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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4 17:26:55 조회 : 479         
   약속의 땅 180304 이름 : 우리교회(IP:119.204.125.121)   

약속의 땅 (여호수아 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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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교회 18-03-05 08:30 
우리교회 주일오후설교 여호수아 5장 6-9절(약속의 땅)180304-한 윤범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5장 6절에서 9절입니다. 구약성경 326쪽입니다.

 

6절,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이 열조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마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로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 행하였더니

7절,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치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8절, 온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필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처하여 낫기를 기다릴 때에

9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광야를 헤매느라 할례를 행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디어 할례를 행하게 되었습니다. 때가 찬 거죠. 9절 마지막을 보면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는 자들에게 죄를 없이하시고 수치를 다 없이하시는 장면입니다.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을 실행해야 되는 거죠.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재개를 하실 것입니다. 광야 40년을 돌렸어요.

 

민수기 14장에 보면 왜 광야생활을 해야 되는지의 내용들이, 이유들이 나옵니다. 거기에 있는 것을 간략하게 압축하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많은 기적을 베풀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이적과 기사를 베풀었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했다는 거예요. 아주 크게 한 것만 열 번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나온, 탈출한 자들은 결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어요. 오늘 이 오후 설교 제목이 약속의 땅입니다. 그들은 들어가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광야 40년 동안에 그들이 다 멸절하기를 기다린 거예요. 때가 되어서 요단강을 건너고 할례를 여호수아를 통해서 하게 되는 것이죠. 그들 조상들에게 하나님께서 딱 한 가지를 지적하시는 거예요.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치 아니했다는 것이죠. 듣지 않는다는 거죠. 그냥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들려져가지고, 듣고 흘려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청종한다는 것은 듣고 그 말씀이 자기 안에 들어와서 작용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어집니다. 남을 게 없어요. 그게 싫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청종치 아니했다고 그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이제 요단강을 건너서 할례를 시행할 때가 됐고, 오늘 이제 할례를 하는 거예요. 5장 1절 말씀을 여러분이 같이 보시면 이런 말씀들이 있어요.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 지금 이스라엘을 포함한 이스라엘 주변의 많은 나라들, 특히 이제 하나님께서 정복하고자 하는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죠. 그 땅에 원래 있던 원주민들이에요.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너고, 자기들에게 지금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린 거예요. 마음을 뺏겨버리고, 그들 때문에 정신을 잃고, 마음이 갈라지고, 말라버리고. 도대체 어떻게 대책을 세워야할지, 아무런 대책을 세울 수 없는 속수무책의 상황이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어요. 새로운 시대, 지금 여호수아가 이끄는 새로운 시대가 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밀어붙여서 온 새로운 시대가 그들 앞에 있고, 이스라엘 앞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앞에 가는 땅, 모든 민족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서면 그 주변이 바로 이렇게 돼버리는 거예요. 가나안 정복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에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복수하시는 거잖아요. 보복하시는 것이고. 그들이 죄인이었다는 것이죠. 그들이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이 정복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이끌어서 앞장세우고 그것을 낱낱이 다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도 감춤 없이 다 보여줍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원주민이 있었지만은, 정복한다는 것은 그들의 땅을 빼앗는 거잖아요. 지금도 이스라엘이 있고, 그 주변에 팔레스타인이 있고 그 주변에 아랍지역들이 있잖아요. 우리가 원래 원주민이었다는 것이죠. 1948년에 이스라엘이 UN의 허락을 받아가지고, 국제적인 어떤 공모가 있었죠. 받아가지고 이스라엘의 국기를 꽂고, 여기가 우리 이스라엘 땅이라고 했지만, 원래 수 천 년, 수 백 년 동안 살아왔던 사람들이 있었다고요. 그들이 당장 쫓겨나야 되는 거잖아요.

 

근데 이스라엘이 하는 이야기는 이게 우리 땅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고 한 거예요. 기가 막힌 일이죠. 누구도 감당 못합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밀어 넣으신 그 약속의 땅에서 해방을 맞이해야 됩니다. 탈출하면 끝인 줄 알았는데 광야 40년을 돌려버렸어요. 그러면 애굽을 탈출한 것이 무용지물이 되고, 아무소용이 없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은 거죠. 탈출한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그래서 가나안까지 가는 거잖아요. 거기가 최종목적지잖아요.

