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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6 06:59:14 조회 : 333         
   십자가마을 여름 수련회 (4강-6강) 요약 -이미아 성도님의 글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제 4강 방언

현상이란, 부분을 가지고도 전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주님께서 전체를 표현하는 방법은, 현상적으로 그걸 세대라고 한다. 예수님은 이 세대와 저 세대를 나누는, 단절의 펜스, 장벽을 설정한다. 이 경계선이 만들어지면서 이 세대와 저 세대가 같이 딸려온다. 같이 나타난다. 하나에서 이 세대와 저 세대가 나온다. 빵은 두 개지만, 마치 햄버거의 빵 속에 들어있는 토핑처럼, 빵과 빵 사이에 들어있는 부분, 이 경계선을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이라고 보면 된다. 양쪽의 빵은 세대다. 성령이 임하므로 천국과 지옥의 기준은 이미 종결되었다. 천국과 지옥으로, 성령이 없으면, 아버지를 아버지라 할 수 없고, 율법의 종이 되고, 아무라도 주시라고 할 수 없다(고전12:3).

사도행전에는 이게 나타나지 않고, 그러나 교인들은 사도바울이 전도한다고 왔다 갔다 하니까, 교회 키우는데 사도행전이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안디옥 교회에 소위 지도자급, 유명한 자들, 바나바, 니게르, 시므온, 루기오, 미나엔(행13:1), 이 다섯 명이 집단체계, 연합체를 이룬 것이다. 여기서 두 사람, 바나바와 바울은 성령이 시켜서 보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디옥 여기를 이방인 전도의 베이스캠프로 여긴 것이다. 그럴 때 안디옥과 예루살렘이 누가 더 크냐? 하고 배틀이 붙었다. 사도행전이 이런 식으로 가는 이유는 교회가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기업이 되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상품을 팔아야 돈이 들어오니까, 새로운 목사의 역량은 교인수가 늘어나는 것과 헌금이 나오는 것이니까, 그래서 새로운 목사는 무리한 프로젝트를 한다. 후임의 당회장이 새로운 교회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가시적인 양적팽창을 제시해야 된다. 거기에 적합한 것이 사도행전이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선교하자! 결국 인간은 살기 위해서다. 교회가 살려줄게. 돈 내라!

그런데 사도바울은 전도를 하면서 이건 아니라고 여긴 것이다. 이건 아니다. 기존의 예루살렘이 유대교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서 백성들을 법적인 체계에 옭아맸고, 그 법적인 체계에 의해서, “바라바냐? 예수냐?”해서 예수님을 죽게 만들었듯이, 개인이 아닌 권력체계의 집단범죄를 한 것이다. 사울이 바울되기 전에, 하나님의 일은 율법의 해석체계가 정치 행위로 가세해서 하나의 권력에 집단화된 정치적인 모양새를 가지고, 그 다음에는 율법을 받침대로 사용해서 까치발을 딛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이 공식, 이 공식에 철저했던 사람이었다. 이렇게 될 때 율법의 실제로 본 것이다.

그런데 사울이 알게 된 것은 바로 이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했던 현상이었다는 것이다. 악행이었다. 이것을 안디옥이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교회는 계급이라는 것이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평신도, 이것은 어느 정도 유대교에서 했던 계급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이것을 사도바울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법체계를 깨는 식으로 고린도전서에서 이야기를 한다. 3차에서는 고린도교회가 주(主)가 되고, 2차에서는 데살로니가교회가 주(主)가 된다고 보면 된다. 고린도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다. 아볼로가 2년 동안 있었는데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편지로 언급한 것이 뭐냐 하면 법체계를 은사로 깬 것이다. 은사의 특징은 우발성이다. 오래 머물 수가 없다. 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설교를 한 20년 동안 전했어도 그 다음 주에 복음이 안 나오면 그만둬야 한다. 자기를 고수하면 유대교식 기독교가 된다. 폐암으로 죽은 코미디언 이주일이 한 말이 있다. “뭔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설교자는 뭔가 보여주면 계속하고 뭔가 안 나오면 그만둬야 한다. 그런데 유대교식 기독교가 되어서 사람은 그럴 수도 있지, 자리가 중요하다고 나와 버리면 교황이 된다. 교황은 인격을 논하지 않는다. 교황은 생물학적 신체로는 윤리도덕이 아무리 개판이어도 법적신체로는 교황이라는 권위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이게 바로 권력행위다. 이 권력행위를 관통해서 이 세대와 저 세대를 뚫은 분이 예수님이다. 그동안 권력체제가 쏘아대는 화살을 예수님의 온 몸으로 다 받으신 것이다. 온 몸으로 다 받아서 형성된 정보를 성령을 통해서 성도에게 그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전부 다 안겨버렸다.

