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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30 14:59:39 조회 : 219         
   여리고성의 저주 180930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여리고성의 저주(여호수아 6:26-27)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TiE4Xo_9t5w, Hit:57
 이근호 18-09-30 15:49 
여리고성의 저주

2018년 9월 30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6:26-27

(6:26)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

(6:27)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명성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해 두 가지 사실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저주요 다른 하나 복입니다. 둘 다 인간들이 기대하는 저주나 복은 아닙니다. 인간들이 예측 못한 저주요 예측 못한 복입니다. 인간은 애초에 저주를 도외시하고 어떻게 하면 복을 따낼 것인가에 마음두고 삽니다.

복에 환장하는 이유는 그만큼 삶 주변에 공포와 불안감이 들끊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나름대로 성공했다 할지라도 달라붙는 공포와 불안감을 떨어낼 수가 없습니다. 형편이 좋지 못할 때는 결사적으로 자기 것을 지켜야 하고 형편이 좀 나아져도 안심 못합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어지간에 잃어도 여유있도록 더, 더 막대한 복이 계속 주어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사는 반대입니다. 이 땅에 ‘저주의 흔적’을 필히 남기시겠다는 겁니다. 즉 이 세상은 복을 기대하기 전에 과연 이 땅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처분받는 지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저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대동하시고 여리고성 정벌에 나서신 이유는, 저 저주받은 여리고성의 운명이 이스라엘다움의 기초가 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존재하고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이스라엘이 되는 게 아닙니다. 참된 이스라엘의 진수는, 예외없이 일괄적으로 저주받아야 될 여리성에서 ‘구원된 자’가 있다는 그 내용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으로 인하여 생겨난 나라입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 혈육 자체가 결코 거룩하고 의로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기에 자동적으로 꼭 복이 와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자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지상에 적용될 때마다 등장하는 것은, 저주이며 그 저주의 환경에서  어떤 식으로 복이 이스라엘로 제공되는지를 이스라엘은 경험해야 합니다. 즉 ‘기생 라합’이 여리고성에서 구원이 되는 상황이 이스라엘 속에서 되풀이되어 일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이 작업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동행하면서 제2, 제3의 여리고성 함락 작전을 시행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여리고성에 남긴 저주의 흔적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26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특정 건물 건축이나 특정 장소가 저주를 머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작 저주는 혈통이 본류라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이나 아닌 이방민족이나 하나님께서 저주를 퍼붓겠다는 노리는 대상은 특정 장소나 성채가 아닙니다. 인간의 혈통입니다. 인간 혈육이 수상하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이 문제성이 있는 혈육에 속해면서도 자신의 혈육에 문제 있다는 것을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점에 있어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왕기상 16:34에 보면,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조심스러워 하려고 합니다. 즉 두 번 다시 여리고성을 건축하지 말자는 겁니다. 만약에 여리고성을 건축하면 자식이라는 자식은 모조리 잃어서 대가 끊어지니  그런 저주는 피하는 것이 좋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도리어 저주를 확대해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혈육은 저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겁니다. 특정 지역에 가서 건축하지 않았다고 해서 결코 우리가 저주를 안 받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저주는 기생 라합의 구원을 통해서 비로소 파악되는 겁니다. 마땅히 여리고성은 통째로 저주받도록 되어 있는 도성입니다.

거기서 저주를 뚫고 구원될 자가 나올 리가 없습니다. 구원이라면 그 여리고성을 침공하는 이스라엘이 독점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산뜻한 이해일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런 해석을 거부하고 흔들어버립니다. 차라리 이스라엘 속에서 혈육에 흐르는 저주성을 보다 또렷하게 발견하기를 원하십니다.