 

이제 요단강을 건너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을 끝내고 약속의 땅에 정착을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언약을 재개하신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죠. 우리가 기도할 때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랍니다.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인도하심을 빕니다.”라고 인도하심을 구하잖아요. 인도하심에 대한 그 말에 어느 정도의 느낌입니까? 말의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네. 인도하심, 하나님의 인도하심? 그냥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고 했을 때에 우리들의 느낌은 뭐냐 하면, ‘아,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시려나보다. 좋은 쪽으로 데려가시겠지. 은혜를 주시겠지.’라고 하는데, 뭐 거기에 토 달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죠. 그렇죠. 그렇게 하시죠.

 

그런데 그 인도하심이 그냥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죽이시는 것이라니까요. 죽이신 자를 끌고 가시는 거예요. 흔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빕니다.”라고 하지만, 아무생각 없이 그렇게 말을 내뱉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인도하심을 통해서 그를 죽여 버리는 거예요. 죽어도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살았다고 우기는 자들을 죽여 버리는 것이 인도하심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기도 중에 하나님께 인도해달라고 하는 것은 조심해야 되겠죠. ‘아, 이건 죽이는 건데.’라는 생각을 떠올려야 됩니다.

 

사실은 하나님께는 죽은 자가 필요 없어요. 결국 궁극적인 목적은 뭐냐 하면 살리시는 거예요. 근데 살리시기 위해서 그 사전조치로 죽이시는 거죠. 그걸 끝까지 보지 못하니까, 당장 고난당하고 괴롭고 죽이는 그게 싫은 거잖아요. 그래서 아우성치는 거죠. 끝까지 가셔야 됩니다. 기다려보세요.

 

근데 여기까지 이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더 이상 그에게는 죽음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앞에 예수님께서 그 코스를 가셨고, 따라서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은 이제 주님 가신 길을, 오전에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같이 서야 되는 것이고, 죽음을 주님과 같이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히브리서 2장에 나오는 말씀이죠. 아까 오전에도 죄의 종노릇하는 이야기도 나오고. 종노릇하고, 마귀가 지배하는 지배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죽음이잖아요.

 

근데 히브리서 2장 15절에 나오는 말씀은 죽기를 무서워하는 자들인 우리가 두려워 떤다는 거죠.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자, 예수님께서 우리가 뭐라고 구원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뭔데 예수님께서 피 흘리시면서 까지 구원하시겠다고 하시는 겁니까? 도대체 그 이유가 뭐예요?

 

십자가를 통해서 주 되심을 보여주는 그 과정 속에서, 부수적으로 떨어지는 콩고물이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완전히 부수적이에요. 주님의,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일에 우리의 구원은 거기에 하나 끼어 있는 부록정도밖에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걸 받으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고 하는 거죠. 아, 긍휼히 여겨주셨구나! 하는 거죠. 아는 자에게는 그런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내가 뭘 해서 그랬다는 것은 이건 뭐 말도 안 되는 거죠.

 

점심에 어떤 집사님하고 잠시 이야기를 나눴지만은, 하실 이야기가 많으신 것 같아요. 그러나 저는 제 스타일대로 주로 들었습니다. 참 무서운 동네에요. 복음이 전해지는 동네는요. 여러분께서 어느 정도 실감을 하실지 모르겠지마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냥 들려지고 그냥 역사되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을 처박거든요. 그리고 그곳에 처박아서 꼼짝도 못할 정도로, 비명 지를 정도가 되는 그 상황에서 그치면 안 되고, 더 더 더 가는 거죠. 더.

 

하나님께서 누구를 붙들고 말씀을 들려주시기 시작하면 그 끝을 보십니다. 그거는. 끝을 보셔가지고 이제는 나라는 존재는 다 산산조각이 나가지고 오직 주님만을 이야기하고 주님만을 떠들 때,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그 순간이에요. 그러니까 그때 가야 주의 증인이고 뭐고 나오죠. 어쨌든 죽음을 드러내고 보여준다는 것은 우리의 죄의 들춰냄이에요.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를 계속해서 들춰냅니다. 아, 이 정도면 됐지, 라고 했는데 한 번 더 파시잖아요.

