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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7 21:17:23 조회 : 346         
   영화 [버닝] 평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영화 [버닝] 평- 세상 사람의 세상 읽기-

이창동 감독은 11전에 [밀양]이라는 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 젊은 나이에 파괴된 가정생활을 극복하기 위해 기독교라는 가상 진실로 옮겨 타려는 시도가, ‘신의 용서’ 앞에서 좌절되는 내용을 그린 영화였다. 즉 피해자만이 용서할 자격이 있다고 알고 있는 주인공은, 자신의 자식을 죽인 범인이나 자신이나 똑같이 ‘신의 용서’를 받아야지만 구원이 된다는 장벽 앞에서 그녀는 절규하면서 신을 뒤로 하고 다시 허무한 세상을 돌아온다. 구원이란, 내가 만든 세상이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이창동 감독은 이번에는 영화 [버닝]을 가지고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아프리카 부시맨 종족의 의식을 통해서 이 세상에는 두 가지 굶주림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배가 고픈 굶주림이 있는 반면에 또 다른 굶주림은 삶의 의미를 몰라서 굶주린 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 삶의 의미에 굶주림은, 배가 고픈 굶주림을 경유해야 한다.

(줄거리)

남자 주인공은 우연히 서울에서 고향(경기도 파주) 여자 친구를 만나게 된다. 마트의 배달원(남자 주인공)과 나레이터 모델(여자 주인공)로 서로 끌리어 사귀다가 여자 주인공이 삶의 의미를 찾아 아프리카로 며칠 다녀간다고 통보하면서 집에 고양이가 있으니 자기가 올 때까지 돌봐 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의 빌라 방에는 고양이는 보이지 않고 고양이 흔적만 있다. 즉 분명히 있는데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마치 삶을 살면서도 의미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돌아오는 날, 공황으로 마중 나가니 여자 주인공은 아프리카 케냐 공향에서 만났다는 어떤 잘 사는 집안의 남자는 함께 나타났다. 여자 하나에 남자 둘이 사귀는 상황이 된 것이다. 여자 주인공은 이 벤이라는 낯선 남자의 여유로운 취미생활을 반기게 된다.

그러나 서울 강남 부자집 아들인 벤은, 여자 주인공을 갖고 노는 이유가 따로 있다. 그것은 자기보다 훨씬 수준이 뒤떨어진 여자의 삶 자체를 깔보다가 없애는 취미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늘 배고파 헤매는 있는 젊은 여자(여 주인공)의 진지한 아프리카 체험담에 대해서 하품이나 한다. 그는, 사람이 눈물 흘리는 것을 신기하게 여긴다. 자신은 눈물 흘려본 적이 없다고 한다. 곧 경제적 상황이 정신적인 위계를 결정한다는 것을 이 부잣집 아들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위계적 의식은 당연히, 비록 힘들게 살아가지만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 순수함에 대한 모독인 것이다. 감독은 이것을 오늘날 범죄의 원천적 성격으로 본다.

즉 오늘날 이 현대사회는 ‘삶의 의미’를 찾는 자들을 훼방하는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흥적이고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육체적 감정을 자신의 베이스base로 여기는 풍조로 인하여 (벤이 보이는 삶의 의미), 비록 가난하지만 ‘삶의 진지한 의미’를 추구하는 모습을 ‘쓸모없고 불편한 것’이라고 해석되어지는 것이다. 마땅히 자신의 노리개가 되어야 될 자들이 경제적 우월한 가치에 정신적으로 굴복하지 않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추구하는 것을 잘 사는 자들은 제거해야 될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 ‘건방짐’으로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남자 주인공은 같이 어렵게 살아가는 여자 주인공을 갈수록 사랑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벤이라는 남자는 그들의 사랑을 노리갯감으로 간주해서 천한 것들의 사랑을 한껏 모독해주고 싶어 한다.

“나는 두 달마다 비밀 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어. 얼마나 가슴 두근거리는 일인지 몰라. 쉬워. 비닐하우스에 그냥 라이터로 불만 붙이면 돼” 즉 사랑이라는 취미보다 불붙이는 취미가 더 짜릿하다는 것이다.

결국 벤은 더 이상 가지고 놀 가치가 바닥 난 여자 주인공을 몰래 없애고 만다. 이 사실을 모르고 남자 주인공은 벤과 어울리면서 지낸 여자 주인공이 어떻게 되었느냐를 묻는다. 벤 주위를 감시하다가 들켜버린 날, 남자 주인공은 벤의 집으로 초대받게 되는데 그 집의 화장실 서랍에서 여자 주인공의 시계를 발견하게 된다.

촌스럽다고 스스로 치부한 그 시계처럼 여자 주인공은 벤에 의해 촌스럽게 버림받은 것이다.

결국 벤이 자신의 여자 주인공을, 비닐하우스에 불붙이는 정도의 하찮은 가치로 여기고 살해했다는 확신이 들자, 평소에 유순한 남자 주인공은 잠재된 분노가 폭발한다.

실은 그의 아버지(영세한 축산업 하다가 분노조절장애로 인해 군공무원을 폭행해서 교도소에 갇혀 있음)로부터 성격이 발산되는 것이다.

겨울 이른 새벽, 한적한 고향 파주 동네 밭으로 벤을 유인하고서는 칼로 복부를 여러 차례 찌르고 그가 타고 온 포르쉐 고급차 앞자리에 집어넣고서는 라이터 불로 전체를 태우므로 서 (버닝 burning) 영화는 끝이 난다.

(평)

감독은 초반부터 판도마임의 성격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즉 삶의 의미란, ‘없어졌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다. 인생이란 결국은 없어질 것들이니 없어진다고 슬퍼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없어졌다고 여기고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취미로 판토마임을 배웠다는 여자 주인공은, 자신이 7살 때 자기 집 우물에 빠졌다는 거짓말을 잘도 꾸며 내었다.) 새롭게 꾸며나가는 것이 ‘삶의 의미’라는 것이다. (남자 주인공은 장래 소설가가 꿈이었다)

만약에 이 거짓말 같은 세상을 진실인 것처럼 여긴다면 그 진실이 가혹해서 불에 태워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의 잠재된 치부를 건드리는 것이 된다. 현실은 잘 꾸며낸 소설로 여기면서 궁극적 의미를 찾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잘 사는 자나 못 사는 자나 모두 잠재적 분노조절장애들이기에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진리를 묻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삶의 요령이라는 것이다.

(복음적 평)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여기고 살아보라고 감독은 권하지만 여기서 ‘죄 사함’의 요소가 빠져 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운명적으로 심판의 상대자라는 사실을 놓쳐버리면, ‘세상 사는 것’을 마치 당연한 권리인양 여기게 된다.

인간이 사는 것은 은혜의 연속이요 봐주고 계신 덕분이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그렇다면 이 은혜의 출처를 돌아봐야 한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희생에서 나온 은혜 덕분이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이 살아 있음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살아계심에 주목해야 한다. 이렇듯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성도의 존재 이유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박지영 18-06-17 16:32 
목사님 영화평 잘 보는데요 몇 개 없네요.
도그빌 보셨나요? 니콜 키드먼 나오는..또 저수지의 개들은요?
 박지영 18-06-17 16:34 
취향이 아니실 수 있어 강요하는 건 아니구요^^;;
도그빌 평은 좀 보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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