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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6 07:00:29 조회 : 477         
   십자가마을 여름 수련회 7강-9강 요약(이미아 성도님의 글)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7강 일체성

 

천국을 만드신 예수님한테 직접 설교를 듣는다고 한다면 얼마나 안심이 되고 좋을까? 그러나 결과는 그 주님을 내쫓고 죽여 버렸다. 우리도 사도행전을 보면서 성령을 받았던 사도바울에게 직접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지난 시간에 했던 사도행전 17장에서 사도바울의 설교를 듣게 하신다. 스토아 에피쿠로스, 그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너희가 알고 있는 것과 나는 다르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없는 것이 바울에게 있는 것이다. 이것을 매개라고 하는 것이다. 매개는 둘 사이를 연결해주는 것이다. 예수님이라는 매개를 설명하면서 그들이 알고 있는 매개를 재 정돈해주고 있다.

 

사도행전 17장 22절에 아덴사람들은 종교성이 많다고 한다. 종교성이라는 것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매개물이 있는 것이다. 그저 누리고 받고 있다고 생각하자 아테네 사람들아! 이 이방사람들아! 너희들 나름대로의 매개물, 내가 착해서, 내가 잘해서, 신에게 갖다 바쳤기에 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받으면 안 되겠니? 신상을 섬긴다는 것은 얻을 것은 얻고 챙길 것은 챙기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우리를 결과물로 보자는 것이다. 그럼 신은 어디에 있는가? 신의 호의의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니? 그렇게 생각해야 그저 받고 있다는 생각이 내가 알고 있는 참된 신이라는 것이다. 말씀 지켜서 받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호의를 받았다고 생각해야 된다는 것이다.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다.”(행17:25). 거저 주시는 분이다. 안 착해도 준다. 신은 퍼주시는 분으로 반영되고 있다. 다만 종교 없이 살자는 것이다. 그냥 살자는 것이다. 지금 사도바울은 이렇게 점잖게 설교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걸로 구원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냥 사는 것,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신은 퍼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고 구원받겠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설교를 시작했을 뿐이다. 이제 사도바울은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줄 수 없는 은혜가 온다는 그 교차점에 예수님의 죽으심을 집어넣는다. “니가 알아? 왜 퍼주시는지?” 그 교차점, 그 교차점을 전하는 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설교방식이었다. 여기에다가 사도바울이 결정적인 중요한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하나입니다.” 일체성을 이야기한다. 일체성을.

 

사도행전 17장 26절,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시고” 일체성, 하나로 묶어버린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한 것 없이 거저 누렸다는 그 점에서 하나로, 일체성을 만들어버린다. 한 것 없이 그냥 누렸다는 점에서.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모든 것이 하나 되어 있다는 것이 떨어져서는 안 된다. 자기만 특별대우해달라고 할 수 없다. 다 거저 받았다. 다 너도나도 거저 받은 입장에서 왜 시건방을 떨었을까? 다음에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해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에 매개체로서 예수님이 들어간다.

 

근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 하고,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간다는 것하고 이거는 말이 다르다. “이렇게 은혜 받은 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었거든요.” 그러면 사람들은 띵한 것이다. 예수님이 살아서 그냥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화투 48장을 나누어주면서 왜 죽습니까? “나는 매개체야! 내가 죽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거저 주는 것은 없어!” 예수님께서는 내가 죽지 않으면 거저 주는 것도 없다고 하신다. 은혜와 죽음의 상관관계다. 이런 상관관계가 특히 이방인들에게는 와 닿지를 않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자기 존재기 때문에. 살아있는 자기는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 거저 준다고 하면 감사하지만, 죽음과 자기의 존재를 어떻게 매치시킬 수 있는 그런 아이디어는 없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점점 더 나아가 공의로 심판하신다고 하신다(행17:31). 심판하실 거면서 왜 줬어요? 사도바울이 좋게 가다가 뒤에다 심판한다고 하니까, 심판과 은혜가 매치가 안 되고, 죽음과 은혜가 매치가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을 풀기 위해서는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된다. 요한의 세례, 예수님의 세례, 곧 성령세례와의 차이점은 뭔가? 세례요한의 세례는 천국 못 간다. 성령 세례를 받아야 천국 간다는 것인데, 왜 세례요한의 세례가 거추장스럽게 미리 왔는가 하는 것이다. 호의를 베풀어놓고 심판을 한다는 것과 세례요한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와의 이것이 서로 연결되어 설명할 수 있다. 힌트는 일체성이다. 전부 다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박스에 모든 사람을 다 집어넣는다. 인류를 하나, 1로 취급한다. 75억의 인구를 한 아담으로(로마서 5장). 단 하나에서 새끼 쳤던 75억을 도로 한명으로 응집시킨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대할 때는 내가 은혜로 너를 만들었다가 된다. 이것은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줬다는 것과 같은 취지가 된다. 이렇게 해버리면 기존의 종교성은 인간 중에 괜찮은 하나를 뽑아서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시켜 그 덕을 보자는 것이다. 이게 종교성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반대다. 하나님이 그 한 사람을 죽여서 우리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은혜를 주셨는데, 그 은혜의 최고의 은혜는 예수님을 죽여서 살려냈다는 것이다.

