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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0 15:03:00 조회 : 102         
   제사장이 분배한 땅190310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제사장이 분배한 땅(여호수아 14:1)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3YE5JfCyHcM, Hit:13
 이근호 19-03-10 15:54 
제사장이 분배한 땅  

2019년 3월 10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14:1

(14:1)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취한 기업 곧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분배한 것이 아래와 같으니라

땅 분배에 제사장이 관여한다는 것은 곧 ‘분배받은 땅’에서 제사장적 정신을 구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음을 말씀하는 겁니다. 제사장과 선지자 여호수아의 2중 관여가 둘 사이에 의견차이로 이어지지 않을까요? 과연 이스라엘에서 최고 자리는 누가 차지하고 있는 겁니까?

우리는 여기서 ‘제사장’이 높으냐 아니면 ‘선지자’가 높으냐를 두고 잘 가늠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신 분’을 왕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없는 존재’가 되겠지요. 이 ‘없음’과 ‘있는 백성’ 사이에 중간 위상에 있는 자들이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있음’보다 ‘없음’이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게 됩니다. 있는 인간의 지시보다 ‘없는 분’의 지시가 최종적이다 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없음과 있음이 그 중간위상을 통해서 연결이 된다는 말인데 실제로 그 연결성은 ‘죽음’으로 나타납니다. 즉 제사장이 하는 일은, ‘죽음’을 관리하는 일입니다.

사람 죽음을 관리하는 장례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삶’을 도리어 결정짓는 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지속적으로 ‘죽음을 살리고 유지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제사장입니다. 즉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만남을 죽음을 매개로 하지 아니하면 성사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의 몸은 태어나면서 죽고자 하는 것보다 살아남고자 하는 근성으로 온통 무장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되었던지 죽으면 실패라는 의식이 강렬합니다. 얼마나 사는데 잘 버텼느냐를 두고서 우열을 논하자는 식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하나님 만남의 장소’는 인간과 하나님과 실은 만날 수 없는 불가능한 사이임을 부각시키는 장소입니다.

곧 살아있다고 우기고, 또한 살고 싶어 환장하고, 또 살아남는 것이 인생의 가치라고 여기는 자들은 참된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한 심성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이것은 거룩의 위력입니다. 그래서 이 거룩한 공간에 일반인들은 들어올 수 없습니다. 오직 제사장만 들어갑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르아살 제사장은 아론의 셋째 아들입니다. 첫째와 둘째는 하나님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지도 않는 다른 분을 가지고 향을 피워 성소 안으로 들여놓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한 것은 제단불로 향을 피워야했습니다. 어떤 불이 되었던 향을 피우면 되지 않느냐 하실 수 있지만, 우리는 율법 안에 짜여진 연결망들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낱낱이 알 수 없습니다.

마치 시한폭탄 내부의 복잡한 전선에게 왜 이런 전선과 저런 전선이 상호 연결되어야 하는지 일반들이 모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라는 제사장이 죽은 것은 거룩에 대한 안일함이 있었던 겁니다. 하루 이틀 그들이 일한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같은 작업을 해왔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을 유예할 이유가 아닌 것입니다.

제사장의 숙달됨이 하나님의 거룩의 값어치를 더 올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은 한결같습니다. 즉 ‘완전한 거룩이 아니면 나의 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입니다. 따라서 제사장의 직업은 위험직업입니다. 백성을 대표해서 하나님의 거룩과 마주하고 그 안에서 일해야 합니다.