 

사실 말은 이렇게 부드럽게 하지만, 막상 죄가 까발려지는 현장에 우리가 서면 하나님한테 인도해달라고 하는 기도 못 합니다. 죽여 달라는 소리인데 그 고통이 얼마나 크겠어요. 그저 더는 안 된다고 아우성이나 치고, 비명이나 지르고 이제 그러겠죠.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한 자이어야 합니다. 더러운 자는 하나님한테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는 계속 털어내시는 거예요. 탈탈 털어냅니다. 끝까지. 비명을 지르든 말든.

 

우리가 오늘 여호수아를 보는데, 할례이야기를 하는데, 할례와 더불어서 유월절까지, 이것은 하나님의 소유의 표시에요. 너는 내 백성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내게 합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는 거예요. 그리고 그들에게 승리를 주시고, 이 약속의 땅에 정착하도록 하시고, 비로소 애굽에서 탈출한 최종목적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 여호수아의 시대 앞까지는, 아까 말씀이 나온 대로, 초반이라 서론의 설명이 깁니다. 조상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원망을 쏟아내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해서 여호수아를 앞장세워서 이끄는데, 그 앞장세워 인도자로 세운 여호수아조차도 종이었다는 겁니다. 종. 5장 끄트머리에 가면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나고, 누구십니까? 하는 문답이 오가는 가운데, 여호와의 군대장관이라고 하니까 땅에 엎드리고. “주여 말씀만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하면서, 이제 종으로서의 부복을 하는 장면이 나오죠. 거기에 딸려 있는 이스라엘 백성도 다 같이 따라서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종으로 삼고, 그의 인도함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뒤를 따르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끌고 가시고자 하시는 것은, 결국은 마지막 자기 아들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에요. 하나 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에요. 그리스도의 몸이 이런 식으로 하나 되고 모아지고 뭉쳐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할례를 시행하시는 겁니다. 할례를 통해서 거기에 무슨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을 그들에게 보임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알아챔으로 말미암아, 아, 하나님께서 이런 목적으로 우리를 끌고자 하시는 것들을, 이제 알아먹게 하시는 거죠.

 

할례는 어떻게 합니까? 할례? 잘라내는 것이잖아요. 할례이야기는 여러분이 많이 들어보셨죠. 잘라내는 그것이 애굽에서 나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겁니다. 애굽에서 탈출했구나! 애굽에서 벗어났구나! 라는 것을 일단은 증명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할례에 담겨있는 것까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끝까지 가지 않으면, 할례만 남으면 이게 사단이 일어납니다. 일단은 할례를 함으로 말미암아, 아, 전에 있던 애굽에서 벗어났구나, 이제는 애굽사람에서 벗어난 출발점에 섰구나,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잘라내는 그것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할례의 시초에요.

 

약속의 땅에 누가 들어갑니까? 애굽사람으로는 출입금지에요. 못 들어갑니다. 이제 나는 애굽 사람에서 벗어났어? 아직 아닙니다. 아직 아니에요. 아까 말씀을 드렸듯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허황된 꿈이죠. 다 죽이시는 거니까. 그 다음에 할례의 효과는 뭐예요? 이제 잘라냈습니다. 할례의 효과? 잘라내면 피가 나오잖아요. 그 잘라내는 것을 통해서 주님이 보여주시는 것은, 이제 다 죽었다는 것이잖아요. 나는 죽었다.

 

이스라엘 전체를 상대로 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 집단, 집단죽음, 집단살해잖아요. 인종말살정책 뭐 이런 것. 아담의 혈통을 끊어버리는 그것. 근데 그렇게 해서 얻는 효과가 뭡니까? 효과? 본문에 나와 있는 대로 수치를 굴러가게 하는 거예요. 애굽을 벗고 새사람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함으로 그 효과가 최종적으로 드러납니다. 이제 약속의 땅까지 들어가야 돼요. 지금 요단강을 건너서 할례를 시행하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정신없습니다. 중앙에서 북쪽으로 갔다가 남쪽으로 갔다가, 약속의 땅 전체를 휘젓고 돌아다니면서 정복전쟁을 벌여야 돼요. 아직 전쟁전입니다. 최종적으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끝까지 버텨야 되는데, 그들이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사도행전에서 설교를 하면서 할례이야기를 끄집어들이죠. 이 할례가 할례의 언약이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거기까지 이르러야 되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할례 언약을 받고, 이삭에게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고, 온 집안사람들에게 할례를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 할례 행하는 것이 언약의 표징이고 영원한 언약으로 되었다고 땅! 땅! 땅! 결정이 나버렸어요. 그렇게만 하면 할례를 행한 사람은 영원한 언약에 속한 것이 됩니다.

