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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5 12:42:19 조회 : 223         
   교체를 위한 배역 201115 이름 : 우리교회(IP:119.18.87.190)   

교체를 위한 배역(골로새서 1:3-5)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rVaOyXiD26Y, Hit:27
 우리교회 20-11-15 13:28 
교체를 위한 배역

2020년 11월 15일                본문 말씀: 골로새서 1:3-5

(1: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1: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는 것이 과연 하나님께 감사한 일일까요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감사할 일일까요? 데살로니가전서 2:13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 말씀이 스스로 믿어야 될 자 안에서 활동하는 결과로서 믿음이 발생된다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작업은 필히 ‘인간의 말로 이해’라는 장애를 극복하게 됩니다. ‘인간의 말’이 바로 ‘신학’이라는 겁니다. ‘신학’이란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에게 어떤 일을 하면 나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요령같은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말씀이 스스로 작용하는 것과 다릅니다. 인간의 말로 이해하는 것은 철저하게 ‘자신’을 포기되지 못한 상태를 알려줍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 없는 겁니다. 이래서 참된 신앙이란 이 세상에서 기피대상입니다. 이 세상이 갖고 있는 신앙은 귀신들이 갖고 있는 신앙입니다.

야고보서 2:19에 보면,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3:11-12에 보면,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계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귀신이 갖는 신앙은 예수님과 영원히 갈라서고 격리되는 실정을 보여줍니다. 갈라서야 될 자를 갈라서게 만들면서 나오는 고백같은 겁니다. 반면에 참된 신앙은 주님과의 격리가 하나가 되는 신앙입니다. 마가복음 5:34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고 되어 있습니다.

12년동안이나 하혈하는 병을 가진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스스로 자기를 고치기 위해 온갖 의사와 노력을 했지만 갈수록 더욱 심해졌습니다. 12년째 되는 해 드디어 그녀는 예수님께서 자기 마을에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동안 자기를 만지던 손가락으로 예수님을 옷을 만졌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내가 아픈 원인이 자기 몸이 아니라 저기 게신 저분이라는 겁니다. 이로서 그 여인과 예수님은 같은 기어축에 묶여있는 톱니바퀴가 된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오셔서 곱게 죽으신 것이 아니라 살해당하신 겁니다. 그만큼 이 세상이 위험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세상이 그토록 위험한 곳이 자신을 망하는 하는 곳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게 되는 사람들의 모든 일들은 스스로 자기에게 올무가 되고 망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믿는 신앙이라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과 영원히 결별될 믿음인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 형편만 고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말하기를, “나에게서 능력이 나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란 이 땅에서 살해당하실 능력입니다. 이 땅의 정체를 밝히고 영원히 파괴하고 결별할 능력입니다. 이런 자기 운명과 같이 할 운명에 있는 여인을 만났다는 겁니다.

곧 그 여인의 병든 자리가 예수님께서 자기 자리로 삼을 장소입니다. 마치 익스트림 스포츠(극한의 스포츠)에서 아무러 낙하 장비 없이 맨 몸으로 1000m이상의 상공에 떠있는 비행기에 뛰어내립니다. 도중에 어떤 도움도 없이 그냥 뛰어내립니다. 도착 지점에서 준비된 것은 실내골프장처럼 생긴 그물망입니다.

4개의 장대에 걸쳐 있는 그물망은 공중에서 보면 한없이 작아보입니다. 스턴트 맨은 공중에서 자기 몸을 좌측 혹은 우측으로 조정해서 정확히 그 그물망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납작하게 죽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몸을 자신의 착륙지점이 되도록 12년전에 그 여인에게 그 병을 걸리게 하신 겁니다.

이 관계가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입니다.(히 11:1) 믿음은 이미 있습니다. 그것이 구체화되는 것이 지상에 배역맡은 자들의 출현입니다. 남들처럼 살아가지 않는다고 하나님에게 원망하지 마세요. 사람마다 할당된 배역과 역할을 다 다르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이 신앙인들의 출몰이 사람들의 비위에 거스리게 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의 위력말고 자신들이 말씀에 순종한다든지 실천하는 식으로 원하는 결과가 나오기를 고대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여전히 영원히 예수님과 결별상태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12년동안 혈루병 들린 여자에게 자신의 능력이 나가는 것을 허락하신 이유는, 그 병든 자리를 자기 자리로 삼으므로서 그 여인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영생의 자리를 허락하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리를 자신의 자리로 삼으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자리에 들어오시도록 조치하시는 겁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이 되신 이유와 관련 있습니다. 이 세상은 악마와 더불어 범죄하고 하나님 낙원에서 추방되고 난 뒤, 모두 남성의 나라가 된 겁니다. 남성의 지평을 이룹니다. 여성이란 거저 남성에게 복속된 보조적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남성이 정자가 필요치 않는 채 이 세상에 탄생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겁니다. 그 어떤 남성 세계의 언어로서 이러한 사실을 설명해낼 수가 없습니다. 소망이란 바로 이런 세계에 미련두지 않고 떠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사랑이란, 주님과 더 이상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입니다. 상대의 리드에 놀아나는 겁니다. “나는 죽어도 좋아요”라는 것이 사랑의 상태입니다.

