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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5 11:44:14 조회 : 86         
   [일반]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이진우역 (경기도 파주 한길사: 2018)

1958년 작품이다.

저자 한나 아렌트(1906년 10월 14일 ~ 1975년 12월 4일 독일 사상가)는 역사적인 사상들을 조망하면서 ‘인간의 조건’을 ‘노동’과 ‘작업’과 ‘행위’로 분류시켜 놓고 시작한다. 이런 시도로만 혼선으로 얼룩이 진 사상들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노동’은 인간 신체의 생물학적 과정과 일치하는 활동이다. 신체의 자연발생적 성장, 신진대사와 부패는 노동에 의해서 생산되어 삶의 과정에 투입된 생명 필수재에 묶여 있다. 노동의 인간의 조건은 삶 자체다. 곧 사용되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시용’과 ‘소비’를 구분한다. 소비되지 않고 사용되는 것은 사물계에서 사라지게 마련이다 는 것이다.

세계의 영속성과 지속성을 보장하는 것은 노동생산물이 아니라 세계의 일부로 간주되는 작업생산물이다. 영속성과 지속성이 없이는 세계는 가능하지 않는다.

‘작업’은 인간의 실존에 비자연적인 부분에 상응하는 활동이다. 인간의 실존은 ‘인간 종’의 영원한 순환에 완전히 들어맞지 않으며 개별적인 인간의 사멸성이 인간 종의 불멸가능성으로 보상받지도 않는다. 작업은 모든 자연적 환경과는 분명하게 다른 ‘인공적’인 사물체계를 제공한다. 각각의 개별적 삶은 그 경계 안에 자리 잡고 있지만 이 세계 자체는 개별적 삶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이를 초월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 작업의 인간적 조건은 세계성이다.

노동과 작업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마르크스의 작업이다 고 저자를 밝힌다. 마르크스는 모든 작업을 노동으로 이해하기에 사물을 세계적이고 객관적인 실재로 생각하지 않고 노동력의 결과물이자 삶의 과정에 작용하는 기능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노동생산성도 사물화하여 객관적 실재에 합류시키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기껏 해야 인간이 ‘노동하는 동물’에 지나지 않는 이론이다. 인간의 사회는 인간의 작업은 -노동 차원에 머물 듯이 - 단순한 부의 축적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간다는데 의의를 둔다.

이 ‘함께’는 곧 분업을 지칭한다. 인간은 작업을 통해서 ‘도구적 동물’로서의 자질을 발휘하지만 이 와중에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하기에 도구화된 자기 자신이 곧 자신의 목적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세계가 곧 도구나 수단들만 넘쳐나는 세계라는 말이다. 이것은 인간이 진정으로 ‘사유하는 자’가 되지 못함을 뜻한다.

사유를 대신하는 것이 시장에서의 교환이다. 교환의 보편화에 동원되는 것이 돈이다. 하지만 돈은 그 자체만으로 일체의 상대적 척도를 모두 뛰어넘는 독자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다.

여기서 돈과 예술작품과 비교해보면 그 한계가 확연히 드러난다. 예술작품도 사물이기는 하지만 작품을 빛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사유능력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사물과는 달리 범세계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그 증거가 바로 예술작품은 영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죽을 운명을 갖고 태어난 인간이 거주하는 인공세계에서 예술작품의 영속성은 블멸성으로 나타난다. 살아있는 정신이다. 사유는 인식과 다르다. 논리적 추론과도 다르다. 실용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 속에 내재되어 있는 세계 불멸성을 발산하는 것이 곧 예술작품이다.

인간에게도 이런 불멸성이 ‘활동적 생명’을 통해서 나타낼 수 있다. 인격과 결부되어 나타나는 것이 곧 ‘행위’이다. ‘행위’는 사물이나 물질의 매개 없이 인간들 사이에서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유일한 활동이다. 행위는 다수성이라는 인간의 조건, 즉 한 인간이 아니라 다수의 인간이 이 지구상에 살고 세계에 거주한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모든 사람에게 의미 있는 공동의 세계에 관해 논의하는 기초적 활동을 말한다. 행위는 노동의 필연성과 작업의 도구성, 그 어느 것도 절대화되지 않도록 하고 동시에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도록 만드는 인간의 기초적 활동이다. 이렇게 노동의 활동은 생명의 조건에, 작업의 활동은 세계성의 조건에, 행위의 활동은 다원성의 조건에 부합한다.

이 세 가지 활동과 각각의 조건들은 인간실존의 가장 일반적인 조건, 즉 탄생과 죽음, 탄생성과 사멸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노동은 개인의 생존뿐 아니라 종의 삶까지 보장한다. 작업과 그 산물, 즉 인간의 인공물은 유한한 삶의 무익함과 인간적 시간의 덧없음에 영속성과 지속성을 부여할 수단을 제공한다. 행위가 정치적 조직의 건설과 보전에 참여하는 한 그것은 기억의 조건, 다시 말해 역사의 조건을 창출하는 것이다.

