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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8 12:41:08 조회 : 257         
   율법의 실현210328 이름 : 우리교회(IP:119.18.87.190)   

율법의 실현(골로새서 2:13-14)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1p5cs-Rxmz8, Hit:38
 우리교회 21-03-28 13:32 
율법의 실현  

2021년 3월 28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2: 13-14

(2: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2: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율법을 하나님쪽에서 주시면서 왜 하나님 스스로 율법을 철거하는지 궁금할 수가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원하는 그 어떤 바도 하나님의 생각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악마와 한 통속이 된 인간의 입장은 늘 모든 가치 있는 시작은 자기와 결부시킵니다.

삶의 목적이 자신의 절대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인간의 의도하는 바와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바가 일치되지 않음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바는 율법을 톻해서 최종 나타납니다. 그것은 ‘언약의 완성’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 언약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제물을 죽여 쪼개 놓고 마주보게 했습니다. 즉 제물 한 가운데 누군가 지나가는 통로를 만들라는 뜻입니다. 솔개는 이 제물이 죽은 사체인 줄 알고 덤벼들었지만 아브람은 그 솔개를 후쳐냅니다.(창 15:11) 그 제물은 ‘사체’이기에 비로소 ‘언약에 의해’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율법은, 모든 인간이 실은 죽은 사체에 불과함을 분명히 하고 언약 활동의 환경으로 조성합니다. 인간들이 자신을 살아 있다고 자부하면서 하나님의 언약 성취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겠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있다고 여기기에 율법도 마치 ‘나를 위해서’있는 것처럼 간주합니다.

거기에 비해 이스라엘 민족들은 각자의 몸에 할례를 행하므로서 그 신체에 각인된대로 신체가 다루어지는 대상으로 사용됩니다. 즉 할례의 취지를 위해 이스라엘이 동원되는 겁니다. 각종 모든 율법들은 다 이 할례언약 중심으로 집중하게 됩니다. 이는 율법과 몸의 만남으로서 참된 현실은 오로지 율법이지 결코 인간 ‘본인이 사는 것’이 현실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할례를 행하게 된 그 특수한 몸들은 할례법과 동반된 율법들의 진척 과정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 끝을 보여주고 어떤 식으로 완성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손으로 한 할례를 했지만 마음으로 해야 하는 할례를 해낼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신체와 율법과 불연속적임이 드러납니다,

즉 그 어떤 인간도 율법을 이룰 수 없다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은 예수님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아버지에게 꼭 시체가 되어야 될 조건을 부여받았습니다. 즉 율법대로 인간은 꼭 죽어야한다는 겁니다. 이점을 통해서 육신을 가진 인간의 한계가 분명해졌습니다.

이제 인간은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인간들이 법을 지킬 수 없는 이유는, 출발점을 예수님으로부터 잡을 줄을 몰랐던 겁니다. 철학이나 과학이 속임수가 남발되는 지식인 이유가 그들 논리의 출발점은 인간 자신에게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간이 ‘이미 죽을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합니다.

악마는 스스로 하나님에게 대적하고자 하는 자신의 방식을 그대로 인간에게 덮여쒸었습니다. 선과 악에 아는 지식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이 항상 선한 쪽에 있음을 비례적으로 파악하겨고 합니다. 즉 인간은 스스로 본인을 완전한 자로 자부하는 것이 아니라 비례적으로 학함보다 선한 쪽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악마나 인간들에게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본인들과 법을 링크link(연결)한 겁니다. 법을 몸에다 칭칭 감은 겁니다. 그렇게 감고자 하는 이유는, 인간들은 시작점이나 최종점을 자기에게 두는 것 외에 달리 다른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나로 인하여 내가 잘 되겠다’는 겁니다.

인간의 두뇌는 이미 이 경향성에 놀아나고 있습니다. 외부에서 주어진 환경을 조절하여 자기 내부에 자기를 위한 아지트를 따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거기서 하는 일은 오로지 자기로 인하여 자기가 만족하는 존재가 되고 싶은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외부에서 자기를 칭찬하고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요청하는 법은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법입니다. 이 법을 신으로부터 재가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율법을 만족시키지 못할 경우, 사정두고 보지 않고 잔인한 형벌이 주어지는 법입니다. 따라서 법을 요청하면 할수록 인간은 참혹한 저주를 요청하는 바가 됩니다.

이처럼 육체와 율법이 만나는 이런 사태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언약’으로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저주로 통하는 언약입니다. 그렇다면 복으로 통하는 언약이 따로 편성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이렇게 되면 언약은 두 갈래 가지로 시간 속에 그 실재성을 나타내 보입니다.

갈라디아서 4:22-24에 보면,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약속에 따라 난 자는 이삭입니다. 그런데 이 이삭은 이 세상에서 태어난 자가 아니라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규정하십니다. ‘made in promise’.  이것이 ‘made in Christ’로 완성되는 겁니다. 즉 율법의 맹렬한 심판성이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는 창조의 원동력이 된 겁니다. 더 이상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 새로운 피조물을 생산해내신 겁니다.

성도는 예수님처럼 이 땅을 보내게 됩니다. 양쪽 어깨쭉지에 날개가 달렸다고 생각하세요. 성령의 날개입니다. 이 날개가 있기에 이 세상의 저 나락에 빠지는 체험은 그다지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이 나락조차 구애받지 않을 마음이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5-7)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계신 십자가가 마음껏 발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21-03-28 20:13 
21강-골 2장 13-14절(율법의 실현)210328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2장 13-14절입니다.