“날 살려주세요”가 아니라 “나의 세상보는 관점을 지워주세요”가 사랑입니다. 즉 “나는 지금 사라져도 상관없어요” 상태가 사랑입니다. 누가 누구를 힘들게 하는지 생각해 보세요. 막대기를 하나님께서 쥐고 계시듯이(사 10:15) 우리가 하나님을 쥐려고 하지 마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감사할 것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20-11-16 09:47 
2강-골 1장 3-5절(교체를 위한 배역)2011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골로새서 1장 3-5절까지입니다.

골로새서 1:3-5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복음의 진리의 말씀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많이 전하고 있었어요. 전할 때도 그냥 개인의견으로 전한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도우사 성령에 의해서 설교를 해 왔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걸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일부 사람에게만 말씀이 말씀대로 들리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이야기해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 이런 결과를 낳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예수 안에서 감사합니다. 주님의 성과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있을 수 없었는데,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생길 수 없는 일인데 이렇게 생겨버렸구나.’

그리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믿음, 소망, 사랑, 그리고 진실, 이런 단어로 하늘의 개념이 지상에 나오는 거예요. 믿음, 소망, 사랑, 진실, 이런 것은 하나의 캡슐 같아서 하늘에 있는 모든 압축된 예수님의 성과가 캡슐 안에 담겨 있다고 보시면 돼요. 캡슐 안에 담긴 채 세상에 나타나게 되면 그것이 믿음이 되고 사랑이 되고 소망이 되는, 하나의 개념이 되는 겁니다. 성경말씀을 압축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그 당시 사도바울이 골로새교회에 굉장히 고마워하고 있다면 오늘날 사도바울이 우리교회에 대해서 과연 고마워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우리가 파악을 해야 되거든요. 거기에 대한 기준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2장 13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여기 보면 또 하나님께 감사해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어떤 일이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냐 하면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여기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그 앞에 나오는 단어가, 그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사람이 이야기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사람의 말로 아니 듣는다는 것이 하나님이 직접 관여한 일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어떤 특정교회를 향하여, 사도바울이 골로새교회를 향하여 감사하다고 이야기할 때 동일한 평가를 우리교회가 들으려면 우리교회도 성경말씀을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해야 돼요. 사람의 말로 성경 말씀을 들었던 그 결과가 뭐냐? 신학이라는 겁니다. 모든 신학은 사람의 말을 사람의 말로 정리한 것이 신학이에요.

신학을 깨보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되느냐, 그게 들어 있어요. 내가 죽어서 천국가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되느냐가 신학 안에 들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느냐, 가 나오니까 이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이 해야 될 일을 가려버리고 밟아버리는 거예요.

하나님 못 믿겠다는 거예요.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내가 나에게 뭘 하는 일 그것만 믿어지지 아무것도 안 해도 하나님이 뭘 하신다, 제발 그 말 만큼은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말만큼은 내가 괴롭다는 거예요. 평생 살아온 내 행세와 모든 습관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 그 원리에 준해서 살아왔었어요. 구원받는 것도 물론 내가 알아서 해야 되지 내가 아무것도 안하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뜻은 뭐냐? 네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야 구원된다는 거예요. 지옥 가는 것도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지옥가기도 하지만 어쨌든 구원받는 것은 네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는데 구원받았다, 가 되어야 구원이고 천국이라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네 속에서 역사, 활동하는 것, 액션, 하나님의 말씀이 친히 네 속에서 너로 구원되게 하는 일을 지금도 하고 있으니 굳이 네가 따로 너 자신에 대해서 해야 될 것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이게 과연 먹힐까요? 이 세상에서 먹힐 리가 있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신학을 원했던 겁니다. “목사님,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그런 소리를 원했던 거예요. 너희가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받고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한다고 할 때 그 사람에다가 누구를 집어넣어야 되느냐 하면,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할 때 그 사람 속에 본인을 집어넣으세요. 나를 포함시키세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천국에 도달되게 하시는 그 일을 하나님은 하시는 겁니다. 나를 빼세요. 나를 빼는 것이 정말정말 이것은 힘들고 어려워요. 기도하신 성도님 말대로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하옵소서,이렇게 기도를 하셨는데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해 주실 겁니다. 주시는데 많이 괴로울 거예요.

왜냐하면 냄비에 고구마나 감자 계란 삶을 때 냄비 뚜껑 딱 열고 넣잖아요. 고구마, 계란, 내가 좋아하는 것들 냄비 뚜껑 열고 그저 집어넣기만 하면 되는데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냄비뚜껑을 열어보니까 거기서 개구리 나와요. 메뚜기 나오고 독충이 나와요. 독충, 저주가 나온다니까요.

왜 주님의 말씀이 나를 빗겨갑니까? 나는 내 안에 마귀 들었다는 생각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냥 이 몸 가지고 영광 돌리면 된다고 생각한 거지요. 막상 말씀이 와서 먼저 뚜껑부터 슬쩍, 슬쩍은 아니고 갑자기 딱 열어보니까 내 안에서 악마들이 소리 지르면서 발악하면서 “주여, 저에게 왜 이러십니까?” 하면서 아주 난리를 치면서 냄비뚜껑 안에서 그동안 참았다, 이거거든요.