오직 행위만이 인간의 배타적 특권이다. 짐승도 신도 행위능력은 없다. 행위만이 타인의 지속적인 현존을 전제조건으로 삼는다. 저자가 행위를 최종적인 인간의 조건으로 진지하게 다루는 이유는, 인류의 영속성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번지며 나갈 때에 오직 ‘행위’만이 이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고대의 철학자 플라톤은, 행위의 산물인 인간사를 진지하게 취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행위는 무대 뒤에 보이지 않는 손에 조종되는 인형의 동작과 비슷하며, 인간은 일종의 신의 장난감처럼 여겼다. 역사는 인간 때문에 존재하지만 분명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난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즉 이야기의 주인공은 있으나 저자는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정치적 동물일까 아니면 사회적 동물일까? 최초의 철학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정치적 동물이었다. 왜냐하면 사람이 동료와 함께 사는 것은 동물에게 있는 특성이다. 하지만 도시국가의 발생은 가족이나 씨족과 같은 사적 생활이 아니라 두 번째 삶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적 삶을 부여받았음을 의미한다.

이제 도시 국가에 사는 시민은 두 가지 존재 질서에 속하게 되고 그의 삶에서 자신의 것과 공동의 것을 분명하게 구분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동물로서의 견지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도 아닌 ‘사회적 영역’의 출현으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이해하게 되었다.

사회의 출현은 가정의 문제가 공론 영역의 밝은 곳으로 이전된 것을 말한다. 공동세계 밖에서 오직 ‘자신의 것’의 사생활로 일생을 보내는 삶을 ‘백치의 삶’이라고 규정한 그리스인들의 생각과도 다른 것이며, 사생활은 공적존재로부터 일시적 피난처일 뿐이라는 로마인의 생각과 다르다.

근대 개인주의로 인해 사적 영역이 매우 풍부해졌다. 근대인의 사생활은 정치적 영역이 아니라 사회적 영역과 예리하게 대립하고 있다. 사회가 사생활에 침투하는 것은 정치적 영역에서의 침투가 아니라 사회적 영역의 침투를 뜻하는데 이는 사회가 인간의 마음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왜곡하고 인간의 가장 내밀한 영역까지 들어옴에 대한 극력한 반항이 작용한다.

사회의 부상과 가족의 쇠퇴가 놀랍게도 시기적으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통해, 사회는 언제는 그 구성원이 하나의 의견과 하나의 이해관계만을 가질 수 있는 거대한 가족 구성원인 것처럼 행동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이미 현실로 장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회는 평준화를 원한다. 이것을 ‘순응주의’라고 부른다.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비슷하게 행동하게 되고 더욱더 다른 행동에 대해서 관영하지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개인에게는 불행한 것이지만 행동주의에 관한 진리이고 또 법칙의 타당을 보여준다. 이것은 통계학의 근거가 되게 변동을 평준화하게 한다.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이끌고,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화시키는 하나의 사회적 이익이 존재한다고 가정한 자는 자유주의 경제학들이었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손’을 상정한다. 정치는 이 사회성에서 출발한다. 즉 ‘보이지 않는 손’은 익명에 의해 지배받는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탁자가 그 둘레에 앉는 사람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듯이 사물의 세계도 공동으로 그것을 취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던 두 사람은 더 이상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개인 소유화할 수 없는 그 무엇에 의해서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서 소유와 부가 동일시되고 다른 한편으로 무소유와 가난이 동일시됨으로써 오해의 여지가 많아졌다. 전통적으로 소유는 신성한 것이지만 부는 신성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원래 소유, 혹은 소유권이란 자기가 속해 있는 그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가지고 정치적 조직체에 소속되는 것, 즉 공론 영역에 구성되는 요소였다.

따라서 시민으로의 추방은 단순히 그의 재산의 몰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처 자체의 실질적 파괴를 의미했다. 실존의 박탈이었던 것이다. 즉 아무리 가난해도 공적 영역의 실존만큼은 훼손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하지만 외국이나 노예의 부는 아무리 거부가 된다 할지라도 자동적으로 이런 시민으로서의 소유권은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적 가정이 신성한 이유는, 탄생과 사멸이라는 인간의 지혜 이전의 사태를 간직하고 있는 처음 자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예처럼 자기 소유의 근원적 사적 장소를 갖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래서 옛날의 부는 돈의 많음이 아니라 노예의 많음을 뜻한다. 노동에 소요되는 활동을 줄이고 공적 생활에 전념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 당시 사회법이란 곧 자유민과 노예를 가르는 담벼락 같은 기능을 위해 만들어졌다. 담이 없으면 진정한 정치적 공론이 존재하는 도시 국가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해방된 노예는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아무리 많은 노예가 해당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노동자는 되는 것은 공적으로 등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서 경제적 생산성이 중요하게 등장했다. 가치 기준이 되었다. 마르크스가 등장하므로 서 사적인 것은 모두 사회적 생상선 발전에 방해할 뿐이기도 사적 소유권은 사회 전체의 부의 증대를 위하여 무효화되어야 하는 주장을 하게 된다.