골로새서 2:13-14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여기에 ‘무할례’라고 되어 있는데요.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라고 되어 있는데 무할례는 이방인들에 해당 됩니다. 할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받았던 겁니다. 그런데 무할례, 할례 받지 않았다는 그 자체로 하나님 보시기에 이방 민족을 이미 죽은자로 간주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산 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할례를 받았는데 그들이 할례를 받은 것은, 율법이라는 이것이 그냥 하늘에서 오는 잔소리로 끝나는 것이아니고 실제로 세상은 율법대로 진행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과 이스라엘의 몸과 결합을 시켜 놓았어요.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 그 사람들의 몸의 변천 과정은 곧 하나님이 내려주신 법의 변천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파스타 먹을 때 포크 가지고 국수를 돌돌 말잖아요. 그러면 접시 위의 모든 파스타 국수는 그 포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포크를 들어 올려서 입에 쏙 집어넣으면 파스타를 먹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모든 율법이라는 것 모든 율법은 그냥 바깥에서, 외부에서 잔소리하듯이 들려 오지만 인간의 몸에 새겨진 율법이 있어요. 몸에 새겨진 율법. 이 율법이라는 게 단순히 그냥 외부에서 훈계만 하고 나무라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너희 몸을 통해서 계속해서 이 세상에 새로운 현실을 하나님께서 진척해 나간다, 진행해 나간다는 것을 확실하게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창세기 17장 13, 14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을 때 할례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한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만큼 훌륭하냐? 이스라엘 사람들이 훌륭하지 않아요. 훌륭하지 않은데 그들의 몸에 새겨진 할례 언약, 할례 율법이 율법답게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귀신 붙은 거예요. 딱 들러붙은 거예요. 보통 몸에 문신을 새길 때, ‘타투’라 하지요, 내가 문신을 새겼는데 만약 어떤 괴기영화에 있어서 몸에 새긴 문신이 오히려 주도권을 쥐고 나를 이끌고 간다면 이것은 무시무시한 이야기죠. 지금 이스라엘 민족이 그런 형편에 있는 겁니다. 자기 몸에 새긴 그 문신 같은 할례가 오히려 주도권을 율법이 쥐고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는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누가 만나냐? 하나님의 율법이 새겨지지 않은 이방 민족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나게 하십니다. 의도적으로 만나게 할 때 그 의도 중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할례받은 쪽은 굉장히 미약하고 가진 게 없게 만들어요. 반면에 할례가 없는 민족은 강한 민족, 모든 세상 사람들이 다 겁을 낼 만한 막강한 힘을 가진 민족으로서 싸움을 벌이도록 그렇게 유도하십니다.

대표적인 것이 골리앗과 소년 다윗의 싸움이지요. 다윗을 제외한 사울 왕에 속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부 다 겁을 집어먹고 ‘안된다 이거. 게임 끝났어. 우리가 져.’라고 했는데 소년 다윗은 어디를 주목했느냐? 골리앗이 키가 커요. 약 3미터쯤 되니까. 그리고 힘이 세고, 무기 강력하고, 군사 많은 것은 다 인정하겠는데 결정적으로 그들에게는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요.

저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고 우리 이스라엘 쪽은 가진 것은 없지만 할례받았잖아. 그렇다면 이 전쟁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할례 언약 중심으로 일한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뜻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일을 할 때는 율법을 앞장세워서 일하기 때문에 율법대로 진행되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진행된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걸 아예 몸에 새겨버렸으니까 이건 보통 자부심이 아니지요. 십계명, 모세가 하나님과 독대해서 하나님의 법을 들고 왔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 모세!” 하고 모세를 추앙했습니다. 유일하게 하나님 만난 사람이기 때문에 확실하게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보장해줄 수 있는 사람은 모세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는 말이 “나 보지 말라. 나는 늙어 죽는다. 나 보지 말고 율법이 있잖아, 율법!” 그 십계명 율법 주시고 그 뒤를 따라서 파생되는 율법들이, 제사법들이 막 뒤따라온 거예요. 모세가 십계명 받겠다고 올라갔는데 거기에 십계명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제사법과 여러 가지 법 율법들이 한가득 거기 하늘나라에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율법은 어디에 초점이 맞춰서 응집되느냐? 마치 렌즈에 햇빛을 쐬어 초점을 맞춰야 종이를 태우는 것처럼 그 초점이 모이는 지점이 뭐냐 하면, 할례 지점, 할례 언약 지점이에요. 할례 율법 지점입니다. 여러분이 성경 봐서 다 아는 이야기를 내가 또 해서 상당히 미안한 감은 듭니다만 모른다 치고, 모른다 치고요.

이걸 이방 민족, 할례 없는 이방 민족에게는 주지 않았어요. 왜? 그들은 이미 죽은자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한테 이야기하기를 “율법 살면 너 살고 율법 없으면 너 죽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전쟁을 벌일 때도 너 이스라엘 이기라고 전쟁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율법 없는 쪽을 이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그 율법, 그걸 모세 언약이라 합니다. 노아 언약은 방주고요. 아브라함언약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고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언약이라 하는 것은 이 땅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 언약이거든요. 이 땅에 없는데 새로 주어진 것 방주지요. 이 땅에 없는데 자식이 새로 태어난 것, 이삭이지요. 이 땅에 없는 율법 주셨지요. 그 율법을 가지고 모세 언약이라 하지요.