마스크 쓰는 것도 답답해 죽겠는데, 냄비 뚜껑 딱 열어 놓고 마스크 벗어보니까 태어날 때부터 장착된 악마가 거침없이 나오는데 이게 한 두 마리가 아니에요. 군대에요. 수 천 수 만, 끊임없이, 끊임없이 마귀가 나와요. 영광 돌릴 새도 없어요. 마귀 모아서 무슨 영광을 돌립니까? 완전히 내 안이 마귀를 모아놓은 괴물의 동물원인데요.

온갖 종류의 것들이 다 들어있어요. 사람의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내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러운 거예요. 모든 추악한 것은 내 속에서 다 튀어나왔어요. 그동안 우리가 점잖은 체 한다고 냄비뚜껑을 그동안 눌러놔서 그런 거예요. 딱 건드리니까 나도 모르는 내 본색이 나오는데 내가 말릴 수가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대책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대책은 배역입니다. 배역, 역할을 할당하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 손으로 해결 못합니다. 우리 손으로 내 속에서 나오는 이 괴물, 악마를 처리 못해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말씀 자체가 일한다 해야지 그 말씀을 내가 지키고 순종하고, 나를 거기다가 끼워 넣지 마세요. 우리는 무능합니다. 내가 악마를 다룰 수가 없어요. 내 문제에서 내가 손을 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역할을 맡아버리고 배역을 맡아버리면 내 인생은 나의 스토리, 나의 이야기가 아니고 주님의 스토리가 되기 때문에 이것은 주님이 맡긴 배역만 맡을 뿐입니다. 그 증거가 골로새서 1장 1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사도의 역할입니다. 배역 맡은 것이 뭐냐? 사도에요.

그런데 사도는 누구의 뜻이냐?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 사도의 사도된 인물됨이나 성격을 우리가 평하지 맙시다. 사도에게 그 사람이 어디 출신이냐, 키가 몇 센티냐, 어디까지 배웠느냐, 집에 돈은 얼마 있느냐, 그거 물으면 안돼요. 사도가 받은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여받은 배역입니다. 역할이에요.

영화배우가 감독이 맡긴 역할 배역이 있으면, 계약을 했으면 그 역할에 군소리하지 말아야지요. 어떤 사람은 드라마 시작하자마자 죽는 사람 세 사람 나온 걸 봤습니다만, 나오자마자 정원에 떨어져서 죽는 사람, 어떤 사람은 저는 공항으로 가고 있습니다, 하다가 육교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 어떤 사람은 펜트하우스에서 떨어져서 조각품에 꽂혀서 죽는 사람, 죽고 난 뒤에 그 다음에는 안 나오지요. 그렇게 되면 그 탤런트는 돈 얼마 못 받습니다.

그런데 그걸 작가한테 따질 거예요? 더 살게 해달라고 따질 겁니까? 그러면 영화가 안 되고 드라마 자체가 안 되잖아요. 왜 남의 배역을 그렇게 부러워합니까? 내 배역은 따로 있는데. 그냥 배역이에요. 우리가 태어날 때 육신에다 배역을 할당받은 것뿐입니다. 그냥 이 육신은 악마가 지배하는 육신이고요. 죄가 지배하는 육신에다가 역할 하나 추가해서 거기에 부가된 것뿐입니다.

그래서 이 배역, 역할은 어떤 것을 보여주느냐 하면, 지옥 가는 사람은 살다가 그냥 늙어 죽으면 그만이지만 성도는 살해당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의해서 살해당해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이 배역이 어디서 나온 배역이냐 하면 예수님에게서 나온 배역이거든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그냥 죽으신 것이 아니고 살해당했어요.

살해당했다는 말은, 그냥 곱게 죽으면, 너도 죽고 나도 죽고 세상은 그냥 그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세상규정이 제한되지만 예수님이 살해당했다는 말은 세상이 수상하다는 겁니다. 세상이 위험하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행복하게 주저앉고 있는 이 세상이 가장 멋져 보이고 안정되어 보이지요. 그러나 상당히 위험한 공간입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공간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아요. 그런데 배역을 맡은 사도바울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은 악마가 지배하고요. 악마 나름대로의 인간들에게 제안한 믿음 소망 사랑이 있어요. 진실이 있다고요. 그게 굉장히 위험해요. 제가 말로 하는 것보다 실제로 성경말씀으로 보이는 것이 적절한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3장 11-12절에 보면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계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귀신이 나가면서 그냥 나가지 않고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나갔어요. 고백하고 나갔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그 입 다물라, 이렇게 했어요.

