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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7 14:56:21 조회 : 98         
   연습 인생 200517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연습 인생(욥기 9:22-25)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SeRbd9QKbvU, Hit:15
 이근호 20-05-17 16:12 
연습 인생 

2020년 5월 17일            본문 말씀: 욥기 9: 22-24

(9:22) 일이 다 일반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순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9:23) 홀연히 재앙이 내려 도륙될 때에 무죄한 자의 고난을 그가 비웃으시리라

(9:24) 세상이 악인의 손에 붙이웠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리워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이뇨

욥이 단단히 삐졌습니다. 선인과 악인이 명확하게 판정하시고, 그 결과를 우리 인간들이 알아 먹을 수 있도록 해주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생각했던 욥에게 있어 하나님의 침묵은 정신적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육체적 고통에다 정신적 고통이 추가됩니다. 욥이 같이 호응할 수없게 일방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욥은 큰 실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의 의견을 나름 솔직하게 발설합니다. “선과 악의 기준이 불명확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우습게 보면서 이 세상을 악이 설치는 세상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제발 선한 자와 악한 자를 달리 다루어 줍소서”라고 간청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것이 고통이 없으면 세상을 즐기면서 신에게 감사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막상 고통이 오게 되면 기어이 하나님의 세상 운영의 해답을 알아내어서 자기 정당성을 어떤 식으로 확보하려 합니다. 바로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자아 조작’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살아남을 권리가 있다고 날마다 조작합니다. 그래서 만약에 자기에게 고통이 온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잘못된 처사를 내린 것이라고 항변합니다.

이러한 항변을 해대는 그 바탕에는, 자기에게 주어진 이 목숨이 내가 정당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셨다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욥에게 그 목숨이 위태롭고 고통스럽습니다. 욥은 지금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준 목숨을 도로 가져가려는 처사로 여깁니다. 여기서 욥은 의문을 갖습니다.

‘나는 정당한데 왜 내 목숨을 가져가시려고 하시는가?’하면서 반발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 목숨을 가져가시면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하나님의 일관성있는 원칙이 깨어진다는 겁니다. 이러한 욥을 보면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너무 유난떤다는 생각을 할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욥처럼 고통을 안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아무리 우리의 마음을 점잖게 유지하고 싶어도 오로지 그 고통당하는 지점으로 온 신경을 쓰게 만듭니다. 그렇게 되면 자아는 그 고통 자리에서 또다시 자아를 재조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욥이 구원과 비구원의 경계선상이 있는 인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할 때도 이 절차를 필수적으로 겪게 하신다는 겁니다. 극한적으로 하나님의 정당함에 의문을 품고 대드는 절차를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자기 백성에게 다가서면 자기 백성은 자신이 잘난 존재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면 일단 ‘괜찮은 품격으로 무장된 신자’로 자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난데없이 목숨을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갑자기 성도는 ‘나의 목숨과 나의 구원은 그만큼 내가 받을 만한 인물이라서 받는다’는 기존 인식이 흔들리게 됩니다. 억울하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과도한 처벌이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참으로 성도가 아니라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역시 나는 신자가 아닌 게 맞아”라고 말입니다. ‘신자 아님’으로 도피하려는 이유는 ‘저를 더 때리지는 마세요’라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성도를 찾아오시려는 이유는 ‘약속’을 이루려함입니다. 약속은 예수님을 두고 말입니다. 약속을 중간에 두지 않고 구원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모든 구원이 약속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너 구원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약속 완성한 분이 누구신가’를 알리기 위한 구원입니다. 따라서 욥에게 찾아온 고통은, 욥이 악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닮기 위한 조치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을 닮는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형편을 닮습니다. 인간들이 무엇 때문에 그토록 힘들게 살고 고통스러워하는지 직접 체험하시려고 합니다. 인간들이 벌려놓은 그 더러운 일 속에서 하나님께서의 일은 멈추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악인에게 벌 주는 것이 인간의 더러운 것에  벌주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약속에 대한 거부차원에서 다루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 자신이 인간 세계에 들어오십니다. 그들의 죄의 이유와 본질을 공감하시면서 파악하십니다. 히브리서 5:7-9에 보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라는 이유 때문에 인간의 아픔을 모르고 유유자적하실 것이라고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아픔을 외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에게 고통이 오게 되면, 갑자기 자아조작에 나서서 자신이 이만한 고통을 안 당할 대상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의 자아는 항상 자기편입니다. 자기에게 우호적입니다. 억울함으로 무장해 있습니다. 따라서 욥이 짜증부리는 그 모습은 실은 오늘날 우리들의 진상 부리는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우리 사정을 모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 자신에게 너무 집착하고 수시고 자기 잘난 쪽으로 자아를 조작하고 수정하는 식으로서는 하나님의 뜻에 공격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6:13에 보면,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인자(人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바로 인간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모습이 인자(人子)입니다. 즉 고난받는 인자입니다. 인간의 고통을 아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주님의 질문에 대해서 누가 과연 제대로 질문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는 인간은 이 질문을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욥이 하나님에게 항의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답변을 바로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욥이 자신의 억울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고난받은 인간형’으로서의 하나님이 되시므로서 새로운 질문 형식으로 답변을 대신하시는 겁니다. 바로 고난받은 인간형을 모델로 해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백성을 친히 창조하십니다. 이사야 43:7에 보면,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기 사정에만 정신 팔려 있는 자는 약속에 대해 오해하게 마련입니다. 인생이란 그저 연습일 뿐입니다. 잘난 연습, 못난 연습 하지만 어디까지나 약속은 따로 계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연민에 너무 빠져 있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20-05-17 19:47 
31강-욥기 9장 22~25절(연습 인생)20200517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9장 22~25절입니다. 구약성경 769페이지입니다.