 

근데 그 영원한 언약이 이 땅에서 사라져버립니다. 할례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전히 충격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그게 트라우마가 되어가지고 후손대대로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습니다. 그래서 할례 해야 돼. 할례 해야 돼. 할례 해야 돼... 이러고 있는 거예요. 신약에 가면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행하고 디도에게는 할례를 안 했나요? 순서가 바뀌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누구에게는 할례를 하고 누구에게는 할례를 안 하고 하는 이런 장면들이 나옵니다.

 

우리는 눈여겨봐야 돼요. 이것이 꼭 잘라내야만 되는 것이냐, 안 잘라도 되는 것이냐, 뭐 사람들이 정신없고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광야생활을 끝내고 약속의 땅에 정착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언약을 재개를 하시는데, 자 보세요. 언약을 염두에 두시고 할례를 시행하는 거예요. 할례를 하면 그것이 주구장창으로 끝까지 영원한 언약이 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할례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중에 상황이 바뀌면 할례를 하든, 할례를 안 하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를 않아요.

 

지금 구약이라서 할례를 합니다. 어쨌든 그 할례의 최종효과는 죄를 도말하고, 다 없애버리고, 그리고 수치를 굴러가게 만드는 거예요. 이젠 부끄러움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음을 듣고 어쨌든 살아가는데, 인생 깨지고 처박히든 간에 전혀 부끄럽지 않습니다. 끝난 전쟁이라고 했잖아요. 끝난 전쟁. 남들은 치열하게 전쟁하고 있는데 우리는 끝난 전쟁하고 있는 거예요. 전쟁 끝나가지고 오는 것을 누리고 이제는 쉬기만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믿고 까부는 거예요. 이제 까불기 시작합니다. 할례가 영원히 불변하지 않는 좌표(사물이 처해 있는 위치나 형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지 알고 있는 것이죠. 할례를 어떻게 삼는 거예요? 할례를 대체물로 삼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삼는 거예요. 기표(귀로 감지할 수 있는 말의 외적 형식)로 삼는 거예요. 하나님이야기하고 말씀이야기하면 보이지 않잖아요. 근데 할례를 하라고 했으니까, 딱 자르니까, 표시가 자기 몸에 딱 나잖아요.

 

창세기 17장 13절에 보면 바로 그 살에 영원한 언약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말씀도 완전히 빼박, 빼도박도 못 해요. “말씀도 이렇게 했지. 내 몸에도 이렇게 새겨놨지. 이건 영원한 언약이 나를 통해서, 우리 민족을 통해서 있는 거야. 이건 절대로 변할 수 없어.”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할례언약이 불변의 좌표가 돼버린 겁니다. 이제 언약을 눈에 잘 띄는 기표로 삼은 것입니다. 우리는 말보다 그 이미지가 앞서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잖아요. “봐라. 나 잘랐다. 뭐 바지 내려 볼까?” 뭐, 이러는 거예요. “넌 없지? 난 있어.”뭐, 이런 식으로.

 

