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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2 14:54:38 조회 : 253         
   인간의 신비체험200112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인간의 신비체험(욥 4:12-21)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DuN0IGfHhgY, Hit:38
 이근호 20-01-12 15:34 
인간의 신비체험 

2020년 1월 12일                 본문 말씀: 욥기 4:12-21

(4:12) 무슨 말씀이 내게 가만히 임하고 그 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4:13) 곧 사람이 깊이 잠들 때쯤 하여서니라 내가 그 밤의 이상으로 하여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4:14)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골절이 흔들렸었느니라

(4:15)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었느니라

(4:16) 그 영이 서는데 그 형상을 분변치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 내가 종용한 중에 목소리를 들으니 이르기를

(4:17)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4:18)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4:19)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4:20) 조석 사이에 멸한 바 되며 영원히 망하되 생각하는 자가 없으리라

(4:21) 장막 줄을 그들에게서 뽑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이 죽나니 지혜가 없느니라

인간은 영물입니다. 자신을 그냥 흙덩어리로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에 참으로 자신을 흙덩어리 본다면 누가 자신을 치고 때린다고 할지라도 반항하지 않을 겁니다. 사람은 외부의 자극이 없으면 자신이 얼마나 자기 본위로 사는 지를 느껴지지를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엘리바스의 경험은, 평소에 인간이 얼마나 본인위주로 사는 지를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체험된 것들을 솔직하고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나 진리가 될 수가 없습니다. 순수하거나 진심으로 말했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는 아니라 그저 인간의 한계성만을 드러낸 것뿐입니다. 인간에게는 물러서고 싶지 않는 마지노선을 뒤로 두고 삽니다.

즉 “모든 것을 양보해도 그것만큼은 도저히 못참겠다”라는 한계선을 두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영적 존재로부터 신비로운 체험을 겪어도 체험이 끝나면 항상 끝에 묻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요? 나는 어떻게 되는데요?”라고 자기 걱정으로 돌아서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자기 본위는 사람과의 만남에서도 드러납니다.

혼자 있을 때는 우주의 신비까지 다 꿰뚫어낼 것 같지만 옆에 막상 다른 사람이 있으면 결국 귀찮게 마련입니다. 사이가 좋아서 며칠 지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얼마나 안 가서 사람과 사람이 엮인다는 것은 개나 고양이하고 사는 것보다 더 힘든 일임을 압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각자 현존 몸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긴긴 과거의 계열과 만나기 때문입니다.

즉 상대방의 과거를 다 용납하고 받아줄 수 있을 정도도 우리 자신의 과거에 여유가 없는 겁니다. 그저 양보와 양보를 거듭하지만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한계선을 긋게 마련입니다. 인간은 영물이기에 이러한 과거사에는 나름대로 의미있는 체험들이 일방적으로 왜곡된 해석으로 변모된 채 장착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은 가련한 티끌과 하루살이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상당히 겸손해보이고 깊은 경건함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마저 영물로서 인간이 해낼 수 있는 한계점이 됩니다. 특히 ‘티끌’이라는 주장은 1665년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으로 정리될 수가 있습니다.

그 방정식은 이러합니다.  F = g입니다. 여기서 f= 물체 사이에 서로 당기는 힘입니다.
M, M = 각 물체의 질량입니다. r= 물체 사이의 거리입니다. G= 뉴턴 상수로 불리는데 그 값은 G=6.67259×10-11 Nm2· kg-2입니다.  이 공식에서 알 수 있는데 ‘모든 물체’ 속에는 인간도 들어갑니다.

이 세상에는 신이 주신 힘이 작용하는데 이것은 두 물체 사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상호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겁니다. 이 원리와 원칙에 대해서는 하나님 스스로 마저 부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하물며 인간이 받았다고 여기는 신비체험으로 감히 이 확실한 법칙에 대들 생각 말아야 합니다.

