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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8 14:57:40 조회 : 255         
   하나님의 이중작업 171008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하나님의 이중작업(신명기 29:1-4)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7lE9k-t48og, Hit:40
 이근호 17-10-08 15:44 
하나님의 이중 작업

2017년 10월 8일                         본문 말씀: 신명기 29:1-4

(29:1)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사 모압 땅에서 또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이 이러하니라

(29:2)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 목전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29:3)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가 목도하였느니라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29:5)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행케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고 난 뒤에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언약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닙니다. 모압 땅에서 또 언약을 받게 됩니다. 이는 이방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즉 동행하시는 하나님은 전쟁을 벌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재편성하려고 하시려는 겁니다.

인간들은 ‘보는 것’으로부터 진리를 발췌해서 자신의 생존에 도움 주려합니다. 과학이라는 것이 대표적 작업입니다. 관찰을 통해서 조금씩 전체 진리지평을 넓히려 합니다. 이점은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그들은 숱하게 많은 하나님의 기적들을 체험했습니다.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체험들이 하나님의 말씀 진위를 아는 것에 전혀 소용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어떠한 존재인 줄을 몰랐습니다. 자신이 어떤 인간인가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몫으로 남아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그들은 전쟁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과거에 그들이 경험한 것들이 현재에 전혀 보탬이 안 됨을 그들은 느껴야했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모세는 전체 이스라엘을 소집합니다. 전체 대 모세 한 개인입니다. 이 모세라는 인물의 개인은 결코 이스라엘 각 개인과 같은 개인이 아닙니다.

그 당시 하나님 앞에서 중보자 기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로서 그 많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모세 개인을 대신할 개인은 전혀 없습니다. 특별한 개인입니다. 그리고 그 개인은 이스라엘 중 누구보다도 중요한 개인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아는 개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는 곧 각 개인이 무엇을 체험하고 무엇을 경험하느냐로 인하여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누가 대신 하나님 앞에 나타나 있느냐가 중요하고 관권입니다. ‘나를 대신’하기에 그 분 앞에서 나는 관심의 대상에서 소멸되어야 합니다. 이제 그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만년필’입니다. 하나님께서 쏟아놓으신 대로 지상에 필기해야 합니다. 모세와 일반인들의 차이점은, 일반인들은 ‘보기’에 의해서 살아가는 반면에 모세는 ‘듣기’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하심’은 그 당시에 그냥 말 뿐이지만 곧 안가서 자연계를 비롯해서 모든 상황이 그 예언을 준해서 재정렬이 됩니다.

이런 점에서 모세 ‘개인’은 일반인들 중의 ‘개인’과 다릅니다. 모세는 개인주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기에 말씀에 따라 운명이 조정당하게 됩니다. 반면에 일반인들의 개인은 철저하게 이기주의적입니다. 마치 세상은 자기에게 조금도 힘들게 하지 않아야 마땅한 것처럼 여기며 삽니다.

모세는 자기에게 주어진 언약대로 가나안 땅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지 결코 그 땅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모세와 주님이 중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하기’에 따라 모세와 함께 하셨던 주님은 그 뒤 여호수아와 함께 하십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점령하면서 발휘된 모든 것들은 ‘모세의 말’이 아니라 ‘모세 언약’에 의한 것입니다.

하늘에서 우박이 내리고, 해가 멈출 정도로 자연계는 여호수아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모세 언약’의 준해서 진행됩니다. 바로 이 ‘모세 언약’을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 모세가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보기’라는 한계를 못 벗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하기’는 방식으로 세계를 이끄십니다.

그 격차로 인하여, 언약은 인간 세계를 심판을 내리고, 인간들은 자기 중심으로 세상을 보면서 언약을 배척하게 됩니다. 하지만 모세에게 말씀을 주신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들이 하던 모든 것들은 다 ‘무효’가 됩니다. 인간들이 쌓아놓는 모든 업적들은 자신의 행함을 과시하기 위한 손꿉놀이 같은 겁니다.