이러한 제사장의 취지는 이스라엘이 땅을 접수하고 정복하면서 약속의 땅 전체로 전달됩니다. 즉 ‘우리가 잘 나서 살아남는 땅이 아니라 제사장이 다루시는 그 죽음의 효력으로 살아남게 되는 땅’입니다. 이 취지의 확대가 곧 ‘모세 언약의 확대’입니다. 모세 언약을 달리 말해서 ‘레위 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의 제사 업무를 통해서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만남을 추진하는 이 의의는 예수님에 의해서 ‘새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완성이 됩니다. 곧 제사장이신 예수님 자신의 ‘죽음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안’에서 만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자기 죽음과 합장한 사람을 찾아 나서십니다. ‘내 백성’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더 쉽게 말씀드려서, 인간들이 ‘언약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 안에서’ 구원되는 겁니다. 그 안에는 필히 백성의 죽음이 기정사실화 되어 있습니다. 살고자 하는 자가 죽는다는 말은 곧 살아 있으면서 염두에 두고 시도하려는 모든 기획들이 같이 무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언약, 곧 약속 안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의 근거가 어떤 것임을 잠언 6:16- 19에 잘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곧 땅이라는 부동산을 두고 약속의 전부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전에는 어느 땅 위에서 살 것인가가 관권이었다면 잠언에 들어와서는 그 땅에 살면서 어떤 마음가짐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약속구현의 관권이 되어 있습니다. 즉 땅 가져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서 살만한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러한 잠언의 언급은 곧 레위언약이 말하는 죽음을 취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죄로 인하여 죽음’이라는 사실을 더욱 구체화하게 합니다. 즉 ‘지은 죄에 대해서 용서받아라’가 아니라 점차 인간 자체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일괄적으로 알리는 죽음쪽으로 약속이 전개됩니다.

신약에 와서는 말씀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식으로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10:36-37에 보면,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주님께서는 가족까지 건드리십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는 이런 시도가 다음과 같이 총괄적으로 제시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롬 14:7)라고 되어 있습니다. 새언약은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이 죽으심 속에 길이 완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새삼스럽게 ‘길을 찾아가는 자’가 아니라 ‘길로서’ 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주님으로부터 늘 정복당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9-03-10 21:44 
227강-여호수아 14장 1절(제사장이 분배한 땅)201903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4장 1절입니다. 구약성경 341페이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취한 기업 곧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분배한 이 아래와 같으니라”

지난 시간에는 요단강 동편에 대한 땅 분배였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약속의 땅에 속한다고는 볼 수 없어요. 정복은 했지만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구역에는 속하지 않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와서는 거기 두 지파와 반 지파가 있었고 나머지 아홉 지파와 반 지파는 요단강 동쪽이 아니고, 그러니까 요르단 지역이 아니고 진짜 지금의 이스라엘 지역 팔레스타인 지역, 이 지역의 땅 분배를 하게 됩니다.

여기에 누가 관여하게 되느냐 하면 오늘 14장 1절에 보면 제사장이 여기서 관여하고 있습니다. 보통 구약성경을 보고 초반기 이스라엘을 쭉 보면서 노골적으로 질문하는 사람은 별로 못 봤지만 이런 의문점은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목사님 제사장이 높습니까? 선지자가 높습니까? 누가 대장입니까?”라는 생각.

축구에서 투톱이라는 것이 있는데 공격진의 두 사람이 한 사람 아니고 두 사람을 공격하는 그런 작전방식도 있는데 이스라엘이 제사장도 있고 선지자도 있으니까 누가 왕초질을 하는지 노골적으로 질문하는 사람은 없지만 아마 마음속으로 그러한 의문점은 있을 겁니다. 그런 것을 정리하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언약은 모세 언약의 시대에 모세 언약은 무슨 중심이냐 하면 제사장 중심입니다. 모세 언약의 핵심은 이스라엘 왕은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왕은 보이지 않는다는 거.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왕이 보이는 백성을 통치하고 이끄시는데 중간 지점을 설정해 놓았어요.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거룩의 추가적 요소를 덧입고 하나님의 거룩의 지시에 의해서만 따르게 될 그러한 업무를 하는 사람, 그 사람들이 바로 제사장들입니다.