즉 인간에게 있다는 감정이나 애정이나 느낌이나 신분이나 성격이나 인격이나 믿음, 소망, 사랑 같은 것도 우주를 움직이는 원리에서 전혀 무용지물인 것이 드러납니다. 인간이 자신의 품위 같은 것은 세상에 내세우려고 한다면 이는 ‘허무한 티끌’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즉 오늘날에 있어 과학보다 더 신적 계시적이 또 없을 겁니다. 종교를 대신해서 이미 과학이 진리 대변자로 굳어졌습니다. 종교계의 주장은 과학계의 주장 앞에서 맥도 못춥니다. 기가 죽기 마련입니다. 실제적인 성과는 실적을 과학만큼 내놓지 못하고 있기에 무슨 대외적으로 큰 소리칠 수 있단 말입니까.

경제에 관한 것도 과학적인 통계학이 설명의 주류를 차지합니다. 전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이 가장 확실한 영적 계시인 과학이 다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욥의 친구인 엘리바스의 주장은 기껏 초기 계시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계시마저, 혹은 과학적 계시마저 배후에 악마가 작용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명기 18:14-15에 보면,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지 아니하시느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이 선지자 말고 다른 선지자는 어떻게 될까요? 신명기 18:18-22에 보면,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자기가 과거에 받은 신비체험을 가지고 욥을 책망하려고 신적 근거를 마련해서 충고하려고 했을 때, 욥의 태도는 간단합니다. “참으로 경솔하다”는 겁니다. 즉 나의 고통체험을 내가 설명하려는 것조차도 주님이 주신 고통에 비하면 참으로 경솔한 일이라는 겁니다.(욥 6:3)

곧 욥과 욥의 친구와의 체험 해석의 차이점은 욥으로 하여금 자기 정당성을 위한 그 어떤 마지노선을 결정짓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정도도 자신은 설명조차 할 수 없는 실제 계시가 주어진 겁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자신이 받은 체험이 권위를 가지고 욥을 훈계하려고 하지 말고 자기 눈 앞에 벌어진 욥의 고난 자체를 하나님의 계기로 받아야 하는 겁니다.

인간의 마지노선은 오늘날에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란 인간의 무지함과 자기 정당화를 맞이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보여줄 최후의 계시입니다. 더 이상 인간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최후의 마지선(한계성)은 없습니다. 성도는 오직 십자가만을 증거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체험을 접게 하옵소서. 오직 십자가만을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20-01-16 22:01 
13강-욥기 4장 12~21절(인간의 신비체험) 202001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4장 1~7절입니다. 구약성경 764페이지입니다.

“무슨 말씀이 내게 가만히 임하고 그 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곧 사람이 깊이 잠들 때쯤 하여서니라 내가 그 밤의 이상으로 하여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골절이 흔들렸었느니라,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었느니라, 그 영이 서는데 그 형상을 분변치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 내가 종용한 중에 목소리를 들으니 이르기를,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조석 사이에 멸한 바 되며 영원히 망하되 생각하는 자가 없으리라, 장막 줄을 그들에게서 뽑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이 죽나니 지혜가 없느니라”

본문 말씀을 엘리바스가 이야기하죠. 욥의 친구들 배후에는 악마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신비롭고 거룩한 말씀이 마귀의 말이라고 감히 여러분이 상상이나 하시겠습니까? 누가 들어도 사골 우러나듯 깊은 신앙체험에서 우러나는 복음 그 자체처럼 들리기 마련입니다. 어떻게 여기 17절에 보면 하나님이라는 용어까지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관여하는 사람과 직접 관여하지 아니하는 사람과의 차이점을 사람들은 알 수가 없죠.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내용은 이거예요. 인간은 멀리서 보면 인간인데 가까이서 보면 귀신이라는 거. 사람이 멀리 거리를 띄우고 보면 아주 점잖은 사람과 점잖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집에 며칠 살아보세요. 귀신도 그런 귀신이 없고 그 인간과 엮인 것만 후회가 될 뿐이고 차라리 모기 파리와 같이 살지 인간과는 못 살겠다고 사람들이 산골로, 지리산으로 계룡산으로 뛰쳐 올라가는 거예요.