자기 자신의 그동안 살아온 것에 대해서 남들이 알아달라는 겁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인위적인 겁니다. 남들이 차려놓은 손곱놀이를 위하여 자신의 손곱놀이판을 엎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끌어모아 자기 인생을 꾸려놓았습니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겠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가차없이 부셔버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하기’로 인하여 펼쳐질 세계를 훼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인간들은 기어이 “눈에 보이면 천국이고 지옥이고 믿어주겠다”고 나섭니다. 로마서 10:6-8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는 자는 ‘흔적’이 아니라 ‘증인’이 되는 겁니다.

‘흔적’이란 주어진 대로 받아있는 형편을 말하지만 ‘증언’은 필히 자신의 인격을 동원해서 하나님이 주어진 일에 반항하고 반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탕자’가 되지 아니하면 아버지의 ‘아버지됨’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로마서 10장에서 말씀하시는 바는, 인간들이 천국을 목격하고 지옥을 목격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인격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죄인됨을 인정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결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인간들의 체험위주의 종교성은 도리어 예수님의 죽게한 사례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보는 것’과 ‘말씀하기’의 차이점입니다.

예수님께서의 말씀은 이 지상에서 완결되셨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그 말씀에 준한 예언 실시 차원으로 구원될 자에게 덮치게 됩니다. 바로 이 결속의 관계가 믿음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믿음의 선물에 함몰된 상태입니다. 이런 식으로 인격적으로 성도는 ‘보지 않고 믿는 자’로서 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됨이 무슨 뜻인지를 한시로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7-10-09 08:48 
154강-신 29장 1 - 4절(하나님의 이중 작업 )1710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29장 1 - 4절입니다. 구약성경 308페이지입니다.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모압 땅에서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은 이러하니라,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의 목전에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중 작업을 했습니다. 놀라운 기적을 목격하고도 그것은 너희들의 구원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이 보는 것으로 구원되는 것, 그것이 성립이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보는 것으로, 니가 경험하고 체험한 것으로 구원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깨달으면 구원되는 가. 깨달으면 구원된다는 것은 불교에서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면 깨닫는 것도 안 되고, 눈으로 보는 것도 안 되고, 귀로 듣는 것도 안 되고. 그러면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주 예수님 때문에 되는 겁니다.






제가 웃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해답을 들어보면 알아요. 그런데 이 문제를 던져보게 되면 당황들을 하십니다. “믿어도 안 된다니 큰일 났다. 믿어도 안 돼, 소망해도 안 돼, 사랑해도 안 돼, 교회 다녀도 안 돼, 헌금해도 안 돼. 나, 어떡하지?”






그런데 막상 제가 답을 전해 드렸습니다. “주님의 공로로, 십자가로 구원됩니다.” 라고 한다면, 정말 성령을 받은 사람은 “내가 바보 등신이야, 또 잊어 버렸어.” 이렇게 되고,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글쎄, 예수님이 하신 건데, 내가 어떻게 그걸 내꺼 만듭니까? 그걸 이야기 해야지요.”라고 꼭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그런 소리를 해요. 여전히 아주 절대적 이기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것은 예수님 중심으로 탁류로 휩쓸려가거든요. 지금 홍수 나서 탁류로 휩쓸려 가는데, 같이 주님께서 휩쓸린 데로 휩쓸리면 되는데, 꼭 거기서 자기중심을 찾으려고 해요.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서 뭐할 건데요? 니만 좋으라고? 정신 차려서 뭐할 건데요?






오늘 본문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마는, 2절이 중요합니다.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이게 중요합니다.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개개인은 완전히 개무시 당한 겁니다. 온 이스라엘을 소집했어요. 소집하고 그거 전체를 모세와 일대일 대응시킵니다.






