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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5 15:10:45 조회 : 114         
   기드온 사람의 속임수181125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기드온 사람의 속임수(여호수아 9:3-6)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HxWBp2JxsjY, Hit:18
 이근호 18-11-25 15:58 
기브온 사람의 속임수

2018년 11월 25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9:3-6

(9:3) 기브온 거민들이 여호수아의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

(9:4) 꾀를 내어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9:5) 그 발에는 낡아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 난 떡을 예비하고

(9:6) 그들이 길갈 진으로 와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그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우
리는 원방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약조하사이다

전쟁에 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냥 전쟁의 승리의 결과만 노리기만 하면 아니됩니다. 그 전쟁의 와중에서 자신들이 기존 생각들이 바뀌어지고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이 확연하게 달라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에서 무엇으로 달라져야 할까요? 사람은 홀로 살고 싶어합니다.

자기 말고 자기 속에 그 누구도 들어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랍니다. 즉 독자적인 삶이 인간의 본질에 부합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는 겁니다. 모든 결정도 본인이 내리고, 모든 결심도 본인이 내리고 싶어합니다. 나만의 것, 그로 인하여 영원토록 즐거워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전쟁에 나서주신다니까 이스라엘은 신나는 겁니다.

이런 자아상에 변화와 변모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전쟁 중에 그런 변화가 생기고 그것이 인간들에게 ‘새로움’을 줍니다. 세상을 보는 새로움입니다. 세상을 달리 보게 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본인도 달리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어떤 점에서 이스라엘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진멸의 대상인 히위족속에 속하는 기브온 민족이 단지 살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거짓으로 자신들을 위장해서 진멸의 대상에서 면제되는 일이 일어났고 거기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관대하고 그들을 용납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관대함’이나 ‘동정’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사회에서는 높은 덕목이 됩니다.

인간들의 사회공동체를 평화롭게 유지하는데 기본 소양입니다. 진리나 정의보다는 따뜻한 이웃의 정이 사람을 더욱 더 사람답게 살게 한다는 주의입니다. 마음을 낮추고 동정을 요청하면 악한 짐승이 아닌 이상, 받아주는 것이 인간의 기본도리라는 것이 상식입니다. 하지만 ‘상식’이라는 말 속에는 항상 “결국 나는 옳은 생각을 하는 존재입니다”라는 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렇듯 바른 생각은 설사 하나님께서는 끼어드신다 할지라도 책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식을 갖고 있습니다. 즉 인간들은 상식의 범주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상식선으로 다른 사람들과 관련 맺습니다. 상식선에서 사람 사는 맛을 느끼겠다는 겁니다. 이 점에 있어 우리는 기드온 사람을 용납하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탓하지 못할 겁니다.

즉 오늘날 우리들의 상식이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식과 기드온 사람들의 상식과 서로 통하고 있다는 말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기드온 사람은 분명히 몽땅 다 진멸의 대상자들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 자신의 전쟁에 끼어들게 하신 겁니다.

곧 이스라엘 사람들의 현재의 한계를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전쟁에 임하는 자세가 철저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쟁에서 전사다움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빠져 나오던 그 날밤의 사정을 압니다. 거기에 동원된 죽음의 천사들의 자세를 보세요.

그들에게 봐주거나 주저하거나 용납하는 것이 없습니다. 꼭 킬러같습니다. 냉혹하고 비정하게만 느껴집니다. 전 애굽의 각 가정들의 맏아들은 각 고유한 사연이나 내력이 고려된 지 않은채 모조리 예외없이 다 죽게 됩니다. 히브리인들 가정의 맏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의 천사 앞에서 그들의 맏이도 이미 죽은 자입니다.

