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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6 06:57:38 조회 : 264         
   십자가 마을 수련회 1강-3강 요약(이미아 성도님의 글)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2018년 여름수련회 요약글-사도행전 (이미아)

<요약>

1강 무슨 일 있어?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행1:10)

고요하게 그냥 정상적으로 흘러가는 세상에 천사 둘이 나타나게 된다. “천사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천사가 뭔가 일을 시작해버리면 인간들은 이것을 따라가야 할지, 부정해야 할지. 인간들이 천사 둘을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 쪽에서 어떤 변화가 나타날지, 인간 쪽에서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 천사를 다른 말로 하면 인간세계 바깥에 있는 존재, 외재성이다. 외재성인 천사가 이 세상에 나타났을 때, 천사와 우리가 하는 뜻이 같을 때는 천사는 천사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자연스럽게 살면 되는데, 그런데 천사와 우리가 하는 뜻이 다를 때는 없애든지, 회개하든지, 항복하든지 해야 되는 것이다.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1:11)

천사가 등장했는데, 등장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올라가지 않아서 알 수 없는 다른 환경을 제시하는 것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위로 올라가면 밑에서 볼 수 없는 다른 환경을 다 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올라가심으로 올라가신 분이 보는 안목으로 하시는 말씀은, 인간 너희들이 살고 있는 환경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올라가셨으니 인간세상을 새롭게 파악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을 가지고 역사를 뽑아낼 수 있을까? 있을 수 있다. 사도행전에서 일어난 일들을 연결시키면 역사가 되는 것이니까. 그런데 그 뽑아낸 역사를 가지고 사도행전을 연결시키는 방식이 사도바울의 편지에서 용납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용납할 수 없다. 사도행전 뿐 아니라 절대로 모든 세상역사를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보게 되면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는, 인간의 몸을 중심으로 하는 시간의식을 긍정하고 옹호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환경에서는, 인간들끼리는 용납하지만 예수님이 올라가버리면, 위에서 보는 다른 환경에서는 이런 시간의식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에 사도행전을 역사로 보면 성령 받지 못한 자도 사도행전을 쓸 수가 있게 된다. 그럼 아무런 차이도 없게 된다. 성도와 성도 아닌 사람, 천국 가는 사람과 지옥 가는 사람의 차이가... 성도가 되려면 성령이 있어야 하고, 성령이 있다면 일반인들의 안목이 아니라 올라가서 봤던 다른 안목이 있어야 된다. 그렇게 되면 사도행전은 전부가 하나의 사건이 돼버린다. 단 하나의 사건이 된다. 하나하나 흐르고 있는 역사는 존재기 때문에, 사건은, 흐르고 있는 일어난 일에다 플러스해서 보태기 할 수 없다. 몇 살 몇 살 때 일어난 일은 사건에 말려든 것이지 그걸 ‘나’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에스겔처럼, 사도바울처럼, 요한처럼 신에 이끌리어 올라가야 한다(겔3:12 고후 12:2 계4:1).올라가면 다른 환경이 보인다. 천사가 두 명 나타났다는 것으로 사도행전의 시작을 한다는 것은 이 세상은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위함이다. 심판이라는 테두리 안에 이 세상 모두가 갇혀있다는 것이다. 가두리양식장에 갇힌 물고기처럼. 세월이 몇 년, 몇 십 년, 몇 천 년이 가도 상관없다. 갇혀있기 때문에. 갇혀있다는 것은 죽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죽어 있는데 굉장히 바쁘다. 이 세상에서 바쁜 그 모든 것들이 이미 들려 올려간 입장에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죽은 자의 생활일 뿐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을 주시고 안목을 주시고 새로운 언어를 주셨다. 창세기 11장을 보면 바벨탑에 마법을 걸어 놓았다. 모든 민족들이 서로 언어가 안 통하는 마법을. 그러면 주님께서 마법을 풀어주면 될 것 아닌가? 주님은 마법을 풀어주는 대신에, 공통적인 언어를 주되 그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새로운 장벽의 마법을 걸어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말은 하나인데 서로가 못 알아듣는 마법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방언이라는 마법으로 더 철저하게 마법을 걸어놓은 것이다. 말이 아니라 이제는 내용을 못 알아듣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환경에서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천사들이나 아는 내용을 지금 사도를 통해서 현재화시킨 것이다.

사람들이 사는 환경에 외재성, 천사가 예언한 대로 성령이 오심으로 방언을 하게 되면, 내재성으로 삽입이 돼버리면, 사도행전 28장 26절의 말씀처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게 된다. 사도행전을 역사로 보면 옛날 일로 그냥 끝나고 만다.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시대에 돌입했다는 것이다. 이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알지 말라고 마법을 걸어놓았는데 왜 알라고 하는가? 마법을 걸어놓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그건 몰라야 된다는 것이다. 그걸 알아차리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천사다.