옛날 봉건주의 사회에서, 통치는 왕의 일이고 소유는 신하의 일이었다. 그래서 왕의 의무는 신하의 소유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연방’이라는 것도 공동의 부를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부도 오늘날에는 ‘사용가치’가 상실하고 시장에서 ‘교환가치’로 바뀌므로 서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되었다. 항상 변하는 교환가능성은 돈이라는 공통분모와 관련을 맺음으로서 단지 일시적으로만 고정될 수 있다. 일시적이 아니라 영속성을 지니려면 돈을 자본으로 바뀌어야 한다.

사적 소유는 안정적 구조의 영속성을 통해서 고유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의 영속성에서 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지속적인 부의 축적과정이 없다면, 부는 즉시 사용과 소모를 통해 분해된다. 따라서 돈은 자본이 되어야 살아남는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서 새로운 소유개념이 자리 잡게 되는데 그것은 사회가 최종 소유권을 갖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한 신체적 힘을 소유한 개인이 된다. 즉 사회에서 ‘자신이 실존하는 구체적 장소’로서의 ‘사적 소유’개념은 폐지되는 것이다.

노동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이라든지,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작업)이 아니라 사유(행위)하는 인간으로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 안에 ‘용서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인격이다. 인류가 짊어지는 환원불가능성과 예측불가능성의 짐을 지고서는 인류를 지속력 있게 가져갈 수 있는 이유는 ‘행위’ 자체가 복구하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용서는 보복의 정반대다. 보복은 아니더라도 무한히 잔인하게 계속되는 것을 끝낼 수 있는 방안은 있다. 그것은 처벌이다. 처벌할 수 없는 것은 용서할 수 없고,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처벌할 수가 없다. 처벌과 용서는 둘 다 뭔가 무한히 계속되는 것을 끝내려는 의도를 지닌다. ‘끝나지 않음’이 주는 잔인함을 용서, 혹은 처벌을 받아들이므로 서 끝내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가지고 ‘정치적 우애’라고 말했다. 이 우애 안에서 약속을 맺는다. 협약을 한다. 이것이 인류를 지속적으로 버텨내는 안정적인 힘이다.

어거스틴 사상에서 중세 시대에는 관조만이 유일하게 자유로운 삶의 방식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행위를 포함한 다른 모든 활동보다 관조가 우월하다는 생각은 기독교에서 유래하지 않는다. 그 기원은 플라톤의 정치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세상사에 말려들지 말고 이 세상의 모든 사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어거스틴의 기독교적 주장은 고대 말기 철학의 의식적 무관심에서부터 발생하여 계승되었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에 의하면 폴리스를 이상적으로 재조직하는 일은 철학자가 탁월하게 통찰한 지도에 따라야 하고 또 그 일은 철학자의 삶의 방식을 가능하게 하는 목적 외에 어떤 다른 목적도 갖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데카르트 이후에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의 위계가 뒤집어졌다. 진리와 지식은 관조가 아닌 행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바뀜은 급진성은 도구와 기계적 세계관에 주도권을 안겨다 주었다.

최고선(最高善)을 추구하는 관조적 삶 대신에 ‘생산’에 모든 활동을 퍼붓는 그런 세계가 도래한 것이다. 인간 자체가 맹목에 희생당하는 연장(도구)이 된 것이다.

(평)

저자 한나 아렌트의 글에는 어느 정도 순진한 면이 있다. 여전히 세상의 지속성에 기대를 건다. 왜냐하면 그것 없이는 삶의 의미조차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를 괴롭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외부에 대한 공격성은 실은 정리되지 않는 인간 내부 문제에 원인이 있다.

처리 불가능한 요소를 품은 채, 인간은 세상 속에서 활동을 통해 자기를 잊으려 한다. 관조적 활동, 종교나 선교활동, 기업 생산 활동, 예술 활동, 과학 탐구나 가사노동 등, 저자가 말한 ‘활동적인 삶’을 통해서 폭발하는 내부모순을 해소하려 한다.

인간의 조건은 인간이 자기 한계를 느끼면서 구상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악마의 마주침에서 드러나는 언약에 의해서 이미 확정되어졌다.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관조의 삶이 아니라 이 세상의 지옥체험을 감사한 마음으로 떠안는 것이다.

주님은 왜 십자가 이외에 다른 길로 가지 않으셨는지를 알고, 그 길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참 인간인 ‘성도’의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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