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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30 15:01:57 조회 : 171         
   더불어 181230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더불어(여호수아 10:40-43)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o_YBBXEpi5o, Hit:19
 이근호 18-12-30 15:51 
더불어

2019년 12월 30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10; 40-43

(10:40)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온 땅 곧 산지와 남방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무릇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하였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

(10:41) 여호수아가 또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사까지와 온 고센 땅을 기브온에 이르기까지 치매

(10:42)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고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과 그 땅을 단번에 취하니라

(10:43)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길갈 진으로 돌아왔더라

‘호흡 있는 자는 진멸하였으니’라는 대목이 나오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숨을 참고 사는 자들입니까? 이스라엘도 역시 호흡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민족이 호흡을 하든 하지 않든지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는 겁니다. 그들은 벌써 죽음을 경유해서 계속 ‘죽음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그냥 두 존재가 같이 함께 있다고 해서 성사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둘 사이에 맺어주는 원리가 수립되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약속’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가나안 땅의 ‘약속의 땅’이라고 규정하셨습니다. 그러니 곧 여호와 하나님 자기 땅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자기네 신은 없는 겁니까? 그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조상 대대로 섬겨왔던 나름대로 신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이 결코 우상이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참된 신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이 자기네들 조상을 통해서 복주셔서 이 땅에서 영원히 살도록 해주셨다고 버티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 이스라엘 쪽은 그것은 ‘우상’이라고 규정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상인 신과 우상이 아닌 신의 차이나는 특징은 무엇일까요? ‘인간 자기를 위하는 신’은 그 신이 어떠한 신이든 상관없이 우상입니다. 반면에 ‘자신이 스스로 죽는 신’은 참된 신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신은 인간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연동하여 조치를 취하여 인간들에게 포착될 수 없는 신으로 등장하시는 신이십니다. 쉽게 말해서 ‘이미 있는 존재’를 위하는 신은 가짜요, ‘없는 자기 백성을’ 새롭게 늘 만들어내는 신이 참된 신이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입장 변동에 의해서 물갈이를 늘 하게 되는 민족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 물갈이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애굽으로 건너온 이스라엘 집단을 기어이 40년간의 세월을 광야길에 쏟아 부어서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서는 다 죽게 하셨습니다. ‘죽은 그들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간다’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약속 자체가 대상을 계속 바꾸신다’에 의의가 있는 겁니다.

따라서 일관성 있는 원칙 같은 것이 하나님이 벌리시는 전쟁에서 계속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 적용의 증거가 바로 ‘길갈로 돌아가다’입니다. ‘길갈’이라는 지명조차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동하고 전쟁에 나서지 않았으면 생겨나지 않는 지명입니다. 성경 이해에 있어 기본은 단일 현실이 아니라 중첩된 현실으로 진행된다는 겁니다.

다른 현실에서는 죽었지만, 그 ‘죽었다’는 이유 때문에 다른 현실에서는 ‘영원히 산 자’로 인정받는 겁니다. 따라서 산 채로 다른 현실에 들어설 수는 없는 겁니다. 이 단절의 경우를 모델로 하여 계속해서 이 모델에 합하도록 조치하십니다. 그 단절이 바로 애굽에서 나올 때 행했던 첫 번째 유월절입니다.

길갈이라는 곳에서는 두 가지 일을 시행했는데 하나는 ‘할례’로 다른 하나는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이란 ‘한 성격의 죽음을 집단에 적용’한 사건을 말합니다. 이것은 ‘개인적 죽음’을 죽음의 원형으로 보지 않았다는 겁니다. 대표적 죽음은 따로 있고 그 죽음에 참여하고 적용되어야지만 하나님의 약속 속으로 들어설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할례’란 ‘수치를 굴러가게 했다’는 겁니다. 굴러가는 수치가 그 전에는 이스라엘 각자의 몸에 붙어있었다는 겁니다. 공통적으로 붙어있는 수치들이 할례 언약 조치에 의해서 단체로 굴러갔다는 겁니다. 이것은 유월절과 관련시켜 봅시다. 과연 인간들이 사는 것 중에  뭐 그리 수치스러운 일들을 행했다는 말입니까?