 

그러면 죽여서 살려내는 것하고 그동안 태어나서 사는 것하고, 이 두 개의 가치를 비교해봐야 한다. 사도행전 17장 30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그다음에 31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이다. 우리의 잘잘못을 묻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심판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악인이든 선인이든 그냥 퍼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퍼주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선물은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에 붙을 것이냐는 것이다. 아니면 그 선물을 발길로 차버릴 것이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걸로 결정적인 심판의 한방을 날리겠다는 것이다.

 

일체 묻지 않을 테니, 신에게 바쳐서 챙기는 그런 공식을, 종교성을 철폐하자는 것이다. 착해서, 바쳐서 복 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뭘 해줬는가가 중요하다. 분명히 주님께서는 정하신 사람으로 죽음 가운데서 살려낸 것을 복음이라고 내세우는 것이다. 죽은 자를 살려낸 것이 복음이라면 아담(인간)쪽에서는 복음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착해도 더 착해야 하고, 아무리 바쳐도 더 바쳐야 하고 아무리 잘해도 더 잘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개인적인 의견이나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서나 꼬시기 위해서 했다면 안 먹혀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행19:13-14절을 보면,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14절,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사도바울이 마귀를 쫓아내니까, 그게 굉장히 신기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자기도 모방을 해서 예수 이름으로 나가라고 하니까, 거기에서 유명한 고백이 15절에 나온다. “악귀(마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라고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마귀 쪽에서도 유명한 것이다. 하나님의 천국에서 인정한, 유일한 주의 종이라는 사실을 저 반대편에서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바울의 설교를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유명한 바울이 편하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바울은 고생을 한다. 풍랑이 인다. 편하게 살지 못하게 한다.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죽음 가운데서 바울의 자리가 바로 주님의 자리였다. 지금 사도바울의 싸움은 영적싸움이다. 인간의 싸움이 아니다. 인간의 차별, 직업이라든지, 수입이라든지, 금전, 부동산, 재산, 행실, 행동, 지금 그것 가지고 사람을 평가 안 하기로 이미 하나님은 정했다. 사도바울은 사람을 죽이는 그것으로도 악마한테 협박당하지 않았다. 다윗도 마찬가지다. 살인하고 간음했어도 협박당하지 않았다. 왜? “나 원래 그런 놈이니까.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야!” 이게 성도의 표준모델이다. 그런데 악마는 죄가 있다는 것이다. 이게 악마의 구조다. 그러나 주님의 구조는 죄가 없다는 것이다. 주님은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어주는 트랜스다.

 

사도바울은 니들이 악마를 알아? 하나님이 퍼주는 것을 알아? 그냥 퍼주면 밥 먹고 살면 된다. 하지만 마지막 심판은 끝난 것이다. 따라서 그 퍼주는 그 호의의 결정판, 그 결정판은 우리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아들을 죽여서 살려내는 이 과정에 개입된 성령이 자기 택한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을 집어넣어 줘버리면 이 사람은 거저 죽었다가 거저 살려내신 주님의 은혜를 거저 아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서 모아이의 일부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게 사도바울의 설교다.

 

그러면 세례요한의 세례는 뭐냐, 사도행전에는 안 나오는데 골2장에는 나온다. 세례란, 한 몸이다. 연합이다. 예수님이 택한 백성을 위해 죽으면 우리도 죽어야 한다. 그런데 주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셨으면 우리도 다시 살아나야 한다. 이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도 좋든 싫든 의인으로 살아나야 한다. 누구 덕분에? 주님의 액션 덕분에 한통속으로 뻔뻔스럽게 살아나야 한다. 이 뻔뻔스러움이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이 뻔뻔함을 강력히 반대했다. “인간은 착한만큼 주께 영광 돌리는 도덕적인 존재다. 이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거룩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 사고방식에서 뭐가 빠졌느냐 하면 세례(끈)가 빠졌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세례가 왜 안 되느냐 하면 준비단계는 되지만 결론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본인이 알아서 물에 들어가야 한다. 본인의 액션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성령세례는 일방적이다.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죽으시고 살아나셨기에.

 

주님께서 성령을 주심으로서 그 다음에는 본인이 본인의 원대로 하지 않고, 끈을 묶어놓으면 예수님의 성령께서 앞장세워서 필요한 대로 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가 아니고 사명이다. 존재의 특징은 홀로 있다. 사명은 지시하는 다른 외부인이 따로 있는 것이다. 이게 사랑이다. 골프를 쳐도, 크루즈여행을 가도 다 주께서 인도하신 것이다. 이렇게 살아도 될 정도로의 뻔뻔스러움! 그것이 거저주시는 은혜에 대한 사도바울의 설교다.