천하 죄인, 간음하고, 살인한 그 다윗의 계통을 통해서 왕이 태어난다 해서 그걸 다윗언약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의 땀과 노력과 피와 희생과 헌신을 전부 다 싹쓸이해서 버리고 이 땅에 계시지 않는 하늘나라의 예수님의 살과 피를 가지고 새언약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땅을 건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고 할례 언약을 준 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의를 마중하기 위해서 땅에서는 율법이, 진리가 이 땅에서 완성될 때 그걸 진리라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 45장 8절에 보면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 같이 듣게 할찌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찌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찌어다.” 그러니까 하늘에서 먼저 뭐가 주어져야 되느냐 하면, 의가 내려와야 하는 거예요. 마치 산에서 범 내려오듯이, 범 내려오듯이 하늘에서 의가 내려오게 되면 그것부터 시작이 돼요.

그게 시작점이 되어서 땅에서 만들어진 구원이 마중을 나오는 식으로 구원이 성사되는 겁니다. 시편 85편 10, 11절에 보면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있는 철학과 과학과 모든 것은 그 출발점이 하늘이 아니에요. 골로새서 2장 8절에 보면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여기 철학, 요새 말로 과학이죠. 그 당시 철학이 요새 과학이에요. 과학은 속임수라는 거예요.

왜? 과학의 모든 출발점은 자기로부터, 자기가 존재하는 이유 의미를 자기로부터 끄집어내기 때문에 이게 속임수인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진리가 아닙니다. 의도 아니고. 하여튼 인간은 아무것도 몰라요. 창세기 5장 3-5절에 보면 “아담이 일백 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인간의 이름, 그 모든 것의 시작은 인간에서부터 시작해서 인간으로 끝이 나요. 죽었더라, 가 끝이에요. 인간의 모든 생각 곧 인간의 이름은 한시적입니다. 930년, 참 오래 살았지요. 오래 사니 뭐합니까? 죽는 순간에 929년은 다 무효가 된 거예요. 다 지나간 것이고 무효가 된 거예요.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골로새서에서 언급하는 것은 율법이라는 것은 어디에 배배 꼬여 있는가? 율법이, 지금 제가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율법이 그냥 잔소리가 아니에요. 보통 어른들이 자식보고 잔소리하잖아요. 그것은 그냥 잔소리에요. ‘이야기하세요. 난 안 듣겠습니다.’ 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러나 율법은 잔소리가 아니고 실제로 몸과 결합이 되는 겁니다. 몸과 결합이 되었다는 말은 율법에 매인 그러니까 할례받은 자의 몸은 율법이 놔주지를 않아요. 여러분이 이것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됩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하늘의 요소에 포착이 되고 장악당했으니까. 세상에 이런 행운이 어디 있겠어요?

로또 맞아봐야 돈 다 써버리면 다시 거지 되잖아요. 주님께서 인간에게 할례를 주고 그 할례에 따라서 뭐가 온다 했습니까? 율법이, 거기에 돌돌 감기듯이 할례 중심으로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할례를 행했는데, 몸에 할례를 행했는데 문제는 할례를 어디까지 요구했느냐 하면, 마음의 할례까지 요구한 거예요.

여기서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은 실패로 끝난 겁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왔어요. 그래서 몸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 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받았던 할례와 너희들이 받았던 할례와의 차이점을 똑똑히 눈여겨봐라.”

너희들의 몸과 내 몸이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보라는 거예요. 주님이 스스로 율법의 할례를 받으시고 그리고 모든 율법을 다 받으시고 돌아가셨어요. 그렇다면 사람들 입장에서는 ‘뭐 너나 나나 똑같네.’ 이렇게 되겠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죽었던 몸을 사흘 만에 부활을 시켰습니다. 이 말은 뭐냐? 율법을 완성했다는 거예요.

율법을 완성했기 때문에 그 예수님이 받았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이제 어떤 자리가 확보되었느냐 하면, 율법으로 모든 것이 처리가 끝난 새로운 몸을, 율법으로 드디어 심판받지 않는, 저주받지 않는, 정죄함을 받지 않는 몸, 새로운 몸을 주님께서 창조할 수 있는 권한을 예수님이 부여받은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가 완성한 그 마음과 영을 특정 사람에게 할당함으로써 그들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거예요. 여기에 오늘 본문 보게 되면,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린다고 되어 있어요. 죽은 시체를 가지고 일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인데 먼저 예수님이 아버지한테 그런 식으로 다루어진 그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죽으려고 오셨거든요. 이미 우리는 죽었고 예수님은 죽으려고 오셨고, 그런 겁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언약을 맺을 때의 이야기를 했는데요. 창세기 15장 10, 11절에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 아브라함이 쫓았다고 되어 있는데 솔개는 그 제물이 죽은 줄로 알았어요. 원래 솔개는 죽은 것을 먹으니까, 독수리도 그렇지만, 죽은 줄로 알고 왔는데 아브라함이 쫓았다는 말이지요. “너 보기에는 죽은 것으로 보이냐? 아브라함 보기에는 본격적으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장소다.” 살아 있는 사체가 되는 거예요.