인간으로서 알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몸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누군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에 무엇을 집어넣었는지 무엇을 심어놓왔는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어떻게 하나님에게 수치스러운 것이 될까요?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벌리시는 전쟁을 통해서 밝혀집니다.

이 전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들이 ‘업무방해’를 해오고 있었다는 겁니다. 즉 약속을 모르는 주제에, 자기가 잘된다는 것을 약속의 내용 속에 집어넣고 그것을 필히 이루어주실 신을 자기들 쪽에서 찾게 될 때, 바로 이 점이 정말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업무방해를 하는 짓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전쟁을 통해 약속 바깥의 인간의 위상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목격하게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함께 하는 ‘약속 체험’입니다. 즉 ‘호흡 있는 자는 약속의 땅에 사는 것만으로 범죄’가 되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소용있는 자’와 ‘소용없는 자’를 분간하십니다.

그렇다면 성도로서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가르쳐야 할까요? 이게 두 번째인 ‘가르치는 자’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치려면 성경과 복음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마치 사도행전 1:8에 나오는 말씀을 실천에 옮기려는 시도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지만 의도적 선교는 주님의 일이 아니라 사업입니다. 곧 실적을 늘 점검하고 실적으로 그 가치를 측정하게 되는 겁니다. 즉 선교는 결코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확인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소용있는 존재’로 둔갑하게 만듭니다.

이 또한 우상이 되는 겁니다. 우상인 예수는 교회들에게 선교를 명령해서 그 실적을 보게 합니다. 이것이 비-약속이요 가짜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자들이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어떤 자들이 하나님의 전쟁에 같이 활동하는 자들입니까? 그것은 ‘맡기는 자’입니다. 맡기는 자는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와 죽음을 경유해야 합니다. ‘실패’란 자신이 세운 목표나 목적이 무산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기뻐하는 이유는, 실패를 통해 비로소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보너스라는 것을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방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남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8-12-31 06:37 
217강-여호수아 10장 40~43절(더불어)201812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0장 40~43절입니다. 구약성경 336페이지입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그 온 땅 곧 산지와 네겝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호흡이 있는 모든 자는 다 진멸하여 바쳤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과 같았더라, 여호수아가 또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사까지와 온 고센 땅을 기브온에 이르기까지 치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으므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들과 그들의 땅을 단번에 빼앗으니라,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길갈 진영으로 돌아왔더라”

오늘 본문 이 대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지명을 알려면 우리가 단체로 성지답사 해야 합니다. 여기가 가데스 바네아고 여기가 가사고 여기가 고센 땅이고 기브온이고 예루살렘이고 이렇게 해야 하는데 뭐 가봤자 거기에 아랍사람들 살고 있어요.

그럼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그들이 호흡이 있는 자는 다 진멸되었다고 했는데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 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살아있지 아니하다는 뜻이에요. 여기에 보면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 되었으니” 숨 쉬고 있는 자는 다 죽었다는 말은 그러면 이스라엘은 일체 숨을 안 쉬고 있다는 뜻일까요? 평생을 숨을 안 쉬고 있기 때문에 산 겁니까? 아니면 진즉에 죽었기 때문에 산 겁니까?