거기에는 모기 파리는 있지만 사람은 없잖아요. 거기 가니까 숨 쉴만하다는 거예요. 자식도 귀찮고 다 귀찮고. 차라리 말 잘 듣는 개나 고양이 키우며 살고 싶고. 이것은 그 인간 자체가 그냥 과학에서 말하는 질점이라고 하는데 사물 물체가 아니고 영물 덩어리예요. 인간 자체가 영물입니다. 생물학이나 의학이나 그런 과학은 그걸 밝혀내질 못해요. 좋게 이야기해서 영물이지 사실은 정신병자들이죠. 정신병자들.

정신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인간이 살아가는 그 방향 자체가 이미 지옥으로 정해져 있다는 거죠. 지옥은 따로 있지만, 그 지옥의 시작은 죽어봐야 아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 땅에서 슬슬 지옥이 되고 여기에 참기름을 발라놓았는지 미끄러지듯이 아무리 저항하고 몸부림쳐도 지옥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그 힘을 인간이 어떻게 말릴 수가 없어요.

그걸 중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중력에 대해서 인간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버티는 힘보다 중력의 힘은 더 세니까요. 이걸 영물로 보면 인간이 지옥이나 가게 하는 그 힘이 거기서 발 빼려는 힘보다 훨씬 더 세게 되어있어요. 산속에서 혼자 산골 사람처럼 살아보게 되면 자기가 뭔가 도나 튼 것처럼 여기지만 산골에서 약초 캐서 5일 장에 가서 물건 팔려고 하면 중국산 때문에 가격 확 내렸을 때 갑자기 마음에 훅 올라오죠.

혼자 사는 것이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화나는 일이 발생 될 때 인간은 아무리 혼자 살아도 그동안 느끼지 못할 뿐이지 자기가 괴물이 되었고 괴물로 살아가고 있고 자기가 지옥으로 가는 이 발걸음이 돌이킬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인간은. 인생의 방향은 돌이킬 수가 없어요. 인간이라는 것은 마치 땡볕에 놔둔 얼음 조각 같아요. 가만히 놔두면 슬슬 녹아서 나중에 보면 그게 없어져요. 세상에 이것보다 더 영적인 현상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이 죽는다는 것보다 더 영적인 현상이 어디 있습니까? 살아서는 나불나불 뭐 영을 받았다는 둥 계시받았다는 둥 하지만 그냥 그거 안 받아도 그냥 가만히 있어도 매일 하루 치를 늙어 가는 현상, 늙어 가고 있고 쪼그라들어가는 현상보다 더 확실한 계시가 있을까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확실한 계기는 이것 뿐이죠.

손자 크는 거 오랜만에 보면서 “야, 이 녀석 많이 컸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많이 늙었네”라는 말과 같죠. 인간의 성장이 보통 20대에 마감되는데요, 인간의 자아성은 30대까지고요. 30대까지 올라가는데 그다음부터는 용쓰지 않더라도 가만히 있으면 내리막길만 남아있어요. 30살부터 점점 내려갑니다. 그래서 노래에 ‘점점 더 멀어져 간다’라고 하죠. 점점 더 멀어져 가는 거예요.

누가 도대체 그러한 절차를 마련했습니까? 우리가 마련했습니까? 누가 마련했는지를 지금 욥의 친구들은 몰라요. 욥의 친구입장에서는 지금 그 앞에 누가 있느냐 하면 그 앞에 욥이 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계시를 들으려면 계시받을 것이 아니고 그런 망령 들린 소리를 들을 것이 아니고 눈앞에서 코앞에서 욥이 당하고 있는 그것이 확실한 주님의 계시가 되는 거예요.

여기 12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무슨 말씀이 내게 가만히 임하고 그 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곧 사람이 깊이 잠들 때쯤 하여서니라 내가 그 밤의 이상으로 하여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어떤 누구를 만난 모양이에요. 15절에 보면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여기에 글자 하나 더 넣으면 “훅 지나가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었느니라”라고 했어요.

