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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7 18:38:20 조회 : 162         
   2019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교재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말씀의 움직임

-이사야 속의 그리스도-

서론

1. 정신치료와 현실치료

(1)개인적 정신치료

정신적으로 문제를 느끼는 환자가 자신을 치료해 줄 치료자를 찾아오는 이유는 욕망의 반복되는 문법에서 특정 부분이 삶을 위기에 처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욕망의 반복되는 패턴이 주체의 환경과 충돌하는 경우이다. 또는 주체의 마음을 찾아온 뜻밖의 새로운 욕망이 원래 자리 잡고 있던 욕망의 구조와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치료자는 분석 주체에게 자유로운 발화를 유도해냄으로써 그가 사로잡혀 있는 욕망의 반복적 패턴이 어떤 구조를 갖고 있는지 파악하게 된다. 환자의 무의식이 어떤 문법으로 표기되어 있는지를 알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치료자가 사용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치료자가 소유한 정신분석 이론은 단지 일반론이기 때문이다. 치료자는 각각의 환자가 소유한 고유하고 특수한 문법을 알아내기 위해 자신의 지식을 포기해야 한다. 신경증의 히스테리나 강박증에 관한 지식은 단지 환자의 무의식에 접근하는 단초의 역할 이상은 될 수 없다. 치료자는 환자의 말 속에서 무의식의 문법에 연결된 지점들을 찾아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치료자의 주체 역시 이 같은 시도에서 배제되지 않는다. 그 역시 치료자 주목하는 말의 지점들-말실수의 기표,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단어, 배제되거나 우회되는 단어, 수렴되는 단어, 또는 특별히 과도한 정동을 불러일으키는 단어에 주목하면서 은폐된 무의식의 담화로, 과도한 향유의 중심핵으로 접근하는 데 참여한다.

그리하여 근본환상이라 불리는 최종적인 기호 연쇄에 도달하게 되면 이른바 공백의 연안에 이르게 된다. 이때 치료자는 환자가 자신의 욕망의 건축물을 구성하던 마음의 기둥들이 초라한 환상에 근거한 지푸라기였다는 사실에 직면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분석 주체에게 일종의 각성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분석 주체가 자신의 욕망의 신화가 몰락하는 지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도, 끝도 아니다. 분석은 계속 진행된다. 왜냐하면 분석 주체는 자신이 도달했던 무의식의 장소를 다시 부인하고 억압하려 시도할 것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환자의 자아는 삶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환자가 공백에 도달하는 횟수를 늘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와 같은 반복이 가져올 효과가 치료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공백에 도달하는 반복 속에서 분석 주체의 의식에 다른 기호가 개입해 들어오는 우연적 사건이야말로 치료의 핵심이다.

이미 환자는 주어진 자아의 좌표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것을, 제아무리 또 다른 억압을 불러올지라도 어쨌든 새로운 현실 지배 아래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한 방식으로 이제 환자는 하나의 자아와 그것을 생산해내는 현실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체험한다. 정신분석 임상으로 환자가 경험하는 이러한 빠져나감은 이후 또 다른 이의 권력과 그것이 야기하는 환상에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는 유연한 존재를 가능하게 만든다.

환자는 이제 자기 자신을 고정된 자아로서가 아니라 텅 빈 공백으로서, 간헐적으로 출현하는 균열의 틈으로서, 혹은 아주 상식적인 표현을 쓰자면 미래를 향해 개방된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파악하는 데 익숙해질 것이다.

여기서 환자는 자신의 무의식의 문법을 구성했던 핵심적 단어연쇄 구조에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치료가 되는 마지막 순간은 증상이 소멸되는 순간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분석의 끝에서 증상은 주체에게 긍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증상을 지탱하던 기표 배열의 변화를 모색하는 분석은 증상 자체가 주체의 삶을 지탱하는 쾌락의 지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환자 자신이 비로소 자신의 증상을 즐길 수 있도록 말이다.

충동의 자리에 접근하여 그것이 발휘하는 힘을 새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충동과 주체 사이를 가로막는 법의 장벽들을 넘어서야만 한다. 위반을 장치화하는 임상이란 바로 이것을 법이 남긴 장벽을 위반하고 넘어 설 수 있게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도달된 공백, 충동의 가장자리에 새로운 자기 설명을 성사시키는 것이 치료의 핵심이다.

치료 과정에서 환자가 치료자에게 갑작스럽게 부정적인 전이감정을 드러내며 분석을 중단하려고 할 경우, 이는 낯선 사실에 대해 분노의 형식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치료자의 해석이 환자의 무의식적 충동을 제대로 포섭하지 못해 계속해서 딴소리만 늘어놓을 경우 환자의 의식을 알아채지 못하지만 환자의 무의식은 새로운 현실이 주는 공격성을 드러낼 수 있다.