너희들의 모든 운명은 바로 내 안에 있느니라. 내 안에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모세 지가 구세주도 아닌데” 라고 비아냥거리지 마시고 그 당시 모세 안에 그리스도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생각해 보는 게 아니고 실제로 그래요. 모세 안에 그리스도 있으면 모든 사람은 모세를 보면 안돼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이 구원에 방해가 된다는 겁니다. “에이, 저거 모세네.” 이러면 안돼요. “어, 들리는 게, 모세의 사적인 견해네.” 이러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리고 “모세 니가 하는 말을 내가 깨달을게.” 이것도 안돼요.






왜냐하면 모세의 의견에 깨달아 버리면 공감이 되는 겁니다. 공감이 된다는 것은 1+1 = 2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달랑 2명만 구원 받게 되요. 그게 아니고, 깨닫는 나 말고도 다른 사람이 구원된다고 여러분들이 믿으신다면 니 깨달음조차도 이거 별 의미 없는 거예요.






오전에 이야기 했지만 시체가 깨달아 봐야 그거 뭐 할 건데요? 인생은 무효입니다. 모든 게 무효예요. 60, 70, 80까지 살았잖아요? 돌아보면 다 무효, 무효예요. 아이들 갖고 노는 장난감 중에 이렇게 쌓는 게 있습니다. 나무토막을 블록처럼 쌓아요. 쌓아 놓고는 밑에 손으로 쳐버리면 다 무너지잖아요.






인생 자체가 이렇게 70, 80까지 사는 것은, 그게 “니 언제 가서 그게 무효인 것을 언제 알래?”라고 계속 기회를 주는 겁니다. 나이 80돼도 무효인지 모르고, 90돼도 무효인지 모르고. “나는 무효가 아니야”라고 하는 순간 그 사람은 개인주의에 빠져있는 사람입니다. 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을 모세 앞에 소집한 것은 하나님이 모세 없는 이스라엘은, 이거는 이스라엘이 무효입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모세 속에 그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한 거예요. 각자 “나 잘 났습니다”하고 자랑질 하라고 모세 앞에 소집한 게 아니고, 표창장 주려고, 개근상 주려고 “오늘의 상장 받을 사람은..” 이런 것 주려고 모집한 게 아니에요.






너희들 전체와 모세 하나와 누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느냐 한번 보란 말입니다. 이걸 신약으로 하면 예수님 한분과 그리고 예수님 뺀 모든 인간, 누가 하나님 뜻을 아시는 분입니까? 누구의 아버지입니까? 예수님의 아버지예요. 아들과 아버지와 아는 그 내용이 흘러넘쳐서, 흘러넘치는, 베푸셔서 흘러넘치는 그 콩고물 때문에 구원받는 겁니다.






그것을 제가 ‘인간은 어떻게 구원 받는가, 주님의 공로로 구원 받는다.’는 그 이야기예요. 그 콩고물이 대단한 콩고물인데 그 콩고물이 왔을 때, 이스라엘은 땡 잡은 겁니다. 인위적이지 않아요. 제가 외손녀 오고난 뒤에 60년 만에 처음으로 소꿉놀이를 해 봤습니다.






“아롱이 다롱이 이리와” 인형을 말하는 거죠. 이불 덮어 주고, 베개 해 주고, “아롱이 다롱이 잘 자라”하면서 톡톡 다독거려주는 데, 외손녀가 ‘에이’ 하고 휘저으면서 안 논다고 하니까 나의 인위적인 소꿉놀이가 개판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외손녀는 기저귀를 차고 있어요. 아직도. 그러니까 인생은 뭐냐, 기저귀로부터 기저귀로 끝나는 거예요. 오늘 기저귀 차신 분 참석 안했는데, 인생이라는 것이 기저귀로부터 기저귀로 끝나요. 무효라니까요, 무효. 아무것도 아니에요. 시편에 144편에 나오죠.