죽음의 천사는 피를 보고 넘어갑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께서 시키신 대로만 움직일 뿐입니다. 전쟁은 그렇게 하는 겁니다. 사정 봐줄 수 있는 권한이 천사들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양의 피를 페인트칠 했다는 말은 “우리 아이는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즉 자신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 아들 대신 양의 피를 바른 겁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지시 앞에서 인간의 자식 사랑도 소용없음을 고백하는 겁니다. 자식은 결코 부모가 책임질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식의 운명이든지 부모의 운명이든지 진정 생명의 권한 우리 인간에게 조금도 없는 겁니다.

그러나 그랬던 그들이 막상 이스라엘이 세상에 나가 다른 민족과 만남에서는 자기 자신의  결단과 결정에 의무를 부여하는 겁니다. 멀리서 오나 가까이에서 오는 히위족속은 다 죽이여야 했습니다. 죽이는 것이 오락이고 즐거워서가 아닙니다. 승리감의 일종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약속이 그러하기에 그 어떤 여분의 감정도 갖지 말고 실행에 옮겨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인간들이 선뜻 주님의 일을 따르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착함에 마음이 끌려서 그것을 살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즉 홀로 사는 본성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5장에는 세 명의 직원에서 지시를 맡기고 멀리 출장하는 사장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에게 10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5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1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다른 두 사람은 주인이 멀리 있든 같이 있든 상관없이 맡겨진 일에 합니다. 이는 평소의 태도가 늘 주인과 함께 있을 경우에만 본인의 존재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달란트 받은 사람은, 평소에도 주인이 없이 사는 자기 자신이 진정 자기답다고 여긴 겁니다. 따라서 주인이 있을 때는 순종하는 것 같지만, 차라리 주인없이 혼자 살고 싶다는 본성은 주인이 타국에 출장갔을 때 비로소 들통 난 겁니다.

여기에 대한 돌아온 주인의 처벌이 가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주인이 시킨 대로 안한 겁니다. 여전히 자기 가치를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버티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전쟁들을 통해서 자신들이 간직하고 버티고 있는 모든 가치관이 파괴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죽어 마땅한 존재가 자기 자신임을 일러주는 그런 주님의 전쟁에 그들이 참여되고 있는 겁니다. 새로움이란 이처럼 더 깊은 속살을 노출시키는 겁니다. 그냥 추가적인 새로움으로 마감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오늘날도 예외없이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자식을 주신 것은 그 자식이 하나님의 자식임을 분명히 해두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부모는 자식을 통해서 자신이 달라져야 합니다. 단지 내 소유의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지극정성을 쏟아 부어도 여전히 그 자식은 부모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겁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아는 전쟁은 지금도 쉬지 않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괜찮음을 자랑하지 말게 하옵시고 주님께서 이 인간 세상에서 당하셨던 그 아픔에 동참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8-11-25 19:56 
212강-여호수아 9장 3~6절(기브온 사람의 속임수)201811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8장 3~6절입니다. 구약성경 332페이지입니다.

“기브온 주민들이 여호수아가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 꾀를 내어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그 발에는 낡아서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가 난 떡을 준비하고, 그들이 길갈 진영으로 가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그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우리는 먼 나라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하니”

전쟁이라 하는 것은 미리 목적과 목표가 있기 마련이죠. 그런데 전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뭘까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가 놓치는 게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전쟁을 하는 와중에 우리 자신이 얼마나 대수롭지 않고 어설픈 존재라는 것을 나 스스로가 이렇게 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그걸 깨닫지 못해요.

왜냐 하면 가지기에 급급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늘 계획하면서 살잖아요. 그 계획할 때 내가 이 정도로 어설픈 것을 새롭게 깨달으리라고 계획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저걸 가져야 해. 왜냐 하면 나는 가질만한 자격이 되니까’라고 항상 뭘 가졌다 하면 그만한 위치에 있어서 자기를 강화하기 위한,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뭔가가 시도되는 겁니다.