“일이 다 일반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순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홀연히 재앙이 내려 도륙될 때에 무죄한 자의 고난을 그가 비웃으시리라, 세상이 악인의 손에 붙이웠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리워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이뇨”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일단 욥이 당하고 있는 억울한 고통에 합세해야 합니다. 욥은 자기가 굉장히 억울하다고 생각합니다. 억울한데 이 억울한 감정이 육체의 고통 못지않게 같이 더 고통을 추가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욥이 자기가 고통 없었을 때를 계속 잊지 않고 있다는 그것이 문제점이 되는 거죠. ‘나’라는 것을 욥이 조작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인간은 나를 조작한다는 거예요. 조작할 때 나쁜 것으로 조작하지 않지요. 자기 자신의 정당성을 수립하기 위해서 좋은 것으로 나를 조립합니다. 조립하는데 그 조립할 수 있는 바탕이 뭐냐 하면 아직 목숨이 붙어있다는 것이 근거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어디서 착각을 하느냐 하면 내가 목숨 붙어있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것이고 하나님은 마땅히 목숨 부지하도록 그렇게 조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목숨을 줄 때는 내가 착하다는 조건을 보고 목숨을 붙여 주었기 때문에 내가 악하지 않은 한 나에게는 목숨이 유지되어야 하고 고통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 욥의 생각입니다. 욥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오늘 본문 내용이 나온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내용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이 복잡한 것을 쉽게 생각하려면 지금 욥은 하나님께 따지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따지느냐 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악인과 선인을 가리지 않고 같이 취급하실 권한이 있는 줄로 내가 알고 있습니다. 정말 훌륭하시군요”라고 비비 꼬고 있는 거예요. “예, 훌륭하십니다. 예. 악인이나 선인이나 나보다 못한 인간이나 나나 똑같이 취급하고 나의 선행을 계산에 넣지 않는 하나님이여, 참 하나님답습니다. 참 훌륭하십니다. 됐습니까?”라는 식으로 삐진 거죠.