즉 여리고성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도 혈육을 의지하는 한 저주가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사무엘상 2:29-31에 보면,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지게 하느냐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존중’의 비교치로 ‘자식 사랑’을 내세우십니다. 여기에서 두 누구도 자신과 무관하다고 할 사람이 없을 겁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존중을 내세우지만 막상 자기 자식이나 손자에게, 가족에게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서 ,“하나님, 이럴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통곡하고 애통해 할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지시하는 것과 같은 취지입니다. 즉 모든 인간은 자신의 혈육 자체에 대해서 제대로 봐야 한다는 겁니다. 저주가 이 혈육 안에 내장되어 있습니다. 즉 그 어떤 인간도 혈육에 속했다는 바로 그 자체로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같은 혈육에 속하면서 그 무서운 저주의 전쟁에서 구원된 기생라합의 사정이 참으로 기이하고 기적적인 일입니다. 구원이란 이처럼 ‘저주’라는 환경 속에서 벌어집니다. 저주가 일어나지 아니하면 구원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네 자식을 하나님께서 건드린다고 불ㅊ안하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혈육에 속한 우리 자신이 천국을 간다는 점을 더 신기하고 놀라워 해야 겁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고백 속에서 기생 라합의 체험이 살아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8-10-01 02:14 
204강-여호수아 6장 26–27절(여리고성의 저주)201809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6장 26–27절입니다. 구약성경 327페이지입니다.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장자를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명성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

성경에서의 진실이라는 것은 비교하는 데서 보다 분명해집니다. 26절에서는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라는 저주에 대해서 구태여 알려주시는 이유가 그 여리고성에 두 가지의 결과물을 내놓았다는 겁니다.

하나는 여리고성에 살았던 사람들은 여리고 성이 무너지면서 그 모두에 속해있는 사람도 같이 저주 받아서 멸망해야 되는 게 마땅한데 25절에 보면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살렸음으로 오늘날까지 이스라엘에 거한다” 라고해서 여리고성이 구원을 위한 성일 수가 있다는 생각을 가질 거예요.

하지만 26절에 보면 그 생각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여리고성이라는 것은 구원을 위한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저주하는 그런 것이 형성되지 않고 누구든지 여리고성에 살았다는 그 이유 때문에 다 죽어야, 저주받아야 마땅한 성, 저주의 성, 이것이 바로 여리고성입니다.

따라서 여리고성에서 기생라합이 살아났다는 것은 인간의 예상을 뛰어 넘는 거예요. 바로 그 저주 속에서 살아남은 그러한 위상이 현재 이스라엘이 경험해야 될 언약의 하나님, 언약의 상황, 언약의 환경이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여기에 보면 여리고성에 누구든지 건축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마치 머리가 빠졌으면 다시 심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머리가 빠진 것을 저주라고 봅시다. 머리가 빠진 것을 저주라고 보고 저주를 확 티내자는 겁니다. 저주를 확 티내서 저주 안 받은 척 뒷머리 뽑아서 앞머리에다가 심지 말고 노골적으로 저주의 저주됨을 그대로 노출되게 하는 이것이 일관된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죠.

이렇게 할 때 사람들은 여리고성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할 거예요. 오늘 대목에 설교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요. 이게 어떤 특정지역은 저주고 그 지역에 거하지 않으면 저주 안 받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26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장자를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

계자라 하는 것은 막내아들을 이야기하죠. 그 기초를 쌓을 때는 맏이를 잃을 것이고 문을 세울 때는 막내아들을 잃는 다는 것은 자식이라는 자식은 홀라당 다 빼앗아 간다는 거예요. 여리고성에다 건축을 하는데 옛날에는 텔이라고 해서 간편하게 집짓기 위해서 남은 터 위에 계속 터를 쌓았습니다.

그러니까 고고학에서 발굴을 하는 이유가 저 아래 터는 BC 몇 세기이고 그런 거죠. 언덕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옛날 유적이 땅에 파묻힐 수밖에 없는 이유가 옛날 유적지가 기초가 되어 있으니까 거기에다 엎친데 덮치고 덮친데 엎쳐서 세월 따라서 계속해서 새로운 집들이 계속해서 그 위에 거주지로 택지로 계속 올라갔거든요.