 

8강 교회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렇게 설교를 하는 사도바울을 누가 괴롭히는가? 처음에는 이방인들이 괴롭혔지만 이제는 교인들이 괴롭힌다. 같은 교인들이 그렇게 괴롭히면 하나님의 원수가 점점 더 위험한 지경으로, 적과 적이 뚜렷이 구분되지 않고, 우리의 거룩한 공간까지 마귀가 침투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천막장사를 했어도 모자라서 빌립보교회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인간은 사람과 사람으로 만난다. 노동자로 만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인간관계가 우선이지 노동관계가 우선이 아니다. 돈만 많이 주고 잘해주면 얼마든지 일할 수 있다. 헌금해서 부동산을 사고, 여기서 부동산이 생긴다. 소유주가 누구? 이렇게 된다. 부동산은 있음이 되고, 최종소유주는 존재에 종속이 된다. 그 부동산을 교회라고 해버리고 연속적의미를 준다. 이 의미를 지키기 위한 사명이 이 소유주에게 주어진다. 그래서 이 소유주는 부동산 지키는 사명으로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게 교회인가? 왜 교회까지 악마가 따라왔는가? 교회는 왜 무너져야 교회인가?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행20:28). 존재가 아니라 지속적인 기능이 살아있는 곳이다. 피의 가치가 계속해서 살아있는 그때만 교회가 된다. 이럴 때 교회 있음은, 교회가 존재가 아니라 사건이 된다. 그 이유는 자기를 쫓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행20:29). 자기라는 인물, 거짓인물이다. 피를 흘리지 않았다. 사울은 사울파를 왜 좋아하지 않았나? 나는 십지가 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동의하면 교회고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다. 피 흘린 그 분만, 한 분만으로 결정하자! 교회는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능이니까. 사명이니까. 십자가지지 않은 자가 은근히 소유권을 주장했을 그게 바로 악마가 침투한 교회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교회가 없다. 이런 교회밖에 없다는 것에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완벽한 교회가 있으면 우리는 또 달려가 악마의 교회로 만들어버리니까.

 

사도바울은 아무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고, 탐하지는 않았지만 받아 챙겼다(행20:33).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했다(행20:33-34). 이것은 기능에 대해서 도와준 것이다. 은사가 끊어지면 안 주겠다는 뜻이다. 사도바울에게 준 게 아니고 예수님이 사도바울과 어떤 기능을 행사할 때, 주의 지시에 의해서 성령 받은 사람이 하게 되면, 은사를 받아서 그 사람이 필요한 것을 주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퍼주시는 하나님이시니까, 서로 예의를 차리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에베소를 떠나면서 빠이빠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사도바울이 어떤 동네를 떠날 때 빠이빠이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 동네 주민들,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반대할 때는 미련 없이 떠났다. 자기를 반대할 때 억지로 붙어있지 않았다. 반대하면 그냥 떠났다. 왜냐하면 반대하는 것이 그들의 뜻이 아니고 주께서 이제 됐다고 하는 주님의 시그널, 신호로 본 것이다. 떠나가면 주께서 갈 곳을 인도해주겠지, 라고 생각한 것이다. 누굴 원망하지 않았다. 누굴 원망하는 그런 것 없었다. 그냥 가는 것이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사명이 내 존재보다 우선이다. 묻고 따지지 않는 퍼주시는 은혜다. 예수그리스와 함께 묶여 있어서,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를 너 같은 인간을 통해서, 더욱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주신 은혜, 그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의 반응은 이렇다. “캬!!” 사도바울은 믿음이 좋다. 믿음 좋은 사도바울이나 이렇게 사세요! 사도될 만 해서 사도되었구나! 이렇게 모든 영광을 주께 빼앗아 사도바울에게 주는 것이다. 우리는 나중에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사명을 빠트렸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평생에 사명이 늘 앞장섰다. 사명이 우선이었다. 다른 사람과의 특이점은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혼은 미친 짓으로 보았다. 주님에 대한 사랑을 배우자에게 바치는 위험한 짓으로 보았다. 될 수 있으면 결혼하지마라. 그러나 너무 사랑스럽거든 결혼해라. 차라리 결혼해서 실컷 고생해라. 원 없이 고생해라. 사명이 사도바울을 이렇게 만든 것이다. 결혼을 안 했으니까 자식이 없었다. 자식이 없으니까 돈을 모을 필요가 없다. 혼자 먹고 다 쓰면 된다.