그러면 제사장과 하나님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것은 방금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제사장은 눈에 보인다는 것. 인간이라는 것. 그러면 제사장과 일반 백성의 차이점은 무엇이냐 하면 일반 백성은 사는데 급급 하지만 제사장은 죽음을 다루고 죽음에 집중할 업무를 갖고 있는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계시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냐. 당연히 제사장들이 가깝죠. 왜냐 하면 제사장이 일하는 그 구역은 일반인들이 출입을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출입하면 죽어요. 그러면 그것은 제사장 중심의 그런 사상과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고 있다면 이것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의 중심부에는 죽음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죽음’이 이스라엘을 살린다는 말이고 다른 말로 하면 너희들 살고자 하는 자는 그냥 이방인처럼 살고, 살고자 열심을 다 하는 것은 곧 이방 민족이고, 이스라엘의 생명이라 하는 것은 이방 민족의 생명과 달리 반드시 경유 해야 할 것이 뭐냐 하면 죽음을 경유 해야만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죽음을 경유 하지 아니하면 그 죽음을 경유 하지 않는 상태에서 생명과 영생과 천국을 논하는 것은 그것은 가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짜 말고 진짜로 살면 되지 않겠느냐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제사장이 있어야 할 이유는 항상 그들의 육신 자체가 가짜만 유발하는 속성을 가진 그런 신체를 지니고 있는 거예요. 인간의 육신의 한계입니다.

‘나는 무엇 무엇을 안다’라고 생각할 때, 인간은 그 ‘안다’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아는 것이 나의 사는 것에 보탬이 될 거라는 생각으로 나의 사는 거에 대한 기대를 은근히 충족시키고자 결합합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너희들이 알아야 한다”라고 하고 알아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너희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게 다르죠.

이게 오늘날 그대로 복음이냐 복음이 아니냐로 구분되는 겁니다. 복음과 기독교 교리에 대한 차이점이 뭐냐 하면 기독교 교리는 안 죽어도 영생얻을 수 있는 방법을 기독교 교리가 제공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목회학, 교회 성장학 같은 것. 이런 것은 이제는 죽음은 잊으라는 말이거든요. 그러나 그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신체를 어떤 식으로 활용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내 신체에 대해서 이제는 내 관리하에 있다고 우기는 경향이 있어요. 경상도 말로 ‘단디 해라’라는 말이 있거든요. 단디 하라는 말은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려서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이렇게 이야기한다고요. 단디. 자기를 몰라도 너무 몰라요. 그게 화근입니다. 아침에 단디 하면 그게 자아를 강화한다고요.

성령이 없이 우리는 자력으로 천국 갈 수 없습니다. 흔히 세상에서 여러분이 길을 찾아가면 내가 단디 찾아가면 찾아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길을 찾아가겠다는 의식이 뭐냐 하면 마치 순례자처럼 자기 자신을 연극 무대에 이미지화시키는 거예요. 나는 있고, 주께서 주신 길이 있고, 나는 그 길을 가게 되면, 주님 가신 길을 가면 된다고. ‘뚜벅뚜벅 외롭지만 고독하지만 주여, 보시옵소서. 기어이 그 길을 내가 찾아가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교회가 제시한다고 우기는데요, 신약 성도는 길을 찾아가는 사람이 아니고 길로써 가는 거예요. 길로써. 본인 자체가 길이에요. 본인 자체가.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길은 없어요. 그러나 주께서 길을 찾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고 길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길이 되게. 교회가 조용하니 기분이 좋은데요, 길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주께서.

길이 된다는 것은 뭐를 포기한다는 말이냐 하면 죽음을 경유 했다는 말이고 죽음을 경유 했다는 말은 모세 언약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내 안에 내장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동안 내가 길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니고 길을 찾아가는 것은 주님의 거룩하신 언약의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나는 멀쩡한 괜찮은 나로 유지하겠다는 고집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구원받고자 하는 당사자가 누구일까요? 바로 계속해서 본인을 상정하는 거예요. 어떤 고생과 노력을 다해도 나는 기어이 구원받고야 말겠다는 겁니다. 그 유명한 노래 있잖아요.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 그 몸을 죽여야 해요. 주께서 우리를 성도 되게 한 것은 네가 그 구닥다리 그 몸 죽이라고 한 거예요.

