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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5 09:52:53 조회 : 2060         
   십자가마을 여름 수련회 안내와 그 교재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를 아래와 같이 개최합니다.



일 시: 7월 30일(일) ~ 8월 1일(화)


장 소: 가야호텔 (경북 성주군 수륜면 가야산 식물원길 52)


강 사: 이근호 목사


주 제: 열왕기상


회 비: 10만원 (유치. 초등생 5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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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책임자



서울 경기: 이미아 선생 (010-9998-4171)


부산 경남: 박병규 목사 (010-2323-3571)


대구 경북: 이상규 집사 (010-2685-8211)


광주 전라: 김을수 집사 (010-2627-7800)


대전 충청: 김종인 집사 (010-8808-7111)


울산 지역: 김병만 집사 (010-4379-1471)


강원 지역: 정인순 목사 (010-2676-6823)


그외 지역: 서경수 목사 (010-2962-7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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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수련회에 참석을 원하시는 분은 해당 지역 책임자께 7월 22일까지 신청해 주시고


각 지역 책임자들께서는 23일까지 알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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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나라 (2017년 십자가마을 여름 수련회 교재)



Ⅰ 서론



1. 인간의 물질성


진리란 비밀을 들춰냄이 아니라 도리어 보존함이다. 그래서 비밀을 없애려는 인간과 싸운다. 인간들로 하여금 승리의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한다. 이 진리의 개입으로 진리는 인간과 싸운다. 이게 역사다.



역사의 전개는 고통의 전개이다. 이 고통을 기억하고 함축한 것이 언약이다. 그래서 언약은 반복적으로 그 이후의 역사를 그 이전에 세워진 원칙에 준해서 해체한다. 역사 안에서 진리가 피해 받은 바를 언약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삶을 키우는 과정이 아니라 끝없는 해체의 과정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그저 시체가 되기 위해 매일 출생한다.



진리의 돌출은 순서대로 예상되는 것이 아니라 ‘예외적 상황’을 통해서 드러난다. 예외란 ‘현 규칙의 위반’이다. 내부에서 해명과 분석이 가능한 위반사례가 아니라 밖에서 포획한 채 ‘끄집어냄’을 당하는 식으로 ‘예외’가 발생한다. 이는 곧 인간들이 진리를 배제한 것이 아니라 진리로부터 인간 세계가 도리어 배제 당함을 알리는 징후다.



인간들은 자기 역사 속에 들어온 진리를 포착하려고 계시의 언어 속을 헤집는다. 그러나 언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형상을 빌려 표현하는 기법이다. 거기서 묘사할 수 없는 형상부분은 다른 가시(可視)적 대상의 형상으로 대용되면서 유감스러운 해석을 남긴다. 진리는 이처럼 역사에 여운을 주고 세상을 끝까지 자기 식민지로 만든다.



순수한 의미는 해당되는 개별 단어나 작품 전체로도 온전히 드러날 수 없으며 진리는 오직 파편들의 불연속 속에서만 드러난다. 따라서 인간들은 투덜댄다. “과연 순수한 의미가 있기는 있을까?”



여기서 인간들은 자신의 본성을 왜곡할 의도를 보인다. 곧 자기를 ‘최종 순수’로 여기고 싶은 것이다.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니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사 47:10)”



역사 안에서의 모든 싸움의 근원은 ‘최종 진리자’를 확인하는 싸움이다. 순수, 혹은 진리란 혼합(mix)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에게 묻어있는 모든 혼합요소를 털어내고 오직 순수한 최종적 자아로 변신하려는 투쟁이 역사 안에서 벌어진다. 자기(自己) 일원론(一元論)을 위하여!



이 본성을 당할 자가 없다. 이 본성으로 투쟁이 여전하다는 것을 통해서 모든 인간은 생겨난 그대로가 결코 순수하지 않고 혼합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이런 모습들을 들추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즉 인간은 처음부터 물질의 일부였던 것이다.



2. 진리와 물질의 섞임(mix)


인간은 물질의 일부임이 판명되면서 인간이 세상의 원인자가 아님이 분명해졌다. 달과 해와 별을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닌 것이다. 동시에 그것들의 주관자도 아니다. 그럼에도 인간 주변에서 각종 물질들이 지금도 부지런히 움직인다. 누가 그렇게 움직이게 하시는가? 무슨 요소가 섞여 들어왔는가? 흙에 불과한 인간이 왜 움직이는가?



이는 물질 그 자체 속까지 스며든 외부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물질의 세계에서 그 스며든 요소를 찾기 위해서는 다른 물질과의 관계를 따져보면 결과적으로 생길 수 있는 경우를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병치(倂置)


이는 같은 장소에 함께 나란히 놓여 병렬될 수 있다. 구성 성분들은 자신의 고유한 성질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대로 보존이 가능하다. 잡곡밥 안에 쌀이나 콩이 한데 모여 있는 그런 종류의 섞임인 것이다.



(2)완전융합


결합되는 물질이 융합과정을 통해서 각각의 고유한 성질을 상실하고 새로운 제 3의 실체로 재탄생하는 것을 말한다. 의학적 약물의 경우, 애초의 두 구성성분이 완전히 융해되어 제 3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섞임이다. 이것은 화학작용에 의해 화합물이 생겨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물리적, 화학적 융합으로 이 세상의 움직임을 제대로 설명했다고 볼 수 없다. 다음과 같은 경우도 있다.