지금 엘리바스가 꾸며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없는 이야기를 들은 풍월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솔직하게 순수하게 진심으로 이야기해요. 그러나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솔직함과 진실함과 순전함은 결코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것보고 일하시고 그런 거 아닙니다. 하나님의 설계도는 인간이 갖고있는 신비적인 체험가지고 일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그 신비적인 체험도 개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나 인간들은 이러한 계시를 받게 되면, 엘리바스도 그날 이렇게 받았는데 그다음 날도 똑같이 계시받습니까? 그건 아니란 말이죠. 밤에 찾아왔던 낯선 유령이 그다음 날 또 오고 그다음 날 또 오고 일요일 하루 쉬고 월요일에 오고 그런 거 있어요? 없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의 추억과 자기의 기억에 속아 넘어가는 인간이라는 거죠.

하나님 살아계셔서 매일같이 인간으로 하여금 과거를 잘라내고 현재 우리의 삶의 몫으로 하루 치를 줘요. 내일은 없어요. 오늘까지 수명 끝나는 거예요. 내일은 내일 되어 봐야 알겠죠. 내일이 있는지 없는지. 오늘 저녁도 마찬가지고요. 대전 가다가 차가 뒤집어지면 끝나는 거 아닙니까. 인간은 지나간 자기 체험같은 것을 그것도 괜찮은 체험, 현재 자기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체험들을 끌어모아서 그것을 하나님의 계시 용도로 대체합니다.

그런데 이런 체험과 계시에 허점이 있어요. 그들은 나름대로 마지노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노선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더이상 나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옹고집 같은 것이 작용하는 거예요. 어떤 체험이 왔을 때 그 체험을 체험으로 순수하게 해석하는 게 인간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 체험을 받고 난 다음에 나오는 말이 있어요. “나는요? 나는 어떻게 되는데요?”

여기에 엘리바스라는 욥의 친구가 받았다는 아주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체험을 한번 보세요. 14절에 “두려움과 떨림이 나에게 있었다, 골절이 흔들렸다, 그때 영어 내 앞으로 훅 지나가매 내 몸의 털이 주뼛하였다”라고 하는데 그래서요? 결국 여기 주뼛하였다고 하면서 자기 체험을 계속 이야기해요.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라고 하고 여기 19절에 보면 “티끌 같고 하루살이 같다”라고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언급해요. 하루살이와 티끌 같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욥의 친구를 통해서 악마가 계시를 준 것은 인간이 자신이 미처 몰랐던 자신의 한계점을 인간들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인간들의 한계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허무하다’라는 이런 소리 하는데 꼭 교회 다녀야겠습니까? 이게 꼭 신천지 다녀야 나옵니까? 여호와 증인 되어야 나옵니까? 블랙 아이스에 차가 뒤집어져서 자신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 살아 있어요. 그럴 때 ‘아,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라고 얼마든지 할 수 있고요.

천문학자들이 망원경을 보면서 ‘저 별의 끝은 어디냐? 달에서 보는 지구의 모습을 봐도 이 지구라는 것이 은하계에서 저 변두리에 있는 그러한 조그만 곳이 이 태양계고 그것이 인류 역사는 전부라고 여겼고 착각했지만 이제 우리는 티끌보다 더 작은 존재구나’라고 알았다 칩시다. 그래서 천국 갑니까? 천문학자가 그거 안다고 해서. 자기가 마음을 낮춘다고 해서 구원받습니까? 천국이 그렇게 해서 들어가는 곳이에요. 아니잖아요.

인간에게는 아무리 뒤로 후퇴하고 후퇴하고 ‘허무하다, 허무하다, 티끌 같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어떤 소리를 뱉어 봤자 인간은 구원이 안 됩니다. 다만 인간들이 끊임없이 뒤로 물러서면서 물러서면서 보여주는 그 양상들이 도리어 악마가 쳐놓은 그물 밖으로 어느 정도까지 그물이 쳐 있는가를 그 한계를 드러내는 하나의 계기가 되는 거예요.

