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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0 18:34:48 조회 : 664         
   2017년 노벨문학상 작품 [남아있는 나날] 평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2017년 노벨문학상 작품 [남아 있는 나날]에 대한 서평

저자: 가즈오  이시구로              김석희 역

때는 1956년 7월, 35년 동안 달링턴 홀의 집사로서 전 주인에게 충직하게 일한 주인공은 새 주인의 배려로 6일 동안 주인의 포드차를 타고 삶의 경계선을 넘어 영국 남쪽으로 여행하게 된다.

전에 같이 일하면서 마음에 연민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른 이와 결혼을 해서 직장을 그만 둔 컨턴 양도 겸사해서 만나서 복귀 의사를 타진하려는 생각도 있다.

하지만 소설의 주된 흐름은, 주인공의 6일 여행 내내, 과연 자신이 ‘참다운 집사’인가를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되짚어보는 내용이다. ‘참다운 집사’로서의 갖추어 될 품위란 과연 어떤 것인가? 그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주인에 대한 충복스러운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비록 주인이 비-인간적 결정을 내린다 할지라도 집사는 그 주인의 결정을 의심하지 않고 충실하게 실행해야 한다. 예를 들면 하녀 두 사람을,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단호하게 추방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집사는 토 달지 않고 즉각 조치를 내린다. 이 일로 좋은 관계였던 동료 컨턴 양과의 사이도 틀어진다.

컨턴 양은 주인공에게, ‘이번 내린 조치가 부당하다’가 직언하지만, 주인공은, ‘이런 경우가 바로 품위 있는 참다운 집사 됨의 본질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고 강변한다.

독일 나치 정권이 들어서고, 히틀러는 영국에 대해서 자신의 음흉한 전쟁 계획을 사전에 숨기기 위해 영국 정치권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주인공의 주인에게 독일 대사를 통해서 유화책을 펼치는데 달링턴 홀이 그 밀실 정치의 구심처가 된다.

주인공의 주인인 달링턴은 영국의 위대한 전통인 신사도를 시대상황에 흔들림 없이 굳게 지켜나가는데 있어 크나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독일의 나치 정권은 바로 그 점을 이용한 것이다. 1차 대전에 패배한 독일에 대해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승전국들이 너무 과도한 배상금을 요구한다고 엄살을 부리는 것이다.

그래서 영국이 나서서 다른 나라를 설득하여 독일의 힘든 사정을 감안해달라는 계속 요청하고 있었는데 그 중개자로 주인공의 주인인 달링턴 씨가 힘써 달라는 것이었다. 친 나치적 정책을 영국 정치권내에 펼치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호응하고자 달링턴 씨는 자기 저택에서 일하는 유대인 하녀 둘로 급작스럽게 해고한 것이고, 주인공은 전후 사정을 다 알면서 충복하게 주인의 지시대로 따랐던 것이다.

이것은 결코 주인의 지시가 윤리적이라서 아니라 대대로 ‘기품 있는 집사’는 주인의 그 어떠한 부당한 지시도 집사 개인의 사적 감정까지 중지시켜 가면서 ‘집사로서의 이상(理想)’을 실현하는 기회라고 여겼던 것이다.

큰 전쟁을 앞두고 독일 나치 정권의 영국 내 위장책은 더욱 활발해진다. 덩달아 달링턴 홀이라는 저택이 매우 분주하고 긴장감이 감돈다. 세계 평화와 직결된 회의들이 빈번하고 주인공의 업무도 버거울 정도로 집중된다.

그 바쁜 와중에 주인공의 아버지 (이 분도 왕년에 소문난 ‘품위 있는 집사’로서 지금은 은퇴해서 아들과 더불어 보조집사로서 생의 마지막을 충실하게 집사일을 달링턴 홀에서 움직이고 있었다)가 뇌졸중으로 운명한다.

주인공의 동료 컨턴양의 헌신적으로 곁을 지키고, 한 공간에 있으면서 아들 주인공은 세계 평화와 관련된 막중한 업무의 일부라도 감당하기 위해 들락날락 하다가 아버지의 임종을 끝내 지켜내지 못한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다.

이런저런 회상을 하면서 넷째 날에는 어느 마을에 도착하는데, 그곳 사람들은 나름대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소시민적 정치적 견해들을 갖고 있었다.

주인공은, 전에 자신이 달링턴 홀의 손님으로 온 정치인들에게 ‘무식(無識)의 표본’으로서 집사 자신이 일반 서민의 대표로 즉석에서 일방적으로 호출되는데, 그들 정치인들이 주인공을 불러낸 것은 일반국민들의 견해가 얼마나 비전문적 안목을 갖고 있는가를 공개하기 위해서이다. 주인공은 그날의 아픔을 잊지 않고 당시의 일을 회상하게 된다.