(3)통일(완전혼합)


결합 후에도 여전히 애초의 구성성분들이 자신의 고유한 성질을 보존하는 경우다. 이런 점에서 ‘완전융합’의 경우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섞임을 겪는 두 물질적 실체는 그 섞임 속에서 서로 완전히 스며든다는 점에서 ‘병치’하는 경우와도 다르다.



이런 관계는 창세기 2-3장에 나오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와 그 변동사항에서 잘 드러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면서 ‘흙’이란 물질을 사용하셨다. 이는 인간 창조에서의 ‘여호와의 생기’의 영향력을 따로 강조하기 위해 물질성을 언급하시는 것이다(창 2:7).



즉 생기란 물질과의 결합이 가능한 하나님의 요소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하나님께 철저하게 종속된다. 이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이 다 이런 식으로 움직여진다는 것을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 밝혀주신다.



시편 104:24-30에 이 사실이 나온다.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 저기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 동물 곧 대소 생물이 무수하니이다 선척이 거기 다니며 주의 지으신 악어가 그 속에서 노나이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세상 만물의 본성은 ‘주의 영’에 철저하게 종속된 채 존재하고 움직인다. 이로써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호흡함’이라는 단일 근거로 통합해서 설명이 된다.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전 3:19-20)”



호흡은 신체를 움직이게 하는데, 이 호흡 또한 ‘주의 영’에 의해서 취급된다. 이로써 주의 영은 세계를 각자의 고유성을 형성케 하면서도 그 형성된 고유성 속에 함께 하시고, 함께 머물고, 함께 온갖 것을 겪는다. 즉 세계는 이미 통합적인 구조가 배경이 되고 있다는 말이다. 운명을 같이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3. 고통 받는 영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 8:22)”



하지만 피조세계의 전체 운명은 인간 쪽에 열쇠가 있다. 인간과 짐승은 차이나는 요소가 있었던 것이다.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 3:21)”



아무것도 아닌 존재(사 2:22)에 불과한 인간이지만 언약으로 인해 인자(人子)라고 호칭되면서(시 8:1-5) 언약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하지만 그 언약 안에 ‘주의 고통’이 실려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신’ 혹은 ‘하나님의 영’으로 피조세계에 전달된다.



그렇게 되면 피조세계 안에 하나님의 영을 고통케 하는 원인자(악마)가 밝혀지게 되고,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등장되는 인물들(선지자, 사사, 메시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의 고통’은 실체가 드러나고, 이 상호 마주치는 두 개의 낯선 세계가 자체적으로 통합세계를 형성하면서 군림하고 행세하고 있음도 아울러 노출된다.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사 63:10)”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고통’의 원인자를 찾아 현장에 투입되므로 인간 세계가 언약에 저항하는 성격을 가진 요소로 인해 하나의 완전한 단일체계로 장악당하여 굳어지게 된 그 과정의 내막을 추적해 들어가게 된다. 선지자 맞은편에 왕이 있다.



왕은 국가를 대표한다. 애굽은 바로(왕) 소유의 나라이다. “우리가 어찌 우리의 전지와 함께 주의 목전에 죽으리이까 우리 몸과 우리 토지를 식물로 사소서 우리가 토지와 함께 바로의 종이 되리니 우리에게 종자를 주시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고 전지도 황폐치 아니하리이다 그러므로 요셉이 애굽 전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드리니 애굽 사람이 기근에 몰려서 각기 전지를 팖이라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니라(창 47:19-20).”



국가의 등장으로 인해 개인이 살기 위해 자기 신체 외에 무엇을 더 요구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게 된다. 즉 스스로는 결코 충분하지 못하며 국가의 보호와 도움이 당연한 권리처럼 인식하게 된다. 국가는 개인의 기본적 욕구, 즉 의식주 욕구를 정당화하기에 그 존재도 차후적으로 정당화 된 공동체이다.



그러나 국가는 본성적 욕구만으로는 성립할 수 없으며, 그 욕구를 적절하게 제어할 수 있는 장치도 필요하다. 국가는 인간이 스스로 탐색해서 그려낸 지도를 닮았다. 영혼의 확대판으로, 영혼의 삼중 구조와 동일한 구조로 구성된 정치적 유기체다. 국가는 확대된 인간이며 인간은 축소된 국가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영혼의 세 구성부분이 갖는 능력들 사이의 관계는 국가를 구성하는 세 계급 간의 관계에 상응한다고 말한다. 그는 영혼 가운데 ‘욕망’에 해당되는 농부, 장인, 상인 등의 생산기계, 그리고 ‘기개(과감한 용기)’에 해당되는 수호자 계급, 그리고 ‘이성’의 역할을 담당하는 최상위층으로서의 통치자 등 세 계급으로 국가의 구성도를 그린다.



각 계급이 자신의 위치와 임무에 맞게 행동할 때 국가의 정의가 달성된다. 국가의 정의란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다. 영혼(마음)의 세 부분이 이성의 지배 아래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처럼 국가를 구성하는 각 계급의 덕목인 절제(하층계급의 덕목), 용기(중간계층의 덕목), 지혜(상위계층의 덕목)가 조화를 이룰 때 국가의 정의는 실현된다. 즉 국가의 정의는 계급 간의 불화나 부조화를 제거해서 이미 정해진 계급적 질서를 잘 보존하고 유지할 때 발현된다.



농경사회는 이런 계급적 상징에 몹시 집착했다. 법으로 정의(定義)된 품계로 스스로를 세분화하고 각각의 지위에 고유한 휘장을 부여했다. 사람들 사이에 권위를 존중하고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을 선량한 백성의 기본 도리로 여기는 사고방식이 보편적이었다.



