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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0 11:07:24 조회 : 113         
   21 겨울 수련회 교재 이름 : 우리교회(IP:119.18.87.190)   

2021 겨울수련회 교재

두 종류의 구원

 

- 사무엘상 속의 그리스도 -

 

서론

 

현실의 진실

 

인간은 자신이 더럽다는 생각을 못한다. 그저 의미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여긴다. 가끔은 의미없는 기쁨에 환호하지만 본인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를 모른다. 고통만이 현실이고 인간은 거기서 출생한 것이다. 즐거움이란 고통을 잠시 잊은 경우다. 그래서 장난이나 익살이나 놀이를 원한다. 현실에서 잠시 비켜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현실이 아니라 고통이 현실이다. 더러움이 현실이다. 여기에 가 등장한 것이 화근이다. 는 고집스럽게 고통이나 슬픔으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고통을 삶의 진실로 삼은 적이 없다. 그만큼 우리는 내부로부터 망상을 꾸며내고 있고 그 망상 안에서만 돌아다니고 싶어한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는 자세가 인생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악과 선은 여기서 시작된다. 자신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경우나 대상체를 악이라고 정해놓았다. 선이란 에게 즐거움을 주는 경우나 대상체로 정해놓았다. 이러고서 진실을 짜맞춘다. 이렇게 되면 진실은 악의 모서리와 아귀가 맞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현실은 저주받은 것으로 퍼즐 그림이 짜맞춰지는 것이다.

 

여기서 낯선 발자국을 만난다. 두 개의 구원의 길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먼저 그 길을 가신 주님의 길, 십자가의 길을 답습하는 자가 성도다. 진실이 등장하게 되면 사람들은 고통을 느낀다. 상주한 악이 악다운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다. 거짓이 진실의 둘레를 회전한다. 저주가 인간을 어떤 식으로 변모시켰는지가 거짓과의 만남에서 드러난다. 저주의 독가스가 가득한 어항 안에서 인간들은 진실에 목말라 한다.

 

삶의 공허함(진공 느낌)신경질적인 열광그룹 형성을 촉구함이념에 집결됨계급 형성전쟁승리자로 환생

 

승리자가 되는 즐거움으로 고통을 잊으려고 허망함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나를 해석한다. 차라리 벌써 죽은 유령으로 살라고 말씀하신다. 비로소 성도는 비-자발적으로 진리에 합류되었음을 안다. 고통과 즐거움이란 반복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2. 자아가 문제다

 

나는, ‘너는 존재한다.’라는 대답을 듣고 싶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의지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인지는 사실상 알 수 없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자신으로부터 달아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과 마주하는 법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의 광기는 편집병, 즉 동일성의 광기이자 자신의 절대적인 예외성을 손상시킬 수 있는 일체의 것을 무조건 지키려는 광기이다. 자기를 으뜸가는 기원성으로 설정한다.

 

타인을 대할 때도 이런 성향이 발동한다. 자신이 상대하는 타인의 이면에 달라붙어 자신이 만나게 된 모든 경우의 항()들을 통해 통합적인 관계망을 구성한다.

 

누군가를 향하여 말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내가 말을 하는 순간, 본인이 사라지고 가상 자아가 대신한다. ‘’, ‘이것’, ‘여기’, ‘지금은 경험이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나는 대명사 를 사용하여 동일한 자아인 나를 나 자신으로 명명하지만 나는 언제나 이미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내 발언의 형식은 그것을 지시하는 것과 같지 않다.

 

이 논리는 사물, 어떤 것, 어느 것에나 다 적용된다. 사용하는 말과 그 말의 내용 사이에 존재하는 역설이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복화술의 허구다.

 

나는 누구인가? 나란 실제로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그 사람이 누구든지 특정 말하는 행위 속에서 스스로를 말하는 자로 지칭하는 인물이다. 한편 상대방은, 스스로를 말하는 자로 일컫는 사람에게 말 걸기로 걸려든 사람이다. 제대로 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상대방이 내가 한 말을 다 들어주기를 고집한다. 하지만 상대는 진정 나와 상관되는 자가 아니기에 나의 뜻은 절대로 대답의 형식으로 상대방의 반응을 얻어낼 수가 없다. 의사소통에 있어 결정적인 사실은 소통이 결국에는 가능하지 않다는 점과 적절한 대답이 실패해야 한다는 점이다. 상대 품 안으로 제대로 닻을 내릴 수 없다.

 

의사전달에 늘 실패한다는 것은 타인사이의 간격 문제가 아니라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말을 하지만 그자가 누구인지 아는 데 실패하고 다시 본인에게 되돌아온다. 궁극적으로 본인은 가상 본인을 자기를 지키는 보호막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보호막과 자기 사이의 간격 안에는 나의 것으로 마저 돌릴 수 없는 여분의 것이 생긴다. 그 차이를 온전히 나의 것으로 돌릴 수 없다면 그로 인해 가상의 나와 결코 일치되지 않음이 증명된다. 타인을 의식해서 나를 지키기 위해 장만한 나의 보호막이 온전히 나를 가려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 원인은 자신이 이미 거대한 질서 안에 삼켜져 있기 때문이다. ‘라고 여기는 것이나 이라고 여겼던 것들도 실은 거대한 질서의 활동 일부가 되어 있다. ‘라는 가면을 쓰고 활동 중이다. 거대 질서 안에 나만의 것을 따로 챙기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쓴 가면이다. 가면은 만의 것을 챙기기 위한 구원 활동의 일환이다.