그러면 성도가 움직이는 것은 바로 이 세대와 저 세대를 가름하는 햄버거 속처럼, 알맹이처럼 경계선으로 움직인다. 거기서 바로 이 세대, 저 세대의 정체가 부각된다. 고린도후서 2장 15절,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복음은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이다. 지옥 갈 사람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죽었는데 어쩌라고?” 이렇게 돼버리고. 천국 갈 사람은 “어찌할꼬? 나는 진즉에 죽은 자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구나! 내가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구나! 그동안 자기 의를 위해서 법의 해석체계에 팔렸구나!”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 고백이 바로 쫙 깔려나오는 것이다. 그럴 때 동의하는가를 보는 것이다. 인간은 존재가 아니라 현상이다. 그런데 지옥 갈 자들은 존재라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 예수 믿고, 나를 위해서 천국 믿어야 하고, 나를 위해서 삼위일체를 공부하고 있어야 된다.

존재의 특징은 보호받는 것이다. 유기체의 자기 조직화다. 유기체는 보호본능이 있어서 스스로 자기를 보호한다. 인간도 카멜레온처럼 보호막, 보호책을 갖고 있다. 그러나 현상은 이미 찢어짐이다. 그 찢어짐 속에서 보호할 필요가 없이 주님이 시키는 대로 그냥 그대로 살뿐이다. 존재를 찢은 관계가 있다. 바로 연인관계다. “그대만 있으면, 너만 행복하다면 나는 없어져 줄게.”라고 한다. 자기존재를 알아서 삭제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그림자요 현상이 된다. 그래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했다(고전16:22). 존재는 권력으로 자기를 보호하는 반면에 사랑은 자진해서 자신을 찢는다. 그 사랑을 희생이라고 한다. 그 사랑이 어디서 나오는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다. 이 사랑을 성령의 택배로 부어주게 되면 내가 왜 사랑받아서는 안 될 그런 나쁜 사람인가를 살아가면서 깨닫게 된다. 로마서 5장 20절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은혜는 왕이요, 나는 그 은혜의 쫄다구가 되면 행복이고, 누구의 쫄다구가 되는 즐거움이다. 예수님의 현상을 집어넣는, 본체와 그림자가 붙어서 같이 가는 것이다.

현상은 주의 지시가 먼저 내려지면 주님의 숨겨져 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주님은 보이지 않고 현상이 먼저 보이니까, 그 현상으로 주님을 만날 수밖에 없다. 그 현상으로 주님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방언이다. 방언은 내용으로 결정된다.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 세대에 속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다. 못 알아들어야 정상이다. 인간은 무엇을 믿든지 나 좋아라고 믿는 것이고 나를 위한 보호막을 걸치기 위해서 믿는 것이다. 현대이전은 계급사회였다. 그래서 권력이 자본주의보다 위에 있었다.

그런데 이게 1789년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독립전쟁에 의해서 모든 권력은 하늘에서 주어진다고 한 것이다. 근데 이건 거짓말이다. 모든 권력은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내부에 있는 괴물의 목소리다. 인간의 보호본능을 숨길 수 없다. 자본주의는 본인이 본인에게 권력이 된다. 외부권력은 ①여론(언론)이다. ②리스크(위험부담)를 제거하기 위한 보험이다. 보험은 자기에게 미래에 올 필요한 권력을 돈 주고 가지는 것이다. 모든 권력은 보험체계다. 빈곤에는 금전적 빈곤과 사회적 빈곤이 있다. 금전적 빈곤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어도 사회적 빈곤은 마약, 도박, 술, 담배는 해결할 수 없다.

이 시대는 개인을 보호할 때 얼마나 많은 권력을 동원해야 하느냐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자기가 누군가를 지적해줄, 법적 정당성을 해석할 수 있는 해석체계가 없다. 왜냐하면 평소에는 보험으로 보호를 느끼다가 교회 가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느끼려고 하기 때문이다. 존재보호의 고리를 강제로 끊어야 된다는 것을 누가 해 준 적이 없다. 주위에서 아무도 안 해준다. “나는 진즉에 죽은 자구나!”라는 것을 아무도 이야기 안 한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에. 배우들이 연극할 때는 조명이 거기를 비춘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연극이 끝나고 배우들이 무대 옷을 벗고 나면, 다시 말해서 죽는다는 것을 말하는데, 죽고 난 뒤에는 정적만이 흐른다.

존재는 사건이다. 주님께서 너는 사건이라고 이야기하시는 것이다. 존재도 아닌데 왜 존재라고 하느냐, 법적해석을 잘못해서 그렇다. 제대로 나를 누구라고 이야기해줄 복음적 해석을 교회에서도 안 하고, 모든 종교에서 이야기 안 하고 돈이나 빼먹기만 할 뿐이었다. 정작 니가 누구냐를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인간들이 보호를 할 때 개인적으로 안 되니까 공동체운동을 만드는 것이다. 김진홍 목사의 두레마을처럼 약속의 땅이라고 해서 사도행전 2장을 들고 나온다.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지 않고. 세상에! 상대적 빈곤을 모른다. 5퍼센트 낸 사람하고 50퍼센트 낸 사람하고 같이 먹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른다. 이게 다 보호에서 나왔다. 보호는 지독한 자기사랑이다. 이걸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삼은 것이다. 오늘날은 성경공부로 삼아서 나를 내가 지키기 위해서 성경공부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이 왔다는 것은 보호할 필요도 없고 보호받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받은 방식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킨다.