이런 사회에서 신흥 엘리트에 속한 1인이 만인 위에 군림하는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어느 왕이든 왕위를 유지하려면 포괄적 연합 체제를 구축해서 잠재 경쟁자들을 지지 세력으로 전환해야 했다. 통치자는 준(準) 동류집단을 왕권 아래 흡수하기 위해 이들에게 관직과 영지를 내려 귀족으로 봉했고, 귀족층은 통치자에게 자신들의 필수불가결성을 입증하기 위해 유용한 전문가 집단으로 스스로를 재포장했다. 이들의 전문 분야는 종교, 법률, 학문, 전쟁 등으로 갈라졌다. 이렇게 다각화 된 엘리트층은 서로 협력관계를 형성해 덩어리가 커진 사회의 면면을 조직하고 재편해 나가며 세금 부과, 법 집행, 종교의식 주관, 정복전쟁 수행, 반란 진압 등 모든 인류 역사를 채우는 통치활동을 폈다.



4. 선지자의 등장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의 고통을 품고 뛰어들어서 그 일원화 된 체계를 유지하는 위험한 힘의 성격을 고발하고 정죄하는 기능을 하게 된다. “너는 왜 그 자리에서 특정한 권력을 발휘하느냐?”를 묻는 식이다. 선지자는 질서의 경계선을 찾아낸다. 선지자와는 대조적으로 왕은 늘 주권을 행사하게 된다. 주권자의 모든 결정은 ‘법을 창출해내기 위해 나는 법 밖에 나가 앉아야 된다.’는 식이다. 정치적 효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마련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법 바깥에서 법을 말하는 셈이 된다. 바깥에 나와 있는 왕의 공간까지 포함해서 권력 공간으로 삼을지, 아니면 그 공간을 예외로 하고 나머지를 권력 공간으로 삼을지 모호하다. 하지만 선지자는 여기에 대응해서 권력 공간 안에 법으로 이해될 수 없는 사건을 유발시킨다.



이러한 사건의 유발은 전체 우주를 관장하는 ‘여호와의 신’에 의해 촉발된 것이다. 그런데 국가는 ‘법으로 이해될 수 없는 사건’을 ‘법에 위반한 사건’으로 오해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법 밖으로 나와 있던 왕의 초월적 위상까지 ‘낯선 사건’에 의해서 강제 소환당한 현장에서 ‘기존의 법의 한계’를 놓고 ‘여호와의 신’으로부터 판단 받게 된다. 법 외부에 자리 잡은 그 초월적 주권의 실상을 밝혀줄 요소가 법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왕이 그동안 국가에 행사한 ‘주권적 폭력’의 범주 속에 온전히 통치할 수 없는 이질적 요소가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실시되는 ‘자연 폭력’이다. 이 ‘자연 폭력’에 준해서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처벌의 대상자로 부각된다.



선지자가 몰고 오거나 적용한 언약은 선지자의 활동에 의해서 보다 진전된 범주를 소개한다. 의도적으로 ‘주권적 폭력’에 맞서게 한다. ‘주권적 폭력’이 품고 있는 그 성질을 선지자를 상대로 부리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처벌받은 선지자의 몸을 통해 우주 전체를 통제하는 ‘자연 폭력’이 그 실재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법 내부에서 ‘위법자’의 입장에서 재판받아 퇴출당한 그 사항은, 결국은 성령으로 온전하게 갱신케 될 새 세계를 위한 바탕으로 들어간다. 진리는 법에 포획되지 않는다. 오히려 진리로 인해 기존 주권국가에서 추방되는 형태로 법은 완성된다.



따라서 선지자는 이를 위해 버림받아야 될 운명을 짊어지고 기존 세계에 합류한다. 세상의 주권국가는 왕의 지시에 따라 그를 법 위반자로 기소하고 ‘사형’이라는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데 이로써 선지자에게 일어나는 배제 조치는 ‘선지자의 죽음’을 근거로 해서만 비로소 이 세상은 설명이 가능한 곳임을 확인해줄 뿐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사 40:7-8).”



5. 성신에서 성령으로


성신에 의해서 활동한 선지자들로 인해 ‘성신의 장악 하에 유지되는 시대’의 성격이 알려진다. 세상에서는 나름대로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폭력을 야기했다. 그 가운데서 심지어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인도받던 선지자마저 그 법의 희생물이 되었다. ‘하나님의 신’이 내재하는 자연세계에도 이런 반(反)-언약적 동기가 선지자의 죽음을 통해서 윤곽이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계를 떠맡게 된다.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그 어떠한 일도 세상 종말과 무관한 일로 새지 않도록 온전하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 전부를 떠맡는 것이다. ‘성신’에 의해서 착실하게 유지되어온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 일은 종말의 영인 ‘성령’에 이끌리어 활동하게 된다. 성령께서는 예수님마저도 정의 실현과 결부된 처벌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그 폭력성 가운데 성령에 의해서 되살아남으로 오는 세상이 기존 세상과 철저하게 차단되었음을 마지막 시대를 운용하는 원칙으로 삼으신다.