 

뻔뻔스러워져라! 이것이 사명이다. 사명. 자식 놓는 것도 사명이고, 자식한테 재산 물려주는 것도 사명이고. 그게 전부 다 주님이 주신 사명인데, 그 사명이 뭐냐 하면, “나 이토록 죄인입니다.”를 들추어내는 사명. “이만큼 잘났습니다.”가 아니라, “이렇게 못난 놈을 건져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그 사명. 그러니까 결국 그냥 사는 것이다. 내가 나를 안 만들었으니까.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20:28). 자기 피로 사신 교회는 피가 중지되지 않는다. 반드시 교회는 있기 마련이다. 듬성듬성 있어도 촘촘히 있어도. “이 말을 한 후에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행20:36).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행20:37).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행20:38). 이 대목을 보면 사람들이 굉장히 좋은 사람들로 보이지만, 아니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사도바울을 좋아했느냐 하면 사람들이 눈이라도 빼주려고 했었다. 눈이라도. 사도바울은 이것을 기능이라고 보았다. 3초의 기능으로. 3초의 사명으로. 주께서 인도해야지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주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것이다.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행21:10). 가지 말라는 이야기인가? 가라는 이야기인가? 성령이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더욱 가야한다. 사도바울은 아바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아픔을 그대로 운반하는 사람인데, 이것이 사도바울이 받은 사명이다. 고린도교회에선 고생을 많이 한 사도는 저주받은 자로 보았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단호하게 말한다. 나를 사도라고 하지 않는 자들을 고린도교회에서 내쫓으라는 것이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행20:9). 강의 내용대로 실제로 죽음이 일어났다. 모든 사람에 의해서 죽었다고 판정 난 상황이기 때문에 이건 죽은 자가 맞다. 죽은 자 맞는데, 다른 사람은 여기에 손을 댈 수가 없다. 유일하게 사도바울이 손을 댐으로써, 생명을 줌으로서, 사도바울의 기적뿐만 아니고 그동안 밤새도록 강의한 강의내용, 이게 옳았다가 증명이 되는 것이다. 주의 의해서 죽은 것을 알고, 주의 뜻이 있다면 살아날 줄로 알고, 사도바울은 그렇게 이해했고, 밤새도록 전했던 그 복음 내용이 진실이구나, 이게 현실자체구나를 알게 되는 것이다. 주님은 살아있다. 죽었던 분이 지금도 살아있다. 그래서 인간이 살아서 활동하는 그것은 보지 말고 주님이 활동하는 그걸 보는 것이다. 그것이 이미 시작된 천국생활이다.

 

사도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복음을 전한다(행26장).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난 그 사실을 세 번씩이나 이야기한다. 사도행전을 역사로 받아들이게 되면, 이런 이야기가 사적인 경험으로 끼어 넣어 진다. 그러나 세 번이야기(행9:7, 행22:9)를 한 것은 역사를 찢어버리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장님으로 살았을 때는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그렇게 생각과 행세를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도바울의 설교에 의하면, 그게 종교성이다. 종교 빼고 살면 되는데, 그저 한 것 없이 거저 누렸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께 이만큼 충성봉사, 십일조 했기 때문에 나와 우리 가정이 잘 됐다는 것이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인간의 본성이 어디에 가겠는가? 장님인데 운전을 잘하고, 장님이 장님끼리 보다가 장님인줄 모른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안다. 저 세상을 아니까. 지금 이것이 팩트다. 안 그러면 동화책이다. 주님의 살아계심으로 지금도 반복이다. 사도바울의 눈을 뜨게 하여,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셨다. “이 세상은 어두움에서 일체성을 갖고 있고, 구원은 빛의 세계로, 그 다음에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그리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라고 주께서 시켰습니다.”라고 사도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할 때, 아그립바 왕이 하는 말이 “바울아 니가 미쳤도다”(행26: 24)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제대로 잘 전한 것이다. 양보 없이 전했고, 냉정하게 전했고, 똑바로 전한 것이다. 왕이라고 해서 봐주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알아서 기면서 권력 앞에 입을 다물고 있다. 왜? 살라고! 병이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치료받기 싫어하는 그 고집,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집착하는 것, 악마의 권세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성공한 것이다. “니 지금 악마의 권세에 있다!”

 

 

9강 폭풍 속으로

 

불의 혀로 시작했다가 풍랑으로 끝난다(행27:14). 자연현상은 인간이 관찰할 수 있는 인간의 한계다. 하늘과 달과 별, 인간이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질서다. 행 2장에서 성령은 인간의 한계로 여겼던 질서를 뚫고, 자연세계를 뚫고 오시는 것이다. 외재성이다.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렸다고 한다. 인간은 처음 만들었을 때도 에덴동산에 갇혀있었고, 추방되어서는 자연에 갇혀 있는 것이다.