자기가 일부로 못난 존재로 발각되기 위해서 애를 쓰지는 않거든요. 문제는 그런 식으로 살게 되면 그 인생은 천국에 부합되지 않는 인생이라는 것이 성경적으로 문제가 돼요. 나는 이것도 가졌고, 이것도 이겼고, 이것도 진 적 없고, 이것도 쟁취했고,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주님이 가신 좁은 길이 아니고 점점 더 넓은 길을 찾아서 몸부림치는 사람입니다.

이걸 세상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그 가정과 조직사회와 그 직장에서 자기를 쓸모있는 인간으로 비치도록 용을 쓰고 애를 쓰는 모습입니다. 천국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죠. 내가 이 조직에 꼭 필요하니까 나를 죽이지 말라고 생각하는 거, 이게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과 기브온 거민들이 여호수아에 나올 때 그 사람들의 태도가 이런 태도입니다.

‘이스라엘을 앞장세우는 하나님의 전쟁에서 우리가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가 새롭게 편성되는 이스라엘 조직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간주하면 우리를 받아 주겠지.’라고 하면서 그들은 위장하게 됩니다. 그 위장이 뭐냐 하면 본문 3~6절까지 쭉 나와 있는 것처럼 먼 곳에서 왔다는 티를 팍팍 냅니다. 먼 데서 왔다.

“당신들이 접수하려는 그 동네 사람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먼 곳에서 왔습니다. 당신의 정복 대상이 아닙니다.”라는 어조로 위장을 받아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과 여호수아는 그들이 알아서 기고 들어왔다는 것에 흐뭇함을 느꼈던 거예요. ‘저 사람은 우리가 다룰 수 있다’라고 느껴서 굉장히 너그러운 대우를 해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칙에 보면 너그러운 대우라는 건 없습니다. 제가 그걸 장담하는 이유는 예를 들면 애굽에 처음 유월절이 있을 때 애굽에서 나오는 그날 밤에 하나님의 천사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맏아들을 다 죽였어요. 물론 피가 발린 집에서는 건너뛰었습니다. 그 집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두 번 죽일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건너뛴 거예요.

‘이 집은 살려주자’가 아닙니다. 그러면 피를 바를 필요가 없죠. 피를 발랐다는 것은 이미 두 번 손댈 필요가 없다는 거죠. 일사부재리의 원칙입니다. 한 번 처벌한 건 두 번 중복해서 처벌할 수 없다는 원칙이거든요. 이 집에 우리가 손댈 사람은 이미 죽었고 건너뛰자는 겁니다. 물론 그 천사가 그 바른 피가 사람의 피인지 양의 피인지 그걸 구분 못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약속대로 어쨌든 간에 한 번 피를 발랐다는 것은 이게 양이 되든 뭐가 되든 이게 피를 발랐다는 것은 ‘우리는 죽어 마땅합니다’라는 고백을 그 앞에다가 페인트칠 한 거예요. 사람들 보기에 말고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마땅히 지옥 가야지요. 그럼요.’라고 하는 거예요. 더 쉽게 말해서 자기 아파트 앞에다가 ‘이 집은 지옥’이라고 써 놓으란 말이지요.

천국 갑니다. 참 쉽죠. ‘입춘대길’ 말고, 그와 정반대로 거꾸로 해보세요. ‘입춘 저주’ 저주여 오라.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저주받을 만해서 저주받겠다는데 마귀에 시험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 일을 하는 죽음의 천사들은 제가 보기엔 사무라이같아요. 복면하고 뒤에 혐오를 일으키는 긴 칼하고 그저 만나는 사람마다 그냥 자기 솜씨 발휘하는 대상으로 삼는 거.

마치 술 먹고 ‘아무나 걸려라. 여자든 누구든 약한 자 걸려라.’ 하면서 이유 없이 때리는 거랑 똑같은 거거든요. 그 죽음의 천사는 요즘 말로 두 자로 하면 ‘킬러’입니다. 킬러의 특징이 있어요. 동정심은 전혀 없습니다. 기계 같아요. 왜 우리는 기계처럼 못삽니까? 이게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겁니다. 왜 우리는 기계처럼 못사는지.