새 법은 이 폭력사건에서 시작된다. 새 언약은 예수님의 살과 피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 ‘십자가’라는 폭력 사건만이 ‘예수님의 법’의 유일한 근거가 된다면 새로운 세상은 바로 ‘예수님의 법’에 세상 전부가 결부되는 구조이다. 지옥과 천국의 나타남이 그러하다. 예수님에 의한 미움과 사랑의 근거가 이 폭력과 결부되어 있기에 이 폭력의 능력을 실재화 하는 식으로 사랑이 전달된다. 성령 받은 이 시대의 성도들은 기존 자연세계의 회복을 염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연세계의 파괴와 해체를 염원하게 된다. 전면적인 폭력이 실려 있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Ⅱ 본론



1. 다윗 언약과 고난


다윗의 인생 여정을 통해서 보여 지는 다윗 언약은 수없는 역경과 시련 속에서 ‘그러니까 비로소 하나님은 왕이시다’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자기를 위하여 행하시고 또 그만한 능력이 있는데 그것이 모두 다윗에게 내려주신 언약을 위함이다.



(1) 약속의 땅에서의 통치


다윗은 이스라엘 통치를 사울을 통해서 부정적인 안목으로 터득하게 된다. 사울의 최대 관심은 어떻게 하면 백성들의 마음에 맞추어서 통치하느냐 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그들의 불만을 해소하느냐에 달려 있다(삼상13:8/13:11/14:45/15:24).



백성의 관심은 전쟁으로부터의 해방이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이방 왕들이 할 수 있는 한계였고, 사울 같은 자를 추종하는 백성들의 한계이기도 하다. 여기서 다윗은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것만이 ‘기름부음 받은 자’의 임무로 여겼다. 약속의 땅에서의 승리는 거룩의 승리이어야 하고 불신앙과 비신앙에 대한 신앙의 정복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기름부음 받은 왕이 보여줄 신앙은 율법을 완성하므로 극복하는 것이다.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이나 왕이 긍정적으로 해야 할 일은 ‘거룩의 실현’이다. 더구나 레위지파가 아닌 자로서(다윗은 유다지파) 제사 이외의 방법으로 거룩을 달성해야만 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곧 자신이 제물이 되는 것이다. 자기라는 인격 속으로 제사를 흡수시키는 것이다.



이 작업은 ‘하나님의 선택’에서부터 시작된다. 제사는 이 선택 과정 속으로 함몰해 버린다(삼상16:2-7). 이 대목에서 사무엘이 제사를 드린다면서 수송아지가 아닌 암송아지를 데리고 가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 이 사실은 제사가 자신의 본체를 위해 양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제부터 다윗은 제사의 실체로서 등장하게 되는데(삼상 21장/ 30:7) 그의 행위는 바로 하나님의 이름 아래의 행위가 된다(삼상 17:45). 제사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 선택되는 일이다. 여기에는 사람의 이름이 거부됨을 전제로 한다.



이 기름부음이 왕의 기능과 결합된다면 이스라엘에게 있어 하나님의 거룩이 완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왕이란 직분은 기능적으로 그를 대표하고 있다(삼상 12:13-15). 모든 권리가 그에게 집결되고 왕을 세운 당사자들은 자기가 세운 왕의 지배를 받고 종이 되는 것이다(삼상 8:9-18).



다윗은 바로 여기에 기름부음 받음의 의미를 첨가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에 여기에 놀라운 사실 하나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선택받아 기름부음을 입은 자’가 남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왕이니까). 이 사실은 바로 새로운 제도와 법의 제정권을 소유함을 나타낸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면서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니까 해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것은 자신의 기름부음의 정통성을 이스라엘 내부에서 인수받기 위한 조치였다(삼상 24:6/24:10/26:16/삼하1:16). 바로 약속의 땅은 ‘기름부음 받은 자’의 통치여야 하는 것이다.



2. 다윗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형상


시편에 있는 다윗 작품의 대부분은 다윗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에 나온 것들이다. 이런 곤경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행위와 거기에 반응하는 인간의 태도를 익히는 것이다.



시편의 구조는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다음에는 고난 받는 자기 처지를 소개하며, 마지막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다윗은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즉 고난 받는 의인의 모습이 곧 하나님의 모습인 것이다(시 22:1). 그러면 이 고난이 어떤 식으로 처리되는가? 바로 하나님이 의인의 원수에게 보복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보복은 다윗 당대에는 다윗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그 이후에는 다윗언약의 원칙에 준해서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걸쳐 반복해서 진행된다. 다윗의 이름이 아니라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열왕기의 주제다. 다윗이 자기 이름을 사용하는 식으로 언약을 발산하기에 하나님의 원수의 주목을 받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 이로써 역사는 ‘중심부’를 획득하는 가운데 진행된다. 자연적으로 그 외는 ‘언약의 주변부’가 된다. 이는 언약 중심의 새로운 통일성을 보이며 피조세계는 정돈되는 절차에 들어간다.



다윗은 왜 고난을 받으며, 다윗의 원수의 실체는 무엇인가? 어떤 구체적인 인격체일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 영일까? 시편에서는 이것을 악인, 죄인, 또는 오만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시 1편). 이들은 여호와를 모른다는 평을 다윗언약에 준해서 듣게 된다. 언약의 고통이 터지는 자리에 서서 세상을 노래하는 자들이며 여호와의 이름 대신 자기이름으로 대체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성전에서 일어나는 제사의 의미를 성전 밖까지 확대시켜 나간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성전 완성이란 중요한 뜻이 있다. 하나님이 그 지역에서 안식하시기 때문이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에게 있어서 고통이란 피조물과 함께 이 땅에서 저주받는 존재로 지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땅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영의 신음소리에 참여해야만 땅은 창조된 원래의 목적에 부합된다. 그러기에 고통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안식을 위한 배경이다.



