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질문 / 답변

            가족나눔터

            사진첩

            주일학교

            중고등부

            청년회

 

 

 

 

가족나눔터

HOME > 게시판 > 가족나눔터

 

 

 

 

 
2021-02-25 18:04:07 조회 : 221         
   화장터에서 / 모든 순간이... 이름 : 이강진(IP:125.177.14.185)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 정현종 詩 

나는 가끔은 후회 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 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 

위 詩를 읽었습니다. 
이 詩를 읽고 부산의 내 형수를 생각합니다. 
엊그제 그 형수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렀지요. 
위 '정현종의 詩'처럼 
아내 잃은 형이나, 엄마 잃은 자식이나, 또 참석한 가족들이나 
그 '한 순간 우두커니'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詩의 제목이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입니다. 
글쎄요? 
그렇게 느낄 수 있을까요? 

화장터 화구 앞에서 불에 태워질 '관'들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며 
여기저기서 각 가족들의 울음소리가 멈추지 않습니다. 
저 화구 앞, 대기자들의 주검을 보며 
이 詩처럼 그 순간마저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오고 가는 생각들이 자꾸 부딪치는 이 현장에서 
우리는 무엇을 끄집어 내야 할까요. 
저기 주검이 되어 누운 자가 '그 순간이 꽃봉오리임'을 알까요? 
어떻습니까?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만약, 화구 앞에 누운 자가 곧 "나"임을 발견한다면 
그 순간마저 사랑임을 알아야 하겠지요. 
그래서, 잔칫집보다 초상집에 가 보라는 것이고요. 
그러니까, 
진정 사랑을 안다면, 죽음이 사랑임을 우린 읽어 낼 수 있어야 하겠지요. 
서로 떼려 해도 뗄 수 없는.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죽이는 현실이지요. 
그래서 그 죽음과 함께 해야만 사랑의 현실이 됩니다. 
이 현실을 주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지요. 
대신 죽으심과 우리를 십자가에 함께 못 박아 버리시지요. 
그러면 
내 현실은 이 詩와 같이 나를 위해 무엇인들 사랑 못 하겠습니까 
하지만 '무엇인들'이 들킴을 위한 것이라면 나는 선악과를 먹은게 확실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처럼요. 
그러고 보니 
우리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사건 속에 있음을 기억해 내야만 합니다. 

주의 은혜로 
나의 후회도, 미련도, 열심히도, 사랑도 
그  순간순간 '다 내 열심에 따라 피어 날 꽃봉오리인 것들’이 
모두 내 열심히의 法임을 알았다면 
그 열심히로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기에 
거기에는 주님의 피사랑만이 오롯이 남겨지겠지요. 
그리고 
내 열심히에 따라 필 꽃 봉오리에는 
내 열심히의 法이 아닌 주님의 '다 이루심'에 따른 
오직 주의 십자가 죽으심만이 담기겠지요. 

그래서 
독백이 나옵니다. 
“나는 죽었고 내 안에 주가 살아 계십니다” 
"주여! 감사 하나이다" 

오늘, 주님은 내 육신을 끌고 저 화구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잠깐이면 사라질 안개 같은 나를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하여서 주의 의안에 있음을 알리시려고요. 

한 주검이 하얀 뼛가루 되어 항아리에 담겨지고 흰 보자가로 쌉니다. 
그의 아들은 그것을 받아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이에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 뼈들은 소망도 없는 이스라엘이라 우리가 다 멸절 되었나이다” 
그러나 주의 말씀은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나오게 하여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그러니까 이스라엘(우리)은 이러한 것을 전혀 모릅니다. 
이것은 우리를 순종하지 않는 가운데다 가두어 두고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만들어 긍휼을 베풀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가 法으로 더 이상 정죄할 게 없다 합니다. 
이는 긍휼을 입은 산자만이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름이란 주가 ‘일하심’으로 곧 십자가 죽으심이지요.  
거기에는 法이 다 이루어졌기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께로 돌아가고 주에게 영광이 있을 뿐입니다. 

추모공원 안치실. 
화장터 울음속의 장례식과는 상황이 싹 바뀌었습니다. 
안치실 위치, 남쪽방향, 햇볕, 칸과 높이, 경치, 편리성 등의 
그러한 내 선택의 현실로 돌아와 있습니다. 
어디가 좋은 자리일까? 
서로 의견들을 나누고 있습니다. 
죽음의 현실은 사라졌고 항아리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각자의 ‘열심’가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제 장례식은 끝이 나려고 합니다. 
상주인 아들에게 아내 잃은 남편에게 덕담들을 건네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욱 힘을 내서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아담의 이 현실에  
응답 또한 그 말들을 받으며 함께 다짐들을 합니다. 
모두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를 위하여 
여전한 法의 현실을 따라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주의 뜻이 담기면 은혜가 아닌가! 
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심이고  
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더 넘치게 하시기에 그렇습니다. 

이제 나는 죄에 대하여는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 되었으니 
법도 어찌 할 수 없음으로 法도 따라 죽은 것이 되겠지요. 
그러나 ‘내 열심히’의 육신은 죄의 법을 섬기고 
십자가 영으로는 성령의 법을 따르니  
이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주가 사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의 성령이 임하여만 이 은혜를 알도록 하시니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유일한 자이시니 
죽음을 아시고 경험하시고 다스릴 분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그래서 주는 주가 새로 살려낸 자들의 주님이시니 
그저, 감사 감사 할 수 밖에요! 

2021. 2. 21.

    ◁ 이전글 다음글 ▷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986-0172, 010-3511-0172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copyright ⓒ 우리교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