그리고 사도들도 마법에 걸려 어디로 튈지 모른다. 본인이 본인의 일을 결정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랫동네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윗동네(천사가 온 동네)에 갇혀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랫동네에 갇혀 있고 사도바울은 윗동네에 갇혀 있기 때문에 비두니아(터키북쪽)로 가지 못하게 막고 마게도냐(그리스북부)로 가게 하셨다(행16장). 갇혀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다녀가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처참하게 밉상 받아 죽음으로 빠져나갔다. 윗동네가 우리한테 다가올 때 죽음의 세계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죽음이 아니라 내가 살아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마법을 풀 수 없는 것이다. 풀 수 있는 방법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는 벌써 죽은 자가 되어야 된다. 그럴 때 윗동네의 말을 알아듣는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이다.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이 다른 환경의 안목이 없이는 사도바울의 편지나 사도행전의 설명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근데 사도행전이 돈벌이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데, 설명이 될 필요가 있는가? 필요 없다. 왜 쓸데없는 일을 하려고 하는가? 미쳤는가 보다. 하지만 그 미쳤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도행전의 주역들이다. 그래서 이제 사도행전은 풀린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2:42)(행5:42)

이것은 부자를 능가한 가난이다. 부자를 능가한 가난이기 때문에 도로 부자가 될 이유가 없다. 천사 두 명이 나타난 것을 우리는 감당하지 못한다. 천사를 빼고 해석하게 되면 역사가 되고, 천사를 포함시켜 해석하면 역사가 꼬인다. 역사의 인물은 자리가 있는데, 천사를 끼어 둘 자리가 마련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천사를 빼돌려야 한다. 그런데 천사를 빼돌렸다고 하는 그 빼돌림인 그 외재성이 우리 인간에게 내재성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게 바로 부자를 능가한 가난한 자의 집합이다. 미쳤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낫게 한 후에 예루살렘에는 일이 많이 생기게 된다. 인간의 행정적 처리에서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사도들의 행동은 예루살렘에 역사적, 민족적으로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도대체 뭘 전했기에 그런 것인가?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의 설교에 공통점이 있다. 이중결론(결과)에 대해서 말한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행2:23)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2:24)

이중결론이란, 동일한 결과에 원인을 두 가지 집어넣음을 말한다. 첫째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두 번째는 예수님을 인간 너희들이 죽였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이 죽이신 것인가? 사람들이 죽인 것인가? 지금 사도가 설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갇혀있는 환경에 새로운 환경의 안목으로 예수님의 죽음 사건을 가지고 사람들을 추궁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세계는 갇혀있을 뿐이다. 갇혀있음이 해결은 안 되지만, 이중결론을 계속 전하는 것이다. 성령의 오심으로 새로운 마법을 걸어놓았는데 마법 걸린 사도들이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 뭘 하라는 것이 아니고 이미 확정된 결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하고”(행4: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라고 그 당시 사람들이 ‘이 사람들을’ 따로 규정했다. 여기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함으로 이 세상은 두 파트로 나누어지게 하는 조치가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규정하는 자와 규정받는 자로. 그래서 사도행전은 “같은 사람인데 둘로 나누어지더라”로 끝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이다. 세상 살면서 우리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라는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을까? “미쳤냐? 니가 미쳤구나!”라는 말을.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종교라는 취미활동이나 하면서 대충 산다. 그러나 그런 요령은 하나님한테 피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갈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살면 된다. 우린 가두리양식에 갇혀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냥 살다보면 어느 날 성령이 오면 그 다음부터는 열심히 그들과 놀아주고 다 해줬는데도, 이상하게 저쪽 사람들이 우리보고 미쳤다고 한다. 왜냐하면 다른 안목을 가지고 자기들을 바라본다는 것을 그들이 눈치 챘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천사와 같이 있으면서 세상에 섞여있는 성도의 위상이다.

베드로는 옥에 두 번 갇혔는데, 두 번 다 천사가 다 풀어줬다. 그런데 베드로가 갇힌 그 감옥의 간수는 죽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갇혀있던 그 감옥의 간수는 살았다. 산 정도가 아니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라는 말씀을 주신다. 죽고 살고는 천사 때문이었다. 천사 때문에 죽게 된 것은 외재성을 이야기한 것이고, 베드로나 바울 때문에는 내재성을 이야기한 것이다. 외재성이나 내재성은 전부 하나님이 마법을 걸어놓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못 알아듣는다. 죽게 된 간수는 죽을 때 내가 진즉에 죽어야 할 사람인 것을 하나님의 윗동네 입장에서 파악을 하게 된다. 고마워해야 한다. 베드로가 옥에 갇히게 되어 천사가 감옥에서 풀어줬을 때 비로소 간수는 죽어 있는 인간이었음을 안다. 가두리양식장에 갇혀 죽어 있었다는 것을.

사도행전 전체가 이 세상은 죽었음을 보여주는 단 하나의 사건이다. 그런데 왜 사건들이 많은가? 사도행전 1장에서 28장까지 보면 물방울처럼 사건들이 일어나는데, 이걸 사건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의 사건, 큰 사건의 일관된 취지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단 하나의 사건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기에 그렇다.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이 예수를 만났을 때 장님이 된다. 장님 된 사도바울은 빛을 봤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빛의 세계에서 볼 때에는 이 세상은 장님들만이 모여 있는 어두움의 세계의 일부였던 것이다. 사도바울이 장님 되었다가 아나니아를 통해서 눈을 다시 뜬 것은 구원이란 어두움에 감겼던 눈이 빛의 제공으로 눈을 번쩍 뜨는 것이었다. “아! 위에서 본 하늘나라와 아래에서 본 하늘나라는 천지차이구나!”