따라서 현재 고고학자들이 발굴 할 때에는 저 밑바닥까지 다 들쑤셔가지고 그 층마다 다 시대 층을 구분해요. 가야 고분 할 때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 그 ‘텔’ 언덕이라는 뜻인데 그 뒤에 사람들이 하도 많이 거주 하다 보니까 층층이 쌓여서 언덕이 된 거예요.

땅이라 하는 것은 인간에게 살기 위해서 있는 것이 땅이기 때문에 그 땅에다가 자기의 거주지를, 자기의 택지를 만들 수 있지요. 하지만 이거는 비워 놓으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여리고성을 쌓는 행위와 너의 족보 혈통이 끊어지는 것과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저주라는 것이 특정지역에 들어가면 저주고 안 들어가면 저주 안 받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인간의 혈통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그걸 하나 표시하는 형식으로 여리고성을 사용하신 거예요. 실제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리고성에 건축하지 마라는 그 주의 사항을 위반한 사람이 있습니다.

위반한 사람이 열왕기상 16장 34절에 보면 위반한 사례가 나와요.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참 해석하기가 정말 어려운 겁니다. 해석을 보통 이렇게 해요. 여리고성에 주의를 줬건만 왜 하나님을 믿지 않고 건방 떨면서 여리고성에 ‘설마 무슨 일이 있겠는 가..’ 해서 지었더니만 딱 그 터를 쌓을 때 맏아들 죽였고 성문 쌓을 때 막내아들 잃었느니 ‘정말 하나님의 약속은 빈틈이 없구나. 그러니까 말씀은 빈틈이 없다는 것을 믿자.’ 이렇게 해석을 할 거예요. 그래서 믿어서 다 지옥 가는 겁니다.

해석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여호수아는 땅에 관한 문제예요. 여리고성에다가 건축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열왕기상 16장 34절 말씀은 건축과 더불어 어디에 비중이 있느냐 하면 인간의 혈통이라는 것이 과연 아버지 살아 있었다고 자동적으로 자식이 살아 있어야 되느냐 하는 문제를 다시 한 번 심사숙고하라는 이 말입니다.

내가 결혼하기 때문에 자식이 반드시 있어야 되고, 자식이 있기 때문에 손자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너무 당연시 하는데 그걸 당연한 걸로 여기는 그 문제 자체에 문제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당연해 버리면 뭐의 당연이냐 하면 이 혈통은 주께서 건들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미신 같은 것이 작동합니다.

이런 혈통 중심이 하나님의 언약을 방해하고 우리 신앙을 방해해요. ‘하나님이 살게 해주셨으니 계속 살게 해주셔야지요.’ 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요구사항입니다. 뭐 사는 것이 자랑이나 되는 것처럼. 사는 것은 자랑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사는 것 자체가 부끄럽게 여길 줄 알아야 돼요. 왜냐하면 인간은 살아가는 자체가 수치를 느끼라고 살게 하시거든요.

‘주여, 내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럴 수 없습니다. 주여, 죽여주옵소서.’ 이렇게 나와야 정상이라 이 말이죠. 왜냐하면 내가 사는데 내가 한 것이 없잖아요. 보통 기독교가 사회에 나와서 정치 이야기 할 때에 늘 정치이야기 할 때 불만들이 있어요.

그 불만을 나타내는 기저(fundament)에 깔린 기초적인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죽을 자가 안 죽고 안 죽을 자가 죽느냐’ 하는 것에 대한 불만입니다. 좌파에서는 박근혜 진작 사형시켜야지 왜 옥에 가둬놓고 있느냐고 불만이고 우파에서는 문재인이 나라 팔아먹었으니까 사형감이라고 하는 거예요.