“주여, 인생이 무엇이 관대...” 그냥 버려도 되는 쓰레기인데, “왜 쓰레기에서 그것을 하나 끄집어 내십니까, 뭐 할라고, 뭐 할라고 그걸 끄집어 냅니까?” 구원해주려고 끄집어 낸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만년필로 쓰기 위해서, 볼펜으로 쓰기 위해서 끄집어 낸 겁니다.






모세처럼. 모세하고 예수님 하고 중첩되어 있지만 사실 모세 입장에서는 모세와 예수님 사이는 거리는 멀어져 있죠. 그걸 다른 사람들은 모르죠. 모세가 서 있으니,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중보자로 서 있는 겁니다. 그런데 모세 입장에서는 결국은 모세의 자아는 주님 앞에서 자기는 피해야 되요. 이제는 은퇴해야 되요. 왜? 자기는 쇠하고 주님은 흥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모세는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갑니다.






모세가 들어가는 땅이 아니고, 모세 언약이 들어가죠. 모세 언약을 다른 말로 하면, 이게 어려운데요, 보이지 않지만 유령처럼 귀신처럼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 하는 그 분이 앞장섭니다. 근데 그 분이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 않는 데, 자연 세계가 보이지 않는 분에게 순종합니다. 여호수아가 전쟁하러 갈 때에 갑자기 우박이 떨어진다든지, 해가 멈추어 버려요.






인간들의 소꿉놀이 수준이 아닙니다. 평생 동안 인간들이 60년, 70년 한 것이 뭐냐, 자기가 하는 자기 소꿉놀이에요. 소꿉놀이 해가지고, 뭐 아파트 하나 장만 해가지고, 뭐 인테리어 해가면서, 뭐 옥상에다가 인조 잔디 깔아가지고, 뭐 영화 본다고 딱 누워가지고 있어보니, 자기 아버지 와가지고 돈 안 아끼고 이런 거 왜 하냐 하고, 또 싸우고, ‘젊을 때 돈 벌어야지, 이런 짓 하면서 돈 낭비하느냐’하면, ‘아버지하고 나하고는 하여튼 사상이 안 맞아’ 하면서 싸우고, 두 개의 소꿉놀이의 대결, 충돌이 일어납니다. 두 개의 소꿉놀이의.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합당한 종으로 살았습니다. 본인이 못 들어가는 거예요. 본인이 들어 갈 수 가 없어요.






그만한 어드밴테이지(advantage)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 만한 권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너 안 돼” 모세가 아니라 모세 언약이 들어가야 돼요. 그래서 여호수아는 모세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고 모세에게 내려 준 하나님의 약속 말대로 움직여서, 여호수아가 땅을 차지해야 그 땅은 모세의 땅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의 땅, 하나님의 땅, 약속의 땅이 되는 겁니다.






언약의 땅이 되는 겁니다. 근데 언약의 땅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 보면 많은 기적을 보여 주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적을 봤으면 사람들이, 이제부터 어려운 거 시작하겠습니다, 봤다면 사람들이 ‘와, 이제부터 정신 차리자, 깨닫자’ 이래되는데, 여러분 구약 읽어봐서 알다시피 백날 기적 베풀어도 돌아서면 그만이에요. 돌아서면. 그 후손들은 아주 개판입니다.






나중에 사사기, 여호수아 보면. 우리는 납득이 안 되죠. ‘왜 이러지? 도대체 얼마나 매를 맞으려고 하느냐?’ 매 맞으면 그 때 뿐이에요. 돌아서면 또 이방신 섬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주님은 인간이 보고 있는 것을 같이 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은 ‘말하기’로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말하기로. 이거 수요일날 언급했는데, 상당히 어려워요. 주님은 말하기예요.






인간은 보기예요. 인간은 보는데서 진리를 구축하고 주님께서는 말부터 먼저 내세워놓고 말부터 먼저 내세우니까, 지금 눈에 보이는 세계는 주님의 말씀하심, 예언이죠, 그 예언대로 헤쳐모여를 하십니다. 다시 위치와 배열을 다시 조정하는 겁니다.