내용은 이렇다.

안락의자에 늘어 앉아있는 신사분이 호출당해 서 있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여보게, 자네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네.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해 온 어떤 문제가 있는데 자녀의 도움이 좀 필요해. 자네가 볼 때 미국과 관련된 부채 상황이 지금 당면한 무역 침체의 중요한 요소인 것 같은가? 아니면 혹시 그것은 핵심에서 비껴난 얘기이며 금 본위제를 포기하는 것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가?”

주인공은 공손하게 ‘품위 있는 집사’답게 대답한다.

“대단히 죄송합니만 나리, 저로선 그 문제에 도움을 드릴 능력이 없습니다.”

계속 질문이 들어온다.

“그렇다면 다른 문제에서 우리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만약 프랑스인들과 러시아 볼셰비키들 사이에 군사 협정이 체결된다면 유럽의 통화 문제가 개선되거나 악화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주인공은 동일한 답변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키득대는 손님 신사는 질문은 멈출 줄을 모른다.

“최근에 북아프리카 상황에 대해서 연설을 한 무슈라발의 본심은 무엇이었을까? 자파 내 비주류인 자국의 민족주의자들을 압살하기 위한 책략에 불과했다는 견해에 자네도 동조하는가?”

주인공은 여전히 공손하게 신자들에게 답한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그 문제에 대해서도 도와 드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자 그 중 한 신사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상황을 정리한다.

“이 나라의 중대한 결정들을 여기 이 사람과 그의 동류인 수백만 대중의 손에 맡겨야 한다고 고집해야 합니까?”

그들은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고 그 와중에 나리(주인공의 주인)께서 더듬더듬 말씀하셨다. “고맙네 스티븐스(주인공 이름)”

덕분에 나는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 저녁, 선창가 벤치에서 주인공은 켄턴 양을 만난다. 그녀는 남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딸이 있는데 그 딸이 결혼하여 가을에 아이를 낳게 된다고 말해주었다. 이제는 ‘벤 부인’이다.

주인공은 켄턴 양(=벤 부인)이 보내온 편지 구절에 대해서 그녀에게 언급하면서, “사실 저는 벤 부인의 일상에 걱정스러운 일이 생겼는지 생각했습니다.”고 말한다. 그러나 켄턴 양은 극구 부인한다. 그렇게 썼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 구절은 이러하다.

‘남은 내 인생이 텅 빈 허공처럼 내 앞에 펼쳐집니다’

선창가에 전등이 불이 켜지고, 비는 계속 내리고, 둘은 무심하게 다시 헤어진다. 남은 것은 저녁이요 주인공 본인이다.

저녁처럼 ‘남아 있는 나날’은 무슨 의미로 채워야 하나?

(평)

작가는 작품을 통해 다음과 같이 묻는 듯하다.

많은 자들을 살리기 위해 세계 평화에 기여하기 위하는 일에 종사하는 것이 가족의 죽음보다 더 중요시되어야 될 근거가 있기는 과연 있는 것인가?

‘집사’로서 표준을 세우는 일이 평생을 다 소모할만한 가치가 있는가? 즉 내가 해야 할 그 일이 ‘나’ 자체를 근원적으로 없앨 만한 권한을 지니는가?

살아 있기에 비로소 발생되는 그 일이 도리어 근원이 되는 ‘살아 있음’의 고유한 의미를 갉아먹어도 그냥 허락해야 하는가?

이 모든 의문은, 소모되는 절망을 맛보면서도 계속 여전히 ‘남아 있음’에 희망의 불씨를 키우려는 인간의 맹목적 노력처럼 보여진다.

‘산다는 것’을 살아 있는 동안 알 수 없는 것이고 왜곡하기 마련이다. 올해 (2017년) 노벨문학상은 또 다시 생의 한계를 슬퍼하는 내용이다. 분석하고 탐구해봤자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주제가 바로 ‘존재의 의미’다.

던져져서 살면서도 누가 던졌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말한다. “신을 찾으면 해답이 나올 것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신이 다가와도 도망하는 쪽은 오히려 인간들이다. 계속 신을 기피하고 멀리하고 숨는다.

따라가면서 복음을 전해주어도 귀를 굳게 닫고 내뺀다. 복음이 들리지 않는 곳으로 달아난다.

인간은 움직이는 괴물이다. 보이지 않는 악의 모니터다. 노벨문학상은 이 괴물에 대해서 모른다. 모든 것을 궁금해 하면서 유독 복음에 대해서 원수로 행세하며 대든다. 예외 없다. 노벨상 속에서 악마는 여전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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