 

인간이 별을 관찰해봤자, 별은 계속 도망치고 있다. 별의 확장성이다. 마치 대자연은 인간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따라오려면 따라와 봐! 그런 식이다. 마지막을 넘어서야 전부를 아는데, 마치부부사이처럼, 안다고 했는데 살면 살수록 우주팽창성 같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서로가 서로를 알 수 없다. 누구야 너? 정체성을 모른다. 이처럼 갇혀있는 인간에게 성령이 오신 일, “이게 다야.”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주는 것이 이거 외에는 일체 없다는 것이다.

 

성령이 불의 혀같이 임함으로 말미암아, 불의 혀같이 임한다는 것은 바로 불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약속대로다. 요엘 예언서에 의하면 마지막 때에 불이 임하는데, 이렇게 불이 임한다가 너희들이 알고 있는 마지막 장면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마지막 장면을 성령을 통해서 미리 보여준 것이다. 불이다. 그리고 이 불은 미리 앞당겨서 언어의 형식으로, 혀니까, 언어의 형식으로 너희에게 전달되었다. 하나님의 할 일은 끝났다. 다 했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이 세상의 마지막 장면을 아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내용 중에서 마지막으로 이야기한 것이 죄사함이었다. 과학, 의학, 물리학, 어떤 학문으로도 죄사함은 없다. 공부 많이 해도 죄사함은 없다. 박사학위를 받아도 죄사함은 없다. 세리, 창기도 죄 사함 받는다. 죄사함은 받는 것이 아니다. 죄사함은 외부에서 침투한다. 방언이기 때문이다. 죄사함의 효과가 눈에 보일 때는 현상으로 드러나고, 이 현상을 통해서 인간의 존재는, 사도의 존재는 소멸하는 것이다. 소멸, 사도는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다. 교회가 뭔지, 인생이 뭔지, 알 필요가 없다.

 

복음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 구태여 내가 나를 계산해서 가질 필요가 없다. 사도행전의 마지막은 사라짐이다. 점점점...예수님의 효과로 미미하게 사라진다. 다 사라지는 것이다. 나에게 주신 거룩함은 나를 사라지게 한다. 사도의 사라짐이 예수님의 사라짐과 유사하다. 이게 복음의 효과다.

 

사라지는 것인데, 왜 풍랑이 이는가? 하나님께서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준비했다. 근데 풍랑이 어느 정도의 풍랑이냐 하면,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행27:20). 큰 풍랑이었다. 구원이라는 것을 생각하려면 존재가 있어야 하기에, 살고자 하기에 구원에 대한 의미가 심각하게 위협으로 다가왔다. 살아야 되는데 살 희망이 없었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셨으니”(행27:24).

 

사도와 함께 죄수로 동행한 사람이 276명이다. 자연의 변화 앞에 다 두려워 떨게 만들었다. 그런데 약속을 주시는 것이다. 이건 약속이다. 약속이 큰지 대자연이 큰지를 대조시키는 것이다. 14일 동안 해도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다. 너희들은 끝났어! 이것이 존재의 한계다. 존재의 한계는 풍랑에 빠져 죽는다는 것이다. 자연이 살면 우리가 살고 우리가 살면 자연도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외재성, 이런 자연의 한계를 뚫고 약속이 들어온다. 비록 대자연은 너를 협박할지라도, 너의 존재를 위태롭게 할지라도 약속은 끄덕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풍랑을 준비한 것이다. 자연의 풍랑이 아니더라도 자식들이 속을 썩여도 그게 풍랑이다.

 

한평생 우리가 온갖 짓을 다 하면서 살았어도 마지막에 약속이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로또 맞은 것이다. 그 분이 나를 구원하는 근거는, 나보다 더 센 분,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기 때문이다. 죽었다가 살아남을 증거 하는 증인으로 이제부터 살게 하시는 것이다. 나는 애초부터 사라져야 하고 그걸 위한 긴긴 세월은 하나의 사건에 불과했다. 살아온 것이 아니고, 존재한 것이 아니고, 그냥 사건을 통과하고 온 것이다. 주께서 허락한 사건을 통과한 것이다. 이게 인생이다. 그게 풍랑이다. 풍랑 속에서 배운 것이다. 결국 사도는 애초부터 없었다. 사건은 바람 같아서 있다가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가 없는데, 풍랑은 왜 일고하는가? 사도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죄인의 역할로 사람들에게 서야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죄인 아닌 자가 죄인 아니기를 원했던 죄인인 자들을 구원하는, 예수님의 존재와 그 십자가 사건을 사도를 통해서 반복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게 바로 성령께서 오신 자들의 특징이다. 성령 받았다면 이제부터 죄 속에 살아라. 이것이 나와 주변을 살리는 임무다. 멀쩡한데 죄 속에 있는 것이다. Mission: Impossible

 