방언이라는 것이 뭐냐, 방언은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 세대에 속한 사람은 못 알아듣는다. 못 알아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우리의 소속이 저주받을 이 세대에 속했다는 것이 갈수록 분명해지기 때문에 그렇다. 어느 정도로 못 알아듣는가? 마12:32절,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예수님을 비난하고 무시해도 사하심을 얻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이 세대 사람으로 같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그러니까 아직까지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그 펜스, 장벽이 오기 전에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무시할 수 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게 되면,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면, 하나님의 우편의 자리는 새로 마련된 자리이다. 시110편에 우편의 자리는 예외 없이 심판의 자리다. 하나님이 심판할 때는 우편의 자리에서 심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능력이 우편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렇다. 출애굽기 15장 6절에서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우리를 구원했다고 한다. 이스라엘백성이 홍해를 건너올 때 애굽 군대도 건너오고자 했다. 근데 몰살당했다. 그럴 때 “왜 쟤들만 건너 가냐?”라고 한다면, 이거는 내 백성이다 이 말이다.

하나님 우편에서 성령을 줬다는 말은, 성도는 이 땅에서 심판자 노릇을 하도록 되어 있다는 말이다. “나는 죄인이다.” 그 자체가 외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심판의 기능이다. 이미 권력을 뚫고 들어온 주의 영이 함께 있으면 너희는 이 세상의 소속이 아니고 하늘의 소속이다. 매일같이 현재에서 살다가, 마지막에 재림이 되는데, 이 재림은 현재가 넘쳐흐름을 말한다. 현재가 넘쳐흐름. 그러니까 현재와 재림의 특징이 있다. 저 세상에 속하면서 이 세상의 속한 현상을 보여준다는 점이, 현재의 성도의 모습과 재림이 같은 것이다. 주께서 자기 자신의 심판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재림이다.

이 세상은 둘로 구분(장벽)되어 있다. 장벽은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 이것을 실어서 성도가 가는 곳마다 둘로 팍팍 나누어지게 성령께서 하신다. 하나는 악취요(무슨 개소리냐!) 하나는 향수다(반갑다 친구야!). 사도행전 28장 마지막을 보자.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한다. 이게 하나님의 성과다. “니들이 뭘 알아?” 이게 성과라니까. 예수님이 죽었다, 살아나셨다는 것은 나머지기는 다 죽었다는 것이다. 이게 사도의 설교다. 이거 말고 나머지기는 다 제거해버린다. 돈, 취직, 건강, 출세, 성공... 그게 뭔데?

우리는 복음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이미 저 세상에 속한 사람이다. 이것을 그대로 현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경계선이 와 있다. 이 세대도 저 세대도 함께 있다. 그래서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저 세대에 못 가는 것이다. 이미 막다른 시대에 도달된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마지막 때를 거론하는 요엘 선지자를 거론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 19절, “또 내가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절,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해석체제가 또 방언에 속한다. 이건 무슨 내용인가? 마지막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럼 그 마지막 때의 현상이 3차 대전인지, 개기일식인지.. 그런 것을 질문하는 것이 또 잘못된 것이다.

마지막 때의 현상은 성령은 우발적이라서 나라는 존재가 파악이 될 의무가 없다. 내가 마지막 때에 속한다면 골프를 쳐도 해가 변하는 것이다. 내가 놀러가도 해가 변하는 현상으로 같은 레벨에 속한, 같은 서랍에 들어있는 현상이다. 해가 변하는 것이나 성도가 골프 치는 것이나 똑같이 종말이 왔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라 이 말이다.

사도행전 2장 17절,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여기에 들어있는 원형은 예수님께서 일하신 내용이 들어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를 들어 대패질을 했다면 이게 예언이고 환상이다. 꿈이 된다. 저 세상을 보여주는 현상의 부분이다. 현상은 전체를 보여준다. 제각기 하는 일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평범한 돈벌이지만 성도끼리 볼 때는 종말임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성령이 현상으로 이끄시기 때문이다. “주께서 하셨습니다.”

방언은 너무나 평범해서 못 알아듣는다. 소속이 저 세상에 속하고 나는 이 땅에 있으면서, 경계선으로, 내가 어떻게 살든 주께서는 죽으시고 살아나셨다는 그 덕분에 나는 구원되었다. 그 이야기를 품고 태어나게 했으면, 그것은 주님의 역량이고 주께서 만들어주신 경계선이다.

제 5강. 방언의 해석.

예수님 자신이 외부인이 되는 것이다. 외부인이기 때문에 외부인이 하는 모든 것이 방언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 알아듣지를 못한다면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남태평양 이스터 섬의 모아이의 거석이 있는데, 땅에 파묻혀있다. 머리는 외부에 나와 있고 몸체는 내부에 연결되어 묻혀 있다. 그러면 방언은 주님이 안 보이지만 이쪽(모아이 아래쪽)에 속한 사람들이 성령을 통해서 한다. 방언은 내용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못 알아듣는 이야기다. 살고자 하는 이 세상에서 죽으심을 앞장세운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이게 언어에 담긴 의미인데, 항상 언어의 의미에서 이런 단어들은 나라는 중심으로 의미를 압축(은유)하고 결합(환유)한다.

