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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5 15:00:10 조회 : 133         
   과거(2010년) 개혁신학 학회 실황 음성과 교재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기타/개혁신학회논문발제100227다니엘70이레비역사적해석.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기타/개혁신학회논문발제100227다니엘70이레비역사적해석.hwp
 이근호 20-07-05 15:01 
[영문초록] 과 번역과 서론 대목만

Non-historical Interpretation on 'Daniel's Seventy Weeks'


    A Conventional interpretation method on theology is to interpret the Bible on the premise that the mankind have abilities to interpret the God's Word without fallacy. This arises from an attitude of taking it for granted that God never gives the mankind a way of inducing any fallacy in interpreting the His Word.

    But what if the Bible itself contradicts the people's preconception? What if the mankind's understanding itself be a momentum of defying the Truth? What if the mankind can not escape the awareness of pretending himself pious, and of manipulating God?

    For a proper interpretation of this, a related research on human subjectivity should be taken into consideration. I convince myself that God Himself opens the path of indicating this concept of limitation through His Words, for God is alive and active(Hebrews 4:12), and Holy Spirit is working where the Words and the human subjectivity confront each other. A revelation of God for the 'Daniel's Seventy Weeks' would have the same grounds, too. As His revealed activities are associated with the entire  sphere of the Bible including the time of Daniel, we should interpret the Bible within the Cross with the concept of the Covenant. We therefore can observe the inside of the God's revelation and the human subjectivity at the same time because the Crucifixion, the gospel delivered by Paul, contains the concept of 'completion of the New Covenant'.

    A concept of human subjectivity has been expressed as that of the 'human history'. This resulted in a strong possibility that a world view by the human made the human return to their subjective entities for existence. It formed a metaphysical environment of time and space, after all, which derives a distorted interpretation. God therefore stood the Son of Man called the Messiah in the heart of His revelation to rebuke them for their world view. In this context, I will examine His function as 'the Son of Man' in association with the 'revelation of God for the 'Daniel's Seventy Weeks'.


[한글초록]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

전통적인 신학과 해석 방법은,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류 없는 해석력이 당연히 갖추어져 있는 것처럼 전제하고 성경에 접근을 시도한 것이었다. 설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을 주시면서 오류를 유발하는 의도로 주실 리가 없다고 여기는 태도다. 그런데 성경 자체가 이러한 인간들의 선입견에 반박한다면? 인간 이해력 자체가 진리를 훼방하는 계기로 작용한다면? 본인들부터가 늘 신앙심을 가장해야 하고 하나님을 조작하고픈 의식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이런 문제와 결부된 말씀 해석이 되려면 인간의 주체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 주체의 만남의 장은, 하나님의 말씀 쪽에서 지금도 살아 운동하기에 (히 4;12) 성령을 일하심에 따라 인간들의 이러한 한계를 지적할 수 있도록 친히 열어주신다. 구약 다니엘이 접했던 ‘70이레’에 관한 계시도 이러한 묵시의 장으로서 오늘날 다가온다. 하나님의 이 묵시적 활동은 다니엘 시절뿐만 아니라 전 성경의 범위 전부와 연관되어 있기에 ‘언약’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인 십자가 사건이 ‘새언약으로서 성취’라는 내용을 품고 있기에 이 십자가 안에서 인간의 주체 문제와 더불어 묵시의 내막을 비로소 살필 수 있다.

인간의 주체성은 명목상 ‘역사’라는 개념으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인간의 세상관 정립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환경을 구성하면서 결국 자기 존재 가치를 향한 주체적 의미로 귀착되기 때문에 이것이 왜곡된 해석의 원인이 되었다. 이런 인간의 역사관을 공격하고 늘 위기와 종말로 몰아세우는 묵시적 작용의 중심에 하나님께서 ‘인자’(人子)라고 불리는 메시아를 세워놓으셨는데 그 분의 ‘인자로서의 기능’을 다니엘에게 주어진 70이레의 계시와 관련지어 파악해본다.