기표라는 것은 내가 헤아릴 수 있는 어떤 그 실체를 나타내는 그것이 기표입니다. 그것이 존재나 사물이나 뭐든 간에 나타내는 거예요. 내 손에 보이니까 내 손에 쥐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되기 때문에 그걸 쥐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계속 그 짓을 합니다. 저희의 신은 배요(빌3:19), 라고 했습니다. 내 배 부르게 하는 것이 누구든 상관없는 거예요. 교회든, 예수든, 여호와든, 하나님이든 상관이 없어요. 그것이 부처든, 알라든, 조상신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표에서, 대체물에서 강력한 힘이 나오고 전능함이 나오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기대는 거죠. 내가 이것만 붙들고 있으면, 교회만 붙들고 있으면, 예수만 믿으면, 뭐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주님은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허락받은 양 떠들고 있어요. 오전에 학생들 주일학교 할 때 잠깐 허락이야기를 했습니다. 나귀를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고 하니까, 마가복음에만 그 표현이 나와요. 마가복음 11장 3절에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나귀 주인이 왜 가져가느냐 하니까, 주께서 쓰시겠다고 했다. 아, 그렇다면 가져가라고 이렇게 했다는 이야기죠. 그때 표현이 나귀주인이 허락했다는 거예요. 그 허락한 것이 그냥 허락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허락하도록 허락받으니까 허락함이 나왔다는 거죠.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잖아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천국비유나 씨 뿌리는 비유.., 쭉 비유가 나올 때. 그때 주님의 답변은 그거죠. 천국의 비밀은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지만 저들에게는 아니다, 라는 의미에서 허락이에요. 그러니까 허락받지 않은 상태에서 할례를 했다고 까불면 아무 소용도 없는 거죠.

 

또 하나의 예를 들려고 했는데, 시간이 많이 가서 안 들겠습니다. 우리의 시각적인 인식이나 이미지가 하나님의 말씀을 덮어버려요. 너무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이 강력하거든요. 너무 강력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손에 쥐는 것으로 하늘의 것을 보려고 하는 것이죠. 이런 게임이 있죠. 그 게임 이름을 뭐라고 합니까? 동작을 보고 단어 맞추기라고 하나? 한 사람이 할례라는 단어를 봤다면 말은 안 하고 동작으로만 그 단어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오만가지의 동작을 해서 앞사람에게 전달하고 또 앞사람에게 전달하고 해서 맨 마지막 사람까지 전달되면 그 사람이 단어를 맞추는 겁니다. 그 동작을 제대로 전달했는지 안 했는지, 끝에 갔더니 엉뚱한 소리를 할 수도 있고, 동작을 잘해서 맞출 수도 있고, 뭐 그런 게임이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할례를 시행했어요. 그러면서 그 할례를 통해서 영원한 약속이 있겠다고 살에 표시를 했다고 했습니다. 자, 그러면 거기에서의 키key가 할례가 키에요. 할례로 언약이라는 자물통을 열어야 돼요. 자,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를 행하고 언약 앞에 가서 섰습니다. 언약을 열려고 하는데 언약이 안 열리는 거예요.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이게 열쇠로써 작동이 되지를 않는 거예요. 먹통이 돼버렸어요. 중간에 단어를 동작으로 전달하는데 배달사고가 일어나버렸어요. 제대로 전달이 잘 안 된 거죠.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시행합니다.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그 아기가 뭘 압니까? 뭘 알아요?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줘야 한다니까요. 그 자른 부모가 보여주든지, 주변사람이 보여주든지. 애가 자라가지고 언약을 보여줘! 하는 거예요. 할례를 시행한 자기의 벗은 모습을 봤을 때, 이게 뭡니까? 하면 부모들이 이야기를 해줄 게 아닙니까? “이게 할례언약이고 영원한 언약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여기에 있고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이렇고...” 이런 이야기를 쭉 해줄 게 아닙니까? 그럼 그 애가 “근데 그게 뭐? 그게 어떻게 되는 건데? 보여줘! 보여줘!”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한 그 애가 자라서 물어보는데, 답변을 못하고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 할례가 무슨 소용이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조치를 취하시죠. 신약에 가면 그 할례가 바뀝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로. 골로새서 2장 11절에 보면 그 할례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거기에서도.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에게도 할례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주셨다는 것은 뭡니까?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잖아요.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어요? 그럼 뭐예요? 주신 분이 있는 거잖아요.