마치 아이들이 매스게임을 할 때, 매스게임 구성원들이 한 천명이라면 천명은 제한되어 있지만, 그때의 에피소드에 따라서 움직임을 달리하게 되면 다른 모습들을 보여 주잖아요. 그것처럼 주님의 말하기에 따라서 기존의 해와 달과 인간 모든 것은 전부다 헤쳐모여가 되는 겁니다.






근데 인간은 눈에 본다는 것은 그냥 보지 않고 그 보이는 것을 어디로 가져오느냐 하면, 자기가 잘났다 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지가 본 것을 차곡차곡 안에 블록 쌓듯이 창고에 쌓아놔요. ‘나는 이런 체험했다, 이런 거 봤다, 그러니까 나 믿음 있다’ 자꾸 이렇게 한단 말이죠.






그러한 일에 오류가 있음을 신약 로마서 10장에서, 10장 6절 ~ 7절에 보면 거기에 나와 있습니다. 이 대목이 굉장히 어려운 대목인데, 제가 한번 읽어 보면 이 말이 무슨 말이신가 잘 모르실 거예요.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로마서 10장 6절에 보게 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이와 같이 말하되 내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하니, 올라가겠다 하면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지옥이죠, 지옥에 내려가겠다 하지 말라하니, 내려가겠다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뭐 한 번 더 읽어 드리고 싶지만 시간이 아까워서 못 읽어 드리고요, 읽어 드려봤자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하는 거예요. 분명히 여러분 갖고 있는 성경책 속에 로마서 10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넘어 가기로 가결 할 까요? 재직회 3분의 2로? 이 말은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천국 있다고 하니까, “천국 보여주면 갈게.” 그 이야기예요. 지옥이 있다고 하니까, “지옥이 일단 내가 보고, 인간은 보고해야거든요, 내가 보고 판단할게.”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아, 지옥의 불심판 무섭구나, 나 지옥 안가야지. 아, 천국의 생명수 좋다, 거기 가야지.’ 하면서 보고 믿겠다는 겁니다. 보고.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다 실패했다는 겁니다, 구약에서. 로마서 10장이야기, 유대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사람이잖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고 믿겠습니다. 체험케 하면 믿겠습니다. 경험케 하면 믿겠습니다.” 하는 것이 전부다 실패로 끝났다는 거예요.






어떤 교회 장로님들 대표 기도하는 거 들어보면요, 대표기도 내용이 성경내용 거의 없어요. 성경을 알아야 뭐 성경내용을 하지, 안의 내용이 뭐냐 하면은, 특히 재건파 같은 경우에, “우리 교단은 옛날 일제 시대 때, 순교 안 해가지고, 순교 안한 그 덕으로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이 교단을 아직까지 유지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선배들처럼 우상숭배하지 않고 순교하던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지금 교단 자랑질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장로님 기도에. 그거는 재건파 교회고, 재건파 아닌 교회는“이 교회하기 전에 옛날에 돌아가진 우리 아버지가 수천 평, 수만 평 내가지고 그 덕분에 하늘나라 확장되어 가지고 이렇게 수만의 영혼들이 살아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젊은이들도 본받아 가지고 아낌없이 바치게 하옵소서.”뭐 주로 그런 내용이에요.






그게 교회 붙들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교회는 눈에 보이거든요. 말씀은 차단되고 교회는 눈에 보이거든요.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데 무슨 수로 믿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하고 헬라인들은 지식을 원하다는 말이 있죠.






유대인들은 옛날 모세가 광야에 있을 때, 하늘에서 만나를 주셨다는 거예요. ‘눈이 내리네’ 하듯이. 하늘에서 만나가 막 내리면 믿지 말라고 해도 믿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하면서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 가지고 5천명을 먹였잖아요.