사도바울도 지금 죄수276명과 죄수 취급받아서 로마로 호송되고 있다. 죄수이기에 지도자급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다 살림으로서, 없어져야 될 인물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기존인물들을 다 파괴시킨다. 예수 믿으면 착한 것이 아니다. 주께서는 죄수 아닌 죄수로 살게 하셔서 무시당하는 자를 구원하는 역할을 이 땅에서 맡긴 것이다. 그런데 근본적인 문제는 창3장, 선악을 아는 자체로 내가 의인이라고 쳐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의 본래 모습은 아니다. 본래 모습은 몰라도 되는 것이다. 바로 몰라도 되는 이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천국가기 전에 미리 우리에게 살면서 그렇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지 잘난 체 하니까 죄수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자기의가 있기 때문에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그걸 딱 지목해서 율법을 줘가지고 그러니까 니는 죄인 중에 죄인이라는 것이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니가 죄를 모르고 죄 지은 것 없어서 나는 잘난 체 하고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그게 바로 창세기 2장을 모르는 죄인이라는 뜻인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 2장으로 못 넘어간다. 만만치 않다. 거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세우고, 십자가 연속성으로 사도바울을 세운다. 풍랑이라는 사태 앞에서 인간의 지식이나 노하우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가운데서, 살리는 것은 오직 “걱정하지 마라 로마에 선다.”라는 이 약속뿐이다.

 

이 약속 때문에 사도는 살아야 하고 살 필요도 없는 다른 죄수가 산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 덕분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본인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알 필요도 없고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복음이란 애초부터 자기한테 미련을 둘 필요가 없다. 내가 뭔가 잡았다, 소유했다가 문제다. 유령인데, 아무것도 아닌데, 세상주변으로부터 뭔가 자꾸 채우고 붙잡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외재성인데, 침투한 외재성으로 우리는 그냥 현상에 불과한데, 이것이 복음인데, 그걸 흔들어놓기 위해서 창세기 3장에서 기어이 창세기 2장으로 못 가겠다고 하는 인간들은, 인간 쪽에서 대자연의 질서에서 진리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생각한 카드를 찾기 위한 방법으로 나열한 카드에서 정보 4개만 알아도 찾아낼 수 있다. 후루꾸(요행수)다. 인간이 찾아가는 방법이 다 이렇다. 그래서 어디를 가도 터줏대감(노하우, 정보가 많은)들이 있다. 빅데이터, 정보를 잘 듣는 것이 미래의 희망이 되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존재에 응축되어 있다. 병이 들었는데도 치료를 싫어한다. 인간은 다 정신병자다. 남을 패면서 즐거워하는 사디즘이, 또 하나는 자기가 얻어맞으면서 즐거워하는 마조히즘이, 바로 자본주의다. 돈 자체가 상품화 되어 집착증과 편집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얼마 버는데?” 마음을 낮추면 된다. 소멸된다. 소멸 중에 약속이 부여된다. 니 역할이 중요하다. 드라마 연극이 끝나면 우리 역할은 끝난다. 흙인데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있다. 역할 다 하면 끝난다. 하늘나라에서는 시집도 장가도 아니 가고 천사와 같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방언이다.

 

사도행전 28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독사에게 물렸는데, 독이 퍼지지 않았다. 인간의 빅데이터는 몇 초 만에 독이 퍼지는데, 이 정보는 쓸모없는 것이 된다. 정보에서 나올 수 없다. 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모아놓은 그 정보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것, 죄인인데 의인으로 변화시켜주는 그것을 사도바울은 전파하는 것이다. 건강해도 건강이 아니고 아파도 아픔 그것이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몸이 아프냐 건강하냐를 가지고 너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의 잣대로 삼지 말고, 니가 예수님의 피로 죄 없게 되었느냐, 니가 죄를 갖고 있는가, 그게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지금 사도바울은 멜리데 섬에서 이 보블리오 추장을 만났고, 그 증거로 추장의 아버지의 열병을 고쳐준다(행28:8).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나라를 증거 하고”(행28:23). 하나님의 나라를 새롭게 이해를 해야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골라잡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을 때 하늘나라에 소속되지 아니하면, 들어가지 아니하면 오는 세계에 못 들어간다. 미리 예약이 되어 있다. 예약이 되어야 한다. 이미 온 하늘나라의 소식을, 말씀을 귀찮게 여기고 외면해버리면 나중에 그 사람의 운명은 끝장이날뿐이다.