이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거짓 영들이 하나의 매개가 되어서 서로서로가 거짓말을 주고받으면서 형성된 일들이었다. 그래서 신약의 성령 받은 사람들은 구약을 그런 관점으로 파악하게 된다. 사도바울 옆에 있었던 사람들은 이 대화를 듣지 못하고 우레를 들었다고 한다(행9장, 행22장). 그러나 사도바울은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이 대화가 바로 사도바울식의 방언이 된다. 오순절이 지나고 받았던 성령의 마법이 된 것이다. 같은 사람이 아니다. 껍데기는 같은데 그 안의 내용물이 다르다. 이것은 십자가 사건이라는 단 하나의 사건에서 파생된 사건 중의 하나인 것이다.

사도행전은 이런 책이다. “천사 만나 봤나?” 우리는 사도바울이 들었던 이런 소리를 들어봤느냐 하는 것이다. 삼층천에 올라간 경험을 했는가? 사도바울은 스데반 죽고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나고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해서 광주리를 타고 내뺐다. 유대인들은 성경만 있으면 구원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성경이 있어서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다. 아라비아로 가서 3년 있다가 8년 동안 고향 다소라는 곳에 갔다. 다소에 있을 때 삼층천에 올라간 경험을 한다.

그러다 안디옥(비시디아 안디옥, 수리아 안디옥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수리아 안디옥이다.)에서 1년 있다가(행11:26) 예루살렘에 이르자 아가보라는 사람이 불길한 예언을 한다. 크게 흉년이 든다는 것이다(행11:28). 이 아가보는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도 사도바울이 죽는다고 예언한 사람이기도 하다(행21:10). 큰 흉년으로 예루살렘에도 가뭄이 들었다. 이 말은 헌금하라는 말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들도 헌금을 하게 되면 같은 교회라고 인정해준다고 나온다.

이 예루살렘 교회는 AD65년부터 해서 70년에 티투스에 의해서 작살이 난다. 마사다 요새에서 완전히 멸망당한다. 이럴 때 예루살렘의 교인들이 다 어디에 갔느냐 하는 것이다. 요단강 저쪽으로 다 도망갔다. 그러니까 이 시대는 사도바울의 편지가 다 쓰여진 시대가 아니다. 희망과 기대를 갖고 있던 그 시대 속에서 교회를 가시적으로 만들려고 하던 시대였다.

2강 들리니?

사도바울이 예수님과 주고받던 이야기 너도 들었니? 사도행전을 읽을 수도 있고 외울 수도 있지만 그러나 사도행전이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른다. 왜 이해를 못하느냐 하면, 인간은 감당되지 않는 의미는 삭제를 할 뿐이다. 이 삭제는 살해의지의 반복이 된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살해했지만 오늘날에는 들리는 것을 살해한다. 감당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령 받은 성도들에게 토해내도록 하신다. 외재성이 내재성으로 파고들어서 감당되지 않는 이야기를 계속 해나가게 한다. 그럴 때 예수님에게 하셨던 것처럼 이 사람들에게도 그 폭력을 행사한다. 폭력이라는 것은 권력을 갖고 있다는 티를 내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 제사장은 율법을 연구하고 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임으로 폭력을 사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폭력을 행사하기 전에 어디를 들려야 하느냐 하면 정치세력을 들려야 한다. 하나님의 법을 연구한 사람이 정치세력이 된 것이다. 정치라는 것은 계속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 만든 제도다. 국가의 법은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국가의 법에는 사법체계와 행정체계가 있다. 사법체계에서 폭력이 나온다.

사도바울이 전한 교회에서는 폭력이 안 나온다. 폭력이 안 나오는 대신에 헤어짐이 나온다. “갈라서자!” 세상의 오늘날 교회는 폭력이 나온다. 국가가 종교를 다스릴 때, 권력으로 종교를 다스릴 때 그걸 국가종교라고 한다. 국가종교에서 종교국가로 바뀐다. 모든 국민은 다 자동적으로 세례를 받아야 된다. 이슬람, 북한, 중국.. 전 세계에 많다. 종교국가는 교회가 국가를 다스릴 때 이념을 가지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아니다.

유대교는 종교 플러스(+)국가다. 유대교인들이 따라오면서 사도바울을 괴롭히니까 사도바울은 아테네로 피신을 한다. 아테네는 사도바울이 에피쿠로스학파하고 스토아학파하고의 논쟁했던 발생지다(행17장). 논쟁하면서, 세상에 있는 국가의 정신을 불어넣어주는 그 정치사상과 복음이 정면으로 부딪힌 것이다. 복음과 반대되는 것과 부딪힐 때 그 실상이 딱 드러난다. 그 실상은 바로 사도바울의 편지에 다 나와 있다.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와 사도바울의 논쟁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입자가 되지 아니하면 분석이 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힘이 들어간다. 국가든, 가정이든, 사회든, 교회든, 단단하게 응축이 되어야지 흐리멍텅하면 발전이 안 된다는 것이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의 사상이다. 국가의 힘이 응축이 돼야 계획이 된다. 단 하나의 최종적인 알갱이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알갱이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이 인간들이 사고방식이다. 그러면 이건 뭐냐 존재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거기에 대해서 말하기를, “입자가 죽었다. 니가 입자의 끝을 알아?” 그 입자가 죽었다는 것이다. 근데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에서는 “죽음?” 아직 오지 않는 경험이기 때문에 미리 땡겨서 겁낼 필요가 없고, 죽었으니까 겁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경험 안 한 그 죽음을 땡겨서 경험하면 어떠냐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모두 다 동일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십자가의 죽음이다. 믿을래? 안 믿을래? 그들의 희망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백 명 이 백 명이 믿은들 그것은 죽음이요, 죄가 된다. 왜? 그 안에는 권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권력은 계급을 낳는다. 목사, 장로, 권사..,계급을. 미래까지 지탱하고 유지하려고 힘을 여기다가 쏟아 붓는다.