인간의 단어는 자기존재증명이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방언은 사람들에게 밀침 당해 죽으셨다는 그 분을 증거 하는 내용이 된다. 인간은 어떻게 하면 내가 살고자 하는 쪽으로 귀를 기울이는데 엉뚱하게 예수님이 오셔서 죽었다가 살아나셨다고 하니까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의미는 내 살기에 유리한 하나님으로 굳히기 때문에, 죽는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에 삽입될 여지가 전혀 없다. 심지어 열두제자마저도 자기들에게 유리한 예수님을 좇다가 다 도망갔다. 그 중에 글로바라는 제자에게 나타나 약속대로 죽은 하나님이라고 하니 깜짝 놀랐을 정도다.

그렇다면 방언을 어떻게 해석 하느냐, 우리가 하면 안 되고, 성령 받은 베드로, 빌립, 스데반, 사도바울 이런 분들이 나서서 방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를 봐야 한다. 인간의 이름과 하나님을 이름을 중첩시킨다. 중첩이란 것은 하나가 있어야 될 자리에 두 개가 있는 것이다. 행 4장 25절,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베드로와 요한이 설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구약에 나오는 다윗이라는 사람을 예수그리스도와 중첩된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이름에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있었다. 그러면 인간의 이름은 가면이 된다. 이 가면을 벗길 때 방언이 해석이 된다.

시대적으로 공간적으로 뚝 떨어져있는, B.C.900 다윗시대와 그 이후의 예수님 시대가 같이 얽혀 있다. 중첩이 되어 있는 것이다. 물리학에 양자 얽힘, 중첩이라는 용어가 있다. 중첩은 뭐냐 하면 여기서 일어난 일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독자적으로 일어난 일이라도 사실은 원인과 결과로 얽혀져 있다는 것이다. 서로 동떨어진 시대인데, 동일한 시대로 같이 보는 것이다. 성령이 다윗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니까. 다윗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함께 있었다면, 다윗의 가면을 확 벗기면 그 안에 예수님의 일하심이, 성령님의 일하심이 그 안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삐에로처럼 다루어졌다는 것이다. 다윗 때는 몰랐는데 성령이 오고 난 뒤에는 소급해서 그렇게 구약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4장 25절,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절,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이 말씀이 시편2편의 말씀인데 언제 완성되느냐고 할 때, 다윗시대에?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게 완성이 된다는 것이다. 시간의 거리는 무시하자는 것이다. 모든 게 현재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성령 안에서의 시간은 말씀이 언제 던져졌느냐가 중요하지,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느냐는 의미 없다. 다윗이 죽든지 살든지 뭘 해도 어차피 다윗은 삐에로요 마스크다. 그러한 마스크역할을 행7장에 나오는 스데반집사가 또 모세를 통해서 한다. 나와 같은 선지자가 곧 모세다. 모세의 가면을 벗기면 그 안에 예수님이 들어있다. 나와 같은 선지자를 빼버리면 진짜 선지자, 모세에게 예언했던 진짜 그 원형의 선지자는 모세 안에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모세가 가는 곳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잡아먹듯이, 쥐어뜯듯이 반항을 일삼았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주님이 자기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지상에 자기백성들을 깔아놓고 시공간을 능가하는 다른 해석을 내어 놓는 것이다. 예수님의 몸과 인간의 몸을 두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다르다. 인간의 몸을 두르고 있는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계속 가는 것이 시간이고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 지점에 있다가, 또 이 지점에 있다가 움직임으로 어떤 차이가 나는 것이 공간이다. 그러다 나중에는 예를 들어서 기차시간이 확정되면 인간의 시간은 사적시간, 공적시간으로 중첩이 된다. 그래서 우린 공적인 시간에 지배받게 되어있다. 사적보다 공적이 우선된다. 공적인 시간이 유지돼야 국가권력이 되기 때문에. 인간의 몸은 사적인 비눗방울과 공적인 비눗방울 둘 다 들어있어서 주변과 함께 간다. 내 소유는 나의 신체가 확장된 것이다. 자기 육체가 점점 더 확장되는 것이다. 인간은 행동하게 되면 모든 것이 자기 소유의 확장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주님의 몸은 새로운 시공간의 중첩이다. 그래서 어디에도 주님이 함께 계신다. 인간은 자기존재증명을 하고 예수님도 자기존재증명을 한다. 사도행전 마지막에는 왜 풍랑이 일어나느냐? 그리고 스데반집사는 왜 돌에 맞느냐? 라고 할 때에 죽음을 통해서 자기 마스크가 벗겨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제는 남의 인생을 그만 살래” 자기주인은 따로 있는데, 자기 몸이 있으니까 마스크를 그만 쓰고 싶은 것이다. 내용물은 주님이고 껍데기는 나고, 이것이 중첩이다.