 

그럼 할례 받았다는 것으로, 할례 받았으니까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언약백성이다, 라는 이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받았으니까, 주신 분이 있으니까, 주신 분이 왜 줬을까, 그 다음에 어떤 조치를 취할까, 그 끝이 뭘까, 계속 가는 거예요. 계속 가는데 우리 마음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조치하신 그 분이 앞에서 끌고 가시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따라가는 것이고. 이제는 몸에 표시는 그 시효는 끝나버렸어요. 이제는 우리 몸에 새길 공간조차 없습니다. 육은 육이고, 육은 날아가 버리니까 거기에 백날 새겨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게 신약에 오면 그걸 세례라고 하고, 또 그리스도와 연합했다고 표현하죠. 우리의 이 육신의 몸은 다 사라져버리고 할례 표시해봐야 소용이 없고, 이제는 문제가 복잡해졌어요. 단순하게 이스라엘 백성처럼 기억하고, 잊지 말고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해야지. 뭐 이렇게 회상하는 식으로의 시대는 이제 끝나버렸어요. 이제는 회상정도가 아니라 그 새긴 연유를 알아야 되고, 그것을 재현해야 되고 실현을 해야 됩니다. 할례 한답시고 자기 몸에 새겨도 칼로 벤 자국만 남지, 아무 효과가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밀어붙이고, 밀어붙이셨을 때에 할례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이 알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럼에도 물끄러미 살에 영원한 언약이 있다고 하니까, 자기 몸에 할례 행한 것만 들여다보고,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스스로 안위하고, 스스로 위로받고 있으면, 참 상황이 이상한 상황이 되겠죠. 주님 따로 믿는다고 우기는 사람이 따로 노는 거니까.

 

할례가 세례를 통해서 또 연합이 되고, 이렇게 되면은 이제는 노는 동네가 바뀌어서, 그 동네로 인도하신 분에 의해서 주도권도 바뀌었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됩니다. 따라서 할례의 효과를 보기 위해 재현하는 것도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죠. 몸에 새긴 것이 소용이 없다면, 그 이후에 따라오는 부수적이 것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돼버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도 할례를 이야기하고 또 세례를 이야기하면서, 자기 몸짓으로 내가 해낼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을 지속하고자 한다면, 마귀만 좋은 일을 시키는 거죠. 마귀가 얼마나 정교하냐면, 우리가 연기로 하는 것, 억지로 하는 것을 믿음으로 포장시킵니다. “거봐. 할례 행하라고 해서 할례 행했더니 복 받았잖아.” 이런 식으로. 예수 믿고 세례 받아야 한다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 뿌려 세례를 주면 세례가 되는 겁니까? 마귀가 굉장히 간교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안심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이단이 계속 득세하고 살아나는 거죠.

 

제가 동네를 산책하는데, 산책하는 길에 보면 큰 교회가 하나 있어요. 거기가 새로 조성된 곳이라 건물들이 다 새 건물들입니다. 원래 그 교회가 침례교회였어요. 침례교회로 크게 지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교회 간판이 바뀌었어요. 하나님의 교회로. 어머니 하나님이야기 하는 안상홍 쪽에서 건물을 다 사들였어요. 요즘엔 그쪽이 돈이 많은지, 주변의 건물들을 다 사들이고 하는 모양이에요. 어쨌든 그런 이단에 빠지는 심리가 뭘까요? 이단에 빠지는. 2월에 JMS 정명석이라는 사람이 10년 만기 출소를 했어요. 그 사람이 재판을 받는 과정 속에서 형량을 좀 줄이려고, “나는 재림주가 아닙니다.”라고 했어요. 그전에는 재림주, 재림주 라고 했는데. 재림주가 아니라고 부인을 했어요. 그래서 10년을 받고 만기출소를 했는데.

 

자, 그러한 이단사설에, 이단 신학에 빠지는 심리가 뭐예요? 이유가 뭐예요? 우리 주변에도 있잖아요. 이단에 빠진 사람들. 근데 그들이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무지하고 그냥 막돼먹은 사람들이 아니에요. 멀쩡하고 돈도 있고 공부 꽤나 한 이런 사람들이 그런 데에 다 넘어가서 합니다. 사람 사는 것이 그래요. 약하면 약한 대로 눌려 살고 억압된 것에 대한 좌절과 실망이 있지만은, 또 힘세면 힘센 대로, 나름대로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 오는 공포와 두려움도 같이 와요.