이 세상에서는 악마가 예수 믿는 믿음이 따로 있어요. 예수님에 대해서 귀신이 믿는 믿음이 있다는 말이지요. 야고보서 2장 19절,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귀신들도 하나님 믿어요. 귀신들도 예수님 무서운 줄 압니다. 당신이 하나님 아들이고 우리를 멸하러 온 줄로 다 알고 있어요. 귀신들도 알고 있어요. 그게 귀신들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 말고 다른 믿음, 귀신들의 믿음의 한계를 벗어난 믿음, 그 믿음의 배역과 역할 없이는 그 믿음에 속할 수 없습니다. 그 믿음을 장착할 수가 없어요. 악마의 믿음, 그 악마의 믿음이나 귀신들의 믿음이라 하는 것은 그 출발점이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의 믿음의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시작하는 믿음입니다. 십자가가 어떻게 펼쳐지고 십자가가 어떻게 전개되는가? 그것과 관련되는 믿음은 진짜 구원받는 믿음이고 그렇지 않고 나는 어떻게 되는가, 나는 죽고 지옥 가는가, 천국 가는가, 이것 고민하고, 이것 계산하고, 이것 측정하는 믿음, 그것은 벌벌벌 떠는, 자기 잘못될까 늘 노심초사 벌벌벌 떠는 귀신의 믿음, 마귀의 믿음이에요. 그 한계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여러분이 구약을 허투루 보지 마세요. 느부갓네살이라는 다니엘 시대의 왕도 다니엘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을 얼마나 칭송했는지 몰라요. 정말 칭송했습니다. 그리고 모세 당시의 그 바로왕도 혼나고 난 뒤에 여호와 하나님의 위세에 대해서 알았어요.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결코 자기 자리를 떨쳐버릴 수가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잠시 엉덩이 들썩, 이 정도지 자기를 툴툴 털고 ‘아, 이 자리에 있으면 안 되겠네. 큰일날 뻔 했네. 이 방석이 나를 붙여서 지옥으로 당기는구나. 아이고, 식겁했다.’ 하고 화들짝 놀라면서 나의 자리를 떠나는 믿음은 느부갓네살이나 구약의 모든 이방민족들의 왕들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알지를 못했어요. 그러니까 구약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날 우리 형편에 대해서 언급하는 믿음이에요.

그러면 진짜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통해서 여러 군데서 알려주셨는데 마가복음 5장의 예를 들어보면 거기에 종합적으로 잘 나와 있어요. 마태복음 5장 34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앞에 무슨 이야기가 나오느냐 하면 12년 동안 계속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어요. 한 두 해가 아니고 12년 동안 그 긴긴 세월동안 계속 피를 쏟아내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많은 의사한테 찾아가고 낫고자 많은 애를 썼어요. 그러나 26절에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27절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그러고 난 뒤에 28절에 보니까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많은 무리가운데서 자기 능력이 나간 경우를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홱 돌아봤지요. “누구야? 내게서 능력이 나갔다. 누구야?” 그러니까 그 여자가 두려워서 벌벌 떨지요.

33절에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여자가 “제가 이런 짓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옷가만 만져도 제 병이 나을 줄로 알고 이렇게 만졌습니다.” 그래놓고 꾸중들을 줄 알았는데 아까 읽은 본문 34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이 대목에서 여자가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것 같이 인간의 육신은 이미 이 땅에 올 때 자기 육신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육신으로 태어난 우리들은 몰라요. 내 안에 뭐가 있는지 고상한 것 좋은 것만 들어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오늘 이 말씀에서 29절에 보면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여기서 근원이 나와요. 오리지널이지요.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하나의 배역을 맡았으면 그 배역은 출처, 오리지널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오리지널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의 능력은 어떤 능력이냐 하면, 이 땅에서 살고자 하는 능력이 아니고 이 땅에서 죽고자 하는 능력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살려주세요, 가 믿음이 아니라 나의 근원을 만나고 나를 이렇게 만든 그분을 만나는 것이 믿음이에요.

그래서 오늘 누가복음, 마가복음, 마태복음 지나서 사도바울이 히브리서 1장에서 사도바울이 믿음이라는 것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다시 말해서 믿음은 인간과 상관없이 이미 어디엔가 있다는 겁니다. 먼저 있다는 겁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먼저 있었다는 겁니다.

내가 믿는 게 아니고 나를 빼라는 말이지요. 믿음이 어딘가 있었는데 그 믿음을 믿음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이 세상이 창조되었고 이 세상은 각자 역할과 배역을 맡은 형편에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할 때 그 믿음이라는 것이 하나의 증거기 때문에 그 믿음이 증거되기 위해서 어떤 사건 사태가 형성되어야 돼요. 어떤 이벤트가 만들어져야 돼요.

그 이벤트를 위해서 그 여인은 12년 동안 피 흘리는 병을 고쳐서 12년째 되던 해에 자기 오리지널을 만난 거예요. 근원을 만난 겁니다. 나를 이렇게 병들게 하신, 병든 역할과 배역을 주신 그분을 만난 거예요. 나는 왜 병들어야 했는가? Show me the money, 가 아니고 Show me the original, 이에요. 나에게 돈을 주세요, 가 아니라 나에게 원천을 보여주옵소서.

남들은 피를 흘리지 않는데 나는 피 흘렸다. 여자가 아무리 자기가 병 고치고자 의원을 찾아가도,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내가 아무리 내 인생을 수습하려고 해도 그게 실패했어요. 갈수록 더 심하게 되었어요. 내 인생을 내가 수습한다는 게.

제가 아까 설교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사도바울의 말씀을 들으매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한다 할 때 그 사람의 말속에 우리 자신도 집어넣으라고 했지요. 내가 나 수습하고 관리하기 위해서 얼마나 했지만 그것은 백날 해도 소용이 없어요. 내가 나한테 적절한 배역을 줄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그 말이지요. 내가 원하는 내 인생을 내가 꾸려갈 권한은 나에게 없습니다.

‘나 목사 할래’ 그거 백 프로 가짜 목사에요. 물론 목사 자체가 백 프로 가짜지만 내가 뭐 할래, 하는 것이 소용이 없어요. 그건 자기가 누군지를 전혀 모르는 거예요. 더 알기 쉽게 말씀드릴까요? 이 세상에서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나를 망하게 하는 올무로 나를 죽게 하는 하나님의 무기입니다. 공격 무기에요.