사도바울에게는 죽음보다 더 센 게 왔다. 환란이다. 주님의 죽음이 들어있다. 죽음마저 이겨내지 못한 그 고유의 자리에 주님과 사도바울이 함께 있었던 것이다. 중첩된 현상이 다 되었을 때, 주님이 제시한 것은 죽음이다.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도 마찬가지다(눅9:30), 다윗을 누가 그렇게 괴롭게 했는가? 시편2편에 보면 이방민족이다. 신약에 오면 이방민족정체가 바꾸어진다. 구약은 이스라엘 대 이방민족 이렇게 대치되어 있었고, 지금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이방민족 대 이스라엘민족에게 밉상 받는 사도들로 대치되어 있다. 결국 이방민족은 이스라엘과 결탁이 된다. 본디오 빌라도와 권력이 결탁한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이방민족에게는 주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의 중첩이 없고, 사도들은 마스크를 썼으니까, 아바타니까 중첩이 있고, 보기에는 같은 인간이지만 안에는 예수님이 들어있으니까, 사도들을 몰아세움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살해했던 그 권력이 그대로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모아이거석을 보면 머리(부활하신 예수님)는 바람 불어 멀쩡하지만, 땅에 묻혀 있는 몸(사도들)은 모기한테 뜯기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아프다. “니가 아프냐? 나도 아프다. 참아라. 니는 뜯길만하다.” 죄인이기 때문이다. 모기한테 뜯기는 이것은 예수님이 죽으신 것 때문이다. 이게 방언이다. 방언을 통역한 것도 방언이다. 방언이라는 외국말이 이제는 저 초월적인 하늘나라의 말이 되는 것이다.

모하이 이미지를 바닷물고기로 보면 이 물고기가 가끔은 바닷물 위로 뛰어 올라온다. 근데 자기만 뛰어 올라오는 것이 아니고 여기저기서 뛰어올라오는 것을 보는 것이다. 세상권력에서 나만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저기에서 벌떡 뛰어올라온 자들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다시 연합하고 규합하고 조합하라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은 개인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잠식되어 있고, 잠겨 있다는 것이 수면위로 고개를 내민 물고기에게만 그것이 인식이 되게 되어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고난 받아서 펄쩍 위로 올라가니까 이 세상 전체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악마의 세력이라는 것이 바다에 잠겨 있다가 가끔 뛰어오르는 물고기에 의해서 증거 되는 것이다. 그냥 가만히 살면 되는데, 어떤 사태가 유발되고 일어나는 것이다.

사도행전 27장 풍랑이야기를 하면, 갑자기 풍랑이 왜 일어났는가, 풍랑으로 구원의 여망이 끊어질 정도로 사도바울은 곧 죽을 것 같은데 사도바울은 살아있었다. 그것은 사도바울을 살리기 위함이 아니고 복음을 살리기 위해 사도바울을 보호해준다. 그러지 말고 우리는 그냥 바다가 잔잔했으면, 앉은뱅이가 아예 처음부터 멀쩡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라고 생각한다. 근데 이것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사이에는 죽음의 세계, 악마의 세계, 예수님을 공격하는 세계에 잠겨있었다는 것을, 이 세상 전체를 볼 계기가 된 것이다. 몸이 나은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음을 인식하는 이것이 최고의 선물이 되는 것이다. 주님은 살아계시다. 나는 죽어있는데 예수님이 살아있는 조건하에서만 나는 살아있다. 나는 죄인이 맞는데 의인이 되는 조건은 죄인과 함께 계시는 주님으로 나는 의인으로 인정받는다. “그래, 나 죄인이야!”

성령 받은 성도의 특징은 구원받은 자기존재증명이 아니다. 구원받지 않아도 되는데 주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나를 임의로 택했고 주님의 살아있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다. 구약에서는 다윗이나 모세가 죽을 뻔 했지만, 신약에서는 이미 죽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이미 죽은 자이기에 풍랑이 일어서 산다는 것이 더 이상할 정도로 사도바울을 몰아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가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 것이다. 자기가 자기에게 타인이 되는 것이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있는데,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4장 마지막 절에 나오는 바나바가 밭을 팔아 사도들 앞에 바친 것과 대조를 시키는 것이다. 값을 내놓았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둘 다 값을 내놓았다. 바나바는 주님의 아바타이기에 시킨 대로 주님의 것을 내놓으라고 해서 내놓았을 뿐이다. 주의 이름과 내 이름에서 내 이름이 삭제되면서 주의 이름이 드러난다. 근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 이름을 반만 지웠다. 모아이에서 얼굴은 주님인데 아래턱에는 자기 수염이 난 것이다. 괴물이다. 베드로가 니가 사람을 속임이 아니고 주의 이름을 속였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둘 다 죽었다는 이야기다. 처음부터 안 냈으면 안 죽었을까? 그런데 안 낼 수가 없다. 인간은 자기 이름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자기존재증명의 본능이 있다. 그 본능을 사도 앞에서 행사한 것이다.