의인이 오히려 고난 받는 세상이라면 그 세상은 본래 하나님이 기쁘게 창조하신 세상과는 다르다는 것이 명백하다. 여기서 다윗언약은 땅의 안식과 관련된 분으로 여호와의 이름이 투입된 사실을 알린다. 노아 때의 땅의 회복이 세상에 대한 심판으로 달성되었다면(창 5:29) 여호와의 이름도 분명 이 죄악 된 세상에 대한 심판의 기능이 있다.



심판을 실시하는 당사자가 바로 영원한 제사장이다. 이 심판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는 자가 새로운 단일화 된 나라의 백성이다.



3. 열왕기의 줄거리


인간이 왕을 구한 이상 하나님은 그 왕을 중심으로 통치하시는데 있어 변하지 않는 원칙과 원리가 있을 것이다. 다윗언약의 영구성은 인간 왕들의 돌발적인 과오에 의해서도 결코 소멸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내부에서 다윗언약의 지속성을 보장해 줄 정치적 장치는 무엇일까? 다윗가문의 혈통적 보존만이 그 증거로 삼는다. 다윗언약의 혈통 유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 이행에 관한 사항이지 결코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결과와는 무관한 것이다(“다윗 성에 장사되고”라는 문구).



즉 장소가 언약 안에서 갖는 의의를 나타내는데 이는 솔로몬이 성전에서 하나님과 맺은 약속에 연장된 혜택이라고 볼 수 있다. 다윗성에 귀속되도록 조치된 이스라엘의 실체는 그 실체를 만들어내는 일 뿐 아니라 그 실체를 유지하는 동안에 늘 이스라엘에 지속되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이유를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왕의 임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회피하게 된 이유와 진리를 외면한 왕에게 다시 원리원칙으로 돌아가기를 독촉하는 선지자들의 갈등을 수록한 것이 열왕기이다.



하나의 현실을 두고 그 현실 해석에 차이가 난다면 서로가 다른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여기에 배척과 수모 받는 자가 나타나고 한쪽이 다른 한쪽을 밀칠 수밖에 없다. 해석은 다양하지만 실제 현실의 동태는 하나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다윗 이후 인간 왕들의 활동에서 이스라엘의 원초적인 한계를 다윗언약의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그러면 그 한계는 어떻게 극복되는가? 선지자들의 활약상에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그 선지자들은 어떤 식으로 세상을 보았으며, 왕들은 어떤 안목으로 정치를 해나갔는가?



또 왕들의 그런 정치지론이 왜 하나님으로부터 부정적 시선을 받는 대상이 되었는가를 알아봐야 한다. 이 점을 파악하기 위해서 먼저 성전을 완공하고 난 뒤 솔로몬과 하나님이 쌍방 간에 약속한 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열왕기상 8장의 기도는 그 앞서 솔로몬의 위상에 대하여 검토되어야 된다. 열왕기상 2:45과 3:3에 보면 솔로몬을 자신이 다윗언약에 종속됨을 밝히고 있다. 자기가 왕이지만 자기가 잘나서 왕이 아니라 아버지 다윗과 여호와가 맺은 언약에 준하여 그 실시를 위한 방편의 일환으로 왕의 자리에 앉아 있음을 잘 인식하고 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마치 여호수아가 땅을 정복했어도 사실은 모세언약이 땅을 정복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과 같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수 1:3)”



사무엘하 22:1-23:7에 다윗은 평정된 이스라엘의 정치상황을 바라보면서 읊은 노래가 실려 있다. 다윗의 입장에서 최종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내용은 다윗의 집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친히 반석이요 방패요 망대요 피난처요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어떠한 외세나 이방의 힘도 그(다윗)에게 위협이 될 수 없는 것은 여호와께서 거기에서 구출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몸소 체험한 바 있다. 자비를 구하는 자에게 자비를 주시고 완전을 요구하는 자에게 완전함을 보이시며 무시하는 자에게는 무서운 심판을 지체하지 않는 모세언약에 대한 충실성도 그는 체험했다.



더 나아가 다윗이 여호와께 호소하면 천군천사까지 동원하여 다윗과 그가 통치하는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신다. 심지어 여호와께서 직접 이 땅에 왕림하실 때면 땅이 흔들리고 그 뿌리를 드러내게 되는데 이는 다윗이 여호와와 맺은 영원한 언약에 의한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그 왕(강림하실 영원한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풀되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 주어질 것이다. 이처럼 여호와의 신이 임한(삼하 23:2)자는 다 이와 같은 사상을 지니게 된다. 다윗 이후의 선지자들은 다윗을 기점으로 하여 다윗에서부터 출발하는 선지자들이 된다. 즉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선지자의 성격까지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의 이러한 사상은 기실 주변에 널려있는 이방나라들의 정치관과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낸다. 이러한 사상을 이어 받은 솔로몬은 열왕기상 3장의 일천번제 드린 이후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다윗의 교훈이 자기 것임을 고백한다.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는 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壽)도 구하지 아니하고 부(富)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왕상 3:11)”



솔로몬은 다윗언약에 담긴 정신은 이미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은 부분을 솔로몬이 이긴 것으로 삼음으로 언약이 계승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솔로몬의 정치신조는 이미 확정적이다. 문제는 그가 단지 다윗의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느냐, 아니면 더 보탤 것이 있느냐 하는데 있다.