내가 벌이는 모든 일, 목사가 되었든, 집사가 되었든, 내가 어떤 직장, 공무원을 하든, 교사를 하든, 뭘 하든 그 일이 나를 죽이는 겁니다. 나를 지옥 보내는, 나를 망하게 하는 일이에요. 왜냐하면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하기 때문에. 살리는 것은 주의 말씀이 하는데 이 세상에서는 내가 나를 살리겠다고 설쳐댄다 그 말이지요.

‘12년 동안 병들었다. 남들은 병이 안 들었는데 나한테 병이 들었으니까 내가 분명히 뭔가 나쁜 짓을 했다남들 보다 더 악독한 짓을 했다. 그렇다면 내가 수습에 나설 수 있다. 왜? 착하면 되니까, 바르게 살면 되니까, 이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되니까. 그러면 이러한 피의 근원이 마르겠지. 나에게 병든 이것이 정지되겠지.’

소용없습니다. 그동안 여자가 얼마나 자기 손 가지고 자기 몸을 만졌겠습니까? ‘이 몸아, 이 몸아, 좀 정상적으로 살자. 내 몸인데 왜 내 맘대로 안 되느냐, 이 몸아.’ 이렇게 했지요. 그거 자기 몸 아닙니다. 오리지널 따로 있어요. 이제는 그 여자가 그 손을 들고 자기 몸통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몸통을 만졌지요. 예수의 몸을 만진 겁니다.

그게 놀라운 일이에요. 왜냐하면 병이 났으면 원인이 나에게 있지 남에게 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터치를 예수님한테 합니까? 내가 원인이 아니고 당신이 원인일 수가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 당신이 내 병의 원인일 수가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기어의 축 같은 겁니다. 같은 기어, 예수님도 톱니바퀴에 묶여 있고 나도 묶여 있으면 그 기어의 축이 돌아가면 같이 돌아가는 것, 그 축의 관계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믿음. 그게 믿음이에요. 주님이 돌리니까 따라 도는 거예요. 주님은 지금 건강하라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고 12년 동안 피 흘리는 그 여자의 자리를 자기의 자리로 삼는 겁니다.

남자가 여자의 후손의 자리에 오는 거예요. 남자가 여자의 후손의 자리. 이 세상은 남성들의 지평입니다. 남성들의 세계에요. 여자는 남성들에게 종속된 거예요. 여자는 남자의 보조입니다. 여자는 따로 존재하지 않아요. 그러나 그 남성 된 예수님은 여자의 자리에 오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쉽게 말해 이렇습니다. 익스트림스프츠라 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간이 쪼그라드는 것을 하는 거예요. 보통 1천 미터, 1천 5백 미터 상공의 비행기에서 내려올 때는 낙하산 메고 뛰잖아요. 그런데 낙하산 없이 뛰어 내리는 거예요. 익스트림스포츠, 극한 스포츠.

낙하산 없이 뛰어내릴 때 옆에 보조로 다른 친구들이 낙하산 메고 내려오다가 중간쯤에 같이 내려온다든지 그런 것 없어요. 그냥 맨몸으로 떨어지는 거예요. 그런 스포츠가 있어요. 그야말로 미친 짓이지요. 광기입니다. 떨어질 때 어디에 떨어지는가?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릴 때 푹신한 스펀지매트 깔아놓고 뛰어내리는 식으로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뛰어내리면 그 사람 죽습니다. 이게 10미터 20미터가 아니고 천 미터가 넘어요. 그거 배겨내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골프연습장에 보면 큰 장대 세우지요. 장대 세워 넣고 거기에 그물을 걸쳐 놓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천 미터 높이에서 내려올 때 눈으로 그 자리를 봐요.

공중에서 자기 몸을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조절하면서 밑에 쳐놓은 그물 안으로 들어가면 살고 그 밖으로 떨어지면 완전히 납작하게 되어버려요. 몸을 조절해서 그물로 떨어지니까 그물이 출렁 하고 내려오는데 탄력 받아서 내려온 길이만 해도 5십 미터가 넘어요. 그 정도로 위험한 거예요.

1천 미터 높이에서 뛰어내린 그 스턴트맨 그 사람은 내려오면서 자기 몸의 방향을 조절하잖아요. 우리 주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올 때 조절해요. 어디를 조절하느냐? 12년 동안 앓은 여인의 몸에 뛰어내립니다. 다른 사람은 자기가 멀쩡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안에 위험한 괴물이 들어 있고 자기가 믿는 믿음은 귀신의 믿음이라는 것을 생각도 못하고 있어요.

인간은 아무리 자기가 말씀 지키고, 율법 지키고, 교회 나오고 해도 내 문제는 내 손으로 해결이 안 된다는 사실을 본인들이 몰라요. 교회 다니고 지옥 가는 겁니다. 전혀 해결이 안 되었으니까 자기 잘난 체만 하다 그냥 가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적절하냐? ‘왜 하필이면 저에게 피 흘리게 합니까? 이것은 생뚱맞습니다.’라고 자기 인생에 대해서 포기 먹을 수밖에 없게 만든 사람이 있어요.