현실의 볼트가 낯설게 다가선 새 현실의 너트에 들어맞지 않아 헛도는 경우에 감정적 장애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보다 일반적인 경우로 확대해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분노란 무의식적 충동이 적절히 해석될 수 있는 현실의 흐름과 연결되지 못할 때 출현한다. 따라서 분노조절장애는 엄밀한 의미에서 충동조절장애라고 불리는 것이 정확하며, 즉 내 마음을 남들에게 적절하게 알릴 수 있는 단어를 선택하지 못해 화를 내는 경우가 된다. 이에 대해서 언어적 풍요로움을 경험하는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분노로 인한 긴장을 다양한 대화의 실천을 통해 완화하도록 하는 것은 무의식의 충동을 지표의 풍요로움에 개방하는 효과를 가져 오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같은 치료법들은 단지 일시적인 효과만을 가져올 것이다. 환자의 충동을 설명하는 데 실패했던 것은 의식차원의 어법이 문제가 아니라 본인도 몰랐던 과거 기억의 어법 때문이다.

유년기에 충동을 둘러싸기 위해 형성된 무의식적 대화 패턴이 빈약하거나 왜곡되어 있을 경우 환자의 분노조절장애는 외부의 특별한 영향 없이도 증상으로 출현할 수 있다. 이 경우 환자의 충동을 포획한 근본환상의 지점으로 하강해 들어가는 정신분석 임상의 절차만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환자의 무의식의 중핵에 존재하는 충동과 이를 사로잡는 최초의 설명들이 서로 헛돌지 않도록 위치를 조율하는 것이 곧 분노조절장애를 해결하는 유일한 정신분석적 방법이기 때문이다.

정동과 관련된 이 모든 논의에서 치료자는 결코 환자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환자가 우울증을 호소한다면 충동을 우회시킬 자기 설명들의 연쇄기능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지 실제 사건 때문에 그러한 증상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세로토닌의 결핍으로 우울증세를 보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울증과 관련한 세로토닌의 감소는 그 결과일 뿐 원인이 아니다. 다양한 단어들을 사유에 참여시켜 충동을 억압하는 현실적응 기능에 장애가 일어난 것이 우울증의 원이이며 세로토닌의 감소는 그 결과이다. 격렬한 운동이 원인이 되어 엔돌핀이 발생하는 것이지, 엔돌핀 때문에 격렬한 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듯 말이다. 따라서 환자에게는 항우울증제라는 약물 처방이 아니라 단어 연쇄의 활성화가 필요하다. 욕망이 단어 연쇄의 끝없는 표현 기능 속에서 갈아탈 수 있는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단어들이 필요하지 억지로 세로토닌 수치를 높이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2)현실치료와 그 한계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자체가 병리적이라면 어떤 식으로 치료가 가능 할까? 세상 속의 사람들은 자신이 내뱉은 상징물로 스스로 속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에서 병리적이다.

인간 문명의 시작도 상징에서 비롯된다. 사람의 발길이 쉽사리 닿을 수 없는 깊은 동굴의 벽과 천장에 이미지들을 빼곡히 그려 넣으면서 고대인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것은 그 당시 인류가 욕망했던 성스러움에 대한 표현이다. 이는 현실적인 질서를 초월하는 어떤 대상에 대한 표현인데, 그 대상이란 묘사될 수 없는 것, 표현 불가능한 어떤 것, 오직 공백의 형태로만 출현하는 무엇이다.

이러한 관점은 동굴벽화를 그렸던 선사 인류의 행위를 종교적인 차원에서 파악하는 것이며 벽화를 일종의 제례 의식적 예술작품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제한다. 인간의 심리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불안의 감정을 중심으로 구성되며, 예술과 제례의식은 모두 불안으로부터 자아를 방어하려는 실천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세계의 이미지는 충동이 발생시키는 부정적 효과, 즉 불안의 감정이 메아리치는 스크린과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불안의 근원을 테두리 치고 가두며 통제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동굴벽화의 이미지들이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백의 심연을 벽화로 둘러싸는 과정에서 인류는 세계에 대한 불안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방어하기 위해 그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공백을 억압하려는 방어적 행위, 강박적 행위만은 아니다. 깊은 동굴의 심연으로 내려가 벽화를 그리는 실천은 또한 불안의 공백을 드러내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그림 그려진 장소가 음침한 동굴이기 때문이다. 텅 빈 심연을 이미지로 둘러싸면서 인류가 출현시켰던 성스러운 공백은 또한 세계 너머의 초월적 영역을 표상하는 듯 보인다.