이것이 바로 16세기의 개신교의 출발이다. 개신교는 종교 하나에 나라가 다 붙는다. 초대교회의 복음이 로마에 가면 철학이 되고 개신교에는 문화가 되고 미국에서는 기업이 되고 한국교회에는 초기업이 된다. 전부 다 입자다. 단단하다. 내 교회, 내 가정이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교회 세우자는 것이 없다. 인간이 세운 교회는 이중결과에 의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가로막고 부정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교회는 권력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권력이 있는 것이 권력이 없는 것을 내치게 되어 있다. 교회 갈래? 교회 될래? 어느 것 할래?

예루살렘 교회의 문제점은 자기가 높은 곳에 있다고 여긴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본부다. 아지트다. 예루살렘 교회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의 뜻이라고 본 것이다(행1:8). 그래서 사마리아, 아시아, 다른 곳들은 예루살렘에 보고하게 되어 있다. 예루살렘이 본부고, 지부는 반드시 예루살렘 교회, 본부의 말을 들어야 된다. 프랜차이즈 사업을 벌인 것과 같다. 예수님의 지시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본부를 망하게 하셨다. 본부 없다. 주님의 뜻은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지상의 예루살렘 교회가 망하고 천상의 예루살렘의 교회로 바로 가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는 없다. 선교하지 않는 것이 선교다. 선교가 있으려면, 1차(46-49), 2차(49-52), 3차(52-56), 사도바울의 전도 여행처럼 세월이 흐르게 된다. 그러나 하나의 사건밖에 없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의 파생은 어떤 이야기를 해도 단 하나의 사건, 십자가 사건의 연발성이다. 바로 하늘의 예루살렘과 연결되게 되어 있다. 선교라는 것이 없다. 파생된 사건에서 일어나는 공통점은 신나게 죽자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선교는 살기 위해서 선교한다. 일상적인 생활과 똑같다. 인간은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교는 죽은 자만이 할 수 있다.

정말 어떤 선교사가 선교를 했을 때, 그 사람이 성령 받았다면, “주님이 직접 선교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쓸모없는데, 쓸모없는 인간을 붙여서 주님께서 구원해주셨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된다. 아볼로가 뭐며, 게바가 뭐며, 바울이 뭐며, 그게 뭔가?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고전3장). 누굴 통해서? 전혀 능력 없는 선교사를 통해서 하시는 것이다.

야고보나, 다른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본부로 여겼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 땅에 관한 문제다. 이 땅에 대한 의식을 누가 지적하느냐 하면, 예루살렘 열두 사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제3의 인물, 사울(안디옥 1차전도하기전에 이름이 바뀜)이라는 사람이 이것을 공박하는데, 이 사울이라는 사람은 교회를 학대한 사람이었다. 이게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이다. 복음을 반대한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이다. 교회를 핍박한 사람을 교회로 집어넣어버렸다. 그러면 교회는 누굴 따라가야 하느냐 하면 교회를 핍박한 그 사람을 따라가야 한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가시적인 땅의 교회에 매료된 사람들이다. 성령이 오고 삼천 명, 오천 명으로 이제는 교회가 커지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자들은 죽기위해서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다. 죽어도 좋은 사람들이기에, 0+0=0이 되어야 한다. 나를 숫자에 집어넣지 말라. 숫자는 권력이다. 예수님의 복음을 해칠 뿐이다. 권력은 감당하지 못하고, 권력은 권력 자체를 확장시키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예루살렘의 오류를 사도바울이 지적한다. 교회는 교회를 부수면서 교회가 나온다. 이게 교회를 세우시는 주님의 멋진 반전이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초창기 인물들이 맛디아를 뽑아서 열 두 교회를 어떻게 해보려고 했었다. 열두 교회를 작살내려고 뽑았다는 것을 감히 그들은 생각하지 못했다. 열두 교회를 우습게보고 핍박했던 거기에서 진짜배기 교회가 사도바울을 통해서 등장한다. 교회! 어차피 무너지지 않으니까 무너트리자! 신나게 편하게 핍박하자.

왜 할 수 없는가? 망할 교회를 붙잡고 싶다는 심보와 본인의 자존심, 목돈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았다면 교회를 심하게 핍박해서 분란이 일어나서 나간다면 그것은 애초부터 교회가 아닌 것이었다. 십자가로 세운 교회는 사도바울에 의해서 만드시고(행20:28), 그 교회가시간적으로 예루살렘 교회보다 뒤에 나타난다. 그 뒤에 나타난 교회를 누가 핍박하느냐 하면, 시간상으로 역사상으로 먼저 나타난 앞에 있는 예루살렘교회가 핍박하고 공격했다.