그러나 그 몸 죽을 때 뭐도 같이 매장되느냐 하면 나의 은밀한 계획과 내가 시도하는 것, 내 꿈, 이걸 죽이는 거예요. 이걸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주께서 무덤에 가신 거예요. 언젠가 그런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주님은 조폭입니다. 삽 들고 아예 우리를 묻어 버려요. 처벌이 없는 곳에 무슨 영생이 있습니까? 왜 처벌 없이 영생 받으려고 해요?

그리고 주님이 당한 그 처벌은 홀로 당한 처벌이 아니고 그 처벌 당한 이유를 그 이유와 같이 합장하는 겁니다. 이유가 있어 줘야 해답이 의미가 있어요. 너 때문에 주님이 죽으신 거예요. 그럼 나는 거기서 빠지면 안 되죠. 주님의 답이 답 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합장해야 해요. 합장. 합장 아시죠?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할머니 돌아가시면 그 옆에 눕히는 거.

제사장이 땅을 분배한다는 의미는 그냥 땅 차지했다고 헤헤거리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땅을 분배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거죠. 그러면 선지자는 뭐냐 하면 선지자는 감독관이에요. 제사장이, 예를 들어 수학시험을 친다면 수학 선생님이 전교에 있는 학생들 수학 문제를 선생님이 다 내요. 수학 문제를 선생님이 내는데 시험 감독은 누가 하느냐 하면 생물 선생님, 국어 선생님이 감독하고 하거든요.

그러면 아이들이 수학시험 치다가 인쇄가 잘 안 돼서 잘 안 보이는 거 있거든요. 요즘은 그런 게 없을 건데 옛날에는 그랬어요. 그러면 감독 선생님이 가정 선생님이라면 “선생님, 이거 잘 안 보이는 데 숫자가 뭡니까?”라고 하면 그건 수학 선생님 나중에 점검하러 오실 때 그때 물어보라고 하거든요. 그 감독자가 선지자예요.

선지자는 본인이 뭘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커닝하고 엉뚱한 길로 가지 말라는 거예요. 이미 확고한 기준은 제사장이 제시하는 겁니다. 이제 결론 내리겠습니다. 선지자가 높습니까? 제사장이 높습니까? 제사장 중심, 이게 모세 율법이고 구약은 말라기에서 그걸로 끝납니다. 레위 언약은 영원하리라. 그게 말라기 내용입니다. 레위 언약은 영원하리라. 죽음은 영원하리라. 그리고 오실 메시아는 이 레위 언약이 마감되고 레위 언약에 준해서만 필히 주께서 오시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근본적인 질문을 해 봅시다. 주께서 왜 죽으십니까? 주님께서 어디 계시는지를 질문하지 마시고요, 어디 계시는지 이미 우리가 존재하는 입장에서 존재적인 질문을 하지 말고 우리가 지금 살고자 하잖아요. 살아서 좋은 나라를 보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반대로 가셨단 말이죠. 그러면 질문을 이렇게 해야죠. “우리는 다 살고자 하는데 주님은 왜 죽으십니까?”라고요.

우리교회 어떤 설교 당회장 목사님이 오셨다면 그리고 설교를 하는데 “제가 이제 새로운 설교자입니다. 우리 다 같이 죽읍시다.”라고 한다면 복음깨나 들었던 교인들이 생각하기는 우리 교회 새로운 설교자 와서 교회를 잘 부흥시키고 살려야 하는데, 오자마자 “죽읍시다”라고 하면 나오는 질문이 뭡니까? “왜 죽으려고 하십니까?”라고 하겠지요.

