상대와 나는 결국 한 통속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일에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서로가 만나야 내가 정립되기에 싸우면서도 아쉬운 법입니다. 아무나 나와 말 건네주는 사람조차 없다면 홀대당하는 서러움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기존에 알고 지내던 그 그룹에서 내침을 당하는 것이기에 그동안 쌓아놓은 자아정립이 무너지고 새롭게 정립해야 하는 힘든 수고를 해야 합니다. 즉 타인의 나의 가치를 안 알아주면 나의 존재 의미 자체가 무너져내리는 겁니다. 그래서 싸우면서도 친구사이가 되는 겁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욥은 연륜의 지혜를 강조합니다.

상대의 지혜를 짐승이나 새나 물고기 지혜라고 거론하면서 욥은 자기에게 있어 세월 헛 먹은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욥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지혜가 나오지 않으니 친구에게 실망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답답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욥과 친구 사이의 지혜는 그저 인간들 사이에 늘 나올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등장한다고 해서 그것을 근거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느 편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에 와서 여호와의 손, 즉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은 ‘연속’이 아니라 ‘단절’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모였다 하면 위계를 세우고 서열을 정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높고 최고의 자리에 대한 집념을 보이게 됩니다.

도전의식을 고취하는 겁니다. 하지만 신약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율법으로 모든 사람의 입을 막는 일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즉 아무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규정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의견을 피력해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인간쪽에서 해명할 수 없는 단절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지혜의 단절로 인해, 인간과 인간들의 의견 조정을 무의미합니다. ‘무차별적인 동질성’을 하나님께서는 발휘하시는 겁니다.

마태복음 3:4-6에 보면,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에게는, 인간의 지혜로 알 수 있는 지혜의 한도 너머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모든 인간들은 이 위계적 단절성에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인간 대 인간 끼리의 비교나 경쟁은 실용성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연속성을 인정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들의 자기 해석은 선과 악이라는 구조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는 무조건적으로 옳고 타인은 이 잘난 나의 평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됩니다. 이것이 바로 ‘헤아림’입니다. ‘헤아림’이란 ‘헤아리는 나’의 평가에 주도권이 있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할 때 나오는 태도입니다. 즉 자신은 남을 평가하는 심사위원으로 당연한 권한이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럴 때, 자신의 자기 평가는 당연히 옳고, 그것은 타인을 평가하는 최종 기준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욥에게도 그런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입장에서 보면, ‘선과 악’말고 다른 기준이 작용합니다. 그것은 바로 ‘단절 뒤의 부활’입니다. 즉 부활의 요소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리라고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부활은 여백입니다. 다 설명될 수 없습니다.

지금 욥에게 난데없이 주어진 그 고통이 욥으로 하여금 친구들의 세상 보는 기준은 다른 기준을 적용시키려 합니다. 기존에 선악체제에 입각해서 자신과 타인을 평가하던 그 평가 기준이 더 이상 신약에서는 통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연속적’이지 않고 불연속적인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김성수가 부른 ‘당신’이라는 노래)

“내 품에 안기어
곤히 잠든 그대여
어느덧 그대 눈가에도
주름이 졌네
내 가슴에 묻혀
꿈을 꾸는 그대여
야위어진 그댈 바라보니
눈물이 솟네
고왔던 여자의 순정을
이 못난 내게 바쳐두고
한마디 원망도 않은채
긴 세월을 보냈지
난 맹세하리라
고생 많은 당신께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그대를 사랑하리”

이 가사에 나오는 사연을 보게 되면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연속성이 유지됩니다. 전에 아내에게 고생을 하게 해 나는 이제라도 남은 생애를 아내를 위해 살면 만회가 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 속에 부활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자신의 잘 잘못을 평할 수 있는 기준점을 본인에게서 도출시키기 때문입니다.

욥에게 고통이 이유도 없이 왔듯이 하나님께서는 욥으로 하여금 기존의 인간들의 선악체계에서, 하나님과 악마만 아는 그 영역으로 옮겨다 놓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존의 선악체계와는 단절이 일어납니다. 중요한 점은, 욥은 더 이상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해석하거나 설명한 권리자로서 박탈됩니다.

고통이란 그냥 이유 없이 주어진 겁니다. 욥이 큰 잘못을 해서 남보다 더 큰 고통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찾아들 욥에 대한 축복도 같은 원리에서 주어집니다. 로마서 8:18에서 사도가 밝힌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나쁜 짓해서 성도에게 고난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무슨 연유로 어려움이 오든 상관없이 장차 올 영광은 지금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겁니다. 비교에서 벗어나는 인물들이 새로 창조된 성도라는 겁니다. 항상 따지고 살면, 감사나 고마움이 사라집니다.

그 어떤 형편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의도에 의해 주어진 이 상황을 즐겁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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