우리는 기계처럼 살 생각은 안 하고 반듯하게 살려고 해요. 반듯하게 사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반듯하고 아니고 이런 관점은 그것은 네가 챙기고 다룰 관점이 아니고 주님이 알아서 할거고 우리는 주님이 시키는 대로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나이다” 그것만 하면 돼요. 주인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런 것이 굉장히 쉽습니다.

주인이 있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쉬워요.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이런 유명한 비유가 나와요. 어떤 공장에 직원들이 세 명 있는데 그 세 명을 모아놓고 주인이 말하기를 내가 먼 타국에 간다고 하고 각각에게 일거리를 줬어요. 10달란트, 5달란트, 1달란트. 10달란트와 5달란트 맡은 사람은 주인이 있어도 기계였고 먼 곳에 갔어도 기계였어요.

왜냐 하면 먼 곳에 있어도 이미 지시사항이 떨어졌으니까. 주님의 지시가 있고 시킨 것이 있다는 그걸로 이미 주님은 떨어져도 지금 나와 함께 있는 것으로 간주했어요.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그 종은 거기에 보면 게으른 종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 한 달란트 받은 종은 평소에 ‘주인 출장 좀 안 가는지’하면서 혼자 있고 싶어요.

단독으로 살고 싶어요. 혼자서. 왜 혼자서 있고 싶어 하느냐 하면 주인이 원하는 인생은 내 인생이 아니니까 싫다는 겁니다. 주인이 요구하는 인생이기 때문에 내 포부와 내 꿈이 안 담겨 있으니까 그게 싫다는 거예요. 독자적인 나의 꿈, 나의 희망, 내 인생 따로 갖고 싶다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게으름이라고 했어요. 왜 게으름이냐면 네가 종답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종이면 종처럼 놀아야지 왜 종이 주인처럼 행세하느냐는 지적하기 위해서 게으른 종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게으른 종의 처벌은 가혹해요. 아주 가혹해요. 지옥에 보내버려요. 주께서 비유하실 때에. 평소에 우리는 세상에 나가면 다른 사람과 서로 흉내 내고 모방합니다. 인간의 모든 배운다는 것은 모방에서 모방으로 전염되듯이 배워요. 그러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고방식과 어떤 태도를 배웠습니까?

‘나는 나에게 주인이 있는데 나는 시키는 대로 산다’라는 이런 거를 배운 거예요? 아니면 ‘나는 언젠가 독립해야지’라는 걸 배운 거예요? 사회에 나가서. 직장생활하는 사람이 ‘난 평생 직장생활 할래’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도 복권 당첨되면 이 회사 그만둔다’ 그런 식으로 나왔을 거예요.

노래방에 있는 여자 직원이 노래방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에요. 나도 돈만 있으면 노래방 내가 차리겠다는 거예요. 위장한 것이 아니고 진짜로 먼 곳에서 오신 그분이 하신 말씀이 자꾸 제 안에 새겨져요.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는 겁니다. 인간은 단독으로 인간을 몰라요. 누군가 나의 미래까지 미리 보여줘야 해요.

그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아버지 앞에서 지실 때에는 이걸 예수님에게 국한된 일로 보시면 안 됩니다. 그거는 믿음이 아니에요. 주님이 당하신 그것이 내가 당할 일을 미리 보여주신 겁니다. 우리의 미래 운명은 고민할 필요 없어요. 미리 다 보여 줬어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 나는 주님 앞에 버림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미리 보여준 겁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 이야기가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리는 거예요. “너 학교에서 그렇게 안 배웠잖아. 너 부모로부터 그런 소리 안 들었잖아.” 부모로부터 배운 것이 뭡니까? 공부 잘해서 우리 집안을 일으켜라. 그런 것을 굉장히 압박한 거예요.