그는 보탤 사항이 있다고 봤는데 그것은 성전 건축하는 일이었다. 열왕기상 5:3-5에 성전을 건축하게 된 취지가 나와 있는데 솔로몬은 마치 사무엘하 7:13에 나와 있는 집을 자기의 성전건축을 정당화 해주는 다윗언약의 한 부분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다윗에게 허락하지 않은 것을 솔로몬에게는 허락했을 뿐이지 명령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행 7:46-47). ‘허락’이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 방식에 그러한 인간의 제시한 부분을 이용하신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하나님이 왕과 함께 있다는 증표로 제공하신 것이 성전이었다.(대상 22:16)



하나님이 왕과 함께 있다는 말은 왕과 맺은 언약관계가 계속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왕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어도 하나님은 왕과 이스라엘을 지켜 주신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면 이스라엘을 이 땅에 존속시키지 아니하시겠단다(왕상 9:4-7). 이것은 그 전에 솔로몬 쪽에서 먼저 하나님께 요청했던 사항에 대한 답신이기도 한데 솔로몬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건의했다.



우선 기도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누구든지 이 성전에 와서 기도하면 들어서 제대로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다. 그런데 그 기도의 내용은 왕과 백성의 죄를 용서받는데 대한 것이었다(왕상 8:30).



여호와의 이름이 이스라엘에게는 죄를 사하시는 이름이며 왕은 백성의 죄를 사하기 위해 기름부음 받은(대하 6:42) 여호와의 종이라는 자각을 갖고 있다(왕상 8:28-29). 결국 솔로몬이 지혜를 달라는 것도 언약과 관련 있는 것으로 선을 선으로 악을 악대로 분류할 수 있는 능력을 두고 말하며 이는 언약의 연속되는 과정임이 드러난다(왕상 8:32).



그런데 어째서 솔로몬이 성전, 즉 여호와의 이름을 사죄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가? 이는 성전의 법궤 안에 들어 있는 두 돌판이 언약의 의미를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방편으로 간주하고 있다(왕상8:9,21/ 출24:4-8,12).



그 돌판은 백성의 언약 불이행으로 이미 훼손되고 난 이후에 등장된 돌판이기에 그 돌판의 존재 자체가 백성을 고발하고 있는 셈이다(신 9:6,13-17/10:1-8). 결국 솔로몬이 이해하는 성전은 하나님의 자비의 자리이며 불쌍히 여김이 작용하는 처소로 보고 자신의 죄를 인지하는 자에게 있어 유일한 죄 사함의 자리로 간주되는 것이다.



따라서 다윗언약은 성전이 존재함을 통해서 증명되듯이 자비와 긍휼로 유지되는 언약인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곳에 계시는 것은 아니고 그 이름이 계시는 곳으로 여겨진다(왕상 8:16-29). 여호와는 하늘에 계신다(왕상 8:27). 솔로몬이 하나님과 그 이름을 분리하는 것은 언약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하늘과 땅의 만남은 오직 언약 안에서만 가능한데 그 언약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체결되기 때문이다. 땅에 거할 수 없는(땅의 제한을 받을 수 없는) 하나님께서 땅과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은 자신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 한해서 복을 주시겠다는 제안이 이미 있었기에 이것에 대한 실현으로 솔로몬은 보고 있다(출 20:24).



그런데 그 복은 하나님과 함께 있어도 죽지 않을 정도로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한다. 즉 죄 사함에 대한 사항이다. 정복이나 통치는 거룩이 비거룩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사역의 과정에 불과한 것이라서 이 복의 내용에다 담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부터가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 되는 것이 우선과제라 할 수 있다(출 19:5-6). 그래서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의 전부는 바로 죄 사유와 연결된 것들이어야 한다. 죄 용서가 처음임과 동시에 끝까지 어떻게 거룩을 유지하느냐가 언약공동체로서 가질 태도이지 다른 것에 마음을 두고 하는 기도는 언약을 배반하는 처신밖에 안 된다(왕상 8:35-39).



여기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정신에서 벗어나는 태도를 말한다. 즉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불쌍히 여김’을 받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공감하듯이 타인의 관계에서 이 정신을 확대시켜 나가는 것이다(삼하12:6/ 시편51:17/ 신10:18-19/ 사1:15-17/ 렘7:1-7/ 말3:5-6/ 마6:14-15/ 엡4:32).



솔로몬은 다윗언약의 전수와 완성을 이렇듯 성전과 여호와의 이름을 결부시켜 기도했다. 그럴 때 여호와께서는 그 기도에 다음과 같이 응답하신다. 즉 나의 이름을 영원히 거기 두겠다고 하신다. 그러나 만일 언약 정신에서 이스라엘이 벗어날 때에는 가차 없이 이 땅에서 제거하겠다고 하신다. 그리고 거룩하다는 이 성전도 없어질 것이라고 하신다(왕상 9:3-9).



이 말씀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나 성전에 얽매이는 분이 아니라 언약대로 시행하시겠다는 의지를 미리 단정 짓는 것이다. 즉 광야 때는 돌판, 여호수아 때는 법궤가 하나님이 언약의 백성과 함께 있음을 표현했지만 이제는 성전의 고정성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성전이 어떻게 파괴되고 회복되는가를 통해 언약이 지닌 내용을 보다 확실히 인간들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솔로몬의 성전중심의 언약신학에 있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분명히 언급한 것처럼 다윗의 정신 안에서만 체제가 유지되는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의 이방인 첩들로 인해 이스라엘에 외래종교가 수입되어 번지게 되자 하나님으로부터 배척받게 된다(왕상 11:4-13).