도를 닦는 사람 나와보라 그래요. 도를 닦고 닦고 세상의 진리를 아는 사람 나오라고 해요. 책을 읽고 강의하고 백날 나오라고 하란 말이죠. 법률 스님이 성철 스님이 김수환 추기경이 무슨 목사니 다 나오라고 해요. 그렇게 나와보았자 마지막 내는 것은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뭐 그 정도 아닙니까. 천상천하 유아독존. 인간은 무에서 나와서 무로 돌아간다는 그런 식이란 말이죠.

인간의 보이는 어떤 현상에서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추구하고 달려가고자 하는 시도,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의 이론입니다. 안이비설신, 마나식, 아뢰야식, 이런 의식이 있는데 안이비설신은 눈의 의식 귀의 의식 코의 의식 혀의 의식 몸 전체를 통합한 의식과 여섯 번째가 마나식 그다음이 아뢰야식해서 인간의 의식에서 무의식까지 통합해서 있고 아뢰야식에 오면 해탈된다는 겁니다. 누구 마음대로 해탈돼요?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가 불교를 통해서 계속해서 전달 될 때 사람은 그걸 어떤 느낌으로 보느냐 하면 ‘야, 이건 부처가 열반의 깨달음을 얻어서 열반에 들었구나. 그러면 내가 얻을 지혜가 있겠다. 나도 그 깨달음을 얻게 되면 구원받을 수 있겠네’라고 그렇게 가만히 있는 자기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인간은. 거기서 나오는 아이디어들이 있잖아요. 구원받는 아이디어들. 욥의 친구나 요즘 불교나 천주교나 별로 차이점이 없지요.

불교는 말하기를 인간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해요. 휘발성 주체죠. 인간은 뭐가 되냐 하면 또 ‘오온’이라는 단어를 끄집어내요. 이 안에 뭔가 진리나 놀라운 통찰력이 들어있는 것처럼 악마가 자꾸 현혹하는 거예요. ‘오온’이 뭐냐 하면 색수상행식이라고 하고 색은 물질이고 수는 느낌이고 상은 생각이고 행은 의지고 식은 식별이라고 해요. 그래서 어쩌라고요. 이걸 한방에 보내는 것이 신명기 18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선지자는 가짜다. 신명기 18장 21절에 보면 먼저 전제가 있어요. “죽여라”부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이런 헛소리를 하는 것은 죽여버리라고 합니다. 죽이라는 것은 먼저 시작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 내가 마련한 하나님 나라에 절대 들어올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누가? 욥의 친구 같은 이런 소리 하는 사람들. 신비체험 가지고 사람을 현혹하는 사람들.

인간은 영물이니까 얼마든지 신비체험 할 수 있습니다. 정신이 나갔을 때 기절했을 때 교통사고 났을 때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서 자기가 천국 갔다 왔다고 얼마든지 그런 소리 할 수 있어요. 그건 내가 지어내도 지어낼 수 있습니다. 신명기 18장 21절에 보면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라고 되어 있고 그 앞에 보면 “그런 자를 주의 이름으로 죽여라”라는 이런 말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이미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이에요. 왜냐 하면 유월절 어린양 죽을 때 그 피가 자기들 피거든요. 자기 집에서 일 년간 키우는 어린 양이거든요. 그 어린양의 피를 발랐을 때 사람하고 사람하고 배틀해서 누가 더 신비로우냐, 누가 더 고상하고 오묘한 신비를 말하느냐, 누가 더 신학적으로 완벽하고 철저하냐를 시합한 것이 아니에요.

이스라엘 사람이 어린양을 내밀 때는, 어린양의 유월절 피를 내밀 때는, 하나님 마중 나가는 거고 하나님을 만나는 거예요. 시시하게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오전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이스라엘은 율법 없으면 죽는다고요. “내가 어떻게 하면 삽니까?”라는 그런 질문 자체가 용납이 안 돼요. 어떻게 살아요. 이미 죽은 자들이 뭘 살아요.

인간의 신비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은 티끌이거든요. 이 티끌을 과학적으로 수식으로 증명한 사람이 있어요. 1655년 뉴턴이라는 사람이 사과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 세상이 움직이는 것을 공식화했는데요 그게 만유인력 법칙입니다. 그 방정식은 이러합니다. F = g입니다.