이렇게 삐지면서 ‘세상이 선도 악도 없이 혼란에 빠지고 악인이나 선인이나 구분도 안 되는 그 책임이 하나님 아니면 누구에게 있겠어요?’라고 오늘 본문 24절에 나와 있습니다. “세상이 악인의 손에 붙이웠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리워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이뇨” ‘그’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욥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욥은 지금 모르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약속을 가지고 나타나신 하나님이십니다. 욥에게는 약속이라는 것이 없어요. 없으니까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그 중간에 무엇을 끼워 넣느냐 하면 자신이 ‘하나님은 이래야 하는 하나님 맞지요?’라고 자기가 만들어낸 그 어떤 체계를 가지고 하나님과 자기와 통해 보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체계라는 것이 어디서 만들어낸 체계냐 하면 욥 본인이 만든 거예요. 그러면 욥 본인은 어디서 나왔는가. 욥이 ‘나는 이런 인간이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그냥 조작한 거예요. 그렇다면 이 본문을 왜 이렇게 욥이 토라져서 하나님께 대드는 이 불경스러운 사실을 왜 이 성경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것은 바로 구원을 받는 절차가 욥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원되었느냐 안 되었느냐의 경계선을 욥이 아주 심리적으로 복잡하게 묘사해주고 있어요. 아코디언처럼 주름이 펴졌다 접혔다 하는데 접힐 때의 좁은 부분처럼 하나님께서 욥의 좁은 마음을 통해서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욥의 이 생뚱맞고 하나님 앞에 괘씸하게 여겨지는 이 심정이 오늘날 보통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다 담겨있어요. 그게 약간 더 펴졌다 접혔다 할 뿐 그건 별 차이 아닙니다.

누구나 욥 같은 마음으로 다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걸 차마 그렇게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이놈, 가진 거 다 내놔라”라고 하시면서 자신만 손해 볼까 봐 꾹 참고 억누르고 있을 뿐이지 이러한 심정은 다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욥이 이렇게 건방 떨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자기 나름대로에 정당성, 그 정당성은 어디 있느냐 하면 자기는 악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고 선을 지향했다는 거죠.

나는 선을 지향했는데 하나님께서 선 쪽에 있는 것을 때려버리시면 악에 속한 자들이 얼마나 신나라 하고 고소하게 느끼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손해냐. ‘하나님은 내 편이니까 하나님이 손해 아니겠습니까’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와 같은 욥의 마음씨가 오늘날 우리의 보통 마음씨라면 우리의 맞은 편에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맞은 편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오게 돼요.

그러면 그 약속이 인물화 된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의롭지만 맞았어요. 의롭지만 얻어맞았다고요. 그런데 욥은 의롭기 때문에 안 맞아야 한다는 것이 욥의 생각입니다. 보통사람에게 물어보죠. 어느 쪽이 정당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느냐고, 어떤 조치가 하나님의 조치에 부합되겠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욥이 맞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욥은 구원된 사람과 구원되지 않은 사람의 그 경계 선상에서 복잡한 자신의 마음 상태를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생각할 때 이것만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하나의 연습이다. 연습이 무슨 연습이냐 하면 왜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지 못한 것을 평생토록 보여주는 연습을 하고 있는 거예요. 결국, 나는 아니다가 되어야 해요.

‘나는 아니고 주님께서 나를 외부 쪽에서 건져야 됩니다’라고 내뱉기 전에 또는 내뱉기 위해서는 만약에 우리가 내 목숨을 유지한 채로 구원을 받으려면 우리는 지독스럽게 내 목숨을 아끼면서 어떤 마음 자세를 보여주겠는가를 생각하면 그런 점에서 욥이나 우리나 진배없습니다. ‘이 목숨 주셨잖아요. 왜 줘 놓고 뺐습니까?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라고 몸부림을 치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하기는 ‘욥은 정말 신앙도 없어. 하나님을 생각하면 될 것이 아니냐’라고 쉽게 생각하는데 고통이 욥에게 오지 않을 때는 욥이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람이 이가 아프면 아무리 하나님 생각해도 관심사가 어디 있느냐 하면 이 아픈 것에 관심을 두게 되어 있어요. 고통은 그 사람의 모든 마음을 한곳에 모으는 그러한 결과를 낳습니다.