둘 다 의식이 뭐냐 하면 왜 죽일 자를 안 죽이고 안 죽일 자를 죽이냐는 거죠. 살리지 말아야 할 자를 살리고 살아야 될 자를 왜 죽이느냐 하는 겁니다. 참 그런 경우 많잖아요. 술 먹고 운전 한 자는 살아 있고 그 차에 받힌 인간은 죽고. 어떤 사람이 죽기 전에 메시지를 보냈어요.

음주 운전을 안 하고 차를 타고 어떤 아가씨 차로 가다가 저쪽에 술 먹은 남자가 자기 차를 받았고 자기는 죽어가고 있어요. 죽어가고 있으면서 문자를 날린 거예요. ‘엄마, 나 죽어가고 있는데 내가 왜 죽어야 돼? 저 음주 운전한 사람이 죽어야 하는데 내가 왜 죽어야 돼?’ 라고.

아주 젊었어요. 20대란 말이죠. 웅성웅성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이 사람 죽어가고 있다..” 자기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가운데 문자를 남겼는지 음성을 남겼는지 모르겠지만 억울해서 못 살겠다는 거예요. 뭐가 억울한데요? 뭐가 억울해요? 아무도 자기가 누구인지 제대로 이야기 해준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어요.

서로 좋은 게 좋다고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기 바빴지 내가 누구냐를 아무도 안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교회 와서 말씀을 보면서 그걸 듣지만 우리네 부모들 보세요. 연세 들어가면서 아직도 자기가 누군지 모르면서 돌아가십니다. 그러한 확실한 예를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

요양등급 매기기 테스트를 하는데 딸이 가서 신신당부하면서 예비테스트를 해요. “어머니, 제발 등신처럼 해야 합니다. 똑똑하면 사단 납니다. 그러지 마시고 요양 등급 매기는 데서 와가지고 이것저것 아시냐고 물어보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정신이 없다고 이야기 해주세요. 그래야 등급 나와서 나랏돈 나와서 자식들이 좀 편합니다”

사전에 예비고사에다가 예비 면접까지 다 했어요. 다 해가지고 이제야 등급 나오겠지 안심하고 있는데 막상 D-day와서 심사하는 사람이 와서 이야기합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르신, 참 곱네요.” 그 한마디에 다 넘어가버렸어요. “참 고우십니다” 그 다음부터 슬슬 말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아이고, 이래 뵈도 자식 키운다고 고생 좀 했어요...” 치매는커녕 알아서 자기 과거 이야기 술술 다 나와요. 심사하는 사람은 계속 부추기기만 하면 돼요.

평생을 남에게 부추김 받는 그것을 보람으로 삼았기 때문에 테스트 하는 사람을 마귀라고 보면 마귀가 평생을 우리에게 붕붕 띄웠습니다. “어르신 참 곱습니다. 참 훌륭하십니다. 자식 잘 키웠네요.” 하면 상대방에게서 막 나옵니다. 말 못하는 게 어디 있어요. 달인이에요. 달인. 결과는 “등급 안 됩니다.”

왜 이렇게 낮춘다는 것이 없는지. 자기 사전에 낮춘다는 것이 없어요. 오늘 본문에 핵심은 이겁니다. 여리고성이 저주받았잖아요. 너도 그중에 한사람이라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별난 종족이에요. 이스라엘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써 나온 별난 종족이에요. 자꾸 이스라엘을 우리와 동일시 보지 마세요.

우리는 이방 민족입니다. 우리는 마귀가 붕붕 띄워줬어요. 혈통과 혈육이 전부입니다. 내가 아니라도 내 자식이 잘 되면 오케이예요. 그래서 제사 지내잖아요. 뭔가 영속성, 영구성, 나는 일찍 죽지만 뭔가 내 요소가 남아 있다면 나는 불멸의 존재라는 겁니다. 지금 모든 불신자들이 여기에 희망을 걸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본인의 혈통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제사가 없어요. 이스라엘에 중요한 것은 본인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 약속이 약속답게 영구적이면, 그 말씀이 완성이 된다면 그것이 바로 그 나라가 하나님이 구상한 최종 목적의 나라예요.