사도행전 5장 3절,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갑자기 악마(사단)가 나온다. 악마의 특징은 주님을 알면서도 치료받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자기가 뭐가 병이고 모자란 줄 알면서도 절대 병원에 안 간다. 나이 들수록, 70이나 80이 되면 고집증세가 급상승한다. 속에 있는 괴물이 점점 더 위세를 발휘한다. 반인반수다. 이게 인간의 본색이다. 자기 속에 괴물이, 사탄이 우선이다. 자기존재증명, 자기 의가 눌러져 있다가 두뇌에 산소공급이 안 되면 혼란이 일어나게 되고, 그야말로 개구리나 곤충이 가지고 있는 본능에 충만한 것 밖에는 없다. 감각에만 의지하여 하루하루 버틴다. 악마가 교회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 니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런 사태를 유발한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 권한이 있다고 헌금에 실어서 자기정당성을 내세운 것이다. “주의 영을 시험 하려느냐”(행5:9).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을 보고 온 교회가 함께 두려한다는 했다. 두려워하지 말고 즐거워해야한다. 주님의 살아있는 것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보다 주님이 살아계시기에. 처음부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주와 함께 있지를 않았다. 하나님은 안 받아 줄 사람은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안 받아준다. 이 대목을 보면서 그 당시에 헌금을 내려고 한 사람이 벌벌 떨 텐데, 근데 성령이 찾아온 사람과 안 찾아온 사람의 구분을 해야 된다. 내든 안 내든, 깎아내도 안 죽는다. 왜? 성령이 그걸 지시했기에. 나는 어차피 개판이요, 어차피 죽은 사람으로 나갈 것이냐, 아니면 내 잘남의 존재증명을 할 것이냐, 그러나 성령이임하게 되면 우리는 어차피 죽은 자기 때문에 두 번 죽을 필요가 없으니까, 주님의 아바타로 살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방언해석의 중첩되어 있고, 중첩된 마스크를 벗을 때, 반드시 죽음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마술사 시몬은 돈으로 성령을 사고자 했을 때(행8:18), 베드로는 돈 주고 성령을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니가 은과 함께 망하라고 한다(행8:20). 이렇게 성령은 인간의 유인책에 말려들지 않는다. 온화하다고 성령이 오지 않는다. 모아이의 입장에서 세상에 자기 몸체를 드러낼 때는 이미 머리에서 결정된 것이다. 근데 밑에서 비슷하게 흉내 내어 머리에 접근하려고 하게 되면 다 잘린다. 끊어진다. 그래서 모방은 한계가 있다.

교회가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는, 모방범죄를 하는 사람들을 다 추려내야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8장27절에 보면 빌립은 사마리아로 내려가서 전도를 한다. 사도바울이나 사도들은 성령이 밀어붙이는 것이다. 자기가 전도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자기가 있는 자리가 주와 함께 있는 자리이기에 전도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사53장 7-8절을 읽게 된다. 성경 펼치는 것도 우연이다. “저가 누구냐?” 빌립이 방언을 해석할 때는 예수님의 자기존재증명이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이것이 성령이 하고자 하는 뜻이다. 내 존재증명 접어버리고 예수님이 이런 분이라고 내놓으면 그게 바로 성령의 해석이다.

6강 세속

사도행전의 테마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주시므로 구원된다면 이스라엘에게도 율법주지 말고 바로 성령을 주시면 깔끔하게 될 텐데, 왜 율법을 줘서, 이스라엘이 오해케 해서 메시야를 죽게 만들고 뒤늦게 와서 그 방법이 아니라고, 까치발 딛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가 뭐냐 하는 그 점이다. 사실은 사도바울은 베드로와 충돌하면서, 유대인들의 구원방법과 충돌하면서 더 감추어진 내용을 갈라디아서, 로마서, 고린도전서에 다 담아놓았다.

이방인의 구원방법과 유대인들의 구원방법이 왜 다른가? 어느 쪽이 왜 정답인가? 사도행전 10장부터 시작이 된다. 고넬료에게 천사가 찾아온다. 베드로에게도 천사가 찾아온다. 하나님께서 이 두 사람을 만나게 해 준 이유가 뭐냐 하면 유대인의 구원방식과 이방인의 구원방식이 차이가 나는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이라는 이 자체가, 이미 인간은 비눗방울이어서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선과 악이라는 법적인 정신에 지배를 받고 있고 선악과 체계에 질식하도록 갇혀있다는 것이다.

그럼 인간이 구원이 되려면, ‘어디에서 어디로’가 성립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라는 방식이 다 성립이 되어야 한다. 근데 순서상 ‘어떻게’가 먼저 등장해서 ‘어디에서 어디로’는 이미 ‘어떻게’로 결정이 다 돼버렸다. 구원이란 율법의 저주성에서 벗어난 것이다. 율법을 십자가로 완성하면 더 이상 저주는 없다. 근데 인간은 그냥 몸 편하면 그만이다. 불행에서 나가면 구원이고 행복으로의 구원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게 잘못된 구원인 것이다. 하나님의 끼어드는 게 없이 그냥 자기 몸 편한 것으로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고 축복이라고, 일방적으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자기가 정한 것이다. 어떻게? 이게 없다. 왜? 살기 힘들어서, 자기 욕심 때문에 자기가 밤잠을 못자기에.. 모든 종교가 여기에 해당된다.