이곳에도 지금 아픈 분이 한두 분이 아닌데 주님도 아프셨어요. 아프면 본색 나옵니다. 신앙이고 소망이고 사랑이고 뭐 없어요. 아프면 노골적으로 자기 정체 다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면 다시 말씀을 연결해보면 인생이라는 것은 연습이다. 어떤 연습이냐. 아파봤을 때 네 본색은 이 정도밖에 안 됨을 보여주는 연습이에요. 아프게 되면. 사람이 자기 점잖을 때는 천하에 부처고 천사고 그렇지요. 그런데 아파보게 되면 이것은 나 자신도 고통에 견디지를 못하는 겁니다.

이와 같은 것에 대한 해답이 있어야겠지요. 전도서 9장 2절에 보면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 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 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여기 ‘일반’이라는 말과 오늘 본문에 욥기에 나오는 욥이 하는 말과 똑같은 말을 여기서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에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일반이라는 말은 그냥 연습생이니까 연습생 때 네가 어떤 삶을 갖든지 그건 네 맘대로 하되 하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연습생은 연습생대로 한곳으로 몰아넣는 거예요. 우리가 아직 안 죽었잖아요. 살아 있잖아요. 살아있으면 모든 것을 모르죠.

사람이 모든 것을 모르고 모든 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익숙하지 않으면 항상 뭐가 남는가 하면 희망이라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에요. 희망. 만약에 여러분들이 갑자기 어느 낯선 동네에 이사 갔다고 하면 그리고 이삿짐 푼 지 두 시간밖에 안 됐다면 그러면 그 동네가 저 골목 집에 누가 있고 저 뒷집에 누가 살고 하는지 모르죠. 모르는 경우에 여러분들은 그 동네에 대해서 은근히 희망을 품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의 특징은 “Boys be ambitious!”예요. 젊은이들에게 희망이 있다는 말이죠. 다른 말로 하면 여백이 있고 여지가 있는 거예요. 내가 이 동네에 이사를 왔으면 이제는 이 동네 사람과 친하게 지내서 혹시 이 동네에 내가 원하는 어떤 배필자가 있을 수도 있고 이 동네에 나의 취직을 도울 수 있는 그런 착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이 사람들에게 잘 보이면 내 삶을 이 동네에서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는 그 희망이 어디서 생기느냐면 다 내가 미처 모르는 여백, 빈자리에서 희망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이 땅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은 자꾸 돌아다녀요. 꼭 방황합니다. 끊임없이 방황합니다. 이일 하다가 때려치우고 저일 하다가 때려치우고. 왜냐 하면 내가 세상을 다 안 겪어 봤으니까 희망이 있는 한 나는 움직인다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움직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우리 성도님들에게 이야기했지만 어떻게 평생을 교사 생활하느냐, 도대체 얼마나 진리에 대해서 빠삭하게 알고 진리에 대해서 모든 것을 섭렵했기 때문에 어떻게 평생을 한 직장에 꾸준하게 교사생활을 아무 생각 없이 꾸준히 도대체 연금이 뭐길래 그렇게 꾸준히 계시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아는 어떤 친척분은 교사하다가 때려치우고 슈퍼하다가 때려치우고 번개탄 뚜껑 만든다고 하다가 때려치우고 한국에 있다가 때려치우고 전 세계 돌아다니다 페루로 갔다가 때려치우고 자꾸 돌아다니다가 돌아가셨어요. 끝까지. 왜? 희망이 나를 살린다는 거예요. 내 목숨 여기서 포기 못 한다는 겁니다. 희망 없는 목숨이라면 죽는 게 낫지. 살아서 뭐하겠나. 이러면서 자꾸 뭘 해보려고 하는 거예요.