물론 둘째, 셋째는 관계없습니다. 첫째인 장녀나 장남에게는 그게 굉장히 심하게 와요. ‘집안을 내가 건사해야지. 동생들 내가 돈 벌어서 공부 다 시켜야지.’ 이게 장남은 타고났어요. 장녀, 장남은 타고나요. 고추 농사해도 동생 다 챙겨 줄라고 동생에게 줄 생각부터 먼저 하고 있어요. 농심라면이 거기서 나왔잖아요.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예수님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장남이라고 해요. 맏아들. 로마서 8장에. 하나님 뜻은 뭐냐 하면 맏아들만 닮으라는 겁니다. 맏아들만. 그러면 그 닮아야 할 분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서 사셨던 겁니다. 둘째 셋째 되는 우리는 영 근처도 못가죠. 다시 정리합니다. 단

독자로 사는 것이 아니고 지시에 따라 살았는데 지시에 따른다는 것이 인간들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타고난 본성이 뭐냐 하면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혼자서 홀로 최고가 되고 싶은 거예요. 혼자서 최고. 여성분들도 나중에 나이가 50~60 넘어가게 되면 그 전부터도 그런 잠재성이 있었지만 가정에서 왕이 되고 싶어요. 최고가 되고 싶어요.

이제는 삼시 세끼도 하는 것이 싫어요. “네가 알아서 먹어라. 너는 손 없나? 나도 좀 놀자. 골병들겠다. 평생 나는 내 인생이 없잖아” 그러니까 처음부터 자기 인생 기대한 거예요. 자식에게 잘해주면 자식이 잘해줄 거라고 생각 한 거예요. 세상에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다 하다니. 그건 속고 속인 겁니다.

그런 거 없어요. 인간은 해주면 당연한 거고 못 해주면 짜증 내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는 손해 안 보고 이익만 챙겨도 되는 자격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여기며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너무 탓하지 마세요. 본인도 참고 있을 뿐이지 사실은 본색이 그 본색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건강해야 할 이유가 하나가 아프면 다른 한 사람이 짜증 나요. ‘무슨 팔자가 이렇게 더러워서 몸 아픈 사람이랑 같이 살게 되었느냐.’ 이렇게 돼요. 자기가 안 아파도 옆에 사람 아프면 이렇게 짜증 나는 겁니다. 이러한 기계처럼 살아야 하고 냉혹한 전사 킬러처럼 해야 하는데 그게 천사는 가능한데요, 인간은 사적인 그놈의 정에 늘 휘둘리게 되어 있어요.

늘 휘둘리는데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두 자로 ‘상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상식이라 하는 것은 내게 유리한 쪽으로 내가 착한 쪽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는 논리 그게 상식이에요. ‘나는 이 정도 되니까 나를 착하다고 해줘.’ 결론적으로 나는 나쁜 사람 아니라는 쪽으로 필요한 자료들을 다 끌어서 새롭게 정렬을 해놓는 거예요.

이게 상식이라는 겁니다. 상식은 상식 맞아요. 상식 맞는데 진리는 아니에요. 이건 진실이 진리가 아니에요. 흔히 사람들이 이야기하죠. 솔직하게 이야기한다고 하는데 그 솔직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나 나쁜 사람 아니요’가 미리 들어 있어요. 그걸 가지고 배를 운전하는 사람은 ‘바닥짐’이라고 합니다.

바닥짐이라는 것은 무거운 물건을 일부러 배 밑바닥에 실어요. 풍랑에도 오뚝이처럼 흔들리지 말라고. 흔들려 넘어지지 말라고 바닥짐을 쓰거든요.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바닥짐이 있어요. 나한테 지겠다고 패배하겠다고 굴복하겠다고 미리 허술하게 먼 곳에서 왔다면 이건 상대적으로 이스라엘 자존심을 한 것 높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높은 자로 주위 사람에게 대우받게 하는구나. 신난다.’ 이거는 사실은 인간의 마귀적 본성입니다. 교만한 것을 하나님이 원치 않거든요. 사람이 교만하게 되면 사람 레벨이 이미 올라가 있어서 거기서 욕망이 멈추질 않아요. 아침에도 이야기 했지만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큰 게 뭐냐 하면 우리의 욕망입니다.