여기서 f= 물체 사이에 서로 당기는 힘입니다.
M, M = 각 물체의 질량입니다. r= 물체 사이의 거리입니다. G= 뉴턴 상수로 불리는데 그 값은 G=6.67259×10-11 Nm2· kg-2입니다. 이 공식에서 알 수 있는데 ‘모든 물체’ 속에는 인간도 들어갑니다. 이 세상에는 신이 주신 힘이 작용하는데 이것은 두 물체 사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상호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모든 이 세상은 물질과 물체가 있는데 그 물체가 얼굴이 얼마나 고우냐 성격이 온화하냐 믿음이 있느냐 서로 사랑하느냐 이런 것은 일체 따지지 않고 그 모든 물체를 하나의 물질로 봐버려요. 티끌로 본다고요. 티끌로 보는데 왜 태양이라는 티끌, 달이라는 티끌은 왜 서로 안 떨어지고 그 자리를 반복해서 도느냐를 사람들은 모르고 욥의 친구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뉴턴은 자기도 신자라고 우기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 맞는데 하나님 스스로 위반되지 않는 어떤 법칙이 있을 것이 아니냐는 거고 그 법칙을 찾는 거예요. 그 법칙이 바로 둘 사이에는 이러한 만유인력 법칙대로 움직이더라는 겁니다. 그중에서 사람도 예외가 아니라는 거고요. 이모와 조카 사이에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만유인력으로 움직이는 거죠. 정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요.

이렇게 티끌이니까 인격이고 뭐고 소멸되는 거예요. 하나의 물체 덩어리가 되는 거예요. 물체 덩어리.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은 인간의 정이라든지 사랑, 애정, 배려, 봉사, 섬김 같은 이런 가치를 다 무시합니까?”라고 화내는데 저에게 화내지 마시고 과학 시간에 화내세요. 과학자에게, 과학 선생님에게. 무슨 원자 사이에 정이 있고 사랑이 있어요. 인간은 원자고 물질로 되어있는데. 아닌가요?

어떤 30대 사람이 수면 내시경 하러 병원에 갔답니다. 그런데 의사 인상이 별로 안 좋았던 모양이죠. 그러니까 자기가 수면 내시경 하면 잠이 들기 때문에 의사가 어떤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자기가 몰래 스마트폰 녹음 기능을 켜놓은 거예요. 그걸 왜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깨어날 때 무슨 소리 했는지 들어보자 했던 겁니다. 과연 인상 나쁜 이유가 있었어요. 녹음 내용이 “한참 월요일에 바쁜데 왜 네가 와서 나를 힘들게 하냐”라는 소리를 했답니다.

의사 입장에서 그 30대가 얼마나 훌륭하냐 아버지를 얼마나 잘 모시냐는 관심 없어요. 그냥 물체예요. 물체. 물체 안에 헬리코박터라는 균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만 조사하면 끝나는 겁니다. 장차 위암으로 번질 수 있는지 조사만 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리고 끝나고 나면 돈 받지요. 사람보다 돈이 우선되거든요. 돈 안 주면 그런 거 해주겠어요?

그러니까 가장 계시의 극단, 하나님의 뜻의 극단이 뭐냐 하면 과학입니다. 종교니 교회니 뭐니 해도 전부 다 과학 앞에서는 꼼짝 못 해요. 고개 다 숙이고 있어요. 과학의, 과학에 의해, 과학을 위해 우리는 오늘날 살아가고 있습니다. 천국 가는 희망보다 화성에 누가 정착하느냐, 화성 부동산 투자에 대한 계획이 더 현실적으로 확 와 닿지요. 화성 땅값이 얼마인지가, 달 땅값이 얼마인가가 확 와 닿는다고요.