Ⅰ. 서론

전통적으로 70이레에 대해서 역사적 해석을 고집하는 자들의 의도는, 어떻게든 유대공동체를 ‘이스라엘의 남은 자’로 인정해주어서 하나님의 언약의 일관성과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 약속보장의 영속성의 흔적을 이들의 역사적 존재성에서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남은 자’란 ‘드러나지 않는 남은 자’로서 언제든지 드러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다.) 그들 생각에, 이것이 담보되어야지만 후기 선지서의 편집을 둘러싼 정치 사회적 배경과 더불어 그 선지서 내용이 윤곽이 드러나고, 비밀로서만 회자되는 묵시문학의 내막이 역사적 근거 확보에 준해서 납득이 가능한 해석지평으로 끄집어 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유대공동체의 존재를 긍정하는 식으로 대하신 것이 아니라 아예 ‘공동체 죽음’을 요구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8장에서 말씀하시기를,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즉, 천국의 본 자손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천국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하셨다. 유대 공동체는 짐승의 세계에서 야기된 짐승의 분할 현상이다. 즉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땅과 씨에 대해 독점적 해석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아브라함의 신체와 연계된 혈통에 근거한다고 보았다. 이는 주체로서 발현될 신체를 현재의 자기 신체들 이외에 없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짐승’이라는 묵시적으로 부정(否定)적이고 악함의 의미를 싣고 있는 실체 등장의 근거가 혈통이라는 물질적 사유로서는 도저히 해명해 낼 수가 없게 된다. 단지 곡해하기를, 유대공동체에 대한 애매한 핍박을 가하는 비-여호와적인 정치적 바깥 세력 정도로 간주해서 유대공동체 내의 결속과 주체성을 다지고 함양케 하는 계기로 활용될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명분이다. 진정한 짐승의 활동은 특정 신앙공동체와 연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짐승의 내부 활동에서 자체적으로 주체성을 구성해나가는데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주체(자아)란 실은 하나님의 영적 다스림을 드러내는 기능점으로서만 발현하기에 그러하다. 권력이 ‘실체없는 효과’로서 작용하는 이유는, 인간이라는 이름의 주체자들이 자신의 허한 주체 공백을 메우기 위해 타인의 절대적 욕망에서 그 대상을 찾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짐승이나 그 짐승으로부터 핍박을 받는다고 자처하는 유대공동체나 마찬가지다.