 

그러니까 누가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단에 빠지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 다 그런 쪽에 붙어있는 거예요. 거기에 이제 착각하게 만들고 기만하게 만드는 이런 것들이 작동하게 되면 꼼짝 못합니다. 마귀가 이런 것들은 꽉 잡고 있고, 그들을 절대로 옴짝달싹 못하도록 붙들고 있어요. 한국교회를 볼 때, 뭐 안상홍만 이단이겠습니까? 여호와 증인, 십자가마을도 이단취급 하잖아요. 사탄의 전략은 바로 그거예요. 보이지 않는 그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대체하는, 대체물로 삼고 기표로 삼게 만드는 거예요. “봐라. 여기 증거가 있잖아.” 뭐 이런 식으로.

 

흔히 기독교인이 욕먹는 것 중의 하나가 그겁니다. 보여주지는 않고 말만 떠든다고. 참, 십자가마을이 말이 많잖아요. 좀 말이 많습니까? 근데 말을 하나하나 들어보면 전율이 일어납니다. 그냥 말이 아니거든요. 그냥 말이 아니잖아요. 살아있는 말이고, 살아있는 말씀이 운동을 하고 우리를 아프게 하고 찌르고 하잖아요. 그냥 시정잡배들이 이야기하는 농담이고 가십거리가 아니잖아요. 사탄이 그렇게 보이는 것으로 우리를 유혹할 때에, 과정을 무시하는 겁니다. 그냥 결과만 따먹도록 하는 거예요.

 

과정이 무시당하면, 결과만 따먹으면, 뭐 복잡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 사람들하고 아무리 논쟁을 벌여봐야 끝이 안 납니다.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돌아서면 그만이에요. 이단들의 특이한 것 중의 하나가 나가라고,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가죠. 얼마나 강력하게 세뇌를 시키고 보여주는지 안 나갑니다. “우리 목사님은 교회를 나오지 말라고 해. 뭐 그냥 함부로 나오지 말고 아는 사람만 나오라고 그래.” 이게 뭐 대단한 교리고 대단한 복음인 것처럼, 역으로 우리 목사님 좋다고, 교회 좋다고 합니다. 목사들이 그걸 이용해요. 여러분, 아십니까? 그래서 오죽하면 심리학에 물든 기독교, 라는 이러한 책들도 발간하고 많이 팔리고 그렇습니다. 복음에 대한 반응은 어때요? 남아있지를 않잖아요. 그렇죠. 못 견뎌서 다 튀어나가잖아요.

 

이제 설교를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로만? 아닙니다. 실제예요. 실제로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이 세상 사람이고 애굽 사람이에요. 그들에게는 약속의 땅이 없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아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여기가 지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망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이 땅에서 그냥 차지하고 누리고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들을 밀어붙여서 망하게 만들잖아요. 망하게 만드는 그 지점에서 바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만드는 거죠. 피 흘리심으로서 그 일들을, 그 과정들을 다 겪게 만드시는 거예요. 그걸 다 보여주시는 것이고. 주님이 앞장서서 다 가게 하신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망했는데, 나는 이 땅에서 살 궁리를 한다? 그럼 같은 편이 아니에요. 그렇죠. 같은 편이 아니잖아요. 그 자체가 같은 편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잖아요. 십자가야 말로 불변의 좌표입니다.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기조를 계속 유지한 채 계속 가게 되어 있습니다. 보이지 않기에, 보지 못하기에 대체물로 바꿀 필요가 없어요. 십자가를 본 자는 넉넉히 그 본 것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인도하심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저 기다리고 따라갈 뿐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겪어내지 못하면, 할례를 하더라도 아물고 난 뒤에 또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치 않는 그 짓을 또 되풀이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그렇게 했어요. 오늘날 우리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할례의 언약이, 그냥 이것이 진정으로 영원한 언약의 취지대로, 약속의 땅에 입성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할례파를 등장을 시켰어요. 새로운 할례파를. 십자가로 오신, 그 언약의 피로 오신 주로 말미암아 손으로 행하지 않은 할례를,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게 하셨습니다.

 

성경 한 구절 읽고 마치겠습니다. 빌립보서 3장 3절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할례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 받은 줄 알고 구원받은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주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는 그들에게, 주님께서는 당연히 심판하시고 당연히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우리의 몸에 새겨진 것으로 주님 앞에 호소할 수 없고, 내가 예수 믿는 것으로 주님 앞에 내가 예수 믿는 표를, 티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주께서 허락하심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때 우리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오직 주님만 바라볼 수 있고 주님만 기다릴 수 있도록 인도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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