그 대목도 따져보면 정말 재미있어요. 돈까스 5천 인분 트럭에 실어 가지고, 푸드 트럭에 실어 가지고 5천명 줬으면 사람들이 “이거 어디서 났습니까?” 이래 안 물어볼 거예요. 5천 인분이 와서 5천명 먹인 거 하고, 달랑 1인분도 안 되는 거 가지고 5천명 먹일 때, 사람들은 “이거는 기적이다, 이거는 기적이야.”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들은 그것이 바로 한 분에게 나왔다는 사실을 모를 겁니다. 한 사람에게. 받아 챙긴 것만 생각하고 예수님 한 분에게서 왔다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그들은 받아먹었잖아요. 체험이죠. 그러나 그것은 경험한 거고 보는 거예요. 니가 나를 따름은 육으로 배부른 까닭이에요.






그러나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제부터는 이 모든 말씀이 보이는 것을 무효화 시키고 이제는 말씀에 의해서 새롭게 모든 것이 재 정돈 될 건데, 그 말씀이 이 세상 모든 돌아가는 것이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는 그런 차원으로 새롭게 모든 게 구성 될 거예요. “이걸 믿느냐”하시니까 모두들 “안뇽~”하고 다 가버렸습니다.






다 가버렸어요. 자기 아버지 장로가 돌아가시면서 땅 오천 평 바쳐가지고 그 돈 가지고 세운 교회, 그 교회에, 뭐 부르지도 않겠지만, 내가 가서 “여러분 이 교회 우상입니다. 교회 보기 때문에 여러분은 복음이 안 보이는 겁니다.”하게 되면 나갈 때 차비도 없어요.






‘어떻게 교회를 모독하느냐’ 하는 겁니다. 모독을 당해야 구원을 받지요. 모독을 당해야. 뭔데 모독을 안 당합니까? 지가 뭔데 모독을 안 당해요? 모독을 당했다는 것은 개인주의예요. 개인주의. 로마서 10장이 어려운 이유는 뭐냐 하면 나는 천국을 가고 싶다고 기어 올라오지 말고, 지옥 보고 싶다고 땅 밑에 내려가지 말고, 주님께서 자동적으로 주님 앞에, 니 앞에 뭐가 있느냐, ‘니 앞에 말씀이 가까이 있느니라’ 라고 8절에 나와요.






말씀이 이렇게, 로마서 10장 8절이 이렇게 중요한 겁니다. 10장 6절, 7절에서 눈에 보이면 믿겠다는 사람에게 똑바로 이야기 합니다. 말씀이 너희 가까이에 있는데 그 말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인격이 들어 있어요. 예수님의 인격이에요. 예수님의 마음이란 뜻이죠. 예수님의 마음, 아픈 마음이 들어있어요.






그 말이 뭐냐 하면 인격 대 인격이 만나자는 말은 “헌집 다오, 새집 줄게”라는 말이에요. 쉽게 말해서 내 몸과 주님의 몸을, 주님의 마음을 바꿔치기 하게 되면, 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주님의 몸이 되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그릇이 되요.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고요.






그런데 눈에 보이는 그것을 계속 쥐고 있는 사람에게는요, 성경을 휙 하고 덮어버립니다. 다음에 진도 나가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서 덮어 버립니다. ‘역시 천국을 봐야지, 사도바울만 삼층천이고 나는 뭐... 누구는 무시뿌리 주고, 누구는 인삼뿌리 주나, 그 사람은 보여 주고 나는 왜 안보여 주냐, 맨날 사도바울만 보여주고 나는 안보여 주고.’






“그러면 육신의 가시도 한번 심어줘? 육신의 가시 한번 심어줘? 빼고 싶어도 못 빼는 난치병” 턱에서 종양 올라와 가지고 남은 중학교 친구 다 죽이는 그런 사태 한번 일어나게 해줘요? 처참한 사태 아닙니까? 자기 딸 친구를. 아버지가 딸 키웠다고, 뭐 어금니가 행복한 가족이라고 칭찬받고 방송에 나왔던 그 인간이 딸 친구를 죽였어요.