오늘 본문 골로새서에 믿음, 소망, 사랑, 죽 나오잖아요. 믿음 소망 사랑은 이 세상에 없는 겁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런 것은 오늘날 대다수의 믿는 사람한테는요, 이것은 정말 듣기 싫은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런 믿음 소망 사랑, 성령의 배역을 맡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하나의 맨홀 또는 블랙홀 같은 거예요. 그 근처에 가서 빠져버리면 다 죽어요.

그러니까 믿음 소망 사랑, 주님의 배역을 맡은 사람은 거기 가까이 가기 다 싫어합니다. 사람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고요. 마치 예수님이 사람의 주목을 받지 못하듯이. 그 죽음이, 사도바울의 십자가복음이 사람의 주목을 받지 못했어요. 다 기피대상이었습니다. 사람에게 환영받기 위해서 주께서 성령준 게 아니에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축이라고요 축.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살해당하게 만든 세상이라면 같은 성령, 예수님의 영을 받은 우리도 같은 축에 매달려 있는 톱니바퀴가 되어서 예수님 돌아가면 같이 돌아가서 우리도 세상한테 기피 대상이에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이에요.

‘아는 체하다가 같이 블랙홀에 빠지겠다. 어, 재수 없다. 저리가라, 저리가!’ 무슨 축복을 받습니까? 이 세상 자체가 위험한데 무슨 축복을 받아요? 12년 동안 피 흘렸다. 이 여자가 인기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에게 거부당했어요. 전염될까 싶어서. 그래서 그 여인이 그걸 아니까 나 자신이 감히 공개적으로 못 나서니까, 그동안 충분히 무시당했으니까 몰래 주님 옷을 뒤에서 만진 거예요. 그게 몰래한 사랑이에요.

몰래 옷을 만진 겁니다. 우르르 예수님 밀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은 모르지요. 예수님께서는 주목했지요. 내 능력, 내 능력, 내 능력을 지상에서 재현하고 표현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 스턴트맨이 비로소 내 착륙지점, 예수님께서 비로소 착륙지점을 만난 거예요. 스스로 자기병문제를 해결 못하고 난감하기 짝이 없는, 아무 죄도 없는데 벌어진 이 블랙홀, 이 세상 누구도 그 근처도 안 가려는 그 지긋지긋한, 12년 동안 피 흘린, 여성으로서 수치스런 병에 걸린 이 것, 그거 예수님의 착륙지점입니다.

그걸 가지고 뭐냐? 대체성이라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 여자를 자기 자신의 인생 속으로 들어오게 해서 ‘INSTEAD OF’ 제가 아는 영어숙어입니다. ‘……대신에, ……대신에’ 교체하는 거예요. “너는 배역으로 맡았는데 배역시절 끝났다. 끝났어. 내 생명에 들어오너라. 그동안 12년 동안 피 흘리는 배역한다고 애썼는데 그 역할 했는데 고생했다.”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구원은 바꿔치기에요. “네 자리에 내가 들어가고 내 자리 네가 차지할거야.”

아, 이게 사람의 철학과 사람의 이론과 신학으로 이게 가능합니까? 인간의 이성으로 이걸 알아들을 수 있겠어요? 성령이 안 오면,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이걸 알아들을 수 있습니까? 모든 인간은 잘난 나 더 잘나고 싶어서 살아가는데 누가 내 인생을 바꿔치기 한다는 이것은 상상도 못했을 거예요. 누가 나를 납치하듯이 빼가서 예수님의 자녀로 바꾸는 것, 내 더러운 자리가 예수님과 축을 같이하는, 주님과 함께하는 자리라는 사실을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는 성도라 하면서도 매일같이 밀려오는 것은 뭐냐? 말씀에 대한 회의입니다. ‘주여, 말씀대로 사는데 왜 저에게 이런 것이 옵니까?’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누가 누구를 힘들게 합니까? 지금 주님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하는데 지금 누가 누구를 힘들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회의와 의심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근심되게 한다는 생각을 안 해봤어요?

바꿔치기 하겠다는데. 내 인생은 그냥 주님의 착륙지점입니다, 하고 내놓으면 되는데. 주님의 십자가는 그것보다 더 고통스럽잖아요.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해도 그것보다 더 고통스럽다고요. 그냥 내놓으면 되는데 자꾸 안내놓으려고 하는 거예요. 내놓지 않으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내놓아야 뭐 바꿔치기 하든지 말든지 하지요. 그냥 배역입니다. 그냥 역할이라니까요.

거지역할 하는 배우가 부자역할 하는 배우보다 자기 집은 더 잘살아요. 더 잘 살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냥 배역이에요. 맡은 배역이니까 내 인생에 대해서 원망하지 마세요. 주께서 배역 줄 때 주님의 원칙이 있어요. 그게 마태복음 20장 14절에 나옵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 것 가지고 내 뜻대로 배역 준다는데 왜 네가 말이 많으냐, 그 말이지요. “천국은 이와 같으니……” 천국은, 내 인생은 배역이다, 이걸 알아채는 그것이 이미 천국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이건 내가 고민하거나 염려하거나 낙담할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이게. 왜 자꾸 지옥 가는 사람하고 비교합니까?