다니엘에서의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란, 국가 자체가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태고적 힘들이 밀려오는 것을 의미한다. 땅의 기존 인간들이 주체가 되어서 다룰 수 없는 이질적인 힘을 말한다. 이 힘은 땅을 적시면서, 모든 위치에서 생산되고, 모든 관계를 다시 조성한다. 결코 혈통적이나 육적이 아니라 영적이다. 이미 국가라는 추상적 주체에 예속된 주체로서는 국가의 영적 성격을 파악해낼 수 없다. 국가의 정체성을 말씀대로 ‘땅 외적 요인’으로 되돌아가서 해석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국가란 단지 힘의 뭉치가 아니라 그 이질적으로 인간이 다룰 수 없는 힘의 파도가 차후적으로 조성되고 배치된 힘들의 관계구조를 실행하는 주체가 된다.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다니엘의 국가들은,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무질서적 힘이 스스로 ‘빈 칸’ 만들어내고 그 공간을 일시적으로 채우는 식으로 조성되는 가운데 돌출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 국가나 공동체는 힘으로만 조성되는 주체성에 매료되고 그 유혹에 황홀해한다. 유대공동체도 예외가 아니다. ‘인자 같은 이’의 몸으로 만들어지는 나라가 아니라(단 7:13) 도리어 땅에서 시작하는 묵시 세계를, 바다에서 시작한 영적 세력이 죽이고 미워한다는 점에서 여타의 이방제국과 다를 바 없다. 도리어 그 힘에서 파생되는 새로운 지층이다. 이는 곧 힘의 바깥에서 조절하는 ‘인자 같은 분’의 묵시적 조치로서만 움직인다는 결과를 내놓을 수 있다. 이 조치에 의해서 힘으로 ‘안으로 접치게’ 되면서 국가라는 주체가 발생된다. 이 ‘주체화’ 작업은 ‘인자 같은 분’의 인격적 발현성과 병행하게 된다.  즉 진정한 묵시세계의 주체 등장과 견줄 수 있는 주체로 적당하게 정립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이방 국가 권력 안쪽에서는 영적으로 더 심화된 ‘짐승’의 힘이 잉태되고 있었다. 유대공동체라는 종교집단체다. 짐승에서 나온 힘의 결절(結節)이라고 할 수 있다.(고후 11:13-20) “저희는 양의 탈을 쓴 악마 나라의 직원들이다… 너희들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잘도 용납하는구나”  결절, 곧 갈라짐이란, 발뒤꿈치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각질과 같은 것으로서, 짐승의 내부 속성이 자꾸만 표면화되는 올라와 층으로서 자체적인 구조를 이루는 현상을 말하는데 내부적으로 공격과 저항을 병행한다. 거룩한 가치를 사수한다는 명분 하에 정치적 권력 집중화를 통한 주체화 및, 계시 생산과 독점이 이루어지면서 인자와 성도의 세계마저 삼키려는 힘이 최고점을 향해 빨리 질주하고(단 12:4) 발휘된다. 종말의 강도가 고도조로 강화되면서 숨어있던 종말이 깨어지듯이 열리고 심판의 스케줄이 본격화된다. 권력은 영적 집중성을 역사적 벌판에 토해낸다. 땅의 백성들은 역사적 메시아를 희구한다. 그러나 그것조차 그동안 짐승이 작업해 놓은 업적이다. 땅의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같이 생긴 짐승을 내심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역사적 상황 안에서 주체의 한계다. 본인들 각자가 그 힘의 융기 위에 올라온 돌출들로서 짐승에게 배속되어 있는 주체들이기 때문이다. 이 주체들을 묶어주는 것은 오직 가시적 역사를 잃지 않으려는 힘들의 관계뿐이다. 유대공동체는 자기를 압박하는 이방민족과 말씀을 사이에 두고 결코 대척점을 형성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동일한 목적(권력이란 허구가 보여주는  효과=영적 지배)을 지향하면서 같이 움직일 뿐이다.  예수님이나 세례 요한이 상대하는 유대집권층은 그 당시 유대공동체 전체를 상징하는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아비를 악마로 보았다. 그들은 뱀의 자식들이다. (요 8:44/마 23:33) 그들은 본인들도 천국을 가지 못하면서 천국가려는 자들까지 막는 자들이다.(마 23:14) 역사적 해석의 결과로 자칭 남은 자로 간주하는 이들 유대공동체의 손에 예수님이 피살되므로서 새로운 해석이 ‘인자’라는 묵시적 몸에 의한 묵시적 해석이 전 역사를 소급해서 적용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단 유대라는 이름의 공동체적 나라와 다른 짐승의 나라의 차이점은, 하나님의 말씀의 수혜자라는 입장이 곧 하나님의 백성됨을 증명하는 역사적 혜택임을 자부하면서 나름대로 종교적 공동체라는 ‘주체적 형식’을 예수님에 근접하여 보여준다는 점이다. 즉 예언이 유발한 권력집중화 현상은 지상에 권력체를 영적으로 대변해줄 수 있는 ‘가공의 장(場)’ 역할에 충실케 하게 했다. 모든 국가의 정치적 다스림의 궁극적 지향점이 실은 영적인 이상(理想)체 실현과 관련된 채 ‘영적 전쟁’의 실무자들로 참여된다는 증거를 유대공동체는 미리 보여주었다. 쉽게 말해서 영적 공동체(교회)라는 자부하는 단체들이 ‘메시야 살해’로 이어진 영적 전쟁에 부정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말이다. 곧 인자되시는 분의 본질을 가장 근접한 위치에서 드러내도록 접촉된 상대자인 유대공동체로서 드러난 악마성은 전체 역사적 지평으로 확산된다.(요한계시록의 테마) 이는 곧 종교적 성격을 지니고 땅의 세계는 ‘색출의 현장’이 된다는 말이다. 영적전쟁의 주력들은 각기 자기 사람들을 호출해내면서(짐승의 표와 어린양의 표) 스스로 세상을 두 조각나는데 가담되고 있다. 이 때 각자의 세계에서 내민 고른 시간판이 사용되는데 고유의 역사관 끝에 종말을 매달므로 서 주체자로서 활약하는 단체의 활동 여부에 따라 종말의 시점은 자꾸만 역사 끝 지점이 각가지 변수로서 계시 내용이 풍부해지는 현상을 띠게 된다. 이런 경향마저 읽어내기 위해서는 70이레 계시가 주어진 다니엘 상황에서의 다니엘의 주체성을 먼저 언급할 수밖에 없었고, 다니엘이 ‘선지자’라는 입지를 고려해서 그 전의 관련된 선지자의 임무와 일관성을 찾기 위해서라도 선지자와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성을 검토해야 했고, 그것이 성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파악하고 나서는 왜 다윗 언약에 있어 성전의 존재가 중요한 사항인가를 제시할 필요성을 가졌다. 이 성전이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의 목표인 동시에 언약민족의 목표이기도 하기에 전쟁과 언약의 기능을 언급해야 했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논문의 출발은 언약을 받은 자의 주체성부터 다루어져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사람을 불러내어 언약 사람으로 움직여가면서 뿜어내는 역사적 인식과 묵시성(비역사성) 인식의 대조성이 밝혀지면, 70이레에 대해 역사적 해석만 고집하는 단선적 해석의 문제점이 밝혀지게 된다. 