유대교는 율법위에 교회를 세운 것이다. 율법위에 예수님이 우뚝 선다는 것이다. 그게 율법의 완성이라고 본 것이다. 사도바울은 율법에 철저했던 사람인데, 바로 이 가짜 교회가 예수님을 핍박한 것을, 예수님 만나고 나서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율법이 아닌 율법 외에 메시야가 와서 율법의 메시야를 전부 다 까는 식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근거가 바로 율법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었으니까. 이제는 너희들이 율법에 의해 죽을 차례라는 이 말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은 심판의 대상이다. 이게 바로 복음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령이 임하니까, 같은 패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거기에 대해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다른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은 깜짝 놀란다. 못 믿겠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사도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한다. 사도바울의 이야기를 쭉 들어보니까 진짜였다. 어떻게? 율법의 바탕이 없는데 메시야와 한 몸이 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율법이 없다는 것은 과거에 무엇을 했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성령으로 천국 간다는 것이다.

이것을 누가 역겨워하고 누가 그렇게 싫어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법으로 세력화 된, 우리는 교회고 우리는 참된 성도라고 우겼던, 그 법으로 권력화 된 종교단체가 이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흐름은 뭐냐 하면 안 믿는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그러다 이미 예루살렘이 권력화 된 가운데 이제 로마권력에 확장되어서 사도바울을 핍박한 것이다. 로마조차도 유대인들을 핍박하지 않았다. 기독교인들만 핍박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일신이고 황제를 숭배하지 않았고 오직 여호와만 믿는다고 했으니까. 핍박을 해야 되는데, 유대인들이 반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는 공격하지도 핍박하지도 않았다. 차이가 뭔가? 왜냐하면 유일신을 믿고 있었고, 로마사람들이 보기에는 유대인들이 말하는 것은 민족연합체, 혈통연합체였기 때문이다. 혈통에서 권력이 나오기 때문이다. 유일신 믿는다는데.

근데 기독교인은 왜 핍박하는가? 혈통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그리스도로 옷 입으면 천국백성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 중심의 교회는 혈통중심이 아니다. 신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관계없이 하나가 된다. 이게 바로 로마를 화나게 만든 것이다. 혈통은 가족인데, 가족의 중심을 깨버리면, 행복이 어디서 나오느냐 이 말이다. 자기가족중심으로 살았는데. 천사를 빼버린 아랫동네로 살았는데. 그러나 사도바울은 천사와 패밀리였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역사이야기가 아니다. 아주 괴상한 이야기다. 성령 받은 사람들은 내일 일을 모른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 다만 뒤돌아보면 어디까지 온지는 안다. 주께서 어떻게 한 일을 안다. 세상을 뒤돌아보면서 예수님한테 가했던 행세를 우리에게 그대로 하는데, 우리가 예수님과 한 가족이 되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것을 성령세례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하며”(행16:17).

귀신들린 점치는 여자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여러 날을 이렇게 이야기 했다. 자, 이 말이 맞나? 틀리나? 만약에 이 말이 맞는 이야기면 사도바울은 잘한다고 격려했을 것이고, 이것이 틀린 이야기라면, 그럼 사도바울이 하는 일이 뭔데? 이 여자가 하는 말대로 그대로 하잖아. 맞는 이야기이지만, 그 다음 사도바울의 조치는 뭐였는가? 여자에게 귀신을 내쫓아버리면 이 여자는 두 번 다시 그런 이야기를 안 하게 되니까, 전도하는데 손해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전이라는 것이다. 치료받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여자는 귀신들렸기 때문에 사도바울의 정체를 안다. 귀신들렸음에도, 사도바울의 정체를 알면서도 이 사람에게 치료받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이 말은 아무리 복음을 알고 아무리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아도, 그냥 아는 것으로 머리에 담아두기를 원하지 그 예수님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을 본인이 원치 않는 강력한 힘에 매여 있는 것이다. 십자가 복음을 아무리 알아도 아는 것으로 그친다. 손해 보기를 원치 않는다. 악마가 발목잡고 있는 것이다. 죽기 싫다. 가족혈통으로 나간다. 알고 있는 내용에 투신하기를 싫어한다. 귀신은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를 다 알면서도 귀신은 지옥가기를 수호한다. 이 사실을 아랫동네인 인간들은 모르고 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는 보이스피싱에 넘어가는 것이다.

철판은 하나의 사건을 보여주고 철판 안에서 구워지고 있는 것들은 심판이라는 파생된 사건을 보여준다. 심판 속에서 구원이 나온다. 심판이 끝나고 난 뒤에 보인다. 심판 속에서는 안 보인다. 심판의 의미를 아는 구원받은 사람이 나온다. “예수님은 인간들이 때려죽였다. 그것을 하나님은 죽이셨고 살리셨다.” 이 복음을 듣고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 이게 뭐냐 이중결과다. 누가 누군지 모르지만 무조건 복음을 전하고 사도들은 고생한다. 인간이 예수님을 미워해서 죽이지만, 하나님이 알아서 죽이시고 하나님이 알아서 살리신다.