 

①번. 성경을 어떻게 해서 먹을 것인가? ②번. 성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인가? 성령이 어떤 것을 주셨는지, 우리는 ②번이 정답인줄 알지만 우환이 있을 때는 성경을 나를 위해서 써먹으려고 한다. ②번인 줄 알지만 나라는 존재에 집착하는 순간에 ①번은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장사가 안 돼서 조금 손해 보는 것, 성령께서 주신 주님의 풍랑이다. 하나님 나라는 바울처럼 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보다 성령이 주신 하늘나라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이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행28:24-27)

 

그 하늘나라가 외재성으로 다가왔을 때,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성령으로 흩어지는 것이다. 성령으로 했더니만 흩어졌다. 왜냐하면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 때문이다. 다 간다 해도 우리는 왜 갈 수 없는가? 그것은 이사야로 하신 이 말씀이 우리를 강권적으로 장악한 것이다. 다 흩어져도, 그럴 경우라도 가족보다 교회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나는 죽었다 살아난 약속과 복음만 자랑한다. 나에게서 나온 말이 아니다. 다 흩어질 때 사도는 감사했다.

 

나는 안 완악했는가? 나는 안 둔했는가? 나는 장님이 아니었었나? 나는 귀머리가 아니었었나? “오지 마!” 이 오지마를 뚫고 왔기 때문에 우리는 횡재한 것이다. 안 오셔도 되는데 오셨다. 그래서 내가 사는 것은 주님의 뜻이다. 성도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가끔가다가 이게 내가 미쳤나? 진짠가? 할 때가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것으로만 끝나면 진짜다.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셨다. 이게 진짜구나!” 풍랑보다 더 센 게 약속이다. 죄인이 되라! 오늘날 우리들이 사도다. 사도는 이렇게 사라진다. 죄인이 될 경우에만, 내가 무가치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때만 사도의 기능을 할 수 있다.

 

<후기>

이근호 목사님의 강의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사도바울의 움직임이 보이고, 사도바울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예수님이 하신 일이 보인다. 예수님, 그 분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이게 복음이다. 왜 복음인가? 존재가 아니라 사건이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사건이다. 이 복음을 전파했던 사도행전은 역사가 아니다. 철판에 어떤 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해도 그것은 하나의 철판에서 만들어진 요리다. 이 세상에서 만들어 낼 수 없는 단 하나의 사건,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사건에서 파생되어져 나온 모든 사건은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을 뿐더러 다 흡수되어 녹아져 아무것도 남지 않고 다 사라진다. 이 세상에서 판단기준이 되는 모든 것들도 아무 의미 없이 사라진다.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도 아무 의미 없이 사라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이 세상이라는 아랫동네에서는 우리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천사도 함께 살고 있다. 천사뿐이겠는가? 예수님의 영이 활동하고 계시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지워버린다고 해서, 들리는 것을 살해한다고 해서 면제되지 않는다. 거저주시고 막 퍼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에도, 햇빛과 공기와 비를 내려주시는 이 은혜에 감사하며 살고 있음에도, 인간의 끝없는 불만은 어디서부터 생겨나는 것인가? 감사는 곧 자기정당성을 고수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가면일 뿐이다. 그 가면을 벗기기 위해서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되게 하신다. 그래서 고통 없는 인간은 없다. 고통이 왜 주어졌는지 모르면서 고통스러워한다. 갇혀있다. 가두리양식장이라는 하나의 양식장에 일괄적으로 다 갇혀있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수많은 정보를 동원해도, 죽음에 가둬놓고 심판을 행사하시는 단 하나의 사건, 십자가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이 뭘 잘못해서 고통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이 땅을 다녀가셨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풍랑보다 더 센 약속을 가지고 오신 분, 성령의 일방적인 침투는 자기존재증명에서 손을 놓게 하고 예수님을 증거 하는, 죄수 아닌데 죄수인자로 살게 한다.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계시다. 교회가 우선이 아니고 복음이 우선이다. 성령의 발길질로 편하게 살지 못하고 부산스럽게 움직여야 하는 사도바울의 전도여행의 핵심은 복음이라는 매개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처럼 선교한다고 따라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게 아니다. 복음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서 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움직임은 존재가 아니라 현상이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반복해서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 실체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자기보호를 위해서 자기를 붙잡지 말아야 할 교회를 붙잡고, 로마마저도 옹호했던 혈통중심의 교회, 유대교회는 다 권력이고 그 권력과 결탁한 정치세력이었다. 그 밑바탕에 깔린 것은 나만 살면 된다는 본성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침대로 삼고 까치발을 딛고 구원받고자 했다. 그런 유대인들을 쳐내고 개 같은 이방인을 구원함으로 진짜 이스라엘의 구원의 내용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아닌 무조건 잘못했고, 구원받지 못할 저주받은 자로 드러나는 것이 구원의 내용이었다. 율법의 메시야가 아닌 율법 외의 메시야의 구원이다. 사도바울은 북이스라엘/니느웨, 유대인들/이방인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이방인/ 사도바울, 이 대조를 통해서 주님의 생뚱 맞는 구원방식을 전하는 것이다.