이스라엘을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합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유월절 자체 의미가 하나님의 백성을 산자로 보지 않아요. 그럼 산자로 안 보는데 어떻게 우리는 살아있느냐면 우리 안에 제대로 산자가 담겨 있지요. 그걸 제가 아침에 운반체라고 한 겁니다. 주님이 살아있다는 조건 하에, 주님이 쓰신다는 조건 하에 우리가 살아있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전쟁은 이렇게 보게 되면 간단한 전쟁이에요.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묻는 전쟁입니다. 죽었다면 그냥 호흡이 있는 자는 다 죽었으니까 그럼 살았을 때도 무슨 요건 하에, 그러니까 더 쉽게 말해서 그 조건이 살아있으면 살았고 그 조건을 막고 감추고 묵히고 조건은 거부하면, 그 조건 내놓으라 하는데 내놓을 조건 없으면 그건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 조건을 가지고 두 자로 ‘약속’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통 커피숍이나 다방에서 하는 약속은 몇 시에 만나자는 그걸로 끝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 약속이 지명 화 되어있어요. 그 지명이 43절에 나옵니다. “더불어 길갈 진영에 돌아왔더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오늘 설교 제목이 ‘더불어’ 인데 이 ‘더불어’라 하는 것은 같은 체험을 했다는 점에서 ‘더불어’입니다. 같은 체험을.

해병대나 신학생도 그렇고 이러한 특별한 경우 그 동기의식이라는 것이 굉장히 강렬합니다. 같은 신학교 출신, 같은 동기 출신, 동창 출신 이런 동기의식을 가지고 보통 학문에서는 공동체 의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공동체가 문제가 돼요. 구체적인 공동체가 바벨탑이었고 그것이 깨지고 조각난 공동체가 여기저기서 다 흩어져 있습니다.

혼자 살지 않고 더불어 산다는 기치하에 공동체가 있는데 그 공동체 중에서 유명한 공동체가 바로 ‘민주주의’라는 겁니다. 민주주의 하면 굉장히 고상해 보이고 진리처럼 보이지만 일종의 공동체예요. 공동체는 그 공동체 자체를 위해서 개인의 가치는 없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누구에게 죽었느냐면 공동체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공동체 안에 뭐가 살아있느냐 하면 권력이 살아있지요. 권력을 구체화하는 것을 가지고 한 자로 법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네가 법에서 벗어났다”라고 하십니다. 천국이라는 것을 공동체라고 생각하지 말고 “너 중심의 공동체가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하면 되고 어떤 공동체도 어떤 법도 너를 지적할 것은 남아 있지 않다”라는 그것이 구원이 가져다주는 기쁨입니다.

그러면 공동체에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법이 생기고 법의식이 생기는 겁니다. 법의식이 오래 진행되면 그걸 가지고 전통이라고 합니다. 전통 또는 상식이라고 해요. 그 상식과 전통이 자아내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그 의로움을 두 자로 하면 ‘정의’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단어와 개념 속에서는 공동체 의식이 깔려 있고 그 공동체 의식은 너무 일방적입니다. ‘우리 민족끼리’ 어디서 많이 듣던 화두 같은데 ‘우리 민족끼리’라고 하는게 어떤 정의감이 펄펄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죠.

제가 말장난을 해보겠습니다. 유대교가 뭐냐? 유대 하는 교회예요. 말장난입니다. 유대, 연대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는 종교가 유대교죠. 혈통적 이스라엘. 그 혈통적 이스라엘에서 율법,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율법은 유대교가 다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 장악된 유대교가 힘을 발휘해서 주님을 십자가에 죽게 했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느 자리에 가느냐면 그 유대교의 유대 권력 속에 같이 참여해야 해요. 그 참여하는 그것을 지명으로 말한다면 그게 ‘길갈’입니다. 길갈. 길갈을 지키는 것이 바로 여호와 전쟁의 구호입니다. 길갈로 돌아오라. 길갈로부터 출발해서 길갈로 돌아오라.(Bring back) 다시 돌아오라. 길갈로 돌아오라.

그 길갈은 여호수아 5장에서 이미 했습니다. 이미 했다는 말은 다 잊어버렸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면 그 길갈이라는 것이 어떤 일이 일어났고 하는 것은 설명해드리겠지만 먼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해요. 여러분들이 과연 길갈에서 나와서 전쟁하고 이기고 오늘 본문처럼 길갈로 돌아올 수 있느냐. ‘하나님께서 인도하면 돌아올 수 있지요’라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이스라엘이 망한 겁니다.