그러면 우리 교인들은 구약 성도라고 보면 되고 새로 오신 설교자가 메시아로 보신다면 그 관계가 유지되는 걸 가지고 모세 언약의 완성인 새 언약이 되는 겁니다. 새 언약. 두 자로 신약이 되는 겁니다. 신약. 그래서 신약이 뭐냐 하면 인간이 어떤 짓거리를 해도 그 본성은 내가 안 죽고 살고자 하는 본성이 생생함을 까발리는 쪽으로 해석이 되어야 해요.

왜냐 하면 주님 살아있고 나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은 이 땅에서 죽은 분으로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죽으신 분으로서. 그래야 우리의 의도가 드러나거든요. 우리는 그러죠. “저도 주님 복음 믿고 죽고자 합니다”라고 할 때 주님의 답변은 이렇게 됩니다. “네가 죽고자 하는 이유는 뭐냐?”라고 물으세요. 네가 죽고자 하는 이유는?

언제 주님이 우리에게 죽으라고 요구한 적 없거든요. 주님이 안 되는 걸 이야기 하신 거예요. 주님께서는. 점점 어려워지죠. 안 되는 걸 이야기 하셨다고요. “네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라”라는 말은 지키라고가 아니라 원래 못 지킨다를 전제로 하고 주신 말씀이에요. 성경에 그런 대목이 있다는 것을 자꾸 놓치면 안 됩니다.

제가 로마서 14장 7절을 읽어 드릴게요.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가 없고”라고 되어 있어요.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서 살지만 자기를 위해 살지 않도록 노력합시다”라는 말이 아니고 다시 말해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서 사는데 그러지 말고 이제는 성령 받았으니까 우리는 자기를 위해 살지 맙시다”라는 말이 아니고 성령을 받든 말든 관계없이 우리 중에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다는 말은 아무도 자력으로 이 말씀을 “이제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나설 위인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제가 그렇게 하게 되면 너무 터무니없고 내 해석대로 하는 말이라고 반발을 하실 건데 제가 여기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로마서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이야기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제한된 대상을 향해서 하셨던 그것을 보편화 시킨거예요. 유대 사회에만 해당하는 말씀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라면 뒤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편지는 앞으로 유대 사회를 떠나서 온 세상에 널리 전파되면서 모든 인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 씨앗이 되는 원래 이 말씀, 방금 했던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가 없고”의 원래 말씀을 찾아갈 필요가 있는 거죠. 그 말씀의 극단화이고 극단적으로 말씀하니까요. 그것이 마태복음 10장 36절과 37절에 나옵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지금 이걸 지키라는 건지 못 지킨다는 건지. 못 지킨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라고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잖아요. 이것을 제가 약간 풀이해서 한다는 게 뭐냐 하면 인간은 육의 연대성에서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왜 인간은 육의 연대성에서 못 벗어난다는 성경에 없는 이야기 합니까?”라고 해요.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예요.

가버나움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제가 평을 달아 놨잖아요. 가버나움 영화의 핵심은 뭐냐 하면 인간은 종교가 뭐든 간에 자기 집안의 강력한 결속력에서는 어떤 인간도 못 빠져나온다는 거예요. 친구야 헤어지면 되죠. 부부도 갈라서면 되지만 내가 낳은 자식을 내가 무슨 수로 버릴 수가 있습니까? 그런 자식을 주님께서 주셨는데.

뭐 호적을 파내는 둥, 나가라는 둥, 말만 그렇게 하지요. 어려울 때는 몰래 또 농심라면 갖다 주고 이것저것 다 집어넣어 준다고요. 몰래. 자식 걱정을 누가 합니까? 부모 외에. 뭐 문재인 대통령이 자식 걱정 해 줍니까? 다른 건 다 눈 감고 모른 척하지만, 자식에 대한 이야기는 모른 척할 수 없어요. 제가 오늘 오전에 이야기했잖아요. 그냥 등신 되면 좋겠다고.