만약에 내가 그 입장이라면, 내가 난치병, 불치병 걸려가지고 참다 참다 못해서 신에게 도전하듯이 “에이, 니 인생 내 인생 다 조져버려야지”했다면 과연 그 영혼 구원 받겠습니까? 갑자기 또 해답이 난감해 집니까? 초반에 했는데, 구원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받는 거라고.






참 내가 얼마나 참으리요. 얼마나 이야기해야 아시겠습니까? 자신의 처참한 지경까지 이르지 않은 상태에서 구원해 주세요라고 우리가 요청할 권리가 없어요. 어금니에 종양이 나든 간에 어깨에 뭐가 나든 간에 그건 주님의 몸이니 주님 맘대로 하는 거예요.






내 몸 내가 간수해서 구원받는 거 아닙니다. ‘목사님은 우리를 너무 경멸 한다’고요? 자신이 경멸하기 이전에 주님이 먼저 여러분을 경멸한다는 사실을 아셔야 돼요. 왜냐면 우리가 먼저 예수님을 경멸했잖아요. 주는 대로 받아야지요. 우리가 주님을 모독했잖아요.






필요치 않다고. 돈보다 더 소용없다고. 돈이라는 재물이 중요하지 예수라는 인격은 필요 없다고. 우리는 맨 날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교회를 안 나오는 거예요.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없다고요. 말은 안하지만 뻔히 다 알지요, 장사 한 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나 보다 더 중요한 것 없다는 사고방식 때문에 교회 안 나오는 겁니다.






예수 그까짓 것 뭔데. 내가 더 중요한 데.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깨닫지 않게 한다는 건, 니가 전쟁을, 니가 할 수 있는 전쟁이 아직 안치러졌다는 겁니다. 깨닫는 것도 믿음도 전쟁 이후에 전쟁의 승리자가 우리에게 선물로 믿음을 줘야 돼요. 내가 사탄 이긴다고 나서면 그건 돈키호테입니다. 지나가다 풍차보고 덤비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인간은 소꿉놀이 하는 겁니다. “아롱이 다롱이 베개하자” 내가 이러면 우리 외손녀한테 칭찬 좀 받을 줄 알았지. 외손녀가 휙~하고 치워버렸습니다. 내 소꿉놀이가 레벨이 격이 낮아서. 이걸 응용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날 알아주세요. 나는 문재인 대통령, 대통령까지 한 사람입니다.”하면 “그건 니 소꿉놀이고” 안철수 소꿉놀이, 보수파 소꿉놀이, 전부다 지 소꿉놀이 벌려놓고 “자 날 알아주세요”이거죠. 세상, 인생이 뭡니까? 이게 전부예요. “내가 자식 잘 키웠습니다. 나에게 박수 쳐 주세요.” 자기가 소꿉놀이 벌려놓고 그거 알아달라는 겁니다.






아이를 안고 왔는데 “아이고 이쁘다, 똑똑하게 생겼다” 하면 기분 좋고, “이런 게 어디서 나온 거야?” 하면 욕 나오고, “어디서 반찬이 이런 거 나왔어?” 하면 욕 나오고. 각자의 소꿉놀이 벌려놓고, 서로 누가누가 잘났나 그 짓 하다가 지옥가시렵니까? 사실은 이방인들이 한계가 그것뿐이에요. 그거 하다가 다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할거냐? 마태복음 18장 20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내가 그들 중에 있느니라.” 여기 내 이름이, 주의 이름이 뭐냐, 전쟁하는 이름입니다. 지금 여기에 신명기 29장 1절에 보면 “내가 호렙산에서 말씀 주었고 그 다음에는, 이중 작업이죠, 그 다음에는 모압땅에서 그들과 세우신 언약이 뭐냐 하면 호렙산에서 세우신 그 언약 말고, 그 다음 언약은 싸움에 나서는 언약입니다. 싸움에 나서요.