두 다리 있고, 어느 지점에서 어느 지점으로 가서 전쟁하고 다시 원대 복귀하는 것이 뭐가 어렵겠어요. 굉장히 쉽습니다. 이게 쉽기 때문에 이게 믿음이 아닌 거예요. 그러면 다시 돌아오는 믿음의 내용은 어떤 내용일 때 이것이 믿음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느냐. 제가 문장을 하나 읽어 드릴 테니 여러분들이 믿을 수 있는지 한번 스스로 점검해 보세요.

‘죽임을 당할 수 있으나 죽지는 않는다는 것을 과연 믿을 수 있느냐?’ 죽임을 당할 수 있으나 죽지는 않는다는 그런 믿음이 과연 있느냐 하는 겁니다. 죽을 수 있으나(십자가죠) 죽지는 않는다(부활), 따라서 ‘죽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죽지 않는다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한다면 그걸 달리 말해야 해요. ‘얼마든지 죽겠나이다’가 되어야 해요.

얼마든지 죽겠나이다. 까짓것 죽어도 사는데 뭘 못 죽겠어요. 레벨이 90까지 가면 죽어도 다시 살고 그러기도 해요. 알함브라 궁전에서는 그게 돼요. 게임에 들어오면 죽어도 또 살고 죽어도 살고, 이 증강현실 속에서는 게임 하듯이 그렇게 사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과 있는 중첩 현실이거든요. 중첩 현실 속에서 주님이 벌이는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그 게임에 초점은 그겁니다. ‘죽어도 산다는 것’ 왜냐하면 주님이 죽어도 살았으니까. 네가 죽어도 산다는 것은 모델이 아니에요. 표준이 아니에요. 우리가 왜 그 믿음 생활을 못 하느냐 하면 자꾸 내가 나의 모델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거에 익숙해서 자꾸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로 나와서 나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그거는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건 억지죠. 전쟁을 경유 해야 하고요. 그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해야 할 것이 뭐냐 하면 “호흡 있는 자들은 다 죽었더라”를 몸소 체험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은 내가 호흡하기 때문에 살아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불 신앙이고 하나님에 의해서 또는 이스라엘의 칼에 의해서 죽어가는 저쪽 이방 민족과 동일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을 치라고 할 때는 그것은 이스라엘의 과거를 치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예요.

‘내가 저렇게 살았었잖아’라는 자기 과거를 다시 한번 보여주면서 내가 주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저 꼴 났다는 것은 우리의 몸이 그것에 익숙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저 꼴이 어떤 꼴입니까? 살고자 하는 꼴이죠. 내가 살고자 하는 거예요. 왜 살고자 하느냐면 도로 내가 원하는 내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내 목표로 도로 돌아오고 싶다는 거예요. 그게 내 이상형으로 꼭 그런 인생을 살고 싶다는 거예요.

제가 광주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유혹이 있으니까 유혹이 목표가 되었다고. 선악과가 있으니까 선악과를 따먹자는 목표가 된 것처럼, 인간은 가장 큰 문제가 뭐냐 하면 목표와 목적이 있다는 것이 문제가 돼요. 2019년도에 뭘 할 것인가? 죽은 자가 뭘 합니까? 죽기만 하면 돼지.

그런데 2019년에 이렇게 하겠다고 하는 것은 그 기조가 뭐냐 하면 내가 2019년에 꼭 살아있겠다는 것을 전제로 깔 때 그런 망상이 이어 나가는 겁니다. 이런 목표라는 망상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적이 되고 이스라엘의 적이 되고 이방 민족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면 됩니까? 실패하면 되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자진해서 실패할 일은 없어요. 하지만 함께 계신 주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실패하게 하는 겁니다. 부도가 난다든지 몸이 아픈 그런 실패 말고 내 자체를 제대로 파악하는 내가 처음부터 나는 실패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제대로 아는 즐거움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죽어야 하고 실패해야 할 인간이 무슨 목적이 있고 목표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목표를 세우시거든 그 목표는 아예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이 목표는 달성되지 않기 위해서 주께서 나에게 일부러 부추긴 목표다. 해봤자 소용없다’라고. ‘우리 아이는 서울의대에 들어간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뭐 돈 듭니까? 그냥 생각하는 거예요.