눈에 보이는 걸 줘도 만족 못 하는 이유가 우리의 욕망이 주체를 못 해요. 눈에 보이는 게 잠시는 좋아요. 하지만 ‘이게 다야?’가 대박에 나와요. 누가 저에게 100평짜리 아파트 사줘 보세요. 처음엔 기분 좋아요. 그런데 이게 다냐는 말이죠. 한 채 더 있어야지. 남자들 차 바꾸는 이유도 거기 있어요. 차 좋다고 바꿔놓고 6개월도 안 돼서 팔아먹었어요. 지루하다고.

모든 취미생활도 그렇잖아요. 자꾸 바꿔치기한다는 말이죠. 마음이 낮아져야 하는데 하나님의 전쟁은 외부의 전쟁이 아니고 사실은 이스라엘 내부의 전쟁이라고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죠. 내부의 전쟁이에요. 정신이 붕 뜬 거예요. 이상하게 일이 잘 풀린 거예요. 전쟁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항복한다. 이거 횡재한 거 아닙니까?

‘역시 하나님은 우리의 자존심을 다 챙겨주시는구나.’ 그런데 여기 이 바닥짐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냐 하면 이걸 바꾸라는 겁니다. 어디서 바꾸느냐 하면 구체적 현실 속에서 보편적인 것을 식별해 내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 가운데서 바닥짐같이 흔들리지 않는 한결같은 것을 식별해 내는 눈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기브온 사람한테 속은 겁니다. 이 기브온 사람의 지역을 제가 이스라엘 갔을 때 못 가봤어요. 거기가 팔레스타인 지역이기 때문에 가보질 못했어요. 이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9장 22절부터 27절까지 보면 끝까지 살아남는 데요, 나중에 이 지역의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생기느냐 하면 사울 왕의 활동 중심이 됩니다. 이 기브온 사람들이.

원래 이 기브온 사람은 히위족속에 속하는데 히위 족속은 9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전부 진멸의 대상입니다. 아이고 어린이고 여자고 전부 다 죽여야 해요. 다 죽여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광야로 오면서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보인 놀라운 능력으로 인하여, 이건 뭐 전쟁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알아서 기어들어 온 겁니다.

이건 약속에 위반되는 거예요. 봐줘서는 안 되는 겁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킬러라고요. 약속은 약속이지 인간이 그 약속에 끼어들 수가 없어요. 인간의 정이라든지 동정심이 약속에 끼어들면 안 됩니다. 부모가 자식 양육할 때에 내 자식이라고 싸고 들면 이것은 하나님의 지시에 부모가 나서서 가로막는 샘이 되어버려요.

자식이 귀하잖아요. 귀한 만큼 약을 독하게 써야 합니다. 아주 맹독을 써야 해요. 귀할수록 내 자식 아닌 것처럼 다루어 져야 합니다. 왜냐 하면 어린 청소년은 기댈 구석이 가정에 있는 어른밖에 자기 태어난 부모밖에 기댈 곳이 없잖아요. 기대는 것이 수법이에요. 상투적인 수법이 되었어요. 모든 책임을 부모에게 뒤집어씌우는 게 그 기술과 노하우가 아주 계속해서 발달합니다.

그런데 부모는 이쁘고 사랑스러우니까 오야오야 하면서 다 받아 주는 거예요. 이건 벌써 유치원 가기 전부터 3살 되기 전부터 해야 하는데 하여튼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도 이게 안 돼요.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이게 안 돼요. 성경에 보면 자식은 부모를 떠나라고 나와 있는데 부모가 안 놔준다니까요. 이게 하나님이 맡겨 준 자식을 내가 내 소유물로 전환한 거예요. 남의 것을 빼은 거예요.