종교는 고통에서의 해방, 고통에서의 면제를 원한다. 그러면 그 고통이라는 것이 어디서 오느냐? 사람들은 고통은 죄를 지어서 온다는 것이다. 이게 문제다. 죄를 지어서 고통이 오는 것이 아니다. 복음이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복음이다. 왜 세상에 고통이 있어야 하는가, 예수님이 다녀가신 곳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덩달아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렇게 정답을 내려야 한다. 주님의 죽으심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 이 땅에 그리스도와 함께 같이 있어줘야 된다. 그게 바로 죄다.

우리가 원인이 되어서 고통이 오는 것이 아니고, 이 땅 자체에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도 이 땅에서 고통 받았다. 그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하라고 우리에게 고통이 주어졌다. 왜냐하면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가 잘 됐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주님이 하신 일이 옳았다는 것으로 모든 것이 정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령 받은 사람의 모습이다. 결론은 인간의 고생은 죄 탓이 아니다. 죄를 지어서가 아니고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라고 우리가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결론을 내야 된다. 주님이 이미 고통스러웠다면 우리도 당연히 고통스러워야 된다.

고통을 억지로 이겨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주님의 고통에 동참된 것을 감사하라고 한다. 주님과 함께 끈으로 묶여진, 주님의 아바타기 때문에 고통이 왔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감사하면 고통이 사라질까? 감사한다고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센 게 온다. 응용문제, 심화문제가 들이닥친다. 왜냐하면 내 믿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나는 주님을 믿은 적도 없고 믿음도 없고, 믿을 필요도 없고...내가 믿음소망사랑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데에서 나오는 감사가 나온다. 빌4;13,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내가 한 게 아니잖아요. 주께서 일방적으로 일을 벌이셨잖아요.”라는 고백이다. 믿음은 소유가 아니라 도로 주님께 도로 주는 것이다. 계시록 4장에서 면류관을 도로 바친 것처럼, 내가 쓸게 아니기에. 원치 않는 사태가 그냥 일어난 것이기에, 주고받고 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냥 잊어버리고 감사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10장에 베드로가 배가 고파서 먹고자 했는데, 하늘에서 한 그릇이 내려왔다. 근데 그릇 안에 있는 것은 율법에 의하면 못 먹는 것이었다. 여기서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고넬료가 자기 자존심 때문에 율법적인 성향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베드로를 도와준다. “니 강도 돼봤어?”이런 식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베드로를 가르치듯이, 구원받은 이방인이 구원받겠다고 그렇게 닦달을 내는 유대인을 가르치는 것이다. 못났기에 가르칠 수 있는 권한이 있는데, 그 못남을 유지하지 못하고 뭔가 쪼다 되었다고 느낄 때는 이미 먼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봉사는 농락당했다고 생각할 때 그만두어야 한다. 사람에게 싸움이 일어난다는 것은 이미 자기가 싸울만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붕 떠서 그렇다. 나는 니 한테는 안 진다. 니한테 지는 것보다 차라리 죽겠다고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구원방식은 아무것도 아닌 자를 구원하시는 그것을 통해서 오직 십자가의 피, 주님의 희생만, 단독자의 영광에만 쏠리게 한다. 나는 이렇게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다. 이것 믿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것만 변함이 없는 것이다. 이것을 보이기 위해서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어야 한다. 근데 이것을 믿는다고 하게 되면 복음이 가리어지기 때문에, 또 자기가 잘난 체 하고 살아있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은 더 이방인, 더 낮은 사람, 더 구원받지 못할 자로 들이대는 것이다.

유대인의 구원방식과 이방인의 구원방식에 대해서는, 율법 없이 어떻게 구원받느냐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그래서 너희들의 구원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함으로 이렇게 정리가 되었는데, 근데 이방인의 구원 방식에는 난제가 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이방민족의 권세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1,2,3차에서 그걸 느낀다. 사도행전 17장 16절에,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유대인들만 만나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 바울이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는 그리스사람과 만난 것이다. 18절에 보면,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쌔”라고 되어 있다.

도대체 바울이 가진 이 복음이 어떤 내용이기에 이게 쟁론할 수 있는 여지가 발생했느냐 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나는 예수를 믿음으로 이렇게 구원 받았다.”라고 나오면 스토아, 에피쿠로스학파와의 대결이 안 된다. 구원론에 관한 것이라면 거기에 대해서 이 두 학파도 할 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와 살았다가 내용이기에 그들은 멍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자기 잘났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기에 그들도 사도바울을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 당신은 행복한가? 라고 사도바울에게 질문한다면, 나는 예수 믿음으로 행복한 것이라고 하면 그들과 같은 한통속일 뿐이다. 근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렇게 생각한 것이 죄입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도대체 스토아, 에피쿠로스철학자들이 무슨 소리를 증거 했기에, 대분부의 아테네 사람들도 동조하고 이들과 함께 사도바울을 공격했던가? 이게 옛날 철학이 아니다. 오늘날 과학이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세상은 원자로 또는 입자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을 쪼개고, 쪼개고, 쪼개다 보면 결국은 쪼개지 못할 입자들의 다발이 있다. 근데 위에서 똑바로 떨어지지 않고 가끔은 비스듬하게 떨어지게 되면 입자들에게 변화가 생긴다. 그래서 우주는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게 무신론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철학에 신이 없음에도 세상 사람들에게 환영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시대에 이미 신을 지워버리고 인간존재를 그 자리에 집어넣어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전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전쟁으로 자기인생을 못 살고 빼앗긴 것이다. 그래서 전쟁이 지겹고 그냥 내 몸 하나 편하면 좋겠다 해서 나온 철학, 윤리, 실천철학이 스토아, 에피쿠로스철학이다.