코디 붙여서 서울대학 들어가게 하는 거 할 수 있습니다. 해봐야 안 된다는 것을 미리 짐작하면 되거든요.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은 모든 것은 실패로 끝난다는 것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내 건강 유지하겠다는 것도 실패로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왜 침대에 누워 있지 않고 펄펄 돌아다니는가? 그게 바로 하나님이 주신 여분의 사랑이고 은혜인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길갈이 내 몸을 휘감고 있는 겁니다. 길갈에 합당한 인간이 되는 거예요. 세상에 합당한 인간이 아니고 길갈에 합당한 일을 주께서 원하셨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것을 나는 이것을 가지거나 누릴 수 있는 권한은 내게 없음을 아는 즐거움을 우리에게 허락하는 거죠.

예를 들면 설날이 되면 땅콩강정을 해요. 강정도 하고 떡국도 하고 먹을 게 많지요. 먹을 게 많으면서 그 먹는 것을 즐거워하는 요령이 뭐냐 하면 ‘내가 이걸 먹을 자격이 되나. 지금 내 입맛이 다 가고 몸이 아파서 병원에서 기껏 내가 먹을 수 있는 건 링거 외에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한데’ 영양제 주사 외에는 먹을 수 없는데 내가 입맛이 돌고 손으로 그걸 먹는 것은 하나님이 여분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전쟁 승리의 보너스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느낄 때 땅콩강정이 대단히 맛있죠.

목표를 정해 버리면 그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뭘 먹어도 맛있지 않습니다. ‘어디 가면 오리고기가 맛있는데’라고 목표를 정해 버리면 아침에 먹는 것은 맛이 없어요. 오늘 저녁에 오리고기를 먹기 때문에. 참고로 저는 오리고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목표와 목적이 되어 버리면 주님이 주시는 은혜, 그 주님의 보너스를 짓밟는 게 돼요. 그런데 순간순간 뭐냐 하면 어디 맛있는 거 맛집 찾아다니지 말고 지금 여기 있는 작은 것이라도 감사하기 위해서 주께서 길갈의 원칙으로 계속 제공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길갈의 원칙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전쟁을 하면서 이스라엘에게 세 가지를 제공했어요.

첫째로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것은 업무방해예요. 업무방해죄로 인해서 그들이 진멸해요. 업무방해. 이 약속의 땅은 원래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에요. 약속한 땅이기 때문에 원래 주인 행세를 여호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스라엘 앞에서 그 땅을 비워줘야 해요. 왜냐 하면 주인이 왔기 때문에. 전세금 돌려주며 나가줘야 해요.

그러나 그쪽 이방 민족들도 여호와를 주인으로 생각해서 자기가 만든 신이 따로 있어요. 그들이 신들을 믿었거든요. ‘이건 우리 신이 우리에게 거주하라고 대대로 허락한 땅인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지금의 팔레스타인 아랍사람들처럼.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에 의해서 이건 자기 땅이라고 정했다고 하면서 아랍사람들을 7년 전쟁에서 몰아냈거든요.

그런데 아랍사람들은 고고학이나 역사학을 들고나옵니다. 그 전부터, BC 2000년 전부터 해양민족에서부터 블레셋이 있었다는 인간이 만든 인문학이라는 역사를 가지고 들이대는 거예요. 자기 나름의 신이 있어요. 그래서 가나안 전쟁이 무슨 싸움이냐 하면 어느 것이 우상이고 어느 것이 참된 신인가 하는 참된 신과의 전쟁입니다.

십계명에서 일 계명이 뭐냐 하면 “다른 신을 내게 두지 마라”는 전쟁을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쪽 신은 뭐냐 하면 기존에 있는 인간을 지켜주는 신이 그쪽의 신이에요. 이스라엘 보기에는 우상이지만 그쪽은 절대로 자기 신을 우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알라신을 우상이라고 보지 않지요. 진짜 신으로 보죠.