이방인과 싸우면서 나중에는 뭐냐, 이스라엘과 싸우시는 여호와의 이름, 다른 이름으로 싸워서 이미 승리한 이름 외에는 우리가 구원받은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싸우시는 것은 온 인류, 아담의 모든 인류를 상대로 홀로 싸우셨습니다.






그게 뭐냐, 아담의 몸과 그리스도의 몸의 교체작업이에요. 아담의 몸과 그리스도의 몸의 교체작업입니다. 접속이죠. 충돌입니다. 우리가 그냥 기적을 받으면 흔적이에요. 이번에 겨울 수련회 때 제목을 흔적과 증언으로 일단 정해봤는데, ‘야, 이건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 흔적과 증언의 차이점이 있어요.






흔적은 그냥 주어진 것이라 반발이 없는데, 이 흔적이 인격화 되어서 증언 하려면, ‘내가 꼭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하겠습니까?’라는 반발이 나옵니다. 반발을 거쳐야 우리가 증인이 되요. 반발이 없이 그냥 흔적이 되어 버리면 멸망한 이스라엘과 똑같이 되어가지고, ‘뭐 주님을 체험했다’ 하면서 그냥 끝나요.






그러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반발을 경유해야 돼요. ‘나 이 짓 못합니다, 주여, 나도 나의 각오가 있고 내 자존심이 있습니다. 이거 못합니다.’ 그럴 때 ‘고것 참, 증인으로 적당하네.’ 그리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였잖아요. 체포했잖아요. 그런데 증인 되었잖아요. 열 두 제자가 몽땅 다 예수님 배반했잖아요. 그런데 그들은 사도가 되었지 않았습니까?






잃어버린 증인이 있어야, 얻은 양이 되는 겁니다. 집나간 탕자가 되어 봐야, 아들다워요. 집 가출하지 않은 맏이는 소용없어요. 탕자가 되어야, 아버지를 정말 아버지로 제대로 깨닫게 됩니다. 그 싸움이라는 것. 나의 싸움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내가 이길 수 없는 싸움. 어떻게 죽음을 이기고 사망을 이깁니까? 어떻게 영생의 나라에 들어갑니까?






그 모든 것을 모세처럼 소집시켜 놓고, 대신하고, 그 분이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그 분이 말씀을 하시게 되면, 그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이 바로 주님의, 내가 말씀을 믿는 게 아니고, 말씀이 나를 덥쳐 버리면, 그 덥침에 합류되어서 나는 주님의 믿음에 증인이 되는 겁니다.






내 믿음에 증인이 아니고, 주님은 이런 식으로 세상을 살아서 승리했다는 것을, 변변치 않은 우리,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 같은 우리, 시체에 불과한 우리를 가지고, 주께서 부리시고, 활용해 주시니, 이 신분은 천사도 부러워한다고 했거든요. 천사도 부러워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말씀드린 것은 로마서 8장의 말씀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생각컨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기저귀차는 걸로 끝나지만, 그것도 고난이지만, 그러나 주께서는 그러한 썩어질 우리를 주께서는 주님의 고난에 참여 시켜가지고, 내가 고난 받는다가 아니라 내 속에서 주님은 이런 못난 놈, 아주 못난 우리를 위해서 아주 고생하셨다는 것을 우리의 생에를 통해서 보여 주면서, 보여 줄때, 우리는 이 세상에 일말의 미련이나 이 세상에 대해서 유혹 받지 않고, 미련두지 않고, 떠나게 되는 나그네 삶, 성도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몸이 교체된 걸 몰랐습니다. 아직도 이 몸, 내가 개선하고 훌륭한 몸 되어서 하늘나라도 가서 자랑질 하려는 이 음흉한 이기주의적, 개인주의적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주님 십자가 앞에 소집당하게 해주시고, 주님 공로로 구원되었음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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