잘 다니는 회사 때려치우고 사업한다고 해보세요. 부모들이 얼마나 놀란다고요. 그런데 전도서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일단 연습이라는 겁니다. 연습이니까 뭘 해도 상관없지요. 연습이니까. 그러니까 욥은 하나님이 주신 고통이 있다면 욥 말고 다른 사람은 자기가 알아서 고통을 유발해요. 고생을 사서 한다고요. 젊으니까 아프다고요? 아파서 좋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젊다고 아프고 싶은 사람 있습니다. 없어요. 젊은 사람들의 깜깜한 희망 가운데 반가운 것은 밤에 오는 피자 배달입니다. 반가운 것은 늦은 밤 찾아오는 피자 배달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그나마도 배달시켜 줘야 오늘 밤은 기쁨으로 넘어갈 수 있어요. 그래서 치킨 시키고 피자 시키고 해서 찌고 찌고 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죠.

그다음 중요한 겁니다. 그러면 왜 욥에게 고통을 주고 왜 전도서에서 인간은 연습이라고 하느냐. 여기서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닮았어요.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내용에 있어서 반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다고 하잖아요.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반전으로 오신 거꾸로 하강하신 하나님에 의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닮습니다.

인간이 하는 그 행세를 하나님이 그대로 거기에 자기 몸을 담아버려요. 왜? 그래야 고통이니까. 그게 히브리서에 나와요. “도대체 인간들아 너희는 어디까지 고생하는지 나도 맛 좀 보자. 그래 너희들은 되지도 않는 연습을 하는데 연습의 이유도 모르고 연습하는데 하나님께서 너희들만 연습하도록 내가 방치하지 않을게. 나도 너희들 연습하는데 뛰어들게”라고 인간이 고생하는 것을 깔아놓고 그 고생을 남 보듯이 하지 않고 그 고생에 같이 뛰어들어 버립니다.

이게 바로 우상과의 차이점이에요. 우상의 하나님은 배불러요. 느긋해요. 욥은 지금 그걸 모르고 있어요. “하나님은 좋겠다. 나만 고통스럽네”라고 하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욥은 지금 약속으로 오신 분이 욥의 지금 불만 불평하는 것을 충분히 귀담아듣고 그 연습하는 것을 외면하지 않고 거기에 뛰어듭니다. 그렇다면 욥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 이야기예요.

‘하나님이여, 이가 왜 이리 아픕니까?’라고 하면 “너만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고 하면 자리로 뛰어들어 주님께서 주되시는 하나의 자리를 만드는 거예요. 그 자리가 바로 우리의 자리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닮아요.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자’라고 합니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쓰는 거예요.

마태복음 16장 13절에서 예수님께서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인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지요. 그 물음에 이런 내용이 포함된 것을 놓치지 마세요. 어떤 인간도 나에 대해서 모르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자기에게 관심이 없이 나에게만 관심을 두고 저분은 누구냐고 묻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욥과 똑같아요. 자기만 가장 고생스럽고 자기 인생이 가장 불행하고 이 하나님은 자기에 대한 처우가 잘못되었고 하나님은 엉뚱한 사람 잡고 있다고 악인들은 저렇게 행복하게 놔두고 잘난 나는 이렇게 괴롭히고 있다고 이건 하나님이 실수한 거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고통 하고 고통 할수록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관심사가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거예요.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으니까 자기만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주님은 억울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구원되기 전과 구원 후에 그 경계선에서 까딱까딱하고 있는 거예요. 욥은 신약 사람이 아니에요. 구약 사람이에요.