인간은 이중결론이다. “우리는 죄인이었는데 구원받았습니다.” 뭔가 해야만 하고, 하고 싶다. 주님이 하시게 하셨다는 것을 안다. 이것으로 구원되지 않음을 알지만 하고 싶다. 왜? 그게 죄가 되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 때문에 주님이 죽으셨다. 본격적으로 한다. 왜?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나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고 했다(로마서 1장). 안 설쳐도 대는데 자꾸 돌아다니면서, 하고 싶어 해놓고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다. 합격을 받아놓고 왜 내가 하는 것은 합격이 안 되었는가를, 합격증을 쥐고 이제는 뭔들 못해! 뭐든지 구애받지 않고 한다. 뭘 해도 죄가 되기 때문에. 죄를 마음 놓고 하는 죄의 즐거움이다. 거기에 대해서 감사하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빌립집사는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났다. 그 내시가 이사야 53장에서 이 사람이 누구냐? 라고 묻자 빌립은 구약 전체를 설명해 줬다. 세례를 받겠다고 했다. 이 사람이 뭘 안게 아니다. 단지 철판전체를 알게 된 것이다. 세례는 예수님이 죽었다 부활했다는 것이다. 세례의 내용의 전부다. 이중결론이다. 뒤돌아보면 나는 그냥 열심히 살았는데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 사도행전은 철판구이에서 일어난 일은 십자가 사건의 본질이 확정된 가운데 십자가 사건의 재현이다. 자기가 뭘 안게 아니라 철판이라는 단 하나의 사건을 안 것이다. “주께서 하게 하셨다.”

3강 선교는 없다.

선교의 있다 없다는 사도바울의 설교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성령 받은 사도들의 설교핵심은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내용을 볼 때 선교는 없는 것이다. 이것을 전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이 활동(선교)을 하면 ‘죽었다’에서 홀로 빠져버리는 것이다. 사도들의 선교 내용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본임이 선교에 나서게 되면 자기의 관심사로 이동해서 본인은 ‘예수님의 죽었다’에 포함이 안 되는 독특한 사람이 되고 만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셨다는 이 내용을 전하기 위함인데, 그렇다면 여기에 모든 인간은 죽은 자가 된다. 죽은 자가 무슨 선교를 하는가?

인간이 하는 일에 대해서 관심 뚝 끊어버려라. 예수님이 현존에 인간이 끼어들면 이 복음적인 사실이 훼손된다. 예수님이 죽었고 살아나셨다고 하면 사람들이 하는 꼭 질문이, “그럼 나는? 나는 천국가요? 지옥가요?”라는 이 질문이 나오는데, 이 복음 앞에서 이런 질문은 파생되어 나올 수가 없다. 사도는 복음, 예수님에 대해서 전하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가지고 얼마나 자기에게 이득을 볼까? 자기미래를 잘 풀어볼까? 하는 것이다. 이건 반칙이다. 선교가 없는데 갑자기 선교가 나와 버리는 것이다. “베드로! 당신 구원받았습니까? 얼마나 행복하십니까?”라고 질문을 하면 베드로의 대답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여기에 관심 있는 채로 구원받았습니다. 내가 죽었다에는 관심이 없고 주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셨다에만 관심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짓 하는 자체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현존이다.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방식이다.

예수님이 살아계시니까, 예수님이 죽었다가는 놔두고 살았다고만 증거 하면 되지 않느냐? 그러나 예수님이 살았다고만 하면 안 된다. 죽었다고 해줘야 선교가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1,2,3차 선교한 것이 아니다. 성령이 뒤에서 발길로 차버린 것이다. 만약에 선교가 있다면 왜 이 선교가 왜 선교가 아닌지를 증명해야 한다. 만약에 선교가 있다면 선교한 사람이 살아있어야 한다. 살아있는 자가 뭘 증거 하게 되면 주님의 현존하는 공식에 어긋난다. 예수님이 죽었을 때 모든 인간은 죽었기 때문이다. 죽었다는 공식에 위반해서 살아있는, 선교하는 자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현재 존재하는 방식들을 선교라는 명목으로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방해하는 것이 아니고 선교라고 보는 그 안목, 사고방식이 주님의 현존, 주님의 복음을 훼방하고 있는 것이다. 선교 안 하면 주께서 일 안 하시는가? 주의 일이 실패하셨는가? 교회 없으면 주님이 답답해하시는가?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행1:7).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이에 정보를 주고받아야 할 텐데,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알바 아니요”라고 하셨다. 묻는 것이 수상하다는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정보 빼내서 주님 일에 협조해서 주님한테 칭찬받을 가능성을 높이려고 한다. 쓸모 있는 인간으로 봐달라고 한다. 그런데 일언지하에 잘라버린다. “같은 편이잖아요?” “같은 편 좋아하네.” 주님은 자기편이 필요치 않는다. 주님은 아버지하고 의논하기 때문에. 아버지 보시기에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완료된 것이다. 이중결론, 이미 예수님을 죽임으로서 이 세상은 이미 죽어 마땅한 세상인 것만 까발리게 되어 있다.

그래서 사도바울에게는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후딱 죽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죽는 것을 알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단지 사도바울은 어디서 생을 마감해야하는지 지금 정해지지 않아서 헤매고 있을 뿐이다. 어디서 죽을지... 사도바울의 의식은 보통 인간들이 가름할 수 없다. 판단도, 해석도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도바울 움직임 자체가 이미 해석이 끝난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해석이 끝났을 때, 사도바울의 고백 같은 것이 나온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소원은 빨리 죽는 것이었다. 이곳은 자기 동네가 아니니까. 그 근거는 사도의 설교 속에서 나온다.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이다. “저는요?” 그럴 필요가 없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 있음이 이 세상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느냐, 그것만 설교에 담아서 전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사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한테 있는가? 나한테 있는가?