 

바울의 인식은 점점 더 수정되어져 가고 심화되어 간다. 그래서 답답한 가면을 벗고 후딱 죽고 싶은 것이다. 가면을 벗기면 예수님이 그 안에 있다. 사도바울은 움직이는 경계선이 된다. 가는 곳마다 갈라지고 흩어진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복음전파 때문이다. 창세기3장에서 선악과에 발목 잡혀 있는 인간은 절대로 2장으로 넘어갈 수가 없다. 죄인인줄 몰라야 되는데, 죄인인줄 안다. 죄인인줄 아는 그것이 저주받아야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세기 3장의 죄기 때문이다. 착하면 행복하게 살고 나쁘면 불행하게 산다는 이 선악적사고방식이, 예수님의 죽음을 유발시킨 것이다.

도박판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종교마저 예수님마저 도박판에 벌여놓고 판돈을 건다. 판돈을 다 가져가는 자가 성공한 것이고 판돈을 잃은 자는 실패자가 된다. 인간의 행복만을 추구하기 위한 이 경쟁마당에서 낙오자는 필요치 않다.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면 복음이 아니다. 사도바울을 죽음이 소용돌이치는 풍랑 속에서 살리신 것은 살리시기 위함이 아니라 죽이시기 위해서였다. 풍랑으로 죽어서는 안 된다. 약속으로 죽어야 한다.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풍랑 속에서다. 모든 게 풍랑이다. 풍랑 아닌 게 하나도 없다. 하지만 구원받고자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생각한 구원이라는 것이 사라진다면, 우리가 의도한 14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의도한 14일이 지나면, 로마에 가서 가이사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사도바울에게는 구원이었듯이 성도에게도 구원이 된다. 연극이 끝나면 정적만이 흐르고, 죄인이라는 역할이 끝나면 답답했던 가면을 벗고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것이다.   

 

태풍 같은 성령이 불어 닥치면 성도(?)가 성도(?)를 감당하지 못한다. 이상하다. 태풍은 다 휩쓸어버린다.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태풍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처럼, 성령은 사건으로 남아있다. 다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인간뿐이다. 변한다면 죄인만이 변한다. 죄인이 변화의 흐름에 따라간다면 주님께서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죄인을 주님이 만드셨기 때문이다. 우린 방언 때문에 갈라지는 것이 아니다. 성격, 기질, 목소리, 외적인 것 때문에 갈라진다. “내 말 들리니? 내가 말하고 있잖아!” 내 말을 들어주면 내 편이고 내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다른 편이 된다. 무수한 말들이 오가지만 방언은 없다.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뿐이다. 방언은 못 알아들어야 한다. 예수님만이 십자가지셨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외쳤던 것은 내가 십자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누구의 말도 듣지 말아야 한다. 단 성도에게 성령이 오시면 우리의 내부는 방언으로 가득 차게 되고, 그 방언은 어떤 이에게는 사망의 냄새로, 어떤 이에게는 프레쉬fresh한, 살아있는 향수가 되어 흩어지게 하실 것이다. 사도바울이 가는 곳곳마다 갈라섬의 현상을 일으켰듯이, 그렇게 말이다. 우리는 늘 이중결정에서 산다.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으로, 그러나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언약으로... 우리가 죄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죄인이 되어야 된다.

 

교회는 무너지지 않는다. 주님의 피로 사셨기 때문이다.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교회는 없는 것이다. 무너지지 않아야 교회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눈치 보지 않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을 유창한 말로 전했을 때, 니가 미쳤구나! 라는 말을 사도바울은 들었다. 잘 전한 것이다. 제대로 전한 것이다.

 

“잘 전하셨습니다!”

 

사도바울에게 눈이라도 빼주고 싶어 했다. 아니었다.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사도바울의 인식에 수정이 일어나고 심화되었던 것처럼, 그래서 초창기 편지보다 옥중에서의 편지가 더 깊어져 갔었던 것처럼, 그렇게 사도바울의 복음은 눈을 빼주고 싶은 그때보다 더 휘몰아가는 현상으로 움직였다. 죄짓는 사명이 나를 미치게 한다. 죄짓고 싶어서. 사적인 아쉬움이 있었어도 기대치 않았던 공적인 욕심이 아쉬움의 그림자마저도 덮었다. 이번 수련회는 죄짓기 위해서 늦은 밤까지 이야기하고 죄짓기 위해서 아침 일찍 일어났어도 피곤하지 않았다. 미쳤다. 가야산에서 내려오자마자 자연의 한계에 부딪힌다. 이 자연의 한계를 뚫고 들어오신 외재성으로 인해 내재성은 짜증의 언어를 토해낸다. 엄청 덥다. 오늘은 좀 시원하겠지... 그 기대마저도 포기하도록 매일 새롭게 더웠다. 폭염으로 죽을 자는 죽는다. 그런데 죽지 않는다. 이미 죽었는데 뭘? 그럼에도 시원한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에어컨 바람 말고 자연의 바람이... 중첩된 현상으로 벌써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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