동굴벽화는 그러한 방식으로 심연에 숨겨진 공백을 드러내는 동시에 억압하는 예술의 가장 원초적이며 기원적인 기능을 암시한다. 이 모든 행위의 가장 주요한 감정적 불안은 인류에게 '성스러움'이라는 특별한 감정으로 다시 해석될 것이다. 그것은 인류가 스스로의 불안을 잠재우는 동시에 불안 자체를 향유하는 승화의 특수한 양식이었다. 나아가서 인류의 문명은 바로 이것, 성스러운 공백을 중심으로 구성된 승화의 다양한 형식들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동굴 천정에 벽화를 그리는 행위는 신을 보이지 않는 거주민으로 간주해서 현 인간이 사는 현실에 소속시켜주고 그렇게 해서 신을 고정화 하려는 기능하다. 함께 살게 된 신이 큰 능력으로 자신들을 응시하며 지켜주기를 원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람들에게 있어 현실은 어떨까?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사상이 지닌 보편성이 진리로 행세한다. 이 보편성을 구체적으로 내세우는 것이 국가주의다. 고대인으로부터 흘러내린 동굴 신화적 요소가 정치사상 안으로 전수된다. 이것이 국가주의를 지탱한다. 이것은 환상이며 그들의 권위는 텅 빈 동굴 속처럼 공백이다. 하지만 이 텅 빈 내용을 감추고자 하는 방식으로 국가는 비로소 국가로서 가동이 되고 유일한 절대기관으로 행세한다.

쉽게 말해서 국민들을 하여금 안심 놓고 믿을 만한 것을 믿음의 토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병리적 증상이다. 이 믿음의 연결망은 다음과 같은 인식으로 상호 통한다. 내가 믿고 있는 이 절대적인 것을 다른 누군가도 어디선가 여전히 믿고 있을 것이다는 여론 조성으로 절대적 보편성을 유지토록 작동한다. 신념의 연대이다.

텅 빈 이 세상이 인간들의 연결된 믿음 망으로 충만해진 듯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듯 완전함을 추구하면 할수록 그전에 보이지 않는 위협 요소들이 자꾸만 발생되는 것이다. 이 우연적 요소를 강제로 메워 절대적 보편성을 지탱하려고 힘쓰는 가운데서 현실이 주는 불안 증세는 집단적으로 퍼져나간다.

오늘날 주체들이 인식하는 데 실패하는 대상은 현실이 아니라 그들의 현실을 구성하는 환상이다. 정치사상적 환상이 사회적 현실을 구성한다. 포괄적 정치사상은 사회적 적대의 부정성을 가려 감추는 환상을 제공함으로써 현실을 계속 상징적으로 재생산하고 구조화한다.

환상은 완전을 유지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빈틈을 억지로 메우는 것이다. 아무리 완전하고 절대적이라고 상상을 해도 그러한 노력은 헛되다. 현실의 다양한 양상들은 억압된 빈틈이 언제나 회귀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일제 시대 때, 서로 종로 바닥에 깡패들이 설치고 다녀 민생에 지장을 주기에 일본 경찰이 나서서 깡패들을 소탕하는 것이 너무나도 정당해 보이는 조치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조선을 계속 지배해야 한다는 정치사상은 여전히 병리적이다 는 사실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과 같다.

세상을 제대로 치료해서 바른 세상을 만들겠다는 정치적 명분과 시도들이 오히려 초정치적으로 움직이는 세상 변화를 억지로 억누르고 있는 짓인 것이다. 이 사실이 병리적이라서 세상은 세상 힘으로 스스로 고칠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스스로 주체로 자임하는 국민정서에 비추어 볼 때, 고정되고 불변하는 현실을 갖고 싶어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향이 폭력을 함유하고 있는 모습이다. 내가 속한 권력은 절대 권력이어야 이 주체를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보다 과도해지는 동일화와 통일성에 대한 환상으로 말미암아 자꾸만 적들을 찾아내고 되고 도처에서 새삼스럽게 발견했다고 우긴다. 언제나 가공적 타인을 위조해낸다. 그리고 자신이 가상적으로 만들어낸 타인으로 인해 자신이 불안해한다.

모든 절대적 힘이 자기 쪽으로 와서 완결해야 한다는 욕망이 멈추지 않고 갈수록 급해지기 때문이다. 과연 이것이 적절한가를 따질 보편적 기준도 없다. 단지 내가 그것을 원한다로 논리는 마감된다. 보편성에 핑계를 대다가 결국에는 자기 절대성으로 모든 것이 닫히는 것이다.

매사가 비일관성으로 흐르는 환경 속에서 강제적으로 일관성을 고집하는 것은 주체가 패권추구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방식

성도는 이미 죽은 자가 되었다는 것은, 곧 개인적으로 세상도 모두 끝난 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성도로 하여금 세상을 상대로 해서 심판자로서 우위에 서는 초연함이 주는 자기 즐거움을 누리라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말씀의 실재성이 주는 여파에 심하게, 정신없이 호되게 당하라는 말이다.

세상은 인간들이 조성해 온 게 아니었다. 인간들은 인간들을 상대로 하지만 성도만은 이미 하나님 세계와 접선되어 있다. “

 첨부파일 : 2019 여름수련회 교재.hwp (37.5K), Down:20
 이근호 19-06-27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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