그들 신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미 있는 인간을 계속 지켜주는 신이라고 보면 됩니다. 따라서 우상이라는 신이 뭐냐 하면 나를 지켜주는 신이 우상이에요. 그 우상 이름이 예수가 되든 삼위일체가 되든 성부 성자가 되든 여호와가 되든 그건 상관없어요. 무조건 나를 지켜주는 신은 우상이 되는 겁니다. 왜냐 하면 신보다 내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거 아니면 교회 안 가지요. 그것 때문에 교회 가는 거예요. 절에 가듯이. 무당 찾듯이. 내 가족이 제일 좋고 내 건강이 중요하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미 없는 존재로 간주해요. 유월절에 이미 죽은 존재로 간주한다고요. 약속에 의해서 그때그때마다 새롭게 발생 되는 민족을 새롭게 전쟁을 통해서 만들겠다는 겁니다. 정말 어렵지요. 정말 제가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나 여기 있다. 나 복 받기 위해서 참된 신을 섬겨야지’ 이런 사고방식은 쉬워도 너무 쉬워요. 이건 뭐 교육받을 필요도 없고 성경 볼 필요도 없어요. 이건 타고난 거예요. 그런데 제가 소개하는 하나님을 한 번 들어보세요. 얼마나 어려운지. 이 땅에 이스라엘은 없는데 하나님이 작업을 벌이면서 그때마다 새롭게 새롭게 한 둘씩 생산되고 백성이 새롭게 만들어 진다고 보시면 됩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신명기(새롭게 갱신)에 보면 하나님의 새로운 작업에 의해서 40년 동안 다 죽여버리고 죽고 난 뒤에 갈렙과 여호수아를 심지처럼 심어놓고 모세도 끝나고 그 두 개의 심어진 그 중심으로 우리가 여호수아를 보고 있거든요. 새롭게 만들어진, 없는 데서 하나님을 만나서 새롭게 만들어진 이스라엘이 진짜 이스라엘이에요.

이것을 가지고 더 어렵게 함축해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상황에 따라서 그때그때 달라진다. 예수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는다. 누가? 내가요. 그러면 나는 너 구원 안 한다. 그런데 나중에 어떻게 뭐 자기가 실패자고 내 쪽에서 시도하는 어떤 기도, 헌금, 예배 참석, 성경공부, 선교, 그 어떤 것을 해도 그건 구원의 근거가 되지 못하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깨달을 때 주는 것은 뭐냐 하면 오직 십자가의 주님 살아계시는 피의 능력으로 변화되지 않을 인간을 변화되게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교회 다니면 구원되는 줄 알았는데 교회 다니다가 얼마 안 돼서 김집사와 최집사가 서로 싸우고 난리 나서 ‘이제 교회 다니나 봐라’ 하면서 삐져서 집에 갔다가 갑자기 성령 받아서 ‘맞아. 내가 미쳤지. 교회가 구원하는 게 아니지’라고 하고 왔다면 그 교회라는 조건 자체가 그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의 전쟁터가 된 거예요.

그때 김집사 최집사 싸울 때 당신들 왜 싸웠느냐고 하면 “그건 내가 잘 났으니까 싸웠죠”, “너의 그 정당성은 어디서 나왔느냐?”, “내가 예수 십자가 피를 믿잖아요” 그게 문제가 된 거예요. 내가 예수 피를 믿음으로 지옥 가는 겁니다. 믿음으로 지옥 가는 거예요. 예수님은 참된 신이라고 여겼는데 그 참된 신이 내가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그 신은 내 앞에 우상이 되어 버린 겁니다. ‘나를 위해서 뭘 해줄 거냐? 뭐 해주신다면 제가 아낌없이 드리겠나이다.’라는 주고받는 이게 바로 업무방해입니다. 첫 번째 업무방해.