기도한다고 전쟁 이깁니까? 어떤 무기가 족집게처럼 뽑아서 죽이는지가 관건입니다. 시편에 나오는 “나의 전쟁은 활과 창에 있지 않고 말과 인간 숫자의 전쟁이 아니다”라고 백날 이야기해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왜? 이미 계시는 과학으로 굳어졌어요. 이 천재적인 과학자가 누구냐 하면 엘리바스 이 사람입니다. 욥의 친구예요. 거기에다 뭐 이상한 소리, 신비로운 소리 하게 되면 그것을 자기가 아주 신앙적으로 순수하고 순전하게 하나님과 막 사귀는 사이인 줄 착각하도록 만들지요.

여기에 대해서 욥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한 마디로 이야기합니다. “경솔하다”라고. 이만한 신비체험을 가지고 훅 들어오게 되면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교회에서 신비체험 같은 거 하게 되면 사람들이 그 사람을 대단한 존재로 벌벌 떨면서 ‘저렇게 계시를 받은 사람이면 돈 좀 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하면서 지갑 막 열고, 청년회 헌신 예배할 때 돈 막 내고 이래야 하는데 그 앞에 욥이 앉아서 한마디 하는 이야기가 “경솔하구나”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경솔한 짓이라는 거예요.

이건 마치 신명기 18장에 나오는 죽여버려야 할 대상입니다. 왜냐, 하나님의 계시는 바로 언약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숨겨져 있는 언약, 그 언약이 완전히 나타나는 것은 십자가예요. 독생자께서 오신 것이 계시가 아니고 독생자께서 죽으신 것이 계시예요. 예수님 안 죽으면 천국 못갑니다. 그분이 죽으셔야 해요.

그래서 죽음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죽잖아요. 죽음 가운데서 독특한 죽음. 사흘 만에 살아난 죽음. 독특하죠. 사도 바울은 게임 끝났어요. 진리, 계시, 하나님의 비밀은 게임 끝났어요. 구원받는 자에게는 십자가 만이 구원의 능력이에요. “나는 너희들이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어요.

인간의 지혜, 신비체험, 엘리야와 붙었던 그 850명의 바알 아세라 선지자들의 그 놀라운 신비체험 소용없습니다. 그저 눈요기 감에 지나지 않지요. 자기의 웃옷을 벗고 칼로 자기 속살을 찢고 일부러 피를 낼 때 그걸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흥분하겠어요. 대중들이, 군중들이, 오늘날 교인들이 얼마나 흥분하겠습니까? ‘세상에 저 사람들은 진짜 하나님의 선지자다’라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아침에 이야기한 것처럼 엘리야는 거기에다 물을 확 부어버려요. 불가능성, 불가능함. 확 물을 부어버려요. 물은 이런 곳에 쓰는 거라는 걸 보여주죠. 하나님의 어떤 예언이나 효과나 성취함은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가 던져진 그 말씀을 인간으로 하여금 그 말씀이 왜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가를 충분히 보여주시고 그 실패의 현장이 십자가에 의해서 독생자가 인간 손에 죽게 되는 그것이 인간의 한계예요.

인간의 마지노선은 뭐냐 하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을 보고서도 못 알아보는 거, 욥을 욥의 친구들이 보고도 욥에게 계시가 떨어진 것을 못 보는 거, 그것은 악마에 의해서 이미 눈이 감겨있고 맛이 갔어요. 인간은 영물입니다. 이미 맛이 갔어요. 그저 이 땅에는 과학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어떤 환속한 중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중이 왜 환속을 하느냐? 일곱 가지 이유를 댔어요.
1. 경제적 이유 때문에
2. 외로워서 – 외로운 이유는 법문할 설교할 자리가 없기 때문에
3. 자존심 때문에
4. 여자 때문에
5. 조직에 대한 환멸 때문에
6.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에
7. 아성이 강해서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는 것

이런 이유 때문에 환속하는 겁니다. 그러면 환속하면 구원받습니까? 그러니까 이건 괜히 발 한쪽 담가봤다가 뺀 거예요. 인간은 그 자체가 태어날 때부터 마귀의 괴물이기 때문에. 십자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백성 될 수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존재로 다룬다는 사실을 감사하고 그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씨앗처럼 솟구치는 이런 신기한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만 우리가 남들에게 자랑하고 증거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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