교회를 세운다? 훼방질을 할 뿐이다. 모든 사람이 죽었다. 죽었다가 살았다는 것을 증거 하는 그 자체가, 이미 그 자체가 움직이는 교회다. 이렇게 교회가 있는데, 왜 따로 교회를 만들려고 하는가? 만들려고 한다는 것은 움직이는 이 교회 있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살아도 교회다. 왜 한국교회를 만들려고 하는가? 돈이 들어오니까 신천지, 구천지를 계속 만드는 것이다. 사업이기 때문이다. 사업이기 때문에.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나눠주고,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떡을 떼며(행2장), 이 내용을 가지고 써먹기 때문이다.

바나바가 땅을 팔아 사도의 발 앞에 두었다(행4장). 이 바나바는 사도바울을 잘 챙겨주고 보호해주고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을 잘 챙겨주면 뭐하는가? 나중에 사도바울과 바나바가 싸워서 헤어지는데, 둘 다 성령 받았는데 싸우면 성령 대 성령의 배틀인가? 그런데 성령에 의해서 싸우라고 해서 싸운 게 아니고, 그것은 사도바울도 갈수록 의식의 수정이 일어나고 심화되어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초창기 편지 내용과 옥중서신과 다른 것이다.

선교가 없는 이유는, 만약에 선교가 있다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이 자체가 파괴가 된다. 그래서 사도들의 복음의 핵심,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것이 이 세상의 심판의 기준이 된다. 저주의 기준이 된다. 선교가 있다고 우기는 사람은 심판을 해버리면 복음 전할 타이밍, 복음 전할 구석은 없지 않는가? 라고 반발한다. 그러나 그들은 요나를 모르기 때문이다. 요나에서 어느 것이 구원의 방식에 근접하고 모델에 적한한가? ①북이스라엘 구원방식이 옳은가? ②니느웨 사람들의 구원방식이 옳은가? 어느 쪽이 정답인가? 하나님께서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신 것은 처음에는 니느웨를 심판하라고 보내신 것이다. 그래서 요나는 “복음전할 구석이 되지 않는다. 심판하는데 굳이 갈 필요가 있는가?”라고 했다. 그래서 다시스로 가는데, 풍랑이 일어서 바다에 빠져 물고기 뱃속에서 있다가 사흘 만에 니느웨 앞에 토해내게 했다. 심판을 전하는 것이 복음 전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요나가 40일 후에 멸망한다고 하니까 갑자기 니느웨 사람들의 집에 속한 모든 것이 다 회개했다. 요나는 죽겠다는 것이다. 니느웨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회개하니까 심판이 없어졌다. 구원의 원형은 심판이 근접하고 회개하는 “무조건 잘못되었습니다. 나 자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는 것이다. 이것을 그동안 이스라엘이 놓쳐버렸다. 진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방식을 그들은 놓친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의 원리를 깨트려버린 것이다. 그 깨트린 것을 니느웨를 통해서, 우회해서 보여준 것이다.

응용문제다. ①예루살렘에 있는 열두 제자(유대인들)의 구원방식이 옳은가? ②이방인들의 구원방식이 옳은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침대로 삼아서 까치발을 들고 메시야를 기다리는 방식이었다. 율법을 지킨 사람들에게 메시야가 결합된다고 하는 것이다. 율법의 완성으로 메시야가 온다면, 언약의 혜택으로 본 것이다. 이게 ①번이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전도를 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할례를 반드시 행해야 하고, 안식일을 반드시 지켜야 했다. 그렇게 했어도 개 같은 이방인취급을 했다. “이방인들아! 우리가 봐주니까 같이 천당 가는 거야.”

사도행전은 역사를 뽑아내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의 편지가 그렇게 역사 중심으로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했다. 갈라디아서는 1차 전도여행을 떠나서 사도회의(행15장)를 하고 난 뒤에 안디옥에 가서 2년 동안 있으면서 쓴 게 갈라디아서다.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 우리 어머니라고 했다. 이거는 뭘 의식한 것인가? 예루살렘 형님들(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있는 예루살렘 본사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에 대해 의식하고 쓴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혈통중심이라는 것이다. 로마도 유대종교를 핍박하지 않을 정도로.

그런데 이방인들의 구원방식은 뭐냐, 이방인들의 구원방식은 생뚱맞다. 형님들의 본점에 갈 필요도 없다. 본사 무시하고, 성령이 오시면 그대로 끝인 것이다. 더 보태고 뺄 필요도 없다. 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영이 오게 되면 죽을 너희 몸도 살리시리라(로8:11). 성령이 오게 되면 구원받는다가 아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십자가 영이기 때문이다. 그냥 담겨버리는 것이다. 아이언맨이다. 이방인들은 구원 못 받는다는 것을 이방인들이 안다. 니느웨 사람들은 구원에 대해서 예상도 안 했다. 니느웨에 전면적인 심판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이유가 없다. 이 세상은 그냥 이유 없이 심판받고, 저주받고, 지옥가야 한다. 단지 이유가 있다면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저주받고 심판받는데 아무 이유 없다. 특히 이방인들한테는 대상이 안 된다. 언약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방인들에게 깜짝 놀랄 구원을 주시는가? 그것은 바로 진짜 이스라엘은 너희들이 생각한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된 이스라엘을 새롭게 구성된다는 것을 이방인들을 통해서 똑똑히 보여주는 것이다. 너희들이 아니고 너희들이 개무시한 이방인들이 구원받음으로 말미암아 진짜 이스라엘이 언약대로 어떻게 완성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로마서 11장 돌감람나무, 참감람나무 이야기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롬11:26). 이게 사도바울의 편지다.