하나님은 가만두지 않습니다. 내 것이 아니야 하면서 하나님이 가져가려고 하면 부모가 나서서 기를 쓰고 “내 자식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하나님 네가 무슨 상관이야?” 물론 노골적으로는 그렇게 안 하죠. 저주가 겁나서. 노골적으로는 안 하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하나님 자식으로 만들려는 일에 대해서 방해를 하는 거예요. 끝까지 내 자식이라고 하면서.

이걸 고쳐야 해요. 자식을 주는 것은 자식 달라지라고 자식 준거 아니고 부모가 달라지라고 하나님께서 자식을 준겁니다. 그놈의 정이라는 것이 천국에는 아무 소용없고 지옥에나 통하는 정입니다. 그 초코파이. 지옥이나 통하는 거예요. 가족 분위기 좋지요. 다 좋은데 지금 이스라엘 실패한 것은 오늘 본문에 보면 바로 코앞에 눈앞에 정 때문에 그 큰 뜻을 잃어버린 거예요. 큰 보편성을 잃어버린 거예요.

배가 뒤집힐 지경입니다. 나중에. 기본은 안 바뀌어야 하는데 기본이 텅텅 비어있어요. 주님의 약속, 십자가 피, 하나님의 냉엄함, 이런 건 다 빠져있고 그저 정 때문에, 이것도 정 때문에, 저것도 정 때문에, 전부 다 자기 인생의 배에 전부 다 인정, 사정, 그런 거를 잔뜩 집어넣는 거예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신성일이 효심 때문에 죽었다고 했죠. 이게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지만 제가 과도하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술 담배 안 하지만 부모님 섬긴다고 절에서 매일 향불 피웠는데, 향이 폐로 들어가서 폐암 일으켰다는 겁니다. 담배도 안 피우는 폐암 걸렸어요. 그래서 제발 부모에게 효도하지 말라는 겁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효도 받으라고 있는 부모가 아니고, 효도 다 필요 없고 자식을 내치라고 있는 것이 부모의 역할입니다. 이제는 말합니다. 시집 보냈으니.

차라리 자식을 내치느니 날 내치겠다고 하는 것이 부모죠. 그게 바로 내가 몰랐던 내 모습이에요. 인간은 내 정을 내가 이기지를 못해요. 내가 나를 사랑해요. 이게 문제예요. 그게 단독자가 되고 독자적으로 살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냥 후원만 해달라는 거예요. 나는 끝까지 나를 사랑할 테니까. 그러지 마시고 냉혹한 킬러로 사세요. 킬러라는 말 말고 그냥 기계가 되세요.

자식을 바로 내치고 뭐 하라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해주세요. 그리고 자식은 그 표정을 압니다. 내가 부모 이용하는 것을 부모가 알고 내 수완에 부모가 안 말리는 것을 알아요. 그것이 바로 자식은 부모 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자식에게는 쓸데없이 자식이 먼저 내미는 말에 말 섞지 마세요. 다만 자식에게는 명령만 할 뿐이지 자식에게 호응해 줄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어릴 때 세 살쯤 되었을 때 유치원 갈 때는 오야오야 해주지만 점점 크게 되면 자식이 부모를 떠나기 전에 부모가 자식을 내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그게 내 정과 내 사랑을 내 쪽에서 끊어 버리는 겁니다. 이게 냉혹한 기계 같은 주님의 지시에만 움직이는 것, 이것이 유월절 정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세상에서 너무 많은 것을 익혔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흉내 내고 모방했습니다. 이게 천국에 합당한지 계산도 못 했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지시대로 우리 자신을 분명히 알아서 천사처럼 기계처럼 움직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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