천국이 되는 겁니다. 주님으로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 끝낸 나라에 우리가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를 높일 필요도 없고 우리를 스스로 돋보이게 할 필요도 없어요. 오히려 그건 거추장스럽고 주의 일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성경해석을 할 때에 6장 보고 ‘거봐, 말 안 듣다가 죽었잖아. 우리는 살아 있으니까 안심이다.’ 라고 자꾸 하는데 우리가 지금 살아 있는 겁니까? 우리가 여리고성에 건축 안했기 때문에 그 덕분으로 우리 첫째 아들, 둘째 아들 다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런 겁니까? 아니에요.

반대로 해석해야 돼요. 열왕기상 16장 34절에 나온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따라서 혈통이라는 것은 자동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마땅하다가 아니라 혈통이 유지 될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하나님께서 봐주는 경우에 혈통이 유지돼요.

비록 죄를 지었지만 봐주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봐주는 것은 아직도 기회를 준다고 이렇게 보시면 돼요. 기회를. 혈통은 너의 소원대로 그렇게 네가 유지하고 싶다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뭐가 개입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의 의미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많이 봐주고 있는 겁니다. 사무엘상 4장에 보면 엘리 제사장 나오는데 혈통 작살났습니다. 혈통 끊어졌어요.

혈통이 끊어졌는데 그 끊어진 이유가 사무엘상 2장 30절에 보면 엘리라는 제사장이 자식에 대해서는 그렇게 관대해요. 남한테는 안 그러는데 자식에게는 그렇게 관대해서 잘못을 해도 잔소리 몇 번하고 그냥 놔둬버렸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29절에 보면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라고 한 거예요. 엘리 제사장 가문을 작살 낸 이유가 자식을 옆에 놓고, 하나님을 옆에 놓고 하나님이 소중 하냐 네 자식이 소중하냐를 두고 너는 어느 것을 소중하게 보느냐 하면 네 몸에서 난 너의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나는 너의 자식을 작살내고 끊어 버리겠다고 한 거예요. 그래서 며느리가 아기 낳다가 죽고 엘리 가문은 저주받은 가문으로 이어집니다.

이게 어떤 특정가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보지 마세요. 이 특정가정인 엘리 제사장, 즉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전체가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다 담겨 있어요.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일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뜻이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원리로 흐르는 가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똑똑히 목격하라는 이 말이죠.

그렇게 해볼 때 하나님의 뜻은 확고해요. 하나님이냐? 네 자식이냐? 분명히 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지시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너의 자식을 나에게 바쳐라” 잖아요. 너무 하나님이 가혹해요. 우리가 할 수 없는 능력 밖의 일을 요구하시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예, 알았습니다. 앞으로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귀하게 여길 게요.” 라고 또 이렇게 철없이 나오시는데 그러지 마세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어느 누가 하나님을 자기 자식보다 귀히 여길 사람은 우리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자식에게 손을 대게 됩니다.

아프다든지 말썽이 일어나게 되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미워하는 지가 자동적으로 계기판에 나옵니다. 하나님 좋아한다는 것은 백날 말뿐이고 실제로는 ‘주여, 그것만은 안 건드리기로 했잖아요.’ 라고 자기가 스스로 법을 만들어서 그걸 왜 건드리느냐고 하죠. 그거 건드리면 하나님이고 뭐고 눈에 뵈는 거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나옵니다. 마귀의 고백이죠.