이 말은, 하나님이 일을 하실 때는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인간하고는 상대를 안 해요. 모든 인간을 죽여놓고, 사체를 만들어놓고 그 사체에, 주께서 말씀 완성을 그 인간에 입힘으로서 그 인간을 새롭게 창조를 하는 거예요.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요, 철학이나 과학에는 없어요.

자꾸 철학, 과학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일을 자꾸 꾸미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온 것은 사체가 되기 위해서 온 거예요. 죽은 시체가 되기 위해서 온 거예요. 지난 낮 설교 때 그런 이야기 했어요. 끝부분에, 우리가 남을 볼 때 사체 다루듯이 보세요. 사체 다루듯이 봐 가지고 그 사체에서 인광이 비치거든 성도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인광이라 하는 것은 빛을 쬐는 광원이 사라져도 거기에 반짝이는 그 무엇, 소문에 의하면 공동묘지에 그런 것이 많답니다. 존재의 여유,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여분의 것, 잉여의 것, 바로 주님이 주시는 것은 바로 그걸 주시는 거거든요. 외형적으로 볼 때 예수님은 그냥 초라한 사나이였어요. 그냥 보통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누구와 함께 있는가? 성령과 함께 있었거든요. 제자들은 자기가 살았다고 우기기 때문에 그걸 몰랐던 거지요. 성령과 함께 있음을 몰랐던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니까, 인광이 오니까 비로소 주님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셔야 되는 분인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은요, 일단 죽여놓고 시작해요. 사체를 만들어놓고 한다고요. 하나님의 언약이 사체를 만들어 놔야 될 이유는 죽은 자가 손대지 않도록, 그냥 그 사체 사이에 하나님의 불, 하나님이 언약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냥 일방적으로 일하시는 거예요. “어떤 누구도 손 대지마. 네가 거기에 관여하지 마. 손 떼! 다 떼! 내가 할 거야.” 일방적으로 주님 혼자 구원하시는 거예요. 혼자 일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 때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할례 언약, 언약 자체를, 할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었다면 신약은 이미 율법에 대해서 다 완성이 된 상태에서 그 완성됨의 증거물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피조물, 신약의 성도를 성령을 통해서 만들어내신 거예요. 이게 made in china가 아니고 made in christ 예요. 주님께서 친히 만들어내신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만세를 부르고 있습니다. 만세! 끝난 거예요. 더 이상 율법에, 어떤 법에도 구애받지 않아도 되는 존재, 오히려 법을 찾는다면 오히려 의심할만한 존재가 되는 거예요. “네가 왜 법을 찾아? 뭐하려고? 뭐하려고? 한 번 더 살아보려고? 이미 살았는데? 왜 그걸 찾지?”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주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 뭐냐?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라고 했는데 여기 “우리를 대적하는” 곧 이미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 made in christ, 하나님이 친히 만들어놓은 그것, 그것이 만들어지고 나니까 그동안 무엇이 우리를 힘들게 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그것은 우리가 요청해서 어떤 법을 자꾸 촉구한 거예요. 이미 구원받은 사람만이 아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나로부터 출발했던 그 사실, 그래서 생각하는 그 현실과, 주님으로부터 시작한 그 현실에서 나오는 그 몸과의 확연한 차이, 이게 불연속적인데, 연속적이 아니에요, 차이가 난다는 그 사실을 성령 받은 사람만이 아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람만이 ‘아, 더 이상 율법이 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시비 걸 일이 없구나.’ 왜? 이미 심판처리가 끝났거든요. 모든 제품이 made in christ, 이렇게 합격도장을 받은 이상 다시 어떤 하자가 있다는 그 과정으로 도로 돌아갈 일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이미 하자가 있는 죽을병에 든 자이기 때문에, 사체기 때문에 서서히 사체가, 시체가 되어가거든요.

그러면 그 병에 대해서, 죽을병에 대해서 우리가 손댈 수 없는 처지에 있는 겁니다. 사람이 병은 고치지만 죽을병을 누가 고칩니까? 죽을병에서 낫게 하는 것은 불연속적인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 밖에 없어요. 다른 의사의 능력으로서는 우리가 부활 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이미 made in christ, 그리스도의 만든 새 상품, 새 상품을 대적하는 그것이 무엇인가? 그게 바로 눈에 보이는 모든 증서, 법적인 증서를 주께서 도말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제하여 버리는 것, 찢어버리는 거예요. 이 법적인 증서를 찢는 동시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사체다. 시체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만약에 율법이 계속 살아 있으면 우리는 안 죽은 존재가 되고 안 죽은 존재가 되어버리면 이것은 사태가 심각해져 버려요. 옛날 구닥다리 몸을 그냥 쥐고 천국 가려고 애쓰는 것밖에 안 돼요. “목사님,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뭐가 있습니까? 시켜만 주이소. 다 하겠습니다.” 이것은 진짜 마귀 들린 티를 완전히 보여주는 거예요. 그거 지켜서 뭐하려고 뭐하는데요?

인간의 그 과학은 모든 출발점은 자기로부터 출발하거든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파악하고 수습하고 자기를 더 개선하기 위해서 칼 클레이스트(Karl Kleist 1879~1960)라는 사람은 뭘 만들었느냐? 뇌지도를 만들었어요. 그걸 ‘칼 클레이스트맵’이라고 하는데 인간의 두뇌를 그려놓고 거기다가 하나의 지점, 총 46개의 지점을 분할해서 그 지점마다 다 번호를 매깁니다.