그럼 두 번째 업무방해가 뭐냐 하면 내가 경험 한 것을 남에게 알리면 된다는 겁니다. 마치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 그대로인 것처럼 느껴지죠. “성령이 임하면 네가 땅끝까지 예수의 증인 되리라” 그런데 이것도 아니에요. 왜냐 하면 예수님의 증인 되려면 뭘 배워야 합니다. 성경공부 해서 뭔가 기본이 되어야 하거든요.

열심히 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교회도 있고요. 하여튼 누구 만나면 전도하고 하는데 해봤자 백전백패. 들려오는 소리는 “목사님 강력하게 거부하던데요” 이런 거죠. 내가 주의 증인 되면 구원받습니까? 정답은 ‘아니옵니다’예요.

주의 증인 되면 새벽 4시에 지하철 타고 고함 질러야 하고요, 샌드위치맨처럼 앞에는 예수천국 뒤에는 불신지옥 붙이고 몸 뱅뱅 돌려가면서 PR하고 해야겠지요. 선교회비 내서 간접 선교해야 하고 필리핀에 있는 선교사들 돈 보태줘야 하고 그들은 돈 받은 티 낸다고 “나는 당신을 위해서 중보기도하니까 우리의 기도를 믿으세요”하고 이건 선교하면 느끼는 점이 사업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사업. 세상에 그런 선교를 주께서는 하게 하신 적이 없습니다.

세 번째입니다. 주의 뜻은 뭐냐 하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냥 맡기세요. 어디에 맡기느냐. 도저히 내가 믿지 못하는 상황 속으로 주께서 집어넣으실 거니까 내가 믿을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맡기라고요. 믿지 마시고 그냥 맡기세요. 그 결과 속에서 우리는 결코 신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정확하게 우리는 파악합니다.

왜 신자가 되지 못하느냐. 왜냐 하면 죽은 놈은 신자가 될 이유도 없어요. 죽으면 죽으면 되지 죽은 놈이 기어이 꼼지락 꼼지락 살아나서 마지막 죽어가면서 “예수님처럼 주님을 믿습니다. 치매를 이기리라”하는 이거를 세자로 ‘산 낙지’라고 하거든요. 입에 들어가면 붙어서 꼼지락거리는 산 낙지. 토막 냈는데 살아있어요. 독하지요. 우리가 산 낙지 못지않게 독합니다.

맡기라고 했는데 기어이 맡길 믿음이 없으니까 믿음을 만들어 내려고 애써요. 왜? 못 미더워서. 누가? 주님이. 이 상황이 주님의 상황인 것을 믿지를 못해서. 믿지를 못하니까 믿는 척이라도 해야지 않습니까?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서. 남들 ‘주여’할 때 따라는 해야지 않겠습니까? “주여~주여~” 몇 번 하다가 나중에 다 졸고 있고.

그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노예근성.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노예가 된 친구는 사귈 수 있어도 노예근성을 가진 사람과는 친구가 될 수 없다”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와~진짜 심오한 이야기예요. 아들인데 잠시 노예가 된 사람은 우리가 복음을 나눌 수 있지만, 근성 자체가 노예근성, 율법의 노예근성, 악마의 노예근성, 다시 말해서 살기 위해서 빌빌거리는 그 근성은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없죠.

예레미야 36장에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장면이 나오는데 예레미야의 비서가 있었어요. 바룩이라는 사람. 그 사람이 예레미야가 말하는 언어를 문자로 옮긴 사람이에요. 문자로 옮겨서 왕에게 줬어요. 왕에게 읽어 주니까 왕은 읽는 족족 다 화롯불에다 집어넣는 거예요. 이게 굉장히 멋진 코미디입니다.

왜야 하면 지금 세상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예언과 계시대로 말씀대로 돌아가잖아요. 그런데 이 바보 같은 여호와김 왕은 그 종이쪽지만 없으면 세상은 말씀처럼 안 돌아가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거예요. 꼭 빌라도와 마찬가지예요. “나에게 잘 보이면 내가 십자가에서 풀어줄게”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지금이라도 천군 천사가 와서 박살 낼 수 있다. 네가 사태파악이 안 되는구나”라고 이야기하시니까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 진리 속에 있으면서 진리를 묻고 있으니 주께서 답변할 가치도 없는 거죠. 예수님이나 제자들이나 그냥 진리 속에 푹 맡겼어요.