 ‘이레’라는 시원적 시간단위는 새로운 인식론을 필요로 한다. ‘이레’는 결코 ‘7 년’이란 일상의 시간 단위로 환원되어 표현 할 수 없다. 그것은 새로운 주체적 약동이 ‘이레’라는 시간단위를 적용하시면서 지상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주체자의 약동은 사람 손으로 지은 성전의 붕괴와 관련지으면서, ‘인자’라는 구체적이고 묵시적 인물을 지향하게 된다. 반면, 역사적 이해에 밀착된 주석들은, 과거에서 미래로 쳐 올라오는 식으로 해석하므로서 지나간 사건에 대한 재생 의미를 차단시켜 버리게 된다. 이것은 인간 주체의 한계성을 노출시키는 바가 된다. 즉 7이레 시점이 확고하면 그다음 62이레의 기간과 1이레의 기간과 확실하게 점찍을 수 있다고 보는 동시에 그 7 이레는 이미 지나간 일회성 사건으로만 기억될 뿐이다.

 이렇게 되면 구약의 예언은 십자가 복음과의 지속적인 연관성이 소멸된다. 이스라엘 회복과 메시아의 출현 사이에 계시적 연결은 시간적인 계기로 가능하지 않다. 십자가 못 박힌 그 메시아의 주체의 묵시적 위상에서 해결 지어져야 한다. 역사적으로 환원시켜 말씀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여전히 그 해석 주체자들의 살고자하는 (어떠하든 구원되고자) 육적인 본성과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의 연관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해석이라고 간주되어 ‘인자의 죽음’의 시각에서 다니엘의 70이레를 해석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죽음이란 곧 심판의 결과며 묵시의 완성이다. 이 심판성을 품고 죽은 자로서 참여하는 것이다.(갈 2:20) 그렇게 되면 70이레의 진면목이 단지 지나간 한 역사상의 과거의 계시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생명의 힘을 전달하는 내용을 품고 영원히 적용된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단회적인 것에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상으로 지난 날의 계시까지 묵시적 구조 안에서 영원히 장악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바이다. 즉 70이레 해석에서도 십자가 의의는 묵시의 자격으로 역사 위에 쏟아지게 되어있다. 이러한 해석 인식은 이미 베드로가 제안한 바가 있는 인식이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느니라”(벧전 1: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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