번호를 매겨서 이것은 시각지점, 이것은 촉각지점, 이것은 청각지점, 그걸 1차 감각지점이라 하는데 그렇게 들어와서 이게 신경조직을 통해서 어떻게 퍼져서 나는 자아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나는 왜 생각하는가, 나는 왜 감정이 있는가를 자기 지도를 펴놓고 하나하나 추적해 가는 겁니다.

그 추적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지식, 생화학적 지식뿐만 아니고 분자, 양자물리학, 생물학, 모든 지식이 다 들어가요. 나중에 언어학까지 들어가는 겁니다. 인간의 언어는 어디서 발생하며 인간의 자의식은 46번 장소, 인간의 안구를 움직이는 여덟 가지의 근육조직은 얼마나 세밀한지 등등. 발끝부터 머리까지 초속 100미터를 달리거든요. 그 전파의 펄스는 초속 100미터의 속도로 올라온다고요. 빠르게 반응하라고요.

그러나 그런 것은 전부 다 뭐냐? 빠르게 반응해서 자기 몸체를 보호하는 것 이것은 전부 다 동물들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인간의 대뇌피질이 원숭이보다 더 발달했어요. 그 혹처럼 튀어나온 대뇌피질에는 뭐가 들어있느냐? 그것은 단순히 1차원적 의식이 아니에요. 아프다, 우울하다, 이 정도가 아니고 내가 누구냐를 생각하는 것, 언어를 구사하는 것, 인간을 더욱더 진화시켰다 합니다.

진화라는 말, 나쁘게 발전한 것이 아니라 좋게 발전했다는 거예요. 그 언어를 통해서 단순히 인간은 동물처럼 그냥 에너지가 와서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안에 저장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저장하는 것이 기억이고, 기억의 다발이 바로 자아가, self가 되는 거예요. 나 자신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말씀과 관련해서 인간은 뭘 요청하느냐 하면, 바로 그 언어라는 것, 언어라는 것이……,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동물은 좋다면 꼬리를 흔들 줄 알잖아요. 대표적으로 강아지, 개가 그렇게 하지요. 그러나 동물은 예스는 되는데 노가 안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만이 예스/노가 되거든요.

인간이 다섯 살 이하일 때는 외부의 환경과 교류할 때 approach, 접근하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의 몸을 추스르지요. 그런데 사춘기가 되면 ‘가치 있느냐/무가치하냐’ 그것 가지고 선과 악을 결정하는데 나에게 가치 있으면 선이고 불편하면 악으로 보는 거예요. 그때 선과 악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비율로 가요.

비례해서 비율로 한다는 말은, ‘내가 선한 쪽에 속했냐 악한 쪽에 속했냐’ 그런 식으로 인간의 자아가 사춘기 때는 그렇게 간다고요. 여러분 사춘기의 애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나중에 어른이 되면 목적지향적인 관점으로 본다는 거예요. 그 목적지향적인 관점으로 본다 할 때 이 모든 것은 바로 사회에서 교류를 해서 계속 수입을 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기 위해서 세상에서 나를 의롭다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거예요.


사회는 뭐냐? 내가 인정받기 위한 투쟁이라고 이야기했어요. 내가 남에게 인정받고 싶다. 그냥 밥이나 먹고 사는 기계가 아니라, 식충이가 아니라 나는 남한테 인정받고 싶은 거예요. 직장, 가정, 어딜 가도. 인정받고자 할 때는 뭘 요청하느냐? 법을 요청하는 거예요. 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법은 언어로 만들어지고 언어는 일어나는 사건을 시간으로 흡수시켜요. 시간으로 흡수시키면 그 다음부터는 시간을 가지고 순서를 정하는 그것을 영어로 sequence라 하는데 순서, 배열을 정해요. 순서, 배열을 정하면서 거기서 생기는 게 뭐냐 하면, 법 법입니다. 누가 이 짓을 했느냐 하면, 악마가 아담에게 이 짓을 한 거예요. 선과 악, 하나님께서 그거 알지 말라고 당부했잖아요. 당부했는데 악마는 밀어붙이는 거예요.

왜? 악마는 예수님부터 출발하지 않고 악마는 나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모든 가치체계를 나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나한테 유리하면 선이고 나한테 불리하면 악이고. 내 뒤는 없어요. 내가 시작점이고 내가 종착점이에요.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로 돌아가는 겁니다. 이게 악마의 마음이에요.

그런데 악마가 치명적인 실수를 한 일이 있어요. 이것을 여기서 밝힙니다. 악마가 치명적인 오류 실수를 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 법을 자기 몸에다 칭칭 감은 것이 그게 결정적으로 사단난 겁니다. 그래서 사탄인가? 그 법을 자기 몸에 감아버렸어요. 감아버리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을 보내준 이유가 그 율법을 못 지키면 저주가 주어져요. 어떤 저주냐? 참혹한 저주, 잔인한 저주, 봐주기 없기, 저주, 그냥 저주에요. 율법대로 안 하면, 법대로 안 하면!