그러나 하나님은 성전과 예루살렘이 갖는 언약적 의의를 솔로몬의 과오로도 은폐될 수 없다고 보고 이스라엘을 분리시켜 예루살렘과 유다지파의 선택이 갖는 중요성과 가치성을 부각시킨다. 그 방법은 예루살렘과 유다지파를 이스라엘의 희망의 등불로 간주하시어 아히야 선지자를 여로보암에게 파견하여 그로 하여금 유다지파를 고발하는 인물로 등장시킨다(왕상 11:29-32, 36).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이 시행하신 선택(유다지파와 예루살렘 선택)에 대하여 인간들이 거부하고 있음이 곧 인간들의 근원에 자리 잡고 있는 본질임을 밝히신다. 인간과 하나님의 계약관계에서 서로가 서로의 것을 교환하거나 제시함으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스라엘은 알 필요가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우리에게 제공한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창조 때부터 주신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 안에서 발견코자 하신다. 타락 이후 그것은 오직 언약 안에서만 제공되어 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다윗언약 안에 무엇이 주어졌는지를 발견했어야 한다. 그것은 ‘긍휼에 의한 죄 용서’였다.



이것은 이미 솔로몬의 성전 기도를 통해서 확인되었다. 거기서 솔로몬은 왕의 직책이란 여호와의 종으로서 백성의 죄를 위해 비는 중보자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왕상 8:27-30).



이 사상은 후대 왕들의 표준적인 태도로 백성들은 이해하고 있다. 열왕기상 13:7에서 “왕이 만일 오늘날 이 백성의 종이 되어 저희를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저희가 영영히 왕의 종이 되겠나이다.”라고 나이 많은 신하가 르호보암에게 말하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바와 같이 왕이 먼저 백성의 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백성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백성을 주인처럼 섬기는 자의 모습이 곧 왕의 본질이다. 그러나 그 섬기는 자의 선정도 백성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왜 꼭 하나님의 선택된 지파와 가문에 국한되어야 하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스라엘은 무지했고, 이것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나뉘게 된다. “우리는 다윗과 함께 할 분위(分誼)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 할 업(業)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삼하 20:1).”



이스라엘의 나라가 분단된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왕은 백성을 섬기는 자이다.


(2) 왕은 반드시 하나님의 선택된 계통을 따라야 하며 인간의 뜻에 의해 정해질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위의 문제를 하나로 결합하여, 백성의 죄 사함과 관련된 일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선택된 개인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필연적인가를 알아야 한다. 또 선택에 반기를 드는 행위가 왜 언약을 파기하는 행위인가를 깊이 인식해야 한다.



선택이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고발행위이다. 인간의 능력과 자질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음이 선택행위로 드러난다. 여호수아 이후 이스라엘은 구원의 매체로서 특정 지파가 선임자 노릇하지 않았다. 이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한 단위로 취급하여 그들 모두에게 모세언약의 계약 상대자로 간주했기 때문에 한 개인이나 한 지파가 대리 언약준수자로 나설 수가 없다. 그들을 정치적으로 하나 된 공동체 이전에 신앙적인 공동체로 하나님이 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사기에서 보았듯이 그들의 단결과 협조는 주로 외세로부터 안정을 보장받기 위한 정치성이 짙은 연합체 성격을 띠었다. 신앙차원에서 다루어야 될 문제를 그들은 정치문제로 이해했고 힘의 우세에 의한 안정을 추구했다. 즉 약속의 땅에서 그들이 살아남는 길은 주위의 나라보다 더 힘이 세어지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고 여겼기에 그 힘을 모을 수 있는 권위를 지닌 지도자를 찾았던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선택이란 그들의 이러한 제의에 대하여 하나님이 추인하는 형식을 두고 말한다. 그래서 꼭 다윗지파일 필요는 없다는 식으로 다윗지파를 고집하는 하나님의 의도에 대하여 그들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다윗지파의 설정은 그러한 힘의 균형에 의한 약속의 땅 강점에 대하여 고발하기 위한 일환으로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다윗지파 선택은 인간의 자체적인 선별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는 것이다. 즉 신앙적 차원에서 힘의 차원을 고발하는 증표이다.



광야에서 지파공동체를 이끈 것은 야곱과 맺은 약속에 근거하여 복의 민족을 구현하기 위한 하나님의 임재에 의해서 유지 되었는데 거룩한 분의 비거룩(이스라엘)과의 동행은 자비와 긍휼에 의한 것이었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여호수아에 와서는 법궤를 중심으로 한 전쟁에서의 승리로 표현되었으며 사사시대에 와서는 사사의 활동이 이스라엘의 부족을 극복했다.



다윗지파의 등장은 야곱에게 약속한 축복에 이미 계시된 바 있다. 따라서 다윗지파의 부각은 야곱언약의 회복을 의미한다(창 49:8). 솔로몬 이후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든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의 언약신학에 왕과 백성들이 주목하는데 대한 것이었다(왕상 18:36).



갈멜산에 선 엘리야 선지자는 이 언약신학으로 그 당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언약에 나타난 이스라엘로(왕상 18:31) 정죄하는데 있었다(엘리야가 쌓은 단에 내려진 불은 단순히 제물에 불로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땅까지 핥았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약속의 땅에 거주하는 현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와 심판의 불이다). 곧 이것은 현 이스라엘에 대한 부정을 선언하는 것이다.



아무리 다윗언약이 왕과 체결된 언약이라고 할지라도 옛날 종족들의 언약정신에서 이탈될 경우에는 오히려 그 다윗언약에 의해 고발당함을 선언한 셈이 된다. 고발 되었을 경우에는 신명기 28장에 나타난 저주가 그들에게 적용될 것은 뻔한 이치인 것이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신 28:15-16).”