장님 되었으면 주님만 생각할 거 아닙니까? 개코도 모르는 것이 자꾸 눈을 뜨고 보니까 어떤 결과를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내 행위의 결과를 다시 나에게 적용해서 새로운 나로 거듭나려고 시도하는 그것이 행함의 절차거든요. 알고리즘. 논리적 체계란 말이죠. 그러니까 그걸 끊기 위해서 아예 나는 안 듣고, 안 보고 싶은데 그게 현실적으로 안 돼요.

물론 그걸 도 닦으면 돼요. 주님만 생각하고. 그런데 기도하는데 옆에서 얘가 우는데요. 기도 방해되는데요. 서울의 의존교회 강의하는데 얘가 크게 우는 거예요. 목사님 사모님이 어쩔 줄을 몰라요. 할머니니까 어쩔 줄을 몰라요. 그래서 아이가 우니까 내용이 묻힐까 싶어서 내가 소리를 더 내면 아이도 좋다고 경쟁하듯 소리를 더 내요. 그러나 그게 동네 아이들 같으면 혼내서 밖으로 내보내면 되는데 자기 자식이고 손녀잖아요.

내가 내 몸만 있으면 우리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까짓것 어떤 사람처럼 자살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내 손으로 내 자식을 죽인다는 것은 이건 인간은 못 하는 겁니다. 그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시키신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우리가 못하는 그 경계선에서 비로소 등장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에요.

“해봐라. 해봐라. 되는가. 도 닦아봐. 되는가.” 도 닦아도 안 되는 것이 하나님이에요. 나타나 줘야 해요. 따라서 신약의 이 말씀은요. 이게 새 언약이고 지금 제가 말씀하는 제사장 이야기는 모세 언약이에요. 오늘 등장하는 엘리에셀은 아론의 네 아들 중에서 세 번째 아들인데 첫째 나답 둘째 아비후는 다 죽었어요. 제사장인데 다 죽었어요.

제사장의 작업 환경이 그렇게 극한 직업이에요. 술 먹고 제단 불이 아닌 다른 중국산 라이터를 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불의 성분을 조사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냥 제단에 불 피우면 되잖아요. 그 불을 피웠던 제단의 향기 가지고 뿌리고 하면 되는데 그것도 처음부터 첫째 둘째 아들들이 경솔하게 한 것이 아니고 원래 그 동네에서 계속 몇 년 동안 하다 보니까 이게 도사가 된 거예요.

숙달된 조교가 문제성이 있어요. 갑자기 교만해졌다고 할까요. 내가 처한 이 삶의 환경이 얼마나 말도 안 되게 엄청난 혜택이 주어진다는 것을 처음 사랑을 잊지 않는 사람에게는 감격의 눈물로 오지만, 오래 교회에 다닌 사람들은 건성 건성이에요. 그래서 오죽했으면 주께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했겠습니까?

참 우리교회 시작한 지 벌써 20년 가까이 되는데 시계가 처음 바뀌었어요. 오늘 아침에. “이제 종을 편안히 놔주시는군요” 한주 지나면 벌써 시계가 늦어져 있는 거예요. 시계가 크니까 건전지가 빨리 닳아서. 주께서 십자가를 주셨다는 것은 시작이 아닙니다. 그게 처음 사랑인 줄 알지요. 하지만 그게 마지막 사랑이에요. 그게 마지막 사랑입니다.

“네가 까불고 땍땍거리고 해도 이 십자가 피 외에는, 피 아니면 너는 인간도 아니고 천국 못가”라고 주님께서는 십자가 피 언약, 새언약 가지고 누누이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건방을 떨면서 “주여, 복음 그 정도는 압니다”라고 아는 행세가 그렇게 건방을 떱니까? 그건 알고 내 보따리 내놓으라는 거예요. 내 보따리.