그걸 잔인하게, 아주 좐인하게! 잔인한 저주를 퍼부어요. 악마가 몸에 둘둘 말지 말 것을 감아버린 겁니다. 법을 감아버린 거예요. 법을 감는데 자기만 감은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법을 감겨줘 버린 겁니다. 그 증거가 창세기 4장에 가인이 제사를 드렸지요. 가인이 제사를 드렸는데 가인이 제사를 드린 그것 때문에 사달 났어요. 가인이 제사 드린 것 때문에 가인이 영원한 지옥에 들어간 겁니다. 누가 제사를 하라고 했습니까?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선악으로 시뮬레이션 된 이 두뇌를 갖고 있기 때문에 나의 나다움을 증명해 줄 것을 내 안에서부터 생산하는 거예요. 외부에서 어떤 것이 들어오더라도 여기서 편집을 해요. 세상에서 들어오는 모든 감각은 ‘시상’에서 일단 모아요. 모아놓고 시상은 라틴어로 방이라는 뜻인데, chamber라는 뜻인데 두뇌 속 그 방에 다 모아놓고 거기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대기하고 있다가 전에 앞에 툭 튀어나온 대뇌피질에서 자아의 단계에서 새로운 정보가 우리한테 중요한 것이라는 전갈이 오게 되면 이 시상에서 딱 보내줍니다. 그리고 이거 필요 없다, 하면 그 다음부터는 흐지부지 되지요. 그래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기억은 대뇌피질을 통해서 저장고로 가는데 해마라는 곳에 가서 저장을 한답니다.

단기기억, 단발성 기억은 시상에서, 그리고 장기기억은 해마에서. 그래서 치매 걸린 사람들은 자기 집은 잊어버려도 오래 함께 산 남편 이름은 안 잊어요. 자기가 소중했던 것은 잊어버리지 않는 겁니다. 제일 마지막에 퇴화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라는 것은 자체가요, self, 자기밖에 몰라요. 교회, 물론 기어 나오지는 않겠지만, 하여간 교회 기어 나오든 어쨌든 간에 자기밖에 몰라요. 그것은 저주 자초한 겁니다.

그래서 율법은 무엇과 연관되어 있느냐 하면, 바로 육체와 연관되어 있어요. 물론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지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은 아브라함 안에서 모든 인류는 어떻게 끝나는가가 아브라함언약 안에 있거든요. 아까 말했듯이 아브라함언약이라는 것은 이 땅에 없는 자식을 새로 만들어요.

그러면 이 땅에 있는 자식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이스마엘, 종인 하갈에게서 나온 이스마엘과 없는 자식 하나님의 약속, 언약에 의해서 주어진 인물이 등장해요. 이삭, 이삭과 이스마엘을 대비하는 겁니다. 대비해서 하갈의 sequence, 사건을 시간 안에 흡수시켰으니까 인간의 법적인 역사관, 시간관, 그 모든 것을 그냥 추진하도록 허락해줘요. 그것이 하나의 언약이 되는 겁니다.

육체가 무엇을 만나느냐 하면 율법을 만나서 그 자체가 하나의 언약이 되는 겁니다. 이 이야기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갈라디아서 4장 21절에 나옵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라디아서 4장 21, 22절의 말씀, 사도바울의 말씀입니다. 사도의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에요. 계집종에게서 육체를 따라 났고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난 거예요. 이 육체는 뭐가 달라붙어 있는가? 악마의 치명적인 오류는 뭐냐? 육체가 스스로 자기가 절대자 되기 위해서 법을 감는 거예요.

왜 법을 감느냐? 내가 그 법대로 좋은 쪽에 속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내가 법을 요청하는 거예요. 법을 구걸하는 겁니다. “내가 지킬 수 있는 법을 주시옵소서.” 왜? 그래야만 내가 이렇게 잘난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개뿔도 없는 것들이 꼭 남에게 이기려고 할 때는 법을 동원하거든요. 개뿔도 없는 것들이 남에게 안 지려고 하는 거예요.

인간의 본성은 이거 하나밖에 없어요. 날 무시하지 마라. 주님 보시기에는 이미 죽은 자거든요. 사체인데 때깔 좋은 사체라는 뜻이에요, 뭐예요? 그게 이미 죽은 시체에요. 죽은 시체가 뭘 나를 무시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은 자살할 권한도 없어요. 죽은 시체가 자살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인간은 그냥 짐승처럼 살아도 되는데 꼭 의미를 끄집어내서 자기에 그 의미를, 나는 그래서 의롭다는 그것을, 의미를 자기한테 가지고 오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산다’ 하지요.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산다는 것은 맞아요. 그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교회 내에 성경 백 독 천 독 한 사람들 한 번 보세요. 그 사람들 어떻게 사는가, 한 번 보세요. 악마의 모습입니다. 마귀 모습이에요. 교회 충성 봉사하는 사람들 마귀 모습이에요.

지금 우리 교회는 봉사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까 제가 마음 놓고 이야기합니다. 그냥 마귀들만 교회에 다 모였다고 보면 돼요. 자기 알아달라라고 환장을 한 거예요. 육체를 따라 났다. 그리고 24절에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언약이 하나가 아니고 둘입니다. 이 말은 어떤 인간도 언약 바깥으로 빠져나갈 구멍은 없어요. 주께서 모든 것을 장악했습니다.