브리스길라(아내)와 아굴라(남편)부부가 로마에 살던 사람인데 유대인이라고 나가라고 해서 고린도에서 바울을 2차 여행 때 만나서 복음을 듣고 다시 로마로 갔고, 그 다음에 3차 때 고린도에 있으면서 이 부부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로마서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편지 내용이 바로 이 원리를 겨냥한다. 이 큰형님들, 인간적인 열두제자들이 전했던 이 구원이 한계가 있음을 성령께서 알렸다고 보내는 편지다. 사도바울은 12대 1로 붙는다. 베드로는 그것도 모르고 큰형님 노릇한다고 안디옥에서 복음 전한다고 했지만, 근데 거기서 할례 받지 못한 율법에 훼방되는 사람이 딱 오니까, 깜짝 놀라면서 할례 받지 못한 자와 식사를 같이하게 되면 율법에 어긋나고 거룩에 훼방이 될까봐 후딱 빠져나간다.

그걸 보고 사도바울은 막아서면서 “할례에 막히는 이게 무슨 복음이냐?”라고 한다. 무슨 복음이 율법 지켰다, 안 지켰다, 할례에 막히는 게 무슨 복음이냐 하는 것이다. 그럼 복음은 뭔데? 개 같은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시면 끝이라고. 이것은 어떤 인간이 훌륭해서도, 착실해서도 아니다. 성령 자체가 값어치가 있다. 아무리 모든 것을 얹어도 우리의 질량은 제로(0)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은 소위 유명하다고 하는 인간들의 레벨이 이것밖에 안 된다 면박을 주고 있다. 인간은 성령이오기 전에 뭔가 장착을 해줘야 성령이 그거보고 찾아온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가장 심판받을만한 사람을 찾아간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됨으로 유대인들이 했던 그 모든 것은 헛짓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성령 받아 활동하면 의식이 자꾸 동업자가 된다.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은 이게 바로 자기 의라고 한다. 자기 의. 자기 의가 생기는 절차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말씀을 주셨는데, 이것은 법의 형식이다. 법은 새로운 두 가지 결과를 예상한다. 법을 못 지키면 체벌이고, 법을 지키면 축복이다. 따라서 인간이 해석할 때는 자기존재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복 받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게 자기 의다. 여기서 공식은 법의 해석 작업을 유도한다. 주위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에 집단해석을 하고, 거기서 권력이 나오고, 권력은 역사와 전통, 관습이 나온다. 왜 이렇게 나오느냐 하면 처벌받지 않고 복 받기 위함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 법의 해석에서 놓친 게 하나 있다고 한다. 자기 주제파악을 놓쳤다는 것이다. 나는 처벌받아 마땅한,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생명나무에서 끊어졌기 때문에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이것을 놓쳤다. 죄인 주제에 처벌이 적당하다. 이러한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12년 동안 혈류병을 앓은 여인, 18년 동안 허리가 꼬부라진 여인, 자기 딸이 귀신들린 수로보니게 여인, 예수님의 말씀에 그들은 내가 있음은 저주가 있는 곳임을 알았고 개로 인식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받을 때, 심판에서 면제될 때 진짜 구원의 원형이 나왔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잘못됐다는 것이다. 어떤 잘못한 게 기억나서 반성한 게 아니다. 나라는 존재 자체를 죄의 존재로 보는 것이다. 나의 움직임 자체는 저주가 냄새피우면서 움직이는 것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강도와 세리와 창기가 먼저 간다. 창세기 2장과 3장에 근거해서 니 주제파악해라. 선악을 아는 자체가 하나님께 저주받은 본래 니 자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해석범주에서 저주받은 짓을 유발시킨다. 해석하면 처벌받고 또 해석하게 한다. 블레셋 전쟁에서 언약궤를 빼앗겼다. 언약궤가 있다고 해서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법의 해석을 뒤집어버리는 것이다. 또 제사장이 제사를 해야 한다고 하니까, 사울이 제사를 드리려는 사울의 본 의중을 사무엘이 약속을 어김으로 드러내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본 의중을 드러내기 위해서 참으신다. 오늘날 성도를 인내하시는 이유는 니가 얼마나 예수 믿는 믿음이 좋다고, 잘났다고 하는 것을 드러나게 하신다. 니가 어디서 깨져야 하고 니가 얼마나 못났다는 것을 드러나게 하신다. 이게 바로, 이방인의 구원방식이 모든 인간이 구원받는 원형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구원의 원인이 나온다. 열두제자가 아니라 개 같은 자에게 있었다. 그러나 구원이 없다. 구원은 어떤 것을 보여주는 현상이지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 내용물 때문에 우리는 번쩍번쩍 퍼지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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