그러면 여기서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 스토아학파의 행복은 뭐냐 하면, 세상의 원리를 알면 행복할 수 있다. 로고스라 하는데 이것은 이성이다. 인간의 이성이 만물의 원리인데 감정보다 이성이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감정은 우발적이지만 이성은 한결같기 때문에 한결같은 로고스, 이성에 의해서 살아간다. 복음이 오기 전에 이미 이런 로고스 사고방식이 있었던 것이다. 원리를 알고 있으면 감정을 초월하기 때문에 그게 행복이라고 한다. 에피쿠로스학파는 그게 아니다. 쾌락을 조절하면 그게 행복이라는 것이다. 너무 즐겁지도 말고 너무 재미있지도 말고, 너무 퍼지지도 말고, 적당하게 행복하고, 적당하게 즐기게 되면 그게 바로 행복이다. 이 이론이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다. 왜냐하면 생존경쟁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라는 것이 지금 현 시대의 모토가 되어 있고, 모든 게 경쟁인 이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성주의(스토아)가 인간은 도덕적으로 살아야 행복하다는 칸트주의로 나간다.. 쾌락주의(에피쿠로스)는 편리한 것이 진리라고 하는 존듀이의 공리주의로 나간다. 이것이 나중에는 과학의 발전으로 나온다. 과학은 응축이다. 모든 것을 하나로 응축하면 된다. 내 것만 소유하면 된다는 이 진리가 과학에서 나온 것이다. 과학에서의 질량은 힘을 줬을 때 가속도가 나오는 것을 질량이라고 하는데, 질량은 다 응축된 것이다. 응축된 것은 소유의 대상이다. 내가 나를 응축할 때, 붙들 때 행복하다. 나는 나를 버리지 않으면 나름 행복한 것이다. 꼭 나를 붙들고 산다. 과학정신이다. 내가 나를 확고하게 응축하지 않으면 상품가치가 없다. 응축되는 것은 계속 팔리기 때문이다. 내가 붙들고 싶은 가사를 써라. 자기이야기만. 꼭 자기이야기만. 그게 랩이다. 무조건 나만 잘된다면.

질량으로 모든 것을 응축할 때 이것을 수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 수학언어로 함축시켜버린 이 우주관, 이걸 내가 알 때, 소유할 때 그게 바로 행복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이야기 했을까? 사도바울은 예수와 그 몸의 부활을 자랑한다(행17:18)고 했다. 대결 방법이 서로 다르다. 그들은 그저 내 몸을 내가 지키는 것이다. 내가 행복하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한다. 혼자 행복하지 않고, 상대적 빈곤에서 행복하고, 짓밟으면서 행복하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나에게 응축한 시대에게 예수님의 몸을 주목하라고, 예수님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고, 세상은 이미 죽음의 바다에 빠져있음을 그냥 알려준다. 이게 설교의 핵심이었다.

그럼 설교하기 쉽네? 그러나 예수님이 죽었다 할 때, 예수님의 몸은 이런 더러운 세상, 악마와 결부되어 일어났다는 것을 맞물려 이야기 해줘야 한다. 나만 잘 살면 행복이라고 여겼던 자기의 몸이 그걸 낯설지 않게 설명해준다. 여기에서 예외 될 수 없다. 맞닥트리고 모든 만남이, 육신과 주님의 복음과의 계속 부딪힘이 그대로 설교로 나와야 한다. “나 이렇게 개판이고 죄인입니다. 돈에 환장하는 이런 자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라는 설교가. 이게 바로 방언이다.

그러나 스토아나 에피쿠로스학파는 내가 잘되면 된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잘 될 때 복음 없이도 산다. 살면 살수록,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나만 생각하는 증세가 심해진다. 이럴 때 복음 전하는 기회다. 나 같은 이렇게 못돼먹은 인간이 또 있을까? 라는 것과 예수님의 피를 절묘하게 결합을 시키라고 주께서는 나로 하여금 망가지고 또 망가지게 한다. 감사가 없다는 것은 높아지고, 높아지고, 높아지려고 하기 때문에 자꾸 힘들다. 근데 낮아질수록 중력의 법칙 의해서 자꾸 내려간다. 내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주님이 더 높아지는 그 길이가, 그 낚싯줄이 점점 길어지는 것이다. 십자가 지는 것이 그렇게 편하다. 성도의 모습은 더더욱 낮아지게 하신다. 주님은 사도바울을 더 낮아지고, 더 낮아지게 만든다. 왜? 그거보다 더 낮은 사람을 건져내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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