그래서 너는 지옥 갈 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을 그들에게 딱 갖다 붙여준 거예요. 성경 백 독 천 독……, 뭐 우리 교인들은 좋지요. ‘난 안 읽었는데……’ 성경 천 독을 하고 만 독을 하고 자기가 남에게 안 지려고 성경공부 배틀, 기도 배틀, 헌금 배틀, 안 지려고, 무시 안 당하려고, 시체 아닌 척 하려고 이렇게 육체와 율법을 결합했거든요.

이 이야기는 뭐냐? 모든 인간들은 어디에 속하느냐? 두 언약 가운데 저주받을 인간으로 이미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주받지 않을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 말 하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은 어디에 나타나느냐? 갈라디아서 2장 26, 27절에 보면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잉태치 못한 자, 다시 말해서 인간이 개입하지 않은, 인간의 의도와 욕구와 욕망이 개입되지 않는 made in christ, 그리스도에 의해서 태어난 자가 따로 있다는 거예요. 하늘나라는 그런 사람만 입궐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만 들어가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안돼요.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가?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등장하는데 어떻게 그걸 구분하느냐? 갈라디아서 4장 29절에 보면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여러분! 핍박, 받으세요. 시체한테 핍박 받아도 괜찮습니다. 귀신한테. 핍박 받으세요.

신데렐라 동화에 보게 되면 어느 가정에 구두가 왔어요. 그런데 그 구두에 담긴 의미가 뭐냐 하면, 그 구두에 발이 맞는 여인을 장차 왕이 될 왕자가 자기의 신붓감으로 뽑는다는 그러한 조건이 붙어 있어요. 언니들이 그 신발, 맞지도 않는 신발에 억지로 발을 쑤셔 넣는데 발이 뚱뚱해서 들어가지를 않아요.

“비켜라. 내가 할 게.” 그 다음 언니가 또 집어넣는데 이게 안 맞아요. 억지로 해도 안 맞아요. 왜냐하면 신발이 의식이 있어 가지고 일부러 안 맞게 했어요. 주인만 찾아가게 되어 있어요. 신데렐라에게는 이건 뭐 맞춤신발이에요. 분홍신? 이거야말로 딱 들어맞아요. 그래서 동생이 그 신발 신고 가버렸어요.

가버리고 난 뒤에 언니들끼리 모여서 네가 잘났니 내가 잘났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신발이 없는데. 신발이 없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게 바로 성령이 임한 자는 이미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 신발이지요, 신데렐라 신발, 율법의 완성의 신발과 딱 맞아떨어진다 그 말입니다.

따라서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율법처리가 끝난 그 이후에 새롭게 등장한 존재라는 것을 만천하에 보이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거예요. 율법처리가 끝났어요. 죄사함을 받았어요. 그냥 자체가 죄사함 받은 거예요.

그래서 성도에게는 뭐가 있느냐 하면, 이런 비유를 든다면, 성도의 어깻죽지에는 성령의 날개가 이미 달린 겁니다. 비유로 한다면 성령의 날개가,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그러한 부활의 능력이 임했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날개가 임했기 때문에 여러분이 어떤 경험을 하셔야 되느냐 하면, 나락에 떨어지는 경험도 즐기시기 바랍니다.

빌립보서 2장 5-9절에서 그것을 가지고 너희는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한 뜻이에요.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거든요. 주님께서 요단강 세례받을 때 이미 성령 받았잖아요. 주님에게는 성령이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마귀도 만나고 주님께서 어떤 숱한 수모도 당했지만 주님께서는 거기에 대해서 전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을 거예요. 왜냐하면 어차피 떨어지려고 오기 때문에.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님은 죽었지만 성령께서 도로 살렸다 그 말이거든요. 날갯죽지에 있는 성령이 이미 주도권을 갖고 있어요. 새로운 피조물, made in christ, 예수님에 의한 새로운 피조물은 주도권이 우리한테 있는 게 아닙니다. 성령한테 있는 거예요. 주님한테 있는 거예요. 주님한테 있는데 그까짓 거 세상의 나락에 떨어지는 거 그거 뭐 대수겠습니까?

어차피 지옥에는 못갈 거 살아생전에 지옥체험 해보는 거예요. 놀이동산에서 살라는 이야기 아닙니다. 놀이동산에서 롤러코스터 타는 그거 24시간 거기서 놀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가끔은 놀이동산에 갈 필요가 있어요. 멀미 나는 사람은 갈 필요 없지만.

그래서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세상은 장난이라고요. 세상은 코미디라고.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세상은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그런데 자꾸 고민이 되고 걱정이 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바로 옛 품성 다시 말해서 법을 칭칭, 악마가 법으로 우리를 칭칭 감은 거예요.

“너 그러면 남에게 욕 얻어 먹는다. 네 가문의 명예 먹칠한다. 너 다른 사람이 너 친구로 안 놀아준다. 너 어디 가도 행세 못하게 만든다.” 자꾸 그런 식으로 세상이 우리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는 겁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뭘 느끼느냐? 우리의 self, 우리의 자아, 죽은 사체인데, 시체인데 다시 죽은 자아를 또다시 끄집어내요.

어떤 부인이 있었는데 어느 날 남편 지갑을 보니 진짜 멋있게 생긴 어떤 여자하고 사진을 찍은 것이 남편 지갑에 들어있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이 부인이 격분했어요. 그래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화가 너무 나서 자기 남편을 죽이고 말았어요.