믿음이라는 것을 다시 설명 드리면, 믿음이란 나의 죽음이 주님의 죽음과 결합되어 있어서 묶여 있다는 것,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첫 부활로 살아난 것처럼 주님의 죽음과 묶여 있으면 그 다음차례의 부활은 우리 차례에요. 이 묶여 있는 관계, 축, 그걸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믿음은 주님의 살아계심을 허접한 우리를 통해서, 내 인생이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을 통해서 보여주는 증거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의 선조들이 다 증거자로 살았어요. 나의 증거자 되지 마시고 함께 있는 주님의 증거자로 하려면 우리가 뭐 고생해야 되고, 가난해야 되고, 돈 없어야 되고, 이게 아니고 돈이 있든 없든 간에 이런 경우도 하나의 배역이니까 내가 나대지 말고, 내가 고생해서 이만큼 잘되었다 그렇게 까불대지 말고, 이 배역을 통해서 주님은 내가 좋다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살해당하신 분이에요. 그것도 기피대상으로서 미움 받았잖아요.

우리는 왜 자꾸 주위 사람한테 사랑받으려고 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동위원소에요. 동위원소라는 말은 뭐냐 하면, 원자가 안정화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안정화되는 것을 방사광 가속기에 집어넣어서 순간적으로 인위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어버리면 거기서 알파감마 베타라는 방사선이 나오거든요.

그 때 나오는 것이 동위원소라는 거예요. 원자에서 전자가 빠지면서 동위원소라는 것이 생겨요.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서 계속 예수님의 새끼 같은, 예수님 닮은 동위원소같은 것을 이 땅에 깔아놓는데 그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믿음 소망 사랑 진실을 가져버리면 주위에서 예수님을 미워했던 이 세상에 동일하게 예수의 믿음 소망 사랑을 갖고 있는 사람을 다 미워해요.

왜 미워하느냐 하면, 제발 사람이 납득이 되는 소리를 좀 해달라는 거예요. 내가 이성적으로 통하는 이야기 해 달라, 이렇게 하게 되면 이렇게 구원받습니다, 그 이야기 해달라는 거예요. 이 지옥 가는 인간들이! 목사보고! 목사는 좋다고 위로한다고 난리고요. “이 땅에서 여러분이 예수 믿는 사람처럼 살게 되면 복 받습니다.” 계속 위로하는 거예요. 그 냄비 안에 개구리 같은 악마가 들어 있는 것도 모르고.

주님은 그렇게 살해당했다는데 ‘이렇게 살다가 곱게 죽지.’ 무슨 곱게 죽는 역할은 없어요. 미움 받다 죽는 거예요. 아버지가 죽으면서 만약에 재산이라도 좀 있는 것을 교회에 기증해 보세요. 자식들한테 그 교회는 얼마나 밉상 받는지 몰라요. 사도바울이나 골로새 교인이나 성령 받은 사람이나 주께 감사하는 사람은 전부 다 이 세상에 역주행 풍경을 자아냅니다. 반대로 살아가고 거꾸로 살아가요.

이것이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그 선조들이 나열되어 있어요.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어요. 모든 사람들이 세상 사람과 역주행, 달리 살아가는 겁니다. 그게 바로 남성의 세계가 위주가 된 이 악마의 세계에서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대로 여자의 후손이 등장하는 겁니다.

남성 없이 여자의 후손, 남성에 구애받지 않는 특이한 여성의 등장, 남성의 정자를 받아서 자식을 낳아야 되는데 그것 없이 남성의 정자를 받지 않고 아기를 낳는 특이한 여성의 등장, 그 여성의 속성을 모든 성도는 다 배역 맡을 때 부여받은 겁니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의 DNA 때문에 예수 믿은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없는 요소로 인하여 나는 거듭났고 나는 하늘나라 봅니다.” 그걸 이야기할 수 있는 특이한 사람, 이 세상의 블랙홀이에요. 근처에 가면 같이 죽을 것 같은 블랙홀. 그럴 때 세상은 말합니다. “제발 알아듣는 이야기 좀 해라. 이래가지고는 너하고 소통이 안 된다.” 소통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옛날 코미디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아내가 남편에게 조릅니다. 맛있는 것 사달라고 졸라대니까 남편이 하는 말이 “이게 어디서 맛있는 것 사달라고 해? 나 때는 말이야. 여자들이 오전에 애 낳고 오후에 밭일 나갔어. 그 맛있는 것 다 먹고 마셔버리면 소는 누가 키우는데? 소는? 소는 누가 키울 거야, 소는!”

예수 믿으면 이 세상 우리의 남은 행복은 누가 제공하는데요? 이 세상에 살면서 예수 믿고 행복하게 살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어요. 교인들이. 목사들도 따라갈 수밖에 없고. 그래야 장사가 되니까요. 업소가 운영이 되니까요.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특이성이에요. 예수님의 특이성.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특이함이 있어야 됩니다.

마가복음 5장의 이야기가 있었는데 마가복음 16장 13, 14절에 보면, 마가복음을 끝내면서 마지막에 그런 대목이 있어요. 제자들이 하는 말이 13절에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제자들이 12년 동안 피 흘린 그 여자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믿음이 생기지 않았어요. 마가복음 끝내면서 끝부분이에요. 제자들은 어떠하다? 믿음이 전혀 없었다. 이게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는 절차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는 교회 한 4십년, 5십년 다녔는데 하나님이 평하기를, 믿음은 전혀 없었다. 믿음이 있었는데 건드려 보니까 믿음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은, 이것은 귀신들이 하는, 내가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살까 하는 믿음이었다. 그것을 성령 받은 사람은 마가복음 16장이 그 안에서 역사해서 “저도 열두 제자의 한 표요. 저도 넣어주세요. 제가 믿음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믿는 자입니다. 이게 믿는 자에요. “주님, 제가 현재 지금 살아서 말씀대로 내 안에 움직인다는 것은 이것은 제가 머리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제가 예상도 못했던 사실입니다.”