여기서 우리는 카리스마적인 존재(선지자)의 부정적인 역할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은 단순히 왕을 축복하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모세언약에 의해서 그 언약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적용하는 것뿐이다(민11:25,29/ 신18:18).



따라서 여로보암에게 찾아가서 왕으로 삼은 아히야 선지자도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한 선지자였다(왕상 11:29/14:1-18). 여로보암의 집에 대한 심판의 선언은 “그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였으니” 라는 형식문을 창출케 했으며(왕상14:16/ 15:30, 34/ 16:2,19,26,31/ 22:53), 이는 “다윗성에 장사 되니라(왕상11:36/ 14:31/ 15:4,8,24/ 22:50).”와 대조된다.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당한 그 시점부터(왕하 17:23) 다윗성에 잔다는 이야기가 들어 있지 않는 것을 보아서 우리는 이러한 대조에 역점을 두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면 여로보암은 다윗언약을 왜 전적으로 무시했는가 하는 점을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여로보암 정책의 특징은 여호와 종교를 위한 정치를 청산하고 이제는 그야말로 정치를 위한 정치로 전환한 것에 있다. 종교정책은 다만 백성들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향하기 위한 유화책에 불과한 것이다. 결코 거기에 얽매일 수도 없고 오직 그것만을 바라보는 정치를 수행하지 않았다. 거짓 여호와 종교를 창안한 것이다.



두 개의 금송아지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설치해 놓고 여호와의 이름과 결부시키지 않는 입장에서 성소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즉 언약의 전진성을 배제하고 과거의 성소 그대로 오늘의 성소(복이 내리는 곳: 출 20:24)로 간주하고자 했다.



그러나 자칭 성소, 복 받는 곳이라고 여긴 그 장소가 오히려 여로보암을 심판하고 저주하는 장소로 변해 버린다(왕상 12:25-33). 뿐만 아니라 레위 지파가 아닌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워 놓고 8월 15일로 남쪽의 유월절을 대신하려고 했는데(왕상 12:25-33), 이는 북쪽 이스라엘의 국가적 정체성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가운데서 나타나는 종교의 한계를 보여준다.



이는 결코 종교의 토착화도 아니며 다만 나라가 있어야 종교도 있다는 단순 정치이론에 의해 종교를 정치의 한 부분으로만 생각해서 나온 처사였다. 그런데 여로보암이 여호와 종교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것은 현재 자기들이 거하는 땅이 평범한 땅이 아니라 모세와 맺은, 또는 여호수아와 세겜에서 맺은 언약에 근거해서 살고 있는 언약의 땅임을 잊고 있다.



여호와 종교는 단순한 백성 유화책으로 이용되어질 성질이 아닌 생명의 원천이다. 계약이 깨어지면 계약에 따라 그들은 저주받도록 되어있는 땅임을 그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열왕기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여호와의 신이 임한 선지자들은 이점을 놓칠 리가 없다. 다윗정신을 계승할 선지자 무리들은 땅의 효용성(언약적 유효성)에 대하여 기적과 표적으로 답변하고 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기적들은 역사적으로 일회성을 갖는 것으로 현 체제에 대한 고발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이적도 결국 말씀화 된 고발에 흡수된다(왕상17:1,21/ 18:11-14/ 22:18-23).



이러한 말씀으로의 전환은 종말의 선지자들의 특징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특히 두 선지자의 이적들은(독을 제거, 죽은 아이를 살림, 샘이 쏟게 함, 문둥병 치료,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일 등등) 땅의 회생력과 팽창력과 하늘의 복과 관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뿐만 아니라 이방왕정 체제가 갖는 횡포는 급기야 하나님이 기업으로 준 땅까지 침범하여 왕의 소유가 되는데 이르게 된다(왕상 21:1-16의 나봇의 포도원 사건). 이 사건으로 인하여 아합은 멸망을 선언 받게 되는데, 나중 이스라엘의 멸망이 아합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임이 밝혀진다. 그 땅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소유였기에 언약의 공동체를 유지하지 않는 한 언약대로 쫓겨나게 되어 있다(레 26:27-33). 이처럼 열왕기 선지자는 인간 편으로서는 어떤 왕으로도 다윗언약을 이룰 수 없음을 이스라엘 역사로 증명하고 있다.



Ⅲ 결론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사 65:1).”



가장 소중한 것을 부숴서 역사에 드러내는 작업이 열왕기상을 통해서 알려진다. 그것은 ‘은밀한 나라’였다. 그동안 이 ‘은밀한 나라’가 소위 소중한 것들로 가려진 채로 꾸준히 통과해오고 있었다. 마지막 때에 그 피 묻는 얼굴로 역사에 내밀 때까지 그러했다.



‘존재하지 않는 나라’, ‘끊어진 길을 지닌 나라’가 그동안 역사 내부에서 멈추지 않고 활약을 하고 있었다. 반면에 인류는 맹독을 등에 짊어지고 여태껏 운반해오고 있었다. 매일같이 물리면서 살아온 것이다.



타협을 모르는 ‘내부 고발자’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열왕기상을 읽게 되었다. 그들은 사람을 위로하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알리는 자들이다. 선지자의 등 위에는 메시야의 죽음이 실려 있다.



이로써 ‘독사’ 대 ‘여자의 후손’의 마주침이 반복된다. 이 반복성 속에서 열왕기 역사는 아직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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