 

맹렬히 이 거대 질서에서 따로 빠져나오려고 한다. 이처럼 인간이 벌리는 모든 활동이나 말들도 온전히 자기만이 절대가 되기 위한 노력이다. 이 노력을 통해서 그동안 인간을 지배해온 공적 질서의 실상이 드러난다.

 

모든 것을 다 묘사할 필요는 없고 알 필요도 없다. 그러나 온전한 구원의 동지를 만나게 되면 그분과 비교해서 나의 구원 노력이 얼마나 가짜요 헛수고에 불과한지 알 수 있다.

 

3. 공적 세계의 모순

 

지배자들이 통치하는 이유는, 왜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해야 하는지에 대한 합당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지배 행위는 궁극적으로 지배할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백성은 그것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박탈한다.

 

개인은 근원적으로 자기 일 말고 남의 일에 간섭할 권리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어떠한 권리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의 권리이며 결국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될 수 있는 권리자다.

 

즉 지배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들로 이루어진 잉여 공동체가 지배자를 지배한다. ‘지배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란 모든 사람(everybody)을 의미하는 동시에 누구나 (whoever)를 의미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평등을 보장할 지배를 원한다. 누구나(anybody)와 다른 모든 사람(everybody else)과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 정치적인 것(통치성)이 사라지는 조건으로 빈번하게 조건들을 다시 제정함으로써 정치적인 것의 한계를 변경해 나가려는 것이다.

 

즉 실제적 평등과 형식적 평등 간의 대립을 항상 생각한다. 형식적 평등은 현실 불평등의 겉모습이다. 현실상 가차 없이 내몰리는 경쟁 마당에서 이미 출생부터 차이 난 불평등한 명백한 불공정 속에서 가혹한 경쟁자들은 그 격차를 더 벌려놓으려고 안달이다. 여기에 인정사정은 일절 없다. 따라서 인간들은 하소연할 곳을 찾고 매달리기 마련이다.

 

겉으로는 엄격한 법에 대한 헌신으로 평등이 마련된 것처럼 보이지만 평등 밑에는 사유재산을 통한 쾌락과 고통의 셈법이 있다. 법적인 평등 세계를 극찬하는 것이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실제적 평등을 위해 형식적 법 제도를 끊임없이 흔들어대야 한다. 이상적인 평등을 위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 국가 형식은 계속 분열 조짐을 보여야 한다.

 

형식적 평등을 극복해서 실제적 평등으로 들어섰다고 여길 때에 나타나는 것은 사목(司牧) 정치. 소위 장로(長老) 정치. 연장자의 이미지를 지닌 자만이 국가의 수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성한 목자가 우리 세상을 지배한다는 환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국가 안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병폐에 대해서도 신성한 목자는 전지전능한 처방전으로 해결책을 낼 수 있음에 대한 믿음의 가치가 살아 있기를 원한다.

 

타인을 다스릴 권리가 없는 자다스리지 않겠다는 겸손의 가치를 사적으로 고이 간직하고 싶은 것이다.

 

4. 하나님의 통치 방식

 

하나님께서는 이런 백성들의 의도에 틈새를 벌리신다. 백성들이 고대하는 이상 세계를 미래에 도착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간 안에서 구성해서 개입시키신다. 이 시간은 약속을 실어나르는 시간이 두 개의 통치가 같은 시간 안에, 같은 공간에 겹쳐지게 하신다.

 

누구에게나 오는 약속의 시간도 아니요 아무에게나 오는 시간도 아니다. 어느 누구도(nobody) 알지 못하게 오는 시간층이다. 그것은 공적 통치 안에서 공개적으로 행해지는 제비뽑기방식의 통치다. ‘제비뽑기란 인간 세계의 일체의 근원을 부정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everybody)의 기대를 피해가신다. 모든 인간을 좌절시키신다. 심지어 선택받은 당사자까지! “사무엘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삼상 10:20)” 공적으로 제비뽑기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하여 미리 사울 머리에 사적으로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셨다.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 맞추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 기업의 지도자를 삼지 아니하셨느냐(삼상 10:1).”

 

즉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들의 근원성을 공격하셔서 일체 인정하지 않으신다. 인간 세계 구성 자체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들만의 세계가 따로 형성되는 것을 묵과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5. 준비해두신 나라

 

하나님의 이야기가 지상에서는 죽은 자의 이야기가 된다. 자기를 향해 달아오는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여서 그 죽음으로 온통 세상을 훑고, 쓸고 다녀야 하는 자들의 이야기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에피소드도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사건 안에서는 죽음 이야기로 후끈 달아오르게 된다.

 

다윗은 이미 죽은 자신세가 되어 사울 왕에게 쫓긴다. 다윗은 늘 죽음에 포위되었으며 어디를 가든지 죽음이 주변에 형성되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예상치도 않는 약속이 마중 나오고 그 안에서 생존한다. 거룩한 떡을 먹게 된다(삼상 21:6). 쫓겨가면서 다윗이 구성해내는 세계는 마치 인간 세계 밖의 세계로서 유령 같은 세계며 인간 세계로부터 공격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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