계속해서 믿음 없는 자로 가게 함으로서 주님께서 살리시고 우리는 살림을 당하는 교체작업, 교체성이 유지되게 하는 겁니다. “너 빼고 믿음 없는 자리에 내가 들어갈게. 그래서 믿음 없는 자도 구원되게 해줄게.”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면 소망은 뭐냐? 소망이라 하는 것, 소망은 쉬워요. 예수님을 추방시킨 세계에 더 이상 굳이 살 필요 없다는 것이 소망입니다. 거기 소망이 나오지요. 골로새서 1장 5절에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 특히 골로새서 3장에 보면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이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이 땅에 굳이 살 이유 없다는 겁니다. 소망은, 이 세상에 미련두지 말라, 이 땅에서 절망해라, 그게 소망입니다. 그러면 사랑은 뭐냐? 사랑은 상대의 리드에 놀아나는 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 사랑 한번씩 들 해봤지요? 결혼할 때 사랑 없이 결혼할 수가 있겠어요? 사랑은 “나를 죽여도 좋아요.” 이게 사랑이에요.

“당신만 있다면, 나 같은 것이 당신한테 얼마나 거추장스럽겠습니까? 나를 목 졸라 죽여도 목 조르신 분이 당신이라면 저는 상관하지 않을 테니 시행하세요.” 이게 사랑이에요. “나는 당신 앞에 소멸되어도 괜찮아요.” 결혼하고 오래가는 사람은 3주일 가고, 어떤 사람은 신혼여행 갖다 오기 전에 끝나고 그래요. 나를 살려주세요,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믿음도 아니고 소망도 아니에요.

나를 죽여주세요, 가 그게 사랑이라 이 말이지요. 도와주세요, 가 아니라 “나의 관점이 주님 앞에서 사라지게 하옵소서. 내가 세상 보는 관점이 주의 관점으로, 대체성이니까, 대체하시고 내 관점은 사라지게 하옵소서. 나 같은 것이 오늘도 왜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랑하시는 주님이여, 지금 저를 죽여도 저는 감사하겠나이다.” 이게 사랑입니다.

지난번에 제가 성도와 성도의 만남도 그래야 된다고 했지요. 서로가 죄사함 받은 것을 선물교환 하듯이 주고받아야 돼요. 죄사함받은 것. “주님이 이렇게 건드렸는데 나는 냄비 안에 개구리 이런 줄 몰랐어.”라고 튀어나올 때 그 이야기 듣고 “나도 이렇게 천하에 복음 알고 믿는 줄 알았는데 남한테 인정받으려고 이렇게 설쳐대는 나 자신을 나도 상상도 못했습니다.”

서로의 못난 것, 믿음 없는 것을 교환하는 겁니다. 그럴 때 죄사함 안에 공히 같이 들어 있는 겁니다. 부부가 처음 결혼했을 때는 서로 잘해줄게, 하는데 그것은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것인지요. 정말 제대로 복음 아는 부부라면 서로 못난 것을 내놓고 “당신은 나에게 너무 과분한 사랑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또 고백해도 문제에요. 왜냐하면 선행 뒤에는 또 칼이 있거든요. 내가 너에게 잘해줬는데 너는 나에게 뭐 해줬나, 해서 나중에 뒤에서 칼 꽂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냥 입 다물고 그냥 사세요. 막 사세요, 그냥. 늘 우리 자신은 잠시도 안정되면 안돼요. 흔들려야 되고 흔들려서 나의 안정화조치가 깨져야 돼요.

그래야 믿음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세계가 주님에게서 다가와서 나를 이렇게 작용하는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이사야 10장 15절에 보면 구약에 있는 말씀인데요,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체 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일반이로다.”

사람이 막대기 들고 있는데 막대기가 갑자기 사람을 들려고 하는 이것이 얼마나 불합리한 거예요? 말도 안 되지요. 우리는 주님의 맡은 배역자에요. 역할입니다. 주님은 몽둥이에요. 막대기에요. 어떻게 막대기가 주님보고 이래라 저래라 일을 시키고 간섭질을 하고 대들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계획대로 될 뿐이데요.

이제 마지막 말 하고 마치겠습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때에 죽은 자에게 성령을 주셔서 믿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은 이 세상을 폭파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그 폭파시킨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는 그 폭탄의 뇌관이 신앙인의 등장입니다. 사람으로 납득이 안 되고 도저히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들의 등장은 ‘아, 이 세상은 곧 폭발 하겠구나. 완전히 깨지겠구나.’ 그에 우리가 자부심을 가져도 괜찮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만 챙기는 마귀 믿음, 자기만 걱정하는 귀신 믿음, 그것도 믿는 믿음이라고 얼마나 우리 자신에게 속아 넘어갔었습니까? 또 이 세상에게 속아 넘어갔었습니까? 이제는 우리 자리에 쳐들어오시고 이 못난 자리에, 힘든 자리, 고생 자리를 자신의 자리로 여기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신 주님만 찬미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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