그것 지켜달라고 내가 그렇고 주님 앞에 공들였는데 그걸 건드리면 어떻게 됩니까? 여자들이 그런 이야기해요. 긴 머리를 자르면 샴푸가 절약된다는 이야기. 일리가 있어요. 긴머리 할 때 얼마나 샴푸가 많이 사용 됐겠어요. 반 잘라버리니까 샴푸가 많이 절약 된다는 겁니다. 주께서 자식에게 손대고 자식을 흔들 게 되면 우리는 낭패고 절망이다 싶지요. 그걸 통해서 우리가 가렸던 주님의 약속이 그걸 통해서 또렷하게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제시되는 겁니다.

제가 오늘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서 여리고성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여리고성을 지키기 위해서, 그 저주의 흔적을 지키기 위해서 자식 죽인다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열왕기상 16장을 보게 되면 이건 땅의 문제가 아니고 정작 우리가 땅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 아니고 진짜 우리가 못 놓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내 자식인 무조건 잘 되어야 한다는 그거입니다.

그게 바로 주님의 하는 일에 절대적인 방해가 되는 겁니다. 희생한다는 거, 우리가 고생한다는 거, 이거 다 누구에게 몰아주려고 하느냐 하면 바로 내 자식, 내 손자에게 몰아주려고 이렇게 고생하잖아요. 아니라고요? 지금 자식에게 전화 걸려 와서 “엄마 큰일 났어” 하면 예배고 뭐고 바로 달려가게 되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정신이 하나도 없을 건데요.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동네를 못 떠난다. 이게 문제예요. 우리 힘으로 절대 혈통, 우리의 자리를 안 떠납니다. 내 동네를 내가 떠나지 않아요. 이 불가능함, 이 불가능함을 주님께서는 강제로 그것을 뜯어 가게 하십니다. 강제로 가게해요. 강제로 가는 그 결과가 사도행전 4장 32절에 나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서 제가 좀 죄송한 마음이 드는 데요. 사도행전 4장 32절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공유의 것이라고 보면 돼요. 이걸 줄여버리면 공유의 것이 개인의 것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내놓은 결과물입니다.

자식, 내 재산, 내 터, 내 동네... 주의 성령이 오게 되면 이제는 내 것이 소중한 것이 아니고 공유의 것이 중요한 거예요. 너, 나 할 것 없이 공유의 것, 이 공유의 것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세계입니다. 그 터는 여리고성, 다시 말하면 여리고성의 저주에서 저주를 저주답게 분명히 했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서 아무도 구원받지 않아야 하는데 기생 라합이 거기서 돌출하는 것처럼 그렇게 돌출한 사람들의 집합.

죽은데서 자기도 예상 못한, 자기가 이렇게 구원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거, 나는 그저 내 자식이 최고고, 내 교회가 최고고, 내 인생이 최고고, 내 재산이 최고라고 철석같이 믿고 그건 어떤 경우도 양보 못한다고 우기고 우겼던 내가 세상에 천국을 더 좋아하고, 주의 세계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이런 마음이 있다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고백. 그런 고백들로 모인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 자식을 건드리면 “주님, 다른 것은 건드려도 내 자식은 안 건드리기로 했잖아요. 이럴 수는 없습니다.” 라는 이럴 수 없다는 그 아픔의 고백이 동일한 고백이 이제는 어디로 향하느냐 하면 “나 같은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 천국 간다는 것은, 주여,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건 과분한 혜택이옵니다.”

“어떻게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내가 생각해도 나에게서 그런 고백이 나온다는 것은 내가 차마 예상도 못한 도저히 예상 못할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라는 그거, 그게 바로 주님의 용서하심입니다. 주님의 용서하심.

그게 바로 기생 라합이 다른 가족들 다 죽는 가운데 홀로 남았을 때 그 기쁨처럼, 그것이 구원받은 이스라엘에서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 속에 있으면서 이스라엘 속을 저주의 흔적이 되고, 축복의 흔적으로써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 속에 계속 영원히 살아 있어야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의 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터의 저주가 아니라 우리 혈통 자체가 저주받은 혈통인 것을 여리고성을 통해서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속에 용서의 언약만 유지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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