죽고 난 뒤에 경찰에서 조사해 보니 그 사진 속의 여자는 부인이 젊을 때 찍은 자기 사진이었어요. 자기 젊을 때의 모습도 자기가 기억을 못하는 겁니다. 이게 실제로 중국에서 일어났던 일이에요. 인간은 자아를 그리워하고 있는 겁니다. 성도라도. 롤러코스터 타는 거예요.

made in christ, 예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고, 이미 모든 지적할 것은 일체 남아 있지 않고, 죄라고 지적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의 옛 자아의 모습은 차라리 옛날 했던 그때 그 시절의 생활이 그리운 거예요. ‘응답하라 7080’처럼 차라리 그때 그 시절이 좋은 거예요.

왜냐하면 그때는 모든 최종적인 가치 있는 결정을 내가 하니까 내가 살아 있는 것 같아. 내가 사람답게 사는 것 같아요. 사는 보람이 있는 것 같아. 내 선택에 내가 뿅하고 가고 싶어. ‘아, 내가 이렇게 좋은 선택을 했구나. 내가 이렇게 잘난 존재구나.’ 이 맛이 그리운 거예요.

이 맛! 그런 맛을 그리워할 때 집 나간 동네 귀신들 다 쫓아와 가지고 기자회견 하면서, 도와줄게요, 땅 하나 내놓은 것 있는데 이번에 투자하라고, 당신만 알려준다고 이런 식으로 우리를 북돋아 줍니다. 우리의 옛사람을 북돋아 주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교회 다니기, 성경공부는 취미생활이 되는 겁니다. 그 취미의 끝은 단두대에요. 모가지 잘리는 것. 모든 취미는 모가지 날아가는 것입니다. 생활의 끝은. 취미는 그 본질이 여기에 내가 있다, 가 본질이고 액세서리거든요. 그러나 율법의 완성, 십자가가 들어와 버리면 본질은 뭐냐?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게 이게 진짜에요. 내 몸은, 내 인생은 그냥 액세서리라니까요. 그냥 장난치는 거라니까요.

몸이 허수아비고 언약이 우리의 진짜입니다. 이 자연세계에서 우리 몸이 이렇게 쇠퇴하고 후패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연의 대세는 우리 말을 안 들어요. 마태복음 8장 27절에 보면 풍랑이 일었던 바가 잔잔해지니 제자들이 놀라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바람과 바다를 순종하는 사람은 우리는 아니에요. 따라서 우리가 가짜에요. 바람과 바다도 우리가 다룰 수 없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죽어 마땅하다는 자연과 더불어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냥 최선을 다해보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받아주지를 않아요. 하나님께서 받아주는 것, 자연과 바다도 순종할 수 있는 그분의 능력이 아니면 우리는 마귀의 사슬 죄의 사슬 이 죽음의 권세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순종케 해서 그 당시 열두 제자를 살린 것처럼 주께서 우리에게 주어진 나의 인생의 모든 조건들은 바람과 바다에요. 네가 구원될 수 있는 적합한, 딱 합당한 조건들로 지금까지 살게 하셨습니다. 그 조건은 뭡니까? 네 인생에서 네가 더 이상 신경쓸 게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 조건입니다.

색소폰 안 불어도 괜찮아요. 취미 생활은 자칫하면 주객이 바뀐 어떤 실수와 착오를 일으킬 수가 있어요. 주인공이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이 말은 어떠한 취미 생활도 해도 괜찮다는 뜻이에요. 어떠한 취미 생활도. 왜? 이미 나는 사체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떤 취미 생활도 해 보세요. 한번 해 보시라고.

해 보면 별로 재미없을걸요? 재미없어요. 심지어 결혼도 취미 생활의 일종이에요. 별로 재미 없어요.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나 자체가 나한테 전부가 아니에요. 인광, 나 말고 주께서는 성령의 불꽃, 그게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되었다는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이제 첫 번째 했던 것을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할례, 율법을 준 것은 율법이 잔소리가 아니고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몸과 결부가 되었다는 거예요.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확인이 되었고요. 이제는 우리 차례에요.

우리 몸에 실제로 이 십자가의 모든 죄사함이, 실제적인 현실로서 죄사함이, 용서받았음이, 이제는 죄없음이 우리 몸에 실제적으로 적용되고 현실화되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죄짓는 일만 남아 있어요.

죄를 지었는데 이게 왜 죄가 아니냐, 그 말이지요. 따지세요. 주님한테 가서 따지라고. “주여, 이게 죄인데, 분명히 이게 죄인데, 남을 해코지 한 죄인데, 내 욕심을 챙긴 죄인데, 나는 죄인줄 아는데 이게 왜 죄가 안 됩니까?” MAED IN CHRIST, 새로운 피조물에서는 죄라고 하는 그것은 찢어버리고 네가 어디서부터 어디로 구원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겁니다.

자연세계는 항상 볼 때 무겁다/가볍다, 높다/낮다, 크다/작다, 빠르다/느리다. 이렇게 보거든요. 인간세계에서는 뭐냐? 돈이 많으냐/적으냐, 힘이 세냐/적으냐, 그걸 봐요. 그러나 천국에서는 죄냐/의냐, 그것만 구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이 한 것 말고, 그것 신경 쓰지 말고 주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삭을 통해서, 야곱을 통해서, 모세를 통해서, 그리고 다윗을 통해서, 주님을 통해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그것이 우리 몸,안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죄와 만나는 매일의 현실 속에서 늘 의식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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