아이는 공부 잘해야 하고, 뭐 해야 하고 하면서 갑자기 엉뚱한 것을 요구하더란 말이죠. 그래서 뭐냐 하면 이미 구원은 받아 놓고 까르르해놓고 서서히 네가 왜 울음을 통해서 웃어야 하는지를 우리를 보고 우리를 통해서 다시 확인시켜 나가는 겁니다. 제사장이 이렇게 땅을 분배시켜 나갔다는 것은 땅이 너 밥 먹고 살라는 땅이 아니고, 죽음이, 제사장이 왜 있어야 하는지를 하나님의 모세 언약이 왜 터무니없이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와 차이 나는 것인지를 일방적으로 왜 제사를 지내야 하는지를 알라고 주신 거예요.

그 제사 언약은 어떻게 신약까지 발전해 가는가. 잠언 서를 제가 잠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잠언서 6장 18절~19절을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6절에 먼저 보면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라고 잠언 서에 나와요.

그러면 잠언하고 제사장 땅 분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게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면 바로 집단에서 서서히 개별의 마음으로 약속이 이전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중 한 부동산, 이 부동산 가지면 우리는 이제 최고라는, 마치 교회 지을 때 맨날 상가에서 월세 내지 말고 누가 많이도 말고 한 40억 주면, 푼돈 40억 주면 부동산 사고 새 예배당 지어서 입당하게 되면 그때 사람들 마음은 어떻겠어요? 이제 종을 편안히 놔주신다고 하겠죠. 월세 안 올려줘도 되고. “주여, 약속의 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이야기할 거예요.

그런데 그 약속의 땅이 네 마음속에 들어와야 한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십자가가 마음에 관한 문제거든요. 아까 이야기 계속해 봅시다. 마태복음 10장에 사람의 원수가 네 집안 식구라고 해 놓고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37절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이 부분은 요즘 시대에 별 충격은 아니죠. 그런데 갑자기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되어 있어요.

이걸 아까 로마서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자가 없고”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성령 없이 인간의 능력으로 정신 바짝 차려서 단디 해서는 약속이 우리 안에 성취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는 것이 목적이지만 주님은 우리 속에 약속을 집어넣는 게 주의 목적이에요. 그 약속을 집어넣는 과정에 우리의 손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망가지면 돼요. 제가 안양 강의에서 그런 강의 했거든요. 왜 우리가 무섭고 벌벌 떠는가?

안 망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안 망가지려고. 주님 보시기에 이미 망가졌는데. 물론 아직도 우리는 자기 자신을 건사하려고 해요. 괜찮은 존재로 자꾸 버티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안양 강의에서 우리나라에서 버티기 잘하는 사람 두 사람밖에 없다고 했어요. 강호동과 이만기. 다리가 얼마나 튼실한지 버티기 잘해서 천하장사 된 사람들입니다.

버티면 버틸수록 우리는 정말 천국과 무관한 사람이 돼요. 그냥 가훈을 정해 놓으세요. ‘망가지자. 무너지자’ 막살자는 유행이 한물 지나갔으니까 바꿉시다. ‘무너지자’ 왜? 그게 마땅하니까. 무너지는 게 마땅하니까. 너 자신이 마땅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일관된 약속의 마땅함은 우리의 손톱도 안 들어갑니다. “네가 잘했든 못했든 간에 너의 의사는 깡그리 무시하고 나의 마땅함으로 너를 점령하고 접수해 나갈 것이다. 너는 오직 피로만 구원받는다.”

“네 마음속의 그 죄를 제사장 언약을 가동해서, 그 죄를 내가 대신 감당해서 합장하겠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곧 우리의 죽음이 되고 곧 동시에 부활의 처소가 되는 겁니다. 주께서 함께 살아있는 부활의 공동 공간, 이게 새 언약이 주신 선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주신 땅, 땅의 본질은 마지막 새 언약 십자가를 통해서 주께서 주신 성령 안, 약속의 안, 부활의 세계가 약속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이미 그 속에 우리가 속한 사람답게 주님만 자랑하고 주님만 사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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