인간의 한계를 극으로 보여줍니다. 극단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욥의 그 불평이 결국은 오늘날 고통당하면 우리가 내뱉을 우리의 내면의 본심을 욥이 대신해서 다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너무 심합니다’라고. 히브리서 5장 7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욥이 너무 건방지게 하나님께 대든다고 욥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난해서는 안 돼요. 왜냐 하면 욥은 바로 하나님이 만드신 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뭘 아무것도 모르면서 욥도 연습하고 우리도 연습하는데 우리는 이러한 눈물과 통곡의 하나님의 시키시는 기도조차도 우리는 게을러 빠져가지고 안 하려고 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 관심사가 나에게 꽂혀있기 때문에.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사기에 보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관심사가 자기에게 꽂혀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고통이 오기 전까지는 하나님 안 믿습니다. 하다가 다른 주변에서 압박을 가하니까 그때 “하나님이여, 도와주소서”라고 해요. 그거 본심 아닙니다. 여전히 자기에게 관심 있어요.

그것으로 인해 고통받는 것은 사사들이 고통받죠. 사사들이 힘들게 된 겁니다. 오늘날 우리도 못지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제가 그런 이야기 했죠. 기도할 때는 네 목숨을 담보로 내놓고 기도하지 않으면 그 기도는 가짜라고요. ‘주여 이 기도 응답대로 하신다면 제 목숨 가져가세요’라는 비장한 각오 아니면 그 기도는 건성입니다.

후닥딱 하는 기도. “오늘도 귀한 양식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후딱 하고 “밥 먹자!” 건성 건성이에요. “주여, 이 식사 이 짜장면 먹는 대신에 내 목숨 가져가세요”라고 그런 식으로 짜장면 대한 적 있습니까. 없지요. 관심사가 자기에게 있는 이상은 인자라는 인자가 누구냐에 대한 주님의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관심이 주님에게 없으니까 답변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경계선 밖에 있는 그 욥을 안으로 집어넣기 위해서 끝까지 우리에게 토해놓게 하기위해서 마지막 먹은 밥알 하나까지 다 기어 나오게 만들어요. 그게 주님의 사랑입니다. 다 기어 나와요. “이거 내 목숨입니다” “네 목숨 아니거든.” “내 목숨입니다” “아니야, 네 목숨 아니야. 네 목숨에서 잘못된 자아가 조작된 거야. 네 목숨의 주인은 따로 있어”라고 끝까지 다 끄집어내게 하시는 거예요.

그것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아주 냉철하게 단출하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라고 여기 약속하나 등장하죠. 예수님이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고생했다면 그 약속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연습은 하되 약속이 보장된 연습을 하게 됩니다.

고생하면서도 문득문득 고생 가운데서 약속의 고귀함을 되새기게 하는 연습을 하게 돼요. 이미 가질 것 다 가지고 확보할 것 다 확보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서 쓰인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면서 우리로하여금 또 돌아서면 잊어버리니까 또 “내 목숨 왜 이렇게 합니까”라고 그런 식으로 우리가 반복적으로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 약속이 바로 우리 목숨과도 사실 진작에 바꿔야 할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생명이 있기때문에 예수님이 이런 분이라고 나의 관심사에서 예수님의 관심사로 옮겨가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힘든 고난의 길을 우리가 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인생이. 지금 시공간은 우리를 토하는 우리로 하여금 더이상 이 땅에 살지 못하게 하는 그러한 동기로써 작용하고 있습니다. 진짜 끝으로 이사야 43장 7절 읽고 마치겠습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약속을 집어넣고 약속이 약속되게 해서 우리에게 묻죠.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그때 우리가 할 말은 주님은 이런 분이시라고 말하지 말고 내가 나에게만 너무 관심을 가졌기에 주님을 생각하지 않았음을 깨달으며 다시 주께서 관심을 주님에게 돌리게 하시는 치밀한 하나님의 계획에 우리가 놓여있음을 우리가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멀쩡할 때는 주님을 믿는 것 같은데 사는 게 막막할 때, 대책이 없을 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 죽는 것도 아니고 사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흐리멍텅할 때 그 모든 것이 너무 나에게 관심이 쏠려있다는 지적인 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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