여러분 옛날 우리 어릴 때 추운 날 생각나죠? 우리가 좀 어렵게 살 때 추운 날 두꺼운 솜으로 만든 이불 하나만 있으면 밤을 견딥니다. 왜? 그 이불속에 푹 들어가 있으면 되니까. 이 더러운 세상 우리가 큰 솜이불 안에 푹 들어갑시다. 주님의 계시와 진리 안에 푹 들어가면 돼요.

우리는 이미 죽은 자를, 내가 죽었다는 것을 성도 아니면 누가 알겠어요. 이스라엘 아니면 아무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성도 아닌 자를 성도 되게 하려고 죽음을 경유 해서 죽음 속에 집어넣은 거예요. 유월절을 경유 해서 집어넣고 우리는 십자가 피가 우리 속에 들어와서 십자가 피가 살아있고 피가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 앞에서 죽은 존재로서 날마다 살림을 당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상황 속에 있습니다.

우리 일이 없어요. 맡긴 자에게는 더 이상 내 일이 없고 아침에 뭘 먹고 저녁에 뭘 먹느냐가 전부 다 주님의 일이 되는 겁니다. 길갈은 뭐냐? 길갈은 할례를 행한 지점입니다. 여호수아 5장에서. 할례를 행했다면 뭐가 똑 떨어져서 또로로 굴러가거든요. 이름이 길갈이라 하는 것은 굴러가는데 뭐가 굴러가느냐 하면 평생에 나에게 매여있던 부끄러움, 그래서 우리가 옷을 입잖아요, 평생의 부끄러움을 또로로 굴러떨어져 가는 거예요.

이 말이 뭐냐 하면 심판주를 앞당겨서 벌거벗은 몸으로 직접 대면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심판주가 어디 있느냐? 심판주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 흘리는 모습으로 십자가 온 천지가 피투성이가 된 채 우리에게 다가왔고, “주여, 왜 그러십니까? 왜 온통 피투성이입니까?”, “너 때문에 맞은 채찍이고 너 때문에 맞은 피 흘림이다”라는 것을 마주할 때 우리는 어떤 수치나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또로로 굴러간 거예요. 그것이 할례이고 신약에서는 세례라고 하는 거예요.

그 지점으로, 이 세상 온갖 것 구경해도 좋은데, 미국으로 영국으로 다 좋은데, 항상 우리의 본 지점은 미국도 영국도 캐나다 이민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에요. 항상 우리의 지점은 길갈입니다. 그 길갈로 돌아오게 되면 주께서 참으로 부지런히 나를 써먹을 대로 다 써먹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불에도 들어가고 물에도 들어가고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온갖 부귀영화도 골프도 하게 하고 모든 것을 경험하게 하면서 우리가 온몸으로 세상의 것보다 뒤지고 쳐졌다는 부끄러움을 만끽하면서 그게 더 이상 주님 앞에서는 아무 의미 없다는 거예요.

2018년은 아무 의미 없음으로 끝냅시다.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여호와 전쟁은 하늘나라에 소용 있는 것과 하늘나라에 소용없는 것을 날카롭게 가려내는 전쟁인 것을 맡겨진 우리를 앞장세워서 이런 인간도 천국 간다는 것을 참으로 대범하게 내놓을 거 없는 우리를 내놓았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대범함 이거든요. 하나님의 용감스러움을 왜 우리는 본받지 못합니까? 덩달아 같이 당당하고 주저 없이 살아가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눅 들었습니다. 벌벌 떨었습니다. 남 잘될 때 벌벌 떨었습니다. 남이 성공할 때 분노를 느꼈습니다. 이 자체가 얼마나 우리가 주님의 일을 업무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걸 경유 했기에 또다시 주님께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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